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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교실에서 못 배우니 운동장이 가르쳐줍니다 (이지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3:48
조회
393
언 대지가 열어준 틈 사이를 비집고, 수줍게 돋아나는 새싹처럼 봄날의 아지랑이는 겨울을 이리저리 돌아 다시 나의 운동장에 내립니다.

섬진강변에 사는 시인으로부터 매화꽃 영그는 소식이며 동백 몽우리 맺히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지난 겨울초입부터 봄이 그리웠음을 알게 됩니다.

3월이 되면 개강(開講)과 동시에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상징하는 조건반사처럼 축구화 끈을 동여매게 되는데 그 기쁨을 나는 다시 맞는 새봄이 갖는 최대의 의미라 여깁니다.

우수(雨水), 경칩(驚蟄)이 지나면 대동강물만 풀리거나 개구리 말문만 트이는 것이 아닙니다.

 

070323web02.jpg섬진강을 뒤로한채 매화꽃이 피어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겨우내 한동안 뛰지 못해 굳은 허벅지도 풀고 분출구를 잃어버려 어디로 흘러야 할지도 모를 것 같은 이마의 땀샘도 트이게 합니다. 봄 햇살 화사하게 출렁이는 운동장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름들을 큰소리로 부르며 누비는 상쾌함은 남녘의 꽃 소식을 산책하는 어느 시인의 노래보다 더 익숙한 기쁨 입니다.

나는 한 대학의 교수 축구 팀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우리나라 국가 대표팀의 초라한 성적표를 보며, 가슴 졸여 응원하느니 우리가 뛰는 게 낫겠다는 다소 거만한(^^) 동기를 가지고 만든 팀입니다.

짐작컨대 축구공을 처음 만져보는 교수들이 반쯤 되고 젊은 날 20여년을 감옥에서 보낸 신영복 교수(경제학자, 철학자, 서예가)가 최고의 스트라이커였으니 그 수준을 얘기할 바는 못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아트사커”나 네덜란드의 “토틀사커”에 빗댄 “모럴사커”라는 신 장르를 만들고 실천하고 있으니 아주 막된 팀은 아닙니다.
“모럴사커-덕(德)의 축구”는 상대방이나 함께 뛰는 동료를 최대한 배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기위해 골을 넣은 이는 반드시 골키퍼를 해야 하고 킥오프를 할 때는 상대방에게 먼저 공을 차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어 무안하게 하지 않으며 자기편의 잘못을 힐난하지도 않습니다.

골을 넣는 기쁨도 있지만 골을 먹는 기쁨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공을 빼앗는 성취감도 있지만 공을 넘겨주는 여유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모럴사커”는 승부와는 별개의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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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 교수 축구회 회원들 모습
사진출처 - 경향신문




 승부의 관점에서 최고의 선은 상대방보다 골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사람은 적재적소에 배치가 되어야 하고 거기에 맞는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승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승리자를 위해 많은 다수가 희생당해야하는 숙명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리”라는 목표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 경기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승리자가 됩니다.

가끔은 외부에서 온 팀과 경기를 하게 됩니다.

서로 교분을 나눈 사이가 아니니 적당한 반칙 정도는 예사이고 공을 거칠게 다투는 과정에서 순간적 상황에 몹시 기분이 언짢을 때도 있습니다. 사실 나는 단 몇 푼이라도 깎아야 물건을 산 것 같은 포만감을 얻거나 지하철의 빈자리를 먼저 잡기위해 습관적으로 눈치를 굴릴 만큼 생활의 경쟁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승부의 틀에서 승리를 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굴러가는 공을 넓은 골대 안으로 차 넣기만 하면 되는 축구 같은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을 접어두는 건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와는 달리 “힘 있는 자가 상대방을 다치게 한다”는 운동장의 격언(?)을 되새기면 다시 평화(平和)란 서로에게 욕심이 없는 가장 평안한 상태라는 자각으로 돌아가게 되고 기꺼이 상대방의 득점에도 환한 웃음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승리인 “모럴사커-덕(德)의 축구-”의 미각(味覺)에 중독된 사람들은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축구모임을 무척이나 그리워합니다. 사실 지난겨울엔 내가 관여하고 있는 시민단체의 회의일정을 주로 수요일, 그것도 축구를 해야 할 시간에 잡는 바람에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릅니다.

벌써 한 몇 년 “모럴사커-덕(德)의 축구”와 함께 지내면서 축구가 내겐 가장 즐거운 놀이일 뿐만 아니라 교실이 가르쳐 주지 않는 실천적 사고의 장(場)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올봄 황사먼지를 뒤집어쓰고서라도 다시 축구화 끈을 묶습니다. 땀으로 엉기어 등줄기에서 떨어지지 않는 유니폼 위로 봄바람이 스칩니다.

참 시원 합니다.
참으로 시원 합니다.

이 글은 월간 축구가족 3월호에도 실립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