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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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얼마 전 미국의 영화배우 클로이 모레츠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여성 대통령으로!’라며 지지 발언을 하는 것을 보았다. 당당히 소신을 밝히는 그녀의 모습이 멋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부러웠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 여자 연예인이 ‘저는 소신 있는 000정당의 000를 지지합니다.’라고 하면 당장에 삼촌들의 우상에서 끌려 내려와서 눈물의 석고대죄를 할 판국이 아닌가. 굳이 가정을 하지 않아도 정치적 소신발언으로 유명한 방송인 김제동에게는 늘 퇴출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공공연히 정치적인 행위, 발언을 하고 다니는 것 에 대한 단죄다. 우리 사회에서는 공인이 정치적인 소신을 밝히면, 그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의 여부보다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문제가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이 껄끄러운, 개인이 공공연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특정의 것’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다. 토론장이나 선거철, 정치인 같은 특정 장소나 특정 시기, 특정 행위자를 벗어나면 ‘정치적’인 것은 단죄의 대상이 된다. 정치적인 문제를 일상적으로 이야기 하거나, 정치적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이지 않은, 유난스러운 것으로 보는 시선이 늘었다. 정치적인 것을 특정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우리나라 정치권력의 그릇된 행보와, 그에 대해 쌓인 불신이 한몫을 한다. 한국 정치권력의 부패를 목격하는 경험, 정치권에서 일방적으로 소통을 거절당하는 경험이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시민 모두의 권리가 아닌, 특정이 소유하는 것으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우리는 정치적이라는 것에 대해, 정치라는 것에 대해 너무나 그릇되고 억압적인 잣대를 키워나가고 있다. 정치가, 정치적인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질'을 가지고 잘못된 억압을 만드는 것이, 만드는 사람이 문제일 뿐이다. 오랜 세월 그릇된 방향으로 뿌리박힌 정치적 억압이, 관행이 문제인 것인데 그 억압이나 그릇된 관행을 탓하는 것을 넘어 ‘정치적인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인식은 문제가 많다. 정치가 낳은 그릇된 결과를 개선하는 것도 외면이 아닌,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정치의 기본적 특성은 이해관계를 둘러싼 배분, 의사조정 과정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회체계는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 민주 사회를 살아가는 주권자라면 당연히 정치적이며, 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적이 되는 것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개인에게 ‘정치적’이라는 프레임이 공공연히 씌워지는 순간 그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순수하게 호소하는 시위조차도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이미지와 엮이면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으로 배치되는 입장의 구도를, 선악의 구도로 치환하는 양상이 보인다. 그렇기에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단체나 개인을 매장시키는 것이 손쉬운 사회가 되었다. 그런데 결국 정치적이라는 비판에 내재하는 본질은,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름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으나 배척하는 것은 간단하다. 우리 사회는 그 무엇보다도 정치적 관용이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하나의 정치적 입장을 ‘다른 것’으로 규정하고, 다른 것이면 악으로 몰아간다. 소위 고도로 과장된 종북 몰이가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잔인하게 효과적일 수 있는 배경에도 정치적 다름에 선악의 구도를 씌워 ‘단죄’의 대상으로 보는 논리가 기능하고 있다. 빈번하게 ‘정치적 단죄’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정치는 더 먼 것, 관심을 가지면 피곤해지는 것, 특정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는 이와 같은 분위기의, 의식의 개선이 시급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정치적 관용과, 정치에 대한 거리감의 회복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다름을 단죄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지하고, 비난이 아니라 소통을 위해 입을 열어야 한다. 보다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정치는 모두의 것, 모두가 말하는 것, 모두가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를 외면하거나, 멀리 있는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유리되어 특정의 것이 되지 않도록, 정치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과 내가 정치적임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정치적이어야 함을. 이곳은 민주시민의 사회이지, 특정인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23 | 추천: 0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저에게 산다는 건, 버티는 거예요” 청년들의 현실 고민과 갈등을 솔직담백하게 그려내 많은 20대들의 공감을 사며 최근 종영한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윤진명이라는 인물은 ‘산다는 것’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그녀는 식물인간 동생, 동생을 간병하는 어머니 대신 가장 노릇을 하며 낮에는 대학 수업, 저녁에는 레스토랑 홀서빙 알바, 새벽에는 편의점 알바를 하며 취준생의 최전선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하루 버티기에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대기업 공채 면접 기회라는 희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최종 면접의 결과는 낙방이었다. 불합격의 이유는 알고 보니 ‘복장 불량’. 구두를 살 돈이 없어 레스토랑 알바에서 신던 낡은 구두를 면접장에 신고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수년간 계속한 알바로 앞코가 다 까져버린 검정 구두, 상처투성이였던 그녀의 발에 기업은 ‘불량’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나 또한 (극중 윤진명처럼 투잡을 뛰지는 않았지만) 학기 중에 알바를 병행했던 적이 있다. ‘간단한 구직비용’, 즉 매달 토익응시료나 자격증 준비 비용정도는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내고 싶어서였다. 나와 같은 이유로 알바를 했던 취준생 친구들도 이 ‘간단한 구직비용’ 때문에 용돈을 벌면서도 허리띠를 졸라매야했다. 마치 CMS자동이체처럼, 각종 공인영어시험과 자격증 준비비용은 그나마도 몇 푼 안 되는 알바비에서 매 달 썰물같이 빠져나갔다. 그만둘 수도 없는 알바 때문에 취업공부를 할 시간도 없다는 하소연은 우리들 대화의 일상 주제였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취준생들은 ‘어디 하늘에서 돈이 뚝! 하고 떨어지면 어떨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곤 한다. 맘 편하게 취준만 걱정하고 살기에는, 기본적인 구직비용을 짊어지는 것조차도 버거운 청춘들이었던 것이다.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극 중 윤진명(한예리)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고 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매진하는 ‘생계형’ 취준생의 단상을 그려내며 이 시대 청춘의 삶을 현실적으로 대변했다. 사진 출처 - JTBC 서울시의 청년수당은 이런 청춘들에게 마른하늘에 단비 같은 정책이다. 만 19세에서 29세까지, 저소득층이며 주당 근로시간이 30시간 미만인 청년들에게 한 달에 50만 원씩 6개월간 지급하는 청년수당은 청년들의 텅 빈 주머니를 채워주며 구직활동을 지원하는 복지정책이다. 현재 서울시가 추진하는 청년수당은 그야말로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청년수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돈 50만 원을 그냥 쥐어주는 꼴’, ‘복지 포퓰리즘과 복지병이 우려되는 정책’이라며 비판한다. 청년수당에 난색을 표하는 이들이 말하는 “고작 50만원이 취업에 도움이 되겠어?”라는 문법의 기저에는 사실 청년들의 속사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의 시선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청년들의 구직비용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 빈곤하기만 하다. 청년수당을 단순 ‘공돈을 쥐어주는 정책’, ‘포퓰리즘 정책’으로만 보기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청년수당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청년유니온, 민달팽이 등 여러 청년단체가 직접 논의하고 기획하여 무려 2년간의 치열한 토의를 거쳐서 나온 ‘청년메이드’ 정책이다. 사실 청년이 처한 현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은 당사자, 바로 청년들이다. 청년수당은 단순히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급조된 정책이 아니라, 정책의 주인공인 청년들의 제안을 아래로부터 수렴해온 결과물이다. 서울시는 다년간 정책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청년맞춤형 정책을 민주적으로 이끌어냈다. 청년수당을 단지 표나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청년수당의 본질은 ‘공돈만 쥐어주는 정책’이 아닌, 청년 스스로 구직관련 활동을 찾아나서며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자율성과 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OECD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고학력 니트(NEET)족은 4명 중 1명이라고 한다. 게다가 국내 니트족의 38.7%가 ‘원하는 일자리가 없어’ 비구직 상태라는 것이 드러났다. 매해 최고치를 기록하는 청년실업률, 높은 취업 장벽과 구직난도 심각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길을 잃어버린 청년들이 거리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청년수당은 틀에 짜인 직업 고용 훈련과 취업연계제도에 적응하기 힘든 ‘사회 밖’ 청년도 포용할 수 있는 복지정책이다. 서울시는 연계사업으로 마음이 맞는 청년들이 모여 스스로 진로모색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도록 하는 커뮤니티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청년들은 ‘공돈’ 50만 원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진로를 모색하고, 구직활동을 능동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 단, 청년수당 대상자의 취업활동 진행상황에 대한 평가는 월별 보고서의 공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청년수당의 출발점이 ‘청년메이드’였듯이, 정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도 청년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청년수당은 청년정책이 계속해서 실패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청년정책의 활로를 찾는 기대효과를 노릴 수 있다. 그동안 박근혜 정부의 청년정책을 되돌아보면, 임금피크제 도입·공공기관 청년의무고용할당제 등 청년취업정책을 주로 대기업과 공공기관에만 집중하여 청년들이 처한 실제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고용노동부에서는 청년들의 취업알선을 도와주는 ‘취업성공패키지(이하 취성패)’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취성패’를 통한 고용유지율이 45%에 못 미치는가 하면 제한된 훈련과정, 직무와 관련 없는 질 낮은 일자리 연계 등으로 취업자의 절반이 퇴사하는 등 허점이 여럿 존재한다. 청년수당은 청년들의 피부에 와 닿는 금전적 지원을 함으로써 소외된 청년의 사회참여율을 높이는 정책이다. 현재 정부가 ‘적극적인 일자리정책을 실천하지 않고 돈만 쥐어준다’며 청년수당을 힐난하는 것은 청년수당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맹비난을 하는 것과 같다. 청년수당은 오히려 정부의 청년일자리 정책이 연달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년에게 새로운 구직 사다리를 만들어줄 정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청년수당의 본질을 꿰뚫는 시선이 필요하다. 청년수당 지급대상자가 되면 비싼 방 임대료를 낼 때 쓰겠다는 청년부터 학원비와 인터넷강의료에 사용하며 알바 할 시간을 벌겠다는 청년들까지, 각자의 사연만큼 청년수당의 사용처도 다양하다. 여유가 필요한 청년들에게 한 달 50만 원이라는 돈은 단순한 공돈 그 이상이다. ‘사는 것은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며 하루하루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취업준비생들, ‘간단한 구직비용’이라도 벌기 위해 각종 알바를 전전하는 청년들, 미래도 진로도 잃어버린 사회 밖 청년들을 위해 청년수당은 절실하다. 각박한 취업시장 속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청년들이, 우리 사회 속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입장료인 셈이다. 청년들이 이 ‘공돈’을 통해 얻게 될 것은 돈과 시간, 그뿐만 아니라 정서적 여유와 넉넉한 마음일 것이다. 청년수당의 진짜 목적은 아마도 ‘공(空)돈’이 단지 ‘빈 돈’이 되지 않도록 청춘들을 위로하려는 것이 아닐까.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월 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927 | 추천: 0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민중은 개·돼지다.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 한 고위급 공무원이 부적절한 발언으로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다. 아마 그는 억울할 것이다. 이미 자신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회에 만연한 현실을 말했는데 얼마나 억울할까. 그는 자신의 발언이 왜 부적절한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소위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단이 민중을 개돼지 취급한 것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인가. 그의 말은 인권이 배제된 자본주의 사회가 감추고 있던 속살을 제대로 보여줬다. ‘인간’을 위해서는 턱없이 형식적인 제도의 인권과 정치인의 혀끝에만 존재하는 평등한 사회. 국민을 위한 제도가 비인간적이며, 국민의 계층이 나뉘고 공고화되고 있음은 우리나라의 노동자가 처한 현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 청년이 홀로 안전문을 수리하던 중 지하철에 치여 온몸이 바스러졌고, 곧이어 숨을 거두었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려 일했지만, 정작 위험의 순간 그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숨을 거둔 그의 나이는 고작 열아홉이었다. 이 어린 청년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한 명이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매일을 에어컨 실외기 수리를 위해 낡은 건물의 난간들을 옮겨 다녔다. 낡은 선반은 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부서져 내렸고, 안전장비 하나 걸치지 못한 그는 맨몸으로 낡은 선반과 함께 추락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하청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죽음 앞에, 이들의 ‘고용주’가 내세운 말 역시 한결같았다. 바로 ‘안전규칙 미준수’였다. 그들은 이 말 한마디로 죽음의 원인과 책임을 모두 고인에게 전가해버렸다. 하청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과 시스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안전 수칙을 지킬 수 없는 업무 강도, 그럼에도 열악한 임금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만드는 책임 전가식 하청 계약 등은 그들의 입에서는 거론되지 않았다. 하청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낮은 임금과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인다. 그러나 이들에게 일자리와 임금은 생계, 그 자체이며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에 물러설 수가 없다. 늘어나는 하청 노동 속에서 ‘인간안보’에 적색 신호가 켜진 지 오래지만, 국가도, 기업도,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하청노동자 비율은 2012년 37.7%에서 2013년 38.4%, 2014년 38.6%, 2015년 상반기 40.2%로 늘고 있다. 산재 발생 비율은 하청 노동에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 하청 노동자들은 점점 하나의 ‘계급’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청 노동자라는 계급이 가지는 특성은 안전 보장의 가장 밑바닥, 인권의 존재 의미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정한 존재들이 아닌, 우리 국민의 대다수다. 이런 사태가 계속해서 방치된다면, 생존의 기본 권리조차 주장하기 어려운 최악의 노동 환경은, 하청 노동만의 문제는 아니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자본이 노동자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렇듯 비인간적이다. 국가와 사회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는 대다수의 하청 노동자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정부는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부가 매번 외치는 노동 처우 개선과 발전을 믿고 기다려서는 발전이 없다는 것이 국민을 개·돼지로 본다는 공무원의 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국민이 아니라 개와 돼지를 관리하는 관리자에게, ‘인권’을 보장하라는 말이 통할 리가 있겠는가. 제도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형식적인 노동자 보호법을 개선하고 실제 노동자의 현실 개선에 직결될 수 있도록 정부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 하청의 불가피함을 해결할 수 없다면, 최소한 기업과 하청 노동자 사이에 깨트릴 수 없는 국가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 자본과 기업이 몇 푼의 돈을 아끼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켰다면, 그들 자체에게도 사회에서 존립이 불가능할 정도의 규제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 노동문제의 해결은 국민의 삶의 질,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는 ‘인간안보’ 문제의 해결이다. 오늘 국민의 ‘인간안보’가 보장받지 못하는데, 내일을 위한 ‘국가의 안보’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노동자가 힘겹게 올라서야 했던 낡고 위태로운 발판은 그 개인의 앞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안전의 사각지대라는 것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미 사회 전체가 불안전지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인간 안보가 지켜지는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문제를 직시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죽음 앞에서 잠시 울컥하는 마음으로 잠시 혀끝에, 눈가에 반짝 스치는 탄식과 애도는 공염불이다. 정당한 약속과 진실한 이행이 없는 권력과 기업을 향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고용과 노동 사이에 연결된 하청의 고리를 끊어낼, 비수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국민은 국가가 키우는 개도, 돼지도 아니며 결코 하청되어선 안 될 인권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9월 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61 | 추천: 0
최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이름이 뭐예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용된 질문 중 하나다. 그만큼 인간에게 ‘이름’이라는 두 글자는 친숙하고 친근하다. 인간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이름’을 지으려 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현상이든 ‘이름’이 지어져야 인간사회에서 받아들인다. 인간은 작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명할 때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하게 된다. 생김새, 성격에서부터 특징과 기능까지 다양하게 말이다. 사회에 가장 알맞을 듯한 ‘이름’을 뽑아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일단 이름이 지어지면 사회는 이름에 담긴 뜻을 재조정한다. 이름은 사회의 제도와 세월과 인간의 욕망과 끊임없이 뒤섞인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의미가 생성되고 사라지고 고착된다. 이를 통해 ‘이름의 사회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사회화를 거친 이름은 애초 인간이 지었던 ‘이름’ 본연의 의미와는 전연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런 이름은 본뜻보다 강력하고 편향적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적 영역을 지배하기 쉽다. 인간은 그 이름에 담긴 사회적 감성과 시선에 종속된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인간의 머릿속에 본뜻보다 강력한 사회적 의미가 발동된다. 니거(nigger)라는 단어가 있다. 어원은 라틴어 niger(니게르)다. ‘검다’는 뜻이다. ‘니거’도 ‘검다’는 뜻이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흑인 노예를 ‘니거’라 칭했다. 흑인 노예들이 검었기 때문이었다. ‘니거’라는 단어는 노예제도와 200년이 넘는 세월과 인간의 사악함으로 사회화를 거쳤다. 자연스레 ‘니거’는 ‘흑인에 대한 경멸적 호칭’이라는 강력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됐다. 흑인들은 사회화를 거친 ‘니거’라는 단어에 편견과 차별의 시선, 폭력적 감성을 느낀다. 본래의 뜻인 ‘검다’는 사라졌다. ‘니거’와 같이 사회화를 거치면서 부정적 어감을 가지게 된 이름은 많다. 남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gay’와 ‘faggot’,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lesbian’, 그리고 조센징 등 모두 본뜻과 사회적 뜻이 다른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공통적으로 사회적 소수자 혹은 약자를 지칭한다. 강자와 다수를 지칭하는 이름은 사회화를 거치더라도 부정적 어감을 가지는 경우가 매우 적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왜 그럴까? 무의식적으로 강자와 다수에게 편입되려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 있다. 경쟁과 생존에 익숙해진 인류에게 강자와 다수에 편입되어야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논리는 지배적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구별이 아닌 등급과 수준으로 차이를 구별하는 차별이 인간의 본능과 잘 맞아떨어진다. 인간이 지은 이름이 이런 논리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통용되다보니 자연스레 소수자를 대변하는 이름 역시 부정적 어감을 가지게 된다. 올해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사건이 많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연설에서 니거(nigger)라는 금기어를 이례적으로 사용했다. “흑인을 니거(nigger, 검둥이)라 부르지 않는다 해서 인종차별이 종식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름이 사라지더라도 그에 담겼던 시선과 감성은 지속된다는 뜻이다. 작명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능에 대한 반성이다. 최지영씨는 국정화 교과서와 위안부 문제 등의 역사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8월 3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01 | 추천: 0
강은진/ 청년 칼럼니스트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연봉도 적다며.” “얘, 너희만 좋자고 하니? 체면이 있지.” “자네 번듯한 집도 없이 지금 결혼하겠다는 건가?” 최근 방송하고 있는 공익광고 <새로운 결혼문화>에 나오는 말들이다. 광고에서 보이듯 한창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어갈 예비부부들이 가족과 친구들의 참견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달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30대 미혼남녀 839명을 대상으로 결혼 안 하는 이유를 조사한 결과 49.7%가 ‘기대치에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라 했고, 가장 필요한 결혼 정책에 대해서는 61.2%가 ‘청년고용의 안정화’를 꼽았다. 체면과 번듯함이 중요한 결혼을 만족시키기 위해, 경제적 안정이 뒤따르지만 그렇지 못해 포기하고 안 하는 것이 지금 현실이다. 이런 체면과 경제적 불안정 때문에 청년들의 연애와 사랑의 의미들 또한 변질되어 혼란스럽다. 그들 연애의 대부분은 소셜미디어로 중계된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대는 타인에 대한 깊이 있는 공감보다는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과의 진실한 관계보다 어느 맛집을 가서 얼마짜리를 먹었는지,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어디를 가서 얼마나 특별한 경험을 했는지를 과시한다. 심지어 자신이나 상대방의 외모도 견적 받는다. 대화 내용도 그대로 노출되는데, “내가 이만큼 하는데, 넌 왜 그만큼 못해주냐.”는 식의 다툼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손익으로 계산되고 값이 맞으면 거래한다. 능력이 없으면 이 거래에 끼지도 못하고 낙오된다. 사진 출처 -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영국의 사회연구가 캐서린 하킴은 그의 저서 <매력 자본>에서 결혼은 이미 시장화됐을뿐더러, 연애 또한 돈이 없으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자본화 때문에 우리가 ‘보이는 것’에 현혹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하킴은 시대에 맞춰 그런 보이는 매력을 다양하게 개발해 갖추고 적재적소에 써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땐 그런 노력도 상품을 팔기 위한 광고나 전략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 경쟁으로 얻어지는 애정이 과연 만족감을 줄까? 오히려 번듯함을 향한 허영과 타인에 대한 무례한 간섭을 부추기는 꼴이 아닐까? 끝이 없을 것이다. 앞서 미혼남녀들이 말하듯 청년들의 사랑을 위해 고용이 안정됐으면 하는 바람도 크지만, 이 또한 여기서 그칠 일이 아니다. 경제적 결핍과 불안정함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불안 때문에 보이는 면에 현혹돼, 타인을 비난하거나 침해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이미 물질들로 바뀌어 표현되어 왔다. 관계나 애정은 항상 심오한 것이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상품처럼 쌈박하게 굴러갈 수 없다. 항상 모가 나있고 잘못돼서 망가지기도 하지만 이런 불량품들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 아닌가. 이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완벽하고 보기 좋은 것만 너무 강요하지는 않는지. 안온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는 진실된 배려부터 시작해봄을 권한다. 강은진씨는 책과 영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국문학과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6년 8월 1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89 | 추천: 0
김정웅/ 청년 칼럼니스트 최근 여의도에 가야할 일이 많아졌다. 자주 가보기 전에 여의도라는 공간에 대해 가졌던 환상이 있었다. 이 나라의 자본이 모이는 곳. 한국의 ‘맨해튼’. 고소득 전문직들이 오가는 성공한 자들의 땅. 처음 보았던 여의도의 인상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그러나 서너 번 더 다니다보니 특이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농성. 여의도의 높은 대형 빌딩들에서는 세 블록 정도 걷다보면 누군가 농성을 하는 광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농성의 종류는 다양하다. 뙤약볕 아래 피켓을 들고 망부석처럼 서 있는 1인 시위, 큰 천막을 설치하곤 시끄러운 음악을 트는 천막 시위, 확성기를 들고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궐기 시위……. 종류만큼이나 이유도 다양하다. 정당치 못하게 주주의 권리를 부정당했다거나 고객에 대한 거대 보험사의 횡포, 노동자 권익 침해 등 보다보면 우리 사회 부당한 일들이 이렇게나 많은가싶어 깜짝 놀라게 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사정이 궁금하긴 했지만 문제에 도움도 될 수 없는 삼자 입장이라 그 분들께 자세한 내용을 여쭈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분들의 현수막과 피켓의 내용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해를 받고 난 뒤 제도권 안에서의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 그러나 거대 기업의 유·무형의 실력 행사 앞에 그 무엇도 통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런 극단적 방법을 택했다는 것. 그리고 해결이 될 때까지 농성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 아마 그들은 문제가 언론을 거쳐 공론화되는 방식의 해결을 바라고 있을 듯 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여의도의 농성들 중 하나가 사회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는 걸 본 적이 없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앞으로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흔해져버린 농성의 풍경. 매일 그것을 접하는 여의도의 직장인들은 흘깃 쳐다보지도 않는다. 부당함에 대한 피해의 아우성이 흔해지자 보는 이들이 무감각해진다. 상설 전시처럼 되어버린 농성들에는 뉴스 가치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 사회의 서글픈 초상이다. 강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이 있는데, 오히려 힘없는 사람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지 못 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밀려나 길거리 농성을 나선 약자들인데 시민과 언론의 관심마저 받지 못한다. 누구도 편들어주지 않는 공허한 농성의 외침은 점차 잦아들어간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의 투쟁은 서서히 스러져 갈 것이다. 사라지는 농성자들은 모두 응분의 보상을 받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여의도에서 돌아오는 길엔 국회가 보인다. 훌륭한 나라를 만들라고 국민들이 빌려준 권력이 이렇게나 가까운데, 그 근처 구석구석엔 그 국민들의 피맺힌 아우성이 빗발친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 김정웅씨는 사회와 정치의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20 | 추천: 0
박꽃/ 청년 칼럼니스트 고독사를 주제로 한 방송국 다큐멘터리 팀의 인턴으로 참여했던 지인은, 서울 종로 쪽방촌에서 만난 중년 게이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그는 홍석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홍석천은 우리나라에 게이 담론을 대중화한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게 일반이 생각하는 그의 ‘가치’다. 한데 그와 똑같은 게이의 입장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성공한 게이’가 오히려 평범한(혹은 평범한 축에도 못 드는) 게이의 사회적 입지를 더 좁혀버린다고 했다. 중년 게이는 홍석천의 사회적 가치보다, 홍석천이 실질적으로 자기 삶에 미치는 문제들에 대해 더 민감한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 홍석천은 외모, 경제력, 사회적 입지 등의 조건이 최상위에 속하는 극소수의 게이다. 매체는 성공한 그의 삶을 세련되고 멋지게 보이게 한다. 그럴수록 동성애자가 압도적 다수의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번듯하게 설 자리를 마련하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동성애자지만’ 여타 능력은 이성애자보다 뛰어나고 그래서 인정받을 만하다는 논리다. 문제는 그런 논리가 오히려 대다수의 평범한 게이를 소외시켜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이의 현실은 그렇게 성공적이거나 멋있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모든 이성애자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듯 동성애자도 마찬가지다. 종로3가 쪽방촌에 거주하는 중년의 그는 게이라는 이유로 취업이 어려웠고, 결혼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게이라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하다’는 단서를 다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불편하다. 본의 아니게 그에 일조하고 있는 홍석천의 존재도 조금 거북하다. 사진 출처 - 홍석천 인스타그램 비슷한 관점에서 박찬욱의 <아가씨>를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영화 큐레이션 앱 '왓챠' 유저를 비롯, 일부 레즈비언들의 의견이 그렇다. 김민희와 김태리가 방울을 활용해 섹스하는 마지막 장면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두 여자의 ‘방울 섹스’는 그저 어여쁘게만 보이고 작위성이 심해 실제 레즈비언의 섹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요지다. 그 장면에서 김민희와 김태리의 두 몸은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서로 마주보고 있다. 거의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몸의 곡선을 카메라가 직시하는 상태에서 그녀들은 동그란 방울을 활용해 서로를 만족시켜준다. 두 몸의 움직임이 너무나 비슷한 속도와 높낮이로 균질하게 움직인다. 미학적으로 아름다울지는 모르나, 비현실적이다. 일상적 섹스는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이질감이 심할 것 같은 도구를 활용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영화적 상상력 차원에서 존중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그런 만큼 그 장면이 남성이나 이성애자의 ‘레즈비언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데 불과하다는 비판적 의견 역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영화 <아가씨>의 숙희와 아가씨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아가씨>를 보며 불쾌해질 사람은 단연코 남성일 거란 추측을 한 적이 있다. 코우즈키(조진웅)는 두 여자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음란 서적을 훼손당하고, 백작(하정우)은 숙희에게 성기를 쥐어 잡혀 조롱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불편함을 느낀 이들은 오히려 레즈비언이었다. 현실감에서 비롯된 감수성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남자 배우가 영화에서 아무리 우스운 꼴을 당해도 현실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어지간해서는 그런 식으로 모욕당하지 않는다. 때문에 하나의 영화에 불과한 남성모욕담을 잠시 즐기면 됐던 셈이다. 영화 <아가씨>의 백작과 코우즈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본래 피해의식이나 자격지심이 없는 지점은 아무리 조롱당해도 별 타격이 없다. 그러나 레즈비언에게 이 영화는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간다. 아름답게 섹스하는 레즈비언이 일종의 ‘단서’로 작용할 우려가 있기에 그렇다. 그렇게 아름다운 섹스라면, 대중에게 보이고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그럴 때 레즈비언이 느끼는 불편함은 중년 게이가 홍석천을 보며 느낀 거북함과 비슷하다. 영화의 대중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인 이들에게 레즈비언의 삶이 미화됨으로써만 의미를 갖는다면? 별로 아름답지도, 성공하지도 않은 레즈비언의 삶과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물론 영화가 현실을 똑같이 모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화가 현실의 어떤 문제들을 생각하는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아가씨>는 본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김민희와 김태리만큼 아름답지 않은 평범한 레즈비언을 공론의 장에서 배제할 우려에 놓여있다. 발군의 게이 캐릭터 홍석천이 성공한 게이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때, 역설적으로 다수의 평범한 게이가 설 자리는 좁아지듯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가씨>의 방울 섹스 장면을 불편해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들의 마음을 좀 더 성의껏 이해해보려고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동성애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감수성이 한 차원 더 높아질 수 있다. 이 글은 2016년 8월 1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51 | 추천: 0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재작년 돌잔치 행사장에서 반년 정도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가본 이들은 알겠지만, 돌잔치 행사장의 분위기는 대부분 유쾌하다. 행사장 분위기에 따라 ‘팁’이 결정되기 때문에 사회자는 필사적으로 농담을 많이 던진다. 성장 동영상, 덕담, 축의금 경쟁, 사은품 추첨 등 여러 코너가 있지만, 가장 웃음이 많이 터지는 부분은 돌잡이다. 아르바이트했던 곳에서는 연필, 지폐, 명주실, 판사봉, 청진기, 마이크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레퍼토리는 항상 같았다. 먼저 사회자가 부모님께 무얼 잡았으면 하는지 묻는다. 부모님의 답변은 대부분 돈이다. 연필도 가끔 나온다. 마이크를 얘기한 부모님은 한 명도 못 봤다. 부모님이 돈이라고 하면 사회자는 뭘 아시는 분이라며 익살스럽게 동의한다. 돈이라고 하지 않으면? 한 번 더 선택할 기회를 준다. 그러면 모두가 웃는다. 아,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다. 돌잡이가 시작되면 아이의 손에 모든 관심이 쏠린다. 사회자가 접시를 슬쩍 돌려 지폐가 아이 앞으로 가도록 놓기도 한다. 적극적인 부모님은 지폐를 들고 흔들기도 한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잡은 건? 명주실이다! 아...! 박수 소리가 작다. 부모님은 어쨌든 웃어 보인다. 사회자는 요즘 시대는 건강이 재산이라며 급히 다음 코너로 넘어간다. 사진 출처 - pixabay 태어난 지 1년 된 아이가 생일잔치에서 돈을 잡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아이가 장래 행복해지기 위해 돈이 가장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행복에 있어 돈이 중요하다는 개념과 돈이 다른 가치들(건강, 지혜, 명예 등)에 우선한다는 개념은 조금 다르다. 조금 다른 가족이 있었다. 돌잔치 사회자가 평소와 같이 물었을 때, 이들 부모는 한목소리로 명주실을 말했다. 아이의 행복에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 수백 번의 돌잔치를 지켜보며 처음 들은 대답이었다. 이 부부는 평소 내가 믿고 있던 행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행복을 상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돈이 나와 타인의 행복을 판단하는 척도가 아니라, 돈이 행복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인 그런 행복 말이다. 그리고 이제 막 돌이 된 그 부부의 아기는, 앞으로 꽤 값진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행복에 대한 자기 정의가 필요하다. 직업적, 경제적인 행복밖에 상상하지 못한다면, 그는 그렇게 될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한입 베어 먹는 1,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진정한 행복인지, 아니면 행복에 도달하기엔 조금 모자란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자녀에게 물려줄 행복을 우린 조금 더 조심스럽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자가 질문을 조금 바꾸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부모님, 자녀가 어떤 종류의 행복을 거머쥐길 바라시나요?’ 라고.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21 | 추천: 0
-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이빛나/ 청년 칼럼니스트 제주도에서 6월 한 달을 보냈다. 명분은 힐링이 필요해. 쉬지 않고 뭔가를 해야 하는 도시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일명 '제주도 한 달 살기'에 도전했다. 백수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제대로 누리고 왔다. 시간적으로는 자유인이지만 금전적으로는 노예 상태였으므로 바다 앞 럭셔리 펜션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차선책은 게스트 하우스 스탭, 일명 종업원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마다 조금씩 여건이 다르지만 보통 한 달에 보름 정도만 일하고 남은 날들은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일하는 날도 방 청소가 끝나면 체크인을 시작하는 오후 4시까지는 자유다. 일단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숙식제공을 빌미로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긴 했다. 하지만 취업준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벗어두고 싶었다. 일하는 날이면 게스트 하우스가 위치한 제주시 근방을 돌고, 쉬는 날에는 멀리 서귀포시까지 나갔다. 나는 할머니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아침잠이 없다. 새벽부터 일어나 슬금슬금 청소를 시작한다. 퇴실하는 손님 순서로 청소를 하다보면 늦어도 정오에는 일이 끝난다. 오늘의 목적지를 정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바닷가 근처의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기를 반복하고, 인적이 드문 돌담길을 바다가 보일 때까지 걸었다. 테마는 ‘카페 탐방’이었다. 나는 커피 없인 하루도 못사는 카페인중독자다. 커피 맛이 유명하거나 특색 있는 메뉴를 판매하는 카페는 여행지에서 빠뜨릴 수 없다. 사실 일부러 계획할 것도 없었다. 바다가 가까운 곳부터 제주 시내까지 홍대 근처에 있을 법한 ‘힙’한 카페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힙하다’는 말을 듣고 특정 신체부위를 떠올릴 지도 모르지만, 이건 엉덩이와 다리 사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트렌디하다는 뜻이다.) 카페 덕분에 해변까지 유명해진 경우도 있다. 세화해변은 해변가에 위치한 ‘카페 공작소’와 함께 유명세를 탔다. 세화리에 가면 해변가보다 카페 공작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카페뿐만 아니라 음식점,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가 펴내는 독립출판물을 판매하는 책방 등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제주댁 이효리를 시작으로 제주도는 힙스터들의 유토피아가 된 듯하다. 힙스터는 단순히 유행에 민감한 것을 넘어 주류 문화보다 독립문화적 가치를 쫓는 사람들을 말한다. (뭔지 감이 잘 안온다면 당신은 힙스터가 아니다.) 이런 힙한 사람들, 자연과 더불어 여유로운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여행을 오고, 작업실을 차리고, 아예 자리를 잡는다. 제주도의 새로운 풍경으로 자리잡아가는 문화공간들은 자연스럽다. 제주도 특유의 푸르른 풍경과 젊은 감성의 조합은 제주를 찾는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으니. 전통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들은 가족여행객과 중국인들이 가득하다면, 제주를 찾는 젊은이들이 꼭 들르는 곳은 ‘인생 프사(프로필 사진)’를 남길 수 있는 공간들이다. 카메라만 가져다 대면 각이 나온다. 카페 안에 가득한 사람들을 피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사진 출처 - 필자 하지만 한층 힙해진 제주도를 마냥 환영하기에는 씁쓸한 맛이 있다. 내 머릿속에는 죽어있던 도심 곳곳을 새롭게 바꿔놓자마자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나는 젊은 예술가들의 뒷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제대로 힙한 멋쟁이들이 값이 싼 지역으로 들어와 낡은 동네의 분위기를 바꿔놓으면, 임대료가 치솟아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역설을 말한다. 소위 육지인들에게는 힙스터의 파라다이스, 힐링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제주도민들에게 제주도는 삶의 현장이다. 제주살이의 에메랄드빛 환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제주도가 고향인 대학 친구를 만났다. 서울이 아닌 제주에서 만나 느낌이 다르다며 깔깔댔다. 힐링하러 왔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너도 참 대단하다며 추켜세웠다. “제주도 너무 좋다! 서울에 있으면 고향 생각나겠다. 이 좋은 제주도를 어떻게 떠나왔어?” 내가 물었다. “여기서는 미래가 안 보여서.” 친구의 대답에 ‘힐링’ 운운한 것이 미안해졌다. 지난해 한 취업포털 조사 결과 전체 채용공고의 40.9%가 서울에 집중돼 있었다. 경기도까지 합치면 수도권에 일자리의 반이 넘는 65.6%가 몰려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통계들 중 취준생인 내 뇌리에 박힌 숫자다. 제주 지역 일자리는 0.4%로 전국 최하위였다. 그나마 생기는 일자리도 육지에서, 중국에서 건너온 사장님들에게 제주도 청년들이 고용된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일자리를 얻고, 성실하게 일하다 보면 종업원도 멋들어진 바닷가 카페를 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몰려든 자본으로 몇 년 새 뻥튀기 된 땅값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빛나씨는 청년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2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54 | 추천: 0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언니들, 이거 나만 불편해?” 한 여성 커뮤니티에서 등장한 이 말은 ‘여교사’, ‘처녀작’처럼 여성차별적인 현상이나 언어에 불편함을 표할 때 자주 쓰이면서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 유행어에 설명서처럼 따라오는 단어가 ‘프로불편러’다. ‘프로불편러(Pro+불편+-er)’라는 용어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프로처럼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은 여성차별을 조장하는 글과 상관없는 유머글이나 일상글에도 “언냐(‘언니야’를 줄여 말하는 것으로, 여성 특유의 말투를 묘사한 것)들,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여성 커뮤니티 유저들이 사소한 것에도 ‘불편함’을 제기해서 논란거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글에도 위와 같은 댓글을 달며 ‘프로불편러’라고 불리는 일부 여성들을 되레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프로불편러를 희화화한 코너를 내보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코미디프로그램 <SNL>에는 일명 ‘프로불편러’를 조롱하는 듯한 방송을 해 논란을 낳았다. 사진 출처 - tvN 프로불편러는 본래 남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다. 은폐되어 있거나, 혹은 대부분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불편함’을 표현할 수 있는 특유의 예민한 DNA를 그들은 가지고 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예민함은 기성제도와 반대 노선을 걷는 것이므로 사회에서는 늘 소수이자, 비주류이다. 만약 이 소수의 프로불편러가 ‘불편함’을 표현하면, 다수는 이에 대해 불편해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다수는 그들이 믿고 있던 세계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소수가 다수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도 하다. 그 이유로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외치는 프로불편러의 ‘소수의견’이 사회적 각성을 일으키기 보다는, 다수가 ‘피곤하다’고 말하며 오히려 그들을 불편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은 남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는 ‘불편함’을 일단 불편해하고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흔히 쓰이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말은 무언가에 의문을 갖거나 문제를 지적하기보다 ‘다수의 의견에 묻어가라’는, 암묵적으로 동의된 사회적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길 바라는’ 사회에서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프로불편러의 존재가 다수의 눈총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이것이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소수자’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다수자’가 불편해하는 소통구조 하에서, 다수는 소수의 입을 막는다. 프로불편러의 정당한 문제제기가 그저 ‘유난스러움’으로 격하되고 그 과정에서 소수자에 대한 잔학한 폭력이 수반된 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 미국 노동자들이 일으킨 ‘메이데이 운동’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이들은 “기계를 멈추자!”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1880년대 후반, 밤낮없이 기계가 돌아가던 공장에서 기계만도 못한 삶을 살던 노동자들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최소 노동시간 8시간의 인간다운 삶을 살자고 나선 것이었다. 당시 너나 할 거 없이 공장을 세우고 노동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당연시 여기던 자본가와 기득권층은 그들을 재억압하기 위해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즉, 소수의 프로불편러가 억압에 대한 저항을 하면 다수가 그들에게 재억압을 가하는 식이다. 이러한 억압과 폭력의 악순환은 프로불편러의 입을 막는 행위가 되고, 사회의 유익한 담론을 만들어 내는 기회를 박탈해버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다수의 억압에 저항하는 소수의 프로불편러에 의해서 변화되어왔다. 만약 역사 속에 프로불편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껏 세계사에서 있어왔던 수많은 인식의 전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 이단으로 몰리고, 화형을 당하는 등 억압과 재억압을 감수하며 ‘불편함’을 알리려고 했던 코페르니쿠스와 제자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들은 아직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미국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운동을 계기로 전 세계에 공감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8시간 노동’은 꿈의 노동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짐작하지 못했을 뿐, 프로불편러는 일상 속에 늘 존재해왔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혹은 침묵하는 보편적 사실에 돌을 던지고야 마는, 그런 ‘일침러’들 말이다. 비단 ‘김여사’나 ‘~~녀’ 담론에 반대하며 “언니들, 이거 나만 불편해?”를 외치는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별금지를 주장하는 성소수자와 장애인, 부당해고와 임금삭감에 저항하는 노동조합,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단체 등 일상 속의 프로불편러가 다양한 사회 군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프로불편러는 이 사회에 ‘메이데이’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다수가 막연하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수의 ‘애매함’을 파고드는 소수의 ‘구체적’ 지적은 결국 사회구성원들이 ‘나는 왜?’ 나아가 ‘우리사회는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유익한 담론을 공론장으로 이끌어낸다. 편향된 하나의 가치가 굳어지는 사회에 구조 요청을 보내는 ‘메이데이’를 통해 그들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적어도 이들의 ‘메이데이’ 외침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릇이 크다’라는 말은 아량이 넓은 사람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 ‘큰 그릇’보다 필요한 것은 ‘빈 그릇’이다. 제 아무리 ‘큰 그릇’이라도 하나의 생각만 담다보면 넘쳐흐르기 마련이다. ‘빈 그릇’은 ‘무엇이든 담을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일종의 사회적 배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나와 다른 ‘소수의견’이라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관용이, 소수의 불편을 품어낼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66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