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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과 특별, 그 사이 어디쯤: 어떤 여자의 한평생(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12-08 16:53
조회
1147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길씨는 1937년 수원에서 오남매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가 하나, 오빠가 둘이 있었고 6년 후 여동생이 태어났다.


 윤씨 성을 가진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정자(貞子)’라고 지으려 했다.
 그런데 면사무소 서기가 딸에게 왜 ‘아들 자(子)’ 자를 붙이느냐며 ‘길할 길(吉)’ 자가 어떠냐 제안했다. 그렇게 출생신고 중 이름이 정길(貞吉)이가 되어버렸다. 남자 이름 같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모나지 않은 정길씨는 그게 뭐 어떠냐며 자랐다.


 열세 살 때 전쟁이 났다. 온통 뒤숭숭했다.
 아군이라지만, 마을에 미군이 들어오면 젊은 처자들은 장롱이든 어디든 집안 제일 깊숙한 곳으로 꼭꼭 숨었다. 미군이 젊은 여자에게 몹쓸 짓 한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정길씨도 무서워 장롱 속에 숨었다. 미군이 물러갔다. 그런데도 정길씨는, 동시대 사람들이 그렇듯,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미국이 없으면 한국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성실하고 얼굴도 반듯하고 공부도 잘했던 고등학생 정길씨는 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아들)도 대학을 못 보냈는데 셋째(딸)가 대학이라니 안 된다고 손사래 쳤다. 담임교사가 집까지 찾아와 정길이는 대학에 보내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으나, 부모는 어렵다며 반대했다. 정길씨는 대학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 (그래서일까, 나중에 자식들이 죄다 대학원 가겠다고 했을 때도 부담스러운 내색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 스물두 살 때 다섯 살 위 수원 남자와 결혼했다. 마당이 널찍했고 한켠에는 벽돌식 이 층 건물이 있는, 제법 큰 집의 장남이었다. 집안이 괜찮다는 소리를 정길씨도 몇 차례 들은 바 있었다. 시어머니 자리가 결핵을 앓고 있어서 고생스럽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우려도 있었지만, 남자가 나름 괜찮았고, 양쪽 집안에서 얘기도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혼인의 길로 들어섰다.


 정길씨를 기다린 건 시집살이였다. 시어머니가 환자인 것은 이미 알았지만, 환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깐깐했다. 큰 집 살림 뒤치다꺼리는 정길씨 몫이었지만, 으레 그래야 하는 거려니 했다. 말기 결핵 환자인 시어머니 입에서 피까지 받아내며 정성껏 간호했다.


 결혼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아이 키우며 시부모와 남편을 봉양했고, 둘째 아들도 보았다. 첫째에 이어 둘째도 아들이라고 시어머니가 좋아했다. 그 시어머니는 결혼 후 6년쯤 뒤에 타계했다.


 시원섭섭할 새도 없었다. 세무서 근무하던 시아버지가 간장 공장을 해보겠다며 사업에 나섰다가 전 재산을 탕진했다.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는 사건이었다.


 그즈음 수원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남편이 산림 공무원이 되는 바람에 서울로 이사했다. 방 두 칸, 부엌 하나가 딸린 종암동 전셋집이었다.


 전 재산을 날리고도 며느리 앞에서 아들 뺨을 때릴 정도로 당당하던 시아버지가 몸뚱어리 하나만 가지고 정길씨네 전셋집으로 찾아 들어왔다. 성실한 정길씨는 시아버지를 환영했고, 그 뒤 딱히 하는 일 없는 시아버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22년여 모시고 살았다.


 서울에서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번에는 은근히 딸이기를 바랐는데 또 아들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길씨는 성실하면서 억척스럽기도 했다.
 공무원 남편의 박봉 월급을 관리하며 전세살이 4년 만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1960년대 후반 월곡동에 들어서기 시작한 8평짜리 서민아파트였다. 각층에 공중화장실이 있는 아파트였다. 그래도 내 집이니 좋았다. 직장을 찾아 상경한 남편의 제자까지 들여, 좁은 집에 일곱 식구가 복닥거리며 여러 달을 지내기도 했다.


 예전 기억 때문이었을까, 기왕이면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잠실이냐 상계동이냐 고민하다가, 남편 직장이 있는 청량리까지 버스 한 번에 갈 수 있는 상계동을 선택했다. 훗날 자식들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했다며 웃으며 투덜대곤 했다.


 아이들은 커가는데 공무원 남편 월급은 내내 박봉이라 정길씨도 돈벌이에 나섰다.
 양손에 큰 가방을 들고 상계동 달동네를 가가호호 다녔다. 화장품 방문판매사원이었다. 수금해온 돈이 모두 엄마 몫인 줄 알던 자식들은 ‘오늘도 엄마가 돈 많이 벌었다’며 흐뭇해했다. 정길씨는 그저 웃었다. 화장품 판매사원으로 삼사 년 정도 지냈다. 정길씨는 훗날 ‘아모레 가방’을 들던 시절을 즐겁게 회상하곤 했다.


 정길씨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병중에 기독교인이 되신 시어머니가 가족 모두 교회 나가면 좋겠다며 남긴 유언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서울로 이사 오자마자 바로 근처 교회를 찾았고, 그 뒤 이곳저곳으로 이사 다니면서도 교회를 떠나거나 예배를 거른 적이 없었다. 그 영향으로 자식들도 어렸을 적부터 교회 분위기, 기독교적 세계관에 익숙해졌다. 정길씨는 무엇에든 열심인 데다 현명하기도 해서 교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많이 했다.


 성실한 기질에 신앙까지 가미되면서 정길씨는 이 정도면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입맛 까다롭고 무정한 남편에 대한 푸념을 자식들에게 늘어놓기도 했지만, 남편이 정말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더 컸다.


 정길씨는 누구를, 무엇을 딱히 싫어하거나 하지 않았다.
 좋지 않을 어떤 일을 맞닥뜨려도 딱히 ‘싫다’며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무언가 집안에 벌어진 어려운 일은 자신이 지고 가면 된다는 긍정적인 정서가 컸다.


 정길씨는 현명하고 꾸준했다.
 집도 한 칸씩 한 칸씩 늘려갔다. 이사할 때마다 마당도 건물도 조금씩 커졌다. 40대 중반에 상계동에서 50여 평 되는 마당집을 마련한 뒤 내내 그 집에서 살았다.


 정길씨는 자식 자랑을 자주 했다.
 아들들이 알아서 공부도 잘하고 부모 속 안 썩여서 행복하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오십에 큰 며느리를 본 이후 둘째, 셋째에 이르기까지 며느리들 모두 착해서 좋다고 그랬다. 한 아들에 둘씩 손주 여섯을 두었는데, 온 식구라도 모이면 아들 며느리 앞에서 손주 자랑을 했다. 그런 말 너무 마시라는 자식들의 말은 잘 듣지 않았다. 소소하나마 자식에게 문제가 있어도 특히 남들에게는 자식들 좋은 얘기를 주로 했다. 설령 속으로는 불편한 느낌이 있었어도, 싫어하는 것이 일부 있었어도,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 뭐든 딱히 거절할 정도로 싫은 것이 없었다. 할 수 있으면 자신이 감당하면 된다 생각했고 무엇에든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


 정길씨의 팔자였는지, 남편도 몸이 약한 편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다. 시어머니에게 이골이 났을 법도 했지만, 남편의 뒷수발도 정길씨 몫이었다. 그래도 정길씨는 남편이 병치레를 하면서도 평생 공무원으로 큰 탈 없이 지낸 데 대해 감사했다. 남편이 술을 줄였으면 좋겠다고 푸념하면서도 식사 때는 남편을 위해 늘 술과 반주거리를 대령했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정길씨는 늙도록, 아니 늙을수록 남편 뒷바라지하는 데 활동의 대부분을 쏟아부었다.
 정길씨의 사회적 능력과 개인적 역량을 집안에 가두어버린 남편이 불만스럽지 않냐는 주변의 핀잔도 있었지만, 정길씨는 그게 자신의 몫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정길씨는 평생을 가족, 특히 남편 중심으로 살았다. ‘이 나이에 뭘’, ‘팔십 노인이 뭘...’ 하는 체념조의 말을 종종 했다.


 정길씨는 2018년 7월, 남편을 87세로 떠나보냈다.
 평생 몸고생을 시킨 남편이 없으니 일견 편안할 수도 있겠다는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정길씨는 인생의 중심이라도 잃은 냥 다소 무력해졌다. 전에는 남편의 행동거지나 까다로운 입맛을 두고 쓴소리도 하더니, 생전의 남편과 생활방식이 비슷해졌다. 심지어 입맛도 비슷해졌다. 생전에 남편은 먼지 들어온다며 창문을 꼭꼭 닫고, 정길씨는 답답하다며 문을 열자고 티격태격하기도 했는데, 남편이 죽자 정길씨도 문단속을 열심히 했다. 에어콘을 켤지언정 여름에도 거실 창문을 자꾸 닫았다. 남편을 먼저 보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을까, 남편과 운동 겸 다니던 산책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남편 입맛에 맞추던 음식 솜씨는 어디로 갔는지, 남편이 떠나자 식사는 대충 때우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늘 되뇌었다. 어렵게 사는 노인 이야기, 자식에게 용돈 받아 겨우 사는 친구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늘그막에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살 수 있도록 연금을 남겨준 남편을 매우 고마워했다. 그런 남편이 먼저 떠나 외롭고 때로는 무섭기도 하던 차에 외국 살던 큰아들이 코로나19를 피해 정길씨 집으로 들어오자 정길씨는 매우 든든해 했다.


 정길씨는 자다가 죽으면 제일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죽는 게 두렵지 않냐는 물음에 “전~혀 두렵지 않다”며 단호하고 여유 있게 답하곤 했다. 죽으면 자식들이 화장해서 남편 곁에 묻어주는 정도는 하지 않겠냐며 체념과 초탈 사이 어디쯤 되는 발언을 종종 했다. 집 한 채는 자식들이 서로 나눠 가지면 된다는 무덤덤한 말과 함께...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일요일 예배를 드리고, 노인반 모임도 하고, 다음 날에는 50년 지기 친구와 긴 통화도 하고, 저녁도 잘 먹고, 양치도 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방에 들어가 TV를 켜놓고, 방바닥에 누운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몸뚱어리만 남겨놓고 호흡을 거두었다. 2021년 11월 8일 자정 직전이었다. 병원에서는 심정지로 인한 사망이라고 진단했다.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특별한 삶을 혼자 마감했다.
 남들은 정길씨의 죽음이 복된 죽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그랬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