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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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성서(요한복음 5,1-18)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예루살렘에 있는 ‘베짜타’라는 연못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따금씩 물이 휘도는 일이 있곤 했는데 그 때 제일 먼저 그 물에 몸을 담그면 어떤 병도 다 낫게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연못 주변에는 물이 휘도는 순간 먼저 뛰어들 태세로 온갖 병자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삼십팔 년이나 병을 앓아온 중증 환자도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며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내내 변방에서만 활동하던 예수가 어느 날 예루살렘이라는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올라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가 목격한 현장이 바로 저 베짜타 못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경쟁의 현장이었다. 베짜타 못가는 이른바 선착순의 논리에 따라 일등만 구원되는 곳.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밟아야 하는 곳, 저마다 남의 어깨를 딛고 일등을 향해 치닫지만 결국 자신은 물론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더 큰 아픔과 상처를 남겨줄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 삼십팔 년 된 병자도 언제일지 모를 그 막연한 일등을 꿈꾸며 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 하지만 늘 경쟁에서 밀렸다. 처절한 경쟁 사회에서 소외된 현대인의 자화상이라고나 할까. 그 처절한 현장이 예수의 눈에 들어왔다. 특히 그 오래 된 병자를 보고 예수가 물었다: “낫기를 원하느냐?” 병자가 답한다: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병자는 남이 먼저 연못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자신의 병이 낫지 못한다 생각했다. 자신이 먼저 들어간다면 자신 때문에 남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등을 지향하는 사회에서의 성공이란 누군가의 희생과 탈락을 근거로 해서만 성립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정말 예수다운 방식으로 그를 이렇게 구원한다: “일어나 네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어느 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들고 걸어갔다.” 일어나 요를 들고 걸어간다는 것은 그가 치유되었다는 증거이자, 자신을 격리시켰던 사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공개적 증거였다. 다소 비약처럼 느껴지는 이 간결한 대화와 치유의 사건이 말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치유란 경쟁사회에서 일등하는 방식이 아닌, 경쟁사회를 벗어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를 소외시키거나 낙오시키지 않고서 누군가를 치유하고 살리는 행위, 그것이 예수가 행했던 방식인 것이다. 물론 예수는 성서에 따르면 병을 고쳐주고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성인은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功成而不居)는 노자의 가르침과 통한다고나 할까. 이 예수는 누군가를 반드시 죄인으로 만들고 마는, 더 많은 이들을 낙오시키고는 소수만이 의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독점하는, 그러한 사회적 구조를 거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예수가 병자를 치유한 날이 ‘안식일’(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이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에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은, 율법이 정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밀가루 반죽과 설거지는 물론 글쓰기 같은 것도 거의 할 수 없는 날이었다. 노동을 피하고 그저 쉬는 날이었다. 물론 예수도 그러한 율법적 문화 안에서 태어나 살아간 이로서, 당연히 안식일을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문자화된 법적 규정 그대로가 아닌, 법의 ‘정신’을 지키고 실현하는 방식으로, 진정한 안식을 추구했다. 가령 예수가 보건대 병자에게 안식은 치유이고 굶주리는 이에게 안식은 한 끼 식사였다. 그러니 병자 치유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굶는 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기꺼이 노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안식일에 벌어진 그 치유 사건을 두고 당시 지도자들은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비판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예수를 사회적 관례와 질서의 교란자로 간주하고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성서는 이렇게 전한다: “이 때부터 유다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신다 하여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예수 시대 지도자들에게는 이상하게도 병자가 치유되는 살림과 생명의 사건보다는 예수가 규정과 관례를 어겼다는 사실만 크게 보였다. 고통스러운 병도 앓지 않고 굶을 일도 없던 풍요로운 사람들이었던 탓인지, 아픈 자, 굶는 자의 고통은 안중에 그다지 없었다. 관례적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은 그러한 규정을 관리하는 자신들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예수가 이른 나이에 십자가라는 처절한 사형 틀에서 죽게 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지난 13일, 14일 이틀 간 치러진 일제고사에서 학생들이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다. 이번 시험은 일반 초ㆍ중ㆍ고교, 자립형 사립고, 특수목적고, 전문계고 등 국가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모든 학교의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몇 일전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일제고사’(학업성취도평가)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학생들의 학력 수준을 파악하고 각종 문제점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전국의 학교와 학생들을 서열화할 뿐더러 일등을 향한 무한경쟁 체제를 강화시키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행사이기도 했다. 학업 성취도가 떨어진 학교나 학생을 지원해서 학교들 간, 학생들 간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라지만,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경쟁적 일등 지상주의에 다시 불을 붙여 더 많은 심리적 낙오자들을 만들게 될 가능성도 못지않게 큰일인 것도 분명했다. 외고나 자사고 같은 곳에 대한 지원이 일반고보다 세배 이상이나 많다는 며칠 전 뉴스 보도대로라면, 학교 간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계획과 의지도 의심스럽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일제고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서 대안적 체험학습이라도 떠날라치면 그 학습을 주도한 교사에 대한 징계도 대번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기독교 정신대로 세워졌다는 학교들도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체험학습을 떠나는 교사를 징계하기는 마찬가지이거나 때로는 더하기도 하다. 예수는 일등 지상주의를 거부했지만, 예수를 따른다는 기독교 학교도 일등 지상주의로 내몰기는 매한가지이거나 상대적으로 더 한 경우가 많다. 일착으로 연못에 들어간 날랜 행위만이 하느님의 축복인 냥 가르치기가 다반사이다. 만일 그러한 경쟁 지상주의에 반대했던 예수처럼 행동하면 죽거나 떨려나갈 수밖에 없기는 여전한 상황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평등 사회를 꿈꾸었던 예수의 선배 요한(루가복음 3,5-6)도 여전히 제 명에 못 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시 헤로데 왕의 실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참수당한 요한을 성인으로 모시고 그 말씀을 따른다면서도 정작 교회 안에서조차 그 요한의 정신은 실종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요한이 오늘 우리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여러 걸음 양보해 참수는 아니더라도 온갖 징계와 보복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예수와 요한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사형시켰듯이, 오늘 교회도 신앙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전히 무수한 죄인을 양산해 놓는다. 요한의 말을 기억하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리스도교인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예수를 따른다면서 경쟁 사회에서의 첫째를 하느님 앞에서의 첫째와 동일시하고 학교의 말째를 하느님 나라에서의 말째로 만들어놓을 수 있겠는가. 무수한 죄인들, 셀 수 없는 낙오자를 양산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이것저것 양보한다 해도, 학자적, 교육적 양심대로 한 일을 두고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이지 규정과 관례 운운하며 징계하고 정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33 | 추천: 0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9월 18일 한국노동연구원의 박기성 원장이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국무총리실 2008 회계연도 세입․세출결산」에 소관기관 배석자로 나와 “사석에서 노동3권을 헌법에서 빼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느냐”는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의 질문을 받자 “나는 그게 소신이다”라고 한 후 “개헌을 하면 (노동3권을 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사철 한나라당 의원이 무슨 취지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자 “다른 나라는 노동3권이 법률로 보장되면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질 수 있는데, 우리는 헌법적 권리여서 현실하고 어긋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9월 18일자 한겨례신문). 그의 전공이 경제학이긴 하지만, 그런 식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경제학자의 전형적 생각 혹은 올바른 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제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시장이라는 경제적 도구 외의 다른 것(예컨대 민주주의)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9월 18일자 신문에 나타난 위 해프닝은 시장 외의 것에는 무지한 경제학자 중 한 명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치명적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공 분야 외의 것에 대해서 무지한 것은 거의 모든 학자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이 전공이 세분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전공 분야에 대해서까지 잘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더 큰 잘못은 그가 자신의 직책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행동을 비유하자면, 마치 경제 관련 국책 연구기관의 원장이 우리 헌법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폐지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어느 학교의 교수이거나 경제학자에 불과하다면, 이런 말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이 노동정책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설립된 국책 연구기관의 수장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노동연구원이 중립적 시각에서 국가의 노동정책을 개선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행동은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연구원의 중립성을 훼손한 것으로서 매우 큰 과오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와 반대되는 일을 해야만 하는 한국노동연구원의 원장으로 부임하지 않는 것이 경제학자로서 올바른 태도였을 것이다. 그는 한국노동연구원의 원장으로 재직하다 임기를 마친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되지만, 그로 인하여 훼손된 한국노동연구원의 중립성은 남아 있는 구성원들이 오랫동안 치유해야 할 상처가 되고 말았다. 단체교섭 성실 이행을 촉구하며 8일 째 전면파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노동연구원 노동조합은 29일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정운찬 신임 총리는 한국노동연구원 사태를 즉각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러한 발언이 진실성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제헌 헌법 이래 한국 헌법에서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계속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사관계의 현실이 그러한 헌법적 규범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무지한 자들이 국가의 규범 체계를 비난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려 할 때에는 1차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그 정당성을 찾는다. 예컨대 폭력을 행하는 교사는 학생들을 규율하는 방법으로서 체벌(體罰)만을 떠올리고,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권력을 휘두른 경험을 가진 자들은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공권력의 확대나 민간인 사찰과 같은 과거의 도구만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법제화시키고자 노력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박기성 원장의 발언은 어느 정도 한국 노사관계에 관한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경험한 바와 같이, 한국 노사관계의 현실은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단결권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데도, 여전히 사업장에서의 복수 노조의 설립은 매우 어렵다. 공무원이나 교사의 단체교섭권이나 단체행동권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통합된 공무원 노동조합이 민주노총에 가입하려고 하는 행위마저도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의 힘으로 국책 연구기관의 원장에 취임한 자가 헌법의 노동3권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이렇게 현 정부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바람에 여당 국회의원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9월 18일의 해프닝은 노동정책에 관한 현 정부의 생각을 읽는 단초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헌법 개정 논의를 비롯하여, 향후 노동법 개정 작업과 관련하여 정부의 움직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34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최근(2009년) 다문화가정의 실태조사를 진행 중에 있지만, 2005년 1차 조사에 따르면 결혼이주민의 52.9%가 최저생계비 이하의 가구소득을 가지며, 특히 결혼이민여성의 57.5%는 절대빈곤층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는 많은 결혼이민여성이 자국의 가난을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한국에 왔지만 본국에서 보다 더 빈곤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쉼터에 입소하거나 상담을 의뢰하는 결혼이민여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가장 많이 호소합니다. “나는 첫 임신을 했다. 6개월이 되어 간다. 나는 아이를 낙태하고 싶다. 우리는 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남편은 택시 운전을 하고 있지만 거의 생활비를 가지고 오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은 1만원 어느 날은 빈손으로 들어온다. 남편이 회사에 내야 하는 돈은 하루에 78,000원이고 월급은 66만원이다. 만약 상납금을 내지 못하면 월급을 받을 수 없다. 남편은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이를 낳으면 자신이 알아서 다 한다고 하는데 나는 두렵고 걱정된다. 산후조리는 어떻게 할 것이고 분유 값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나는 한국에서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게 살줄 몰랐다.”(베트남 N여성) 대부분 저소득 가정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남편의 임금에 전적으로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연령이고 경제활동에 대한 의욕도 강합니다. 하지만 한국어가 서툰 이주여성들이 안정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고, 가족들이(남편과 시부모) 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행히 일자리를 얻어도 이주노동자들에 비해서 낮은 대우를 받은 사례가 많습니다. 사실 이주노동자들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지만 결혼이민여성들은 가사노동과 육아뿐 아니라 시댁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일자리의 제한도 많습니다. 결혼이민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60%정도인데, 음식점 종업원 등 서비스직(52%)이 가장 많습니다. 경제활동을 하는 이유로는 생계유지가 51%, 자녀교육비 충당이 17%입니다. 취업을 하지 못한 이유로는 자녀양육이 가장 많고(43%), 다음이 구직 실패(21%)입니다. 심각한 것은 15.5%의 가구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끼니를 거른 경험이 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E-6(예술흥행)비자로 한국에 왔다.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결혼 전 남편은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정말 잘해 주었다. 하지만 나와 결혼하면서 빚을 많이 졌다고 했다. 그래서 언제나 나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소리를 친다. 내가 번 돈은 남편이 다 가져가 버린다. 생활이 힘들어서 그런지 늘 싸우게 된다. 이제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남편은 나와 함께 외출하는 것도 싫어한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이 표 나게 될까봐 마스크를 쓰라고 하고 때로는 10m 떨어져 앞서 간다. 함께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그와 다정하게 웃으며 밥을 먹고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나 싶다. 나는 나를 사랑해 줄 다정한 남편이 필요하다. 아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 한국에서 나는 너무 슬프다.”(우즈베키스탄 K여성) 결혼이민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그들에게 친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 땅에서 남편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때로는 의지하는 남편에게조차 말을 걸 수 없는 언어의 장벽을 겪습니다. 더구나 자국 출신의 사람들을 만나 의사소통과 정보교환의 도움을 받고 싶지만 쉽지 않습니다. 자국민을 찾기도 어렵지만, 결혼중개업체들이 자국출신끼리 만나면 도망갈 것이라고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어떤 시부모는 며느리가 도망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국어도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결혼이민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도 합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결혼이민여성들 사진 출처 -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결혼이민여성들은 여러 가지 편견에 시달립니다. 한국에 ‘불법 체류할 목적’으로 들어온 여성들, 혹은 ‘가난하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게으르고’ ‘돈만 밝힌다’고 말합니다. ‘국적을 취득하면 도망갈 여자들’이라는 편견 때문에 국적취득에 협조하지 않는 남편들도 많습니다. 또 이들이 낳은 아이들은 엄마가 외국인이라 ‘언어지체장애’를 겪게 될 것이고,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해 ‘발달장애’를 보일뿐 아니라 학교에 가면 모두 ‘왕따(집단 따돌림)’를 당할 수 있으니 사회적으로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집단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정확한 조사나 근거자료도 없는 이러한 무책임한 편견들은 고스란히 차별로 이어지고 결혼이민여성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특히, 상담을 하다보면 결혼이민여성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 중에도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을 당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처음 보는 성인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당연하게 반말을 합니다. 어떤 방글라데시인은 가족들과 함께 외출하였는데 아이들 앞에서 한국인이 자신에게 반말을 해서 기분이 나빴지만 항의도 제대로 못했다고 했습니다. 또 결혼이민여성들은 가족행사에 배제되거나 가정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무시된 경험이 많습니다. 심지어 친척들에게도 소개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결혼이민자여성은 시장에서 “외국인이라 표 나면 안 되니 말을 하지 말라”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마음이 아팠다며 상담 내내 울고 가기도 했습니다. 사실 상담을 하다보면 밝은 이야기보다는 대부분 어려운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에 화목한 다문화가정도 많이 봅니다. 가족의 격려와 지지 속에 통역사로 활동하게 된 결혼이민여성의 기쁜 새 출발도 봅니다. 미용 기술을 배우고, 자국 결혼이민여성의 생활도우미로도 활동합니다. 다문화가정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 제도적 지원도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많은 부분 개방적인 사회로의 모습에 고무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혼이민여성들이 호소하는 어려움을 단순히 외국인 여성의 하소연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이 땅의 아내요 어머니요 국민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557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2009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사설 : 「법정과 맥아더 동상을 공격하는 세력의 정체」  “용산 참사 사건 법정에서 재판장 한양석 부장판사는 법정소란 행위가 외부단체의 지시나 사주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같은 날 인천 자유공원에서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풍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뿌리가 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법부의 권위와 한미동맹의 상징을 흔들어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우리 사회에 엄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 단순히 재판진행 방해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좌파단체들이 도심에서 벌이던 조직적인 불법 집회시위를 법정으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 도심 불법시위보다 훨씬 심각한 국기(國基) 문란이다. …… 이런 세력의 목표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체제와 한미동맹을 무너뜨리려는 것임을 국민 모두가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땅굴을 파듯이 우리 사회의 밑동을 야금야금 위협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위 사설의 논리는 이렇다. ‘재판거부 행위 → 외부 단체 지시․사주 → 자유민주주의 부정 세력 → 좌파단체 국기문란행위, 땅굴세력’ 이라는 도식이다. 이런 황당무계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단순 무식함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단순하게 세상을 한 가지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다면, 거칠고 험한 세상에 무슨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용산참사 사건에서 검찰이 수사기록 3,000여 쪽을 법원의 증거개시 명령에도 불구하고 변호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상태에서 피고인을 변호해야 되는지 여부를 놓고 변호인단 내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피고인을 보호하는 것이 1차적인 변호인의 책무이므로 변론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런 상황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는 것은 검찰의 불법적 행동을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 법원의 재판을 정당화시켜주는 들러리 역할밖에는 안되므로 재판을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 등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결국은 다수 입장에 따라 재판을 거부하고 변호인 직을 사퇴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재판 참여 및 거부 입장을 놓고 벌어진 변호인단의 치열한 논쟁은 어느 누구의 입장이 옳고 그른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피고인 보호라는 방식에서의 시선의 차이가 존재했을 뿐이고, 내부에서는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였다. 이러한 입장정리에 따라 변호인들은 재판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흥분한 일부 유가족들이 법정을 잠시 소란하게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법정소란의 그 모든 원천과 죄악은 검찰에 있었다. 검찰이 정정당당하게 법률에서 말하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인권옹호 기관‘으로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수사를 하였다면 왜 떳떳하게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못하는가에 대하여 우리 사회와 언론이 이성을 갖고 있다면 진지하게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문제였다. 공익적 기능을 고민하는 언론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성찰은 모르쇠하면서 표피적․일시적인 행위만을 문제삼아 마치 국기문란사범처럼 호도하는 것은 스스로 언론이기를 포기한 적반하장의 만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정에서 검찰의 증거 비공개 내지 은익 문제로 인하여 발생된 재판의 파탄 상태를 두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의 발호처럼 호들갑을 떠는 그들의 실체, 실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들여다보자. 먼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부모형제가 경찰의 집회․시위 진압과정에서 5명이나 사망했는데도 검찰이 수사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훌륭한 당신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존중하는 만큼 조용히 침묵하고 구속되어 재판을 받겠는가. 동아일보의 논리를 거꾸로 전개해보자. 그러면 ‘우파세력 → 자유민주주의 수호 세력 → 재판 순응’의 논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파세력이면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피고인의 정당한 권리를 검찰이 짓밟고, 법원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그대로 순응하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인가.   1일 오후 서울 대한문 앞에서 진보신당,이명박 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과 유가족들이 용산 참사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삼보일배를 하다 경찰에 가로막혀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    수사기록 공개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문제는 좌파, 우파 세력의 편 가르기 다툼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문제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지와 수호를 위하여도 반드시 지켜야 할 문제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보호받아야 할 피고인의 정당한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는 곧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수호하는 것이다. 거꾸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보호되어야 할 정당한 권리를 부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들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썩어 빠진 낡은 이념의 펜을 휘두르는 당신에게는 차라리 돼지 꼬리에 진주를 다는 일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이라고 권유하고 싶다. 용산참사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며, 현 정권의 비인간적이고 물신적인 사고방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사건이다. 인간의 생명보다 돈과 물질을 숭상하고,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 인간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에 의하여 짓밟힌 영혼의 절규와 눈물이 흐르는 사건이 용산참사 사건이다. 용산의 눈물은 비록 현재는 별다른 울림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우리를 성찰하게 만든 시대의 눈물이었다는 사실이 널리 인구에 회자될 것이고, 현 정권의 가슴을 찢어 놓는 사건이 될 것이다. 어느 활동가의 편지가 생각난다. “난 용산참사와 관련하여 하루라도 빨리 감옥에 가고 싶다”고…, 하여 그가 흘리는 용산의 눈물이 정의의 강물처럼 흐를 날도 곧 오리라고 믿고 싶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둥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32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미국이 드디어 북한과 양자대화에 나서기로 결정하였다. 미국 여기자 석방을 위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이후 북미간의 관계개선을 위한 전환적 국면이 예고된 바 있다. 닫혔던 물꼬가 트이면 길이 생기듯 북미 간 고위급 양자대화의 흐름은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혹자는 북미 양자대화의 시작이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로 인한 국제적 압박이 효과를 거둔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능동의 힘과 수동의 벼랑 끝 처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헷갈린 나머지 정세 변화의 특징과 본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로켓발사, 핵실험, 미사일 발사, 폐연료봉 재처리, 추출된 플루토늄 무기화, 우라늄농축시험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군사적 조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북미 간 고위급 협상이 시작되는 정세의 전환적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이것이 정세 변화의 특징이다. 나는 정치, 군사적 외교 협상력은 힘의 역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세계의 비핵화에 기여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북미 간 비핵화군축협상을 통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북미 간 정치군사협상으로 나아가고자 시도하는 정세이다. 이러한 정세 변화의 규정력과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때, 한반도 비핵화와 정전체제를 항구적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대하여 아직도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는 무지한 혹자들에 대한 과학적 비판이 가능해진다.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필요충분조건들을 이제는 채울려고 나서야 하고 능히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한반도 비핵화와 이와 맞물려 전개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 및 분단극복을 위한 북미간, 남북간 정치군사협상과정에서는 반드시 모든 문제를 포괄적,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들이 합의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상호 신뢰가 증진되는 가운데 합의사항이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 모든 한반도 문제의 포괄적, 근본적 해결을 위한 방안의 합의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볼 때, 향후 한반도의 비핵화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한반도 통일을 촉진하는 정치군사협상과정에서 제기될 의제 중에는 북핵 폐기와 함께 이에 상응하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유엔사 해체 및 외국군대의 철수, 남북 사이의 군사적 신뢰구축과 군축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현재 한반도에 주둔하는 외국군대는 주한미군 밖에 없다고 볼 때, 주한미군의 철수 문제는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정치군사협상의 의제에서 핵심적 사안으로 의제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절대로 없다. 혹자는 주한미군 주둔의 법적 근거로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한미 사이의 쌍무협정이므로 주한미군의 철수 문제는 한미 사이의 문제일 뿐 북미 간, 남북 간 진행될 정치군사협상의 의제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고 한다. 물론 법리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주한미군의 주둔과 함께 한반도에서 50년 이상 지속된 북미, 남북 적대 관계로 인하여 첨예한 핵 대결 상황까지 벌어진 군사적 대치와 긴장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치군사협상에서 포괄적, 근본적 해결방안의 합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자 하는 관념적인 주장이다. 정전체제에서 전개된 한반도의 전쟁위기, 핵 위기, 한미군사동맹, 한미군사훈련 등 제반 상황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일일이 예를 들어 열거하지 않더라도 주한미군 주둔의 역사적, 현실적, 법리적 측면 그 어떠한 측면에서 보더라도 주한미군의 철수 문제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연관성이 있는 실질적 문제로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정착을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김명길(왼쪽)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공사와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주 주지사가 샌타페이에 있는 주지사 공관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   북미 양자회담이 정세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북미 간 간극은 여전하다. 북한이 한반도 핵문제를 순조롭게 원만히 해결하자면 미국이 첫째로 대북적대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북미관계개선으로 나가야 하고, 둘째로 북미 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기 위해 지체 없이 북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군 철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북한의 입장과 달리 미국은 북핵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일탈국가의 비정상적인 대량살상무기 보유의 문제로 주한미군의 주둔과 무관하게 폐기되어야 할 문제라 단언하고 또한 한반도 평화체제 및 평화협정 체결의 당사자는 남과 북이라는 입장이다. 평화체제의 당사자 문제는 한반도 평화체제 논쟁에서 핵심 중의 하나인데 북한이 북미 평화협정을 주장하는 것은 미국을 평화협정의 직접 당사자로 하여 주한미군 철수를 규정한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주한미군의 철수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이고, 미국이 평화체제의 당사자는 남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하고자 하는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북미 간 양자대화에서 북미관계정상화, 평화협정 체결 등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협상의 결과는 기본적으로 북미 양자가 평화체제의 당사자가 되고 북한 핵무기의 폐기와 주한미군 철수를 주고받는 내용을 가지는 평화협정의 체결로 타결될 것으로 예측된다. 따라서 이러한 획기적 정세 변화가 도래하고 있음에도 대북적대의 상징이라 할 한미군사동맹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여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핵심적 과제인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금기하거나 회피하는 정책을 완고하게 고수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체제수립을 위한 정치군사협상 과정에서 난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평화체제의 당사자 지위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2009년 오늘 ‘북미 사이의 평화공존’이라는 본질을 향해 발전해 가고 있는 전환적 국면이 도래하였다. 그리고 현재 조성된 역관계로 보면 이러한 양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분명해질 것이다. 북미 양국은 멀지 않은 시간에 북미 사이의 평화체제가 주한미군이 철수되는 평화인가를 놓고 중대한 갈림길에 설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과정에서 남과 북이 주도적으로 주한미군이 나가는 내용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하여 정치군사협상의 실질적 당사자로서 역할을 다함으로써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하는 그 날을 꿈꾸어 본다. 법률가로서 남북의 법률가들이 교류와 협력을 적극 추진, 강화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평화협정안을 준비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60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질병이 세계를 뒤흔드는 엄청난 재앙이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중세 유럽. 피부가 흑색이나 자색으로 변해 결국은 죽게 된다는 흑사병(페스트)은 14세기 유럽 대륙을 덮쳤다. 전체 인구의 1/3 이상이 몰살되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선주민의 무려 90%가 몰살되었다. 학살도 있었지만, 스페인에서 유입된 천연두 등의 질병에 대한 면역이 없어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지난 세기에도 스페인 독감이 맹위를 떨쳤다. 1918년 처음 발생해 스페인에서만 한 달 동안 800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2년 동안 전 세계에서 4천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중세 유럽, 스페인 등 제국주의의 학살이 멈추지 않았던 ‘신대륙’ 아메리카, 1차 세계대전의 참화가 대륙 전체를 휩쓴 20세기 초의 유럽 대륙. 하지만 전쟁이나 학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어갔다. 해서 질병의 공포는 끊이지 않는다. 아시아 독감, 홍콩 독감, 소련 독감, 급성호흡기 증후군인 SARS, 조류독감을 거쳐 이번엔 신종 인플루엔자가 나타났다. 올 4월 멕시코에서 처음 시작된 신종 플루는 이전 시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된 교통의 영향으로 급속도로 전 세계로 확산되어 8월 23일 현재 세계보건기구(WHO)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감염자 수는 20만 9천여 명, 사망자 수는 최소한 2천백85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감염자 수도 4천3백 명을 넘어섰다. 감염자 수 증가 속도가 좀 주춤하고 있지만, 가을, 겨울에는 어떤 상황을 맞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 개학이 되어 학생들의 집단감염이 크게 늘어날 거란 우려도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     개학 후 보건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평소에 무뚝뚝하고 건강한 근정이(중1)를 만났다. “선생님 체온 좀 재주세요, 어제 축구를 하다 다리가 삐었어요. 밤에 다리가 아프면서 열이 났어요. 근데 뉴스에서 열이 나면 신종인플루엔자에 걸렸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빨리 보건실로 가서 체온 측정하래요, 너무 무서워요” 체온계로 측정하니 36.8도였고, 자기의 체온을 확인한 근정이는 아주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교실로 들어갔다. 그 전날 오후 뉴스에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아침에 신용산초등학교를 방문한 모습과 이 학교의 모든 등교생을 대상으로 교문 앞에서 발열 검사를 실시하는 모습이 나왔고, 아이들은 자기도 혹시 신종인플루엔자에 걸리지 않았는가 걱정하여 양호실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교육부는 초중고 모든 학교에 손소독제를 비치하고 체온계를 구입하여 교문 앞에서 일일체온측정을 실시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하지만 교과부의 이런 무신경한 전시행정으로 인해 학교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있다. “신종 플루 얘기가 나온 지 꽤 되었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아직도 발열검사를 못하고 있어요. 비용 문제도 그렇고, 체온계 구하기조차 쉽지 않거든요.” 인천 ㄴ초등학교의 한 교사는 일선 학교의 빠듯한 예산으로는 위생물품을 마련하기도 어렵고, 모든 학교들이 약국이나 의료기 상에서 손소독제와 체온계를 단시간에 구입하다 보니 동이 나서 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김동석 한국교총 대변인은 “학교 현장은 수많은 학생들이 장시간 밀집해 있는 만큼 신종 플루 감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도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학부모들이 자비로 위생물품을 사서 학교에 비치하는 등 전반적인 준비가 대단히 부족한 상황”이라며 “더욱 체계적이고 세밀한 대책을 마련하는 동시에, 학생 전체에 대한 예방백신 접종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2009.9.2 한겨레신문 중) 개학을 맞아 신종 플루의 집단발병이 우려되는 것에 비해 학생들에 대한 예방 대책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정부가 발표한 대책은 교문 앞에서의 발열검사가 고작이다. 그리고 신종 플루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학원 감염에 대한 예방대책은 전무한 형편이다. 6월말부터 신종 플루에 대한 예방교육과 일일보고가 실시되었는데, 교과부는 개학후의 상황에 대비해 현장 교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체계적이고 세밀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미리 앞날을 대비하여 신종 플루의 치료 예방을 위한 백신개발과 충분한 검사 장비를 확보하고 학원 감염에 대한 대책들을 준비했어야 했다. 학교가 학생들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정 학생들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보다 강도 높은 보건교육과 학생들이 건강한 생활을 하며 안전하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노력이 시급하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06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상주에 귀농한 지인이 있어 몇몇 사람이 찾아가 하루는 논에서 피와 잡초를 뽑고, 하루는 비 내리는 밭에서 콩을 옮겨 심었습니다. 평소 허리 숙여 잡초와 피 뽑는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관계로 등과 다리의 평소 사용해본 적 없는 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했고, 일주일 동안 제대로 걷는 것조차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 그 친구는 남들이 다 쉬러 나간 후에도 논에서 나오는 길에 눈에 띄는 잡초와 피를 뽑느라 제일 늦게 나오고 일하러 들어갈 때는 제일 먼저 논으로 들어갔고, 콩을 한줄기라도 더 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쉴 때 남은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농부의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야근에 힘이 부쳤는지 결국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로와 면역력 약화가 원인이라고는 하는데 아무튼 시쳇말로 나이롱환자 노릇하느라 일주일을 허비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 중 아침에 한차례 회진을 도는 교수와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오면, 그들의 말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혈압·체온 체크를 하러 오면 그 결과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이 환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게차에 다리를 깔려 뼈가 부러진 분, 자동차 사고로 왼쪽 다리를 다치신 분, 공익요원으로 근무를 하다 발목 관절을 다친 분 등등 많은 환자들이 의사들의 말 한마디를 신주단지 모시듯 따르고 조심조심하는 모습을 보며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느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기간이 끝나고 또 다시 일상의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씀을 하시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반이 무너져 버린 몸을 이끌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남북화해, 평화를 위해 남은 생의 불꽃을 태우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비록 서거에 임해서이기는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보면서 완벽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내 생에 이런 정치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정치인으로서 욕심이 없었을 리 없겠지만 그 깊은 곳에 항상 자신의 주인으로 국민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원조 촛불' 정치인 김대중 76년 3월 1일 암울했던 유신시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일형 박사 (앞줄 오른쪽) 등과 함께 서울 명동에서 유신철폐를 위한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왼쪽이 김옥두 전 의원이고 김대중 뒤로 부인 이희호씨와 권노갑 전 의원이 보인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땅을 일구는 농부의 손길에서 먹거리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진정한 농심을 찾게 되고,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를 어루만져주는 의사의 손길에서 진정한 의술을 찾게 되며, 가난과 고통으로 시름하는 국민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정치인의 품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게 됩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업무 분야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기계가 대신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세분화될 일자리에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업무수행 능력을 요구받고 있고,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업무처리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객관적이고 고도화된 업무능력을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누구 하나 전문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 전문가들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단 하루도 지탱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전문가는 제 영역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존재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부 전문가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 그들이 최선을 다해야 할 대상을 잘못 찾은 것 같습니다.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그동안 쌓아 온 모든 실력을 발휘해야 할 경찰 전문가들은 시민을 상대로 폭압적인 살인 진압을 자행하고, 국가가 국민의 세금을 들여 양성한 법률 전문가인 검사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를 말살하는데 그들이 가진 온갖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또 매일 매일 TV 속에 그려지는 정치 전문가들의 행태를 통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찾기는 어려운 반면 자본가들과 기득권자들만이 보이는 것은 저만의 편견은 아닐 것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로지 신뢰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이. 그 자리를 채울 신뢰를 어떻게 다시 쌓아갈 것인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리하여 전문가로서 맡은 소임이 일반 대중, 시민,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로서 쌓아온 실력을 왜곡된 방향으로 사용할 때, 이를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한 행동에 나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사회를 지탱해나갈 신뢰, 훼손되고 실추된 신뢰를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모습이 바로 행동하는 양심이 아닐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59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맹자가 양혜왕을 접견했다. 왕이 말했다.   “선생처럼 고명한 분이 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으시고 찾아주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이익이 있겠지요?” 맹자가 말했다.    “왕께서는 어째서 이익에 대해서만 말하십니까? 진정 중요한 것으로는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만약 한 나라의 왕이 ‘어떻게 하면 나의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그 아래에 있는 대부는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선비와 서민들은 ‘어떻게 하면 내 한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위아래가 다투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하면 나라는 위태로워집니다. …(중략)… 왕께서는 인의를 말씀하셔야지 어째서 이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 나라를 이롭게 하겠다는 양혜왕의 선의(善意)마저 이기주의라고 꾸짖었던 맹자가 오늘날 한국의 정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인배들 천지라고 혀를 차지 않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국 각지에 땅과 건물을 사서 재산증식에 몰두해온 분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나는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는 명언(!)을 남긴 장관 후보자부터 남의 돈으로 수십억짜리 집을 사들인 검찰총장 후보자까지, 현 정부는 소위 우리나라를 이끌어간다는(가고 싶어 하는) 분들의 추악한 면면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재산을 환원하겠다는 대선 당시의 공약을 이행한다며 밝힌 재단 설립 계획 역시 많은 사람의 비웃음을 샀다. 공약을 지키기도 그렇고 그냥 먹어버리기도(식언하기도) 그렇고, 전전긍긍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대통령이 되었다고(종신대통령도 아니고) 한꺼번에 남한테 주겠나. 주변 사람들과 상의한 결과가 재산을 기탁하는 대신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었을 터다. 잘은 모르지만 좋은 일 한다는 명목으로 세금도 안 내거나 덜 낼 수 있을 테고, 측근들을 재단에 포진시켜 놨으니 내 맘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사회 환원 방식조차 참 이명박스럽다고 생각한 게 단지 나 혼자만일까. 새삼스런 말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킨 사회적 힘은 바로 우리 국민들의 이기주의에 있다. 방법과 절차를 불문하고 이명박처럼 돈 벌고 성공하고 싶다는 이기주의. 국민들 저마다의 이기주의가 하나의 힘으로 모여 강남 졸부의 화신을 대통령에 당선시켰고, 아니나 다를까, 지금 우리나라는 (가진 자들의 집단) 이기주의의 광풍에 휩싸여있다.     현금까지 뿌려가며 신문 시장을 망쳐놓은 조중동. 이들이 방송을 시작하면 언론환경은 지금보다도 더욱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조로 급격히 바뀔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먼저 ‘4대강 살리기’(실은 죽이기). 이명박 대통령이 대운하 사업을 (눈물을 머금고) 4대강 죽이기로 축소하면서까지(그래도 30조원!) 삽질에 집착하는 배경에는 건설업계의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국내 최대 건설회사 CEO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은 이 사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의 눈에 멀쩡한 자연이 망가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급하면 그 흔한 환경영향평가 한번 거치지 않고 삽질부터 시작했을까. 이 사업이 아니었다면 공터에서 공치고 있을 포크레인과 불도저의 감가상각비만 생각해도 얼마인가.    4대강 삽질이라는 게 강바닥을 파서 수량을 많게 하고 둔치나 보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모래밭과 습지로 아름다운 자연 하천을 한강처럼 인공구조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수천억 원의 예산을 들여 한강의 얼마 안 되는 자연 습지(여의도 샛강을 비롯한)를 파헤치고 있는 건 또 어떤가. 아무리 서울시장 한 번 더 하고 싶고, 대통령에 욕심이 있어도 그렇지 한 때 환경운동연합 회원임을 자랑하고 다녔던 사람의 이명박 따라 하기는 참 볼썽사나운 노릇이다. (대통령의 꿈을 이룬) 이명박을 움직이는 힘이 철저히 계급 이기주의라면, (대통령을 꿈꾸는) 오세훈을 움직이고 있는 힘은 출세욕이라는 개인 이기주의다.    최근 날치기로 통과된 언론악법이야말로 이기주의의 결정판이다. 자전거에 상품권, 현금까지 뿌려가며 신문 시장을 망쳐놓은 조중동이 결국 신문만으로는 살 수 없게 되니까 방송을 하려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언론에 약한 재벌 총수들이 방송사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이들이 방송을 시작하면 우리나라의 언론환경은 지금보다도 더욱 철저히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조로 급격히 바뀔 것이다. 세월이 변한 것일까? 과거 같으면 수십 번도 더 뒤집어졌을 소식을 접해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는다.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같은 건 이슈조차도 잘 안 된다. 왜 일까? 조중동이 외면해서? 더 근본적으로는 국민들이 자신의 문제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기무사의 망동을 이대로 두고 지나갈 경우 기무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반정부 인사들을 미행하고 감시할 것이라는 것을. 국정원은 합법적으로 국민들을 사찰하고 도청도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닌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의 자유도 언제든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대단치 않게 생각한다. 그런 무관심과 불감증의 밑동에 있는 것이 우리 각자의 이기주의다.      그나마 측은지심은 남아있는 것일까?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겁다. 그 뜨거움이 단순한 측은지심이 아니길 바란다. 두 분은 역사와 대의에 자기 몸을 진정으로 바치신 분들이다. 국민들의 뜨거운 반응이 소인배들이 판치는 시대에 대한 뜨거운 경고라면, 아직 우리에게 희망은 남아 있다. 문제는 우리 안의 이기주의다. 우리가 이기주의의 껍질을 깨고 일어설 수 있다면 여론주도권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지난해 촛불 시위 때처럼 말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41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권연대 주최 이번 교사인권강좌에서 강의를 마친 후 필자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맞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요? 인권교육이라는 것이 말은 그렇지만 과연 실제로 얼마나 실행되고 확산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라도 좀 강하게 맞서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었다. 그 때 필자는 선뜻, “이대로 가다가 교육은 결국 바닥을 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더 나아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경찰이 쏘아 대는 물대포와는 상대가 안 될 것 같이 보이지만, 언제 젖는지도 모르게 온몸을 젖게 만드는 이슬비, 그런 이슬비가 결국 물대포보다 강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었다. 이어서,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처럼 담쟁이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결국은 그 담을 넘지 않겠어요?”라고도 했다. 그 후 필자는 “그 답이 과연 충분한 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바닥을 치는 것이 희망이기도 한 이유”와 “이슬비가 물대포보다 강한 이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악화일로의 경제상황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우리는 가끔씩 “바닥을 쳤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이젠 더 나빠질 리는 없으니 조금이라도 좋아질 것”이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다. 또한 살아오면서 가끔씩 끝 모를 절망이나 실패 혹은 슬럼프에 빠져들게 되면 우리는 “차라리 바닥을 빨리 쳤으면 좋겠다. 바닥을 치면 그땐 올라가는 일만 남지 않겠냐?”라고 생각한다. 정호승 시인은 <바닥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하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하며,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하며 그 시를 끝맺는다. 필자가 여기서 이해하는 ‘바닥까지 내려감’은 곧 ‘희망’이다. 새벽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면, 가장 어두운 순간 바로 다음엔 곧 빛이 터져 나오는 거 아닌가? 역대 정권들이 하나같이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수많은 조치들을 발표하고 시행해오고 있지만 교육을 물속에 점점 깊이 빠뜨려 왔다면, 곧 ‘바닥’을 칠 것이고, 그리고는 수면 위를 향해 올라갈 차례가 아닐까? 인권을 무시하여 교육을 물속에 빠뜨렸다면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 인권이 교문을 넘어 학교 안에 확산되게 하는 방향이 곧 수면 위로의 방향일 것이다. 걸상과 허리가 맞지 않아 걸상에 허리를 맞추다가 수많은 학생들이 걸리게 되는 척추측만증, 학생이 안경 쓰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된 안타까운 시력 희생, 초등학생에게까지도 성적이 떨어진 것을 유서 쓰고 투신할 만큼의 불효로 여기게 만드는 교육풍토와 가정교육, 명문대 합격을 위해 인권을 유보함은 당연하다는 식의 ‘입시독재’ 논리……. 더 이상은 내려갈 곳이 없음이 모두에게 자명해지고 있지 않은가? 하여, 교육은 이제 곧, 드디어, 바닥을 치고 오른다! 이것을 “바닥을 치는 것이 희망이기도 한 이유”라고 보는 것은 좀 궁색한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도 우리는 가끔씩 듣는다. 필자는 문득, “무엇이 약한 것인가? 왜 약하다고 하는가? 약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하기에 강한 것을 이기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오래 전에 읽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그 글을 풀어쓰자면, “사람의 숨은 약하기 짝이 없으나 갈비뼈를 들어올리고 내리는 것은 바로 그 약하기 짝이 없는 숨 아닌가?” 예전에 읽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글도 풀어쓰자면, “눈 오는 겨울 산에서 살면 흔히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약하고 약한 눈송이들이 큰 가지들 위에 점점 쌓이면 그 무게를 못 이겨 키 큰 나무들이 통째로 부러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물대포’와 ‘이슬비’는 어떤가?   지난 7월 29일 오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인근에서 점거 파업 중인 쌍용차 노조원에게 물을 전달하려는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을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해산시키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물대포’로 비유되기엔 약할 만큼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 남용 및 과잉진압은 많은 경우에 인명 피해로 이어지곤 한다. 작년의 촛불집회, 올해 초의 용산 참사,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쌍용 자동차 사태에 이르도록, 최루액과 경찰특공대 등을 갖춘 공권력은 이미 허용 정도를 넘어 정당성을 상실한 폭력으로 바뀌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7월 6일 천주교 마산교구 상남동 성당에서 제3차 전국사제시국기도회가 열렸다. 미사에 앞서 행한 연설에서 강기갑 의원(민주노동당)은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사태와 YH사건, 전두환은 박종철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무너졌는데, 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을 폭로하면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듯이, 이명박 정권은 새벽에 6명을 불태워죽이고서 3,000쪽의 조사기록을 밝히지 않으니 말로가 뻔하다.”고 말하면서 용산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와 3,000쪽의 검찰조사기록 은폐가 묘하게 대응된다 싶다.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생명수호를 위해’ 봉헌되는 미사, 수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의 동참,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 갖게 되는 정의와 희망의 연대감, 참사 후 반년이 지나도록 장례마저 못 치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신자, 비신자를 떠나 사람 마음 안에 자리 잡게 되는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양심의 가책, 그러면서 서서히 배우지만 절실히 깨닫게 되는 ‘인권’의 소중함과 불가양도성, 민주주의에 대한 상실감과 목마름……. 이런 모든 것들은, 당장의 위력으로는 ‘물대포’에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서서히, 결국은 모두를 똑같이 적시는, 흔히 우산까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홀딱 젖게 하는, ‘이슬비’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우리에게 남게 되는 것은 결국은 ‘희망’이다. ‘바닥’은 끝 모를 끝이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 강하게 차고 오를수록 상승의 탄력이 붙을 것이다. 그리고 ‘이슬비’는 ‘물대포’를 이기리라. 결국에는 ‘물대포’를 쏘는 발사체인 대포도 녹슬게 만들리라. 약한 것은 약하지 않다. 약하게 보일 뿐이다. 지브란의 말처럼 “갈비뼈를 움직이는 것이 숨”이라면, 국가의 갈비뼈를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으면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은 국가가 강하게 훈련시킨 근육이 아니라 우리 시민들의 올곧은 ‘숨’, 곧, 혼과 의지와 꿈, 시민의식, 특히 인권의식 아닐까? 이것이 약할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42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교직 생활 20년이 넘으면서 매 해 경험하는 일이지만 해마다 담임을 맡게 되는 아이들이 모두 참 다르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같은 학년을 연이어서 담임을 하여도 아이들이 참 다른 것을 보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 속에 미세한 차이가 생활의 또 다른 재미(?)를 주는 것 같다. 올해는 내 교직생활에서 6번째로 2학년을 담임하게 되었다. 28명이라는 다소 경감된 학급 아동수를 내심 반갑게 생각하면서 '올해는 어떤 녀석들일까?' 하는 설렘과 두려움을 가지고 아이들과의 대면을 시작하였다.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간의 눈빛에서 오고가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아이들의 눈빛을 살피던 중 유난히 작은 체구에 교사의 눈빛을 갈구하는 아이가 있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질문도 많았으며 교사가 지시한 것에 대하여 항상 귀 기울이는 아이로 여느 아이들처럼 교사의 특별한 관심을 좋아했다. 그 아이에 대하여 처음 놀란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교사의 과제에 대하여 그 아이가 보인 반응이 나타났을 때였다. 평소 교사가 하는 말에는 집중력 있게 듣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내용에 대한 이해도는 집중도에 비례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업시간에 교사가 설명을 한 후 그 내용을 이행해보라고 한 것에 대하여 본인이 원한 만큼의 결과가 도출되지 않자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울고 감정 조절이 안 되어 무릎을 꿇은 상태로 아이들 책상 주변을 빙빙 돌면서 소리를 지르더니 급기야 손톱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할퀴며 자해를 하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 아이를 붙잡고 일단 이상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리고 왜 그러는 지를 물어보았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른 과제 해결에 대하여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타난 행동에 비해서 그 이유가 너무 단순해서 속으로 놀랐다. 일단 그럴 경우에는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당부하고 달래주었다. 그리고 학부모총회날 그 아이의 학부모로부터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는 맞벌이고 취학 전에는 할머니가 키워주셨으며 그때까지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고 학교 들어오고 나서 이상행동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학년 담임선생님이 이런 이유로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워했다는 것과 그 이후로 놀이치료를 받아 현재에 이르는 중이라고 했다. 면담 후 그 아이에 대하여 좀 더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교사가 필요할 때에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앞자리에 앉도록 하여 세심하게 관찰을 하였으며 개인행동을 일지형태로 기록하였다. 보통의 아이들은 학교에서의 결과물을 통해 성취욕을 가지도록 지도하지만 이 아이는 반대였다. 성취욕이 너무 강하여 결과물에 대한 좌절감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큰 것이 문제였다. 과정에 대하여는 집중하지 못하고 결과에 대하여만 집착하여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도출되지 않을 시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고 조절해나가느냐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이제 겨우 9살인 그 아이가 겪을 인생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내용적으로 어렵지 않은 2학년 과정에 대하여 나타난 좌절감의 표현은 이후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해갈 학습량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표출될 것인가? 그리고 경쟁만이 학력을 높일 것이라는 믿음아래 펼쳐지는 정책들은 그 아이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올 것인가? 우리는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알고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과 그 과정은 달라도 누구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교육은 아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교육을 받고 하나씩 깨우쳐가면서 누리는 기쁨은 이미 옛날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다수의 아이들이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교육이 지향하는 바를 좀 돌아봐야하지 않을까?   지난 3월 31일에 치러진 '교과학습 진단평가시험' 풍경, 초등학교 학생들이 칸막이를 세운 채 시험을 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벌써 한학기가 지나 여름방학이다. 다음 학기가 지나면 그 아이는 한 학년 더 올라 갈 것이다. 더 많은 과제를 해결해야하고 한 단계 높은 수준의 학습내용을 감당해야하며 또 더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모두 알고 있다. 해마다 특별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어느 반이랄 것도 없이 모든 반에 그런 아이들이 있다. 다만 몇 명이 있느냐가 관심사이다. 경쟁을 통해서 1등만이 인정을 받고, 친구들을 이겨야만 내가 살며, 최고의 결과를 도출해야만 세상이 알아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을 때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이들이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막상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는 과감하지 못하다. 우리 교육이 경쟁과 효율성만을 강조할 때 우리 아이들은 상처받고 좌절하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잃어간다. 이는 어른들의 책임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 비단 그 아이 한사람에 대한 것이라 치부하지말기를 바라며 교육에 대한 가치와 철학을 다시 생각해보고 그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하는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4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