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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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배부른 소리나 한번 해보자는 얘기다. “비와서 오늘 공쳤어요” 넋두리 하는 옥외 노동자의 푸념을 듣다가, 또 비 오는 날 송전탑에 목매고 5년이나 싸우고 있는 노인들의 울분을 듣다가, 싸움의 세월이라면 거기에 뒤 질수 없다는 구럼비 지킴이들의 통곡을 듣다가, 인턴을 좋아하고 그 보다는 인턴의 엉덩이를 더 좋아하는 윤 뭐시기의 근황이 궁금하다가 그 윤 뭐시기 보다 더 인턴을 좋아해서 시간제 노동도 좋은 일자리라고 말씀하시는 박 뭐시기의 뇌 구조가 또 궁금하다가 시절이 이렇게 하 수상 한데도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입 싸악 씻고 각자 호주머니 잇속만 차려대는 의원 나리들의 하루일과가 도대체 궁금하다가 에라 이렇게 애 끓다가는 내 속이 먼저 망가지겠다 싶어 셀프 멘붕을 자초하며 잠시, 물만 먹어도 배부르고 눈만 뜨고 있어도 포만감에 젖어드는 동네 바이칼 호수의 지난여름을 기억해 보자는 것이다. 한번 입수하면 10년이 젊어진다는 그 맑은 호수에 하루 종일 들락거리고도 젊어지기는커녕 살갗만 잔뜩 태웠던 그 여름. 나는 400루블 (우리 돈 8000원 정도)를 주고 빌려 탄 자전거로 바이칼의 22개 섬 중 가장 큰 알혼의 언덕을 달렸었다. 모든 게 다 좋았고 사소한 모든 게 용서 되었다. 러시아의 여인들은 거개다 상냥해서 어쩌다 눈이 마주 치면 싱끗 웃어주었는데 거기다가 카메라 렌즈를 돌리면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언덕배기를 오르는 페달 질이 힘들어 잠시 쉬어갈 때는 미리 싸온 “발치카7”이라는 러시아산 캔 맥주를 들이키다가 한갓진 나무그늘아래 한 뼘의 그늘을 빌려 눕기도 했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호수의 빛깔이 새겨져 있고 호수를 보고 있으면 하늘이 그 안에 담겨있다. 날씨는 몹시 무더웠다. 영상 30도 “뭔 놈의 날씨가 이리 덥다냐 명색이 시베리아의 한복판인데” 싶다가도 금세 이마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 한줄기에 흘렀던 땀 방울이 쏘옥 들어가는 신기함, 하늘을 담은 호수의 끝은 지도에서조차 가늠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하다. 하늘을 닮은 호수의 깊이는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다. 1637미터라고는 했으나 바이칼 호변의 백사장위에서 홀딱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여인네의 자유 정도로 알아먹으면 그만이다. 나도 그 여인네의 자유를 흉내 내며 호수 안으로 들어간다. 서두르지는 않는다. 딱히 내 인생 최초의 바이칼 입수에 관해 설레 이거나 혹은 경건해 지는 마음 따위는 없다. 그저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 정도로 여긴다. 발목에서 무릎 그리고 허리춤까지 몸을 담그다가 무슨 숫컷들의 영역 표시 같은 것처럼 눈으로는 하늘을 보는 척 쉬이~ 실례를 시작하는데 아뿔사, 허리아래 관절이라는 관절은 죄다 저려올 정도로 물이 차다. 실례가 완성되는 그 짧은 시간을 참기 어려울 정도다. 영상 4도쯤 된다니 보통의 냉장실 온도와 맞먹는 한기가 온몸을 감싼다. 몸 전체를 채 담구기도 전에 퍼어래진 입술을 덜덜 떨며 도망쳐 나오면 한여름의 태양에 뜨끈하게 몸 달아있는 백사장이다. 3분을 버티기 힘든 차가운 물을 러시아 청년들은 쉼 없이 자맥질 하고 나는 멀지감치에서 누워 햇살의 포근함을 만끽하는 러시아 여인의 자유를 힐끗 거리다가 살짝 잠이 든다. 모스크바는 또 어떠한가. 아르바트 거리의 젊은것들은 아무대서나 거리낌 없이 입맞춤을 해대고 거리의 악사는 마치 십 수 년 간 같은 곡만 연주한 듯 능숙하게 파가니니를 읊어댄다. 빅 밴드 스타일의 재즈 연주곡이 흘러 나오는 카페 앞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 누군가 건넨 “맥주한잔 합시다” 라는 말에 솔깃해지면 “아~ 세월 간다 좋다” 이만한 시간이라면 내 삶의 몇 부분정도는 포기해도 괜찮겠다 싶다. 왜 하필 밤에 도착했는지는 모르지만 바실리 성당. 한때 넋 놓고 두드렸던 게임 테트리스의 배경이 된 이 성당의 야경을 보면 이 나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떠올리거나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해 하거나 여기 물건 값이 우리에 비해 얼마나 싸거나 같은 단순하고도 참 치사한 일상의 꺼리들을 떠들다가도 문득 저 건물의 귀퉁이에서라도 무릎 꿇고 기도하고 싶어진다. 바이칼 호수 사진 출처 - 필자 "솔직히 한국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바쁜 나라에서 시베리아 오는 사람들은 다 또라이 아냐?" 모스크바를 출발해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맞다 또라이들 하며 킥킥대고 웃었지만 그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눈 질끈 감고 큰 결심해야 가는 곳은 맞다. 단순히 비용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단 한 번도 편히 쉬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자본의 구조 속에서 과감한 일탈을 꿈꾼다는 게 수월치는 않다. 허나 거기에 나는 남과 북을 묻었다. 같은 지향을 찾기보다는 나와 다른 무엇을 찾아 갈라서기에만 급급한 진보라는 이름의 옹색함도 묻었고 정작 돈 버는 일을 포기하고 “쉼”을 찾아 먼 여행길에 나선 내가 또라이가 아니라 이런 일 한번 벌이지 못하고 사소한 이익 앞에 늘 흔들리는 분단된 섬나라의 내가 더 또라이라는 사실도 묻었다. 내 주변은 늘 싸움 투성이다. 이명박 시대에도 그렇고 박근혜 시대에는 더 그렇다. 돈 나고 사람 난 세상(資本主義)이 아니라 사람 나고 돈 난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 콩 한쪽 나눠 먹는 세상, 배곯아 아픈 이 없이 돈 때문에 길바닥에 내 처지는 인생 없이 그냥 사는 대로 사는 알콩 달콩한 세상을 희망하는 사람들. 전쟁 없는 세상을 사모 하고 폭력 없는 세상을 갈망 하는 사람들 틈에 있으니 이 풍진 세상 싸우는 것 말고는 달리 대안이 없다. 그래도 어찌 허구한 날 싸움만 할 것인가 말이다. 공자님께서 이인위미(里仁爲美)라고 말씀하셨다. 싸움을 위한 마을보다는 넉넉한 품과 여유가 있는 마을이 더 아름답다는 의미겠다. 어차피 배부른 소리나 해대는 멘붕의 날이니 이런 얘기를 해도 이해해 주시겠지. “좀 쉬자, 쉼 앞에는 어떤 구분도 없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04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늘 아침 신문은 알몸, 노팬티, 성추행, 엉덩이 등 자극적인 단어로 구성된 기사가 온통 도배를 하고 있네요. 선정적일 수 있는 이런 기사가 벌써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지요. 그것도 머리기사로요. 신문 가판대는 머리기사만 보이고, 아이들도 볼 수 있는데… 뭐 일반인의 행위였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대통령의 대변인이라는 자의 행위인지라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지만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까지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나라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게다가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고 가고 친노종북으로 매도하며 신상 털기에 나서는 등 제2의 가해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자들까지 있어 대한민국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실감하게 하네요. 덕분에 많은 일들이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느낌입니다. 강정마을에서의 강제철거,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쌍용차 고공농성, 대한문 강제철거, 남양유업 제품 밀어내기, MBC 사장 교체, 건설업자의 고위층 성접대, 밀양 송전탑, 불산 등 유해화학물질 누출, 원전 가동, 어린이집 원생 폭행, 초․중․고․대․직장인․노인의 자살․투신 … 최근 한 달 동안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사건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은 패러디물 사진 출처 - 오늘의 유머 손에 손 잡고 아 ~ 대한민국을 부르며 대한민국을 사랑하도록 그토록 주입받은 세대인데도, 도무지 정이 가지 않네요. 정이 가기는커녕 대한민국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모른 척하고 살아가기에는 이미 내가 한 발쯤 걸쳐 있는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너무도 심각하기만 합니다.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살려고 해도 언제 내가 피해자가 될지 알 수 없으니 그렇게만 살아가는 것도 힘들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요즘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정말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는 문제의식은 내 아이 앞에서 정지하고,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를 지적하는 문제의식은 나의 직장 앞에서 정지하고, 환경 파괴의 문제를 지적하는 문제의식은 내 집 앞에서 정지하고, 언론의 불공정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연예․스포츠 면 앞에서 정지하지요. 사실 SNS라는 것들을 통해 확인되는 많은 일들은 그저 일부의 관심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말들만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요. 말로만 위로를 받지요. 말로만 … 파편화 된 개인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정보는 날로 차고 넘치고, 그 정보 중 내가 관심 있게 따라가야 할 정보를 취사․선택해야 하고, 또 선택한 정보 중에 실제 행동으로 참여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일상을 저울질해야 하고, 하지만 나 하나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잘 해주는 것 같고, 또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 오늘을 이겨낼 힘이 없어요.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하루를 견뎌내야 할 뿐이지요. 어차피 어려운 일들은 저 위정자들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테니 믿고 맡겨 둬야겠지요. 그러려고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시장도, 도지사도 뽑는 것이니까요. 속았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정치에 대해, 경제에 대해, 사회에 대해 배웠던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였을 뿐입니다. 대한민국은 국민에게서 모든 권력이 나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모든 국민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모든 권력은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관료와 국회의원과 돈에서 나오고, 돈이 없으면 행복할 수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도 없는 나라이지요. 이것이 리얼 대한민국이지요. 어떤 때는 이런 구조를 바꿔 보려고 노력하는 타인의 모습들조차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기만 합니다. 영화 같아요. 다큐멘터리 같은… 그 속에 나는 없으니까요.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그렇다면 오늘도 무언가를 빼앗기거나 의무 없는 일을 하지 않고 하루를 견뎌내셨군요. 그런데 과연 오늘도 안녕하셨을까요?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38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안식년 후반을 보내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 온지 한 달이 되었다. 지난 가을에 3개월 간 체류한 경험이 있어 아주 낯설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한국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회 분위기나 관습 때문에 불편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 소비자로서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웬만한 서비스는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한국에서 살던 입장에서 보면, 독일에서 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급한 성질을 다스리고 굳은 인내심과 느긋한 여유를 키워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식당에 가도 우선 주문하는 일부터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한 참을 기다려야 종업원이 다가온다. 처음에는 손을 흔들기도 하고 큰 소리로 부르기도 했는데, 주변을 보면 독일 사람들 가운데 나처럼 종업원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들 가만히 앉아서 종업원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시간도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다. 더욱 황당한 건 돈을 내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역시 처음에는 손짓을 하거나 부르거나 했는데 주변의 독일 사람들이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다음에는 그저 조용히 앉아서 종업원과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린다. 다른 모든 서비스에서 이런 경험은 반복된다. 나는 다행히 인터넷이 설치되어 있는 집으로 가게 되어 불편함이 없었지만 새로 인터넷을 설치해야 하는 경우, 그 과정은 가히 고행과 다름이 없다. 일단 신청을 하고 설치 날짜가 통보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설치 작업자가 오기로 한 날 마침 집을 잠시 비우거나 벨 소리를 못 듣기라도 하면 다시 날짜가 통보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러다 보면 한 달 정도는 후딱 지나게 마련이다. 어떤 분은 2개월, 어떤 분은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행정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한국 교수 한 분은 4개월 체류를 위해 비자 신청을 했는데 출국 몇 주 전에 비자 인터뷰가 잡혔다. 비자 받고 나면 바로 귀국하게 된 셈이다. 처음에는 도무지 고객 대접을 해주지 않는 느려터진 서비스 문화에 분통을 터뜨리곤 했는데 조금씩 이런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독일 사회 곳곳에서 느끼는 이런 식의 ‘느림’은 단지 이 사람들의 삶의 속도와 여유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소비자 권리 못지않게 어쩌면 더 중요하게 노동자의 권리를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가 깔려 있다. 사진 출처 - 국가인권위 여성감정노동자 인권가이드 삽화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나의 삶은 대체로 소비자의 삶이고 소비자로서의 편리만이 중요하지 않았나 싶다. 소비자 권리가 있으면 그 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 권리도 있는 것인데 그 부분은 거의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흔히 한국은 서비스의 천국이라 말한다. 뭐든 전화 한통이면 바로 해결된다. 아무리 늦어봐야 하루 이틀 걸릴까? 한밤중에도 전화 한통이면 짜장면 배달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대단히 편한 사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게 소비자의 편리가 충족되는 동안 노동자가 편안한 일상과 휴식을 즐길 권리는 사라진다. 한국이 노동자의 권리보다 소비자의 권리를 우선하는 사회라면 독일은 그 반대인 셈이다. 사실 대부분의 노동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기 할 일만 정확히 시간 맞추어하는(그래서 우리 눈에는 늑장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자들은 다른 공간에서 소비자로 살 때 바로 그런 불편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뭐든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바로바로 서비스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로서는 복장 터져 못살겠다 싶은 대목에서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이 별다른 불만 없이 불편을 감수하며 사는 것은 결국 서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는 편하고 즉각적인 서비스에 너무 길들여져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우리들 자신이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 보면 그렇게 즉각적인 서비스에 길들여진 삶이 결과적으로 노동자로서 우리 자신의 권리와 인격을 침해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노동자로서 충분한 권리와 인격,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인 서비스를 요구하는 소비자의 권리를 통해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구호는 곧 ‘노동자는 종’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소비자이며 동시에 노동자라는 걸 생각하면 왕처럼 누리는 소비자의 권리가 결코 맘 편할 수만은 없다. 소비자만이 아니라 노동자도 그만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다 함께 조금은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조금은 느리게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4 | 추천: 0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의 뜨거운 관심 속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탄생한 가운데 ‘교황’을 소재로 한 영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신앙과 인간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돌아보게 한다. 제64회 칸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호평을 받은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교황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자리를 거부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한 추기경의 모습을 유쾌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교황이 된 미셸 피콜리 추기경이 추기경단의 축하를 받으며 성 베드로 광장에 나서 연설을 하려는 장면이나 우울증에 걸린 교황을 치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신치료사의 활약 등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눈길을 잡기에 충분할 듯하다. 메가폰을 잡은 난니 모레티 감독은 우울증에 걸린 교황 이야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일까. 영화 속 교황만큼이나 현실 속 교황의 이야기도 그 어느 때보다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는 모습이다.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은 영화 이상으로 신선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듯하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로 불린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새 교황은 선출 직후부터 파격의 연속이었다. 방탄 기능이 있는 교황 전용 대형 세단이 아닌 일반 차량을 이용하는가 하면,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 회의인 콘클라베 기간 동안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묵었던 호텔에 들러 직접 자신의 짐을 챙기고 숙박비를 계산하기도 했다. 새로 탄생한 교황을 위해 별도로 제작한 새 십자가도 거부하고, 주교 시절부터 사용해오던 것을 그대로 착용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뉴스거리가 되면서 연일 외신을 통해 접하게 되는 교황의 '변모(?)'는 모처럼 가슴 콩닥거리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에 빠지게 하는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파격보다는 그의 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걸을 수도 있고 많은 것을 지을 수도 있지만, 신앙 없이는 인심 좋은 비정부기구(NGO)에 불과할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를 앞세운다면 우리는 교황·추기경·주교·사제일 수는 있지만, 예수의 제자는 아니게 됩니다." "세속적 가치로 어떤 일을 이루려 한다면 어린 아이가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교황의 말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이러한 가치나 삶들과 멀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출처 - EPA=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을 뽑은 콘클라베가 열리기 전 추기경단 전체 회의에서 가톨릭교회가 ‘신학적 자기도취’에 빠져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루카복음에서 예수가 안식일에 여인의 병을 고쳐주는 구절을 인용하며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 자기지시에 빠지게 되고 병들게 된다”고 말했다. 복음에서 회당장은 예수가 안식일에 일을 한 것을 두고 분개하지만 예수는 그를 ‘위선자’라며 비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밖으로 나와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와 “자기 안에서, 자신을 위해, 자신의 것으로 살아가는 세속적인 교회”로 교회를 구분하고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변화와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걸음걸음을 보며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웬일일까. 이제야 우리에게 교황이 있는 듯하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71 | 추천: 2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남북경색의 국면에서도 자신의 정치색을 우렁차게 내뿜는 남녘의 정치인이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진주의료원과 관련하여 자신의 정치적 방향성에서 중요한 일보를 내딛었다. 경영악화를 내세우고 진주의료원의 폐업을 천명하더니 그 책임을 병원노조(강성노조, 귀족노조)에 전가하였다. 폐업을 내걸고 정부에서 운영자금을 더 지원받을 구상인지 아니면 엉뚱한 정책을 관철시켜 거국적인 인물이 되고자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공공의료는 원래 수지를 맞추려는 사업이 아니므로 폐업의 이유는 전체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경영실태나 부채사유는 신문지상에 자세하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공공의료는 박정희의 좌파정책이라는 홍 지사의 발언에만 주목해보겠다. 그의 발언의도가 궁금하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하여 마치 박정희를 부활이라도 시키려는 시대에 박정희가 펼친 좌파정책을 털어냄으로써 박정희를 순수화하자는 것인가! 공공의료 정책이 박정희다운 정책이 아니니까 이제 찍어내야 한다는 것인가! 뉴라이트 역사인식에서 만연한 근본주의적인 난독증을 또다시 만나게 된다. 박정희의 역사에서 제거하고 극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쿠데타, 유신, 긴급조치, 조작사건, 사법살인, 노동탄압, 인권침해이지 의료보험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보시라. 박정희의 업적에서 공공의료를 제거하자고 주장한다면 사실상 박정희 추종자들을 위압적인 극우파로 전락시키는 것 아닌가! 지난 16일 보건의료노조와 진주의료원 직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역에서 진주의료원 정상화와 홍준표 경남도지사 규탄을 요구하는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오늘날 우리는 노동자의 단체행동, 적정수준의 일자리, 교육, 의료혜택, 주거시설, 수입 등을 사회적 권리라고 부른다. 이러한 권리가 인권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사회권의 발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급진파들의 논리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우파들의 사회연대사상이나 가톨릭교회의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1891)과 같은 사회교리가 큰 기여를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회권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사회정의의 기준으로, 혹은 산업평화나 사회방어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이는 정치색에 관계없이 사회권이 모두에게, 모두의 정치적 목표에 유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 정치적 논쟁도 사회권이 권리인지 아닌지에 있지 않고 그 보장의 범위를 둘러싸고 벌어질 뿐이다. 결국 사회권을 와해시킨다면 사회평화도 가능하지 않다. 박정희의 공공의료를 논하는데 독일에서의 사회권의 역사를 언급할만하다. 독일에서 사회권의 탄생은 조금 과장하면 보수정치가인 비스마르크의 작품으로 축약된다. 비스마르크는 1875년에 출범한 독일사회민주당(좌파정당)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악명 높은 이중정책(채찍과 당근)을 구사했다. 독일의회는 1878년 사회주의자금압법이라는 체제보호법를 제정하여 사회민주주의자나 좌익혁명가들을 처벌하였다. 1890년 폐지할 때까지 대략 1,500명의 사회민주당원과 노동자들을 이 법으로 감옥에 보냈다. 동시에 비스마르크는 노동자의료보험법(1883), 산재보험법(1884), 폐질노령보험법(1889) 등 일련의 사회법을 도입하였다. 물론 이러한 법들에 대해 사회보험으로서 노동자의 부담이 과중하다는 비난이 따라다녔지만 보수적인 비스마르크가 보험법을 주도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법의 제정과정에서 보여준 정파들의 태도는 흥미롭다. 공제조합을 추진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이윤의 감소를 우려한 기업가들은 당연히 이 법에 반대하였고, 가톨릭 중앙당은 사회보험이 이웃사랑이라는 자발적 의무를 침해한다며 반대했고(이점은 오늘날 미국보수기독교들의 시각과 유사하다), 사회민주당은 내부적으로 격렬하게 토론했지만 공개적으로는 이 법에 반대했다. 이 법을 지지한 것은 이른바 강단사회주의자들과 약자에 대한 국가의 가부장적 배려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다. 독일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그룹이 사회보험을 지지하였다는 점이 놀랍다. 즉 공공의료는 우파의 정책이었다. 좋게 말하면 비스마르크는 개별자본가의 이해관계도, 기독교의 자발적 사랑논리도 극복하고 총자본을 대변했다. 1970년대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료보험은 비스마르크의 의도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개인의 주관적인 정치적 의도보다는 객관적인 시대정신이 중요하다. 보수정치가도 좌파정책이 없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다. 공공의료는 이와 같이 원래 우파의 정책이었다.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인물이라면 좋은 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킴으로 비판적인 진영까지도 품을 생각을 해야 한다. 몇 주째 계속되고 있는 도지사의 공공의료에 대한 도전과 파괴는 오히려 박정희와 정치를 재야만화(再野蠻化)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 시대의 유산이다. 무엇을 청산하고 무엇을 발전시킬 것인지 합리적으로 계산하자. 모든 정책을 좌우로 나누고 마침내 박정희 삶까지도 좌우로 나누어 찍어내고자 한다면 얻을 것이 무엇인가!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32 | 추천: 0
윤다정/ 인권연대 운영위원 살을 에일 듯 한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한겨울이었다. 용산참사 이후 4년 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던 철거민들이 지난 1월 31일 전국 곳곳에 흩어진 교도소에서 출소해 가족들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철거민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과 함께 ‘끼워 팔기’ 식으로 사면되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일단은 철거민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억울하게 신변까지 구속당하는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축하해야 마땅했다. 출소 철거민 환영 문화제는 출소일 당일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 옆에서 열렸다. 구속 철거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하던 친지들은 문화제 시작 전부터 철거민들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불청객이나 된 것 같은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카메라를 들이대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이윽고 이들의 감정에 완벽히 공명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문화제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찍느라 야단을 피웠다. 철거민과 가족, 동료들은 각자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그 순간을 담아내기 위해 뷰파인더에 얼굴을 가져가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안타까움과 즐거움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지난한 앞날이 철거민과 가족들을 기다리지만, 철거민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모든 이들이 그간의 고충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잠시 잊고 한껏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미디어스 용산 남일당 건물 터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용산 한복판에 덩그마니 주차장으로 남은 남일당 터는 6명이나 되는 아까운 목숨을 잡아먹고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그을음이나 잿더미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하게 단장한 채, 4년 전 겨울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반문하는 듯하다. 용산참사를 상기시킬 만한 것들을 모두 들어내고 텅 빈 남일당 터와 같이, 용산참사 책임자로 지목된 이들 중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책임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뻔뻔스럽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실정이다. 용산 강제 진압을 주도했던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19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김 전 청장은 당시 “공천 탈락의 원인이 용산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돼 보수정당인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의 정체성 및 국가관에 문제를 제기한다”며 “국가와 국민을 지킨 본인을 공천 탈락 시킨 것에 대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불만을 표한 바 있다. 김 전 청장에게서 무리한 진압이 어떤 슬픔을 불러일으켰는지를 고민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더해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은 지난달 12일 59억 원에 달하는 이자를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이후 사업이 정상적으로 재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분석이 중론이다. 용산 개발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입안한 허준영 전 코레일 사장은 자신에게 용산 사업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것은 ‘음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허준영 전 사장은 지난 2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미국·유럽 금융위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게 국가 경제에 엄청나게 소중하고 서부 이촌동 2300세대 1만여 명의 생존이 걸린 사안이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살려보려고 최선을 다했고 많은 분들이 찬사를 보냈다”고 항변했다. “어디까지나 현 경영진이 잘 끌고 나가야 할 일”이라고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허 전 사장은 오는 4·24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서울 노원병 지역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한다. 온갖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되었던 용산 개발 사업의 정체가 신기루로 판명된 이 때, 환상을 조장한 이가 ‘나는 잘못이 없다’며 큰소리를 치는 이 때, 남일당 터에서 죽어간 6명의 목숨은 누가 보상할까. 평생을 가꾼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헤매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가 어루만질 수 있을까. 남일당 터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일당 터에 신기루를 심어 놓은 사람들도 도통 말이 없다. 윤다정 위원은 현재 미디어스 기자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07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작년 이맘 때 발간되었어야하는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에 대한 백서의 발간이 지금에서야 가시화 되어가고 있다. 2008년 12월 사건 발생 후 5년간 진행되었던 지난한 과정과 여러 입장이 반영되어 오고 갔던 말들을 뒤로 하고, 사건의 피해생존자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 단행본 형태로 발간된다. 총선과 대선으로 들떠있던 2012년은 사건의 해결을 어렵게 만든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선정으로 계획하였던 백서 발간이 미루어졌다. 백서 작업을 마무리하던 2월에 느닷없이 들려온 그 소식은 피해생존자를 더욱 분노케 하였고, 곧장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선정 반대 및 철회 촉구 운동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100분 토론에서의 일방적 발언은 피해생존자의 생각이나 사실 확인 없이 방영되어 다시 한 번 피해생존자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지지모임 활동가들이 총선 관련하여 벌인 활동은 지지모임활동가들이 가진 역량을 소진시킨데다 활동의 결과도 미진하여 무력감에 빠지게 하였고, 또한번 백서발간이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후 다시 힘을 모으기까지 일년이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지난 20일 있었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백서발간에 대한 홍보를 하는데 혹자가 한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는다. “부끄러운 일을.... 자랑도 아니고.... 그런 일에 대해 무슨 책까지 내요~~” 이런 정서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드러내서 올바른 방법으로 고쳐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 문제를 드러내지 않고 해결해 왔기 때문에 더욱 드러내야한다고 본다. 드러내야만 공론화 할 수 있고 그래야만 문제의 올바른 해결법을 도출해 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다른 사건의 발생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리라. ‘성폭력 사건 피해생존자들의 말하기 대회’라는 것이 있다. 관련여성단체에서 주최하는 이 행사에서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여러 방법으로 지난날에 경험한 성폭력의 상처와 분노를 표현하고 가슴속에 쌓아둔 감정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방법은 모두 아는 노래를 자신이 겪은 사건과 심정을 담은 가사로 개사하여, 아니면 새로운 곡을 작곡하여 부르기도 하고, 담담하게 옆 사람에게 이야기하듯이 발표하기도 하며 몸짓을 이용하여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 아주 어렸을 때 아는 친척에게 당했던 성폭력도 몇 십 년이지나 나이가 지긋하게 되었어도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결국 여러 경로를 거쳐 그 아픔을 토해내는 사람들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처럼 이 대회를 관람하러 온 방청객들이 대회가 진행되는 것을 보며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우리 주변에 수많은 피해생존자들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성폭력 사건 피해생존자들의 말하기 대회 모습 사진 출처 - 한국성폭력상담소 그러면 피해생존자들은 왜 자신의 상처를 말하고 싶은 걸까? 그리고 그 상처를 말하고 나면 어느 정도 치유가 되는 걸까? 사안마다 다르겠지만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의 피해생존자는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말하려 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거치면서 왜곡되어버린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자신의 글을 읽은 사람들이 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인정해주며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라고 있다. 지난 5년 동안의 왜곡된 소문과 말들에 대하여 깊은 상처를 입어 그런 것이 아닌가한다. 성폭력 사건의 피해생존자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기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성폭력사건에 대하여 조사할 경우, 사건에 대한 진술을 동영상으로 찍어 사건 조사에 활용하는 게 아닌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쓸 때 느꼈을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간의 과정에 대하여 긴 글을 썼다.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싶다. 또한, 백서가 발간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걱정이다. 행여, 피해생존자의 글에서 거론된 관련자들이 글의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법적 공방으로 이어지게 되지는 않을지.... 사실 확인에 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되는 건 아닌지.... 또한 이런 과정이 피해생존자에게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갈지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그러나 이 모든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서 말하고 싶은 피해생존자의 의지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누리기 위한 그 소망이 희망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60 | 추천: 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루소의 『고백』, 그 두꺼운 페이지가 다해 갈 무렵 해서 그런 몇 마디가 있었다. 진작 유명인사가 되고 불화와 추문을 겪은 후 생 피에르 섬에 은둔하고 있던 50대의 루소, 그가 어느 하루를 묘사하면서 쓴 대목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하는 데 골몰하기를 좋아하며, 생각나는 대로 왔다갔다 하고, 시시각각이 계획을 변경하기를, 파리의 온갖 동정을 살펴보기를,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바위를 들어 올리려고 하거나, 10년 걸릴 일을 열정적으로 계획하여 10분 후에는 아쉬움 없이 포기하기를, 요컨대 하루 종일을 순서도 맥락도 없이 허송세월하기를, 모든 일에 있어서 오직 그 때의 변덕만을 좇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 구절과 마주쳤을 때의 해방감이라니. 루소처럼 위대한 인물, 그렇듯 대단한 생산력을 자랑했던 사람도 때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곤 했구나. “10년 걸릴 일을 열정적으로 계획하여 10분 후에는 아쉬움 없이 포기”했다는 말을 이렇듯 떳떳하게 할 수도 있구나. 『고백』 전체가 루소의 ‘낭비’에 대한 증언이건만 왜 새삼 그렇듯 큰 해방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루소 스스로 또렷한 어조로 남긴 ‘낭비’의 기록이어서 그런지, 혹은 그 목을 만날 즈음 특별히 ‘계획’과 ‘유용성’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는지.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라는 책이 한때 꽤 읽혔다. 옛 소련의 과학자였던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세프의 실화라는데, 쳬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류와 더불어 떠오르는 걸 보면 내겐 왠지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상상한 소설처럼 각인됐던 것 같다. 제목을 보고는 SF 형식일까, 기대하며 책을 펼쳤는데, 실제로는 류비세프의 실제 삶을 조명한 내용이었다. 20대 때부터 시간을 한 톨 남김없이 알뜰히 써, 무려 7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는 과학자. 그러면서도 하루 열 시간씩 숙면했고, 손주들과 즐거이 놀아 주었으며, 저녁이면 음악회 관람을 즐겼다는 여유 있는 신사. 과연 그것은 시간을 지배한, 그것도 신경증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능수능란하게 지배한 자의 초상이었다. 1916년인가 세상을 떠났다니 ‘공산주의적 인간형’의 선전과는 거리가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는 프랭클린 플래너나 각종 자기 계발서에 대응하는 사회주의적 판본처럼 느껴졌다. 다 읽고 나니 좀 아득했다. 사진 출처 - 예스24 어디서나 초 단위까지 계산하면서 열심히 살라고 하는구나, 손주들과 놀고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까지 ‘열심히’의 자투리 속에 들어가야 하는구나, 아아, 이렇게 게으르게 멋대로, 널뛰는 마음에 휘둘리면서 살면 안 되는 거구나. 류비세프의 삶은 확실히 경탄스러웠지만, 1분 전까지 곤충학 원고를 쓰다가 돌아앉아 손주들과 놀고, 조금 있다 “자, 이제 너희끼리 놀아보렴.” 하곤 음악회 갈 준비를 하는, 정말이지 빠르고도 매끄럽게 모드를 전환하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를 읽고 20년쯤이 흘렀지만, 여전히 내 생활은 ‘시간의 지배’와는 거리가 멀다. 하기 싫어 하기 싫어… 아 어디로 도망이나 갔으면 좋겠다, 그러다 막바지에 무리해서 일을 해치우고, 당연한 결과로 뻗어버리고, 뻗은 사이 일이 쌓이고, 또 하기 싫어 하기 싫어가 반복되고. 가까운 관계에서 감정의 소모를 줄이는 법도 좀체 체득하지 못해서, 뻔 한 레퍼토리로 가족과 신경전을 벌이고 동료들 사이에서 우울해하고 그러다 또 아무 일도 못한 채 대책 없이 시간만 보내곤 한다.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의 무지무지한 낭비다. 고쳐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렇듯 무대책한 나를 그럭저럭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 끝끝내 시간을 지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고, 그들의 삶 또한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 그 정도인 것 같다. 굿바이 미스터 프랭클린, 굿바이 미스터 스마일즈, 그런 심경이랄까. 자기 계발서의 시조 격인 『자조론』을 쓴 스마일즈는 벵자맹 콩스탕 같은 사람, 대단한 천분을 타고 났으나 태반을 낭비해 버리고 만 존재에 대한 경멸을 책 곳곳에 뿌려둔 바 있다. 그야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낭비에는 마땅히 정신적 결함이 작동하고 있을 테고, 불안이나 불만과 통할 심태를 찬양하긴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다만 낭비는, 불안과 불만은 분명히 현실의 한 양태다. 아마 유토피아에서도 다 소멸될 수 없을. 스마일즈는 『자조론』에서 상황을 탓하지 말고 자기 처지로써 변명하지 말고 꿋꿋하게 ‘스스로를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계속 타이른다. 옳은 말이다. 『고백』을 보면서 느꼈던 해방감이나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를 읽은 후 경험한 현기증 같은 것은 다 자기합리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쓰려는 강박 없이도 언젠가 시간과 더불어, 나 자신과 더불어 조화롭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언젠가 류비세프 식 삶에 성공하더라도 낭비의 시절 또한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어쩌면 지배와 통제뿐 아니라 낭비도 인간을 구성하는 실물일지니.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67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세상은 자연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인간이든 생물이든 자연법칙에 따라 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법칙을 지적으로 ‘대상화’할 줄 안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들어있다. 가령 고대인이 돌을 쪼개거나 날카롭게 갈면 좋은 무기나 사냥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또는 마른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았을 때, 그 고대인은 돌이 날카로워지고 불이 붙는 자연의 법칙을 ‘대상화하며’ 아는 것이다. 법칙을 대상화할 줄 아는 인간은 그 법칙을 하나의 ‘방법’으로 정리해 다른 이에게 전수한다. 이렇게 전수되는 자연법칙이 ‘기술’이다. 불을 피우는 기술 안에는 자연법칙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기술은 단순히 자연법칙이 드러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조작’된 것이다. 번개에 의해 불이 나든, 인간이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든, 모두 자연법칙에 따르는 것이고, 그 자연법칙의 생생한 구체화이다. 그렇지만 벼락을 맞아 산불이 일어나는 경우보다 인간이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킬 때, 자연법칙은 인간 안에 한층 더 분명하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자연 법칙이 인간 안에 하나의 지식으로 갇히는 것이다. 인간은 지식이 된 자연법칙, 전수된 자연법칙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통제한다. 불도 인간의 목적에 맞추어진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피우고, 집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불을 일으킨다. 인간이 자연법칙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목적에 어울리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물론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붙든, 인간이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든, 그것은 자연법칙의 반영이다. 인간이 땅 위를 걷는 단순한 행동 속에도 자연법칙이 들어있다. 그럴 때의 자연법칙은 나무 안에, 인간 안에 그만큼 내면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별도로 떼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 인간은 자연법칙과 철저하게 하나 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만든 불은 인간에 의해 객체화되어 이용당한 불이다. 인간은 불을 이용하면서, 자신이 일으킨 불의 힘을 더 강하게 느끼고, 스스로를 자연의 통제자나 조절자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이런 방법과 기술의 산물이다.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과 기술을 체득할 때 인간은 자연법칙에 따르면서 동시에 그 법칙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연법칙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객체화한 자연법칙에 따를 때에만 그 자연의 효용성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찾아내고 만든 자연법칙이 다시 인간에게 자신의 법칙에 따르라며 요구하는 셈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통제 방법과 관리 기술의 주체로 스스로를 간주하는 사이 어느 틈에, 자신도 모르게 그 방법과 기술에 종속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칙에 의해 인간이 다시 대상화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물질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연법칙을 추상화해서 기술과 기계를 만들어냈으나, 이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과 기계에 따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기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기계 법칙에 맞출 것을 강요한다.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지만, 물건을 생산하려면 그 기계 법칙에 따라야 한다. 인간에 의해 조작되고 탄생되었으면서도 인간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 ‘추상화한 자연법칙’ 앞에서 인간이 다시 객체화되는 것이다. 그 법칙 자체가 주체가 되어서 인간에게 자신의 법칙에 따르라며 요구한다. 지배하는 자가 지배되는 상황으로 역전된 것이다. 2013년 3월 11일, 일본 대다수의 언론에서는 정확히 2년 전에 있었던 동일본 대지진과 그에 따른 후쿠시마 원전(原電) 폭발 사고의 아픔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송과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대지진과 그에 따른 쓰나미는 어디까지나 자연 재난이었던 데 비해, 그로 인한 원전 폭발 사고는 인위적인 재난이었다는 데에 두 재앙의 근본적인 차이와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대상화하면서 핵분열에 따른 에너지 발생 방식도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핵분열 원리에 따라 만든 원자력 발전도 인간이 그 핵분열의 수준과 원리에 맞출 때에만 예상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문명사적으로 보건대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문명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문명의 법칙에 종속될 때에만 문명은 인간에게 효용성을 내어줄 뿐이다. 문명은 인간의 편의대로 생겨난 것 같지만, 인간이 그 법칙에 맞출 때에만 문명은 인간 편을 든다. 원전 역시 인간이 핵분열에 의한 열에너지의 발생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을 때에만 인간에게 유용한 에너지가 된다. 그렇다면 원전 관련 산업이 인간에 의한 완벽한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을 낼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은 원전 기술이 인간에 의해 통제된 자연법칙 치고는 그 법칙의 농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급격하게 객체화시킬수록 인간의 통제 기술에도 한계가 커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원전 기술이 모든 이의 손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 전문 기술자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점도 걱정스럽다. 인류의 미래가 달린 일을 과연 극소수에게 전문가의 손에 맡겨두어도 되는 것일까. 원자력발전은 급증하는 에너지 수요에 대응하면서 화력발전이나 수력발전보다 경제성이 높다고 보았기에 시작된 산업이다. 하지만 원전 산업은 인간이 자연을 객체화하는 수준과 농도가 지나치게 높은 만큼 인간이 다시 자연에 의해 급격히 객체화될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위험하다. 그리고 반자연적이다. 자연법칙에 대한 완벽한 조절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아무리 해도 인간의 힘보다 자연의 힘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연법칙을 지배하다가 그 극한에 이르러 자연법칙이 다시 인간의 목을 죄어오고 있는 지경에 처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문제의식이 크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이명박 정부가 원자력을 수출한다면서 자랑스러워하던 모습을 보면서 어찌 저렇게 근시안적일까 하는 우려로 속을 태웠었다. 상업적 논리에 따라 단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연을 억지로 통제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원전의 안전을 강화하면서 유지하겠다’며 두루뭉수리로 슬쩍 지나려는 느낌이다. 하지만 자연법칙을 통제하며 인위적으로 가두는 방식이 지나치게 위험한 만큼, 원자력 분야 산업은 연착륙시키며 폐기해야 한다. 물론 2012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쓰는 에너지의 31.2% 가량을 원전에서 충당하고 있는 데다, 많은 사람이 원전 분야 산업을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원전을 내일 당장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 비용에 비해 원자력 발전의 경제적 효율성이 높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그렇더라도 자연법칙을 급격히 통제해가며 얻은 효용성은 당대는 아닐지언정 어떤 형식으로든 그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이른바 원전의 경제적 효용성에는 이러한 후대 비용은 계산되지 않았을 것이 뻔하다. 지난 9일 도쿄에서 열린 원전반대 집회(AFP.연합뉴스)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첫줄 가운데) 등이 시위에 참가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2년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사망 내지 실종된 이가 20,852명고, 이재민이 31만5천명이 넘는다. 그것 자체는 자연 재해라 하더라도,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 폭발로 누출된 방사능은 일본은 물론 주변국, 나아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중에 789명 정도가 원전 폭발로 인한 사망자로 확인되고 있다. 전 세계 모든 원전에서 이런 정도의 위험성은 상존하고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투자되는 비용까지 포함한다면, 정말 원전이 경제적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불과 이 년 여 만에 원전의 위험성, 반자연성에 대해 둔감해져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원자력은 효율성만으로 수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원자력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가 지나치게 급격하고 농도도 짙어서 재앙의 가능성이 잠복해 있는 분야이다.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면, 더 유지해서는 안 될 분야이다. 자연을 통제하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겠지만, 논리적으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일부이다. 인간은 애당초 자연 안에 속해 있는 존재이지, 자연 너머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연을 완벽히 통제하는 주체가 결코 되지 못한다. 자연을 객체화하면 할수록 위험한 것은 자연 자체보다도 도리어 자연에 의해 다시 객체화되는 인간이다. 박근혜 정부는 머뭇거리지 말고 설계수명이 다한 원전은 점차 폐기하되, 비용이 더 들더라도 신재생에너지, 자연친화적 에너지 확보에 힘을 쏟아야 한다. 한시바삐 원자력 폐기를 위한 로드맵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전 국민이 에너지를 줄이는 일에 동참하도록 요청할 도리밖에 없다. 앤서니 기든스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 개발과 국제적 공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듯이, 원전 폐기를 위한 국제적 공조에 한국이 나설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결국 인류가 사는 길이겠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정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2013년 3월 11일, 일본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추모 행사를 동경에서 보고 들으면서 원전 폐기가 그저 희망만은 아니길 바라며 소회를 적어보았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0 | 추천: 1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하기 얼마 전, 그에 대한 제보가 신문사로 접수됐다. 주로 밤 생활이 문란하다는 내용이었다. 특파원을 통해 미국에 사는 제보자와 접촉했다. 그런데 제보자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취재는 하더라도 자신의 허락 없이는 기사를 싣지 못한다는 둥 자신이 참전용사 출신인 점을 강조하며,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보복하겠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했다. 제보자를 통한 취재를 포기하고 다른 루트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던 중 김 후보자가 사퇴했다. 알고 보니 우리에게 접수된 제보와 비슷한 내용이 한 재미교포의 블로그에 떠 있었고, 트위터를 통해 이 글이 퍼지고 있었다. 김 후보자가 사퇴한 진짜 이유가 이중국적이나 미 중앙정보국(CIA)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 아니며, 부동산 때문도 아닌, 바로 이 글 때문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글을 올린 재미교포는 자신을 박근혜 지지자라고 소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은 장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용기를 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종훈이 자신을 고소해서 미국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길 바란다고도 썼다. 그런데 김종훈 씨는 장관 후보자직을 사퇴하면서 야당을 비난하고 한국을 저주했을 뿐, 이 사람을 제소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퇴를 발표한 지 하루 만에 미국으로 떠났다.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며 미국 국적을 포기하겠다던 사람이 부리나케 미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허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장관 자리를 주지 않는 나라는 조국이 아니란 말인가. 그의 진짜 조국은 어디란 말인가. 김종훈은 미 해군이 발행하는 잡지 <프로시딩(Proceedings)> 2011년 12월호에 ‘군 복무는 완전한 미국인이 되는 통과의례였다’는 제목의 자필 기고문을 실었다. “내가 해군에 들어간 21살 때만 해도 미국 시민권도 있고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미진한 감이 있었다. 군 복무를 통해 나는 모두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곳이 진정 나의 조국이며, 나는 정말로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이야말로 군 복무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적었다. 대한민국 장관으로 내정되기 불과 1년여 전, 자신의 진정한 조국은 미국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김종훈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사진 출처 - 한겨레 이에 앞서 1998년 미 일간지 <볼티모어 선>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을 비하하는 듯 한 발언을 했다. 한국에 대해 “닳아버린(frayed-신경을 소모시키는 이라는 뜻도 있다) 국가, 온통 가난만 지배하던 국가라는 기억만 갖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가난했지만 나를 낳아준 고마운 나라다,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1998년은 마침 한국이 외환위기라는 초 의 사태를 맞아 부동산과 주식 값이 5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하고 실업자가 쏟아지던 준전시 상황이었다. 미국 시민권자 김종훈은 이때 강남 부동산을 집중적으로 사들인다. 한국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투자하면 돈이 될만한 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여론은 그닥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그는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룡 부처 장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이 상황이 참으로 괴이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이돌그룹 2PM의 멤버였던 박재범이 한국을 비하했을 때 한국인들이 보였던 히스테리컬한 반응과 김종훈에 대한 반응의 격차가 너무 커서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 비하 발언 당시 18살에 불과했던 교포 3세 박재범과 38살의 교포 1.5세 김종훈 가운데 누가 더 비난받아야 할까, 라고 물을 생각은 없다. 대신 이렇게 물을 수는 있겠다. 둘 중에 애국심이 더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더구나 김종훈은 CIA와의 특수 관계가 의심되는 사람이었다. 정보통신과 과학기술 등 우리나라의 미래가 걸린 첨단산업을 총괄하는 부처의 장관이 국가관이 불분명한 사람이라면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될까. 미국과 한국의 국익이 엇갈리는 미묘한 상황에서 김종훈은 어느 조국을 선택할 것인가. 김씨가 사퇴해버리면서 이런 질문들이 충분히 제기되지 않았고, 토론되지 않은 채 묻혀버렸다. 이런 사람을 무슨 대단한 인재인양 삼고초려를 했다는 박근혜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탈세범과 부동산 투기꾼, 공금 횡령범 등 온갖 잡범들을 고위 공직자로 추천한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다만,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가 친일파인 점을 고려하면 박 대통령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본이 조국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 아닌가. 대한민국의 보수는 지금 그들을 변호하기에 급급하다. 먹고 살려다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티브이 토론회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고 애국가도 부르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대통령으로 출마할 자격이 있는지 물었다. 너희 조국은 어디냐를 물은 것이다. 내가 알기로,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엔엘 진영 운동가들은 누구보다 태극기를 사랑하고 애국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1980년대 후반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고 휴전선을 넘으려 했던 게 바로 이들이다. 이들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어 국수주의적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국가관에 관한 질문은 오히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이 땅의 보수라는 사람들에게 돌려야 한다. 당신들의 조국은 미국인가, 일본인가, 한국인가. 주한미군 범죄에 대해선 쉬쉬하면서 미국의 이익이 곧 한국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당신들의 조국은 어디인가. 일본이 극우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고립화를 재촉하는 한일군사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덕분에 경제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당신들의 조국은 어디인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8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