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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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학교, 학생, 교사는 변화 되고 있다. 학교나 교사에 비해 학생의 변화가 빠르고 역동적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차이가 학교에서 세대 간 갈등을 일으키고 교육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교사와 교사 사이에도 세대 간의 차이는 존재하고 교사와 학생간의 세대 차이는 더욱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책임감과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교사들, 학교 조직 속에서 존경과 지시에 익숙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교사들, 현실적이며 직장인 같은 교사들, 그리고 자기의 할 일은 잘하지 못하면서도 권리를 내세우는 학생들과 교사라는 직업이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학교교육은 어려워지고 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40대 남자교사와 담임으로 있는 학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교사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선생님 학급학생들에게 배신감이 느껴져요, 저는 학급 학생들과 소통이 잘되고 있고 그들도 나를 신뢰한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1년동안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저에게 이럴수가 있어요?” 내용은 이랬다. 교사가 담임으로 있는 학급의 여학생과 다른 반의 남학생이 1년동안 사귀고 있었고, 그 두학생은 학교 탈의실 안에서, 복도, 또 학급의 학생들이 있는 교실뒤쪽에서 지나친 스킨쉽을 했었다고 한다. 학급의 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담임교사는 학생들의 이런 행동을 오랫동안 모르고 지내고 있었는데 복도를 지나치다가 상황을 보게 된 다른 교사가 이야기해줘서 알게 되었다. 더욱더 선생님을 당황하게 했던 것은 이 일로 학급의 임원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상황을 늦게 알게 되어서 담임으로서 정말 미안하다, 그렇지만 너희들도 나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니?”라고 했더니 아이들 모두 황당한 얼굴로 “그건 걔네들의 사생활이잖아요? 왜 이야기해야 되요?”라고 했다고 한다. 평소에 학생(중학생)들은 담임교사에게 찾아와 많은 이야기를 했었고, 알고 싶지 않던 아주 사소한 이야기도 전해주던 학생들에 익숙했던 교사는 당황스럽다 못해 배신감이라는 극한 감정까지 느꼈던 것이다. 최근에 인접한 지역에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의 성과 관련한 사건이 발생되면서 긴장을 하고 있었던 담임교사는 학교에서 이성교제를 하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늘 가까이서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시간이 나면 학급으로 가서 학생들을 보고 관찰했던 교사지만 학생들의 이성교제에 대해서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수줍은 고백 같은 모습만 상상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교사가 보지 않는 곳에서 대담한 애정표현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학급의 다른 학생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다. 이처럼 요즘 학생들은 자기표현이 분명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데 비해 교사들은 구성원간의 관계와 협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에서 사고의 차이를 분명하게 했다. 이러한 갈등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빠르게 변화되는 학생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많은 노력과 사회변화에 따른 인성교육과 생활교육에 대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한다. 이러한 노력들에 의해 진정성을 간직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져서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의사소통의 관계복원은 학교와 교사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사회와 가정에서도 학교와 교사가 걸 맞는 노력을 해야 한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15 | 추천: 0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세밑 성탄절을 앞둔 시즌이 다가오면 특별히 종교를 갖지 않은 이들도 뭐가 궁금해선지 마음이 동해 성당이나 교회를 기웃거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맘 때쯤 천주교나 성공회 성당을 들러본 이들이라면, 성당 한 켠에서 길게 줄을 지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한 신자들의 모습에 궁금증이 일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뇌를 자극한 줄은 바로 세간에 ‘고백성사’로 알려진 ‘고해성사’를 보기 위한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세례성사를 받은 이들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고백해 하느님께 용서 받고, 하느님과 이웃, 교회 공동체와 화해하는 성사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을지라도 세속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 은총을 상실하고 하느님과 친교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인간이 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느님 은총의 지위와 하느님과의 친교 관계를 회복시켜 줄 매개체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고해성사다. 죄를 범한 인간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떠나 살았던 삶에서 다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의 삶, 하느님과의 친교 관계를 회복하는 '화해'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고해성사에서 방점은 ‘화해’에 놓여 있다. 세속의 온갖 죄에 노출돼 있는 인간에게 하느님과 이웃,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을 열어주는 게 바로 고해성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고해성사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에게 진정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는 성사이고, 다시금 새롭게 살아가는 힘과 용기를 얻게 하는 성사라고 가르친다. 이런 까닭에 비신자들이 봤을 때는 의아해할 구석도 없진 않지만 많은 신자들이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원의를 갖고 고해성사를 보게 된다. 하지만 모든 죄에 대해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을 거슬러 하느님을 배반한 큰 죄를 범한 경우에만 고해성사를 보도록 한다. 하느님 은총을 잃지 않을 정도의 소죄, 즉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죄는 고해성사가 아니더라도 참회나 영성체로도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가 고백 때문에, 보속 때문에 사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고 용서하신다. 고백은 뉘우치는 마음의 한 가지 표현일 뿐이다. 이러한 논리적 귀결은 참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그렇게 이뤄진 고해성사 또한 대죄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죄가 용서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죄 때문에 아파본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지은 업보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 다음 생에도 갚지 못하면 다시 또 태어나 그 다음 생에서라도 갚아야 한다. 따라서 가톨릭적 입장에서 보자면, 죄를 범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비, 사랑과 은총을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성사가 바로 고해성사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고해성사를 ‘통과의례’ 정도쯤으로만 여기는 흐름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런 현상이 횡행하는 대표적인 곳이 정치판이다. 국민의 혈세를 도둑질하고도 대국민 고백성사를 했다며 면죄부를 얻은 양 의기양양해하는 정치인 정도는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국민이 맡긴 곳간을 고스란히 다른 나라에 내주고도 자신은 하느님 앞에 떳떳하다고 밝히는 이들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교언영색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나라 곳곳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도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들먹이는 이들은 또 어떤가. 세속에서 더 이상 고해성사를 할 일이 없어질 때야말로 신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는 정직한, 참된 고해성사만이 세상을 살리고 궁극에는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까지 하느님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죄만을 고해했다면, 이제는 자연을 파괴하고 창조질서를 어지럽힌 죄에 대해서도 고해성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가톨릭교회는 창조 질서와 관련해 이렇게 가르친다. "더 이상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자연 사랑을 분리해서 볼 수가 없다. … 나의 탐욕과 부주의로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는 것도 창조주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는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죄'이다." 한 해를 보내며,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만큼의 고해거리를 안고 살아왔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것이 이웃과, 세상과, 전 우주와 화해하는 시발점이다. **팁 : 회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하느님 은총을 받을 준비가 돼 있는, 그분 은총에 마음이 열려 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 참된 회개를 하지 못하는 이는 참 생명도 누릴 수 없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3 | 추천: 0
고병헌/ 인권연대 운영위원 …… 우리에게 생각, 즉 성찰은 성장의 지표이다. 따라서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말은 곧 이들이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옮겨간다.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자기 생각이다. 자기 생각이 있어야 줏대 있게 움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며 자기 삶과 공동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였다는 것과 동의어다.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푸른숲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엄기호는 이 책에서 ‘생각’을 개념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누구든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 ‘생각’은 개념으로 하는 것이니, 이는 “인간은 말과 개념으로 세상을 짓는다.”는 말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 이 현실에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들에게 아름답고 건강한 ‘개념들’을 손에 쥐어줘야 한다. 그 ‘개념’이라는 벽돌로 그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짓도록 말이다. 세상을 확정하는 틀로서의 ‘생각’과 그 생각을 만드는 ‘개념’, 이 둘의 관계를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신영복은 이렇게 설명한다. …… 우리가 소위 전두엽에서 진행되는 멀티태스킹, 여러 가지 기억소자를 종합하는 것, 이것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집 떠난 아들을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 이런 경우의 생각도 생각입니다. 어느 것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나요? 생각이란 기존의 어떤 것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생각이란 세계를 확정하는 아주 중요한 틀이라는 것이지요. 강도한테 칼 맞아 쓰러진 행인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는데 사마리아인이 구출합니다. 그 차이가 뭔가 하면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행인을 자기 세계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세계를 조직하는 것, 그게 생각이라는 거죠. 가슴 아픈 것과 머리 아픈 것의 차이가 그것을 잘 설명해줍니다. 가슴 아픈 것은 그것을 자기의 세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슴 아픈 것이지요. 반대로 골치 아픈 것은 자기 세계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들어오는 경우에 골치 아픈 것이지요. 생각이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슴이 하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진리는 용기’라고 했습니다. 가슴보다 머리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진리마저도 세계에 대한 참여, 세계에 대한 조직이라고 보는 것이고, 그것이 진리의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논리와 이성은 근대 사회의 기본적 단위라는 것, 벽돌처럼 근대사회를 구축하는 기본적 요소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념적 사고, 다시 말해서 아도르노가 이야기하는 도구적 이성을 뛰어넘는 세계의 조직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세계의 해석보다 세계의 조직에 대한 사유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신영복,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서울대 출판문화원 그러면 “세계의 해석보다 세계의 조직에 대한 사유”를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있는 제이슨 델 간디오(Jason Del Gandio)는 “수사학이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고 주장한다. 언어란 기호와 상징이 모두 서로에게 연결되어 꽉 짜인 조직화된 체계이며, 이런 이유에서 모든 언어는 그 나름의 고유한 세계관과 전망을 구성하기 때문에, 언어가 다르면 세계관이 다를 수 있고, 언어의 체계를 바꾸면 전망을 바꿀 수 있으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자기가 사는 지금 이 세계를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각하고 혹은 구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현실도 달라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면 언어가, 수사학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재조직할 수 있단 말인가? …… 결국 생각한다는 것은 언어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맞다면, 언어를 바꾸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주의로서는 중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들이 쓰는 언어를 바꾸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이렇게 하면 인간의 사유 수준에서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 사람들이 세상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 세상을 변혁하자는 것이다. 다음 네 단계는 이 점을 분석한다. • 사람들의 언어를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식이 바뀐다. •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뀐다. • 사람들의 방식을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 이 모든 것을 바꿔라, 그러면 사회의 방향이 바뀐다. …… 언어를 사회변혁의 도구로 활용할 것, 자기가 찾는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언어를 활용할 것, 자신이 바라는 현실을 불러내는 언어를 활용할 것, 이 세 가지가 요점이다. 제이슨 델 간디오, 김상우 역,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동녘 정치 영역에서 선거 때 ‘프레임(frame) 전쟁’이라는 말을 쓴다. 상대편이 나를 반대하고 비난하더라도 나의 ‘언어’로 비판하게 만들면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이로울 수 있다는 것인데, 한국 사회에서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둘러싼 프레임 전쟁이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정부의 ‘4대강 사업’이 막 시작한 초창기에,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부가 만든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운동을 한동안 진행했다. 그러니까 구호가 예를 들면 “4대강 살리기 사업 절대 반대” 같은 식이었다. 먹고사는 일이 바빠서 ‘4대강 사업’의 본질을 헤아릴 수 있는 여유나 능력이 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4대강 살리기 사업 절대 반대”와 같은 구호를 듣고선 정부와 시민단체 중 어느 쪽을 못마땅하게 생각할까? “저들은 강을 한번 살려보자는 데 늘 저렇게 반대만 하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프레임 전쟁의 본질인데, 이는 제이슨 델 간디오가 주장하는 “언어를 통제하는 사람이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과 맞닿아 있다. 지난 10월 22일 오후 경기도 여주군 이포보에서 열린 '4대강 새물결 맞이 행사'에서 '4대강 범대위' 회원들이 행사에서 볼 수 있도록 '4대강 심판!' 구호가 적힌 대형 에드벌룬을 띄웠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면 이는 “언어를 창조하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 않은가? 바로 그렇다. 꿀벌들은 밀랍으로 자기 세계를 창조하지만, 인간은 말(언어)과 개념으로 자기 세계를 창조하기에, 우리는 개념의 ‘집’인 언어를 새롭게 창조하여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의 지금 현실과 맺는 관계 방식을 바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사회운동단체 활동가들이나 사회변혁 운동가들 중에서 간혹 언어의 사용방식, 즉 화법(話法)이 매우 경직되어 있거나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이 아니다. 비록 그 수가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조직의 이미지를 색칠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회운동단체 활동가나 사회변혁 운동가들이 진정 사회의 변혁을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사회변혁적 언어’를 사용하는 화법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그리고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신은 자녀와, 당신의 학생들과 소통이 잘 되는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는 상처 중에서 가장 아프고 오래 남는 것이 전혀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느꼈던 ‘밑바닥 외로움’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부모가 어떤 성품의 사람인가에 따라 그리 큰 아픔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을 때는 부모나 교사의 생각이나 경험 모두는 그 하나하나가 채찍이 되고 아픔이 되며, 이런 상태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을 때, 그 때는 부모나 교사의 존재 자체가 자녀나 학생들에게는 ‘지옥같은 세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행복이라곤 전혀 맛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심각하고 찌그러진 얼굴로 “이것이 다 네 행복을 위한 거야!”라고 소리 질러댈 때, 이미 오염될 대로 된 개념이 담긴 ‘성공’이라는 말을 매일 아침 밥상머리에서 해댈 때, 전혀 그럴 마음도, 또 그러지 않았으면서 말끝마다 “너를 믿었어!”라고 쏴붙일 때, 행복이나 성공, 믿음 등과 같은 용어들은 이미 소통을 위한 매개체로서의 언어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자녀와, 또 학생들과 진정 소통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언어’를 써야 한다. 언어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말에 담겨 있는 개념이 서로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인데, 따라서 살아 있는 말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속의 개념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실로 개념이 풍요롭고 아름다워지면 말과 언어가 힘이 생기고, 언어에 생기(生氣)가 돌면 그 언어와 말로 짓는 삶과 세상이 ‘희망’차진다. 인간은 말(언어)과 개념으로 세상을 지으니까. 고병헌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54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후배가 근무하는 송파구 잠실소재 모 초등학교에서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연간 정해진 횟수의 연수를 실시하게 되어있는데 그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연수물을 만들어 배부하기도 하고 예산을 들여 강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그날 후배 학교에서는 강사를 초빙하여 강의를 들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강사는 교장과의 친분(?)을 밑거름으로 본인이 저자인 책을 사줄 것을 부탁하였고 학교장은 어떠한 논의과정도 없이 학교예산을 사용하여 교사 연수를 위한 명목으로 몇 십 권의 책을 구입해 주었다. 강사가 가고 난 후 책을 교사들에게 배부하였고 그 책을 접한 교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책의 겉표지는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나오는 밝고 경쾌한 느낌이었고, 제목은 ‘선생님이 웃어야 아이들이 웃지요’로 창의력을 키우는 유머 모음집이라는 부제를 붙여 그 내용을 짐짓 짐작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기대한 것과는 달리 곳곳에 문제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은 성을 도구화하여 쓴 음담패설이 유머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성차별과 여성 비하,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일상 생활인양 다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 부인 생일 선물을 사러 가서……………………(기타) 조 선생님은 능글맞은 데가 있다. 부인 생일이 다가오자 부인에게 장갑을 사 주려고 가게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장갑을 사려니 사이즈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머뭇거리자 예쁜 아가씨 점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손을 한 번 만져보실래요.” 남자는 아가씨의 손을 만져보고는 장갑을 하나 골랐다. 물건을 사가지고 나가던 조 선생님은 다시 가게로 돌아와 말했다. “이왕 사는 김에 브래지어와 팬티도 하나씩 살까 하는데요.” ⊙ 호박잎……………………(유연성) 노처녀인 변 선생님이 길을 가다가 바람에 스카프가 날아갔다. 마침 옆에 지나가던 남자가 스카프를 주워 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호박잎이 떨어졌네요.” ⊙ 밤 12시 집안 풍경 4제……………………(재구성력) ㆍ되는 집안 - “공부 그만 좀 하고 자거라.” ㆍ안 되는 집안 - “이 녀석이 몇 신데 아직 안 들어와.” ㆍ막 가는 집안 - “아버지 또 안 들어와.” ㆍ콩가루 집안 - “이놈의 마누라가 아직도 안 들어와.” 이런 종류의 글들이 서점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을 쓴 저자는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교육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교총 전 회장이다. 그의 경력(2007~ 열린 좋은교육바른정책포럼 공동대표/ 2006 ~ 제4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2004 ~ 제32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1981 ~ 1982 중앙교육연수원 조교수 겸 교육정책과정 실장 / 1981 ~ 1981 한국교육개발원 책임연구원/ 1973 ~ 1978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일반인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다. 그런 빵빵한(?) 경력으로 후배가 근무하는 학교처럼 교사 대상의 강의도 다니고 죽천(竹天)이라는 필명을 빌어 쓴 책을 구입하도록 권유하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관련 음담패설에 선생님을 주어로 하여 글을 쓴 것도 그렇고 이 책을 통해 유창성, 유연성, 재구성력, 정교성, 독창성 등의 훈련이 필요하다며 창의력 개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 그의 인식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그의 뇌구조가 의심스럽다. 실명확인을 위해 이 책을 출판한 원미사에 확인을 하여보니 현재 후배학교 교사들에게 배부하였던 그 책을 다시 회수하기로 했다고 한다. 담당자는 출판한지 오래된 것도 아닌 올해 7월에 출판된 책이라며 저렴하게 서점가로 주문하였고 학교로 들어가는 것이니 서류도 다 갖추었는데 반납한다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구입의 의사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 나에게 친절하게도 이런 일도 있으니 구입하려면 내용을 살피고 결정하라는 조언까지 해 주었다. 저자의 약력이 무엇이든 정당한 과정을 밟아 누구든지 출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단체의 수장을 지낸 사람이 이런 책을 썼다는 것과 이런 내용이 창의력을 키운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인식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2010년 발생한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폭력 사건이 1,012건에 달한다고 한다. 하루 평균 2,8건의 아동성폭력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조두순 사건이나 김길태 사건, 그리고 최근 도가니 영화를 통해 알려지게 된 장애아동 대상 성폭력사건 등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관련법들이 사건에 따라 만들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사진 출처 - 필자 사람들의 기억이나 관심, 즉 여론에 따라 일관성이 없이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온 여러 성희롱과 성폭력 사건,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성으로 인한 불평등... 이런 것들은 앞으로 타파되어야할 사회의 암적 요소들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사건들과 연관시키는 것이 과도하다 여겨질 수 있으나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사람들의 인식은 사건 발생과 연관이 깊은 것이고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사람들의 인식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가지는 인식은 매우 중요한 교육적 요소이다. 올바른 교사의 인식은 아이들의 올바른 인식을 기대하게 한다. 최대 교육단체의 수장이었던 강사가 가진 인식에 대한 문제의식뿐만 아니라 그가 교사들을 연수한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또한 그런 사람을 강사로 초청한 학교 책임자, 또한 학교의 예산을 개인 돈처럼 어떠한 논의과정 없이 사용하는 학교장의 태도, 책의 내용 확인도 없이 교사들에게 배부한 학교 당국의 처사 등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47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자유 없이 일방적으로 통과되었다. 불균형적인 산업구조를 개선하지 못한 채 ‘자유롭게 무역하자’는 협정 자체가 모순이었는데, 자유를 저당 잡아놓고는 자유 협정을 체결하는 모순이라니,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 자괴감만 커진다. 자유가 무엇이던가. 자유는 “스스로(自) 말미암음(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행위의 원리와 원인을 자신 안에 두는 상태를 자유로 규정했다. 자유는 타자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자신 안에 있는 원리에 따라 자기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 즉 타자의 의존성으로부터 벗어난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자유이다. 물론 다른 차원의 자유도 있다. 하나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타자와의 관계 안에 스스로를 구속시킬 줄 아는 자유, 즉 “~으로의 자유”(freedom to)이다. 전자가 소극적, 개인 중심의 자유라면, 후자는 적극적, 타자 지향의 자유이다. “~으로의 자유”란 타자를 억압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에 기초하면서 타자의 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자유이다. 대단히 성숙한 자유이다. 사실 이 두 자유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적극적 자유의 차원에서 보면 이 둘은 단계적 혹은 연속적이다. 인간이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한, 도리어 그 어떤 것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 자신을 구속시킬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지니기 때문이다. “~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으로의 자유”도 불가능하다. 당연히 오늘날 성숙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소극적 자유를 소화하고 넘어 적극적 자유를 구현하는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단독처리한 22일 오후 본회의장 전광판에 재석 170인, 찬성 151인, 기권 12인이라고 적힌 표결 결과가 표시돼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적극적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떠남’이 아니라 ‘무엇으로의 향함’이다. 적극적 자유는 무엇을 위해 자유로움, 무엇을 위해 열려있음, 따라서 무엇을 위해 자기를 열어놓음, 무엇을 통해 자기 자신이 규정되도록 함, 스스로 무엇에 헌신함이다. 소극적 자유를 발판으로 하되, 타자를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아는 적극적 자유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오늘날 시민사회의 기본이자 목표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황은 반대로 가는 것 같다. 얼핏 보면 자유가 확대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때의 자유라는 것이 주로 개인적, 자기집단 중심적 자유이다 보니, 그것은 늘 그리고 결국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희생을 전제로 한다. 희생은 숨기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자기중심적 욕망을 확대 재생산시킨다. 그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가 확장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근대 사회적 시스템의 필연성이기도 하다. 중세 계급사회가 타파되고 근대 시민사회로 진입하게 된 것은 시민 계급(부르조아)이 탄생하고, 그 자유가 확대되어간 과정이자 결과이다. 하지만 그 자유를 추동하는 힘이 대량생산을 통한 자본 축적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그런 자유의 확대가 환영해야만 할 일은 아니다. 근대 문명의 기초는 자본의 확대가 다지고 만들어놓았다. 이런 기초 위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추동하는 그 엄청난 힘은 자본이다. 그리고 자본을 소비하려는 욕망이다. 자본을 좌우하는 권력이 개인적 혹은 자기 집단 중심적 욕망으로서의 자유를 추동하는 힘이 되었다. 자유라는 이름의 억압이 거의 모든 곳에서 횡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반기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른바 ‘자유무역’을 환영하는 이들도 제법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일수록 “~으로의 자유”를 곱씹을 수 있는 기회가 잦았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공연한 희망일 것이다. 애당초 들리지 않는 구조 속에 안주해 있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희망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자유라는 감옥의 빗장을 여는 일이 이 시대 진정한 자유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찬수 위원은 강남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25 | 추천: 0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묻혀 조용히 지나가고 말았지만, 올해에도 일본 공립학교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기립제창에 반발한 50여명의 교사들이 징계를 받았다. 1999년,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일본의 국가와 국기로 법적 공식지정. 2003년, 도쿄도 교육위원회가 국기게양 및 국가제창, 그리고 제창시 기립 등을 의무화. 그 뒤 적지 않은 교원들이 이를 거부하는 끝 모를 싸움을 계속해 왔고, 애매한 처벌규정에 대한 법정투쟁이 계속되어 왔지만, 올 5월 일본최고재판소가 교육위원회의 징계에 대해 합헌판결을 내림에 따라 교육계의 국가주의 교육 강화 움직임은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졸업식장의 풍경이 유치할 정도이다. 기미가요 제창시 교사들의 성량을 체크하기도 하고, 기립하지 않은 교사와 학생을 체크해 실적이나 성적에 반영하기도 하며, 식장에 의자를 설치하지 않고 시작부터 모두 세워 둔 채로 졸업식을 진행한 학교도 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 이와 같은 일본의 보수화 즉 군국주의의 부활 움직임에 격분하기는 하지만, 실제 기미가요의 어느 부분이 어느 정도 문제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까? 아마도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의외로 일본의 학생들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사가 옛말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다지 대단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긴 하다. 기미가요의 가사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의 세상이 천대까지 팔천대까지, 조약돌이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이게 전부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짧은 국가가 아닐까. 노래로 해도 40-50초 정도이다. 이 한 줄만으로는 제국주의와 일왕에의 충성 맹세를 알아채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 노래는 원래 10세기 초에 편집된 ‘고금단가집’에 수록되어 있는 일본 고대가요이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노래로 경축연 등에서 불리다가, 명치(明治)정부에 의해 새로운 곡조가 붙여져 애국가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때까지 기미가요의 첫머리는 그 뜻이 분명했다. ‘당신의 세상’은 곧 일왕이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뜻이었다. 그 외의 해석은 있을 수가 없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각종 집회나 음악회, 각 학교의 조회시간 등을 통해 이 노래를 하루에 한 번 이상 부르거나 듣도록 강요당했다. 이른바 황민화 정책. 또한 중국인들에게 이 노래는 점령국 군대의 군가일 뿐이다. 일본 군대가 중국의 도시들을 점령해가면서 즐겨 부르던 군가였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독립투사들을 죽이고 간도 대학살을 저지른 뒤에도 기뻐 불렀을 노래이다. 지금도 일본의 극우단체 회원들은 자주 군복을 차려입고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전범들에게 참배하며 이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를 일본인들은 지금 국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SBS 어느 곳이나 불의에 대한 저항은 있는 법. 이에 저항하다 2000년 이후 매년 평균 100여명의 교직원이 징계 받았으며, 2010년에는 200여명이 대거 징계받은 바 있다. 올해에는 50여명으로 줄었지만, 학교측에 의해 졸업당일 옥외의 안내업무 담당으로 명령받은 경우가 많았고, 중복징계가 두려워 스스로 휴가를 신청하고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은 교원도 많았다. 소극적인 저항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올해는 교직원 뿐 아니라 학생들의 움직임도 있었다. 동경 시내 한 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은 몇 명의 학생이 갑자기 단상의 마이크를 쥐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더 이상 선생님들이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된다. 특히 기립하지 않은 학생 수로 교사를 처분하는 것은, 교사를 인질로 학생의 사상을 통제하는 것이다. 생각 있는 학생으로 성장하자. 문제라고 느끼면 행동하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날 학생들은 기미가요 제창시 기립하지 않으면 교사에게 피해가 가므로, 교장 훈화시 기립하지 않는 것으로 불복했다. 몇몇 학교에서는 졸업식 당일 교문 앞에서 성명서를 배포하다 체포된 학부모도 있었다. 처분되는 교원의 수가 줄어들어도, 교육위원회의 명령에 불복하는 교원의 수는 줄어도,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이상 일본의 국가제창 강요와 기립 의무화, 불복교사들에 대한 탄압 등의 배경에는 우경화 즉 국가주의 강화와 함께 표현의 자유나 기본적 인권에 대한 몰이해가 있다. 그럼, 우리는 이로부터 자유로운가? 국기게양과 국가제창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고 비난하고, 이에 저항한 이들의 피해를 안타까워 하지만, 우리는 그 국가주의로부터 자유로운가? 독립운동과 해방의 상징이었던 태극기가 독재정권에 의해 국가에 충성을 요구하는 전체주의의 상징으로 이용되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런 국가주의가 기득권과 지배계층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되는 데에 저항하지 않았던가. 조례를 하면서, 하교길에, 영화 관람 전에 그저 무의식적으로 일어서거나 멈추어 서서 예를 표하고는 했다. 때로는 이유 모를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국가대항 운동경기가 시작되기 전, 아니면 금메달을 딴 뒤 경기장에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며 울먹거려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국가의 존재와 의미와 가치, 막연한 애국심, 그리고 국기 혹은 애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우리 애국가 자체에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과거 자국의 군국주의 역사를 경험한 적이 없으면서도, 그리고 피해국가의 국민이 아님에도 기미가요 제창을 반대하며 징계를 무릅쓴 일본 젊은 교사들의 용감한 저항에 박수를 보내면서, 어릴 적 박정희와 전두환의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했던 자신이 너무 억울하고 창피할 뿐이다. 아무 반성 없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역시.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신부로 일본 릿교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67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린 5세 나이의 훈(오세훈)은 어린 아이들 점심 식사 한 끼를 갖고 쪼잔하게 굴다가 결국 서울 시장직을 사퇴하였다. 하여 서울시장 선거 참여 여부를 놓고 촉발된 속칭 ‘안철수 현상'을 놓고 여러 전문가들이 본질은 ‘분노’에 있으며, 변화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동의한다. 모든 사물의 현상에는 원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분노에도 원인이 존재한다. 일시적인 분노는 감정의 여과를 한 단계 거치면 조절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속적인 분노는 다른 문제다. 지속적 분노는 구조적인 문제에 원인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분노는 지속적인 분노로 판단된다. 지속적인 분노가 계속되면 증오가 쌓이고, 그 쌓인 증오는 어디로 어떻게 폭발할지 아무도 모른다. 분노의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군부 독재가 물러나고 시민들은 이제 최소한 독재·독선 정권은 없을 것이며, 최소한의 민주주의 가치는 존중되고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오히려 좀 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삶의 질이 개선되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MB 정권으로 상징되는 권력은 시민의 희망과 달리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놓는 역주행에 가속페달을 밟았다. 반대로 시민의식은 더욱 성숙해졌다. MB 정권 초기 촛불시위도 분노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분노의 메아리였다. 개인과 소규모 집단의 분노가 시대의 울림으로 뭉쳐져 나타났던 것이다. MB 정권은 공정사회라는 단어로 시민을 현혹하고 속이려 하였다. 그러나 시민은 오히려 공정사회를 이루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지 알게 되었고, 분노의 함성은 소리 없이 확산되고 있다. 표피적으로 나타나는 민주주의 후퇴와 역주행에만 주목한 것이 아니다.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이제 눈을 뜨고 직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은평구의 한 선거구에서 주민들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를 위해 줄을 서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대학 등록금도 낼 수 없는 아픔의 세대,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도 안 되는 신세, 그래서 휴학을 반복하면서 대학도 6∼7년 씩 늦추어 다니는 세대, 그나마 취직을 해도 비정규직으로 살면서 2등 국민으로 취급받는 사회, 가진 자는 더욱 살찌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쪽박마저 깨어버리는 양극화 사회, 노후를 어떻게 살 것인지 막막함과 서러움에 찌들어 사는 장년층과 노인층 문제, 힘없는 자에게는 법치주의 운운하며 감옥으로 보내고 힘 있는 자에게는 아부하는 권력의 파렴치 ---, 이러한 분노의 근본적 원인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헌법의 자유·평등 이념이 실종되어버린 천박한 자본주의 그 한 가운데에 분노의 시선이 꽂혀 있다. 역설적이게도 ‘안철수 현상’으로 상징되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희망의 합창을 듣고 있는 것이다. 한 때 대학 강단에 있으면서 대학생들이 취직 문제로 고민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하면서 기성세대의 한계를 통감하였다. 모두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미래세대에 절망을 안겨준 준엄한 책임을 져야 한다. 분노는 파괴적인 힘을 동반하고 있다. 분노의 메아리가 창조적인 파괴로 이어질 때는 좀 더 행복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분노가 소모적 파괴와 자괴감으로 남아서도 안 되고, 침묵해서도 안된다. 이제 99%의 심장은 1%의 지배를 거부해야 한다. 앞장서서 창조적 파괴를 실행할 시점이다. 박원순 서울 시장 당선에서 우리는 그 일면을 보았다. 어떻게 확 바꾸고, 인간답게 사는 조건을 만들 것인지.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24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4”자로 상징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던가. 400Km가 넘지 않으면 거리도 아니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려고 해도 400km쯤은 가줘야 하는 곳. 그 보단 반경 400km쯤은 동네 마실 다니듯 휘젓고 다닌다는 통 큰 곳. -40도c가 아니면 추위도 아니다. -10도c쯤의 날씨엔 웃통 벗고 다니고-20도c정도 되어야 부채질하며 대략 -40도c 쯤은 되어야 뻬치이카에 불 때기 시작한다는 뜨거운 피를 가진 동네. 40도는 되어야 술이다. 적게는 40도에서 75도그 독한 보드카를 생명의 물이라 부르며 병 채로 들이키는 단단한 내장을 가진 아직도 잠자는 땅 시베리아. 우랄산맥 동편으로 캄차카 반도까지 러시아 땅의 2/3를 차지하고 화석연료와 목재, 차고 넘치는 광물의 대부분을 품에 안고도 조용히 잠자는 그 땅위에 나의 첫 발자국을 찍은 건 작년 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하는 총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열차(TSR)를 타고 눈뜨면 지평선, 보드카 한잔에 눈감으면 백야(白夜)의 잔영과 함께 3박4일을 달려 바이칼에 갔었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를 따라 어김없이 자작나무는 가녀린 흰 바탕의 군락이 되어 다시 나타났고 군데군데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강줄기는 시베리아의 태양을 반사시켜 그 빛으로 나는 아침 세수를 대신했었다. 그때 나는 시베리아의 강물을 보며 사람의 길, 마을과 마을의 소통이었던 강줄기를 꼭꼭 틀어막아 댐을 쌓고 주위를 온통 콘크리트로 도배질 한 후 개발의 완성을 자축하는 우리의 게걸스러움을 보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간이라도 내어줄듯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쳐대는 내 누이의 비굴함과 거기에 얹혀사는 이들을 비참하게 무릎 꿇리는 자본의 비정함을 두려워했었다. 그때 이미 나는 아마존과 더불어 세계 양대 허파라고 부르는 대 자연이 있고 인류의 산업을 적어도 수백 년 동안 지탱 시킬 수 있는 막대한 자원을 땅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자본의 위대함을 앞세워 요기(妖氣)어린 손짓을 보내는 탐욕스런 떨거지들에게 조용히 훈계하는 시베리아의 목소리를 들었었다. “시베리아는 자연을 사는 모든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는 있으나 탐욕스런 너희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는 없다”는. 올해에는 어떤 훈계를 들을 수 있을까 자못 기대하며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른 게 지난 7월. 작년에 완수하지 못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나머지 구간 바이칼에서 모스크바 까지를 거꾸로 타고 내려오기 위해서였다. 갓 30여명쯤 되는 일행의 체크인에 두 시간 반이나 걸리는 모스크바 호텔 측의 느긋함에 부아가 오르고 기껏 배정받은 방의 열쇠를 각 층마다 배치된 여직원(이분은 우리 시각엔 없어도 운영에 문제 없는)이 쥐고 일일이 여닫아 줄때의 황당함이 있었지만 “오늘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일은 하지 않아-구전가요 백수가-”도 별일 없이 사는 듯 한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정리해고에 앞서 월급을 반으로 줄이면서까지 일자리를 나누겠다고 선언한 노동자들을 헬기를 동원한 경찰력으로 무력화 시키고 결국 살인으로 몰아넣는 자동차 회사가 있는 나라에서 온 우리들은 굳이 한사람이면 충분한 일거리를 서넛이 나누어 갖는 그들의 고용 나눔을 술안주로 씹으며 러시아의 첫 날 밤을 보냈다. 모스크바를 떠나 바이칼로 향하는 기차는 어느새 우랄산맥을 넘어 예카테린부르크와 노보시비리스크를 지난다. 기차를 타고 만 하루가 훨씬 지났으니 당연히 일용할 양식인 햇반과 라면 그리고 보드카에 은근히 취해 지평선 넘어 지평선 끊임없는 지평선의 끝자락에 펼쳐진 자작나무 군락을 보며 군가를 흥얼댄다 “라스츠비탈리 야블리니 끌루쉬 빠쁘일리 뚜마니에 나드리 꼬이. 오 노래야 처녀의 노래야 날아라 저 빛나는 태양을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카츄사의 사랑을 전해다오” 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이 가장 많이 불렀다는 러시아 군가 카츄사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아리랑과 같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따위의 노래를 군가로 알았던 나에게 카츄사의 가사는 충격이다.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카츄사의 사랑을 전해다오”이 구절이 어떻게 군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세태비판은 고사하고 허무조차 금지곡의 명분이 되었던 시절에 그 노래들을 부르며 자랐던 가수에게 러시아 군가 카츄사는 이해하기 참 난감한 노래였다.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 작년에 갔었던 하바로프스크의 전쟁 박물관에는 총 맞아 쓰러진 통신병의 미니어처가 전시되어있고 우크라이나역 광장에는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상이 있다.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 시청광장에는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한번도 꺼지지 않았다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바이칼 호수안의 최대의 섬 알혼에도 전장에 나가는 아들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가족이 조각 되어있다. 용산 전쟁기념관이나 일본 야스쿠니 옆의 류슈칸(일본 전쟁 기념관)엔 고대적 부터 사용된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전쟁기념관은 무기전시장이 되어선 안된다. 굳이 전쟁을 기념하려면 “사람을 어떻게 죽였는가 보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가”가 기록되어야 한다. 횡단열차 안에서 보드카 병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엔 기타를 꺼내어 고 문익환 목사의 시 "비무장 지대“를 다 같이 불렀다. “너희는 백두산 까지 우리는 한라산 까지 철조망 돌돌돌 밀어라 온 누리 비무장 지대로” 기차 안 3박4일중 만취한 어느 날은 이 노래를 다시 부르다가 울컥 눈물이 나온 적도 있다. 평화로 가는 긴 여정에서 부득이 전사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 아무르 강변에 누워있는 김 알렉산드리아. 하바롭스크의 작은 집필실에서 낙동강을 썼던 조명희. 타슈켄트의 고려극장 문지기 홍범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러시아 국립묘지)132번 벽면묘지에 잠든 백추 김규면. 그리고 37년 강제이주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의탁했던 17만2천명의조선인들. 내가 타고 있는 이 열차를 통해 목숨이 오고간 씨날줄로 엮여진 거대한 역사 앞에 떨군 한 방울 눈물이 그 무슨 헌사가 되었을까 마는. 다시 시끄러운 나의 세상으로 왔다. 통일부는 여전히 반 통일적 이고 정리해고의 칼날은 언제나 번뜩인다. 제주 강정의 구럼비 바위는 곧 콘크리트로 덮을 셈이다. 시꺼먼 돈을 받은 놈들은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는데 사람의 정리를 생각해서 돈을 준 교육감은 보석 신청도 거부당한다. 을사늑약 보다 더한 한미 FTA의 매국 행위는 언론에 의해 애국이 되고 현직 대통령이 저지른 내곡동 땅 투기는 이름처럼 깊숙한 골짜기가 되어 묻어져 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시베리아는 별것인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별것 많은 세상 좌고우면 하지 말고 조용히 나의 길을 가라고 훈계 한다. 그러니 세상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아 지지고 볶아라. 나는 아직 가보지 못한 시베리아 횡단열차 마지막 구간 부산서 원산 거쳐 연해주 가는 꿈꾸면서 잠이나 한잠 잘란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76 | 추천: 0
정 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유명인의 투표 참여 독려 행위를 선거법 위반이라며 금지시켰다. 국민의 대의가 제대로 수렴되기 위하여 투표율 제고가 필수적인데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며 투표 참여 독려 행위를 금지시키는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선관위는 당시 주요 쟁점이었던 4대강 사업에 대한 찬반집회나 서명을 금지시켰다. 국민의 올바른 여론 형성 과정에 대하여 과도한 제한을 가한 것이다.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의사표명에도 꾸준히 제약을 가하고 있다. 선관위의 경직된 태도는 순도 100%의 공정성을 선거의 최고 가치인양 내세우는 현행 선거법에서 비롯한다.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은 “당선되거나 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를 말한다. 정치적 의사표현의 행위 전반을 선거운동에 포함시켜 법의 규제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단순한 의견개진 및 의사표시는 선거운동에서 제외하고 있다지만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 법집행자의 의사에 따라 적용 여부가 달라질 수 있는 불확실성이 있다면 자유 그 자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선거법이 갖는 문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지적되어 왔고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2000년에는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이 선거법위반으로 처벌되기도 했다. 공정한 선거를 시행한다는 명분하에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도구로 기능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문제투성이의 선거법을 아름답게 포장한 것이 2004년에 마련된 ‘오세훈 선거법’이다. 고비용 선거 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돈 안드는 선거, 깨끗한 선거 문화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고 정치인 오세훈의 오늘을 만들기도 한 법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일부 있다고 하더라도 오세훈 선거법은 과대, 왜곡 평가되었다. 특히 선거법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 제약과 정치 신인 등이 정치에 입문하기 힘들어 기존 정치인의 기득권 구조를 강화시킨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개정 선거법이 정당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일반에 심어주어 국민의 활발한 의사개진과 선거 참여를 통해 대표성 있는 대의자를 선출하는 선거의 본질을 해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선거에 돈이 많이 소요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과정을 거쳐 걷힌 돈이 올바르게 집행되는 것이 중요한데도 현실과 동떨어진 순도 높은 원칙만을 강조하고 있다. 투표인증샷을 찍다가 무심코 손가락 몇 개를 편 것 때문에 선거법위반자로 처벌될 수도 있다는 블랙코미디 같은 현 상황은 바로 우리가 ‘좋은 법’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오세훈 선거법이 초래한 현실이다. 아직까지도 국민의 여론이 왜곡된 소수에 의해 선동될 것이라고 보고 이를 제약해야만 ‘올바른’ 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인식은 잘못되었다. 이제 선거법이 국민의 충실한 의사를 반영하여 책임 있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제도 본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할 때이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07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분노를 삼가는 것을 예의이자 지혜로 여겨 왔다. 한번 노할 때마다 한 번 더 늙고 한번 웃을 때마다 한번씩 젊어진다(一怒一老 一笑一少)라며 화는 속으로 인내하고 꾹 참는 것이라고 말이다. 허나, 때로 분노는 필요한 법이다. 특히 불의한 사회적 구조와 정계․ 재계의 파렴치한 이들에 대하여 치솟는, 의로운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에 울컥 치밀어 오르는 통탄, 그런 의분(義憤)과 공분(公憤)은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며 시민으로서 그것은 도리이자 권리이다. 신약성서를 보면 예수는 특히 성전 앞에서 희생제물을 파는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의 판을 엎어버리시며 크게 분노하셨는데, 그 분노는 그들뿐 아니라 그 판을 허락한 제사장들을 향한 분노였으며, 아울러, 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싼 값으로 희생제물을 사고 돈을 바꿔야 했던 가난한 신도들을 대변한 분노였다. 성전이 장사판으로 전락한 것에 분노하신 예수는 이 시대, 이 사회를, 곧, 하느님이 보시고는 감탄하셨던 이 세상이 어느새 장사판, 전쟁터, 경쟁과 도태의 아비규환, 떼죽음과 멸종의 생태계로 전락한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분노하실까. 자손대대로 숭엄하게 물려주어야 할 아름답고 존귀한 이 나라, 이 겨레, 이 강토에 대해 우리가 무관심 내지 냉소주의에 빠진 것을 보시면 얼마나 더 분노하실까. 요새는 ‘분노’가 대박이자 대세인 것 같다. 작년 2010년 10월 2일에 출간된 93세 노령의 레지스탕스 출신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의 작은 책『분노하라(Indignez Vous!)』는 프랑스 출간 7개월 만에 200만 부 판매, 전 세계 20여 개국으로 번지고 있는 ‘분노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 세계를 감전시켰다고 평해진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을 뒤흔들었고 그 물결이 오늘까지도 이어져 현재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성으로 벌어지고 있는 반(反)월가(Wall Street) 시위(Occupy Wall Street)의 불씨가 되었다고 한다. 급기야 여의도도 표적이 된다. “1%를 위해서 99%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것이 미국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인데, 그 시스템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IMF 이후 금융감독원에게 감독의 책임을 맡기고 탐욕스런 자본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 주길 바랐지만 오히려 그들과 결탁하고 눈감아줘 피해가 커졌다. 사건이 발생이 됐을 때도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았다”라며 2011년 10월 15일, 금융소비자협회, 참여연대, 투기자본감시센터 등의 시민단체 회원 300 여명이 여의도 금융위원회 앞에서 “여의도를 점령하라--금융수탈 1%에 저항하는 99%”를 구호로 분노에 찬 국제연대 집회를 열었다. 이날 국제공동행동의 날 집회는 전 세계 80여 개국 900개 이상의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고 이 물결은 계속 더 큰 파도로 더 많은 국가들에게로 퍼져가고 있다. 저축은행·키코사태 피해자, 쌍용차 해고 노동자 등이 지난 15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금융위원회 앞에서 ‘여의도를 점령하라…금융수탈 1%에 저항하는 99%’ 시위를 벌였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스테판 에셀은 1917년 독일 출생의 유대인으로 20대 젊음을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과 그로 인한 집단수용소 생활로 준열하게 보냈고 194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을 초안하는 데도 참여하였으며 1981년 미테랑 정부 때는 외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현재 94세인 그는 나치에게서 프랑스를 구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시작하여 그 후 프랑스 사회의 미덕이라 할 의료보험, 은행 국유화, 독립 언론 체제 구축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그는 술회한다,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라고. 이제 그가 현 시대를 통탄한다. 분노가 레지스탕스의 존재 이유였음을 상기시키며 오늘날이야말로 다시 그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환기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하며“분노하라, 시도하라, 행동하라!”라고 외친다. 노(老)투사는 사실상 그의 유언으로서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호소한다,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에 맞서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일으키라고. 그러한 분노는 지난 2011년 7월 1일 인권연대 창립 12주년 기념 강연을 했던『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에게서도 이어졌다. 그는 “20대여 냉소는 버려라, 희망의 끈을 놓지 마라!... 당신은 비겁자의 자식, 억울한가? 그러면 분노하라!”고 당부했다. 젊은이들의 아버지 세대가 뭘 못했는지 알아야 하고, 이어서 젊은이들은 더 나아가야 한다, 결코 냉소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그는 기력을 다해 호소했다. 사실, 우리의 현실은 ‘인권개념 실종 종결자’ 내지 ‘인권 문맹자’라 불릴 만한 이들이 통치엘리트들로 군림하여 기고만장하는 반면, 일반 대중들의 절망과 좌절은 극에 달하고 있지 않은가. 허나, 이에 대해 분노하는 자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대부분은 참여하지 않으며 불행해 하고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스테판 에셀은 답을 준다. 100세를 몇 년 앞둔 94세 고령임에도 그러한 강건함과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느냐는 번역자의 물음에 대해 “나의 비결, 그것은 물론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비결은 ‘기쁨’입니다.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분노와 기쁨이 강건함과 행복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아주 일찍부터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의무라도 지우듯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네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야. 그러니 항상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지려고 참으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1937년 스무 살 때 “장 폴 사르트르라는 스승 같은 선배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내게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곧, 행복의 비결은 분노와 참여이며, 그것을 통해서 내가 기뻐지고 강해지고 먼저 행복해져야 남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라는 노래가사처럼, 분노를 감추려고 “웃고 있어도” 분노는 계속 치밀어 오르게 마련이다. 진정으로 웃으려면 먼저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 그 분노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일수록 그 근원을 찾아 바꾸어야만 그 분노는 풀릴 것이다. 그러한 분노가 세상을 바꾸어 왔다. 사회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롭게 한번 노할 때마다 사회는 한 번씩 젊어지고, 냉소주의로 한번 웃을 때마다 사회는 한번 더 늙어간다(一怒一少 一笑一老)라고나 할까. 분노할 때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0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