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헛다리 짚은 ‘파묘’, 쇠말뚝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강국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3-19 10:53
조회
481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파묘’ 제작진은 김덕영 감독에게 명절마다 한우선물세트를 보내야 한다. 그가 좌파 어쩌구 저쩌구 흰소리를 한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파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권좌에서 쫓겨난다고 외국으로 도망간 한민족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권력자였던 이승만을 오구오구 하는 뇌구조를 가진 분이 비난하는 영화라면 틀림없이 괜찮은 영화일 테니까. 그런 연유로 우리 가족도 오랜만에 주말에 극장에 갔다.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고 싶다. “재미있는 영화 소개해줘서 고맙습니다.”


‘파묘’를 본 감상을 말한다면, 충분히 눈을 즐겁게 하는 영화였다. 천만영화가 될만한 자격을 갖췄다고나 할까. 물론 아쉬운 대목도 여럿 있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근엄과 진지라는 함정 옆으로 위태롭게 발을 들이미는 느낌이었다. 특히 ‘쇠말뚝’ 얘기는 다분히 헛다리였다는 게 솔직한 감상평이다.


영화 첫장면을 보자. 주인공이 미국으로 가는 여객기에서 스튜어디스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눈다. 십중팔구 그 여객기는 일본 항공사 소속일텐데, 일본인 스튜어디스가 일본어로 서비스하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주인공은 맥락도 없고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저 한국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스튜어디스는 ‘아 그러세요(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사실 영화를 시작하자마자 감독의 속내를 너무 일찍 들켰고, 또한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약점 역시 노출해 버렸다.


쇠말뚝은 참 오래된 얘깃거리다. 어떤 이들에게 쇠말뚝은 일제강점기의 비극과 분노를 떠올리게 하는 반면, 어떤 이들에겐 감정에 휘둘린 반일감정이라는 허깨비를 보여주는 소재일 뿐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짚어보자. 일제가 박은 쇠말뚝? ‘파묘’에서도 분명히 언급하지만 그 쇠말뚝 가운데 99%는 가짜다. 그럼 나머지 1%는? 그냥 허깨비다.


일본이 한반도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단다. 애초에 쇠말뚝 몇 개 박는다고 수천년 이어온 민족의 정기가 끊어진다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지만 뭐 그렇다고 치자. 만약 일제가 진지하게 쇠말뚝을 박아야 했다면 둘 중 하나겠다. 몰래 했거나 대놓고 했거나. 둘 다 말이 안된다. 몰래? 한반도를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 뭐하러 숨어서 민족정기를 끊는단 말인가.


대놓고 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기는 매한가지다. 대놓고 했다면 그에 따른 예산과 인력을 들였을 텐데. 그런 기록이 없다. 동네방네 조선의 정기를 끊었다고 자랑하고 신문에도 싣고 방송도 해야 모욕감을 줄 수 있을텐데 그런 기록은 하나도 없다. 쇠말뚝 박는데 참여했다는 친일파가 단 한 명도 없고, 자발적으로 쇠말뚝 박아서 칭찬들었다는 사람도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풍수에 입각해 민족정기를 끊는다면 뭐하러 좀스럽게 쇠말뚝을 박는단 말인가. 그냥 다이너마이트로 산을 폭파시키거나 바위를 깨버리는 게 훨씬 더 확실한데 말이다. 민족정기가 용솟음쳐 특정 마을이나 지역에 독립운동 지도자가 나온다? 그냥 그 마을을 모조리 파괴해 버리고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게 효과적인 것 아닌가? 


사실 쇠말뚝 소동에 대해선 이미 1999년 역사학자 이이화가 <이이화의 역사풍속기행>(역사비평)에서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그는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산수의 기를 꺾어 인물 배출을 막으려고 산마루 등 요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말이 있지만, (중략) 이는 그들이 지도 작성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를 삼았던 것”이라고 꼬집었는데, 한마디로 일제의 풍수침략이라는 쇠말뚝은 헛소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지리산 옥녀봉서 또 '일제 쇠말뚝' : 경향신문 2005년 6월 26일 기사


산에 오르는 걸 참 좋아한다. 가장 자주 가는 산은 수락산-불암산인데 둘 다 바위산이고 제법 험한 구간이 있다. 안전을 위해 계단도 있고 줄도 걸려 있다. 그 줄을 연결하기 위해 관공서는 무얼 했을까? 쇠말뚝을 박았다. 바위가 워낙 가파른 곳에는 디딤판으로 쓰도록 관공서에선 무얼 했을까? 쇠말뚝을 박았다. 쇠말뚝에 흥분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쇠말뚝을 밟고 잡고 산에 올랐다는 건 왜 기억을 못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곳곳에 쇠말뚝이 박혀 있는데, 그 덕에 대한민국이 물이 마르고 인재가 말라서 국운이 쇠퇴하기라도 했나? 백두대간 곳곳에 송전탑이 솟아있는데 송전탑을 세울 때는 민족정기를 지키기 위해 나무 말뚝을 쓴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고, 송전탑 때문에 국운이 쇠퇴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쇠말뚝’은 존재한다. 민족의 정기를 반토막내고, ‘호랑이의 허리를 끊는’ 쇠말뚝은 분명히 한반도의 허리에 박혀 있다. 그것도 아주 촘촘하게 155마일에 걸쳐 있다. ‘파묘’가 1000만 관객을 향해 흥행을 이어가고 그 덕분에 쇠말뚝이 다시한번 국민들 입에 오르내리는 속에서도 도깨비불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한반도 허리를 끊고 한민족 정기를 누르고 있는 쇠말뚝, 휴전선을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파묘’에서 가장 씁쓸한 건 진짜 쇠말뚝은 외면한 채 그저 일본만 비난하며 손쉽게 끝내버린 선무당 사람잡기가 아닐까 싶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