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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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최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자유는 책임을 뜻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다.’ 극작가 버나드 쇼는 자유와 책임을 동의어로 봤다.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기준에 비춰본다면 한국 언론은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리고 얼마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상위권에 있는 나라들, 그러니까 광범위한 언론자유를 누리는 국가들을 쭉 훑어보면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가한다는 북유럽에 몰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언론자유 수준이 민주주의 수준과 직결된다는 게 분명해 보인다. 언론자유지수를 보면 한국은 ‘정부는 비판을 참지 못 한다’며 70위로 평가받았다. 2005년에는 30위, 2014년에는 51위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언론의 자유가 침해받은 사례는 많다. 기사 사전검열과 보도지침은 비판을 참지 못하는 정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언론이 오히려 자유를 두려워한 적도 많았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의 책임과 짝을 이룬다. ‘세월호’는 한국 언론의 민낯을 보여줬다. 받아쓰기식 보도, 선정적 보도 등 부끄러운 사례가 끝없이 이어진다. 각종 언론단체는 수많은 반성과 자성을 내놓으며 책임 있는 언론이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옥시’사태를 보면 달라진 게 없다. 가습기 살균제가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5년도 더 됐다. 언론은 5년간 옥시 피해자들의 절규를 등한시했다. 검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나서야 집중보도하기 시작했다. 정치/자본 권력을 감시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전할 ‘자유’를 언론 스스로 외면해온 것이다. 옥시 유가족 대표는 “언론의 관심이 고맙기도 하면서 당황스럽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일찍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줬다면,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다. 옥시 전 사장 신원호가 검찰 수사에 앞서 포토라인에서는 고개 숙여 사과하고 청사 안에서는 동행인에게 “내 연기 어땠어요?”라는 발언을 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그날 그 발언에 관한 기사 수십 건이 보도됐다. 확인 결과, 이 발언은 사실이 아니었다. 신원호는 물론 검찰 역시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자극적 기사 낚시질은 언론의 자유가 아닌 ‘언론사의 자유’일 뿐이다. 언론사의 자 는 일개 기업의 이윤추구의 자유나 다름없다. 사진 출처 - flickr.com 자유가 책임과 동의어라는 시각에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몇 년째 하락중인 것이 꼭 정부와 권력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자유에 합당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은 언론사의 방종도 한몫했을 것이다. 2014~2016년 언론자유지수 하락(51~70위)과 세월호 보도, 기사 어뷰징, 옥시 사태 등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공정한 보도, 약자를 위한 보도는 언론의 책임인 동시에 언론의 자유이기도 하다. “나는 언론인인 동시에 사형수라고 생각한다.” 한 이집트 기자가 했다는 말이다. 그는 파타 엘시시 군부정권을 고발하는 기사를 비밀리에 취재 중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하는 이유를 묻자, “언제든 내 취재가 발각되면 정부가 날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나는 이집트의 언론인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출처: 시사IN, 한국 언론자유지수 70위… 역대 최하위 기록). 비판을 참지 못하는 정부를 목숨을 걸고서라도 비판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훨씬 높지만, 이집트 언론이 훨씬 부러워지는 요즘이다. 참고로 이집트 언론자유지수는 159위다. 최지영씨는 국정화 교과서와 위안부 문제 등의 역사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0
김정웅/ 청년 칼럼니스트 ‘한국 3대 거짓말’이라는 농담이 있었다. 처녀의 “난 시집 안 갈거야.”, 장사꾼의 “이거 밑지고 파는 거야.”, 노인들의 “빨리 죽어야지.” 말은 그렇게 할지라도, 결과적으론 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는 게 웃음 포인트였을 테다. 그런데 2016년의 한국에선 이 농담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국 사회 무한경쟁의 지옥도 속에서, 경쟁 밖으로 밀려난 청년과 자영업자, 노인들이 하는 저 말들을 꼭 거짓말이라고만 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드라마 ‘스타일’ 사진 출처 - SBS 처녀의 거짓말 : 대학을 다니다 알게 된 누나 한 명이 있다. 내가 누나를 처음 알게 된 신입생 시절, 흔히 말하는 결혼 적령기가 가까웠던 누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은 절대 결혼을 하지 않겠노라고 종종 선언하곤 했다. 나는 그 선언을 참 특이한 것으로 여겼다. 심지어 누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할 것이라고 넘겨짚기까지 했었던 기억이 난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누나는 정말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누나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그런데 누나를 바라보는 나와 이 사회의 시선은 많이 달라졌다. ‘결혼을 포기한 청년’이라는 말. 너무나 익숙해져 더 이상 특별할 것이 없는 말이다. 평범한 청년인 나도 요즘 결혼을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 아니 과연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부쩍 많이 든다. 결혼을 못하는 청년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3포, 5포, 7포를 넘어 N포세대가 된 지금의 청년들. 청년 실업, 높은 집값, 낮은 소득수준같이 어렵고 다각적인 원인이 얽혀 있다. 확실한 것은 모두 '돈'에 물려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좋은 수저를 물지 못한 청년들은 이제 진심으로 결혼을 포기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장사꾼의 거짓말 : 우리집은 횟집을 한다. 따로 사람을 쓰지 않고 부모님께서 운영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음식 팔아서 남는 게 없다는 말씀을 버릇처럼 하신다. 그때마다 매출액에서 재료비, 임대료, 수도세, 전기세 등을 뺀 순익을 계산해 말씀해주시곤 한다. 들을 때마다 위태위태한 우리집 가계 수입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요즘 요식업 트렌드가 무한리필이라 좋은 집이 많으니 그런 식당 한 번 가보시라고 지나가듯 말씀을 드렸다. “다들 그렇게 싸게 팔면 우리 가게는 뭘 먹고 사니.”라는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자영업 창업 대비 폐업률 85%. 자영업자 10명 중 9명이 망한다는 얘기다. 장사도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다. 안정적 노후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은퇴자들은 영세자영업으로 내몰리고 있다. 공급이 무한정 늘어나니 경쟁은 심화된다. 가격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다. 영세상인은 물건을 밑지고 팔며 ‘인건비 따먹기’로 근근이 생계를 버텨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노인의 거짓말 : 몇 년 전 군 생활을 마친 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자신이 겪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대형마트 경비 아르바이트를 하며 순찰을 돌던 도중 화장실에서 목을 맨 노인의 시신을 발견했었다는 것이다. 친구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와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인근에서도 종종 이런 일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주었다. 공포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만 알았는데, 그 정도 일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종종’ 있곤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빨리 죽을 거라는 노인의 농담이 현실이 된 것은 가장 비참하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노인 자살률 OECD 1위, 10만 명 중 116.2명, 선진국 노인 자살률보다 무려 20배가 높다. 왜 노인들이 세상을 등지려 하는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문제다. 한 가지 단서를 빈곤에서 찾을 수 있겠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50%, 이 또한 선진국 중 단연 1위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했다. “한 푼 없는 빈털터리가 되는 날엔 자신을 모욕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이라고. 이 나라 노인들은 이 땅에서 자신을 모욕해가며 살아가는 일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것인가. 그리하여 삶 자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인가. 청년 문제, 영세상인 문제, 노인 문제. 예전 농담이 지금의 우리 사회 병폐들을 담고 있다. 세 문제는 모두 하나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가난’. 가난이 저들에게 결혼을, 생계를, 삶을 포기하도록 가혹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3대 거짓말’ 농담을 듣고도 웃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경쟁에서 밀려나는 이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보호를 아끼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 농담에도 다시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김정웅씨는 사회와 정치의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3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74 | 추천: 0
강은진/ 청년 칼럼니스트 취업, 연애, 결혼 등 우리들이 이제까지 믿어온, 당연하고 평범한 삶과 점점 멀어지는 N포세대 대부분은 윗세대의 그늘을 갖고 있다. 지금 청년들의 부모들은 자신들이 먹고살기 힘들어 혹은 그때는 못 배워서, 갖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자신들의 욕망을 자식들에게 강요한다. 그들은 요즘 세상에는 직업의 귀천이 없다 하면서도 여전히 차별을 둬 남들과 비교하며, 내 자식이 피라미드 상층부에 못 들면 인생 실패한 것 마냥 한탄한다. 결혼문제에서도 사랑보다 돈의 자리가 커져가고, 부모들끼리의 싸움에 지친 자녀들은 파혼하네 마네 하기가 일쑤다. 남들과 다른 면이 내 자식에게 있으면 개성으로 인정하기보다, 흉이라 생각하는 부모 때문에 떳떳하게 자기를 표현하지 못해 어둠을 가진 젊은이들도 꽤 많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는 언뜻 보면 따뜻하게 인생 찬가를 외치는 듯하지만, 마냥 밝은 세계만을 묘사하지 않는다. 실없는 웃음과 유머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관계의 이름을 빌린 폭력, 부모 자식 간의 뒤틀린 관계를 날것 그대로 들이민다. 모두 “널 사랑해서, 널 너무도 잘 알아서, 널 위한 일을 하는 것뿐이야."라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엄마가 딸에게 갖는 지독한 집착은 오히려 딸에게 있어 트라우마가 돼버리고,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집중하느라 정작 자식들에게 사과하는 법을 몰라 죽을 때까지 화해도 못한다. 각자 자신의 이유로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상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준다. 이들은 대개 공통적으로 성인이 된 자식을 여전히 자기 ‘소유’라 착각한다. 그 소유에서 몹쓸 ‘권력’이 생겨난다. tvn 드라마 - <디어 마이 프렌즈> 사진 출처 - tvn 괴물은 어떤 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밖으로 좀처럼 꺼내기 꺼려하는 부모 자식 간의 애증으로 얼룩진 권력과 폭력의 역사는 단순히 집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다르게 변주되어 우리 사회 깊숙이 넓게 침투해있다. “젊음을 돈으로 살 수 없으니, 젊은이를 헐값에 사들여” 소유하려 드는 열정 페이도 그렇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지향하는 회사 안에서도 그 강압적 권력구조가 그대로 재현된다. 항상 더 많이 가지고, 더 오래 겪어 본 기성세대의 고용주들이 자식 같은 청년들에게 “다 너 잘되라고, 너 경험 좀 하라고”라는 걱정 어린 충고와 함께 갑질을 한다. 아들 같고 딸 같다고 하며 불쾌한 손을 뻗고, 심지어 지나치게 사생활에까지 간섭한다. 이런 사회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유독 두드러지지 않는가? 외국 특히 유럽 청년들도 요즘 캥거루족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관계 속 권력의 폭력성은 한국보다 덜하다 느껴진다. 일단 생존을 책임지는 경제권을 순전히 부모가 독점하고 있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크다. 혼자 아르바이트를 해도 임금 자체가 한국 청년들의 것 보다 더 높다. 시급으로 살 수 있는 식료품을 비교해보면 여기보다 더 풍족하고 질도 좋다. 월세 보증금이나 등록금 또한 더 싸다. 이러한 조건들은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다. 정부를 비롯한 기성세대들만이 풀 수 있는 곤란하고도 무거운 숙제를 청년정책이라는 이름하에 젊지만 힘은 없는 우리에게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청년들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어도 그것이 앞서 말한 부모들의 착각처럼 소유와 권력에 취해 우리들을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재 청년들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노력들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봄에서 비롯한 것들인지 묻고 싶다. 강은진씨는 책과 영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국문학과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40 | 추천: 0
박꽃/ 청년 칼럼니스트 “여성들 중에는 자기의 외모가 남성중심사회에서 굉장히 잘 먹혀들어 간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있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몇 차례 후원회원 인터뷰를 맡은 적이 있다. 그 때 만난 한 남성 연극연출가는 꽤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남성 중심적 사회가 유지되는데 남성만큼이나 기여하는 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이런 존재를 ‘공모하는 여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사진 출처 - ‘공모하는 여성’ (보부아르, 제2의성) 자신이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생각을 토대로 자신감 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사교성을 발달시킨 여성들은 실제로 꽤 많다. 이런 경우 그녀를 싫어할 남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한 번 꼬셔볼까?’ 하는 동물적 접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개 외적 경쟁력을 바탕으로 내적 자신감까지 겸비하게 된 여성은 뭇 남성의 호감을 사게 마련이다. 그런 여성은 ‘예민할 이유’가 없다. 존재가 호감으로 이어지는 마당에 구태여 조연 취급을 받거나 모욕당하는 여성들의 감정에 이입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이런 여성을 근거로 들어 페미니스트를 비하한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기 때문에 자격지심으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식이다. 경쟁력 있는 외모를 가져서 남자들에게 사랑 받으면 그런 투쟁을 할 리 없다는 것이다. 공모하는 여성은 이런 이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 쉽게 부인될 수 있는 것이다. 젠더 트러블의 저자 주디스 버틀러는 미소년같은 중성적 외모로 사상만큼이나 외모가 매력적인 페미니스트로 평가받는다. 올해 초 “1년간 연기 쉬고 페미니스트 활동에 전념하겠다.”고 선포한 엠마 왓슨을 비롯, 헐리웃 여배우들 다수가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한다. 그녀들이 외적 자격지심 때문에 페미니즘을 말할까? 엠마 왓슨 사진 출처 - UN Women 공모하는 여성의 존재가 페미니즘의 역사에 안긴 가장 큰 고민은 오히려 이런 것이다. ‘어떤 여성은 차별 받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같은 생각을 하는 여성이 다수 존재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여성 평등 운동의 동력을 확장할 수 있을까? 같은 여성조차도 페미니즘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답은 결국 ‘성별을 뛰어 넘은 페미니즘’에 있다. 그것이 내가 한국여성의전화에 후원하는 '남성 회원'을 인터뷰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이상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성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주의라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 조롱당하거나, 모욕당하거나, 상처받은 개인 중에는 남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까지 감싸 안을 때 페미니즘의 생명력이 확장될 수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과거 칼럼에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바탕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노무현은 남성이지만, 남성주의적 패권과 권력 담합에 강제로 희생된 힘없는 개인이기도 했다. 때문에 페미니즘은 언제고 그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남성이지만 남성주의에 무릎 꿇려진 약자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페미니즘이 더 이상 성별구도가 아닌 ‘강자에 맞서는 약자’의 프레임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강남역 화장실에서 이유 없이 살해된 여성을 추모하며 눈물을 흘리던 여러 남성들을 기억한다. 나와 함께 10번 출구 부근에 나란히 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들은 주로 2-30대의 젊은 남성이었다. 이 세대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기득권으로 통칭되는 세력의 남성주의적 폭력성에 시달려본 경험이 있는 사회적 약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남성 역시 약자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된 시류는 지금, 페미니즘 운동의 확장성을 말하고 있다. 공모하는 여성은 성별만 여성일 뿐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반대로 남성주의의 테두리 밖으로 삐져나온 남성, 남성주의적 폭력성에 상처받을 수 있는 남성은 언제든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존 레전드가 페미니스트일 수 있는 이유이고, 정희진이 노무현을 안타까워할 수 있는 이유이며, 이 글을 보는 당신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이 글은 2016년 6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8 | 추천: 1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5월17일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묻지마 범죄로 끝날 줄 알았던 사건은 남혐 여혐 논쟁으로 번졌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여진 포스트잇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혐오범죄 논의를 거치며 상대 이성을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점점 과격해진 시위는 5월22일 급기야 ‘남혐·여혐 싫다, 서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의 피켓을 든 여중생을 여성시위대가 집단 구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해자가 정신병력이 있던 것으로 밝혀져 위 사건이 남성 전반에 퍼진 여성혐오를 대표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대표성 논쟁과는 별개로 ‘여성 혐오가 사회전반에 도를 넘고 있다’라는 데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있다. 오랜 시간 존재해온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성차별과 억압, 최근에 이르러서는 여성혐오의 경험까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여성차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또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사회적 차원의 여성혐오 범죄라는 결론을 내릴지라도)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논리는 다분히 이분법적이며, 사회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2007년 조승희의 총기난사 사건을 두고 미국의 모든 한국인 유학생이 잠재적 범죄자라고는 단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논리는 어느 지점에서 발생했을까? 여성의 억압과 차별 해결을 위해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흡사 2세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인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지배구조와 남성우월주의가 여성을 억압한다는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남성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은 남성 대 여성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고, 페미니즘 운동을 남성에 대한 공격의 도구로 바꾸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데에 실패하였으며, 작년 미국에서는 SNS를 이용한 여성들의 ‘반페미니즘’ 선언까지 일어났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역시 핑크 코끼리, 여중생 등 여성혐오 시위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존재했는데, 급진적인 페미니즘의 폭력성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나타내는 단서일 수 있다. 강남역 10번출구 추모 쪽지 사진 출처 - 아시아경제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 바바라 버그는 페미니즘을 이렇게 정의내렸다. “페미니즘은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자유이다. 한정된 역할에서 벗어나는 자유, 사회의 억압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유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페미니즘이 극복해야 할 대상은 단순히 남성이라는 존재를 넘어 남성 혹은 여성 스스로조차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제도적, 규범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억압’이다, 남성은 페미니즘의 장애물이 아니며, 페미니즘의 성공을 위해 여성은 물론 남성의 공감 또한 필요하다. 크게 2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여성집단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페미니즘 담론은 남성집단의 자발적인 자성과 행동변화를 유도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정치적 설득력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표적인 움직임으로 엠마 왓슨이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유명해진 ‘he for she’캠페인이 있는데, 남성들 역시 그들의 어머니, 여동생, 배우자 등을 위해 페미니즘에 동참해줄 것을 독려한다. 둘째, 페미니즘을 통해 남성 역시 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이때 남성은 페미니즘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페미니즘을 ‘보수적, 억압적 성적규범으로부터의 자유’로 정의한다면, 페미니즘은 ‘호전적인 남성’, ‘경제적 책임자로서의 남성’과 같은 성적규범으로부터의 자유 또한 포함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 공동체 내부에서 여성만이 보수적 성적 규범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남성 성역할에 관한 고민은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양육자로서의 어머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동 양육자인 아버지’가 동시에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남성 또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일반 여성이 참여하는 여성시위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 시위가 ‘살女주세요, 넌 살아男았잖아’와 같이 성적 대립구조를 부추겨서는 제자리걸음만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남성이 여성의 잠재적 조력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손을 내밀 때 페미니즘은 더 큰 타당성과 행동력을 갖게 될 것이다. 사건 발생 이후 현재 7일, 강남역 살인사건은 계속 주요 보도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페미니즘을 ‘포지셔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섬세한 전략이 필요하다.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53 | 추천: 0
이빛나/ 청년 칼럼니스트 “돈 모으기 왜 이렇게 어렵냐.” 친구가 자리에 쓰러지듯 카페 의자에 앉으며 말을 던졌다. 간만에 모인 우리는 하나 둘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A는 졸업한지 이제 1년이다. 학원 선생님으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지만 원룸 보증금 마련은 멀었다. 일주일에 3일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생활비를 번다. 아끼고 아껴 200만 원 남짓을 모았지만, ‘살 만한 곳’은 보증금 300만 원부터 시작이다. ‘괜찮은 곳’은 500만 원은 줘야 한다. 친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전화해 힘들다고 말했다며 울먹였다. 월 20만 원짜리 고시원 생활은 한동안 계속 될 듯하다. B는 7월이면 지금 사는 집의 계약이 만료된다. 슬슬 방을 알아봐야 하는데, 부동산에 방을 보러 다니는 것만큼 진 빠지는 일이 없다. 눈치를 보며 가격을 점점 올리는 부동산 아줌마를 쫓아다니다보면 눈은 높아지고 스스로는 작아진다. 기껏해야 5평도 안 되는 집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에 전화를 하고 실시간으로 방 구하는 앱을 들여다봐야 한다. 서울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가격이 떨어지지만, 북쪽 끝이건 서쪽 끝이건 지하철이 닿는 서울 안에는 있어야 한다. 취준생이니까. 취업 스터디도 학원도 도서관도 설명회도 모두 서울에서 열린다. 나 역시 집을 찾아 떠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진다. 삶의 질을 포기할 것인가, (부모님)등골브레이커가 될 것인가. 그 삶의 질이라는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다. 벌레나 곰팡이가 없고 물 잘 나오는 곳. 처음 집을 구할 때는 최대한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으려고 싼 곳을 줄기차게 외쳤다. 보증금 100만 원에 관리비 포함 20만 원이라는 집은 정말 누울 수‘만’ 있는 크기였다. 순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본 독방이 떠올랐었다. 변기로 쓰는 구멍 대신 멀쩡한 화장실이 있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그 화장실도 집 밖 복도 끝에 있는 공용이긴 했지만. 키가 작아 다행이지 키 큰 사람은 발이 현관으로 나올 지경이었다. 참고로 나는 160cm가 소원인 사람이다. 결국 등골브레이커가 되기로 했다. “아, 행복주택은 어떻게 됐어?” A가 물었다. 셋 다 떨어졌다.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2016년 행복주택 물량을 당초 14만 가구에서 15만 가구로 확대했다는데, 우리 셋의 주거와는 거리가 먼 모양이다. 1분기 신청을 앞두고 취준생도 행복주택 신청자격을 얻었다. 집다운 집에서 몇 년 동안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었다. 1분기 신청 결과, 최고 경쟁률은 서울 가좌지구로 평균 47.5: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1분기 공급되는 4곳 지구 중 대학생과 졸업한 지 2년이 넘지 않은 졸업생에게 50%를 배치하는 ‘대학생 특화단지’는 가좌지구 한 곳 뿐이었다. 가좌지구의 50%는 해당 자치구 내의 대학 재학생과 졸업자에게 우선권이 돌아갔다. 우선 선발권을 얻지 못한 나는 행복주택의 ‘행복’을 누릴 수 없었다. 47.5: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사회초년생·취준생·대학원생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은 행복주택이 유일하다. 가좌지구의 362세대에 들지 못한 1만 6천여 명은 또 각자 집을 찾아 헤매야 한다. 편히 두 발 뻗을 집이 절실한데도 신청 자격도 얻지 못한 청년들도 많다. 대학 졸업 후 2년이 지난 대학원생이나,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직장·재산이 없어도 신청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 바라는 게 더럽게 많죠 (그렇죠) 쉬고 싶죠 시끄럽죠 다 성가시죠?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그럴 땐 이 노래를 초콜릿처럼 꺼내 먹어요 … “방 말고 집에서 살고 싶다.”는 B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집이 없다. 몸을 누이고 짐을 쌓아두는 방이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1~2년 단위로 옮겨 다녀야 한다. 학교에도 직장에도 속하지 못한 우리는 먹고 자는 곳에도 속해있지 못하다. 자이언티(Zion.T)의 노래 ‘꺼내먹어요’의 가사처럼, 집(방)이라 부르는 곳이 있지만 늘 집이 그립다. 사진 출처 - magdeleine 이집트에는 ‘사자들의 도시’(City of deads)라는 곳이 있다. 역대 파라오의 무덤이 늘어선 역사 유적지가 아니다. 살 곳을 찾지 못한 도시 난민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장소다. 사람들은 과거 귀족층이 묻혀있는 무덤과 무덤 사이 공간을 이용해 집을 짓고 살아간다. 사회적으로 죽은 자들이 시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곳이 사자(死者)들의 도시다. 집 없는 서울 사람들은 무덤 대신 도시 속으로 스며든다. 늘어선 건물들 사이사이의 좁은 틈새를 찾아 헤맨다. 어딘가 두 발을 딛고 삶을 꾸릴 수 있는 공간을 얻기 위해서. 물론 운이 좋으면 틈이 아닌 번듯한 집에서 살 수 있다. 정부에서 정해준 ‘행복’의 기준에 들어맞는다면 말이다. 이빛나씨는 청년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6년 5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68 | 추천: 0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1997년의 겨울이었다. 매일 아침 일을 나가 저녁에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회사를 하루걸러 하루 나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집에서 쉬는 날이 잦아졌다. 유명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은 실직자들이 쏟아져 나오던 당시, 아직 알파벳도 몰랐을 시절의 나는 ‘IMF 사태’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실직의 위기를 겨우 피하는 대신 몇 가지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우선 정규직 명함을 반납했다. 아버지의 책상은 원래 다니던 회사의 ‘하청업체’로 옮겨졌다. 그마저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비정규직으로, 아버지는 또 다른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IMF 사태 이후 약 20년 만에, 당시의 칼바람이 다시 불어오고 있다. 이른바 ‘5대 구조조정’(조선·해운·건설·철강·석유화학)이라고 불리는 부실기업 중 가장 먼저 칼을 빼든 건 조선업계다. 현대중공업은 전체 직원의 10% 이상에 해당하는 인력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약 3000명 안팎이지만, 사내하청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8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감축이다. 언제 내 목이 잘릴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칼 날 앞에, 임시로 고용된 하청업체·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대량 해고의 직격탄을 맞는다.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는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구호 아래 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며 지나치게 친기업 정책으로 짜여졌다. 구조조정의 경우에도, 노동자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경영진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오로지 ‘경제적 효율성’만을 앞세우는 한국의 구조조정은 지난 IMF 사태처럼 노동자에게 구조조정의 피해를 떠안게 하고,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없도록 사회의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자본의 논리로 구성원을 가차 없이 잘라낸다는 점에서,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은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것과도 닮았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대학생들에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과대학이나 학과가 실종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대학 구조조정’, 바로 학과통폐합 전쟁이다. 취업사관학교로 전락한 대학에서는 더 이상 순수학문과 인문학, 예술은 대학의 돈벌이(취업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학은 경영학이나 영어, 컴퓨터공학 등 취업에 유리한 학과들만 입맛대로 골라 ‘글로벌’, ‘융합’, ‘인재’ 같은 식의 그럴 듯한 말들로 꾸며 학과를 ‘기형적’으로 결합시켜버린다. (실제로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법학과 경제학, 무역학, 행정학 등을 하나로 합쳐 ‘글로벌법정경대학’이라는 단과대학을 탄생시켰고, 그 때문에 사회과학대학에 있는 나머지 학과는 없어질 뻔하였다.) 사진 출처 - 뉴스1 기업과 대학의 구조조정이 ‘닮은 꼴’인 이유는 또 있다. 대학 구조조정도 기업의 구조조정과 마찬가지로 방식이 대체로 일방적이고 수직적으로 이루어진다. 학과 통폐합에 반대하는 대학생들과 대량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아무리 피켓 시위를 해도 결정권을 가진 윗사람이 의견을 수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제는 이들에게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학과가 없어진 학생들은 한순간에 소속이 사라지고 전공과목의 수강권리도 박탈당하는 상태가 된다. 마찬가지로, 돌아갈 회사가 없어진 해고 노동자들은 턱없이 부족한 퇴직금으로 앞으로의 밥벌이를 걱정해야 한다. 회사는 뒷날의 책임을 오로지 노동자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의 구조조정 사태들이 보여주고 있는 민낯이다. 안전장치가 없는 채로 한국 사회는 구조조정을 외치고 있다. 대학 구조조정의 마수는 대학생뿐만이 아니라 예비 대학생들에게도 뻗칠 수 있다. 전국 21개 대학이 정부의 ‘프라임 사업’에 따라 이공계열 위주의 학과개편을 실시하면서 문과계열의 입학정원을 4000명 이상 감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문과계열의 청소년들에게는 사실상 벌써부터 구조조정이 시작된 셈이다. 조선·해운업의 구조조정도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할 일이 아니다. 구조조정이 없을 것 같은 안정적인 직장으로 꼽히는 공기업도 구조조정의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 한국석유공사 등 에너지공기업은 부실한 실적을 이유로 실제로 그 대상이 되었다. 또한 구조조정은 더 이상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쉬운 해고가 가능한 나라’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들도 구조조정의 주인공이다. 더 이상 이 사회에서 ‘안전지대’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구조조정은 일부 기업과 대학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논의해야 할 논란거리다. 바야흐로 ‘구조조정’ 권하는 사회다. 선택받은 소수만 살아남고, 다수는 사회구조 하위층에 머무른다는 ‘20 대 80 사회’는 더욱 고착화될 뿐이다. 사회적 약자나 취약계층에게 최소한의 금전적 지원은 물론 재취업을 도울 수 있는 훈련 및 자활제도와 같은 ‘사회안전망’이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IMF 때 아버지는 해고의 낭떠러지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썩은 동아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잘리면 발 디딜 곳도 없을 것 같은 공포, 새 삶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은 20년 전에도, 현재도 노동자들이 뚜렷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20년 전과 지금이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기시감만은 아닐 것이다. 뚜렷한 대안 없이 경제적 효율성만을 외치며 약자를 마구 잘라내버리는 한국사회의 구조를 이제는 조정해야 하지 않을까. 선택받지 못한 자들도 살아갈 수 있는 ‘안전지대’가 있는 공동체를 위해, 한국 사회를 ‘구조조정’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5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06 | 추천: 0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그 애, 수능 전에 자살했어.” 한 통의 전화로, 연락이 안 되던 친구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통화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스무 살의 봄, 나는 오랜 친구를 잃으며 20대를 맞이했다. 그녀는 대학 문턱을 넘기 위해 스스로에게 매겨지는 성적 등급을 올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1등급, 2등급 그리고 3등급. 성적이 점점 떨어질 때마다 그녀는 종종 자신이 못 먹는 고기가 되어간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능이 가까워 왔을 때, 자신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미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열아홉 살에 삶을 포기했다. 안타깝게 떠나간 어린 시절의 친구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나에게 있어 그녀의 죽음은 나와 주변인들에게 한정된, ‘개인적인’ 비극이었다. 내가 또 다른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지난해 여름, 한 여성이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그녀는 부당한 해고를 당하고 수년간 투쟁해온 KTX의 여승무원 중 한 명이었다. 오랜 시간 눈물과 고통 속에 투쟁했으나, 그녀들은 끝내 코레일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패소했다. 법원의 판결이 약자에게 등을 돌린 순간, 코레일에 내야 하는 고액의 반환금은 가족이 함께 짊어져야 하는 빚이 되었고 여승무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녀들의 마지막 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은 ‘KTX 여승무원 투신자살’이었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오래전 친구의 죽음이 겹쳐졌다. 어린 시절의 내 친구는 모범생이었다. 학교와 학원, 독서실을 전전하는 하루의 끝에 친구와 통화하며 숨을 돌리는 짧은 시간조차 ‘낭비’라는 죄책감을 느끼던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오롯이 착한 학생이었던 그녀가 평가 제도의 압박에 지쳐 잠시 휘청거렸을 때, 사회의 입시 교육 제도에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여지와 대안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안타깝게 삶을 마감하지 않고 성장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아마도 여승무원이 마주한 현실을 그녀도 마주했을지 모른다. 성실히 근무한 끝에 부당한 처우를 마주하고, 그 부당함을 감내하지 않으면 해고를 당해야 하며, 사회 정의를 세우는 기관에 의해 벼랑으로 내몰리는 현실 말이다. 과연 그들의 죽음에 자살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 인간보다 힘이 강한 거대 자본의 사회와 그 사회를 위해 인간을 순위 매겨 평가하기 위한 제도는 필연적으로 비인간적 고통을 양산한다. 사회가 구조적 문제로 인해 생겨난 개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감내’를 강요하는 것이다. 구조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감내한 이들은 사회인,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해고자, 탈락자, 폭도로 내모는 것이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여승무원과, 어린 학생. 그들은 견디기 어려운 사회에서 더 이상 걷지 못해 날아올랐다. 사회구조가 요구하는 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결국, 인간이 살지만 인간적이지 못한 사회 구조에 의한 타살이었다. 비인간적인 사회 구조로 인해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의 죽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 날은 해고당한 가장이, 어느 날은 군대 사회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린 군인이. 또 어느 날에는 어린 자식을 차디찬 바닷속에 낡은 배와 함께 묻어야 했던 부모가.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사람이 사회 구조로 인해 죽어가도, 사회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인간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사람과 함께 상실하고 있는 또 하나가 있다. 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한 의미다. 우리는 사람을 잃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무뎌지고 있다. 무딤을 넘어 죽음을 조롱하고 피붙이를 잃은 유가족이 시체를 팔아 돈을 번다는 참혹한 말이 공감을 얻어내는 사회가 되었다. 이 속에서 하나의 죽음도, 수백의 죽음도 사회를 바꾸는 물음이, 외침이 되지 못하고, 그저 한해의 사망 통계 속의 숫자로만 기록되고 있다. 누군가 유족과 고인을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해도 사회에 이를 저지할 기제가 없고, 정치권력은 사람의 죽음 앞에 쉽게 등 돌린다. 이는 우리 사회에 사람의 가치에 대한 내면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도, 사람을 함부로 잃어선 안 된다는 것도 사회의 인식 속에서 흐려지고 있다. 사람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식과 무엇이 옳다는 견고한 합의가 없으니 사회의 주체가 거꾸로 되어간다. 구조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구조가 사람 위에 군림하는 양상이다. 비인간적인 구조는 치밀하게 모습을 감추고, 문제를 축소한다. 문제의 원인을 일부로, 개인으로 돌리고 은폐와 축소, 대타를 통해 문제를 잠재우고 존속해 나가는 것이다. 제2의 세월호가 되어가고 있는 옥시 사태 또한 명백한 구조의 문제다. 비인간적 평가제도, 경제 구조에 지쳤으면 벼랑으로 밀려나지 않고 쉴 자리와 대안을 찾을 여지가 필요하고, 잘못된 구조로 인해 사람을 잃었으면 구조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구조를 향한 당신의 물음이, 외침이 절실하다. 전체의 일부가 아닌, 개인이 아닌, 구조를 향한 물음이. 사람을 잃는 것은 아프고, 막지 못한 것은 부끄러워야 한다. 우리가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없더라도, 더 이상의 상실을 막기 위해 물음을 던져라.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치지 않고 물음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왜 잃게 되었는가를.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5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1 | 추천: 0
최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목욕탕에 가면 자주 마주치는 아이들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생 5명이다. 목욕탕 아래층 수영장에서 수영수업을 마치고 목욕탕으로 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체력이 끝내준다. 수영을 하고 난 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운 넘친다. 다이빙은 기본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 싶으면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수영과 물총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로 인해 욕도 많이 들어먹었다. 내가 본 것만 5번이 넘는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어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야, 이건 하지 말자. 혼나겠다.”하며 난동(?)을 자중한다. 어른들이 한꺼번에 목욕탕으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마을 앞 장승처럼 얼음이 된다. 철이 든다는 게 저런 건가 싶어 재미있기도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론 안쓰럽기도 하다. 며칠 전이었다. 그날도 그 아이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온탕에 앉아 눈망울이 시뻘게져 있었다. 남탕 관리인에게 된통 혼이 나고 있었다. “야 이 XXX야. 문 닫고 다녀. 가정교육 어떻게 받았니?” 목욕탕 문이 약간 열려있었던 모양이다. “실수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기가 죽어 변명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괜찮아”라는 위로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들과 처음 대화했을 때가 문득 생각났다. “수영하면 재미있니?”라고 묻자, 아이들이 하나같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엄마가 시켜서 하는 수영은 재미가 없다고 했다. 의아했다.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수영장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요즘 아이들에게 수영은 국어나 영어와 같은 학교 수업의 연장선이었다. 사교육에 지친 아이들에게 목욕탕은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시간이었다. 목욕탕에서 떠드는 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나름 노력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어른들의 경멸 어린 시선과 악담이 아이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는 건 참 안타깝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아이답고, 아이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때론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잘못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아이니까. 잘 모르니까. 잘 타이르고 따뜻한 말로 알려주면 된다. 그게 어른들의 역할이고 사회의 역할이다. 우리 사회는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이가 아이다우면 철이 없다고 한다. 아이가 어른스러우면 대견하고 착하다고 칭찬한다. 마치 철없는 아이는 비정상적이고, 철든 아이가 정상적인, 교육을 잘 받은 아이인 듯하다. 대개 아이들의 어른스러움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때가 많다. 교육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가난과 빈곤, 가족의 부재, 혹은 학대의 결과물인 경우도 많다. KBS 다큐멘터리 <동행>에 나오는 부모를 보살피는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게다. 아이도 어른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정작 어른이 된다면 더 이상 아이스러울 수 없다. 아이스러움, 아이다움은 아이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권리다. 그들의 아이스러움을 박탈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나친 강요이자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철들다’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른스러움을 바라는 생각은 철없는 생각이다. 최지영씨는 국정화 교과서와 위안부 문제 등의 역사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5월 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21 | 추천: 0
오민석/ 청년 칼럼니스트 전 세대보다 못살게 되는 최초의 세대, 전후 가장 희망 없는 세대. 청년 세대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열정페이, 비정규직, 좁은 취업문 등 청년들이 마주한 문제들을 나열해보면 끝이 없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한 세대 전체가 소수자가 되어버렸다. 절망과 함께 자존감도 추락하고 있다. 최근 SNS 등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맨몸으로 차도에서 굴러다니거나, 자동차 바퀴에 다리를 깔아 부러뜨리기도 한다. 일상의 낮은 만족감을 일탈로 채우고 있다. 극우 성향 젊은 누리꾼의 집합소인 일베는 날이 갈수록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자라는 세대는 괜찮을까? 나날이 심각해지는 가정폭력 사건들이 모든 걸 말해준다. 가정에서 당한 폭력을 밖에서 다른 아이에게 되갚아준다. 폭력은 돌고 돈다. 최근 학교폭력 방지 교육 등으로 표면적인 학교폭력은 적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대신 스토킹 등 새로운 유형의 학교폭력이 증가했다. 폭력 그 자체가 없어지진 않았다. 근본적으로 변한 건 없다. 일본에서는 청년세대를 ‘유토리 세대’라고 부른다. 2000년대에 주입식 교육을 개혁해서 조금 여유로운 교육(유토리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일본 기성세대는 유토리 세대의 특징으로 ‘나약하고, 쉽게 좌절하고, 꿈꾸지 않고, 시키는 것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등을 꼽는다. 사진 출처 - 문화일보 한국에서라면 어떨까. 지금 한국의 기성세대 역시 이런 눈으로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건 아닐까. 이런 ‘청년혐오’는 이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 혐오가 내면화된 결과는 끔찍하다. 이들은 ‘자살하고 싶다.’ ‘빨리 자살하자.’ 같은 농담을 툭툭 던진다. 평범한 대화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응답하라 1988에 이어 시그널까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대단한 인기였다. 봉황당 골목이 1988년 쌍문동의 어디였을지 추측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짙어도 너무 짙다는 생각도 든다. 많은 사람이 앞보다는 뒤를 보고 있다. 박정희 향수는 물론 80년대에 대한 향수도 나타나고 있다. 저항마저 현실이 아니라 추억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응답해야 하는 걸까.) 우리 세대는 응답할 곳이 없다. 우리가 응답해야 할 곳은 오직 바로 이 순간이다. 하지만 향수에 밀려 지금 이 순간은 보이지 않는다. 당장 총선에서 새로운 세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녹색당이나 노동당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언제쯤 우리 세대의 상태 창에서 응답 없음이 사라질까. 오민석씨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생기는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3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