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윤석열과 한동훈과 신(新)하나회(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6-29 15:27
조회
1252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의 검찰 특수라인은 21세기의 하나회다. 총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이 하나회 멤버를 요직에 기용했듯이 수사로 정권을 잡은 윤석열은 검찰 특수라인을 요직에 앉혔다. 검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특권집단이지만 그 안에서도 특수통은 소수의 이너써클이 된 지 오래다. 친한 선후배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대다수 보통 검사들에겐 ‘넘사벽’ 같은 존재가 되었다. 특히 윤석열과의 사적 인연이 있었는지가 요직 임명의 중요한 기준이 되면서 윤석열의 특수라인은 사조직처럼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전두환 정권이 군사정권이자 하나회 정권이었다면 윤석열 정권은 검사정권이자 특수라인 정권이다.


 검찰 특수통은 21세기 하나회


 신(新)하나회의 황태자 한동훈은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 겸 민정수석 겸 인사수석으로 4개의 요직을 겸하게 됐다. 문재인 정부 법무부 장관이었던 추미애를 “일개 장관”이라고 폄훼하던 ‘한동훈 맞춤형’ 직제 통폐합이다. 인사이동이 끝난 상태에서 누가 검찰총장이 되든 한동훈의 검찰 직할 통치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정의의 사도처럼 떠들던 검사들은 법무장관의 직할 통치에 대하여 흔한 격문 하나 내지 않는다. 격문은커녕 낯뜨거운 아부성 댓글로 충성경쟁을 벌인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조직을 사랑한다는 윤석열의 다짐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후배 검사들은, 이제 사람에 대한 충성과 조직에 대한 사랑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의 부하가 아니”라며 맨 앞에서 싸워주던 골목대장이 대통령이 되자 (몇몇 예외는 있겠지만) 거의 모든 검사가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부하가 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특수라인이 아닌 다수의 검사가 소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만, 밖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조직 내에서의 출세뿐 아니라 퇴직 이후 밥벌이가 걸린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이라는 사람에 대한 충성과 검찰 조직에 대한 충성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야쿠자처럼 무릎 꿇고 외쳤던 하나회의 제1호 맹세-하나, 국가와 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에서 단어 하나만 바꾸면 검찰의 구호가 된다. 검사가 나라를 지키고 이끌어간다는 환상은 전두환 시대 엘리트 군인들의 그것과 판박이다.


 이들이 부르짖었던 검찰의 독립과 중립이란 검찰을 개혁하려는 비검찰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중립이었음을 검사들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검사 순혈주의와 조직이기주의, 반개혁적 정념과 엘리트주의의 절정에 윤석열 정권이 있다.


 선수가 된 심판


 검찰이 보수여당의 ‘히든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비밀이다. 여의도에 즐비한 검찰출신 의원들은 사건과 의혹을 프레임대로 키우는 핑퐁게임의 훌륭한 파트너였다. 그래도 그때는 아닌 척 시치미라도 뗄 수 있었다. 둘 사이 내통의 비밀이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검사 출신 주광덕 국민의힘 의원의 ‘조민 생활기록부 불법 유출 사건’처럼 끝내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망각 속에 묻히는 사건이 대부분이다. 이른바 고발사주 사건은 재수가 없어서 밟힌 꼬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검찰은 이제 비공식적 정치집단이 아니다. 검찰출신의 정치인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운동장에서 뛰어야 하는 선수 같은 신세가 되었다. 정권과 검찰이 한 몸이 된 검사정권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형용모순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검찰의 중대한 사회적 기능이다. 거의 모든 중요한 쟁점이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법과잉(정치결핍)의 나라에서 검찰은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1차적 권한을 독점해 왔다. 특히 언론의 보도가 검찰의 수사와 기소 절차에 집중돼 있어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여론형성 능력을 검찰은 갖고 있다. 유죄 입증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는 조직의 일방적인 정보가 진실처럼 유포되고 언론을 통해 증폭됨으로써 피의자의 인권과 방어권이 무참히 짓밟힐 수밖에 없다는 점이 현재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의 치명적 결함이다. 이런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부분의 선진국은 검찰의 권한을 분산하고 있으며, 이것이 검찰개혁의 최종 목표였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검찰개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한국 검찰은 정치권력까지 거머쥔 리바이어던이 되었다.


 수사로 사실을 밝혀 기소를 통해 정의를 세우는 사회적 기능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심판의 역할이다. 검사 출신 대통령과 최측근 법무장관이 직할 통치하는 검찰이 공정한 심판이 될 수 있을까. 검찰의 직무를 통한 행위로 인기를 얻은 사람이 휴지기 없이 바로 대통령이 된 사실 자체만으로 검찰은 공정한 심판의 자격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부러 검찰총장을 비워놓고 법무장관이 직접 인사를 해버리는데도 조용히 따르는 검찰이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할 것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출처 - 한겨레


 검찰총장 인선 패싱하는 까닭


 윤석열과 한동훈이 검찰총장 인선을 ‘패싱’하고 검찰 인사부터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형적인 인사는 검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시스템 파괴 행위일 뿐 아니라 법치를 인치로 대체하는 후진적인 행태다. 더구나 한동훈이 평소에 입만 열면 강조하는 “what it looks(어떻게 보이는지)”를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여서 더욱 의구심이 든다. 윤석열 본인처럼 검찰총장이 자기 정치를 할까 두려워서는 아닐 것이다. 정권 초기인 데다 그럴만한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친검정부에서 대통령과 각을 세웠던 검찰총장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총장 인선에 한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리는 걸 고려하면 한시가 급하기 때문 아닐까. 정권 핵심부는 짐짓 지지율에 초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황망할 것이다. 사상 초유의 반토막 지지율로 국정을 시작한 초조감이 이들을 무리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손봐줄 “나쁜 놈들”을 고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수사의 속성상 틀을 잡고 타깃을 고르는 일은 초기에 이뤄지므로 이에 직접 관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자기들이 가장 잘 하는 일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것이다. 지지층의 염원에 보답하는 길이요 최악의 지지율을 반등시킬 호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촛불항쟁의 결과로 이어졌던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수사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크게 다르다는 점을 이들이 알지 모르겠다.


검찰 브라더의 정의사회 구현 의지


 “나쁜 놈들 잘 잡으면 된다”는 한동훈의 발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전두환과 민주정의당의 모토였던 ‘정의사회 구현’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한 세력이 정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초현실적 살풍경이 검사정권에서도 재연되는 것인가.


 한동훈의 ‘나쁜 놈들’ 발언은 윤석열 정권의 ‘정의 독트린’이다. 나쁜 놈을 고르는 기준은 윤석열과 한동훈이 정한다. 검찰은 나쁜 놈을 잡는 게 아니라 나쁜 놈을 고른다. 검찰에 밉보이면 잡고 잘 보이면 봐준다. 같은 편이면 뭉개고 다른 편이면 파헤친다. 따로 예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례가 수두룩하다. 조국 딸의 표창장은 반부패수사부가 나서야 할 중대범죄이지만, 정호영 보건지부 장관 후보자의 딸과 아들이 정 후보자가 병원장으로 있던 대학에 편입학한 의혹은 수사조차 하지 않는다.


 나쁜 놈들의 범주에 한동훈의 ‘카톡 절친’ 김건희와 김건희의 어머니 최은순이 들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법무부 장관 임명 직전에 채널A 검언유착 사건과 관련한 한동훈 본인의 혐의를 셀프 무혐의 처분했듯이, 김건희와 최은순의 각종 혐의들도 모두 무혐의가 될 것이다. 무혐의 처분은 법원의 판결문처럼 세세히 밝힐 필요도 없어 편리하다. 검찰이 혐의가 없다면 그냥 없는 것이 된다. 검찰의 말이 곧 법인 검찰독재의 나라다.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론>은 ‘정의로움에 대하여(peri tou dikaiou)’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사람이 모여 사는 데 국가가 필요하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기술이 정치이며, 정치의 본질은 정의가 무엇인지 밝히는 윤리학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정의는 국가의 존립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다.


 정의와 관련해 가장 많이 논하는 주제가 불편부당함과 자의의 금지다. 둘 다 한국 검찰이 항상 실패하는 지점이다. 니체는 여기에 하나의 미덕을 추가하는데 그게 바로 객관성이다. 한동훈 스스로 중요하다고 말해놓고 이미 대놓고 위반하고 있는 ‘what it looks’(어떻게 보이는지)와 관련 있는 덕목이다. 검찰의 실패가 검사정권에서도 이어진다면 검사정권의 몰락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또한번 혼란과 갈등의 늪으로 빠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정의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