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지혜, 김태민, 이대옥, 이서하, 전예원, 조혜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박록삼(서울신문),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오승훈(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반기득권 서사를 넘어: 검찰권력은 어떻게 '기업살인'을 제도화하는가(김태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6-15 15:11
조회
72

김태민/ 회원 칼럼니스트


 전망과 비전을 폐기하고 취향과 감정으로 뭉친 정치 공동체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역대급으로 낮은 투표율 속에서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는 이미 현실로서 도래했으나 한사코 부인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개혁의 염원을 오로지 부패한 권력을 규탄하는 도덕적 호소로 채우는 감정의 정치 공동체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사실은 그렇다. 지난 몇 달간 탄핵된 보수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준 실패를 만회하고자 괴물 같은 권력을 “모피아”, “검피아” 같은 용어로 명명하려는 시도들을 목격했다. 이 같은 권력의 수사학이 겨냥하는 정치적 효과는 비교적 명백하다. 일반 시민과 거대 권력 사이의 대립을 서사화하며 기득권과 대립각을 세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추문으로 가득 찬 내각 인사들의 오물을 들춰내며 권력의 서사를 직조해내는 방편은 분명 현실 정치의 문법을 반영한 저항의 언어로써 정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권력의 표면을 소묘하는 그 이상의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 무엇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냉소적인 이데올로기와 정권 발목잡기 프레임에 밀려 정치적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다. 게다가 정권 인사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을 넘어 권력의 분배 방식을 어떻게 시정할지에 대한 명징한 대안적 기획이 제시되지 않아 투표에 참여해야 할 명확한 정치적 유인을 제공하지 못했다. 대선에서 최고 투표율을 보인 호남이 지방선거 참여에는 저조했던 건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탄생한 감정의 공동체가 전망과 비전을 만나지 못한 채 맥없이 실패한 셈이다. 


 정권 인사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고 검찰권력과 모피아의 연대를 비판하는 윤리적 호소에 매몰되어있을 동안 ‘반기득권 서사’의 성긴 손가락 사이로 구조적 모순은 잘도 빠져나갔다. 검찰권력의 선택적인 수사와 모피아와의 부패한 연합이 ‘특권계급’의 부와 권력의 분배 문제로 축소된 이유는 민주주의 자체의 환영과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모순을 우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모호하게 정의된 ‘특권계급’이라던가 ‘기득권’이라는 관념이 민주주의의 위기로 제시될 때 체제의 부패한 규율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동형적으로 분포한 현실은 감쪽같이 은폐된다. 규제와 기소를 담당하던 공직자들이 기업을 거쳐 다시 공직으로 돌아오는 행태는 집단 세력화된 엘리트 계급의 부도덕과 파렴치함의 문제를 넘어 이윤 축적을 위해 거대한 공장처럼 운영되는 체제 자체의 문제인데도 말이다. 


출처 - 경향신문


 모피아나 검피아마저 설계해내는 지배적인 구조의 힘을 캐묻지 않은 탓에 이제 저들은 정치 권력을 배당 받은 본분에 따라 노동법 개악을 입 냄새 나도록 떠들며 경제 질서의 재조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때마침 지난 25일 한덕수 총리는 중처법 개정을 본격적으로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기자간담회에서 “산업계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일종의 규제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며 “산업 안전 재해를 줄여야 한다는 것에 다 동의하고 목적에 아무런 논쟁이 있을 수 없지만 그 방법론이 적절한지 들여다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덕수 총리의 위 대목은 범죄와 형벌의 영역이 어떻게 경제적 격자를 통해 규정되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기업살인과 형사법적 처벌을 다룬 중처법은 ‘규제완화와 투자활성화’의 문제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기업살인법과 규제정책의 존재론적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는 논리적 비약은 전혀 어색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형사적 처벌의 영역을 행정적 규제와 관리의 영역으로 오인하는 인식상의 혼동 또는 프로이트적 말실수(Freudian slip)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검찰 권력과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가 동거하기 위해 벌어지는 현실 정치의 기묘한 복화술, 즉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산업재해를 둘러싼 형사법적 권한을 조정하는 양상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공정과 정의의 신화가 전하는 바와 달리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예속된 검찰권력은 경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어떤 범죄를 용인하고 처벌할지를 결정한다. 결국 온갖 기소와 수사의 스펙터클을 뽐내던 검찰은 기업살인에 대한 형사법적 접근을 철회하고 검찰통치를 자랑하는 이번 정권은 기업의 강력한 요구에 발맞추어 기업살인 문제를 ‘규제’와 ‘행정적 관리’의 영역으로 배치시킬 것이다. 지금 당장은 법 개정을 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경영자의 안전보건의무 범위를 축소시키는 가이드라인을 내리는 행정 전술을 통해 중처법을 저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 마디로 검찰권력은 산업재해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자의 대립 속에서 무엇을 물고 무엇을 놓아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의 범죄와 처벌에 관한 문제가 경제 활성화 방안으로 번역되는 과정은 검찰권력에 기초한 이번 정권이 신자유주의 통치성 또는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와 어떤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연히 알게 한다. 


 현실 정치 속의 수많은 권력의 쟁투와 정치적 대결의 양상은 경제라는 강력한 심급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 이유에서 지금의 정세를 단순히 검찰권력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주도권 다툼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 중처법 개정 문제뿐만 아니라 각종 정치 경제 분야에서 기득권 세력의 계보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목록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개혁주의 진영의 내로남불로 ‘반기득권 서사’가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잃고 유권자들에게 투쟁의 정당성도, 대안적 기획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문제의식을 찾아 나서야 할 때다. 자본주의 사회 배후의 은밀한 소수의 조종자들을 규탄하는 윤리적인 호소를 넘어, 반기득권 연대라는 손쉬운 도식들을 대체하고도 남을 총체적인 방향성을 향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