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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누굴 용서하고 있는가? (김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3:30
조회
336
4,373,499.
이것은 무슨 숫자일까?
참여정부 들어 대통령님의 은혜로운 사면으로 죄를 용서 받은 사람 숫자다. 참 많기도 하다.

이 숫자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가를 만천하에 공표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치로써 참으로 부끄럽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자동차운전 관련 사범 등 사소한 행정법규위반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흉악한 범죄자 집단은 아니다.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의 사소한 과오를 대통령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데 누가 이의를 달 수 있겠는가.
설득되지 않는 대통령의 사면 내용

그런데 이 숫자에는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자행한 파렴치한 범죄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통령님께서는 권력자와 재벌 등을 용서한 이유에 대해 ‘국민화합’ 또는 ‘경제 살리기’라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신다. 왜 그런데 나 같은 시골 대학의 촌뜨기 교수는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을 사면해주기 위해 그동안 사면대상에 선량한 국민을 곁다리로 끼워 놓은 것이라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일까.

진정한 국민화합을 위해서라면, 두산의 박용성, 쌍용의 김석원, 대상의 임창욱 같은 재계 거물들과 박지원, 권노갑, 김현철, 김홍일 같은 퇴물 정치인들은 사면에 포함시키면서 왜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은 포함이 안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몇 억 원, 몇 십억 원의 뇌물을 두꺼비처럼 넙죽 넙죽 받아먹은 거물급 권력자와 몇 백억 원씩의 회사 돈을 어린아이 사탕 먹듯 횡령하는 등의 부도덕하고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른 재벌들을 사면시켜주면 국민화합과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되고, 힘없는 노동자와 양심범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을 사면하면 국민화합과 경제 살리기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논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면이 군주국가 시대에 군주의 특권적 자비로 베풀어지면서 악용되는 폐해가 발생하자 근대 입헌국가에서는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면제도가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적 경사나 정치적 상황 변화 등에 따르는 필요성과 합리성을 이유로 대다수의 국가들은 현재 국가 원수의 사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고려할 때 개인적으로는 사면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낫다고까지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사면권의 행사가 자의(恣意)적으로 반복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운용된다면 사면제도를 둘 이유는 분명 없어 질 것이다.

 

7b1003d.jpg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번에도 참여정부는 툭하면 나오는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할 것인가. ‘진정성’을 믿어달라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그 진정성을 담보하는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그 진정성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참여정부 들어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김대중, 김영삼 정권보다도 더 많은 양심수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주관적 진정성과 정당성만으로 마지막까지 국민을 호도하려고 하는가.

참여정부의 순결한 정신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 등을 더욱 보호 대상으로 삼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평등권을 보장하여 주는 이념이 아니었던가. 재벌과 권력자 같은 집단은 사면권의 보호 대상이요, 노동자들은 이러한 집단과 달리 차별적으로 취급하는 머리 아픈 현실에서 어떻게 객관적 정당성을 믿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만인(萬人)이 아니라 만명(萬名)에게만 평등?

우리 헌법 제11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그런데 이번에 단행된 사면의 내용을 놓고 볼 때 우리 현실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의 정신은 혹시 만 명(萬名)에게만 평등한 법조항으로 바뀐 것은 아닌가. 18세기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는 근대 입헌국가의 지도원리가 되었고, 현대 국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념이지만 우리에게는 박제된 구호에 불과한 것일까.

두산 그룹의 박용성 회장이 286억 원을 횡령한 범죄에 대해 검찰은 불구속 기소를 하고, 법원은 경제에 기여한바가 크다고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대통령님께서는 경제 살리기를 위한다며 사면해주는 현실에서 어느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생각하겠는가.

물론 절대적으로 평등한 세상,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국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국민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법 앞의 평등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세계인권선언에 나와 있듯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 할 수 있겠는가.

사면 대상으로 풀려난 권노갑씨가 교도소를 나오면서 한 말은 더욱 가관이다. ‘정의는 승리한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전북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