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치가 오염시키는 언어(정범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7-08 11:54
조회
196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갈등, 대결의 정치 반복되면 미래로 갈 수 없어”
“합리적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면 고통은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 말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제 22대 국회개원과 관련하여 국무회의에서 했다는 말이다. 발언자가 누구인가를 빼고 본다면 이 말 자체를 갖고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러나 발언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이 말을 읽는 사람들의 반응은 180도 달라진다.


역사상 최초로 탄핵받은 대통령이 되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른바 “유체이탈화법”으로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주어가 빠진” 발언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유체이탈화법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 탓”을 해야 할 대목에서 “남 탓”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위 발언을 보면 “유체이탈화법”은 물론이고 아예 언어파괴 수준으로 치닫는 것 같다. 언어가 “진실을 매개하는” 소통도구로서 전혀 기능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마주치게 되는 어느 정당의 플래카드도 정신을 사납게 한다.
“안보는 여야가 없습니다.”



무슨 이런 뻔한 소리를 하고 있나 생각해 보지만 그래도 이건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하나마나한 소리에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 아깝지만 뭐, ‘언론자유’가 있는 나라니까.
그러나 이런 펼침막을 대하면 막막해 진다.


“언제까지 북한 옹호 할 겁니까?”



누가? 언제? 어디에서? 북한의 어떤 짓을? 왜? 어떻게?
플래카드 한 장을 읽으면서 질문이 속사포같이 쏟아진다.
명색이 여당인 정당이 국민들 대상으로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우선 기본적인 우리말 시험이라도 먼저 보는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원인 없는 결과 없다. 아마 북한의 오물풍선에 대응한다고 국민을 대상으로 이런 유치한 말장난을 하는 모양인데, 차라리 이런 플래카드 내거는 돈과 시간을 아껴 탈북자 단체들이 북으로 올려 보내는 그 풍선들 부터 단속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그 풍선에는 달러도 넣어 보낸다는데 그런 비용들은 다 어디서 나오는지도 궁금하다. 탈북자들이 자기 돈 모아서 하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동맹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여당 의원들을 대상으로 “정신 나갔다”고 질타한 야당의원이, ‘정신 나간’이란 표현을 썼다고 ‘국민의 힘’으로 부터 공격받는 현실도 우리를 웃프게 한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말을 오염시키는 데는 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당의 아버지는 이재명’이라고 했다는 어느 야당의원 발언도 실소를 자아낸다. 민주사회의 대표적인 공적(public) 조직인 정당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당화(私黨化) 시키는 발언이다. 혹시 이 말을 한 의원의 머리 속에는 ‘어버이 수령’ 비슷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강건한 봉건사상이 깊게 뿌리박혀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생각해 봐도 스스로 말이 안되는 질문까지 해보게 된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평가할 때 대개 그들이 하는 말을 보고 그 사람 생각을 읽어내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맨 위 윤대통령 발언처럼 유체이탈화법을 쓰는 경우 언어는 더 이상 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된다.


영국 BBC 방송은 이런 표어를 내걸고 있다.
News is nothing without context.
직역하자면, “맥락 없는 뉴스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맥락에도 닿지 않는 말을 그나마 ‘대통령의 말’이니 곧이곧대로 실어야 하는 뉴스업체 종사자들의 처지도 딱하지만, 그런걸 뉴스라고 앍어야 하는 시민들의 처지가 더 딱하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이미 많은 것을 오염시키거나 파괴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사회를 진영대결로 몰아가고 있다. 그 와중에 우리말까지 심각하게 오염시키거나 희화화시키고 있다. 그 가장 큰 책임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을 것이다. 취임 초기, 국가의 주요명운이 걸린 한미 외교를 ‘~ 날리면’ 수준으로 희화화 시킬 때부터 이미 조짐이 좋지 않았지만, 이제 ‘갈등과 대결의 정치’ 책임을 야당에게 돌려 버리는 그의 유체이탈화법을 보면서는 국가 지도자로서 그의 말에 아무런 무게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과연 정치가 이렇게 “아무말 대잔치”가 되어도 좋을 것인가?


정범구 위원은 전 독일대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