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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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때는 새나라 왕 그네가 천하통일을 꿈꾸던 민국(民國) 시대, 저마다 ‘내가 왕’이라 참칭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들고일어나 천하 제패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한심하기 그지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우익군대를 보유한 그네 왕은 이미 나라를 절반 넘게 평정해 다른 맞수들의 표적이 된지 오래. 전설적인 무예를 지닌 세 명의 검객 합규, 도관, 사균도 자신들의 앞날을 위협하는 그네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그네는 자신의 백 보 안에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백 보 금지령을 내리고 엄청난 지위와 명예를 현상금으로 내걸어 그들을 사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의 목을 친 자에게는 십 보 안에서 알현할 영광이 주어졌다. 어느 날 지방의 한 미천한 장수인 재인이 전설적인 세 검객을 처치했다며 그 증거물들을 들고 새나라 왕궁을 찾아왔다. 자신 또한 멸문지화를 당할 뻔한 폐족 출신이었던 재인은 그 공으로 그네 왕 가까이 십 보 안에 들어가게 되지만 결국 그네를 처치하지 못하고…. ‘황제’라는 칭호를 쓴 최초의 왕 진시황제를 둘러싼 역사를 다룬 장이모우 감독의 무협영화 ‘영웅(2003)’을 우리 정치상황에 비틀어 보았다. 이연걸이 주연한 이 영화는 천하의 이름으로 진나라 왕 영정을 암살하고자 나선 영웅들이 천하를 위해 영정을 죽이지 않고 스스로를 희생한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다. 평론가들이나 영화 마니아들은 다양한 이론과 논리로 영화가 지닌 미학을 얘기하고 작품성을 평하지만, 몇 번이나 같은 영화를 본 필자에게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원수를 죽이기 위해 ‘정의’라는 대의 아래 모인 이들이 왜 끝내 그 ‘정의’를 실현하지 않고 ‘정의’의 깃발을 내려야 했을까. 영화는 결국 중국이라는 대국적 견지에서 보는 ‘더 큰 정의’ 앞에 ‘작은 정의’를 희생하는 일이 당연한 것인 양 보여주고 있다. 알려진 대로 시황제는 중국대륙을 통일한 뒤 만리장성 축조를 비롯해 아방궁·병마용 건설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수많은 백성들을 희생시켰을 뿐 아니라 분서갱유 등을 통해 사상을 탄압함으로써 그가 죽은 뒤 20년도 채 못 가 제국이 멸망하도록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결국 영웅들이 내린 정의의 깃발이 더 큰 악을 부르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정의가 또 다른 정의와 부닥치는 상황 앞에 놓일 때가 종종 있다. 의심 없이 정의라고, 진리라고 믿었던 것을 압도하는 또 다른 정의와 진리가 등장할 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바로 제주 강정마을에서 이뤄지고 있는 해군기지 건설 사업이나 핵발전소 건설 사업과 같은 일들이 그러한 예다. 하지만 ‘국가적 사업’이 ‘마을의 평화’나 ‘사람의 인권’보다 과연 높은 가치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가치의 혼란에는 늘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 정의는 정의이고 진리는 진리다. 정의가 훼절당하고 진리가 훼손당하는 현실 속에 이미 파국적 결과의 씨앗이 뿌려져 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장이모우 감독의 무협영화 ‘영웅(2003)’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다음 다시 영화로 돌아가 무림 절대고수 무명(이연걸 분)의 정의에 대한 오해는 그래서 뼈아프기까지 하다. 그의 오해가 결국 오래지 않아 수많은 이들의 피로 가시화됐을 뿐 아니라 더 큰 역사의 왜곡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의협심에 넘치는 이연걸이 될 수는 없다. 더구나 그의 초절정 무예는 꿈에도 꿀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삶 속에서 늘 자신에게 적잖은 무게로 다가오는 성전(聖戰)에 직면한다, 인간다운 삶이라는. 매일 비슷한 무게로 다가오는 성전을 포기할 때 우리는 자신과 주위의 많은 이들을 비인간적인 삶으로 추락시키고 만다. 몇 년 만에 대회전(會戰)을 마주하고 있다, 비기(秘器)를 지닌 무림 고수가 아니라 한 장의 투표권을 지닌 국민으로. 무명의 일이 아니어도 단 하나의 오해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자신에게 닥치는 무수한 결단의 순간에 쾌감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솔직히 역사적 순간에 서 있다는 쾌감보다는 진리를 오해해 잘못된 길을 걷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훨씬 크다. 이 두려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좋은 뜻을 나눌 수 있는 이들과 함께 걷는 길뿐이다. 다만 지금도 진리에 다가서길 망설이는 이들을 위해 이 한마디는 전하고 싶다. “오해하면 아니, 아니, 아니 되오!”
2017-07-14 | hrights | 조회: 611 | 추천: 2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최근 한 방송에서 ‘무방비 도시’라는 제목으로 한 시사 방송이 있었다. 그것은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칼부림, 살인, 집 안방까지 쳐들어온 성폭력 등 범행의 이유나 대상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는, 제어 불가능한 ‘괴물’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지난 8월 22일 저녁 서울 여의도 대로변에서 발생한 흉기난동 사건이 발생되었을 때 우리학교의 교사들은 재학 중인 여러 학생들을 떠올렸다. 화가 나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맨손으로 창문을 깨고 의자를 집어던져 다른 학생들이 다치게 되는 사고를 일삼는 갑이(가명), 학급의 학생들이 자기를 괴롭게 한다며 갑자기 화가 나서 지나가던 학생에게 주먹을 날려서 코뼈를 부러트리고도, 지나가던 아이의 잘못이라며 우겨대는 을이, 1학년 때는 친구들이 자기를 괴롭히는데, 교사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분노를 내뿜다가 음란물에 빠져들고서는 작고 약한 동성의 친구들에게 성적 행동을 강요하는 정이 등 이들에 대한 가정, 학교, 사회모두의 돌봄이 없는 한 ‘괴물’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학교는 학생들이 날마다 함께 지내면서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곳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배우고 이해하는 공감능력을 키워야 하는데,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가기 바쁜 학생들과 많은 행정업무로 피곤을 느끼는 교사와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교사들은 학생이 교문을 나서야 행복하고, 부모는 학생이 집을 나서야 행복하고, 학생은 이들이 없어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뒤늦게 교육과학기술부는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성교육 비전 선포식, 장관과 직원들의 출근길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밥상머리 교육 캠페인, 민간 기업체와의 밥상머리 교육 협약식등 각종 행사로 요란하지만 학교는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학교폭력 관련 자살사건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내놓는 교육부의 졸속적인 교육정책은 교사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그 예로 현재 운영하는 “위(Wee) 프로젝트”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다. 위 프로젝트란 정서·행동발달에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상담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치유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1차 세이프넷(Safe-net)으로 학교에 위 클래스, 2차는 지역교육지원청의 위 센터, 3차는 시도교육청 차원의 위 스쿨이 있다. 우선 학교에 설치된 위 클래스는 그 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상담을 할 수 있는 연속성이 중요한데 현재 정규직 전문상담교사는 학교 수 대비 3%로 배치 비율이 낮아 상담자가 주로 계약직으로 연속성이 없고, 학교의 환경을 경험해 본적 없는 상담교사는 학생, 교사, 학부모 사이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문제가 심각해서 2차기관인 지역교육지원청의 위 센터로 보낸 학생 중 부모가 학생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때는 학생과 부모가 함께 치료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치료 거부 혹은 여타의 이유로 부모의 정신적인 문제와 함께 학생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학교에 되돌아오고 있다. 교육부가 학교폭력 관련 자살사건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내놓은 위(Wee) 프로젝트. 위 프로젝트란 정서·행동발달에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상담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치유하는 시스템이다. 사진 출처 - KTV 학교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중 가정에서 조차도 보살핌을 받지 못한 학생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때문에 선진국들은 가정에서 보호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여러 정책을 만들어놓고 있다. 독일의 경우 한 부모·맞벌이 가정 아동, 고립 아동, 이상행동 아동 등 부모가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1992년부터 ‘호르트’(Hort)라는 공공 방과 후 교육제도를 운영 중이고, 미국은 2002년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하며 ‘21세기 지역사회학습센터’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개별 학습 지원부터 약물·폭력 방지, 기술교육, 미술·음악·레크리에이션 등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한혜정(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지역 주민자치센터나 공공 회관에 부모들이 모여 사랑방을 마련하고 동네 아이들을 함께 돌본다면 끔찍한 일들을 많이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방법은 스스로를 살리고 서로를 돕는 주민들이 주도하는 마을에서는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성범죄나 세상에 복수를 하겠다는 ‘묻지마 살인’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 개개인이 자기 동네를 돌봄의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부모와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는 학생의 외로움과 고통을 들어줄 수 있다면 세상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93 | 추천: 0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8월이면 동아시아는 애국의 시즌이다. 한중일 모두 과거이자 현재를 붙들고 싸웠다. 특히 한일간의 외교에서는 신랄함을 감춘 모호한 수사들이 어김없이 교환되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쏟아 놓은 것 같은데 일본정부로부터 부채를 진 자의 마땅한 행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식민강점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은 지속될 수밖에 없으므로 조급하게 지금 외교의 성패를 논할 수는 없다. 대통령의 발언이 동아시아에서 식민강점과 전쟁의 피해들이 온전하게 청산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지시키는 기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발언에서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위안부의 문제가 우리사회에서 공론화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그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미묘하지만 일본군의 관여와 책임을 최저로 인정하는 수준의 고노 담화(1993)였다. 그 후 일본은 이 담화를 기준으로 법적 책임을 배제하면서 이른바 도의적 책임을 이행하겠다는 줄타기 방식을 펼쳤다. 이러한 방식의 원조는 거슬러 올라가면 한일국교정상화였다. 어쨌든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이후 아시아국민평화기금을 조성하여 한국과 주변국들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면서 책임을 희석하려고 시도하였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고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를 요구하였다. 피해자들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한 일본의 접근을 단호하게 배격하였다. 한국정부도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나섰다. 물론 이후 일본에서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기된 위안부 소송은 제대로 진행조차 되지 못했다. 다만 흥미로운 대목은 2000년에 도쿄에서 전쟁범죄와 성폭력에 관한 각국의 전문가들이 모여 국제민간법정을 설치하여 위안부와 관련하여 일본의 전쟁범죄를 확정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민간법정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유엔 보고서들도 여러 차례 일본의 전쟁범죄를 확인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아무런 법적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징용이나 강제동원 등 전쟁범죄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이나 주장에 대해 일본정부는 불성실한 자세로 임하였다. 예컨대, 1945년 이전에는 일본에 국가배상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국가는 책임이 없다는 논리를 구사하거나, 일본정부에 의한 강제적인 동원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청구권협정이 이미 그러한 불법적인 인권침해 문제까지도 포괄적으로 해결하였다는 식이다.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사실을 청구권협정으로 해결하였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본은 국면마다 거짓말로 사태를 호도해왔다. 최근에 와서는 일본 법원은 시효소멸론으로 청구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국제인도법상의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다. 이른바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에 대해서 공소시효나 소멸시효를 배제하는 것, 그리고 이에 관한 국제법상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자국의 법제를 원용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법의 원칙이다. 결국 일본은 전후에 확립된 국제법의 기본원칙을 거부하고 전쟁을 통해 자행된 자신들의 불법을 여전히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국제법의 원칙으로 돌아가서, 그리고 자신의 헌법이 명목상 내세우는 평화주의 이념으로 돌아가서 아시아에서 평화질서를 적극적으로 수립하는데 동참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공동으로 조성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작년 12월14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천 번째 수요시위. 일본대사관을 응시하는 평화비(소녀상)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끌어안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작년 8월 30일에 헌법재판소가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정부의 행태를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말, 올 5월, 그리고 광복절에서 일본정부를 향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도 이 결정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이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비판하고 일왕의 사죄와 일본의 전향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발언과 관련하여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은 지난해와 올해 한일정상회담에서 거듭 위안부 문제를 시급한 인도적인 과제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인도적 책임이나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주체가 아니다. 인도적 책임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가난한 나라에 큰 홍수가 나서 생활의 곤란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도의적 지원책임을 설명할 때 적합하다. 법적 책임이 있는 자는 법적 책임을 이행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법적 책임이 있는 자에게 엉뚱한 책임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생활고 때문에 일본에게 인도적 지원이나 인도적 책임을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들은 도의적 책임의 이행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일본의 행태를 명백히 거부하였다. 일본대사관 앞의 1000회가 넘는 수요집회는 범죄와 불법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에 대한 피해자들의 근원적인 자존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도적 과제나 책임을 대통령이 언급하면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된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이 문제에 관해 무엇이든 당장 얻어내거나 분노를 배설해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매우 원칙적인 주장과 걸맞는 성과를 기대한다. 이미 한국 정부는 93년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생활지원금을 제공하고 있으며, 2005년에 안정적인 지원법도 마련하였다. 우리 정부가 그때부터 이미 인도적 책임이나 도의적 책임을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고령인 그들이 모두 개인적인 생애를 마치기 전에 일본 정부가 법적인 책임을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어쨌든 우리는 피해자들이 일본이 아시아평화기금이라는 우회적인 지원을 거부한 이유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권리와 자존감을 통해서 그들은 이미 해법을 말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감정적 과잉표출 행태가 오히려 장차 부실한 해결책에 대한 액막이가 아닐까 우려된다. 정치인들이 국민감정의 정치적 활용을 위해 위안부 피해자의 인권문제를 졸속으로 처분하지 않기를 바란다. 피해자들의 권리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특히 외교관계에서 정확한 개념 위에서 멋진 수사를 구사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언제나 탁견을 제시하였던 조시현 교수의 최근 글을 소개하면서 애국의 시즌을 회상한다. 조시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인도주의 문제인가?—한・일 정부의 최근 입장에 대하여—", <민주법학> 제49호, 2012.7, 165-195. http://delsa.or.kr/xe/index.php?mid=dls&document_srl=335192(☜ 내용보기 클릭)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15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30여년 종교 관련 공부를 하면서 종교의 종점은 생명과 평화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종교인으로서의 삶도, 종교 관련 학문도, 모두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확장시킬 때 존재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생명과 평화는 교단이나 종파, 단순한 이념에도 갇히지 않는 건강한 힘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어려웠다. 모두의 생명 보다는 내 생명이 더 중요하고, 우리의 평화가 아니라 나의 평화가 우선이라고 본능이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이유는 교단이나 종파를 넘어서는 언어를 구사하거나 행동이라도 할라치면 어느 틈에 공격해 들어오는 비판적 목소리와 소모적인 논쟁을 해야 하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압력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종교 관련 동네는 특히 심했다. 예전 교회에서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았고, 기독교 정신에 따라 세워졌다는, 내가 13년간 근무한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성 교회는 진작에 떠나 지금은 자유롭고 깊은 교회를 만들어보려 애쓰는 중이지만, 근무하던 대학을 떠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지금까지의 종교학적 작업을 생명과 평화의 언어를 중심으로 사회화시키고 싶던 차에 작은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서 낸 평화인문학 연구교수 공채 광고를 보게 되었고, 주저 없이 지원해 8월 1일자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연구교수는 신분도 다소 불안하고, 월급도 상대적으로 적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강요가 제도화한 곳에는 있고 싶지 않았고, 머리가 더 굳기 전에 합리적인 곳에서 새로운 학문을 하고 싶다는 희망이 더 컸기에, 비교적 주저함도 적었다. 재직하던 대학에 사직원을 낸 다음 날 평소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동료교수들과 환송주도 했다. 고맙고 즐겁고 아쉬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미술대학 교수 한 분이 서양식 캘리그래피에 가까운 서예 작품 한 점을 직접 만들어 내게 선물로 건네주었다: “중취독성(衆醉獨醒)” 사진 출처 - 필자 중국 초나라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굴원이 회왕에게 총애를 받자 동료 정치인들이 질투하며 악성 루머를 퍼뜨렸고, 급기야 왕도 굴원의 관직을 박탈했다. 그 뒤 초라한 몰골로 장강(양쯔강) 주변에서 유랑하던 굴원을 보고 동네의 한 어부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느냐 물었다. 그러자 굴원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중인개취 아독성(衆人皆醉 我獨醒 사람들은 모두 취해있는데 나 홀로 깨어있어서...)” 거기서 나온 말이 ‘중취독성’이다. 남들은 세속의 명리와 이기심에 취해 남을 모함하며 소인배처럼 살고 있을 때, 홀로 깨어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며 사는 자세를 의미했다. “중취독성!” 대단히 강렬한 언어였다. 동료 교수가 나에게서 ‘중취독성’ 비슷한 이미지를 느꼈다면 고맙고 황송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사찰에서 절한 뒤 ‘짤린’ 경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듣기에는 과하게 황송한 문장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깨어있는 삶을 살고 있지는 못한 마당에 그런 문장을 받고 보니 내심 민망했다. 작품을 받고는 짬이 날 때마다 나는 어디에 취해 살고 있는 것일까, 깨어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틈틈이 생각해보았다. 남들이 ‘예스’할 때 ‘노’라고 답하는 일은 어렵다. 적당히 휩쓸려 살면 편안할 때 그에 거스르는 자신의 주관을 갖고 실행하기란 힘들다. 그러려면 현명해야 하고, 용기마저 있어야 한다. 현명함에 용기까지 갖추기란 얼마나 간단치 않은 일이던가. 하지만 인류의 위대한 선구자들이 대부분 ‘중취독성’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독성’은 깨어있는 삶이고, 이웃을 향한 삶이고, 저항하는 삶이다. 그리고 굴하지 않는 희망을 품은 삶이다. 창조적 소수자들의 ‘중취독성’하는 삶이 결국 인류를 바꿔온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깨어있는 상태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푼다.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고요하면서도(寂寂) 의식은 더 맑고 깊은 상태(惺惺)이다.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도 한다. 비고 고요하면서도 신령스러운 앎으로 가득 찼다는 뜻이다.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고 집착 없이 실천한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잠도 밤에 취하고 술도 밤에 취하니 밤을 조심하라는 비유적인 훈계가 나온다. 잠도 자지 말고 술도 먹지 말라는 단순한 뜻은 아니다. 밤은 판단의 기준이 자신에게 몰리는 때이다. 낮에 자신의 모습은 공개되어 있어서 누구에게나 보여 조심하게 되지만, 밤이 되면 자신의 모습이 주로 자신에만 보인다. 그래서 자기식대로 행동하게 된다. 적당히 타협해도 판단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두기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다. 물론 낮과 밤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사람에 따라 낮에도 밤처럼 행동하고 밤에도 낮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들 취해있을 때 홀로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혹시 나는 어디에 취해있는 것일까. 남들도 취해있으니 어디에 취한 들 상관없는 것일까. 정말 홀로 깨어있을 수 있을까. ‘독성’은 단순한 교훈적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감행해오는 엄청난 명령이었다. “중인개취아독성(衆人皆醉 我獨醒)” 내게 그런 자극을 준 이가 고마웠고, 슬쩍슬쩍 응원해주던 옛 동료들도 생각난다. 몇 주 지나지 않았지만 합리성과 배려가 느껴지는 서울대 연구 환경이 무엇보다 반갑다. 제대로 공부 좀 해야 할 텐데 나이 들수록 머리가 굳는 느낌이니 의욕만큼 할 수 있을지 살짝 염려스럽다. 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명백하니 그것도 큰 복이다. 동료들과 즐거이 술에 취하더라도 빨리 깰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과한 문자적 해석만은 아니리라.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55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치부하는 행태는 정치인들에게나 익숙한 방정식으로 알고 살았다. 신(神)을 믿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성직자에게 많은 신뢰와 애정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하다. 더럽고 추잡스러운 세상에서 무한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성직자와 약속을 한다면 누구나 그 성직자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믿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직자로부터 약속을 파기당하는 뻔뻔스러운 일을 겪는다면 누구나 분노할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나와 오창익 국장, 인권연대를 농락·농간한 대구대교구의 신부들에 대한 분노를 참기 위해서 나는 노력하고 있다.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받고 있다. 그들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서 왜 당신들은 그 따위 천박하고 몰상식한 짓거리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화가 많이 난 상태에서 실수를 할까봐 전화를 거는 것도 포기하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성직자와 약속을 해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한 성직자와의 약속은 성직자에 의하여 짓밟혔다. 나는 인권연대와 함께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의 매일신문사 이창영 사장 신부가 소년소녀 가장 돕기를 한다는 명목으로 모금한 수억 원의 돈을 마음대로 사적인 용도로 횡령한 사실을 고발한 사실이 있다. 참으로 경악스럽고 치사한 만행이었다. 속된 말로 벼룩의 간을 빼어먹은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고해성사 대신에 반박 성명서를 통해 인권연대가 오히려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몰아세우면서 “교회가 베풀 수 있는 관용의 한계를 넘었다.”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가장하여 고함을 쳤다. 그래도 나와 오 국장 등은 참고 또 참았다. 이들이 스스로 과오를 뉘우치고, 교회의 자정 능력이 발휘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창영 신부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사실만 첨언해 볼까. 그는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현대 가톨릭 사상’이란 학술잡지에「죽음과 임종을 돌보는 일에 관한 소고」라는 논문을 게재하려다 논문 도용 사실이 들통 나 싣지 못했다. 단순 표절이 아니라 도용(盜用)이었다. 이창영 신부는 도용(盜用)에 익숙한 사람같았다. 인권연대의 문제제기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한겨레가 이창영 신부의 파렴치한 행위를 보도하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는 조환길 대주교가 2명의 신부를 특사 자격으로 파견하여 그동안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이창영 신부를 신문사 사장에서 해임하고, 필요한 모든 원상회복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교구 사정을 이유로 약속 이행을 약간 미루기도 했으나, 약속이 지켜질 것으로 믿고 기다렸다. 결과는 배신이었다. 지난 6월 4일에 있었던 대구대교구 부정과 비리 근절을 위한 기자회견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약속은 지킨다. 시정잡배, 깡패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하며 약속한 사람들이 어떻게 약속을 깰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띵할 지경이다. 약속을 깨뜨리기 직전에는 지인을 통해 내게 “나대지 말고 가만 있으라”고 했단다. 아, 이제는 협박까지 하는가. 천주교 대구대교구 조환길 대주교는 알고 있다. 대주교 자신이 교구 소속 신부의 범행을 알고도 은폐하고 왜곡했다. 나는 그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지만, 그들의 양식과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믿고 지금껏 공개하지 않았다. 남의 돈, 남의 논문에다 하느님의 이름까지 도용(盜用)하면서 부도덕한 부패행위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것인지 궁금하다. 나는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해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는 것을 내 인생의 소박한 철학으로 삼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훌륭한 성직자여! 당신들은 참 자랑스럽게 살고 있구나.” 참고기사 : 한겨레 2012. 8. 19.자 박현철 기자 보도 내용 ☜ 클릭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49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K.A.L에 관한 추억 큰형은 46년생. 한국전쟁이 끝난 후 10대 후반에 이미 일제 강점기 때 온 나라의 산판을 휘저으며 나무를 실어 날랐던 제무시 도락꾸(G.M.C트럭)기사의 조수로 취직해 평생을 운전대로 먹고살았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여를 했으나 군단장지프를 몰아 다행히 전운을 피할 수 있었고 70년대 초반 갓 결혼한 후 큰조카가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엔 사우디 개발의 전사가 되어 열사(熱沙)의 나라에서 산업역군 일을 톡톡히 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형이 사우디에서 귀국한날의 풍경은 잊혀 지지 않는다. 매일 밤 살구나무아래 장독대 앞에서 정한수를 떠놓고 아들의 안녕을 기원했던 어머니는 벌써 동구 밖에 나가 형이 타고 오는 버스가 왜 이리 늦느냐고 재촉을 하시고 17가구가 살던 동네 사람들은 마치 대동놀이회의를 하는 양 좁디좁은 초가집 단칸방으로 모여들었다. 형이 풀어놓은 선물은 대충 이랬다. 조니워커 블랙레벨과 캔트담배 그리고 각종 초코렛. 내가 받은 것은 파카 볼펜과 카시오 전자시계. 물건을 하나씩 내놓을 때마다 긴 설명이 이어졌다. 도둑질하면 손 잘린다 여자와 눈 마주쳐도 감옥에 간다 술 마실 생각은 꿈도 못꾼다 등등. 이어 사우디 공사현장의 더위와 열악함, 힘든 노동의 나날을 얘기 할 땐 형도 어머니도 동네사람들도 눈물이 그렁그렁 했었다. 그때 동네에서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형이 유일했다. 당연히 하늘을 나는 기분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고 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비행기 이착륙의 긴장에 대하여 스튜어디스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기장의 제복이 얼마나 근사한지에 대하여. 비행기 안에서도 밥을 준다는 것과 그 맛의 짜릿함에 대하여 긴 설명을 이어갔다. 그땐 레슬링하면 김일. 축구하면 차범근 회사하면 현대 그리고 외국을 떠올리면 대한항공(K.A.L)이었다. 김일과 차범근의 플레이는 전설처럼 멋진 추억으로 각인되어있고 현대(HYUNDAI)라는 회사가 노동자에게 못할 짓 많이 한 회사라는 건 그 후로 몇 년 걸려 알게 되었지만 대한항공(K.A.L)의 국적기에 대한 위상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국위선양과 관련하여 모든 멋진 놈들은 대한항공의 트랩을 밟고 내렸고 대한항공의 트랩을 밟고 장도에 올랐으니까. 하늘을 나는 태극기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데.... 바이칼호수와 대한항공(K.A.L). 마치 천국과 지옥 대략 내용은 이렇다. 지난 7월 6일 나는 29명의 순례단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에 나섰다. 분단을 넘어 대륙으로 미래로 향하는 길. 블라디보스톡의 안중근. 하바로프스크의 김 알렉산드리아를 만났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을 만나고 자신의 삶을 도려내어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자했던 순교자의 날선 핏방울을 가슴에 새겼다. 역이주한 고려인들의 마을인 우수리스크의 고향마을에는 희망 과수원이란 팻말을 세우고 거기서 자란 과일이 우리가 역사의 이름으로 빚졌던 고려인들에게 얼마나 큰 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궁리하며 흐뭇해했다. 두 번의 일출과 세 번의 일몰을 맞으며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맞은 바이칼. 발목만 닿아도 무릎까지 시리는 차가운 물에 온몸을 담구고 내장을 꺼내어 삶에 찌든 찌꺼기를 흔들어 씻는 나만의 의식은 전율 이었다. 그렇게 스물아홉 도반들은 각자 때로는 함께 자근자근한 감동들을 쌓아가며 일정을 마무리 하고 있었다. 13일이었던가. 마지막 날 밤 시베리아의 파리라 일컫는 이르쿠츠크에선 전제군주의 압제에 맞서 혁명을 꿈꾸었던 순진한 러시아 장교들의 데카브리스트의 흔적을 더듬으며 시베리아에서의 마지막 보드카를 들고 건배 하는 시간. 안내자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이르쿠츠크발 인천행 비행기(kal984편)가 연착이 되었다는 전갈이다. 정확히 975분 11시간하고 15분이다. 아예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지 않았단다. 이르쿠츠크 공항에 낀 안개 때문이라는데 이렇게 청량한 하늘에 웬 안개인가 의문이 들고 공항출발 두시간전인데 이제야 통보하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싶기도 했으나 일단 벌어진 일. 부랴부랴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 한다. 오전 세시 반 출발이 다음날 오후 두시 반으로 늦춰졌으니 문제는 숙소와 이동수단인 버스다. 마침 이르쿠츠크에 대규모 유럽인들이 몰려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길바닥에서 자야한다는 안내자의 다급한 요청에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건 총 2000달러 쯤 되는 추가 비용 때문이다. 여행의 막바지라 대부분 주머니에 차비만 남겨둔 상태에다가 방학 중 알바비를 아끼고 아껴 참가한 대학생, 큰맘 먹고 다섯 가족이 모두 참가한 경우. 기업의 지원을 받아 참가한 새터민 학생들에게 추가비용은 적지 않은 부담이 될터. 어찌어찌하여 순례를 준비한 희망래일과 후원해준 회사의 추렴으로 숙박을 결정하고 그 밤 K.A.L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안주삼아 보드카를 들이킨다. 이르쿠츠크 공항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이르쿠츠크 공항의 국제선은 무척 좁다. 80년 대비 내리는 호남선의 애환을 간직한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의 호남선 대기실에 비해 약 1/3도 안 되는 수준이다. 아침 8시 반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비행기 탑승까지 무려 7시간을 더 지체해야 한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잠시 몸누일 공간도 없어 서너 평도 안되는 작은 상점을 들락거리며 연신 음료수만 먹어댔다. 억울한 마음에 푸념이라도 할 요량으로 K.A.L 직원을 찾았으나 코빼기도 안비추고는 달랑 사과문 하나 붙어있다. 역시 안개로 인한 연착이란다. 죄송하다지만 죄송한 흔적은 공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나중이라도 K.A.L 직원을 만나면 간단하게 섭섭한 심정을 전하는 정도. 국적기 아니던가 하늘을 나는 태극기 아니던가 말이다. 문제의 kal984편이 도착하려던 어제 저녁 이르쿠츠크 공항에 안개가 있었는지를 현지 공항 직원에게 물었다. 대답은 “아니오” 오히려 직원은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 어제 K.A.L기 연착은 인천공항의 사정 때문 아니었던가요? 여기는 모든 게 정상이었어요. 다른 모든 비행기는 제때 도착했습니다”. 뭔가 캥기기 시작한다. 일주일에 두 번 직항을 운영하는 K.A.L이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자회사의 이익을 위해 비행시간을 마음대로 조정 하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이것 보게? 승객이 애완동물인가 지루한 대기시간이 지나고 비행기 표를 끊는 시간. 환갑을 넘기시고도 일행의 안위를 걱정해주시던 박 선생. 우 선생 부부. 전 선생께는 무척 죄송한 마음이 든다. 말이 7시간이지 그야말로 돈 내고 묵는 감옥 아니던가. 그제서야 모습을 드러낸 지점장에게 점잖은 항의를 하고 나선 출국장 안은 모두 우리와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할 말은 많되 통로를 몰라 침묵하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선생을 만났다. K.A.L측의 일방적 통보로 좌충우돌했던 우리와는 달리 선생일행은 항공사 제공으로 호텔에서 잠을 편히 잤다는 거다. 거기다가 아침까지 챙겨 드셨단다. “이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공항에 와야 해요. 와서 따지고 따지고 또따지고, 이XX들은 그래야 말을 들어요” 격한 언어를 써가며 열변을 토하시는 ***선생은 어젯밤 한 시간이 넘는 항의에 지금도 목울대가 아프다며 헛기침을 하셨다. “저희 일행 말고도 어젯밤 함께 공항에 왔던 부산의 일가 네 분이 있어요. 그분들도 함께 호텔에 묵었어요. 지점장이 말이지요 우리가 숙식을 제공 받은 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꼭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 당부를 했단 말입니다. 근데 그게 가당키나 해요? 이선생도 이건 아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그때 나는 왜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이 먼저 생각났을까. 하늘을 나는 태극기 대한항공에 대한 믿음. 꿈의 바이칼로 편안히 모시는 Excellent in flight의 환상이 일거에 무너진다. 나는 목마른 놈이 되었어야 했다. 배고파 칭얼대는 아이가 되었어야 했고 불만이 있으면 온 집안을 헤집어 주인의 관심을 사는 애완동물이 되었어야 했다. 멀쩡히 비싼 값의 요금을 지불하고도 K.A.L은 결국 승객을 애완동물 취급하고 거기다가 거짓말까지 강요했다. 이미 지난 2월13일 예정되어있던 시베리아 횡단과 바이칼 기행(한겨레 통일문화재단.(사)희망래일)주최)도 K.A.L의 일방적인 운항불가 통보로 취소 된 적이 있다. 항공편은 물론 열차(TSR)와 숙소 그리고 이르쿠츠크 시 의회와의 협약식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행사를 진행했던 여행사의 본부장은 아직도 그 분을 삭이지 못한다. 배상은 물론 사과한마디 없었다는 것이다. 작년 그러니까 2011년 9월3일에도 일방적 결항 사태는 있었다. 그때는 우리보다 정도가 더했다. 역시 기상상황 악화가 그 이유다. 무려 28시간 지연. 아니 지연이 아니고 결항이라 불러야 옳다. 무슨 놈의 안개가 28시간씩이나 지속된단 말인가. 그들에게 기상상황 악화라는 말은 항공사 내부의 사정을 은폐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아닌가. 사진 출처 - 필자 대학의 등록금 인상경쟁에 학생들은 알바 하느라 정신이 없고 제발 좀 그만 파헤치라고 사정해도 숫한 자연은 건설회사의 이익이 되어 속절없이 무너져 간다. 자기 집 허물지 말라며 폭압경찰에 항의하던 청년은 방화범이 되어 아직도 감옥에 있고 경찰도 아닌 조직깡패들의 용역질에 노동자들의 평안한 삶도 울부짖음으로 변한다. 목마른 세상이다 찾아야할 우물도 널려져있고 참 배고픈 세상이다. 울며불며 떼를 써야 할 일도 지천이다. “권리의 침대위에 낮잠 자는 권리는 어떤 것으로도 보호 받을 수 없다”지만 자신들에게 이익을 주는 고객에게마저 애완동물 취급을 하는 항공사의 행태는 돈 내고 한뎃잠 자고 거기다가 항의까지 하지못하는 승객들을 서글프게 한다. 명색이 하늘을 나는 태극기 아닌가 말이다 Excellent in flight도 이르쿠츠크 행은 믿지 마시라. 당신도 언젠가는 우는 아이가 될 수 있으니까. 대한항공은 비행기 꼬리에 붙은 태극마크를 가려줬으면 싶다. 태극기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진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659 | 추천: 0
정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본의 유명 미스터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플래티나 데이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은 일본 도쿄 시부야 변두리 러브호텔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장면에서 시작되는데 담당형사 아사마는 상부의 지시로 경시청 특수해석연구소에 DNA샘플 조사를 의뢰합니다. DNA샘플이 전과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일반 수사절차로 알았던 아사마는 DNA조사 결과를 보고 당황합니다. 조사결과는 “성별, 남성. 나이, 40세 플러스 마이너스 10세, 혈액형 RH+ O형. 신장은 170센터에서 180센티미터 사이….”로 시작되어 마지막으로는 “도쿄도 고토구에 살고 있는 야마시타 이쿠에. 이 여성의 3촌 이내의 친족 중에 범인이 있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DNA로 범인의 인적 사항을 거의 확실히 찾아내는 수사기법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일본 경시청은 흉악범죄에 대한 검거율 상승을 명분으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DNA자진등록을 촉구합니다. 현실도 아닌 미스터리 소설을 언급한 것은 위 소설을 꼭 공상으로만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주민등록제도와 지문날인제도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를 뺀 다른 나라는 주민등록제도나 지문날인제도가 없어도 잘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는 왜 유독 개인정보침해, 인권침해 문제가 큰 이 제도가 강건하게 존속되고 있는 것일까요? 단지 존속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 진화ㆍ발전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수 차례에 걸쳐 전자주민등록증을 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주민등록증의 위ㆍ변조와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입니다. 제도 도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의 위ㆍ변조로 인한 범죄의 폐해 사례가 집중적으로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민등록증을 통한 신원확인이 너무나 일상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바로 주민등록 위ㆍ변조를 통한 범죄가 일반화된 것이라는 반론에는 제대로 답하지 못합니다. 최근 경찰청은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실종을 예방하고 실종 시 빨리 찾기 위해 지문사전등록제를 시행한다고 밝혔습니다. 만 14세 미만 어린지, 지적ㆍ자폐성 정신장애인, 치매 환자 등을 대상으로 보호자가 지문과 얼굴 사진, 기타 신상정보를 경찰청에 등록해 두고 실종사건이 발생했을 때 관련자료를 활용하는 제도로서 어린이의 경우 길을 잃었을 때 지구대와 파출소에 설치된 지문인식기를 이용해 보호자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안전에 대해 염려하는 부모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제도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자기정보결정권 침해나 정보유출가능성으로 인한 위험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보편적 인권을 침해할 위험이 있는 제도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명분을 토대로 적용 영역을 확장해 왔습니다. 용산 초등학생 살해 사건 이후 성범죄자에 대한 전자발찌 제도가 쉽게 도입될 수 있었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기술의 발전은 과거 인권에 대한 선구적 논의가 마련되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문제 상황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에 맞추어 새로운 접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관한 정보를 스스로 관리하고 결정할 수 있으며 국가가 이를 침해할 수 없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성범죄 방지를 위해 발찌 착용 제도를 도입한다거나 미아를 찾기 위해 어린이에 대하여도 지문등록제를 시행한다는 등의 손쉬운 방식에 의존하게 되면 문제 해결의 본질을 놓친 채 임기응변적인 해결만 모색하는 노릇이 될 수도 있다는 점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35 | 추천: 0
김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근래에 필자는 책방에서 책을 살피다가 제목에 ‘꽂힌’ 책이 있었다. 그 제목은 ‘가슴이 시키는 일’이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가슴이 시키는 일’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닌, 내가 정말 하고 싶고, 하면 할수록 내가 정말 행복한 일’이며,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풍요롭다,” “하늘이 주신 지금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며, “항상 절망이 아닌 희망의 편에” 선다고 설명한다. “미래가 보장된 의사의 길을 버리고, 신부가 되어 아프리카 오지 마을 톤즈로 떠난 ‘한국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휘황찬란하고 볼거리가 많은 유럽 대신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로 가장 먼저 달려간 ‘바람의 딸’ 한비야 씨” 등을 예로 들며, 저자는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한 걸음 더 내닫는 힘이 있다.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질타와 무시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은 인생의 무게와 꿈을 바꾸지 않는다. 가슴이 시키는 일을 했기에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아울러, “평범함을 뛰어넘어 비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사람들, 역경을 딛고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가슴이 시키는 일’을 했다.”고 한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만 죽을 때 후회 않는다고 한다. 어떤 책을 보면,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5가지” 중 첫째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서 살지 않고 나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이고, 둘째는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지 말걸 그랬어.”라고 한다. 곧, 자신의 삶, 자신의 일이 먼저 주관적으로 ‘의미’가 있고 가슴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후회 없는 삶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진정으로 의미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돈, 명예, 권력, 이 모든 것을 열심히 추구해서 큰 성과를 얻으면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참된 ‘행복’일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마태오 5장 6절)라는 성경 말씀은 ‘옳은 일’에 대한 추구 없이는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할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동서양의 재벌, 갑부들이 인생 말년에 부랴부랴 큰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깨달음에서 오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이 시대, 한국인들은 ‘옳은 일’, 곧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책『정의란 무엇인가』가 미국에서는 10만부 안팎으로 팔린 것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130만부를 넘어섰다고 한다. 샌델 자신도 “놀랍고 말문이 막힐 정도”라며 한국 독자들의 반응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월 스트리트 저널」이 2012년 6월 7일 서울발 기사에서 전한 바 있다. 이 신문은 미국은 38%의 응답자가 미국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답변한 것과 달리 한국은 74%의 응답자가 불공정하다고 답변했다는 것은 “한국 국민들이 공정성에 대한 욕구가 더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면서 “정부가 나서서 사회경제적 불리함을 치유해야 한다고 믿는 확률이 한국은 93%로 미국인의 56%와 비교해서 더 높게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 <가슴이 시키는 일 PART. 2: 실천편>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이러한 ‘옳은 일’ 내지 ‘정의’ 문제의 핵심은 ‘인권’이다. 인간이라는 이유 그것만으로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적 권리인 그 인권조차 침해당하는 이들이 사방에서 급증하기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 ‘옳은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권 실천의 노력과 투신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각자가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이 아주 작더라도 그것이 모이면 결코 작지 않음을 우리는 인권의 발달사, 혹은 우리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가슴이 시키는 일’과 ‘옳은 일’에 대한 목마름을 강조하며, 필자는 이 시대의 우리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그렇게 살기를, 그럼으로써 남들과 똑같지 않고 비범하게 인생을 살기 바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강조한 말도 바로 이것이었다. “너의 인생을 비범하게 만들라!(Make your life extraordinary!)”라는 그의 가르침은 “현재를 즐겨라!(Seize the day!)”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 함께 명대사이자 참된 가르침의 예로서 그 영화가 나온 1989년 이래 현재까지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가슴이 시키는 일’이 정의롭기까지 해서 ‘옳은 일’에 대한 목마름의 해갈에도 도움을 주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이것이 인권교육의 몫이며 ‘인권’이 ‘가치’로서 교육되어야 할 이유이다. ‘가치’로서의 인권에 대한 생각은 필자가 지난 15년 간 대학 강단과 시민강좌에서 인권을 가르치며 갖게 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군부독재시대가 아닌 지금의 시대에는 ‘이념’으로서보다는 ‘가치’로서 인권에 접근하는 것이 훨씬 호응도 크고 더 맞는 방법이다 싶다. ‘가치’로서 인권에 접근한다고 함은 사회변혁 이념으로서 혹은 지식이나 이론 내지 규범으로서 인권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혼란을 극복하게 해 주는, 분명히 옳기에 올곧게 추구할 만한, 특히 가슴을 뛰게 하는 ‘가치’로서, 인권을 가슴 안에 심어주는 것을 뜻한다. 이는 사회 안에 만연한 반(反)인권적인 가치와 불의에 대항하는 의로운 분노와 실천적인 저항, 그리고 가슴 뜨거운 소통과 ‘연대’(solidarity)와 자연스레 이어진다. 하여, 가슴에 ‘인권’이라는 가치를 담음으로써 ‘인권이 시키는 일’이 곧 ‘가슴이 시키는 일’이 된다면, 그것을 하며 사는 일이야말로 행복과 만족의 길이며 “평범함을 뛰어넘어 비범한 삶을 사는” 길일 것이다.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가슴이 시키는 대로 못살고 익숙한 평범함에 안주해버리는 일, 적어도 그렇게는 살지 않으려 하는 것, 그 자체가 곧 비범함이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가슴에 ‘인권’이라는 가치를 담아, 생각하면서 살 일이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84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6월8일과 10일 홍대 부근 일대의 클럽과 야외에서 금지곡 콘서트가 열렸다. 70년대 박정희의 유신체제 하에서 금지곡이 되었던 노래들을 요즘 세대의 젊은 음악인들이 새롭게 해석해 부르는 콘서트다. 이 콘서트는 의미심장하게도 6월 항쟁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생각해 보면 대중의 의식과 감성까지 통제하려 했던 군사 독재 시대의 유물인 금지곡만큼 민주주의 의미를 새롭게 기억하게 하는 게 또 있겠는가. 70년대 금지곡 하면 우선 떠오르는 건 물론 당대 대학생들의 감성과 정신을 보여주었던 일군의 통기타 음악이다. 70년대 대학생 계층에 의해 주도된 청년문화, 특히 통기타와 록음악이 단지 일부 계층의 소비문화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청년 세대의 감성과 의식을 대변하는 뛰어난 작가적 뮤지션들을 통해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뮤지션을 꼽는다면 모던포크의 기수였던 김민기와 한대수, 청년문화의 울타리를 넘어 주류권의 스타로까지 도약했던 송창식과 이장희 그리고 한국 록의 대부라 불리는 신중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대 청년 세대의 감성과 의식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많은 노래가 금지곡의 사슬에 묶임으로써 70년대 청년문화의 정치성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 전체를 일사불란한 병영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게 대학생 집단은 가장 큰 반대세력이었고, 이들의 문화는 체제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방종으로 인식되었다. 군사정권은 이미 70년대 초부터 대중음악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며 금지곡을 양산하고 있었는데,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된 1975년에는 문공부가 나서서 아예 모든 대중가요를 재심사하며 222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고 이어 ‘방송윤리위원회(방륜)’이 ‘고래사냥’, ‘아침이슬’ 등에 추가로 금지조치를 행하게 된다. 그 해 말에는 이른바 대마초파동과 함께 청년문화의 주역 대부분이 활동을 정지당하고 방송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됨으로써 7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통기타음악과 청년문화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김민기의 경우 금지곡으로 지정된 것은 공식적으로 ‘아침이슬’ 뿐이었지만 사실상 그의 이름을 건 모든 작품이 음으로 양으로 금지되어야 했고, 한대수의 경우도 ‘물 좀 주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이미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송창식의 ‘왜 불러’와 ‘고래사냥’, 이장희의 ‘그건 너’ ‘한 잔의 추억’도 금지되었고 신중현의 ‘미인’ ‘거짓말이야’ 등 많은 노래도 금지되었다. ‘거짓말이야’의 금지 사유가 ‘불신풍조 조장’에 있었다는 건 그 시대를 함축하는 코미디지만, 더 기가 막힌 건 ‘미인’ ‘고래사냥’ 등 이미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노래를 금지시킨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당시 심의위원이 “가사나 곡 자체는 문제점이 없으나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좋지 못한 점을 감안’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노래 가사를 불건전하게 바꾸어 부른다는 게 이유였다. 음악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노래가 사회적으로 활용되는 사후 결과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였던 셈이다. 금지의 사슬은 국내 가요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구미의 많은 팝음악들이 이른바 가요정화를 위한 금지의 세례를 피하지 못했다. 금지의 사유는 크게 1)혁명 고취 및 불온물, 2)퇴폐 저속 외설작품, 3)마리화나 음악 등이었다. 존 바에즈의 ‘We Shall Overcome'과 밥딜런의 ’Blowing in the Wind'는 ‘반전’으로, 비틀즈의 ‘Revolution'과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C.R.)의 ’Have You Ever Seen the Rain'은 ‘불온’으로, 맬라니 사프카의 ‘Lay Down'과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Plastic Fantastic Lover'는 '불건전'으로, 시카고의 ‘25 or 6 to 4'와 템테이션스의 ’Psychedelic Shack'는 환각으로, 조니 미첼의 ‘Woodstock'은 ’퇴폐‘로 각각 금지당해야 했다. 일부 곡이 금지가 되면 앨범 발매가 정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저 유명한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선 ’Lucy in the Sky with Diamond'와 ‘A Day in the Life'가 빠져야 했고, 사이먼 앤 가펑클의 <Greatest Hits>에는 ’Cecillia'가 없으며, 퀸의 <A Night at the Opera>에는 ‘Bohemian Rhapsody'가 없고 딥퍼플의 <In Rock>에는 ’Child in Time'이 빠져야 했다. 대부분 해당 앨범의 핵심적인 곡들이었으니 한국의 팝음악 팬들은 이 시기 팝음악의 정수를 제대로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했던 셈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이 이른바 빽판이라 불리는 불법복제판 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6월 8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앞 놀이터에서 6월항쟁 25주년 행사국민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린 금지곡콘서트에서 인디밴드들이 70~80년대 금지곡들을 부르고 있다. 사진 출처 - 스포츠서울 금지곡에는 월북 작가의 작품이나 트로트 가요들도 적지 않았고 록 계열 음악도 있었다. 대마초 파동 역시 록 음악인들과 통기타 쪽에 두루 걸쳐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가요 재심사나 대마초 파동이 유신체제에 대한 사회적 도전을 엄단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일신해 이른바 국민총화를 달성한다는 군사정권의 정치적 전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군사정권의 경직된 시각에서는 청년세대의 최소한의 자유주의조차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대학가를 장악했던 청년문화는 이른바 국민총화를 해치는 ‘불온’과 ‘퇴폐’의 온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김민기와 이장희의 차이, 심지어 신중현과의 ‘차이’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모두가 국민총화를 해치는 척결 대상이었을 뿐이다. 6월8일과 10일의 금지곡 콘서트를 찾은 젊은 세대는 그들 부모 세대가 경험했던 금지곡의 시대를 아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노래들이 금지된 사유를 들으면서 아마 배꼽을 잡고 웃거나 어이없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결코 수십 년 전에 있던 어처구니없는 일로만 치부하고 넘어가도 될 만큼 지금 우리의 현실이 편안하지 않다. 금지곡의 칼날을 휘둘렀던 독재자의 딸이 다음 번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심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 아버지 시대에 남발됐던 금지곡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5.16을 구국의 혁명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금지곡도 유신체제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와 국민총화를 위해 불가피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617 | 추천: 0
육영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언젠가 역사가 반드시 심판해 줄 것이다!”―내가 가장 가소롭게 생각하는 굴절된 역사인식의 하나이다. 이는 정치·사법적 결정의 부담함에 항거하는 희생자들이 ‘역사라는 엄숙하고도 휘황찬란한 이름’을 빌려 항변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유감스럽지만, 정의의 칼날을 휘둘려 줄 역사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과거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불완전하게 가매장된 ‘그 무엇’이며, 무덤 위에 새겨질 묘비명을 둘러싼 논쟁과 알리바이가 반복될 뿐이다. 말하자면, 역사는 자신에게 유리한 형식과 내용으로 과거 기억을 채집, 구성, 유포, 기념, 공식화 하려는 세력들 사이의 투쟁이다. 기억/망각 투쟁에서 승리하여 현재를 호령할 목적으로 지배자들은 역사서술의 각종 공식 혹은 꼼수를 발명한다. 불편한 인물이나 사건 그 자체를 역사리스트에서 아예 삭제하거나, 하찮거나 실패한 이야기로 각색하여 기각시키거나, 구별하기(정상-비정상)나 등급나누기(선진국-개발도상국-후진국 따위)로 혼내주기 등의 전략이 동원된다. 예를 들면, 프랑스대혁명의 자유․평등․우애의 함성에 힘입어 카리브 해 생도맹그에서 발생했던 흑인노예들의 봉기와 아이티 혁명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건방진) 역사’로 강제 망각되었고, 이들이 탄생시킨 세계최초의 식민지해방 유색인 공화국(1804년)은 오랫동안 서양문화사에서 유령취급을 받았다. 또한, ‘검은 인권’의 신체와 영혼에 가해진 고통의 시간은 은폐되고 서구중심세계관으로 대체되었다. 절대정신(자유)이 발전(자기인식)되는 과정으로 세계사를 규정했던 헤겔은 “인간을 먹는 것은 아프리카 원리에 합치하고, 흑인들의 운명은 노예제도이다.”라고 《역사철학강의》에서 기록했다. 과거에 대한 기억/망각을 조정하고 통제하려는 ‘기억의 정치학’은 현재진행형으로 작동 중이다. 냉전체제와 반민주적 근대화 과정에서 억압되고 왜곡되었던 기억들과 목소리들이 침묵의 철판을 뚫고 다시 돌아와서 위로부터 주입된 ‘단 하나의 국가 기억’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일상생활에 각인된 대항기억을 만들고 있다. 한국전쟁 때 발생했던 ‘거창양민학살사건’은 국가와 유가족 사이의 협상을 걸쳐 ‘거창사건’으로 추모되었으며, ‘박정희기념도서관’은 ‘마포-상암동 공립도서관’과 경합을 벌리고 있다. 청계천 보세공장에서 새벽마다 터졌던 코피는 전력으로 돌리는 인공 시냇물로 씻을 수 없고, 구로동 벌집과 가발공장 기숙사를 점령했던 산업먼지가 각혈했던 노동의 쓰라린 기억은 첨단적인 디지털 분칠로 감출 수 없다. 이처럼 ‘기억의 장소’를 거점으로 펼쳐지는 다른 기억들의 갈등과 쟁탈전이야말로 역사를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생명력이다. 다른 한편, 기억/망각 투쟁의 결과가 미래 역사의 씨앗을 잉태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잘 알려진 통속적인 사례를 들자면,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국민투표라는 합법적인 절차를 걸쳐 1852년에 프랑스 황제가 된 것은 삼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대중의 기억/망각의 힘 덕분이었다. 당시 프랑스 시민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특정한 양식—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계승자이며 강력한 지도자의 표상이다―으로 기억했기 때문에, 혹은 그들이 어리석게도 과거의 나쁜 기억―나폴레옹은 언론과 노동권의 탄압자이며 전쟁광이다―을 망각했기 때문에, ‘빛나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삼촌의 대를 이은 조카에게 통치권이 주어진 농담 같은 역사극이 연출되었다. 이런 루이 나폴레옹의 등장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프루동(“사유재산이란 도적질 한 것이다!”라는 급진적인 발언을 했던 사회주의-아나키스트)은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고, 나폴레옹 3세가 건설했던 제2제정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파리코뮌의 내란으로 붕괴되었다. ▲ 사진 출처 - 프레시안 (노순택 사진가) 21세기의 어둑새벽을 견디는 이 땅에서도 미래를 담보로 한 기억과 망각의 또 다른 큰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식민시대 일본육사졸업생이며 해방공간의 ‘좌빨’ 청년장교 신분으로 군사쿠데타를 주도하여 스스로를 구제했던 야심찬 한 장군의 딸이 아버지에 대한 대중의 기억(혹은 망각)에 기대어 대권의 꿈을 엿보고 있다. 제3공화국 대통령이며 유신정권의 창출자였던 박정희의 맨 얼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분단국가의 한계 속에서 총과 삽을 들고 조국 근대화를 완수했던 불굴의 영웅인가 아니면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화운동을 냉동시켰던 겨울공화국의 독재자인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박정희의 실존적 정체가 정녕 무엇이었는지가 아니라, 대중이 그를 과연 어떤 ‘역사적 모습’으로 기억/망각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그 딸의 내일이 달려있을 것이다. 포항제철과 새마을운동, 월남파병과 남산 중앙정보부, 각하의 모심기 시범행사에 끌려나온 막걸리와 최후의 만찬장에서의 노래반주에 곁들여 마신 양주 시바스 리갈 사이의 모순되고도 풍부한 기억과 이미지를 누가 어떻게 조합, 각색, 은폐, 짜깁기하여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초상을 완성할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도 “역사적 심판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 다만, 전쟁과 배고픔의 악몽, 4.19와 5.16의 숫자가 엮는 기억/망각의 숨바꼭질, 제주도 4.3, ‘대구 폭동’ 찍고,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촛불시위, 작금의 종북(從北) 올가미 씌우기 등에 이르는 우리 현대사의 숨 가쁜 고비와 행진을 어떤 빛깔과 용어로 덧칠(전문용어로 뽀샵^^)하고 (기억의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내서) 재활용 할 것인가를 둘러싼 첨예한 기억투쟁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2012년 후반의 대선을 준비하는 역사무대가 온갖 저질스러운 역사기억의 막장 드라마로 퇴행할 것인지, 아니면 지난 반세기 동안 혼란스럽게 뒤엉켰던 기억과 망각의 실타래를 (재)정렬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 중요한 미완성의 역사를 스스로 서술하려는 당신을 위해 덧붙이자면, “기억은 항상 개인에서 출발하여 개인에게서 완료된다.” 일상생활정치의 올바름과 역사적 책무는 ‘그 딸’이 자동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와 새롭고도 즐거운 공적 기억 다시 만들기에 달려있음을 잊지 말자.
2017-07-14 | hrights | 조회: 72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