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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의 자격 (한은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1:28
조회
276
한은석/ 청년 칼럼니스트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말이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지만, 이미 한국 사회에는 안녕이란 무엇이고, 안녕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름의 정치적 입장이 형성되어 있다. 비록 현재에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한때 대통령을 만들어냈던 입장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있으며 안녕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안녕에 대한 기준들은 특유의 세속성과 직관성으로 널리 퍼져 있다.

입장에 따르면, 안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주로 건전한 상식으로 불리는 이념들이다. 마치 칸트가 정리한 정언명령처럼, 영화 변호인의 대사처럼 그러면 안 되는 당연한 것들이다.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사심이 없다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각들로 이념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이상할 정도다. 우리가 안녕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런 건전한 상식이 널리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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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이 말하지 않은 것들 중에서
- 입장에 따를 때,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호인과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그렇다면 안녕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이 건전한 상식과 양심을 갖춘, 마땅한 자격을 가진 시민들이 많아지고, 더 많은 권력을 얻는 것이다. 시민성(civilite)은 더욱 확장되고 수호되어야 하기 때문에 수호자들은 더욱 강한 권력을 얻어야 한다. 반대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건전한 상식과 시민성을 가지지 못한 이른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집단들은 배제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거룩한 시민성의 수호자들은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운동을 지키기 위해서 자격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분쇄하고자 했다. 쉽게 돈을 버는 범죄자인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운동을 폄하하기 위한 음모였으며, 정치에 대한 생각도 없고 개념이 없는 김치녀들은 계몽되어야 했다. 자격도 없고, 운동의 대의에 도움이 될 수 없는 목소리들에게까지 자리를 내주기에는 운동은 너무 중요한 것이었다.

10년 전, 대통령을 만들어냈던 입장들이지만 이런 입장은 이제 틀렸다. 입장과 생각의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이념은 분명히 틀렸고 명백히 잘못되었고,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말이 가진 중요한 함의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한마디로 민폐다. 문제의 핵심은 자격에 있다. 건전한 상식과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진 그 자격 말이다.

자격을 갖춘 나와 너는 결코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시민성의 수호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원래 한국 사회에서 안녕은 평등의 고원 위에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시민성의 수호자들에게 일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치 세력과 성노동자와 김치녀들이 자격이 없었던 것처럼, 주류 이데올로기에 있어 좋은 학벌을 구매하지 못하고 좋은 스펙을 만들지 못한 낙오자들, 학벌을 얻기 위한 노력도 없이 땀을 흘리고 기술로 노동하는 블루칼라들은 당연히 안녕할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퍼져 나간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안녕들 하냐고 묻는 말에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규칙은 단 하나다. 서로가 대등한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과연 평등의 고원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의 안녕을 보듬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서로에 대한 충실성만이 유일한 규칙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대자보 자체를 훼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청자와 화자가 대등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이 오가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화자가 무슨 내용을 말하는 지를 따지지 않고, 화자가 고려대학교 학생인지 아닌지, 성노동자냐 김치녀냐 따위를 가지고 화자의 주제와 자격을 따지는 것이다.

간단하지만 획기적인 규칙을 담은 메시지는 즉각 전파되었고, 이는 수많은 대자보로 나타났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러나 안녕들 하십니까? 의 운동이 기존의 시민성을 극복할 어떤 해답이 될 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이제 막 질문은 던져졌을 뿐이고, 또 하나의 과정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들이 어떻게 나아갈지, 그리고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존의 유력했던 정치적 입장이 자신들의 규칙에 따라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의 메시지를 오독한 것처럼, 운동의 메시지에 담긴 핵심을 이해했다고 착각하여 큰 실수를 저지를지 모를 일이며, 오독과 실수를 하기도 전에 당장 다가오는 6월 지방선거에 대한 소식에 파묻혀서 사람들의 관심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를 노릇이다. 또 관심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민성의 형태로 받아들여질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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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이탈' 안철수, 연대는 나쁘고 양보는 좋다? 중에서
- 안녕들 하냐고 묻는 말이 당장 안철수의 새정치를 넘을 수 있을까?
새정치라는 말의 모호함은 많은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사건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헤겔의 말처럼, 진리는 전체다. 서로의 안녕을 보듬어줄 수 있는 시민성은 역사에서 이전까지의 시민성이 그래왔던 것처럼, 고귀한 계시와 구원의 강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나긴 과정과 일상을 통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말은 누군가가 해주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듣는 것으로, 이런 일은 존경받는 명망가들이나 고매한 이론에만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이다.

한은석씨는 사회 내 불평등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