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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는 데 세상은 별로 평화롭지 못하다. 일부 여유 있는 개인들이 느끼는 탈사회적 내면의 안정감 같은 것을 제외한다면, 세상이 평화로웠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일부 종교 공동체의 특정한 경험 같은 것 말고, 평화로운 사회 혹은 세계에 대한 증언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왜 그런 것일까. 이유가 어찌 한 두 가지 정도랴. 욕망에 눈이 어두운 정치꾼이나 약자를 억압하는 권력자 탓을 할 수도 있다. 불평등을 조장하는 자본주의나 이념적 획일성을 획책하는 집단주의 탓을 할 수도 있다. 이기적 개인주의나 세상일에 무감(無感)한 이들 탓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한 가지 꼭 집어 말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무언가 암담하고 답답함이 지속된다. 종교/학 현장에 있으면서도 그랬지만, 몇 해 전부터 평화학을 공부하면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평화를 묻고 바라는 이들은 많지만, 세상은 언제나 비평화적 상황 속에 있다. 평화에 대한 물음은 늘 시작일 뿐인 듯하다. 한 걸음 나아갔나 싶으면, 다시 평화를 물어야 하는,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상황은 지속된다. 세상의 비평화적 상황은 그만큼 구조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묻고 바라지 않을 수 없다. 학자는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능력은 공감(共感)이다. 영어식 표현에 따르면, 공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에게 공감해 나가는 ‘empathy’와 자신의 입장에서 타자를 이해하려는 ‘sympathy’이다. 타자에 대한 공감은 평화를 위한 기초이지만, 리프킨(J.Rifkin)이 염려했듯이, 지배의 공감이 커지면 식민주의적 제국주의도 생겨나고, 소비의 공감이 커지면 지구가 위험해진다.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만 ‘공감(sympathy)’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적 상황에 일조하게 된다. 그 상황이 다시 자기를 향해 오는 폭력의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타자의 입장에서 하는 공감, 즉 ‘empathy’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타자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empathy가 sympathy보다 더 평화적이다. 평화에 공헌할 가능성도 더 크다. 평화 공부도 운동도 empathy를 기반으로 할 때 진정성이 확보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한다. empathy는 종교적 천재들의 삶의 근간이자 기본 정서이기도 하다. 붓다의 자비(慈悲),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예수의 긍휼(矜恤) 등은 그저 특정 종교인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empathy의 다른 이름들이다. 공감의 능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동력이라는 사실을 이들이 잘 보여준다. 물론 아무리 종교적 천재라 하더라도 언제나 측은지심이나 긍휼로 충만해있을 수는 없다. 자비, 긍휼 등은 그 자체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감정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폭력을 대면하는 일은 더 할 나위 없다. 붓다도 예수도 삶이 녹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행위 자체가 심신의 온 에너지를 빨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은 얼핏 마음 자세이자 정신 행위인 듯하면서도 그 어떤 신체 행위 못지 않게 힘들다. 이러한 종교적 천재들에게는 거의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평화 연구자도 폭력적 상황 내지는 폭력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공감을 연구의 동력으로 삼는다. 힘들어하는 이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연구자의 의미 있는 추진력이 된다. 물론 측은지심이나 긍휼만으로는 설득력 있는 연구가 나오지 않는다. 공감 없는 연구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공감만으로는 연구가 되지 않는다. 연구자 자신도 폭력적 상황에 처해있음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면서도 그러한 상황에서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브르디외(P.Bordieu)의 “참여적 객관화”라는 말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평화 연구자가 스스로를 폭력적 상황 속에 참여시키면서 동시에 그 폭력적 상황을 객관화시켜 더 많은 이들로 하여금 폭력적 상황에 눈뜨게 할 때, 학문의 진정성 혹은 실천성이 확보된다는 뜻이다. 연구의 대상과 주체의 긴밀한 상관성을 전제하고서야, 학문적 성찰의 진정성이 확보된다는 말이다. 이반 힐리히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렇게 학자의 진정성을 드러내고 실천적 함의도 구체화시키는 출발점은 공감적 자세이다. 공감 없는 연구는 없어야 할, 없는 것이 나을, 말 그대로 ‘사족(蛇足)’이다. 종교에서 ‘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학문에도 죄가 있다. 공감 없는 연구, 무감각한 정보의 나열, 무감(無感)이 죄이다. 그에 반해 고통에 대한 공감적 연구는 학문이라는 종교의 신앙이라 할 만 하다. 이반 일리히(I.Illich)가 함께 사는 ‘공생(conviviality)’에 대해 강조했는데, ‘더불어 삶’에 일조할 때, 학문도 구원의 길에 동참한다. 무감이 죄라면 공감이 신앙이고 공생이 구원이다. 무감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감성적 차원의 공감을 넘어, 공감적 공생으로 나아가는 그것이 학문의 길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32 | 추천: 1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러브스토리>(1970)가 세계적으로 히트한 것이 벌써 근 반 세기 전이다. 호평도 악평도 많이 받은 이 영화는 ‘배럿 4세’라는 동부 명문가의 외아들 올리버와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 2세대 제니퍼의 사랑을 앞세워 1960년대 후반 뜨거웠던 위반과 반역의 기운을 달콤하게 버무려냈다. 그것이 기성 질서에 투항하기 직전의 에피타이저였을 가능성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러브스토리>는 대중적 연애 서사에서도 계급 횡단과 반전의 이념을 새겨 넣을 수 있었던 시절을 말해준다. 숨을 거두기 직전―신출내기 변호사가 감당할 법하지 않은 너른 1인용 병실에 환자복 대신 어여쁜 레이스 잠옷 차림인데― 제니퍼는 말한다. “크리스마스엔 군인들이 집으로 온대.” 명문대 출신 이 어여쁜 아가씨,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식 교양으로 중무장한―그렇지만 무척 자연스럽게 상소리를 뱉는― 이 아가씨마저 베트남전 한복판에 있는 군인들을 걱정한다. 죽기 직전에 말이다.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영화 마지막에 이르면 올리버는 본래 제니퍼의 것이었던 이 유명한 대사를 아버지와 화해하는 데 써버리지만, 그래도 <러브스토리>가 볼 만 한 건 이런 디테일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사랑은 각종 사회적 위반과 결탁함으로써 비로소 사랑답게 될 수 있었다. 아무 금지도 제한도 없이 다만 열렬하고 달콤할 뿐인 감정이 무에 사랑이겠느냐. <맨발의 청춘>과 <러브스토리>와 <남과 여>와 <겨울 나그네>에 익숙한 세대라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매끄럽게 일부일처제 핵가족에 정착하여 “그래서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니. 기껏 알콩달콩 사랑싸움 수준의 갈등이 서사의 전부라니. TV드라마 <질투>와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이후의 신세계에도 불구하고 극적 연애를 선호하는 심정은 아직 다 죽지 않았다. 사랑은 사실 서스펜스에 추리에 판타지와 SF까지 겸비한 장르다. 인생에서 경험하는 가장 막대한 에너지 중 하나, 그것을 삶과 세상을 바꾸는 데 쓰지 않으면 어디 쓰겠느냐. 나도 가끔 그런 심정이 되는 것이다. 위안하고 과시하는 데 다 소비하기엔 그 에너지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서. 헌데 대체, 뭘 어떻게 바꾼다지? 몇 해 전 어떤 후배가 사는 모양새를 보면서 지금이라면 나도 소위 기혼남과의 연애에 혹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위반이라니, 대체 뭘 위반한단 말인가. 일일드라마 속 등장인물도 아니고. 영화 '러브스토리' 사진 출처 - 씨네21 우리는 마침내, 성 자체도 위반이 되기 어려운, 누구나 다 난봉꾼-리베리탱(틴느)인 시점에 도달해 있다. 실제로 얽히면 욕해댈지 몰라도 어지간한 성적 자유는 쿨하게 접수해야 하는 시절이다. <마녀사냥>식 ‘섹드립’이 유쾌한 세월, ‘모태솔로’라는 말은 연애의 불가능성보다 성애에의 무능력을 더 강하게 일깨운다. 그러나 잠시 멈춰 생각해 보면, 하긴 성에 대한 이만큼의 자유나마 구가하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위반하고 넘어서야 할 것은 지금도 얼마나 많겠는가. 사라진 것은 다만 위반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매력일 뿐일지도 모른다. <러브스토리>식, 신출내기 변호사의 어여쁜 아내마저 전쟁과 시민권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던 그 무시무시한 구심력이 휘발됐을 따름인지도 모른다. 억압이 절로 보편을 구성해 주던 시절이 사라졌으니, 이제 스스로 보편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렇게 발음해 보니 꼭 나쁜 기분은 아니다. 헌데 보편이란 말이 여전히 유효하긴 한가? <러브스토리> 이후 근 반세기, 이제 한국에서도 ‘합류적 사랑’이니 ‘유동적 사랑’이니 하는 말이 낯설지 않다. 지금은 A와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5년 후에는 이성인 B와 동거하고 한 20년 후에는 C와 안정된 동성애적 관계를 이루는― 이런 관계 속에서는 일 대 일에 대한 집착도 이성애 핵가족 모델의 위력도 희미해질까 싶긴 하다. 저마다 자기 법칙에 따라, 그러나 가능한 한 만남을 활성화하면서 살자는 이런 리듬대로라면 ‘보편 너머의 보편’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까진 어떻게 이르나. 누구와 손잡고 누구와 어깨 겯고 가나. 세상엔 아직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많아, 위반하고 창조하는 작은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누가 일어나고 누가 버텨야 어디서든 거드는 손길이 비롯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소리가 꾸준하게 들려온다. <맨발의 청춘> 시절이건 <질투> 시절이건 <건축학개론> 너머건, ‘살고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이토록 많건만. 우리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날까.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69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준비위원회 회의에서 “지금 핫이슈인 5·24조치 문제 등도 남북한 당국이 만나서 책임 있는 자세로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누어 풀어 나가야”하고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대화가 지속되어야”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통일준비위원회 회의에서는 평라선(평양-나진선)과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 10년간 북한주택 100만호 건설, 남한과 중국, 러시아가 참여하는 다자경제협력방안,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 건설 등 남북협력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도 제시되고 논의되었다. 신유신 체제로 치달아 가다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에 지리한 장마 뒤 개인 하늘을 보는 것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북한에 대한 불신과 증오, 억측에 기반한 낡은 공안통치의 장막이 그 막을 내리고 남북관계 개선의 획기적 전환의 때가 온 것이다.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이 계기가 된 것일까? 북방한계선(NLL) 남북 함정 간 총격에도, 대북전단 풍선을 향한 북한군의 고사포 총성에도 박근혜 정부는 남북 간 고위급 접촉을 꾸준히 이어갈 방침을 밝히고 있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방남한 북한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왼쪽부터),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지난 4일 오전 인천 송도 오크우드호텔에서 류길재 통일부 장관 등 우리측 관계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북한 역시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비난하면서도 인천에서 있었던 남북 고위급 접촉 이후 모처럼 마련돼가고 있는 남북관계 개선의 전환적 분위기를 계속 살려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이행을 촉구하며 대화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번에는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중도반단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여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혹자는 박근혜 정부의 원칙적인 대북정책의 성공으로, 다른 혹자는 북핵 문제와 북한인권 문제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고 남한의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한 북한의 고육지책으로 보기도 한다. 남북 사이에 서로 맞장구치며 관계 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 대세가 된다면 모종의 여건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만, 지지층의 반발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5·24 대북제재 해제라는 대북정책의 전환 가능성까지 언급한 박근혜 정부의 방향 전환의 속사정을 짚어보고 싶다. 어느 보수언론사 사주의 전향적 대북접근 주문이 좋은 힌트가 된다. 그는 ‘한반도 포럼’ 기조연설에서 “남과 북이 상대방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라거나, “핵문제 해결을 모든 문제에 우선하는 입장을 재검토해야 합니다”라거나, “5·24 조치를 그대로 두고는 대화 자체를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5·24조치 해제 등을 주장했다. 사주의 전향적 대북접근 주문에 따라 그 보수언론사의 사설은 “이 조치 해제에 따른 대북 교역 재개와 경제협력은 우리 기업에도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다”라며 최근 심각한 제조업 위기에 직면한 한국경제의 저성장 탈피를 위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대북경제협력이 돌파구가 될 것으로 보고 5·24조치 해제를 제안하고 있다. 막장 남북관계를 정치적 뒷배로 둔 박근혜 정부의 지리한 공안통치에 염증을 느끼는 민심의 이반도 대북정책 전환의 배경이 되고 있다. 대북전단 살포로 인한 남북관계 파탄은 공안 통치 강화를 불러오고 신유신 체제의 막장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총격을 야기하는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여론은 싸늘하다. 신유신의 막장 체제의 도래를 막아내는 민심의 힘은 박근혜 정부를 거스를 수 없는 남북관계 개선의 길로 견인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나진 선봉 경제특구에는 러시아 극동과 중국의 동북지역과 잇닿은 경제협력의 분위기가 날로 커져가고 있다. 신압록강대교의 개통을 앞두고 북중 교역의 훈풍이 불고 있다. 북한의 경제특구와 경제개발구에 외국 기업의 투자 문호가 확대되고 있고, 북한의 경제도 고성장의 동력을 찾아가고 있다. 평라선(평양-나진선)과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을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으나, 여전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북한의 적극적인 대외 문호개방과 경제발전의 흐름에 가장 둔감한 게 5․24 조치로 차단막이 설치된 우리다. 비극의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자화상이다. 통일 대박을 홀로 독야청청할 수 있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맞장구치는 상대방이 그 진정성에 대하여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 안의 의심을 거두고 손뼉을 마주치면서 남북을 잇는 화해와 경제협력의 다리를 건설하여야 한다. 그 다리는 북방으로 이어져 동북아시아와 극동지역의 공동번영의 근간이 될 것이다. 그 입장과 의도를 떠나 보수언론사 사주의 5·24조치 해제와 북핵문제와 분리하여 경제협력을 선창하는 목소리가 마음에 와 닿는다. 공안통치에 반발하는 민심은 남북화해를 기대하고 있다. 공안 통치를 거두고 되돌릴 수 없는 남북관계 개선으로 나아간다면, 이것이 유신을 속죄하며 7·4공동선언과 통일대박을 실천하는 길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74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헌법재판소는 담배를 피울 권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흡연자들이 자유롭게 흡연할 권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에 의하여 보장된다. 비흡연자에게도 흡연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혐연권)가 인정되는데, 혐연권은 생명권까지 연결되는 것이므로 혐연권이 흡연권보다 상위의 기본권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PC방 등을 전면 금연구역으로 지정한 것도 헌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혐연권이 흡연권보다 상위의 기본권이라고 판단한 내용에 법리적 문제점도 존재하지만, 어찌 되었건 흡연권을 자유와 권리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담배를 피울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는커녕 정부와 재벌 등이 앞장서서 흡연자의 인권을 탄압하는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 항공회사는 담배를 피웠다고 권고 사직시키고, 식품 대기업 C 회사는 회사 반경 1㎞ 이내에서 흡연을 금지하고, 대기업 L 백화점은 흡연감시반을 운영하고, 대기업 P 제철회사는 불시에 소변검사까지 하고, 대다수 대기업에서 흡연자는 임원 승진 대상에서 제외하고, 정부는 공군 조종사 선발에서 흡연자를 제외시킨다. 이것은 단순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한 조치를 넘어서는 흡연자에 대한 명백한 인권 침해다. 흡연자에 대한 인권탄압은 봉건 왕조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걸로 그치지 않는다. 시내 주요대로 등 곳곳은 이미 금연 거리로 지정되어 있고, 대다수의 건물은 금연 건물이며, 내년부터는 모든 음식점이 금연 구역으로 지정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담배 피우는 자가 설 땅은 거의 없다. 아파트에서도 층간 소음처럼, 층간 간접흡연이 문제되어 담배 피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러다 보니 지인들과 술 한 잔 마시는 것도 어렵다. 주점에 들어갈 때 담배를 피울 수 있느냐고 묻고 들어간다. 금연 주점은 가급적 가지 않는다. 주점도 금연 장소이다 보니, 영세 상인들은 공간과 비용 문제로 흡연실을 설치할 수 없고, 대형 음식점은 흡연실을 설치하여 흡연 고객들로 북적거린다. 실제 한 시민단체가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음식점 가운데 53%가 금연구역 확대로 매출이 줄어 든 것으로 조사되었고, 매출 감소액은 평균 약 25.7%였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힘없는 놈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소규모 주점이나 디스코텍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함으로써 매상이 급감하여 손해를 입고 있다는 이유로 위헌 여부를 문제 삼은 사안에 대해서 “입법권자가 간접흡연으로 인해 위협받는 국민건강 보호라는 매우 중요한 공공복리 목적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이 사건은 비례적이지 않다. 흡연금지는 매상 격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시하면서 영세 상인들의 손을 들어 위헌이라고 판단하였다.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물씬 풍기는 판결이다. 비흡연자의 권리가 당연히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담배를 피울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가, 비흡연자가 흡연자로부터 피해를 받지 아니할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보장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비흡연자들만 모여 사는 국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흡연자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흡연자에게도 최소한의 숨 쉴 공간과 자유를 보장하라는 요구다. 대한민국 흡연자가 1,000만 명이 넘는다. 1,000만 명의 흡연자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1,000만 명의 흡연자가 소수자도 아니다. 그런데 정부와 기업은 흡연자를 소수자로서도 배려하지 않고 있다. 흡연자를 아예 국민이 아닌 유령 취급하고,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죄인처럼 취급하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흡연자도 숨은 쉬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흡연자가 1년에 내는 세금이 6조 8,000억 원, 건강증진부담금이 2조 3,000억 원이라고 한다. 특히 건강증진 부담금은 흡연자들 건강을 위한 공익사업 경비에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 돈은 거의 다 다른 곳에 사용되고 있다. 흡연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비흡연자의 피해를 막기 위해 위 부담금으로 금연 구역에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만들고, 영세상인 운영 주점이나 시내 소재 건물 내 흡연실 설치비용을 보조하는데 우선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는 흡연자와 비흡연자를 동시에 보호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안이다. 그리고 정부가 흡연자들의 건강을 그렇게 염려한다면 담배 제조 과정부터 건강에 해롭지 않는 성분을 사용하도록 적극 개입하고, 다른 대체 방법을 강구해야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정부는 앞에서는 ‘흡연은 나쁜 것’이야 라고 말하면서, 뒤 돌아서는 세금 받아 두둑해진 배를 보면서 키득거리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하는 짓이란 흡연자들에게 “금지! 불이익! 처벌!” 만을 강요하는 것 아닌가.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충성스러운 납세자에게 국가는 최소한의 대우를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부와 국회가 모르쇠로 일관하면, 흡연자들이 뭉쳐서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 흡연자들은 모두 은행에 가서 1원짜리로 환전하여 담배 값은 전부 1원짜리로 지불하는 「1원짜리 운동」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070 | 추천: 2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즘 언론사 다니는 사람들 참 불쌍해.” 80년대에 친구들과 언론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런 소리가 꼭 나오곤 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정권이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자기네 듣기 좋은 소리만 떠들도록 강요하던 시절이다. 아무리 월급 많이 받으면 뭐 하겠나,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앵무새처럼 떠들기만 해야 하니 그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 아닌가. 이 말에는 그 언론인들의 속뜻은 그게 아닐 거라는, 정직하고 제대로 된 보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거라는 최소한의 신뢰가 깔려 있었다. 실제 그 언론인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그런 속뜻을 가지고 있었음이 나중에 판명되었다. 한국사회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 시절 일부 언론인, 특히 방송사의 언론인들은 80년대라면 꿈도 꾸기 어려웠을 보도를 하고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고 해직과 구속을 감내하며 여러 차례 파업을 통해 언론민주화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언론에 대한 대화에서 그들을 연민하는 이야기를 듣기는 어렵다. 그들은 자기 속내와 다르게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말만 하는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 9월 어느 날 mbc 뉴스데스크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광화문광장 농성이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농성으로 드러났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유가족들이 왜 두 달이 넘도록 끼니를 거르며 그 고행을 계속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그저 ‘허가받지 않은 불법’을 강조하는 기자의 표정에서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고뇌’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그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만에 우리의 언론은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공감으로도 대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애초에 별 기대도 없는 부자신문들이야 그렇다 쳐도 공영방송의 저널리즘이 속절없이 망가져 가는 모양은 정말 참담하다. 임순례 감독이 새로 만든 영화 <제보자>는 새삼 언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는 수년 전 한국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한 과학자의 그릇된 욕망과 허위의식이 이른바 국익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거대한 신화가 형성된다. 이후 몇몇 양심적 과학자와 언론인의 노력으로 진실이 드러나면서 온 국민을 사로잡은 거대한 신화가 허무하게 무너져간다.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이 사건에는 야망에 찬 과학자와 이익을 위해 진실에 눈 감는 주변의 연구자들, 생명과학에 마지막 기대를 건 난치병 환자와 가족들의 열망, 권력자들과 정치권의 비호와 개입, 국익이라는 신화에 맹목적 신뢰를 보낸 수많은 사람들, 진실보다는 당장의 이익과 환호에 열광하며 춤을 추어 댄 언론의 추태, 그리고 양심을 외면할 수 없었던 또 다른 과학자와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진실을 추적 보도한 언론인들의 노력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복잡하게 엮여있다. 영화 <제보자>는 이 복잡한 사건을, 방송사 안팎의 압력을 뚫고 진실 보도를 위해 분투하는 PD의 노력에 집중해 재구성하고 있다. 영화 '제보자' 사진 출처 - 씨네21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건의 스토리를 다시 옮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본 소감부터 말한다면 한 마디로 ‘재미있다’는 것이다. 관객 모두가 결말을 알고 있지만 영화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사건 자체가 가진 극적인 요소들이 적절히 배치되면서 해야 할 말들을 빠짐없이 해주고 있다. 중간 중간 임순례 감독 특유의 유머코드가 실화가 가진 중압감을 덜어내는 점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영화를 재미있게 본 뒤끝이 즐겁지만은 않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래, 우리 방송이 저랬던 적도 있었지.”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고, 방송사 간부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가로막고, 국익의 신화에 매몰된 시청자들이 항의 전화와 시위를 하는 중에도 꿋꿋이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의 사명을 버리지 않으려 했던 언론인들이 있었다. 그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지금 우리의 방송에서 그런 보도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 등장하는 <PD추적>의 모델인 MBC <PD수첩>은 오래 동안 시사 고발 혹은 탐사 프로그램의 상징으로 알려졌던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지금 이 프로그램은 그런 영예를 잃은 지 오래다. 이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고 부정과 비리를 고발하던 PD저널리즘마저 고사해 버린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아직도 ‘국익’을 위해 ‘진실’을 덮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진실이 먼저냐, 국익이 먼저냐.’ 사건 당시 제보자와 방송 제작진을 무겁게 짓눌렀던 이 질문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국익이란 실체 없는 신화이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진실을 덮어도 될 만큼 가치 있는 국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진실보다 신화에 열광하곤 한다. 신화에 의해 감추어지고 억압되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언론의 존재가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영화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길 바란다. 특히 언론인을 꿈꾸는 젊은 학생들이 많이 보길 바란다. 보면서 언론의 참 역할에 대해, 진실의 가치에 대해, 세상을 뒤덮은 신화의 허구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보길 바란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51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이스 버킷 챌린지(Ice Bucket Challenge)가 대세다. "에델 케네디부터 저스틴 팀버레이크까지"라는 미국 ALS(루게릭병)협회의 표어대로 전 세계의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죄다 참여하고 있다. 대 부호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나 팀 쿡은 물론이고 만수르에 뤽 베송,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리고 조지 부시와 빌 클린턴까지 인터넷은 이들의 찬물 끼얹는 동영상을 보며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소위 유명인사 중 다단계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이 운동에 지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낄 정도이니 지구촌이 들썩이는 것은 당연하다. 덕분에 미국 ALS 협회는 공식 보도 자료를 내놓은 8월 13일 이후 불과 열흘 만에 6,450만 달러(약 6백 50억)을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누적액수 7,020만 달러-. 이것이 국내에도 상륙했다. 연예인, 운동선수, 기업인, 또 정치하는 양반들까지 각기의 방식대로 재밌는 영상들을 토해냈는데 내가 이 운동을 처음 본 건 오바마가 물 끼얹기를 거부하고 기부만 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였다. 그 즈음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나경원 의원, 박지원 새정연 의원 등이 물 맞는 기사가 비중 있게 다뤄졌다. 정몽준 전 의원의 챌린지 사진을 본건 부산시내에 기록적 폭우가 내린 그날 이었다. 중동으로도 번졌다. 물이 귀한 동네이니 만큼 얼음물 대신에 흙더미를 뒤집어 쓰는 방식이다. 내용도 진화하고 있다. 아이스 버킷(얼음물양동이)이 루게릭 환우를 위한 퍼포먼스라면 샌드 버킷(흙양동이)은 팔레스타인 가자(GAZA)지구의 어린이들을 생각하게 한다. 지난달 8일 시작된 이스라엘의 공습에 50여 일간 2,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69명이 이스라엘 군인이다. 전 세계의 눈이 중동의 평화에서 멀어지는 순간 가자지구의 어린이들은 매일 포탄에 허물어지는 흙더미를 뒤집어쓰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는 메시지다. 요르단의 코미디언 마흐무드 다르자위가 처음 시작했고 확산일로에 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행히 하마스-이스라엘 평화협정이 26일 체결되면서 다시 불안한 평화로의 동거에 들어갔다. 내가 이 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건 “특정 질병을 지원하는 자선 단체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는 것이 좋은 생각은 아니며 다른 단체의 기부를 생각할 때”라는 Felix salmon의 지적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순전히 인기인의 유명세를 이용한 전형적인 일회성 캠페인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10년만 지나도 세계적 전쟁광으로 역사책에 기록될 조지 부시까지 물 끼얹으며 생명을 말하는 꼴이 가당치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지명을 받으면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처음엔 나를 지명한 이의 체면을 생각해야지 했는데 그것도 무척 속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루게릭병에 대해 조금 더 마음을 두면서 깨닫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송 cbs-fm 그대와 여는 아침의 김용신 아나운서로 부터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이어 받았습니다. 루게릭 환우들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 기회가 되어서 고맙습니다. 내가 많이 모르는 탓에 당장 환우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사람의 중심은 아픈 곳입니다. 사회의 중심도 아픈 곳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 합니다. 그러니 루게릭 환우들과 가족들 또 다른 수많은 병으로 아파하는 사람들.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 돈이 없어 우는 사람들. 오늘 아픔의 덩어리가 가슴에 맺힌 모든 사람들은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아픈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다가 급히 일정을 바꿔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경희대에서 광화문까지의 행진에 참가했습니다. 물도 끼얹지 못하겠습니다. 한 방울의 물도 아껴야하는 곳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대신 행진에 참가했던 학생들과 함께 나눌 물을 미리 준비했고 또 함께 마셨습니다.” - 아이스 버킷 챌린지 참가의 변 나의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결국 아이스도 버킷도 없는 행사가 되었다. 통상 바닥에 버려지는 물은 편의점에서 구입한 생수로 행진하는 사람들의 목을 축였고 찬물에 몸서리치는 쾌감의 퍼포먼스는 세 시간여의 행진으로 바꾸었다. 나를 지목한 김용신 아나운서도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는 일일단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퍼포먼스를 대신했다. 내가 지목한 세 명도 함께 세월호의 아픔에 동참했다. 어떤 이는 국경없는 의사회에 기부하되 세월호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는 결연함을 주었고 어떤 이는 아예 광화문의 일일 단식에 참여했으며, 또 다른 어떤 이는 세월호의 현장에서 노래를 부른다. 루게릭병은 정신이 살아있으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질환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도 루게릭 병을 앓고 있는지 모른다. 전쟁중독의 중동에서는 평화의 버킷이, 기아에 신음하는 아프리카에서는 빈곤 탈출의 버킷이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세월호 진실규명을 갈망하는 특별법 버킷이. 그래서 각기의 현장에서 가장 아픈 곳을 지향하는 운동이 된다면 조지 부시가 됐든 세월호 특별법에 반대하는 김무성 대표가 됐든 아니면 4.16일 7시간이나 행방이 묘연한 그분이 됐건 무엇을 끼얹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59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이스 버킷 챌린지(Ice Bucket Challenge)가 대세다. "에델 케네디부터 저스틴 팀버레이크까지"라는 미국 ALS(루게릭병)협회의 표어대로 전 세계의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죄다 참여하고 있다. 대 부호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나 팀 쿡은 물론이고 만수르에 뤽 베송,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리고 조지 부시와 빌 클린턴까지 인터넷은 이들의 찬물 끼얹는 동영상을 보며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소위 유명인사 중 다단계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이 운동에 지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낄 정도이니 지구촌이 들썩이는 것은 당연하다. 덕분에 미국 ALS 협회는 공식 보도 자료를 내놓은 8월 13일 이후 불과 열흘 만에 6,450만 달러(약 6백 50억)을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누적액수 7,020만 달러-. 이것이 국내에도 상륙했다. 연예인, 운동선수, 기업인, 또 정치하는 양반들까지 각기의 방식대로 재밌는 영상들을 토해냈는데 내가 이 운동을 처음 본 건 오바마가 물 끼얹기를 거부하고 기부만 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였다. 그 즈음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나경원 의원, 박지원 새정연 의원 등이 물 맞는 기사가 비중 있게 다뤄졌다. 정몽준 전 의원의 챌린지 사진을 본건 부산시내에 기록적 폭우가 내린 그날 이었다. 중동으로도 번졌다. 물이 귀한 동네이니 만큼 얼음물 대신에 흙더미를 뒤집어 쓰는 방식이다. 내용도 진화하고 있다. 아이스 버킷(얼음물양동이)이 루게릭 환우를 위한 퍼포먼스라면 샌드 버킷(흙양동이)은 팔레스타인 가자(GAZA)지구의 어린이들을 생각하게 한다. 지난달 8일 시작된 이스라엘의 공습에 50여 일간 2,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69명이 이스라엘 군인이다. 전 세계의 눈이 중동의 평화에서 멀어지는 순간 가자지구의 어린이들은 매일 포탄에 허물어지는 흙더미를 뒤집어쓰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는 메시지다. 요르단의 코미디언 마흐무드 다르자위가 처음 시작했고 확산일로에 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행히 하마스-이스라엘 평화협정이 26일 체결되면서 다시 불안한 평화로의 동거에 들어갔다. 내가 이 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건 “특정 질병을 지원하는 자선 단체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는 것이 좋은 생각은 아니며 다른 단체의 기부를 생각할 때”라는 Felix salmon의 지적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순전히 인기인의 유명세를 이용한 전형적인 일회성 캠페인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10년만 지나도 세계적 전쟁광으로 역사책에 기록될 조지 부시까지 물 끼얹으며 생명을 말하는 꼴이 가당치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지명을 받으면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처음엔 나를 지명한 이의 체면을 생각해야지 했는데 그것도 무척 속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루게릭병에 대해 조금 더 마음을 두면서 깨닫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송 cbs-fm 그대와 여는 아침의 김용신 아나운서로 부터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이어 받았습니다. 루게릭 환우들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 기회가 되어서 고맙습니다. 내가 많이 모르는 탓에 당장 환우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사람의 중심은 아픈 곳입니다. 사회의 중심도 아픈 곳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 합니다. 그러니 루게릭 환우들과 가족들 또 다른 수많은 병으로 아파하는 사람들.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 돈이 없어 우는 사람들. 오늘 아픔의 덩어리가 가슴에 맺힌 모든 사람들은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아픈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다가 급히 일정을 바꿔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경희대에서 광화문까지의 행진에 참가했습니다. 물도 끼얹지 못하겠습니다. 한 방울의 물도 아껴야하는 곳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대신 행진에 참가했던 학생들과 함께 나눌 물을 미리 준비했고 또 함께 마셨습니다.” - 아이스 버킷 챌린지 참가의 변 나의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결국 아이스도 버킷도 없는 행사가 되었다. 통상 바닥에 버려지는 물은 편의점에서 구입한 생수로 행진하는 사람들의 목을 축였고 찬물에 몸서리치는 쾌감의 퍼포먼스는 세 시간여의 행진으로 바꾸었다. 나를 지목한 김용신 아나운서도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는 일일단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퍼포먼스를 대신했다. 내가 지목한 세 명도 함께 세월호의 아픔에 동참했다. 어떤 이는 국경없는 의사회에 기부하되 세월호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는 결연함을 주었고 어떤 이는 아예 광화문의 일일 단식에 참여했으며, 또 다른 어떤 이는 세월호의 현장에서 노래를 부른다. 루게릭병은 정신이 살아있으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질환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도 루게릭 병을 앓고 있는지 모른다. 전쟁중독의 중동에서는 평화의 버킷이, 기아에 신음하는 아프리카에서는 빈곤 탈출의 버킷이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세월호 진실규명을 갈망하는 특별법 버킷이. 그래서 각기의 현장에서 가장 아픈 곳을 지향하는 운동이 된다면 조지 부시가 됐든 세월호 특별법에 반대하는 김무성 대표가 됐든 아니면 4.16일 7시간이나 행방이 묘연한 그분이 됐건 무엇을 끼얹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48 | 추천: 0
홍승권/ 인권연대 운영위원 진도 앞바다에서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하여 470여 명을 태운 세월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로 가라앉는 광경을 전 국민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속절없이 바라보는 가운데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채 무려 300여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지 어언 4개월이 지나갔다. 사건 직후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던 당국자들의 말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특별법이 표류되고 있다. 새누리당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 및 기소권을 부여하는 것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망망대해도 아닌 육지에서 빤히 보이는 곳에서, 그것도 폭발이나 태풍 등의 급박한 사고도 아닌 서서히 배가 침몰해가는 과정을 많은 국민들이 몇 시간 동안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하고 300여 명이 넘게 희생된 이런 참사는 전례가 있었던가? 구체적 사고 원인은 진상규명을 통해 밝혀져야 할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질을 인명보다 우선시하는 풍토 속에서 배양되어 왔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집권 여당은 ‘전례’를 운운하고, 사소한 법조문 따위를 핑계 대며 시간만 잡아먹고 있다. 인명을 우선시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치 또 다른 세월호의 침몰과정을 지켜보는 듯하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부가 어떻게 들어설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지난 8월15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 시민들이 모여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기소권·수사권 있는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국가를 경영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자라면 이런 일이 터졌을 때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여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텐데 왜 외면하는 것일까? 세월호의 침몰원인과 구조과정에서의 어처구니없는 방관 등 밝혀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판에 하루라도 빨리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져야 이 나라가 비로소 새로운 틀로 일어나 걸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리고 수사권과 기소권 없는 조사 행위에 누가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임할 것인가? 의혹 당사자가 감추려 들 때 강제력이 없다면 어떻게 명명백백하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집권여당은 어떤 생각으로 저렇게 몽니를 부리는 걸까? 아무래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면 이 정권에 크나큰 타격이 될 만한 일들이 많아서 그러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다. 시간과 보수언론은 자기들 편이니 적당히 뭉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다다르는 것은 결국 이 정부에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다. 똑같은 말도 사용하는 이에 따라서 개념이 달라지는 판이니 제대로 소통이 될 리가 없다. 상식과 염치는 이미 안 보이는 곳에 유폐시키고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신공을 내보이는 자와 대화가 될 리가 없다. 이미 국민을 위한 국가는 부재하고 정의를 위해 저항하는 시민을 겁박하는 공권력만 남아 있는 나라에서 현명한 시민들이 취할 바는 연대와 불복종, 쟁취만이 있을 뿐이다. 기억하라! 분노하라! 연대하라!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79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100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의 진실은 무엇이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고, 날이면 날마다 위정자들의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말들만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참담하고 죄스런 마음입니다. 온통 나라 안이 뒤숭숭하던 때, 이미 한참 전에 예매를 해놓았던 것이라 하는 수 없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첫 해외여행. 다행히 가는 곳마다 지인들이 있어 밥값과 숙박비를 최소화 할 수 있었고, 현지의 모습을 조금은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이라는 나라. 첫 느낌은 모범생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할 무렵 창을 통해 내려다본 뒤셀도르프는 숲이 내려앉은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나무들은 잘 보존되고 있고, 집과 건물들은 나무 높이를 넘지 않아 멀리서 보면 그 넓은 땅이 모두 나무들의 세상 같았습니다. 자전거를 위한 전용도로가 설치되어 있고, 자전거 통행에 필요한 신호등이 횡단보도마다 함께 설치되어 있으며 사람들과 자전거의 통행은 원활했습니다. 토요일 하루 동안 지인의 냉장고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모두 털어내 먹어치우고 더 이상 먹거리가 남아 있지 않아 일요일 아침 일찍 마을의 중심지에 갔더니 참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마트란 마트는 모두 문을 닫았고, 커피숍과 식당 정도만 몇 군데 문을 열었습니다. 토요일에 일하는 사람은 모두 일당의 2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모두 쉽니다. 대한민국 근로기준법도 비슷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선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모두 문을 활짝 열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데, 독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뭐 이리 불편한지... 그런데 유쾌합니다. 일주일의 하루, 일요일. 그 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사진 출처 - 프레시안 프라이부르크는 생태수도라 불리기도 할 만큼 자연친화적인 도시로 유명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에 갔다가 동물들이 사육되는 처참한 광경에 실망했던 기억이 있어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동물원에 아이를 데려가 보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콘크리트 바닥에 자신이 배설한 오물과 함께 뒹굴고 있는 동물은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인은 동물원에 가지 말자고 합니다. 아니 뭐 동물원까지 가느냐고 합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근처 5분 거리에 있는 농장으로 향합니다. 돼지, 소, 닭, 토끼, 말, 양, 오리, 칠면조... 코끼리와 기린, 악어와 사자가 없어 아쉽기는 하겠지만 이 정도면 아이가 동물들을 경험하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아 보였습니다. 직접 돼지의 등을 긁어 주고, 소에게 여물을 주고, 닭에게 사료를 주고, 말을 만져보고 올라 타 볼 수 있으니 멀찌감치 서서 동물 잠자는 것이나 구경하는 것보단 훨씬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농장은 동물들의 습성에 맞게 방목을 합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길러진 이 동물들은 프라이부르크 주민들의 밥상도 책임집니다. 행복하게 살다간 결과가 결국 사람의 밥상 위라는 것이 씁쓸하기는 하지만 머리만 빼곡히 내민 채 컨테이너 하나 가득 들어찬 닭장 속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한국에서 태어난 닭보단 이곳의 닭들이 그나마 행복해 보입니다. 짧은 기간 동안 독일 몇 군데를 둘러보고 한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습니다. 귀국 전날,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지인의 집에서 확인한 한국의 상황은 떠나올 때보다 더욱 참담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집권 여당은 보궐선거에서 당당하게 승리해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더군요. 더구나 21세기 하늘 아래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도무지 의심스러운 윤 일병 폭행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제는 ‘엄마발 엑소더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등장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독일이라고 사건사고가 없겠냐마는 적어도 상식적인 수준의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고, 노동자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자연과 환경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등록금 없이 누구나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고, 신나치의 집회에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의 방패가 신나치를 향하는 이 나라가 한참 부럽기만 했습니다. 이런 독일을 뒤로 하고 귀국을 앞둔 내게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Welcome Dynamic Hell, Korea!”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제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할 수는 있을까? 의미는 있을까?’ 씁쓸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돌아가야 할 곳, 대부분의 국민들이 뿌리박고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에서 말입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23 | 추천: 0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인권재단 설립에 관한 법률안”에 대한 촌평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칼럼에 이어 위안부 문제의 해법을 또 다시 거론해야 하겠다. 8월이 오면 애국의 월간이라도 되는 양, 한일간의 과거사들이 부상하고, 특히 위안부 문제는 외교현안으로 빠지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외교현안이라는 표현은 언어적으로 빈곤한 수사이다. 위안부 문제는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카드로 쓰는 외교적 소모품이 아니라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상 중대한 권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일과거사와 관련해 간과할 수 없는 흐름을 목격하고 있다. 특히 이 주제에 식견 있는 법률가들(대한변협)이 독일의 기억책임미래재단법(2000년)을 참조하여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인권재단 설립에 관한 법률안’을 기초하고 2014년 6월 18일에 국회에서 공청회까지 개최하였다. 한일간에는 강제동원과 관련해서도 평행선이 존재한다. 단적으로 우리나라 대법원은 2012년 미쓰비시 중공업사건에서 식민지배는 불법이고, 강제노동은 반인도적 불법행위이고, 설혹 한일청구권협정에서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획기적으로 판결하였다(대법원 2012.5.24. 선고 2009다 22549 판결). 물론 일본 법원은 과거에 상이한 취지로 판결해왔다. 식민체제에서 강제동원은 불법행위가 아니라 국가의 적법한 조치이므로 손해배상 사안이 아니라 기껏해야 원호의 문제에 해당하며, 그에 관한 일본정부의 책임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구도 속에서 대한변협은 강제동원에 대한 해법으로 이른바 <2+2방식>에 의한 재단을 제시하였다. 즉 일본정부 및 강제동원 노동자를 착취한 일본기업들, 그리고 청구권자금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한 한국정부와 그 청구권자금을 유용한 한국기업 등이 출연하여 재단을 만들고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에게 일정한 경제적 보상과 지원, 일정한 기념사업을 수행하게 하자는 것이다. 대한변협은 이 법안을 가지고 2014년 7월 28일 일본에서 일본변호사연합회 소속 변호사들과 함께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법안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우선 한국의 국회가 임의로 일본정부 및 일본기업의 책임과 출연을 전제로 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가이다. 관할권의 문제이다. 한일 국회의원들이 각기 자국의 국회에서 유사한 법률을 통과시키는 고도의 팀플레이를 전개한다면 보기 좋겠지만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이든 책임에 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입장표명이나 일본의 구체적인 조치들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의 일부기업들의 출연의사만 믿고 너무 가벼이 움직이는 인상을 받는다. 독일의 기억책임미래재단법의 탄생 전에 상응하는 정부간 협정(agreement)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지난 6월 18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일제강제동원피해자 인권재단 설립에 관한 공청회’모습. 사진 출처 - 대한변협신문 이제 위안부와 관련된 부분을 검토해보자. 이 법안은 위안부를 강제동원 피해자 범주에 포함시켜 함께 해결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법안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를 합당하게 존중하고 법적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의지를 결여하고 있다. 이 법안의 기본발상은 일본정부나 기업이 돈을 재단에 출연하면 과거사의 책임을 이행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인데, 강제동원 일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며, 더구나 위안부 문제의 해법으로서 과연 옳은지 정색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재단법안은 실패한 국민기금의 국적을 바꾸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민기금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상기하기 바란다. 몇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우선, 일본기업들은 노무자의 강제동원에는 책임이 있지만 위안부 문제에는 책임주체로서의 성격이 미약하다. 나아가 법안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한국정부 및 한국기업의 출연의무를 상정하였다. 이제 책임원칙은 사라지고 재원확보를 위한 경영마인드만 보게 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인도적 책임과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뒤섞을 수 있는지도 문제이다. 다음으로, 이 법안(제1조)은 가해행위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고 막연히 ‘피해’라고 규정한다. 즉 법안은 강제동원을 명백하게 불법이라고 천명하지 않는다. 일본이 돈을 제공하면 이를 책임이행으로 간주하겠다는 태도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지와 전쟁 치하에서 가장 끔찍한 인권침해 형태라며 국제사회가 인도에 반한 범죄이자 성노예제로 규정하는 위안부 문제를 단지 피해라고 언급한다면 이는 성노예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행태이다. 최소한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일본정부의 불법이고 범죄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러나 법안작성자들은 어려운 문제를 모조리 우회할 요량인 듯하다. 물론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정부가 공식적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정이다. 그런데도 법안은 강제동원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그 너머 위안부 문제를 끼워 넣어 어영부영 처리하고 있다. 일본은 인도적 책임을 이행하려고 할뿐인데, 재단법안은 그것을 법적 책임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법안의 혼선은 강제동원이라는 표현에 도사리고 있다. 필자는 현재의 법안 수준이라면 강제동원 피해자 범주에서 위안부를 논외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우선, 식민지배는 병합조약에 따라 이루어졌기에 그 후 일본법이나 식민지법에 입각한 모든 조치는 적법하다는 극단적인 내재적인 관점(국제법은 논의로 하고)을 따르면 ‘군인, 군속, 노무자의 강제동원’을 합법적 조치로 주장할 소지가 있지만 내재적 관점에 따르더라도 ‘위안부의 동원’은 일본법에서도 합법적인 행위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의 부인주의자들은 위안부 동원에 국가관여나 강제성을 부인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만일 위안부의 동원에 국가가 관여한 것이 사실로 확정되면 국제법상으로도 국내법상으로도 국가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우려 때문에 그렇게 부인했던 것이다. 따라서 합법성의 맥락에서 회색지대가 넓은 강제동원 개념을 군인, 군속, 노무자에 국한하는 것이 합당하며, 범죄코드에 해당하는 위안부의 동원까지 확장해서는 안 된다. 강제동원과 위안부동원이 모두 심각한 인권침해인 점은 분명하지만 청구권협정에서부터 현재까지 문제해결의 역사와 방식이 같지 않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혼합의 이유를 몇몇 국내법에서 찾을 수 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2010년)> 및 그 선행법인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2004년>)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군인, 군속, 노무자, (군)위안부로 규정하였다. 이 연장에서 대한변협의 재단법안은 위안부를 포함시켰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이행과 관련되어 있는 <대일민간인청구권보상에관한법률(1971년)>은 강제동원 피해자를 명료하게 군인, 군속, 노무자에 한정하였다.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위안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범주에서 배제하였다는 점은 반영하는 것이며, 이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별도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밝혀진다. 앞의 두 법률은 위안부를 강제동원 피해자로 규정함으로써 청구권협정과 관계없이(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인도적인 지원을 제공할 한국정부의 의향을 반영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와 관련해서 한국정부에게 법적 귀책사유가 없으므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생활안정자금)은 인도적 지원책임에 해당한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앞의 두 법률에서 위안부를 강제동원의 피해자로 규정한 것은 법규범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대한변협이 제안하는 재단법안은 일본의 범죄와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고 그 법적 책임을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경제적 지원을 이유로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완전히 털어버리게 하려는 매개체라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일본정부가 이러한 법률을 만들어도 시원치 않는 국면에 한국국회가 이러한 법률을 만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재단법안의 책임사상은 전체적으로 일본의 인도적 책임이나 도의적 책임론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질적인 책임주체들을 엮어서 두루뭉술하게 해결하려는 것은 과거사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법이 아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일본정부가 재단에 거금을 출연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책임인정과 사죄 등 규범적인 잉여를 생산할 것 같지 않다.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돈만으로 재단이 기능하는지는 의문이다. 가해국가인 일본정부가 국가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공식적인 사죄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이고 그 돈으로 기념관을 지은들 어떤 쓸모가 있을까? 그 기념관은‘책임의식의 착오와 혼동의 박물관’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돈을 받는 이유가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 15년 전에 도의적 책임에 입각해서 사과문과 위로금을 제공하겠다는 국민기금의 제안을 위안부 할머니들이 거부하였는데, 대한변협이 이제 다시 받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행동이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해법으로서는 재단이 맞는지도 의문이지만 지금의 재단으로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국가의 책임 인정과 공식사과 위에서만 재단도 가능한 것이다. 광복 70주년이 눈앞에 있다. 인간의 생애적 시간에 제약받는 사건들을 다루다보면 답답한 마음에 속전속결의 의지가 앞설 수 있다. 그러나 1965년 회담도 한일관계의 정상화에만 골몰한 나머지 너무나 많은 것을 소홀히 하였다. 지금 또다시 그래야할 이유가 없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비근한 예를 들어보겠다. 수십억 재산을 가졌으면서도 몇 백 만 원을 떼어먹으려는 인간이 있다고 하자. 채권자는 그 자의 돈을 받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며, 그 인간이 개과천선하는 것은 채권자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국가가 권력을 동원하여 시민에게, 이웃나라 시민에게 엄청난 만행, 이른바 국가범죄를 저질렀다면 우리는 ‘돈 받고 떨어져’라는 소극적인 방식에 만족할 수 있을까! 과거의 인권침해사건, 국가범죄에 대한 피해자들의 규범적 주장은 오로지 금전적 동기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금전배상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재단법안의 작성자들은 친절하게 사죄광고 위헌판결에 기대어 사죄를 상대국가에게 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지적한 대목은 과거청산법과 이행기정의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법률안에 대한 Q&A).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국제법상 책임의 첫 단추는 사죄(apology)에 있다. 2005년에 유엔총회가 채택한 피해자권리장전(Basic Principles and Guidelines on the Right to a Remedy and Repar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 and Seriou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 Adopted and proclaimed by General Assembly resolution 60/147 of 16 December 2005) 제19조에서 제23조까지를 참조하면 국가폭력 이후 사회와 국가가 이행해야 할 일들을 빼곡하게 적고 있다. 피해자권리장전은 배상의 내용으로 원상회복, 금전배상, 재활조치, 만족, 재발방지의 보증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돈만 받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 이후 사회가 져야할 책임의 두께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소송이나 법률투쟁을 넘은 문화적 투쟁의 영역에 속한다. 대한변협의 재단방안은 (외견상으로) 현재 한국법원의 판결,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 위안부 피해자들의 지배적인 견해와도 사뭇 동떨어져 있다. 협상은 자신의 모든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국제적인 규범과 원칙을 무시하고 돈만 받겠다는 납작한 자세로 임할 수는 없다. 재단법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일본에게는 참으로 편리한 법이 될 것이다. 손에 한 움큼 쓰레기를 들고 걷다가 휴지통을 만난 것과 같다. 해방 이후 70년의 세월을 감안한다면 법안은 해당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법이 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 양국이 책임에 관한 원칙협정을 채택하고, 그 아래 양국정부가 추가적인 이행사항을 각기 법제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2+2는 재원조달 방식이 아니라 한일과거사를 둘러싼 사람들의 소통방식이 되어야 한다. 즉 양국정부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포함한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테이블이 필요하다. 일본정부가 일본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대한변협이 먼저 재단법안을 제시하는 것은 선후가 뒤바뀐 시도이다. 필자는 한일협정 50주년인 내년에는 양국이 ‘식민지배와 전쟁책임의 해결에 관한 한일정부간의 추가협정’을 만들고, 다음으로 일본정부가 일본의 국내법으로 피해자권리장전의 취지를 전향적으로 반영한 ‘식민지배와 전쟁피해의 청산법’을 제정하기를 희망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7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