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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상상(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6-11 15:16
조회
173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손흥민 선수에 대한 나의 팬심


손흥민 선수의 재계약 협상이 한창인지 몇몇 매체에서 1년이니 종신이니 연봉이 얼마니 하는 기사가 뜬다. 손흥민 선수가 올해 32살이라 축구 선수로는 나이가 좀 있다 싶지만, 최근 체력 관리 시스템을 보자면 아직 한창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선지 팬들은 토트넘 구단이 손흥민 선수를 박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대뜸, “손흥민 선수 없었으면 토트넘은 EPL에서 강등권이야!”라고 반박한다.


그럴 법도 하다. 손 선수는 올해 17골을 넣었고 어시스트가 10개이다. 자신이 17골 넣고, 다른 선수가 골 넣는 데 10번 도움을 주었다는 말이다. 올해 5위를 한 토트넘 총 득점은 74점이니, 손 선수의 득점 17점을 빼면 50점대 중반이 되고, 이러면 EPL 강등권은 아니라도 하위권 팀이 된다.


하지만 팬심은 팬심으로 그쳐야 한다. 손흥민 선수가 없었다면 누군가 그 자리를 메웠을 것이고, 또한 다른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놀고 있었을리 없다. 따라서 74점에서 17골을 뺀 기록이 토트넘의 성적이 되리라는 추론은 이미 시작부터 오류이다.


[손흥민 선수가 박수로 격려하고 있지 않은가! 시민 여러분 힘내라고!]


K리그도 마찬가지


EPL 말고 K리그를 보자. 전주에는 ‘전북현대FC’가 있다. 가끔 우리 학교 운동장에 와서 연습경기도 하고, 전북FC를 후원한다는 음식점도 꽤 있다. 최강희 감독이 떠나고 이동국 선수마저 은퇴하자 전북 현대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이동국 선수는 10년 이상 전북현대에서 뛰면서 164득점을 올렸으니 말이다. 나는 그가 2006년 월드컵 예선인가에서 발이 접질리는 장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후 그가 회복하여 활약을 보여준 데 대해 팬으로서 고맙게 생각한다.


아무튼 최 감독과 이 선수가 떠날 무렵 나와 가까운 축구팬은 “이 사람들이 없었으면 현대가 우승할 수 있었을까?”라고 말했다. 난 손흥민 선수의 경우와 똑같이 대답했다. ‘다른 선수들은 뒷짐지고 있까니?’ ‘이동국 선수가 없다고 현대가 10명이 뛰남?’ 실제로 전북현대FC는 최강희 감독, 이동국 선수 없이도 2022년에 우승했다. 올해는? 음~ 조금 안 좋다.


역사적 상상, 하지만


이런 류의 생각이나 발상을 ‘역사적 상상’이라고 부른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상상이 나래를 펴는 걸 어쩌란 말인가! ‘역사적 상상’이란 역사를 무대로 펼치는 상상을 말한다. 말릴 사람은 없다.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그때 좀 더 잘했으면…’ 할 수 있다. 좋은 자세이다. 이런 사람은 희망이 있다. 뒤늦게 인권연대를 알게 된 사람이 ‘진즉 회원 가입할 걸’ 하고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 역시 건강한 시민의 마음이다.


헌데 역사적 상상은 역사학의 논제가 되지 못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따라서 역사학의 경험주의에 배치된다. 따라서 역사학도는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같은 가정과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런 상상을 역사학에서는 ‘허구적(가상적) 질문의 오류’라고 부른다.


요즘엔 역사학자 중에서도 ‘가상 역사(virtual history)’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를 반(反)-사실(counterfactuals)이라고 부른다. 그럴 수도 있다. 오늘날 세계를 만든 역사적 사건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와 달랐다면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할 수 있다. 그게 다다. 무의미하다. 그냥 상상해보는 이상의 의미가 없다.


[웃는 아이들. 언젠가 써먹으려고 인터넷에서 담아놓은 사진. 미래를 위한 상상은 희망이다.]


현실을 박차는 상상!


물론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당연하게 생각했던 현실을 낯설게 돌아볼 수도 있다. 간혹 결과론적 해석을 피할 방편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리가 있다.


낯설게 하는 건 중요하다. 거리를 유지해야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험의 밀도와 비판 의식은 비례하는 경우가 더 많다. 현실을 낯설게 보려면, 낯섬을 느끼려면, 현실에 그만큼 밀착되어야 하고 파고들어야 한다. 오직 아는 만큼만 낯설 것이다.


결과론의 안이함과 그로 말미암을 폐해도 크다.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합리화를 피할 수 없다. 변화를 위한 운신의 폭은 그만큼 줄어든다. 하지만 어떤 상황 전개에 대한 이해가 결과론인지 아닌지는 그 현실의 과정에 투철해야만 판단할 수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상상이 위안이 되고 또 필요하기도 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일일이 입에 담기 힘들만큼, 아이들에게 듣게하기도 보여주기도 민망할만큼,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나 부질없이 돌아볼만큼, 이 땅의 하루하루가 참담하고 답답하니 어찌 낭만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신 뒤돌아보며 지난 일을 두고 상상하지 말고, 앞을 보고 상상하자. 뒤를 보는 상상은 무의미하거나 오류를 낳지만, 미래를 향한 상상은 희망을 낳고 비전이 된다. 비(非)-역사적으로, 상상력은 온전히 미래로 향해보자. 우리가 그리는 편안하고 따뜻하고 함께 웃고 있는 세상을 그려보자. 그만큼 그 세상을 가로막는 현실에서 눈을 떼지 말고 한껏 단호해보자. 거듭, 과거를 상상하지 말고 미래를 상상하자. 미래는 이렇게 와 있는 법이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