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잘 지냅시다 우리(신종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1-24 09:01
조회
263

신종환 / 공무원


 내가 처음 정신과에 간 건 오히려 예전 부서들에 비하면 야근이 훨씬 적은 지금 부서에 근무하고부터였다. 맨 처음 주민센터에서 복지상담을 담당했을 때 나는 세상 경험이 적은 사회초년생이라는 점과 맞물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당시 민원대를 맡아달라는 팀장의 말에 민원인 침 때문에 건조할 일은 없겠다며 너스레를 떨던 선임의 말처럼 욕설은 늘 넉넉하게 들었다. 그래도 두어달 뒤 즈음부터 긴장은 되었지만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건 어쨌든 내가 들인 품이 누군가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쉽게 느낄 수 있었고 미우나 고우나 마주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내게 큰 보람을 주었고 그 느낌은 내안에서 나를 지탱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회계업무를 맡고 나서는 내가 두려워 하는 숫자들이 주는 압박들을 느꼈고 그 고통들에 대해 내가 마주서야할 당위성을 찾지 못한 것이 당시 마음 속 붕괴의 단초였다는 생각이 든다. 당위를 찾지 못하니 일이 하찮게 느껴지고 그런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스스로도 당연히 하찮고 예전에는 살아있는 실감을 줬던 것들이 이제는 사라지니 살아갈 보람 대신 날 죽지 못하는 하는 이유들만 원망스럽게 쳐다보던 무섭고 슬픈 시절. 화장실에 들어가면 마약중독자가 불안을 해소하려 마약을 복용하듯 유튜브 쇼츠와 웹툰을 보고 화면을 끄면 바로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들던 시절. 다행히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나는 정신과 약이 잘 맞았고 사지가 멀쩡해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어 급할 때는 술 대신 헬스장을 찾을 정도의 정신머리는 유지하고 살고 있다.


 하지만 다들 나처럼 운이 좋지는 않아서 얼마 전 임용 동기였던 친한 사람은 수년의 휴직 끝에도 내적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면직했다. 그들 자신을 포함해서 ~~해도 괜찮다는 많은 말을 하는 이들과 아픈 이들이 애사심을 갖고 떠나지 않게 각자의 이름을 가진 나무를 심자는 사람들 전부 왜 그들이 떠나는지에 대해서 초점들이 어긋난 느낌을 준다.


 괜찮다는 말로 건네는 위안과 자살하거나 퇴직한 사람들의 고통을 구체화해 해소할 것을 주장하는 말은 틀린 건 아니지만 그 말들에는 어떤 가치가 지향할 법하고 어떤 삶이 살아볼 법한 것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끽해야 저녁이 있는 삶 정도의 얘기가 나온다. 저녁이 있는 삶은 중요하지만 그건 가치있는 삶을 위한 제반조건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띠는 건 도처에 널린 동정과 비명 뿐이라 살아갈 방향에 대한 자력을 느끼기는 어렵다. 어떤 고통은 살아있다는 실감에 뿌리를 두지만 어떤 고통은 살 이유를 찾지 못한 메마른 공허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방향성과 구체적인 욕망의 부재로 인한 회의감과 우울감, 공황을 생각하면 몇몇 사람들과 그들의 말이 떠오른다. 김준산은 본인의 책 ‘철학 듣는 밤’에서 ‘신체적으로 바쁜 이들에게는 우울이 잘 찾아오지 않는다. 몸은 나름대로의 자정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고 니체는 ‘도덕적 현상이란 없다. 다만 현상에 대한 해석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김준산의 말을 얼핏 들으면 요새 사람들은 빡세게 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발상으로 시작하는 라떼식 심정의 산물 같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있자면 그의 말과 상통하는 면은 있는 것 같다.


 매체들에서는 세대를 나누어 특정 나이대에 벌어지는 현상을 그 세대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특징처럼 얘기하지만 상식적으로 그 몇십년 사이에 유전적 차이가 발생했을 리는 없고 상황이 나아져서 그랬다면 과거 세대들도 부유한 집들의 자녀 출신들은 더 많이 고통에 취약했어야 하지만 그렇다는 말도 없다. 다만 살아갈 이유를 찾기가 어렵고 사는 이유를 뚜렷히 보여주고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며 그 대신 단편적인 구매욕과 자극이 내면의 척도를 더욱 어그려뜨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민원 상담직에게 액션캠을 달아주고 비상벨을 설치하는 건 중요하지만 앞서 언급했든 그런 것들만으로는 큰 이유 중 하나인 삶의 척도가 없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이겨낼 심적 까닭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을 삶에 적절히 위치시키려 부단히 애쓰고 애쓰는 보람이 있는 삶을 보여주는 것. 어떠한 것을 하지말자라는 문장, 어떠한 것을 하자는 말보다 맥동 있게 다가오는 건 직접 그런 삶을 보여줌으로써 죽고 싶지 않다는 부정이 아닌 저렇게 살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을 자극 하는 일이다.


 언젠가 그런 삶을 보여주고 고된 사람들에게 말해주지는 못해도 최소한 삶은 어떤 건강한 지향이 있다면 견딜 수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싶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지는 모르지만 우선은 잘 먹고 잘 자고 제 때 청소하고 운동하고 가끔 글 쓰며 살고 있다. 다들 건강한 하루를 소중히 하고 잘 지켜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