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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아무 일도 없었다(김희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5-14 13:57
조회
662

김희교 / 인권연대 운영위원


1587년은 중국 만력제 15년이다. 역사학자 레이 황은 그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적었다. 만력제는 명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1587년 명나라는 여진족의 흥기를 대비해 뭐라도 했어야 하는 한 해였다. 그러나 만력제는 권력 이양에만 신경을 쓴 채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채 한 해를 보냈다. 장거정이라는 대학사와 척계광이라는 유능한 장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은 결국 청에게 300여 년간 지속되어 온 왕조를 넘겨주었다.


2년 만에 이루어진 윤석열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는 내내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책이 떠올랐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과오를 되돌아보지 않을 것이며,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대비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리를 지키고, 시간을 버틸 것이다. 아마도 2024년 윤 정부 3년차, 그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라인 사태가 터졌다. 윤석열 정부는 마음먹은 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결심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네이버가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다. 결정하면 돕겠다.” 그는 여전히 기업이 앞서고 정부가 뒤를 봐주던 자유 무역 시대에 살고 있거나, 일본에게 나라를 갖다 바칠 결심을 했거나 둘 중 하나를 하기로 마음 먹은 듯하다. 변화하는 세계에 대비할 생각은 아예 없다.


시대인식이 없는 정부만큼 위험한 정부는 없다. 기업이 해야 할 일과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다르다. 기업이야 자신들의 이익만 고려하여 이익이 되는 쪽으로 결정하면 되지만 정부는 당장의 이익 뿐만 아니라 국가의 100년을 고려해야 한다. 이번 사안은 단순히 네이버의 소유권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지금이 경제안보 시기이다. 정부가 기업을 끌고 가는 시기이다. 그러지 않으면 기업은 죽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화웨이는 미국 정부에 의해 고사될 뻔 했고, 중국 정부에 의해 생환했다. 네이버는 일본 총무성과 싸울 힘이 없다. 정부가 네이버가 알아서 하라고 하면, 네이버가 할 수 있는 일은 값이라도 후하게 받고 넘기는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미 이 사안을 네이버라는 한 기업의 영업행위쯤으로 끝낼 심산인 듯하다.


  이번 사안에는 미래 먹거리 문제의 핵심 사안인 플랫폼 기업 문제와 데이터 주권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라인은 거의 유일하게 해외에서 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플랫폼 기업이다. 이마저 내주면 한국 미래산업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플랫폼 기업의 보호와 육성은 반도체를 뒤이을 미래산업의 주도적 먹거리와 관련이 있다. 일본이 문제 삼고 있는 데이터 주권문제는 AI 시대 주도권과 관련이 있다. 


  정부가 미래의 핵심 먹거리와 관련이 있는 문제를 방치하는 이유의 바탕에는 윤석열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세계 인식과 외교 행보가 있다. 라인사태를 지휘하는 총무성의 배후에는 일본의 우익들이 도사리고 있다. 일본 우익들의 이데올로기는 전범국가 일본을 지휘하던 전범들의 그것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규범에 의한 질서를 내세우며 한미일 공조체제를 바탕으로 가치 동맹을 통해 글로벌 중추국가가 되겠다고 외치는 윤석열 정부의 세계 전략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는 라인사태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일본은 지금 가치외교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침략 외교를 하고 있다.


일본 우익은 두 가지 이념적 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서구를 표준 모델로 삼고 자신을 서구의 일원이라 간주하며 다른 아시아 국민들을 멸시하는 인종주의이다. 다른 하나는 아시아 국가들을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힘을 사용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군사주의적 성향을 띈다는 점이다. 라인 사태는 일본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동북아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엿보는 가늠자이다.


일본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안보문제를 핑계로 힘으로 기업을 강탈하는 군사주의적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식민지 시대부터 축적되어온 인종주의적 혐한론이 깔려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개인정보가 넘어가면 악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인종주의적 사고가 이 일을 추진한 그들의 논리의 핵심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그렇 수 있는 있는 국가이다.


일본에 있는 구글도 개인정보는 늘 수집한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 기업에게는 그런 혐의를 씌우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이 전범 국가일 때부터 가져오던 식민주의적 습성이다. 일본 우익들은 여전히 그런 습성을 가지고 있고, 그런 우익들이 지금의 총무성을 지휘하고 있고, 총무성은 라인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 지금 일본은 윤석열 정부와 가치연대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과 가치 동맹이라고 외치고 있는 사이에 일본은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제국주의 일본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조국 대표가 독도를 방문하자 일본 외무성은 “국제법상 일본 고유영토”라고 한국 정부에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요청했다. 윤석열 정부가 “반일프레임은 국익을 훼손”한다고 말 한 그날이었다. 확실히 윤대통령이 말한대로 윤정부는 기시다 정부의 좋은 친구이다.


“늑대에게 완전한 자유는 양들의 죽음이다”라고 한 영국 평론가가 말했다. 늑대의 시간이 결국 다시 왔다. 그러나 늑대를 지키는 우리 정부는 양떼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들을 국익에 반하는 반일감정이라고 나무라고 있다. 확실히 지금 정부는 늑대의 편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네이버 사태를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을 간접 체험하는 중이다.


김희교 위원은 현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