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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그리고 공공성 (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1:48
조회
362
며칠 전 한 중견기업의 시이오(CEO)를 만났다.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자금난에 빠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였다. 원래 몸집이 크던 사람인데 좀 작아진 듯 했고, 얼굴도 해쓱해졌다. 하지만 통 큰 목소리만은 여전히 우렁찼다. 욕설이 추임새처럼 감칠맛 나게 섞이는 말을 듣노라니 기분이 좀 풀리는 듯했다. 추임새를 빼고 옮겨보면 이런 것이다.

“우린 꿈을 잃어버린 사회에 살고 있어. 대학 나와서 꾸는 꿈이라는 게 고작 대기업에 취직하는 거잖아. 아스팔트를 뚫고 이제 겨우 싹을 틔우고 꽃 한 번 피우려는데…. ‘누구 아들’이 아니라고 이렇게 고생해야 하다니….”

실제로 그의 회사는 대기업들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자금난을 촉발한 소문의 근원지가 특정 기업과 관련이 있다는 풍문도 돌았다.

그는 30대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구멍가게 같은 회사를 차린 뒤 불과 몇 년 만에 상당한 규모의 기업을 일궜다. 요즘 보기 드문 창업주인 셈이다. 그는 스스로를 ‘천민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누구 아들’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마침 연말연시 신문 경제면에는 재벌 2, 3세들의 초고속 승진 소식이 무슨 연예계 기사처럼 실리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꿈을 잃어버린 사회’는 이미 ‘세팅’이 끝난 사회라는 뜻일 것이다. 꿈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세팅’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서울대 입학생 중 강남 출신의 비율이 높아진다는 뉴스가 전해진 게 엊그제 같은데, 올해 새로 임관하는 판사 중 강남 8학군과 외고 출신의 비율이 3분의 1이나 된다고 한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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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신문 경제면에는 재벌 2, 3세들의 초고속 승진 소식이 무슨 연예계 기사처럼 실리기도 했다.
왼쪽부터 박세창 금호아시아나 이사 / 정지이 현대유앤아이 전무 / 조원태 대한항공 상무   사진 출처 - 한겨레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2만 달러 시대 진입 등 화려한 구호가 넘쳐나는데 민초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 재벌 위주의 성장 탓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 이런 편중된 성장은 더 가속화할 것이다. 여기서 FTA가 가져올 후폭풍에 대해 근거를 대며 길게 늘어놓을 여유는 없다. 다만, 정부의 설명대로 시장이 커지고 기회가 늘어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건 부자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라는 사실은 짚고 싶다. 평생을 일해도 아파트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서민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닥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최대 과제는 편중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다. 해결의 열쇠는 ‘공공성’의 회복이다. 교육 문제도, 부동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학 입시를 완전히 내신으로 대체하는 건 어떤가. 공교육이 살아나고, 사교육은 죽을 것이다. 학교 안에서의 부정행위나 촌지 수수 등은 별도의 감시 장치로 해결하면 될 것이다. 사교육이 죽으면 강남 부동산 값도 크게 떨어질 것이다. 정부나 지자체가 개발하는 모든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임대방식으로만 분양하는 건 어떤가. 정부가 돈이 없어 민간에 맡겼던 과거의 개발 방식을 지금도 계속할 이유가 없다. 부작용이 없는 정책은 있을 수 없다.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해결할 의지만 있다면 부작용을 해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지구상에는 병원비가 공짜이고 주택은 나라에서 해결해주는 나라가 많다. 우리라고 그런 꿈을 꿀 권리가 없을까.
 

06041701.jpg서울 개포동에 위치한 국내 최대의 판자촌인 구룡마을에서 바라다 본 도곡동 타워팰리스의 모습.
강남의 부를 상징하는 타워팰리스와 구룡마을은 직선으로 1.3㎞ 거리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을 하면 몽상가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부세를 내야하는 사람이 전 국민의 2%에 불과한데도, ‘세금폭탄’이라는 부자들의 구호가 득세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홍세화가 말하는 ‘존재의 배반’ 현상이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정부를 비난하면서도 종부세를 반대하는 <조선일보>를 읽고, 한나라당을 지지한다. 부의 편중이 문제이니 부자들한테 세금을 제대로 걷어 사회복지에 쓰자고 하면 빨갱이라고 욕을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자동차 시무식 사태를 보자. 경영진은 수억원의 스톡옵션을 챙기면서도 몇 푼 안 되는 성과급으로 노조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게 사태의 원인이다. 지난해 비자금 문제가 터졌을 때 1조원을 사회에 헌납하겠다던 정몽구 회장의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그런데도 모든 비난은 노조에게 쏟아진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다. 자칫하다가는 더욱 가혹한 방식의 ‘세팅’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불법대선자금이 들통난 대가로 삼성이 만들었다는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른 기회를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고른 기회는 우리 서민들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자신의 존재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투표행위가 이뤄지길 빈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