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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시대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김희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1-10 08:42
조회
451

김희교 / 인권연대 운영위원


<故 이선균씨의 빈소> 사진: 매일신문


 배우 이선균이 죽었다. 법적인 사인은 자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에서 시작됐다. 경찰은 그를 마약범으로 단정한 채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사회적 인격 살해에 앞장섰다. 언론은 그를 마약범으로 단정한 채 대중에게 내던져 인격살해에 공조했다. 대중들은 어느 순간부터 ‘공인’들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사회적으로 죽어도 되는 존재로 취급 하는 혐오주의에 빠져있다. 혐오주의에 빠져 있는 대중과 혐오주의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권력기관들이 이선균을 죽음으로 몰았다.


사진: 한겨레


 이재명 대표가 피격 당했다. 어떤 자들에게 배우 이선균이 죽어도 되는 존재였다면, 살해미수범에게 이재명 대표는 죽어야 하는 존재였다. 살해미수범이 말하는 이재명 대표를 살해해야하는 이유들은 당연히 매우 병적이다. 그러나 그 병은 단독범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질환이 아니라 정치적 테러범들이 가지는 혐오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혐오는 사람을 마음속에서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악을 차별하고 증오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그런 혐오가 집단화되어 나타나면 혐오주의라 부를 수 있다. 혐오주의가 권력과 결탁되어 구조화되면 혐오 사회라 부를 수 있다. 두 사건은 모두 권력집단들이 직간접적으로 결탁되어 있거나 네트워크화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아직 대중들이 혐오권력에 완전히 포섭된 상황은 아니기에 혐오사회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권력기관이 혐오를 조장하고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혐오시대가 열린 것은 분명하다.


 이선균 배우와 이재명 대표는 전형적인 혐오 시대의 피해자들이다. 혐오주의는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도덕적 절대주의이다. 혐오주의자들은 늘 그들 기준대로 선한 편과 악한 편을 가른다. 반대편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적 도덕관을 적용한다. 배우 이선균에게는 ‘공인’이라는 도덕적 기준을 내세웠다. 우습게도 ‘공인’이라는 절대적 도덕 기준은 실정법보다도 더 상위에서 작동한다. 경찰은 그가 ‘공인’이라는 이유로 혐의만으로도 실정법 조차 무시하고 조리돌림 할 수 있고, 언론은 ‘공인’에게 적용되는 알 권리를 내세워 사생활까지 무참하게 짓밟았다. 대중들은 존재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까지 알권리로 착각하고 그들의 가족까지 무자비하게 조롱했다.


 야당 대표 이재명에게는 늘 누구보다도 강하게 ‘진보주의자’라는 도덕적 절대기준이 적용되어왔다. 진보주의자들조차 그에게 없다고 주장해 온 ‘싸가지’는 살인범보다 더 가혹하게 사회적 매장의 빌미로 작동했다. 도덕적 절대기준이 횡행하는 혐오주의 사회에서는 ‘싸가지’가 없다는 규정 하나만으로도 쉽게 누구든 사회적 죽음을 몰고 갈 수 있다. 당연히 누구라도 ‘싸가지’까지 있으면 좋다. 그러나 싸가지까지 있는 진보주의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가 ‘싸가지’를 규정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개 그런 것들은 권력자들이 규정하고 대중은 따라간다.


 이재명 대표가 혐오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의외로 조용하다. 왜일까? 이재명 대표는 누군가에게는 이미 ‘싸가지’가 없어 죽어야할 존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사회적 살해는 끊임없이 자행되어 왔고, 결국 물리적 살해까지 시도된 것이다. 살해 기도 이후 권력자의 태도에서도 그런 혐오주의는 쉽게 드러난다. 경찰은 야당대표 살해미수사건을 몇 만원 관련된 이재명 대표의 법인카드보다도 조심스럽게 수사하고 있다. 언론은 살해까지 기도되는 배경에는 관심이 없고 “헬기 특혜”니 “부산 차별”이니 하는 아젠다를 만들어 혐오 프레임을 작동시키는데 열중하고 있다. 한동훈 위원장이었다면 그랬을까? 혐오 프레임에 갖힌 혐오사회의 대중들에게 헬기 한번 타는 “특혜”는 혐오의 대상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젠다가 된다.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상대가 나쁘기만 하면 된다.


어느 시대나 편견이나 증오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늘 증오범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매개체가 필요하다. 브라이언 레빈 증오극단주의 연구소 소장은 편견이나 혐오적 표현이 증오범죄로 이어지는 촉매제는 대개 정치인과 같은 권력이 개입할 경우라고 밝히고 있다. 정치권력과 결탁된 증오범죄는 혐오시대를 열게 된다. 트럼프 시대 이후 극우들의 전략으로 등장한 것이 혐오주의이다. 혐오주의는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후 갈 곳을 몰라 헤매던 반공주의자들이 찾아낸 대체품이었다. 지금 한국에서도 그런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그들의 무기가 반공주의였다면 지금 그들의 무기는 혐오주의이다.


 물론 지금의 정치권력이 이재명 대표의 살해를 직접 교사했다는 증거는 아직 아무 것도 없다. 그럴 가능성 또한 많아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권력이 레빈이 지적한 혐오사회를 여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검찰은 이재명대표의 범죄를 기정사실화하고 끊임없이 압수수색을 했다. 이재명 대표가 적어도 사회적 살해를 당할 때까지 계속할 모양새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야당대표와 회담을 하지 않았다. 이재명 대표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인 한동훈 위원장이 위원장을 맡으면서 내놓은 일성은 야당공격이었다. 그의 임무는 당의 비상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당에 대한 혐오를 키우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권력자들의 행동은 카롤린 엠케가 『혐오사회』에서 주장한 대로 대중들을 동원하는 하나의 기표로 작동한다. 권력자들의 끊임없는 적대적 행위는 혐오시대를 연다. 혐오시대에 혐오의 대상은 누군가에 의해 쉽게 죽어야 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국승민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시기 트럼프대통령이 중국을 비난하는 트윗을 한번 올릴 때마다 인종차별적 트윗은 20%가 올랐고,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범죄는 8%가 증가했다.


 권력자들의 혐오주의 전략은 끝내 이재명 대표를 감옥으로 보내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결코 아니다. 맹목적 우군인 혐오 세력을 키우는데 성공할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당장 다음 주에 민주당을 탈당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자칭 ‘진보주의자’인 한 정치인의 탈당 변을 보더라도 이런 사실은 충분히 드러난다. 그의 출마의 변 대부분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이재명 대표에 대한 혐오주의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혐오주의는 보수주의의 신의 한 수 인 셈이다.


 윤석열 정부의 등장은 아직 도덕의 시대가 오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선출된 권력의 힘을 너무 과신했다.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면 민주주의는 꽃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야만 권력은 30년간 쌓아온 민주주의의 토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릴 만큼 강고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군부가 합법을 가장하여 국정을 농단하기 위해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던 시대의 권력구조는 여전히 강건하게 남아있다. 그때가 군부였다면 지금은 검찰일 뿐이다. 검찰권력만 살아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재벌은 그 버릇을 못 고치고 검찰권력의 손아귀에 있고, 언론은 군부의 하수인에서 검찰의 하수인으로 변신했다. 군부와 손잡았던 미국은 이제 검찰권력과 손잡고 동아시아의 신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다. 그런 권력들이 여전히 대중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그들의 권력을 지키고 있다. 그때 사용했던 무기가 반공주의였다면 지금은 혐오주의이다.


 혐오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식민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주의는 도덕률이나 공동체의 발전보다 자신보다 더 큰 힘을 숭상하는 식민성과 불평등한 국가간 체제인 식민체제로 구성된다. 아직 우리는 식민주의를 결코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지금의 권력자들은 매일 미국과 일본이라는 더 큰 권력이 자신을 비호하고 있음을 선전하고 있다.


 이선균 배우를 수사한 경찰의 태도는 공정한 수사라기보다 과시적 수사였다. 더 큰 권력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사였다. 이재명 대표 살해미수범의 확신은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정치적 만족을 얻고자하는 큰 권력의 네트워크에서 학습된 혐오이다. 그 권력의 윗자락에는 세상을 여전히 적과 우리로 나누고 신냉전을 지향하는 신식민주의적 체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여기는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다.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다. 미국의 반인종주의자 아히브람 X 켄디는 반인종주의자를 정의하면서 ‘반인종주의자는 나는 반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종주의와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야만 권력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혐오주의에 빠져들게 아니라 혐오주의를 넘어 야만권력과 싸울 우리들의 무기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눈 앞의 대상은 비도덕주의자들이 아니라 혐오시대를 만들어 다시 죽음의 행진을 만들고 있는 정치권력이다.


이번 총선은 큰 싸움의 방향타가 될 것이다. 부디 총선 전까지만이라도 누구의 싸가지를 말하기보다는 야만 권력의 회귀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를 더 많이 말하자. 누구의 싸가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권력자들이 밤낮없이 말하고 있다. 우리까지 거기에 힘을 보태는 어리석음은 당분간만이라도 사양하자. 힘을 결집하자. 내부에 도덕적 절대주의를 들이대며 서로 분열하지 말자. 어떻게 야만권력에 저항할 것인가를 더 이야기하자. 권력자들과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과 싸우자. 지금은 하나되어 야만권력과 싸울 시기이다.


김희교 위원은 현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