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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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1. 한 세대 전만 해도 교육은 근대 문화로의 변화를 선도하는 계몽적 역할을 수행했다. 개인과 집안의 신분을 상승시켜 주기도 했고, 산업 현장과 연결되면서 한국 경제발전의 기초를 담당하기도 했다. 교육이라는 보이지 않는 투자를 통해 격변하는 시대를 경험하며 헤쳐 온 기성세대는, 교육으로 성공한 이든 교육의 기회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이든, 한결같이 교육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 정점에 대학이라는 것이 있다. 온 사회가 ‘올인’하다시피 하는 대학이란 무엇이며, 오늘의 우리의 대학은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 것일까. 2. 대학은 본래 교수 또는 학습자들의 모임 또는 조직이었으나, 일제 때 ‘사립학교령’을 설치해 일정 수준의 재산이 있어야 학교 설립이 가능하도록 한 뒤에는 설립자가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하는 흐름이 생겼다. ‘불온한’ 이들의 대학 설립을 제한하려는 전략적 의도에서였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사립대학은 그 뒤 시설로서의 물적 요소와 단체로서의 인적 요소를 함께 가지게 되었다. 3. 국공립 대학(국가나 지자체 같은 공법인이 설립자가 되어 시설을 설치, 운영한다)과는 달리, 사립대학은 재산을 근거로 구성된 재단법인이 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주체로 부각된다. 법인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학교의 운영 주체이자 소유자로 자리매김해가면서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해 교육 사업을 벌이는 흐름이 커져간 것이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법인 이사 내지는 경영자가 교수나 학생에 대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학생, 시민, 야당인사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국민촛불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4. 하지만 대학은 그 의미와 속성상 ‘시설’만이 아니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조직’이기도 하다. 대학은 교사와 학습자의 만남을 위한 조직적 중개자로서의 측면도 크다. ‘조직’이란 개별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을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결합시켜 능률과 합리화를 도모하는 활동 공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분명히 하나의 ‘조직’이다. 당연히 조직 구성원 전체가 대학의 주체이기도 하다. 시설 투자를 한 설립자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학문의 보급자인 전체 교수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시설 운영의 근간인 등록금을 내는 학생이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다 정당하다. 5. 때론 이 세 주체들이 충돌하곤 한다. 그러나 충돌이 있다는 것은 도리어 학교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영자, 교수, 학생이 어떻든 주체의식,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학 교수들은 자신을 단순 피고용자로 여겨 자신을 선발한 경영자의 경영 방식이나 평가 기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때로는 비리도 눈감아주며 스스로 그에 종속되고 마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월급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냉소적인 회피가 주류를 이룬다. 학생도 별 주체의식 없이 졸업장이라는 자격증만 따면 그만이라는 식의 소극적 처신에 머문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특별히 사립대학의 온갖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주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사립대학의 문제는 대학 구성원이 자기 주장을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도피해 개인의 안일만을 보전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대학의 주체들이 교육의 공공성에 눈감으면서 소유 의식이 강한 설립자나 경영자의 욕망의 크기에 비례해 문제도 그만큼 커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이찬수 위원은 현재 한국종교교육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18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큰 지진이 있었네요. 2011년 3월 11일. 토호쿠(東北)지역. 진도 9.0. 후쿠시마 원전 파괴 방사능 유출. 희생자와 이재민은 얼마나 되는지 모름.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의 땅. 우리에겐 무척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각 기관마다 마치 이 땅에서 일어난 재해처럼 들고 일어나 나눔을 강조했고 전파를 쏜다는 방송이면 죄다 ARS 걸어놓고 누가 많이 모으나 경연을 했지요. 이웃나라의 아픔에 연대의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살갑고 정다운 일이 없으니 무척 잘된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일본의 피해상황만 보도가 될 뿐 그 안에 살고 있는 재일 동포에 대한 뉴스는 한줄 찾기가 어렵더라는 말입니다. 걱정이 되었지요. 도쿄조선 중고급 학교는 강당이 무너졌고 센다이의 토호쿠 초 중급학교는 건물자체가 기울었다는데, 그래서 졸업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데 후쿠시마는 제2의 체르노빌이 되어 방사능 천지가 되었다는데. 그곳에도 조선학교가 버젓이 있는데 이미 4년 전 극우인사인 이시하라의 도쿄도에 빼앗길 뻔 했던 에다가와(枝川)조선학교를 되찾는 모금운동에 참여했던 내가 걱정이 없었다면 말이 안되지요. 이웃나라의 재해복구 성금이 600억원이나 모였지만 그 이웃으로 인해 차별받고 고통 받았던 또 다른 나에게는 단 한푼도 지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요 “거기에 조선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우리의 아이들이 있는데..” 그때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1923년 9월1일 관동 대 지진입니다. 약 15분 동안의 지진 만으로 도쿄의 3/4이 폐허가 되었고 약 14만2천명이 사망할 지경이었으니 당연히 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요. 그때 터져 나온 민심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일본 내무성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조선인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트려 약 6000-9000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던 일은 잘 기억 하실 겁니다. 그날이후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어머니의 말 모국어를 잊게 됩니다. “생사를 넘나들던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날 이후 말문을 닫았습니다. 젖 먹던 시절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자장가도, 고향땅 밟으며 재잘거렸던 수많은 조선말에 대한 기억도 다 지워야 했습니다. 고향집 주변에 사시사철 피었던 꽃의 이름과 이웃들의 정겨운 말투도 다 잊어야 했습니다. 조선말을 한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경험한 그들에게 맘 놓고 조국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란 잠들기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는 가족의 안부 몇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모국어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렇게 20여 년을 더 살아 해방을 맞았고 그해 12월에만 일본 전역에 약 560여개소의 국어 강습소가 세워졌습니다.” -졸저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중 - 정체성 이라는 게 그런 거지요. 나의 생활이 진창이 될 때면 술 한 병 들고가 잔 올리며 꺼이꺼이 울고 싶은 어머니의 무덤 같은 것. 일본인이 되어 넋 놓고 살아도 생에 단 한번이라도 꿈속에서나 만나는 고향의 바람에 살 부비고 싶은 것. 뼈와 살은 바꿀 수 있으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몸속에 흐르는 조선인 이라는 피 때문에 그들은 학교를 세웠고 조직을 만들었으며 모국어를 가보로 여기며 지난 60여년을 한결같이 교육 시켰습니다. 지난 3월 10미터가 넘는 대형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고 이어 방사능 경보로 온 마을이 텅텅 빈 그때도 후쿠시마 조선학교의 교사와 학생 15명은 학교를 지켰습니다. 학교마저 비우면 언제 학교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당장은 죽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보다 우선한 것입니다. 결국 이 학교는 폐쇄되고 인근 니이가타로 이전해야 합니다. 센다이의 토호쿠 조선학교는 무너진 강당 대신에 좁은 식당에서 졸업식을 진행했습니다. 갓 입학한 어린 초급학교생 들은 갈라진 벽을 임시로 메운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진이 나고 나서 나보다 더한 조바심을 가졌던 김명준 (영화 “우리학교” 감독)이 전화를 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우리 이대로 있지 맙시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여럿이 모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지진피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땅연필” 뜨거운 청년 배우 권해효와 꽃보다 아름다운가수 안치환. 그리고 늘 부족한 내가 공동대표를 맡고 진달래 냄새 가득한 김명준이 집행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몽당연필”의 목표액은 기둥뿌리 두개. 조선학교가 다시 세워지는 그날 건물의 수많은 기둥 중에 두 개쯤은 아이들의 고향 남쪽이 전해주는 두 손의 온기로 세웠으면 하는 것이지요. 지진으로 갈라진 토호쿠 조선학교의 벽에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적은 글귀가 마음을 흔듭니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그 글귀에 우리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지난날 그때 만약 이곳 한국에 있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면 우리의 아버지가 무서운 총칼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했다면 우리도 이역의 땅에서 핍박받는 조선의 아들, 지척의 갈라진 조국을 어머니로 여기며 오직 “통일” 두 글자만을 그리워하는 조선의 딸. 사랑하는 아이들아 고통은 극복 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으나 그렇단다 고통은 견뎌 내는 것. 그것도 웃으며 견뎌 내는 것 그러니 이제 함께 견디자. 그리고 함께 지키자. 지진과 해일로 방사능 피해로 무너진 너희의 어깨를 아직은 튼튼한 우리의 어깨에 걸고 “대지는 흔들어도 함께 가자, 손잡고 가자 웃으며 당당하게 가자”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45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자유, 평등, 박애를 이념으로 하였던 미완의 프랑스 혁명도 본질은 빵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요구였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및 지중해 일대에 위치한 국가에서 발생하여 현재도 진행 중인 속칭 ‘재스민 혁명’도 결국 빵과 자유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진행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도 모두 동일한 주제였다. 현재의 우리 화두 역시 빵과 자유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푸른 기와집에서 사시는 지존께서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하여 “원전을 포기하는 것은 인류가 기술면에서 후퇴하는 것이라면서 더 안전한 원전을 만들어 내야지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씀 하셨단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두 달 간 방사능 물질 누출량만 따져도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발 당시 40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결국 일본 총리는 원전 증설 백지화를 선언하였다. 그런데도 지존께서는 시민의 생명·건강권을 얼마나 존중하고 계시는지 위 발언으로 또다시 충분하게 보여 주셨다. 이전에도 그분은 ‘광우병 소 수입’으로 촉발된 촛불 시위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국민의 건강권을 엄청 챙기신 나머지 청와대 뒷동산에서 눈물까지 흘리신 분이라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시민의 자유를 엄청 존중하시는 법치주의 그 자체인 그분의 태도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이다. 미네르바, PD 수첩, KBS 사장 사건 등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를 짧은 시간 안에 축적 시킨 출중한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다. 좀스럽게 G20 정상회의 때 낙서한 사람까지 처벌하면서도 ‘낙서금지법’은 왜 안 만드시는지도 궁금하다. 시민의 자유를 넘어서 시민의 생명과 건강까지 지극 정성 보다 듬는 그분한테 존경심으로부터 눈을 떼기 힘들다. 채용게시판을살펴보고 있는 구직자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존께서는 청년 실업 등의 일자리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우리의 청년 실업률이 8∼9%인데 미국, 영국, 프랑스 보다 좋은 성적”이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분이 누구신가. 그분은 747공약. 7%의 경제성장에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 건설을 약속하고 지존으로 등극하신 분이 아닌가. 그런데 무능과 거짓이 성적표로 곧 나타났다. 그러자 그분은 “임기 내 한번이라도 7% 성장하면 된다.”고 까지 말씀을 하셨단다. 이 정도면 지존은 지도자의 지존이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희극을 연출하신 연극계의 지존임이 분명해 보인다. 왜 ‘나는 가수다.’처럼 ‘나는 연극인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지 않은지도 궁금하다. 빼어난 연출과 연극으로 권력을 꿰어 찬 후 심각한 청년 실업 문제에 대하여 좋은 성적이라고 하였다. 되뇌어 볼수록 기쁨이 넘치지 않는가. 일자리 좋은 성적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포만감. 빵과 자유에 대한 궁핍증은 힘없는 시민이나 사회적 약자와 아픔을 함께하고,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자칭 ‘기업(재벌) 프렌들리 대통령’을 뽑은 국민의 선택에 의한 ‘위대한 탄생’의 결과다.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위대한 탄생이어서 불량품이더라도 리콜도 할 수 없다. 깜깜한 밤하늘에 쏟아져 내려오는 별빛 같은 희망과 탄생도 우리에게는 선택 사항일 뿐이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02 | 추천: 0
정 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렸을 때 주말 백화점을 갈 때면 가족들 모두 민망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쇼핑을 마치고 백화점 주차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에 집결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붉은 조명 아래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는 그녀들을 보았을 때 소설에서 읽었던 ‘몸 파는 여자’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부모님댁에 갔다가 예전의 그 백화점을 가보니 백화점, 영화관 등이 들어선 대형복합쇼핑센터로 화려하게 변신해 있었습니다. 집결지는 달라진 주변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흉물이었습니다. 경찰은 올 3월말까지 집결지를 폐쇄하겠다고 통보하였고 전면 단속에 들어갔습니다. 폐쇄 방침의 배후에 백화점이 있다고 생각한 성매매 여성들은 백화점 매장에 들어가 동전으로 계산을 하겠다며 점거 시위도 하고 보디페인팅을 하며 분신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성매매는 불법입니다. 불법영업장을 폐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당국이 집결지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집결지 주변이 낙후되어 있을 때는 묵인되다가 개발이 진행되면 대책 없이 내 쫓긴다는 것입니다. 집결지 여성들이 지난 5월 17일 성매매 특별법 폐지 등을 주장하며 영등포 일대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는 우리 개발사(開發史)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입니다. 1966년 존슨대통령이 방한하여 시청 앞 광장에서 환영행사를 할 때 전세계 TV에 시청 주변의 슬럼지대가 방영되었습니다. 주로 중국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국가적 망신이라고 생각한 정부는 소공지구 재개발을 서둘렀고 지금 그 자리에는 프라자호텔 등이 서 있습니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총회를 1985년 서울 개최로 유치하였습니다. 당시 그 정도 규모의 국제행사를 치를 수 있을 정도의 연회장을 갖춘 호텔은 힐튼호텔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힐튼호텔 주변인 양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성매매, 소매치기, 앵벌이, 넝마의 소굴이었습니다. 힐튼호텔 객실에서 세계 각국의 참가자들이 양동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토지개발공사가 나서 재개발사업을 시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매매여성 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은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성매매여성의 경우 이들이 다른 생계의 수단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성매매과정에서 입은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묵인해 오다가 개발 사업으로 인하여 주변의 환경과 집결지가 더 이상 어울릴 수 없는 시점이 되면 대책 없이 쫓기는 것입니다. 성매매를 막기 위해 집결지가 폐쇄되는 것이 아니라 집결지로 인하여 저평가되어 있는 주변 건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폐쇄된다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강남에 건축된 오피스텔 빌딩에서 성매매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뉴스보도를 접하고 보니 집결지 폐쇄의 본질은 성매매가 아니라 집결지의 낙후된 외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이것도 디자인 서울의 그늘진 모습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51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4대강 공사를 위해 설치한 낙동강 구미취수장의 임시보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고로 경북 구미시와 일대 50여 만의 식수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라는 소식이 바로 며칠 전인 5월 8일 밤 9시 MBC 뉴스 데스크에서 보도된 바 있다. 공영방송 9시 뉴스에서도 이젠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이 보도되나 싶었다. 정부가 애초에 제시한 청사진은 물 부족 해결, 홍수 예방, 수질 개선, 그리고 과도한 개발로 황폐화된 하천 생태계를 복원하고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비참하다. 16개의 보 건설과 준설로 인해 4대강 본류의 수질은 악화되었고 침수지역은 지천까지 넓혀졌으며, 생물종은 절반으로 줄었고, 4대강 사업이 올려놓은 땅값이익은 그 대부분이 외지인에게 돌아갔다. 허나, 법조인들은 이런 문제를 소송을 통해 바로잡겠다고 하고 정치권은 선거를 통해서 바로잡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고만 있는 국민은 어떡해야 하는가, 어떡해야 했는가. 강변에서 농사짓던 농민들은 생존 기반을 잃었고, 보도조차 통제된 채, 4대강 공사 노동자들은 쌓이는 피로와 허술한 안전조치로 인해 조용히 죽어나갔다. ‘사람을 잡는 개발’이자 ‘죽음의 행렬’이다. 4대강 공사가 시작된 2009년 11월 이래로 지금까지 4대강 공사장에서 숨진 노동자와 이 사업과 연관되어 목숨을 잃은 국민은 모두 30명이다. 2012년 정권 재창출을 위해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채근하는 대통령 때문에 안전관리는 뒷전인 채, 달리는 공사차량에 운전자가 치여 죽고, 준설중인 굴착기와 준설선에서는 노동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 나흘간 4명의 노동자가 공사현장에서 목숨을 빼앗겼는데도 정부는 4대강 사업 중단은커녕 친수구역개발사업으로 규모와 영역을 오히려 훨씬 키웠다(정의구현사제단 소식지,「빛두레」, 2011년 5월 1일자 참조). 사업목적과는 너무 다른 이런 삽질, 그 무모하고 무식한 ‘속도전’, 그야말로 누구를 향해 분노하고 통곡해야하는지 묻고 싶으면서도, 참으로 ‘가관’이다. 정부와 대통령은 왜 애도의 말 한마디 없이 쉬쉬하는가? 어찌 이리도 잔인할까? 작년 2010년 7월 7일은 경부고속도로 개통 40주년 된 날이었다. 한국경제발전사, 아니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을 그 미친 ‘쾌거’ 역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요구했다. 총 428km의 고속도로를 불과 2년 5개월(1968년 2월 1일 착공, 1970년 7월 7일 개통)에 완성했는데, 토목기술의 부족을 머릿수로 메우는 식으로 공정을 밀어붙였기에 연인원 850만 명이 도로 건설에 동원되었고, 가장 위험한 공사였던 터널공사도 인력으로 기술부족을 메우다 보니, 경부고속도로 건설 도중 총 77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터널공사 낙반사고로 인한 사망이었다고 한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당제터널 구간 근처인 금강휴게소에다 박정희 대통령은 위령탑을 세워 개통식 날에 직접 제막을 했다고 하며, 이은상은 추모글에서 이들을 “조국근대화를 위한 민족행진의 전사”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순직 노동자 유가족들은 정부로부터 보상금 한 푼 못 받았고, 다만 소속 건설사에서 유가족에게 50만원(현재가치로 약 500만 원가량) 정도의 위로금을 지급했다고 알려졌을 뿐, 이들은 너무나 억울하게, 너무나 빨리 잊혀졌다. 겨우 도로공사 측에서 매년 위령제를 열어 왔다는 사실에서나 위안을 찾아야 할까.(「조선일보」, 2010년 7월 7일,「동아일보」, 1970년 7월 7일 참조). 비슷한 논리인 이명박 정부는 4대강 개발 순직 노동자들에 대해 어떻게 나올까. 아니, 그때 어떻게 대해준들, 글쎄, 그게 다르랴. 2009년 11월 이래로 지금까지 4대강 공사장에서 숨진 노동자와 이 사업과 연관되어 목숨을 잃은 국민은 모두 30명이다. 노동자들의 안전을 외면한 '속도전' 공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필자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중의 하나가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성서 구절은 이와 관련하여 흔히 인용되거나 상기되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일부를 인용해보자.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구약성서 시편 8:3-8)(강조 추가) 곧,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사람 안에는 하느님이 담겨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모질게 대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모질게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저 하늘과 달과 별들을 선물로 받은 존재이자,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며,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이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곧 하느님이 담겨 있고 우주가 담겨 있다. 올해 내 4대강 사업이 다 완공되면 국민들이 비로소 자기의 뜻을 알아줄 거라는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그것에 공사 기간을 어떻게 해서라도 맞추라는 상부의 지시와 독촉, 시공사들 간의 경쟁에 떠밀리며, 삽질은 앞으로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리고, “과연 누가 센지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라는 식으로 기나긴 장마와 홍수의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시키셨는데, 삼백 몇 십만 마리 가축들이 졸지에 매장되어도 가축들에게는 커녕 국민들에게도 변명 말고는 한마디 사과조차 없던 정부이다. (생매장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미 돼지는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물렸다는 언론보도가 생각난다. 그게 신기했나?) 벌써 30명을 넘고 있는 ‘물길’ 순직 노동자들과 국민들의 희생에 대해 철저히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정부에게 묻고 싶다, “아니, 도대체 사람을 무엇으로 여기는데, 그리고 그 삽질이 도대체 무엇인데?”라고.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08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디에 빠져 사는 사람이 좋다. 취미, 운동, 드라마, 쇼핑, 게임, 일 무엇이든지 빠지면 흥겹다. 열정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인생은 어떠한가. 열정을 갖고 재미와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을 능동적 삶이라 불러본다. 삶은 수동에 빠지기 쉽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한결같이 힘들기 때문이다. 입에 풀칠 할 일이 힘들다. 지겨워도 일해야 산다. 짤리면 끝장이다. 항시 불안하다. 인생에 재미와 열정을 더하기보다 세상에 더 많이 지배당한다. 재미, 열정, 삶의 애착이 사라진다. 머리가 텅텅 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노동자의 삶이 그렇고 공부하는 대학생의 삶이 그렇다. 수동에 빠져 살아가는 삶은 누가 보든지 흥겹지 않다. 일자리 걱정, 취업 걱정에 한치 앞도 볼 수 없다. 재미와 열정을 더하는 삶을 살아갈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살아남아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에, 청년실업에 자존감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끝내 자살한다. 능동적 삶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을 위협하는 위기의 한국사회에서 비명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수동에 빠져 숨죽여 살아가는 삶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 전까지는 우리 사회의 위기를 남의 집 불구경 하듯 한다. 위기에 응전하여 함께 술렁거리지 않는다. 나약해진다. 배짱이 없기에 맞서지 않는다. 생계 걱정에 혼자 끙끙 앓으며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민감해진다. 생사여탈권을 자본권력에 넘겨주고 자본의 이윤논리, 경쟁논리에 복종한다. 자본에 아부하고 자본의 논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피도 눈물도 상식도 없는 세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삶을 길들이는 지배 권력에 복종하여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살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경쟁의 낙오자가 되어 솎아지게 된다. 솎아내기에 걸려서도 뭇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체면을 따지다 대들지 못한다. 인생의 위기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 자포자기하고 만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구조조정의 위기상황에서 노동자는 능동적 삶을 복원해야 한다. 제121주년 세계 노동절인 지난 5월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이 등록금 인하와 임금 인상등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배짱은 가장 튼실한 유도책이다. 눈치보고 체면을 따지고 더욱 움츠려들어 자본에 사정을 해서야 자본의 솎아내기를 당할 수 없다. 자본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잃어버렸던 배짱을 회복해야 한다. 경쟁을 위해 이윤을 좇아 노동자를 솎아 노동자를 갈라놓는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유능치 못해 솎아진 것으로 자책하면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노동 전체의 이해관계에 민감해져야 한다. 실리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쟁과 협상에서 자본권력의 기망과 회유, 탄압을 극복하기 위해 꼭 지녀야 하는 태도이다. 그것이 순응하는 삶에 빠져 상처받은 자존감을 살려내는 길이다. 노동자의 능동적 삶은 노동이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한국사회를 이루기 위한 대안이다. 노동자가 위기의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한 일에 열정을 갖고 대안사회의 상을 좇아 지혜를 닦고 힘을 길러야 한다. 능동적 삶은 인간의 본성에 꼭 맞다. 배짱과 열정, 대의와 지혜를 가진 우리들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수동적 삶을 거부하고 능동적 삶의 실현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장애물을 곳곳에서 제거할 것이다. 치솟는 등록금, 청년실업에 신음하는 청년학생들의 능동적 삶은 누가 복원해 줄 것인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생의 위기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 자살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을 위해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따뜻하게 감싸 줄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과 함께 배짱 갖고 세상에 맞서고 싶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2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디에선가 헤겔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는 클리셰나 다름없는 마르크스의 아포리즘이 요즘 부쩍 자주 눈에 띈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가리타니 고진 같은 이름난 사상가들의 글을 통해서. 이런 현상은 세계 금융위기 이후 <자본론>이 다시 유행한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세기를 들끓게 했던 현실 사회주의가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은 뒤 세계를 제패한 듯 기고만장하던 신자유주의가 허망한 실체를 드러내자, 세상의 구조를 설명하는 원전으로서 마르크스가 다시 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인용한 이유는 나폴레옹 1세와 3세가 노정한 역사적 아이러니의 반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민중들의 위대한 승리로 기억되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848년 혁명이 나폴레옹 가문의 전제정치로 귀결되고만 아이러니 말이다. 마르크스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당통 대신에 코시디에르가, 로베스피에르 대신에 루이 블랑이, 1793~1795년까지의 산악당(몽타뉴파) 대신에 1848~1851년까지의 산악당이, 삼촌 대신에 조카가.” 여기서 삼촌은 나폴레옹 1세, 조카는 나폴레옹 3세를 말한다. 나폴레옹 3세, 그러니까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1832년 사촌인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 1세의 외아들)이 죽자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하고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1848년 혁명 뒤 수립된 공화정에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데뷔한다. 이어 대통령 선거에 나서 옛 황제의 조카라는 혈통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각계각층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익을 모두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에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헌법을 바꿔 스스로 황제가 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뒤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 1세의 반복이었다. 가리타니 고진은 <역사의 반복>에서 황제로서 보나파르트의 정책은 그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찬 것이었다고 단정한다. 보나파르트는 본질적으로는 보호주의자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생시몽주의자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모든 계급의 이익을 모두 만족시킬 것처럼 선전했다. 중간계급과 농민들에게는 질서와 번영을, 빈곤층에게는 복지를 약속했다. 빵값을 낮게 유지했고 위생적인 노동자주택을 건설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쓴 소책자 가운데 <빈곤의 퇴치>(1844년)는 좌파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1930년대에 독일이나 일본에서 파시즘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보나파르트주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게 좋다. 우에서 좌까지 모든 당파, 계급, 민족의 지지를 모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보나파르트주의자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2대 정당이라는 구조를 파괴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경제를 희생시키는 시장자유화인가 그것에 대한 보호인가 하는 대립은 눈앞에 놓인 최대의 정치적 쟁점 중 하나였다. 그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처럼 행동하는 정치가는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해도 좋다. 물론 그것이 항상 파시스트인 것은 아니다.”(가리타니 고진 <역사의 반복>) 파시즘을 보나파르티즘의 한 갈래로 보는 시각이다. 실제로 나폴레옹 3세의 집권 과정과 통치 스타일은 히틀러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먼저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국민투표를 거쳐 합법적인 독재자가 된 점이 그러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왕을 추방하고, 좌익혁명이 유산된 후에 생긴 바이마르공화국의 대표제 속에서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국민투표를 통해 총통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루이 보나파르트가 황제가 되었던 과정과 상동 적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며,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 그것을 조작하기도 하는 것이 파시즘과 보나파르티즘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보나파르트가 삼촌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가리타니 고진은 파시즘이라는 개념의 재정립 필요성을 제기한다. “일반적으로 전제적인 정치형태를 파시즘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와 같은 용법은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유해하다”는 것이다. 파시즘을 이렇게 왜소화시키면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어떤 매력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중략) 한마디로 말하자면, 파시즘은 러시아혁명(사회주의)의 침투에 대한 대항혁명(counter-revolution)이다. 그것은 반혁명(anti-revolution)과는 다르다. 파시즘은 그 자체가 혁명적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흡인력이 있는 것이다.”(같은 책) 설명이 장황했지만, 누가 떠오르지 않으시는지. 보나파르트가 삼촌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다.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1세 시절의 영광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콘이었듯이, 박근혜는 박정희 시대의 고성장과 번영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향수의 아이콘이다. 보나파르트가 자신을 모든 계급의 대변자, 갈등의 중재자인 것처럼 포장했듯이, 박근혜는 신뢰와 복지를 내세우며 만인의 연인 같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박근혜는 노련하다. DJ와 YS이후 사라진 ‘정치9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현역 정치인이다. 최대한 말을 자제하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의 정치를 통해 어눌한 캐릭터의 단점을 극복할 만큼 영리하며, 진보진영의 독점 테마였던 복지 이슈를 선점할 만큼 과감하다. 복지 이슈에서 여전히 방어적인 조중동과 경제 관료들, 전경련 등이 무안해 할 정도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결정적 순간에 일침을 놓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누군가는 박근혜 주변 인사들이야말로 정통 TK(대구경북)들이어서 이명박 정부보다 훨씬 더 말 안 되는 사람이 많다고 전한다. 박근혜가 집권하면 이명박 정부보다 문제가 많은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 걱정이다. 돌이켜보면,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전두환의 민정당으로 계승된 대한민국 수구정당의 역사가 YS의 민주계를 수혈한 신한국당부터는 족보가 꼬이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이재오나 김문수, 박형준 같은 변절한 운동권들이 주류를 차지한 이명박 정권은 더욱 이질적인 집단이 되었다. 이른바 친박이 친이와 쉽게 동화되지 않는 이유는 박근혜라는 아이콘과 더불어 자신들이 정통 티케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정통 티케이가 보기에 영포라인은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이른바 정통 티케이가 정권을 놓친 지가 어언 20년이 다 되어간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들은 오래 굶었다. 지금 우리는 박근혜라는 한국의 보나파르트를 통해 역사의 반복을 목도하고 있다. 박정희라는 비극에 이어 박근혜라는 희극을.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72 | 추천: 1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승만 대통령의 유족들이 51년 만에 4.19희생자들에게 사죄를 드린다며 성명을 발표하더니, 4월 19일에는 묘소에 참배를 시도하다가 4.19유족들에게 제지당했다고 한다. 민주정신의 총체적 결손을 절감하는 이 시대에 이승만의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뜬금없이 이렇게 한 연유가 궁금해졌다. 오래도록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사죄의 감정을 때가 되어 표현하였다고는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4.19 희생자들의 혼령을 필요하게 되었을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유족들은 “제주 4.3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선포한 계엄령이 불법적”이라고 보도한 <제민일보>가 대통령과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실제로 당시 대한민국 헌법은 계엄령을 법률에 따라 선포하도록 하였는데도 계엄법을 제정하지 않는 가운데 계엄령을 선포했기 때문에 제민일보의 보도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제 이승만의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사죄하기 전에 제주에서 민간인학살, 한국전쟁 중 민간인학살, 사사오입개헌, 조봉암 등 정적에 대한 사법살해, 부정선거와 4.19혁명 등에 대하여 공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유족들과 관련단체의 견해가 어찌되었든 간에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이고 공적인 평가가 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유족들의 사죄와 참배가 사망한 정치인의 오명을 털고 뭔가를 시도하기 위한 사과정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정치인으로서 행적으로 충분한 것이지, 유족들의 소급적 참회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정치인으로서 참다운 명예와 평판은 어디에서 올까? 미국의 대통령 워싱턴(G. Washington)이나 로마 공화정의 정치인 킨키나투스(Cincinatus)의 예를 통해 분명해진다. 나아감과 물러섬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를 이론적으로 풀어냈다. 그에 따르면 행복한 삶이란 정치적 삶(bios politikos)과 관조적 삶(bios theoretikos)의 조화이다. 정치적 삶이란 공동체 속에서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최고로 발휘하는 실천적 생애를 말하고, 관조적 삶은 이러한 실천적 삶으로부터 제때에 물러나와 삶을 원리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좋은 삶이라는 이러한 두 측면의 조화로운 결합이다. 세상에 나가는 것과 물러나 안빈낙도하는 것, 끝내는 신선(神仙)이 된다는 동양의 철학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공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고향으로 복귀하는 워싱턴이나 킨키나투스는 좋은 삶에 대한 귀감이 된 것이다. 4·19혁명 51돌을 맞은 지난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 유영봉안소 사진 출처 - 한겨레 존경과 명예는 억지로 얻을 수 없다. 물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권력을 영원히 보유하기 위해 그는 정상에서 하산하는 일을 잊고 ‘공그리’를 치다가 마침내 전제자로 전락했다. 그는 단지 대통령을 오래하다 퇴진의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다.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갖은 헌정파괴와 인권침해를 저질렀으며, 그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도 없다. 그가 시작한 나쁜 통치는 한국현대사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쿠데타와 폭정의 길잡이가 되었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처음이라고 해서 적당히 기념할 수는 없다. 사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상호성을 의미한다. 물론 희생자가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가해자 측은 사죄를 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사죄의 진정성이다. 진정성이 담긴 사죄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향한 공적인 동조를 지속적으로 표방한다면 완강한 피해자들조차 사죄를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정황을 보면 진정한 사죄라기보다는 가해자의 명예를 위한 조건부 사죄와 같다. 유족들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사죄를 기대해본다. 그러면 4.19유족이 사죄의 뜻에 공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승만 유족과 4.19유족간의 사죄와 용서는 다분히 사적인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이 문제를 국민적인 차원에서, 국가의 차원에서 공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민주적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에 대한 미움은 단지 관련자들의 관련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증오가 아니라 공화국의 정신적 토대로서 애국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객관적 미움을 완화시키려는 시도들은 바로 공화국의 주춧돌을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 이 땅에 헌정유린자들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하는 일은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객관적 미움을 보존하는 방책을 세워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53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프랑스의 사상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명저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유형을 몇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경쟁’이다. 경쟁은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고 사람들이 어떤 것에 즐거움을 느끼게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모여 즐기던 가위바위보 게임에서부터 엄청난 수익이 오고가는 프로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경쟁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놀이는 거의 없다. 경쟁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두 팀 간의 우열을 가리는 단순한 청백전식 경쟁도 있고 퀴즈처럼 여러 명 가운데 한 사람의 승자를 가리는 경쟁도 있다. 최근 들어 가장 각광받는 경쟁의 유형은 서바이벌이라는 것이다. TV는 온통 서바이벌 경쟁을 내건 오락물로 넘쳐난다. 공중파와 케이블을 가릴 것 없이 조금만 채널을 돌리다 보면 노래, 패션, 요리, 심지어 다이어트까지 서바이벌 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공중파 채널은 아예 신입사원을 뽑는 과정을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다. 서바이벌은 글자 그대로 생존을 건 경쟁이다. 그 판에서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는 것, 그러니까 매 회 탈락자가 되지 않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다. 서바이벌 경쟁 게임은 한국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현실적 생존 방식과 너무나 유사하다. 우리는 하루하루 서바이벌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어려서는 좋은 성적을 얻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취업을 위해, 취업한 후에는 승진하고 살아남기 위해 경쟁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서바이벌 경쟁은 더욱 치열하고 무자비해졌다. 웬만큼 좋은 대학을 가도, 웬만큼 좋은 직장을 얻어도 끝까지 생존하리라 예측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삶이 불확실해질수록 서바이벌은 어려워지고 경쟁은 뜨거워진다. 그럴수록 사회는 벌거벗은 욕망들이 적나라하게 사투를 벌이는 정글로 변해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정글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벗어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따라서 어떡하든 생존하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TV는 온통 서바이벌 경쟁을 내건 프로그램들로 넘쳐나고 있다. 현재 방송되고 있거나 준비 중인 서바이벌 프로그램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TV의 서바이벌 게임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광은 바로 그런 이중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대한 열광 속에는, 경쟁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어떡하든 그 게임에서 이겨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이 모순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TV를 통해 보는 서바이벌 게임은 시청자들에게 가상의 게임일 뿐이다. TV밖에서 그것을 보는 우리는 그 잔인한 서바이벌의 룰로부터 벗어나 있다. 우리는 그저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 벌이는 무자비한 서바이벌 게임을 관전할 뿐이다. 누군가가 거기서 탈락하고 패배한다고 해도 그게 나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게임일 뿐이고 나는 그로부터 벗어나 그걸 안전하게 지켜볼 수 있다. 내 문제가 아닌 한 서바이벌 게임도 재밌는 볼거리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게임 속의 현실은 나의 현실과 닮아 있다. 거기서 벌어지는 탈락은 언젠가 나의 현실에서도 재현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TV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게임 속에서 현실과 유사한 공포를 느끼고 거기서 탈락한 패배자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TV의 서바이벌 게임에 열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공정한 룰이 적용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모든 게임은 공정한 룰을 전제로 하지만 현실의 게임에서 공정한 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의 불확실성은 그런 룰이 언제 어떻게 불공정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TV의 서바이벌 게임이라면 당연히 정확하고 공정한 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현실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게임의 룰이 적어도 TV 쇼에서만큼은 정확히 작동하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깨어질 때 시청자들은 분노하게 된다. <나는 가수다>에서 첫 번째 탈락자인 김건모를 탈락시키지 않고 재도전의 기회를 준다고 했을 때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 건 그 때문이다. 공정한 게임의 룰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는 TV 서바이벌 게임에서 룰이 깨진 것이다. <나는 가수다>에 쏟아진 시청자들의 비난에는 공정한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투영되어 있다. 탈법과 비리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대기업, 국민과의 약속 따위는 우습게 여기며 부자와 강자만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정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는 사법부 등 현실에서 공정한 게임의 룰이 훼손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그런 불공정 게임의 장이 되고 보니 그에 대한 분노는 대상도 불분명하고 구체적이지도 않으며 공허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무정형적으로 쌓인 분노가 <나는 가수다>라는 아주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폭발한 것이다. <나는 가수다>에 비난이 쏟아질 때, 공정 사회를 유린하는 권력집단에는 분노하지 않고 한갓 예능 프로그램에만 분노를 터뜨린다는 힐난도 있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비판이지만 달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비난하고 비판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TV 속의 가상현실에서라도 공정성이 실현되는 걸 보고 싶었던 거다. 어쨌거나 숨 막히는 서바이벌 경쟁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 TV 속의 서바이벌 게임에 열광하는 풍경은 어쩐지 씁쓸하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52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 깔려서, 이어 닥친 쓰나미에 쓸려가 죽었다. 곧이어 원자력 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많은 사람이 방사능에 피폭되고, 인근 주민들은 생활터전을 버려두고 대피했다. 방사능 물질에 대한 걱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빠져나갔다. 한국도 위험하다며 한국을 떠나는 외국인도 있다. 한국 상공으로는 날아들지 않을 것이라던 방사능 물질들이 전국에서 검출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직접적인 방사능 위험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도 이래나 저래나 한국에서 떠나기 어렵다. 한국의 원전은 지금도 계속 건설 중이고, 해외로도 수출하고 있다. 구제역으로 전국에서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살처분을 받았고, 산채로 땅에 매장됐다. 버스에서는 구제역 종식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구제역은 인체에 무해하므로 육류 소비에 안심해도 된다는 광고가 흐른다. 침출수는 언제 누출될지 모르고 우리가 먹는 식수와 지하수에 언제 침출수가 흘러 들어갈지 모르며 돈을 내고 받아든 생수병의 물이 과연 안전한지 걱정한다. 오래 전 조류인플루엔자가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았듯 지금 구제역도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과 조류가 같은 공간에 있다 보면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을 것 같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겨지기도 하는 것처럼, 구제역은 정말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살처분 된 가축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기간만 더 길 뿐 실은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육류를 위해 도살되는 가축과 살처분 된 가축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겠나.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실태 조사보고에 의하면 응답자의 80%가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을, 52.3%가 외상후 스트레스성장애를 겪고 있다고 했다. 전체인력의 36%인 2,646명을 감원하겠다는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 계획에 반대하며 시작한 파업 과정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경찰의 폭압적인 진압으로 피를 흘리고, 파업이 끝난 지 1년 8개월이 지난 현재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노동자와 가족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월요일 한겨레신문 ‘쌍용차 해고 노동자 짙어진 죽음의 그늘’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지난 2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청 앞뜰. 또래와 함께 뛰어놀던 6살배기 아이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자원봉사자가 “위험해. 어서 내려와”라고 외치자 아이가 말했다. “싫어. 자살할거야.”, 라고 쌍용자동차 노동자 가족들의 모습을 전했다. 민주노총 전국금속산업노조 쌍용차지부 한 조합원이 지난 5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고서’ 발표회 도중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얼마 전 대법원은 합법적인 파업이라도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사용자의 사업운영에 심대한 혼란 내지 막대한 손해를 초래하는 경우에는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합법적인 파업에 대해서는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해선 안 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로써 무력화됐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도 천정부지로 뛰어 오른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든 학생들, 학비 대출을 받아 어렵게 손에 졸업장을 받아들어도 자신을 받아줄 직장이 없는 현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는 언제 현실이 될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위험. 치솟는 물가, 늘어가는 빚,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조용하고 말이 없다.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못 하지만 몸과 마음에 체화되어 있다. 고통이 내게 현실이 되는 때, 내가 저항하기 힘든 상황이 눈앞에 닥쳤을 때 비로소 공포는 육체를 얻는다. 가장 무서운 공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대하는 영화다. 주위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언제 어떤 방식일지는 몰라도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부지불식간에 자신도 옆 사람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절망으로 바뀌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구제역과 침출수의 공포, 방사능 공포,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미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로부터 내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공포다. 너무 익숙해서, 항상 그래왔으니까, 나만 아니면 어떻든지... 이미 제한되고 제한된 파업이지만, 그나마 제한된 절차에 따라 인간답게 살자며 시작하는 파업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엄혹한 현실. 하지만 모른다. 나만 아니면 되고, 우리 사회는 항상 그 정도였고, 법원이 자본의 편인 것은 너무 익숙하니까. 꽃이 피는 봄이 왔는데, 나무에 핀 꽃을 쫓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 뭔지도 모를 나이에 자살을 떠올리며 나무를 오르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