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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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아직 외국생활이 익숙하지 않다. 특히 한국어와 문법이 비슷하다 하여 쉬우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일본어도 외국어였다. 그나마 발음은 괜찮게 들리는지 준비한 인사말 몇 마디에 모두들 감당하기 힘든 주제로 대화를 시도해 온다. 특히 일본인들에게는 천안함 사건이 여전히 큰 관심거리이다. 물론 대부분 일본 언론에서 보도하는 대로 북한의 도발임이 분명하고 전쟁이 곧 일어날듯 한데 일본에게도 심각한 일이라며 호들갑 떠는 내용이다. 그것을 한국인인 나에게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대략의 내용만 접한 것으로 아는 척 하기도 그렇거니와 내 일본어 수준으로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도 어려워 별 일 아니라 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의도적인 도발임이 분명한 사건을 겪고서도 어찌 그리 태연할 수 있느냐고 되물어 오기에, 결국 몇 가지 의문을 이야기하며 좀 더 기다려 볼 일이라 설명하는 중 조금 흥분해서 오히려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는 일본과 미국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른 의도를 갖고 있는 것 아닌가 반문했다. 내 딴에 상식적이라 생각되는 수준에서 가진 의문이었는데 대부분 깜짝 놀란다. 어떻게 매스컴에서 보도하는 내용 이면의 것을 내다 볼 수 있느냐며 대단하다고 한다. 이들이 어찌 알까. 한 두 해가 아니라 수십 년간 당하면서 살아 온 끝에 갖게 된 지혜라는 것을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지혜라 자부하기에는 뭔가 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 정상일까? 주변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사는 것과 어떤 소식이든 들으면서 사실일지부터 고민하며 살아온 우리의 삶. 정상 비정상의 문제는 아닐지 모르지만 안타까운 일임이 분명하다. 물론 진실을 모른 채 살고 있는 이들도 안쓰럽지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로 구성된 '천안함 조사결과 검증위원회'의 우장균 한국기자협회장(가운데)이 지난 6월 4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천안함 조사 결과 발표에 대한 검증 없이 보도한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늑대소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양치는 거짓말쟁이 소년 이야기가 있다. 몇 번 씩이나 마을 사람들을 속인 끝에 실제 늑대가 나타났지만 결국 아무도 사실이라 믿어주지 않았던 이야기. 물론 거짓말 한 소년 탓이라 여기면 그만일 테지만, 결과를 알고 난 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마음이 오죽 복잡했을까. 속이는 사람보다 속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품거나 속은 사람의 마음이 더 혼란스럽고 아프다는 사실을 저들은 알까. 여하튼 그 뒤로 국내 소식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런데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음모론 유포 혐의로 몇몇 사람이 입건까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내용을 살펴보다 보니 ‘지나치게 사건 진행 간의 개연성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 이유로 간과된 가정들을 지나치게 맹신하고 근거로 삼는’ 것을 음모론이라고 한단다. 어느 심리학자는 음모론이 ‘자기가설에 부합하는 사실만 채택하고 맞지 않는 것은 버리는 심리행태’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리여서 사건의 해석이 쉽지 않은 경우 단순명쾌한 음모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주장대로라면 누가 음모론자인지 명확하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간과했던 가정을 맹신하며 근거로 삼고 있는지, 누가 자기가설에 부합하는 사실(?)만을 고집하는지, 누가 보통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서둘러 단순명쾌한 답을 내놓았는지 분명하지 않은가. 온갖 어이없는 음모론으로 나에게 꽤나 구박받았던 후배에게 오랜만에 연락해보아야겠다. 그 친구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언제나 황당무계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그 친구의 의견이 궁금해지다니 나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누구 때문일까?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신부로 일본 릿교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0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삼년 이상 두문불출하며 군위에 있는 시골 선방에서 용맹 정진하던 문수스님이 ‘사대강 사업을 철회하고 서민 정책을 펼치라’는 글을 남기고는 소신공양했다. 제 몸을 태워 부처 앞에 바치는 일을 소신공양이라 한다. 부처 앞에 바친다지만, 제 몸을 태울 정도의 행위는 실상 부처에 가까운 행위이다. 제 몸 하나 보전하느라 끙끙대는 것이 중생의 삶인데, 그 생물학적 본성마저, 그것도 개인적 이유가 아닌, 뭇 생명과 가난한 이웃을 위해 훌쩍 뛰어넘었으니, 필경 부처의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들 어쩌랴. 스님이라는 ‘계란’ 하나가 터져나가도 끄떡없을 ‘바위’ 같은 현실을 생각하면 암울할 뿐이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에 충격을 받고 이번엔 불교환경연대 대표이자 화계사 주지이신 수경스님이 주지, 승적 등 모든 ‘사회적’ 신분을 내어놓고 잠적하는 일이 벌어졌다. 환경운동의 상징적 존재나 다름없는 수경스님은 나도 좀 면식이 있던 분이라서인지 맘이 더 애잔했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스님께 말씀듣기를 청할 때마다 무언가 남다른 존재인 냥 받들어지는 상황을 버거워하셨다. 자격도 없는데 승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대접을 받으니 부담스럽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언젠가 이것저것 죄다 내려놓아야겠다며, 환계(還戒)의 가능성을 몇 차례 비추곤 하셨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진솔한 고백을 할 줄 하는 스님의 겸손하고 솔직한 인품을 느낄 수 있었다. 참 괜찮은 분이라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었다. 그러던 분이 “다시 길을 떠나며”라는 편지 한 장을 가까운 이들에게 남겨 놓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평소의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소신을 일단 실천으로 옮긴 셈이다. 이미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스님의 편지를 한 번 더 인용해본다.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 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스님의 번민이야 그분대로 있었을 테니, 정말 무엇 때문에 그리도 ‘번다하셨는지’ 외부자로서는 다 알 길이 없다. 그래도 나의 짧은 경험과 그분의 인격에 비추건대 이해가 안 될 것도, 공감이 안 될 것도 없었다. 다만, 번다했던 그대로, 번민을 적당히 숨기고 살던 대로 살지 않고,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는 모습에서 나 같은 이와는 다른 수준이 읽혔다. “아버지,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코복음 14,36)라고 기도했던 예수가 생각나기도 했다. 수경 스님이 지난 6월 5일 저녁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문수 스님 소신공양 국민추모제'에서 호소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특히 마지막 말이 내 마음에 남았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보기에 따라, 집착 없이 자연스런 삶 그대로, 그냥 있는 그대로 살겠다는 다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소 섬뜩한 상상을 하노라면 자살의 가능성마저 담긴 말임 직도 하고, 하필 ‘바위’ 옆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듣노라면, 바위에서 투신한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면서도 ‘죽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죽고 ‘싶다’는 고백은 여전히 삶에 대한 집착을 떠나보내지 못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그러면서도 선승의 세계관을 물씬 담은 고백이기도 할뿐 더러, “대접받는 중노릇은 하지 않으리라”는 일관된 고민은 스님이야말로 제대로 된 수행자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수경스님은 물론이거니와 문수스님도 수행자로서의 첫 길에 들어섰다가, 한 번 더 길을 떠난 분들이다. 한분은 죽음으로 생멸의 길을 떠났고, 다른 분은 모든 신분과 권력을 내려놓고 홀연히 사라지면서 생멸의 길을 떠났다. 그렇게 한 분은 무여열반(사후 열반)에의 길에 들어섰고, 다른 분은 유여열반(번뇌는 끊었으나 몸은 남아있는 열반)에의 길에 들어섰다. 종교 공부하면서 느끼던 바이지만, 사람이 제대로 되려면 두 번은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두 분 스님이 시대적 고민 속에서 두 번은 거듭나는 모습을 참으로 실감나게 보여주신 듯하다. 나도 물론이거니와, 이 땅의 수천만 종교인들은 과연 두 번 거듭날 수 있을까. 아니 한 번이라도 길을 제대로 떠나볼 수 있을까.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40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며칠 전 조용필의 콘서트를 보는 기회가 있었다. 20대부터 그의 노래를 들어오고 열성팬은 아니더라도 노래방에 가면 꼭 그의 곡으로 마무리를 하곤 한다. 약 5만 명 정도의 관람객이 잠실주경기장에 있었고, 2층의 무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비교적 좋은 자리에 앉았다. 가능한 말을 줄이고 노래를 많이, 열성적으로 부르는 그의 프로정신은 훌륭했다. 그런데 객석에 앉아있는 동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무대 위의 조용필은 동전만한 모습으로 보이고 그가 부르는 노래는 가사조차 잘 전달되지 못했다. 적지 않은 가격을 지불하고 콘서트에 왔지만 음악은 사라지고 익숙한 멜로디가 나오면 따라 부르면서 그 시절의 감정을 찾으며 나만의 만족을 느끼는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2시간여 동안 피곤함을 넘어 화가 났다. 물론 그런 것까지 감수하면서 콘서트에 와야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콘서트라는 목적에 맞지 않게, 보이지 않는 가수와 들리지 않는 노래가 있는 곳에, 소통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곳에서 있었던 불쾌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요즈음 학교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든 학생의 학력향상이라는 교육기관의 목표아래 학생과 교사는 없었다. 학력향상과 학습부진아에 대해 학교장이 책임지도 하도록 하며,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학교장 학교경영능력평가와 성과급에 반영함으로써 교사들에게 성적경쟁을 조장하고 있다. 일제고사 성적이 공개돼 개인별, 학급별, 학교별, 지역별로 서열화가 가능한 상황에서 교육청의 묵인 아래 일선 학교들이 도 넘은 성적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7월에 치러지는 일제고사를 앞두고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초등학교들이 '0교시 수업'을 실시하고 엎드려뻗쳐 등의 체벌을 가하며 성적 올리기에 몰두하는 등 교육현장이 파행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뉴스는 이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학력은 단시간 안에 강압적으로 향상 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성장 속도에 맞게 천천히 기다리면서 격려하고 보듬어 키워가야만 된다. 그리고 교사는 이들이 아름다운 나무로 성장하도록 땅이 되며 거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열을 위한 교육이 아닌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는 교육이 언제쯤 가능할까? 그러기에 이번에 당선된 교육감에게 핀란드 교육의 희망을 품어 보고 싶다. ‘북해를 바라보며 그는 울었다’ - 도종환 차고 푸른 수평선을 끌고 바람과 물결의 경계를 바라보며 그는 울었다 내일 학교 가는 날이라고 하면 신난다고 소리치는 볼 붉은 꼬마 아이들을 바라보다 그의 눈동자에는 북해의 물방울이 날아와 고이곤 했다 푹 빠져서 놀 줄 알아야 집중력이 생긴다고 믿어 몇 시간씩 놀아도 부모가 조용히 해주고 바람과 눈 속에서 실컷 놀고 들어와야 차분한 아이가 된다고 믿는 부모들을 바라보며 배우고 싶은 내용을 자기들이 자유롭게 정하는데도 교실 가득한 생각의 나무를 보며 그는 피요르드처럼 희고 환하게 웃었다 아는 걸 다시배우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걸 배우는 게 공부이며 열의의 속도는 아이마다 다르므로 배워야할 목표도 책상마다 다르고 아이들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거나 늦으면 학습목표를 개인별로 다시 정하는 나라 변성기가 오기 전까지는 시험도 없고 잘했어, 아주 잘했어, 아주아주 잘했어 이 세 가지 평가밖에 없는 나라 친구는 내가 싸워 이겨야할 사람이 아니라 서로협력해서 과제를 함께 해결해야할 멘토이고 경쟁은 내가 어제의 나하고 하는 거라고 믿는 나라 나라에서 아이가 뒤처지는 아이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게 교육이 해야 할 가장 큰일이라 믿으며 공부하는 시간은 우리 절반도 안 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보며 그는 입꼬리 한쪽이 위로 올라가곤 했다 가르치는 일은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므로 언제든지 나랏돈으로 교육을 시켜주는 나라 청소년들에게 관련된 제도는 차돌맹이 같은 청소년들에게 꼭 물어보고 고치는 나라 여자아이는 활달하고 사내녀석들은 차분하며 인격적으로 만날 줄 아는 젊은이로 길러내는 어른들을 보며 그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학교가 작은 우주라고 믿는 부모와 머리칼에서 반짝이는 은빛이 눈에서도 반짝이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마침내 그는 울었다 흐린 하늘이 그의 눈물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경계를 출렁이다가도 합의를 이루어낸 북해도 갈등이 진정된 짙푸른 바다는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가슴에도 진눈깨비에 젖고 있었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34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최근 10여 년 동안 급증한 국제결혼은 대부분 ‘한국인 남성과 외국인 여성’ 간에 이루어지고 있다. 결혼이민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결혼이민여성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언어의 장벽, 문화 풍속의 이질감, 새로운 가족관계의 어려움을 모두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정의 아내요 어머니로서 살아가고 있을 이 여성들의 안정된 생활은 이 땅의 다문화가족의 안정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한 가정의 아내요 어머니인 여성의 행복이 곧 가족구성원 전체의 건강한 삶과 직결된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분히 이질감을 지니고 있는 다문화가족이 안정된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한국사회에서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정보와 다양한 만남을 통해 다문화가족의 경제적, 문화적, 가족구성원간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특히 결혼이민여성이 가지고 있는 생활의 다양한 부적응과 불안, 낯선 환경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어려움을 조기에 해소하고 이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적지 않은 차별과 배타성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사회에서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따뜻한 마음과 환대의 노력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좀더 체계적으로 다문화가족의 삶의 질을 높이는 복지정책이 이루어질 때라고 생각한다. 사실 현장에서 다문화가족들을 만나보면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시선을 느꼈고, 법적 제도적 차별을 받은 적도 있다고 말한다. 특히 결혼이민여성들은 가족간의 갈등을 겪고 있음에도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지원체계에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결국 갈등의 골은 가족해체의 위기를 맞기도 하는데, 이러한 부부생활, 경제생활 및 자녀양육, 취업 측면에서 일반가족보다 몇 배의 어려움을 경험함에도 사회적지원이 미비하여 가족 안정성 유지와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와 같이 다문화가족을 위한 사회적 안정망이 구축되지 않은 상황 하에서 다문화가족의 증가는 사회적 취약계층을 생산하고 가족해체를 가속화 시켜 우리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시급한 사회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2009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연구 p.28). 아무래도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 다문화가족과 결혼이민여성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취약계층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사회적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가 해야 할 바람직한 본분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다문화가족지원법(2008)을 제정하여 보건복지가족부, 법무부, 여성부가 공동으로 전국 규모의 ‘다문화가족실태조사연구’(2009)를 실시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다문화가족 실태를 조사 분석해서 정책수립에 필요한 기초 통계자료를 확보하고 맞춤형 정책을 개발하는 데 있다. 즉, 다문화가족의 일반적인 특성 및 취업, 경제수준, 결혼생활 및 가족관계, 자녀양육, 건강 및 보건의료, 사회생활을 조사하여 다문화가족의 현황 및 문제점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또한 다문화가족의 교육지원 등의 복지욕구를 조사하여 다문화가족을 위한 맞춤형 정책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다(2009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연구 p.29). 이 조사통계에서 의외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결혼이민자들의 생활만족도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비교적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결혼이민여성 57.0%, 결혼이민남성 53.8%). 또한 가족관계 만족도도 매우 높았다(가족관계별로 매우 만족하는 비율이 배우자 74.8%, 자녀 88.1%, 배우자의 부모관계 64.8%, 배우자의 형제자매관계 60.1%였음). 이는 전체 한국인의 가족관계 만족도보다 높은 수준이었다(배우자 65.7%, 자녀 72.7%, 배우자의 부모 52.4%, 배우자의 형제자매 43%-2008년 사회통계조사). 그런데 생활과 가족관계 만족도에 비해 다문화가족의 경제상태는 많이 낮았다. 월평균 가구소득은 100-200만원 미만이 38.4%로 가장 많았고, 100만원 미만도 21. 3%로 가구소득이 전반적으로 낮았다(2009년 한국의 전체 월 평균 가구소득은 332만 2천원이다). 고향의 전통 복장차림으로 공예품을 판매하는 이주여성들. 국제결혼의 증가로 다문화가정이 급증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그렇다면 소득에 비해 가족구성원과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게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추정해 보는 것이지만, 첫째로 결혼이민여성들의 기대치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동안 정부의 다양한 다문화가족을 위한 정책과 사회 NGO단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결혼이민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결혼이민여성들의 경우 대부분 가난을 벗어나고자 국내 입국이 손쉬운 국제결혼을 이용한다. 한국인 남성 역시 결혼중개업체에게 일정금액을 지급하는 방법으로 나이, 직업, 건강, 경제력과 같은 결혼의 중대한 요소들에 구애받지 않고 손쉽게 외국인 여성을 구하기 위해 국제결혼을 이용한다. 따라서 다문화가족의 경제력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성들에게 심각한 장애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가족 내 환대와 배려가 이 여성들의 삶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환대와 배려를 증진시킬 수 있는 법적인 보호장치가 미흡하나마 실시되고 있고, 갈등 해소의 장으로서 각종 상담프로그램들과 언어교육 및 문화교육 등을 NGO 단체들이 꾸준히 실시해 온 것이 큰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기에 앞으로도 정책적, 사회적 지원체계가 더욱 원활해진다면 다문화가족의 삶의 만족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 조사에서 한 가지 우려할 점은 가정해체(이혼과 별거)도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혼별거 이유로는 성격차이 29.4%, 경제적 무능력 19.0%, 외도 13,2%, 학대와 폭력 12,9%, 심각한 정신장애 9.8%, 음주 및 도박 8.7%, 배우자 가족과의 갈등 7.0%등이었다. 특히 결혼이민여성만이 학대와 폭력을 이혼과 별거의 원인으로 들고 있어 배우자 또는 배우자의 가족과의 관계에서 학대와 폭력이 발생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해체는 결혼이민여성의 자존감을 떨어뜨려 한국생활의 적응을 어렵게 하고, 특히 자녀의 양육에 지대한 피해를 가져온다. 상담현장이나 보호시설에서 만나게 되는 이 여성들은 대부분 정신적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이들의 자활지원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시급한 문제다. 다문화가족여성들보다 오히려 더 취약한 계층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높아 사회의 불안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종교 NGO 단체들 중에는 이들 해체된 가정의 이주여성들의 생활보호와 자립을 돕는 활동을 점점 더 넓혀가고 있다. 특히 서울시는 정책적으로 <폭력피해 이주여성 자활지원센터>를 운영하여 폭력피해 이주여성 및 동반자녀들에게 안정된 생활 주거공간을 제공하고, 직업훈련 등을 실시하여 스스로 사회인으로 자활할 수 있도록 추진 중에 있다. 이 자활센터의 운영을 통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이주여성들과 그 자녀들이 새로운 삶의 희망으로 홀로서기가 가능하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정책도 행사위주의 지원이 아닌 생활의 질을 높이는 교육과 안정된 정착을 위한 삶의 터전을 지원하는 쪽으로 확대 수립되고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생활이 행복하다는 이주여성들의 행복한 미소가 이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47 | 추천: 0
정 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모처럼 정신적 부담이 크지 않은 선거였다.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 ‘사표(死票)’ 논란 때문에 평소 소신을 접고 ‘거악(巨惡)’의 출현을 막는데 나 역시 일조해야 하는지 고민했었는데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일찌감치 현역 시장은 저 멀리 달아났고, 후발 주자가 따라 잡는 것은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국내 대표적인 방송, 신문, 여론조사기관들은 입을 모아 20% 가까운 차이가 난다며 사실상 게임종료를 선언했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를 찍더라도 별다른 부담감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오후 6시가 되어 방송3사 공동 출구조사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한 대 얻어맞은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오차 범위 내 접전으로 조사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실제 개표결과는 더욱 드라마틱했다. 처음에는 현역 시장이 앞섰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표결과는 역전되었고, 박빙의 우세가 새벽 4시 20분 가까운 시간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다시 역전되었고 현역시장은 힘겹게 승리했다. 6·2 지방선거 KBS 개표방송 화면 사진 출처 - 이데일리 3.3%의 지지율을 얻은 후보의 책임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란은 촛불집회와 용산참사에서 느꼈던 생각과 겹치면서 나를 우울하게 했다. 국민 대다수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낸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와 관련된 촛불시위와 달리 용산참사는 극소수의 경제적 약자에 국한하는 문제인 것처럼 오인되었다. 하지만 용산참사 문제처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가 결국은 그 사회의 보편적인 권리 보장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다. 3.3%의 득표를 사표라고 간주하는 생각 속에는 용산참사에 대한 국민 다수의 소극적 입장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김은혜 대변인은 “이번 지방선거 결과에 나타난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더욱 국정에 매진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는 청와대의 입장을 발표했다.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말 보다는 “국정에 매진하겠다”는 말에 무게가 느껴진다. 지금 방식대로 계속 국정에 매진할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이제 곧 월드컵이다. 정부는 조금 마음 놓고 있을지 모르겠다. 뜨거웠던 촛불의 위력이 어느 순간 잦아들었듯이 ‘대한민국’을 외치는 함성 속에 선거에서 표출된 성난 민심이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월드컵 때마다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 중 하나가 복잡한 16강 진출 방정식이다. 자력으로 진출하기 힘들 때마다 누가 누구를 이겨주거나 비겨주어야 한다는 등의 계산이 횡행한다. 선거에서의 사표 논란 역시 일정 부분 16강 진출 방정식과 닮은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수파 후보의 책임을 거론하기 보다는 소수파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긴 소망을 끌어내 자신을 지지해 준 국민들의 기대에 더욱 부응하는 것이 보다 확실한 승리방정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지방선거 후의 상황이 어느 순간 잠잠해진 촛불 후(後)의 리바이벌이 되지 않으려면 3.3%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36 | 추천: 0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쟁기념관에서 대북정책의 전면적인 전환을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이 한반도의 평화를 두 동강 내버렸다"면서 "북한은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완결편이 벌써 나온 셈이다. 지난 10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추진해온 햇볕정책은 폐기되었고, 그동안 남북간 합의들도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전면적인 대결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북한도 조평통 성명을 통해 남한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이명박 대통령 임기동안에는 당국간 대화와 접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북선무방송, 주적개념, 팀스피리트 훈련 등 잊혀졌던 단어들이 속속 다시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잊혀졌던 단어가 또 하나 떠오른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하던... 잘 살펴보면, 아니 그냥 대충만 살펴봐도 한반도는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94년인가 1차 핵 위기 때도 한반도는 전쟁 발발직전 상태까지 갔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폭격계획을 세웠었고, 북한에선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다. 이러다간 버르장머리고 뭐고 한반도가 잿더미가 될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햇볕정책 아닌가? -햇볕정책도 북한이 좋아서 친북이라서 나왔던 정책은 아닌 거 같은데... 햇볕이란 단어만 나오면 왜 친북좌파가 따라붙는지 난 이해가 안 된다- 아무튼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고 해도 다독여가면서 같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 햇볕이었다. 이러다간 둘 다 가는 수가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햇볕을 폐기하고 대북정책의 전면재검토를 선언한 현 정부의 선택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명박 대통령은 ‘궁극적인 목표는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니며, 이 위기를 극복해 잘잘못을 가려놓고 바른 길로 가야 한다, 우리에겐 그만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기대대로 한반도 상황이 전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26일 조선중앙통신은 대북 심리전 방송을 재개할 경우 서해지구 북남관리구역에서 남측 인원, 차량에 대한 전면 차단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사실상 개성공단을 폐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사진은 이날 판문점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햇볕정책을 택하든, 전면적인 대결정책을 택하든 그거야 정책수행자의 몫이고 판단이니까 긴 얘긴 해봤자 입만 아프다. 그리고 이건 지난 10년 동안 주주장장 논쟁을 벌였던 문제이기도 하다. 근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있어서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정권 초기에는 서로의 기싸움도 필요하고 하니 선핵포기니, 상생이니 하는 대북정책을 밀어붙이고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단계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대북정책을 확고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핸들링 하는 능력이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다. 상당한 유연성과 전략적 판단이 중요한 대목이다. 근데,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나 이후 여러 고비에서 보여준 정부의 태도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위태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대통령이 더 강경한 발언을 하고 더 강력한 대북제재 조치를 취하더라도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부가 이 상황을 대처하고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 수단이 햇볕이냐 채찍이냐 하는 문제는 이차적이다. 지난 햇볕정책 시기에도 서해교전과 같은 사태가 있었지만 상황에 대처하고 위기를 관리하는 능력은 지금과 달랐다. 이명박 정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겠지만, 한 것도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상황만 계속 악화시켜왔다. 여기서 사태를 악화시킨 책임이 북한에 전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정부의 책임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08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엉겨서 살지 말자고 다짐할 때가 있다. 주변에 엉겨서 너무 힘든 나머지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를 자주 봐 왔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이런들 저런들 엉겨서 살자고 해 보았건만, 정몽주는 목숨 걸고 독야청청해 버렸다. 엉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엉겨 붙어 헤매다 넋이 빠지기 십상이다. 엉겨 독배를 마시게 되는 운명은 가련하다. 사법시험 합격 후 연수원 시절, 그 시절처럼 엉겨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내게 대학 시절의 엉김은 뜻을 모아 실천하는 보람과 자기수양의 시간이라도 있었다. 도제식 교육에 편입되기 시작한 젊은 법조인들의 삶은 순식간에 빛이 바랬다. 길들여져 가는 과정에 거부도, 저항도 사라져갔다. 순응하지 아니하는 자는 왕따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편입되어 순응하는 삶에 적응되는 순간 자기수양은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비판과 모욕만은 허용하지 않는 완고한 성을 쌓기에 몰두하였다. 꿈과 비판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엉겨 붙은 기능인들의 일탈과 허세 부리기였다. 넋이 빠져들 독배를 마셨다. 스폰서 검사의 운명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리라. 엉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이해관계에서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엉겨 붙어 판단을 그르친 사람들은 자주 주변을 탓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낯선 곳에서, 횡포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경우 불의에 맞서 저항하지 않고, 두려움에, 거기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유혹에 빠지면, 그 누구와도 타협하고 굴복하게 된다. 속절없이 엉기는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시국사건 변론에서 접견을 가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엉기지 말고 거부할 것을. 단 한마디의 진술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상대의 따뜻한 말 한마디, 담배 한 가치, 전화 한 통화의 유혹도 뿌리칠 것을. 구속과 중형 처벌 운운의 공격에는 겁 내지 말고 담대할 것을. 두려움과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엉기지 않고 실천한 이들이 정말 부럽고 존경스럽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엉겨서 살자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고 순탄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장래를 위한 차선책으로써 타협과 굴복도 선택할 수도 있다. 독야청청 살아갈 것 같으면 모난 돌이 정에 맞고 깨끗한 물에 고기가 없듯 왕따가 되기 때문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자기 합리화를 이어나가다 보면 결국 침묵과 굴종에는 주저함이 없는 반면, 삶의 진리에 대한 열정은 간데없고 진리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게 된다. 실용을 위해 진리를 포기한 넋이 빠진 머저리들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는커녕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불가사의한 현실이다. 식민과 독재가 근대화를 이루고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환호성을 지른다. 사대 의존병에 걸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상전을 위해 독배를 마신다. 엉기는 것이 많기에 엉겨야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바로 이 시대의 대학을 거부하는 외침이 들린다. 취업에 저당 잡힌 대학의 현실이 숨 가빴으리라. 대학다움을 찾고자 눈물을 흘렸으리라. 동지와 진리를 찾았으나 역부족이었으리라. 대학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에도 힘들었으리라. 편입되어 갈 뿐 저항하지 않는 대학인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으리라. 취업 간판을 단 대학에서 꿈과 진리를 포기한 채 엉겨 살아가는 젊은 대학인들의 삶이 죽기보다도 더 싫었던 것이 틀림없다. 진리의 상아탑이기를 포기한 채 취업, 고시 준비에 갇혀 터져 버릴 것 같은 대학의 분위기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외침이 주객전도의 세상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미래의 희망으로 다가온다. 지난 3월 11일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44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필자는 ‘소신’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며, ‘소신 있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연함‘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이나 행동 역시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조각가 로댕의 비서였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로댕 어록』속의 로댕의 어떤 말이 가슴에 와 닿아 적어서 오랜 동안 벽에 붙여 두고 지냈었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깊고 의연하고 성실하십시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발표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깊은 진실인 것은 모두에게도 진실이기 때문입니다.”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소신’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되며 로댕의 이러한 격려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한편, 2010년 3월 24일자 어느 주요 일간지 1면에서 필자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헤드라인이 하나 있었다. 워낙 ‘소신’ 없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혹은 ‘소신’을 들먹이기엔 자신감들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쉽게 신문에서 접하지 못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소신’이라고 믿던 터에, 그 단어가 들어간 헤드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나 싶다. “李대통령 ‘4대江 사업은 내 소신’,” “생태계를 복원하는 생명 살리기…반대하는 사람들 설득해야”가 그것이었다. 그 기사를 일부 인용하자면, 이명박 대통령은 3월 23일 국무회의에서 “생명을 살리고 죽어가는 생태계를 복원하며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 것이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목표이자 내 소신”이라며, 최근 천주교 주교회의의 반대 성명 등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해 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4대강 사업은 1995년 국회에서부터 이야기해온 나의 소신”이며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도 정치적으로 반대가 많았다.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과 버스전용차로도 상대 당이 시장 사퇴하라고 공격하곤 했다. 서울시 공무원들도 내게 와서 원상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결국은 반대하던 사람들을 설득시켰다”고 말했다. 이어서, “정치적 목적으로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도 우리의 소중한 국민이다. 생각을 바꾸든 안 바꾸든 성실하게 설명하고 알려야 할 책임이 정부에는 있다”고 했다. 그 후 4월 27일자 다른 일간지에는 “전국 하천 ‘4대강 방식’ 개발 추진,” “청와대 이미 승인” 등의 헤드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한편, 4월 26일에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 연대’(천주교연대)는 4대강 살리기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첫 생명·평화미사를 열었다. 천주교연대의 집행위원장인 사제는 미사에서 “우리는 정치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라 정의 때문에 왔다”고 말씀을 시작하였고, 미사에 앞서 천주교연대 상임대표 사제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명동성당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공간으로 국민 모두에게 의미가 있다”며 “생태와 환경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교회의 염원을 담아 명동성당에서 기도회를 열기로 한 것”이라 했고, “정부는 (최근 여론 악화의 원인이) 홍보 부족 때문이라고 여기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정부가 대화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5월 10일에 1만 명이 참가하는 대형 미사가 예정되어 있는 명동성당은 이제 4대강 반대운동의 중심이 될 것이며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적인 서명 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생명·평화 미사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반대 운동은 천주교뿐 아니라 불교계, 더 나아가, 개신교계 내에서도 퍼져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계는 4월 17일에 ‘4대강 생명살림 수륙대재’를 개최했고 개신교 목회자 800명은 이미 4월초에 ‘생명과 평화를 위한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발표하고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한 바 있다. 범종교계의 이런 흐름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4대강 사업은 살아 흐르는 강물을 막고 강과 함께 살아가는 뭇 생명의 터전인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업이기에,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는 종교계로서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투신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것이다.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 소속 사제와 신도들이 황사가 섞인 비가 내린 지난 4월 26일 저녁 서울 중구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우산을 쓴 채 생명평화 미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아울러, 세계적 권위의 과학전문지『사이언스』최근호도 국제적인 전문가들의 의견을 인용하며 “토목공사를 밀어붙여 불도저란 별명을 얻은 건설회사 시이오(CEO) 출신인 이 대통령의 청계천 살리기 사업이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고 소개하며 “4대강 사업은 유역관리 방법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다”고 비판했다. 작년 11월 유엔환경계획이 마련한 한국의 녹색성장에 관한 검토보고서 초안에서도 “4대강 사업은 논쟁적이며, 습지에 끼치는 영향 평가와 영향을 줄일 조처를 촉구하고 있다”고『사이언스』는 전하고 있다. 세계적인 과학전문지가 ‘4대강 사업’을 특집기사로 다룰 만큼 이 사업은 이제 세계 과학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이 대통령의 ‘불도저’ 식의 ‘소신’이 과연 옳았는지 무모했는지, 그 결말 역시도 이젠 국제적인 관심사이리라. 2년 전인 2008년 6월 30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촉발되었던 촛불집회 한가운데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개최한 시국미사의 강론 제목을 필자는 지금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다.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이 그것이다. 그 강론의 마지막 부분은 대통령이 우선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겸허히 인정할 것, 먼저 국민의 소리를 듣고 그 진실을 깊이 헤아린 다음 국민과의 대화에 나설 것, 그리고 쇠고기 문제를 정치적, 이념적인 갈등으로 몰아가지 말 것 등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그 후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겸허한 자기성찰 없이, 마냥 승리했다고만 믿는 교만한 권력에게도 교훈이 있었을까. 그것이 없었다면 또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 해도 이상할 게 있을까. 다시 서두의 로댕에게로 돌아가 보자. “깊고 의연하고 성실하십시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발표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깊은 진실인 것은 모두에게도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소신은 언제, 그리고 누구에게, 가능한 것일까. 이렇듯, ‘소신’은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 무모한 것일 수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속도전식으로 몰아붙인 ‘위업’이라 스스로 자평하는 70년대, 80년대 경제개발과 중동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거대한 어항을 만든 것인 청계천 사업의 치적을 강조하며, 이번에도 자기가 옳을 것이다, 나중에 모든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는 그 소신... CEO가 아니라 분명히 대통령인데... 아! 그 소신, 참으로 괴롭고, 무섭다. 제발 비극적이지 않기를...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40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냈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 이문재 <내 마음의 지도>   #섬진강 지난해 가을 섬진강변을 따라 사흘을 걸었다. 광양제철소 근처, 섬진강이 바다로 몸을 푸는 지점에서 출발한 나는 시속 4㎞의 속도로 서서히 북상했다. 망둥이가 뛰어오르는 섬진강 하류는 아름다웠지만, 이내 한 무더기의 공사현장과 맞닥뜨렸다. 남해고속도로와 19번 국도를 잇는 지름길을 새로 놓으려는 공사 같았다. 모든 공사현장이 그러하듯, 벌겋게 파헤쳐진 국토는 슬퍼 보였다. 강 하구 쪽에 보가 설치되는 바람에 재첩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무렵이었다. 국산 재첩이라고 써놓은 것들은 죄다 거짓말이며, 이제 재첩도 거의 중국산이라는 육성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걸으면서 나는 강가에는 길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강을 따라가려는 여행자는 국도 위의 아스팔트를 걸어야 했다. 어느 운 좋은 마을이나, 이따금 만나는 공원에서는 강을 발치에 둘 수 있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물결은 멀고 차량은 가까웠다. 발은 쉬이 피로해졌다. 그러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강변을 걸어봤던 것일까?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강변에 접근하기 쉽도록 자전거 도로를 만들겠다는 것일까? 강바닥의 모래를 퍼내어 수심을 깊게 하고 유람선을 띄우겠다는 것일까? 국도가 아닌 강변을 걷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4대강 사업을 자초한 것은 아닐까? 지리산의 구례 쪽 정상에서 바라본 섬진강의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청계천 복개한 도로 밑의 청계천에 가스가 차서 언젠가 청계천 일대가 폭발할 것이라는 괴소문마저 돌았던 청계천 복개도로와 그 위에 위태롭게 걸쳐져있던 고가도로를 뜯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제안을 처음 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박경리 선생이었다. 한겨레신문은 2002년 1월 1일 신년기획 특집으로 박경리 선생 인터뷰를 싣고, 청계천 복원 시리즈를 통해 이 동화 같은 상상에 시민권을 부여했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교통 혼잡과 천문학적인 비용 등을 들어 반대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론을 선거 공약으로 받았고, 김민석 민주당 후보는 미적거리다 반대했다. 결국 이명박이 당선됐고, 청계천은 불구의 몸으로 복원됐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흐르는 살아있는 하천이 아니라 수돗물을 역류시켜 거꾸로 흐르게 하는 죽은 하천이었다. 하천 바닥을 시멘트로 쳐바른 청계천 복원 사업은 토건족 이명박의 절묘한 변용이었다. 개발 시대를 반성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개발의 진화였다. #한강 여의도 63빌딩 아래 샛강과 만나는 수문 근처에는 자그마한 모래톱이 있었다. 둔치 공사 이후, 한강 하류에는 모래가 쌓일 공간이 없었지만, 이곳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모래톱이었다. 김소월의 <강변살자>는 노래가 절로 나오는 정다운 곳이었는데,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공사로 싹없어지고 말았다. 모래를 치우고 시멘트를 발라버렸다. 오 시장은 참 대단한 따라쟁이다. 환경연합 회원이었다는 분이 어찌 그렇게 환경감수성이 무딘지 새삼 놀랄 따름이다. 친구와 그곳을 거닐며,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둔치의 시멘트를 모두 걷어내고 자연하천을 살리자는 운동이 시작될 거라는 얘기를 하며 꿈에 부풀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한강의 다른 구역은 어떤가. 공터라고는 거의 남기지 않고 꼼꼼히 시멘트를 발라놓은 성실성이 놀라울 정도다. 지금의 한강 둔치는 숨 막히는 잿빛 그 자체다.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이 한강르네상스 사업으로 조성된 돌 축대를 가리키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경부고속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한강의 그 잿빛 구조물 위에서 즐겁게 논다. 사진도 찍고 자전거도 탄다. 인공어항이라고 비판받는 청계천을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즐기는 것처럼. 여름이면 발까지 담그며 즐거워한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대강 사업이 완공되면 시민들은 자전거를 타고 지금은 갈 수 없는 한강의 북쪽과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달릴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경치를 즐길 것이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이명박 대통령은 완공 이후의 편익이 과정의 모든 논란을 덮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그랬듯이. #기우뚱한 균형 분명히 말하건대, 섬진강의 모래밭은 멀리서 더 아름다웠다. 누군가는 흉물스럽게 바닥을 드러냈다고, 모래를 퍼내어 물이 가득 흘러야 비로소 강다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런 쪽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싶었다. 모래톱을 해치지 않으면서 가벼운 산책길을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개발과 환경이라는 두 가지 가치 사이에서 철학자 김진석처럼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보고 싶었다. #광기 그러나 이 정권의 4대강 사업은 그 자체가 너무 폭력적이어서 기우뚱한 균형을 말할 공간이 없다. 일체의 여론 수렴과정과 형식 절차를 생략한 채 밀어붙이는 이 독재적 만행 앞에 모든 이견과 상상은 설 자리를 잃는다. 가장 두려운 건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광기다. 대통령 한 사람이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해도 강행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불구가 되었다. #두려움 버스전용차선을 포함한 교통체계 개편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자신의 취임식 날인 7월 1일에 맞춰 모든 작업이 끝나도록 독려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버스카드 단말기는 고장 나기 일쑤였고, 버스전용차선에 깔아놓은 빨간 아스팔트는 빗줄기에 파헤쳐졌다. 시민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충분히 준비하고 좀 천천히 하면 안 되나.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안에 4대강 사업을 완료하기 위한 속도전이 다시 한 번 진행되고 있다. 서울의 교통체계야 약간의 시행착오 뒤 금세 진정되었지만, 4대강 사업이 가져올 후폭풍은 재앙에 가까우리라. 나는 다가올 여름이 두렵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33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린 나이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주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우주는 무한한 것이라고 하는데 나이 어린 나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주가 무한하다고 하면서 빅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빅뱅이 한 점(Spot)이 폭발하여 현재의 우주가 되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얼마나 큰 점이길래 무한하다고 하는 건지, 그 한 점(Spot)이 무한하다면 그 한 점(Spot)의 밖에는 무엇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한 점의 밖은 무(無)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無)라는 개념 역시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분자가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몇 세기 전인데, 이제 인간은 분자보다 작은 원자, 원자에서 더 나아가 전자, 핵, 양성자, 중성자는 기본이고, 300여종의 소립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의 인식의 한계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계속 확장되고 있다. 물론 과학의 수준이 현재 상태에서 파악할 수 있는 한도까지만 인간은 인식한다. 그러나 인식 범위의 확장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 모든 것이 의심에서 출발하고, 궁금증에서 유발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 인식 범위의 확장가능성은 열려있는가? 천안함이 침몰한지 벌써 20여일이 훨씬 더 지났다. 연일 TV, 신문, 인터넷 등을 통해 천안함과 관련된 속보가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천안함과 관련된 그 어떠한 의혹도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뢰 공격이 있었다면 왜 화상을 입은 승조원이 없을까, 군이 보유하고 있는 Tod 영상은 왜 중간이 뭉텅이로 없을까, 군 통신망을 놔두고 왜 국제상선망으로 통신을 했을까, 해경과 해군 사이에는 왜 진술이 일치하지 않을까 등등 천안함 침몰에 관한 국방부의 발표와 관련하여 의문과 궁금증은 갈수록 증폭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당시 천안함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학의 발전은 과학적 발견과 그 발견을 위한 노력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경우에 따라서는 후퇴라는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회 발전의 밑바탕은 정확한 사실의 발견 내지 이를 위한 노력이고, 밑바탕이 마련된 후(내지 밑바탕을 마련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더 나은 사회를 구상하고 실천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한 1200t급 초계함 천안함의 선수 부분이 수면위로 보이고 있는 가운데 해경 함선이 주변을 지나고 있다. 사진 출처 - 옹진군청 그런데 천안함을 둘러싼 여러 정황은 전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이다. 정보를 소지하고 있는 기관이 스스로 침묵하거나 정보를 알고 있는 자에게 침묵하도록 강요하거나 거짓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발표하는 등의 행위를 하고 있다. 각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러 의견과 의문을 쏟아내는 형국임에도 정작 천안함의 침몰 과정에 대해 모든 자료를 보유하고 있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침몰했던 천안함의 선체를 직접 확인하고 있는 군 당국의 신뢰할 수 없는 발표로 인하여 정확한 사실 관계조차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군 당국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천안함 사건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여러 계기들이 사장되고 있다. 게다가 천안함 사건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이처럼 온 국민을 슬픔으로 눈물짓게 하고, 전군의 사기를 땅바닥까지 떨어뜨린 중대한 사안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이 없는 현재와 같은 상황은 이전 정권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천안함이 왜 침몰했는가를 파악하는 문제는 우주가 끝이 없는 것인지, 전자, 양성자, 중성자, 핵보다 더 작은 물질이 있는지 파악하는 문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후자는 인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우연한 발견과 그러한 발견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충분할 수도 있지만, 전자는 이미 인식 가능한 사실이 존재하고 있고, 그 사실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그 사실을 바탕으로 발생가능한 동종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개선점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적어도 장래에 비슷한 사고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여 더 나은 해군을 만들 수 있으며, 무엇보다 징병제가 유지되는 한 줄도 없고, 빽도 없고, 힘도 없어 군에 자녀를 빼앗길 부모들이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천안함 희생자 분들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2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