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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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분명히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요즘 방영되고 있는 jtbc 드라마 <송곳>의 대사다. <송곳>은 대형 유통 매장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며 사측의 온갖 박해와 음모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다룬 드라마다. 잘 알려진 대로 최규석의 인기 웹툰이 원작이고 드라마는 원작의 대사와 전개를 비교적 충실히 옮기고 있다. 원작 만화를 읽을 때 이런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영화라면 몰라도 드라마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이 드라마화 되었다. 드라마 <송곳>의 두 주인공. 지현우(왼쪽)는 이수인 역을, 안내상은 구고신 역을 맡았다. 사진 출처 - JTBC <송곳>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이수인(지현우 분)과 구고신(안내상 분)이다. 이수인은 상식과 윤리에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그런 깐깐한 성격 때문에 어디서나 ‘무난한’ 적응에 실패하고 왕따가 된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가시밭길을 어쩔 수 없이 가고야 마는 바로 ‘송곳’ 같은 인물이다. 구고신은 학생 운동 경력을 가진 노동상담소장이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운동에 나서 싸우는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한다. <송곳>의 또 다른 주인공들은 노동조합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가 싸움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하고 노조운동의 의미를 함께 깨달아 가는 마트의 노동자들 자신이다. 이들이 사측의 회유와 압박을 극복해 가며 조금씩 노동조합의 대의를 공유해가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부담스럽고 무거운 소재이지만 비교적 경쾌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이끌고 가는 연출도 칭찬할 만하다. 특히 이 작품이 가진 미덕은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조원들을 못살게 구는 상사들이 그저 나쁜 개인들이 아니라는 것, 그들 역시 또 다른 ‘갑’들에 의해 억압받는 ‘을’들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측의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면서 직원 해고에 앞장서는 정민철(김희원 분)은 악랄한 인물로 보이지만 사실 더 높은 임원들에게 상시로 위협받고 모멸스러운 말을 들어야 하는 또 다른 약자일 뿐이다. 간명한 선악구도에서 벗어나 노동자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이 얽히는 중층적인 현실의 모순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뛰어난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노동조합, 노동운동은 일종의 금기어다. 노동자는 패배자이고 노동조합은 위험한 조직이며 노동운동은 사회에 대한 위협이라는 게 언론과 교육이 끊임없이 말하는 바이다. 20대 신규 취업자의 80%가 비정규직 노동자인 나라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 <송곳>의 대사에도 나왔지만,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때 모의 단체 교섭을 배우고,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사회 과목에서 노동자의 단체 교섭 전략을 배운다.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배우지 못한 ‘노동’의 문제를 학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송곳>은 한국 드라마 역사에 기록될 기념비적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이런 드라마가 다름 아닌 삼성 재벌의 뒷받침을 받는 jtbc에서 방송되고 있다는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논점을 던져준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 드라마에 대해 다소 찜찜하거나 유보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간단치 않은 문제이지만, 나는 삼성 재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그것대로 유지하면서 이 드라마의 가치에 대해 평가하고 성원하는 것은 충분히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중문화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를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텍스트가 자본의 이윤을 높여준 사례는 차고 넘친다.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많은 영화들이 그랬고 60, 70년대의 숱한 저항적 음악들이 그랬다. 대중문화는 언제나 자본의 지배 에너지와 대중의 저항 에너지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끊임없이 유동한다. 자본은 이익이 된다면 스스로에 대한 공격조차도 상품화시킬 만큼 유연하다. 중요한 건 그 유연함의 틈을 파고들면서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텍스트가 좀 더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대사는 이 드라마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그 대사를 들을 때마다 이 사회가 바로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을 점점 더 사라지게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거대한 악이 구조화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워야 하는 현실에서 송곳 같은 인간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지 않는가. 교육과 언론, 온갖 문화적 기제들이, 오직 권력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면서 송곳의 싹을 잘라버리지 않는가. 드라마 <송곳>이 더욱 돋보이는 건 바로 ‘송곳’ 같은 인간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1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66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원고    대한민국 국민 피고    대한민국   청구취지 1.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00,000,000원씩을 지급하라. (지연손해금이나 소송비용은 파산 될 피고에게서 받기 어려울 것이므로 원금만 청구합니다) 2. 제1항의 금원 지급이 완료될 때까지 원고들은 국민으로서 부담하는 의무의 이행을 거부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청구금액 합계 : 100,000,000원 x 52,220,000명(2013년 기준) = 5,222,000,000,000,000원   청구원인  1. 원고들은 피고 대한민국의 국민들입니다.  2. 피고 대한민국은 아래와 같은 불법행위를 통해 원고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한 사실이 있으므로, 부족하나마 원고들에게 각 100,000,000원을 지급함으로써 원고들을 위로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3.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행위   (1) 피고는 국가로서 원고들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집니다. 피고의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를 부담하고, 피고의 공무원들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피고는 피용자인 대통령과 공무원의 사용자로서 대통령과 공무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사용자 책임을 부담합니다.   (2-1) 피고는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국정원장 원세훈을 비롯한 국가정보원 직원, 군인 등을 동원하여 선거에 개입하였습니다.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 및 박근혜가 임명한 장관 및 청와대 수석 등 다수의 공무원들이 국정원 등의 선거개입을 수사하는 검찰의 수장인 검찰총장을 교체하고, 특별수사팀의 수사에 개입하였습니다.   (2-2) 피고의 대통령 박근혜는 2014년 4월 세월호가 침몰하던 순간 세월호에 갇힌 학생들의 구조를 방관하여 305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만들었고, 직무시간인 7시간 동안의 행적을 밝히지 않는 방법으로 헌법이 부여한 직무를 유기한 사실을 은닉하였으며, 이후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과의 약속을 뒤집는 방법으로 기망하였던바, 1년 6개월 이상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원고들에게 참기 힘든 정신적 고통을 가하고 치유하기 힘든 트라우마에 빠지도록 하였습니다.   (2-3) 피고의 대통령 박근혜와 피고 소속 공무원들은 2015년 5월 중동호흡기증후군 관리에 실패함으로써 37명의 국민을 사망토록 하고, 원고들로 하여금 극도의 공포 속에서 떨도록 하였습니다.   (2-4) 피고의 대통령 박근혜와 교육부 장관,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 등은 원고들이 좌편향 되었다고 매도하며 2015년 11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원고들의 사상을 개조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원고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1)   (2-5) 피고의 대통령 박근혜는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증세 없는 복지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공약을 전반적으로 폐기하는 방법으로 국민인 원고들을 기망하고 있습니다.   (2-6) 피고 대통령 박근혜는 노동개악을 통해 노동자인 원고들을 벗어날 수 없는 노예의 굴레 속에 떨어뜨리고 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의 배를 불려주려 획책하고 있습니다.(2)  4. 소위 ‘헬조선’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땅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일일이 나열하며 피고의 불법행위를 지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불법행위를 지적하면 할수록 오히려 원고들의 정신적 고통은 증폭되기만 할 뿐이니 말입니다. 자고로 위정자들이란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고 백성을 억압하여 축재에나 열을 올리던 부류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책임지지 않는 대통령, 책임지지 않는 공무원들로 구성된 피고라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들로 헌법을 치장했다 한들, 국가 원수라는 대통령부터 그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 이런 헌법과 정부는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는 것이, 차라리 무정부가 원고들의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이 되겠다 싶습니다.  5. 피고는 원고들이 지적하는 불법행위와 관련하여 대통령 박근혜, 그 소속 공무원들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정무적 판단에 따라 행한 일련의 행위로서 고의, 과실이 없고, 위법하지 않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피고는 이럴 때를 대비해 정치적 책임을 지도록 선거제도를 마련해 놓고, 사고가 발생했을 때마다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았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꼼수일 뿐입니다. 피해범위를 축소시키려는 이미지 조작일 뿐입니다. 피고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피고는 피용자에 불과한 대통령과 소속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를 엄중 질책할 것이지 위와 같은 항변으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원고들은 피고가 새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일 때 위와 같은 손해배상책임을 면제해 주는 아량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6. 원고들이 승소하여 손해배상금을 받게 되는 경우 피고는 손해배상금을 국고에서 지출하려 들 것인데, 피고의 전 대통령이던 이명박, 현재의 대통령인 박근혜가 이미 만신창이로 만들어놓은 국가 재정 상태에서 손해배상금이 지급되는 경우 국가 부도 사태에 이를 것이란 생각을 하니 정신이 혼미해질 따름입니다. 그러나 향후 들어설 피고의 정부에 국민의 이름으로 준엄한 경고를 한다는 의미에서라도 피고는 파산 절차를 거치도록 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여 원고들은 이 사건 청구에 이른 것입니다.  7. 참고로 원고들 중 청년 세대는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피고는 손해배상액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소송을 지연할 우려가 매우 큰바, 조속한 판단을 요청합니다. 2015년 11월 19일 원고 대한민국 국민   역사 심판부  귀중 (1) 우편향된 원고들이 본 소송에 참여할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겠으나,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본 소송의 취지를 이해할 것이므로 당연히 참여할 것이고, 보수주의자를 참칭하는 수구세력들은 나라가 아닌 일신의 영달과 안위만을 최우선의 관심으로 챙기는 자들이므로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너나할 것 없이 참여할 것입니다. (2) 자본가인 원고들이 진정한 의사로 소송에 참여할 것인지 의문일 수 있으나, 돈이 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 하는 그들의 속성에 비춰볼 때 그 누구보다 소송참여 의사가 확실할 것입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1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62 | 추천: 0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주의 일입니다. ‘일상의 실천과 변화가 바로 세상을 만드는 힘’이라 믿는 시민단체의 10주년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단체라고는 하나 실은 사무국장 한 사람이, 그야말로 1인 10역을 해오면서 10년을 꾸려온 곳입니다. 수년 전에 인권연대를 통해 알게 된 이후, 단체의 대표이며 사무국장이며 행사 진행자이며 온갖 허드렛일도 담당하는 그는 매번 소식지를 보내왔습니다. 소식지를 볼 때마다 외람된 말이지만,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습니다. 소식지를 통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저는 그 단체의 행사에 참여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변머리가 없는 제가 낯선 사람들이 모인 행사, 더구나 많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사랑방 같은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행사 열흘 전쯤, 열 사람의 몫을 혼자 하고 있는 사무국장에게서 10주년 행사가 있으니 참석을 바란다는 점잖은, 말 그대로 고지성 문자가 왔습니다. 일주일 전 또 다시 문자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꼭’ 참석을 바란다는 문자였습니다. 행사 삼일 전의 문자는 눈물겨웠습니다. ‘이제 3일 남았습니다. 많이 안 오시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으로 불안함에 떨고 있는 요즘입니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을 믿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10주년 기념 행사인 만큼 큰 맘 먹고 100석이나(!) 되는 장소를 예약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꼭! 좀 와주세요!’라는 문자의 끝 문장에, 야심차게 준비한 초대형 행사에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하는 사무국장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행사 당일 오전에 받은 문자는 이랬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꼭 와주세요.’ 이럴까 저럴까 하며 머리를 굴리던 저는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그날, 피치 못할 바쁜 일도 없는 주제에 별 걱정을 다하고 있는 제 꼴이 한심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었습니다. 기분 좋게 참석하면 될 일이니까요. 출판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돌아갈 때쯤이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요즘 읽을 만한 책 있어?” 그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출판사에 이렇게 왔으니 책이나 한 권 줘...” 출판사에 가면 책을 한 권쯤 그냥 받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렸나 봅니다.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저 ‘역시’ 습관처럼 지인에게 책을 주곤 했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 몇 년 전의 일입니다. 글을 쓰는 친구 A가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는 제가 잘 알고 있는 출판사에 다니는 편집장 B 때문에 화가 나 있었습니다. “너, B 잘 알지?” “잘 알지. 걔 잘 지내나?” “잘 지내고 뭐고 그놈 진짜 개떡 같은 놈이야.” “갑자기 왜.. B가 어쨌기에?” A의 다짜고짜는 이랬습니다. 겸사겸사 B가 있는 출판사에 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마침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한 권 달라고 했다, B가 정색을 하며 불쾌한 표정을 짓더라,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A야, 넌 세별전자에 가서 냉장고 하나만 달라고 할 수 있냐?” 그 말을 들은 A는 ‘더럽고 치사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책을 못 주면 못 준다고 곱게 얘기할 것이지 냉장고 운운하며 모욕감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어 저에게 전화로라도 하소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귀한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다시는 B와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잠시 후 B에게 전화했습니다. A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습니다. B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아는 사람도 안 사보는 책을 누가 사보겠니?” 사무국장이 1인 10역을 하는 그 단체의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100석의 좌석도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행사를 마친 후 사무국장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정말 과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더 힘 있게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1월 1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97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4년 전부터 책을 가까이 하는 교사들이 모여 한 달에 한 번 책읽기 모임을 하고 있다.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교사와 보수라고 생각하는 교사가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며, 학교에서 일어나는 문제들과 함께 교사 개인적인 일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른 가치를 지닌 관계로 때때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얼마 전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자칭 보수라는 40대 교사가 “난 역사 교사지만, 교과서 문제가 이렇게 중요한가요? 수업하는 학생들은 역사에 관심이 없어요, 고대사는 정확한 사실이 있어서 자신 있게 가르치지만 여러 쟁점이 있는 근현대사는 사건만 나열하는 정도로 수업해요, 저는 보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사실만 교육하며 제가 보수임을 나타내지 않아요. 중·고등 학생 때 배운 것보다는 주변의 환경과 살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기 계시는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배운 역사 교육이 삶에 영향을 미쳤나요?”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이 교사의 질문과 생각에 세상에 대한 공부를 중단한 채 한 시점에 머물러 자만심으로 가득차 공격적이던 오래전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대부분이 50대인 교사들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두 역사교육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혼란스런 마음이 생각나게 되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들이 지난 10월 29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시국선언에는 일반 교사들도 참여해 2만1379명이 실명으로 서명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국정역사교과서로 배우고 그것으로 학생들에게 교육하다 10여 년 전부터 검인정교과서로 가르치는 세대로서, 그 시대 교육(국정교과서)으로 대학시절에 접한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알고서 복잡하고 당황스럽던 감정을 이야기 했고, 다른 역사교사는 검인정교과서로 된 후에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기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의 관심과 입장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많은 질문이 제기되고 토론이 되는 수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암기위주로 가르치는 수업이 없어지면서 교사들은 더욱 많은 공부를 하고 자료를 준비하고 노력해서 학생들이 답을 찾는 수업을 준비한다고 했다. 질문을 던진 교사는 당황스러워 하며 자신은 보수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객관적으로 역사를 가르치려고 노력한다며 얼버무리며 이야기를 끝냈다. 우리가 보아온 이 교사는 수업도 열심히 하고 담임의 역할도 최선을 다한 착한 삶이었지만 학생들 모습에 자신의 생각으로 단언을 하고 세상을 알기 위한 노력보다는 본인이 가장 상식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교사는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학생과 학교를 알아야 하며, 좋은 삶을 가르치는 직업으로써 절대 중립적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반성이 되었다. 교사로 보낸 많은 시간들을 돌이켜 보니 착한 삶을 사는 것이 좋은 교사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학생들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착한 삶의 모습으로 보일까 두려워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서 좋은 삶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 것을 다짐해 본다. 좋은 삶이란 좋은 삶은, 삶의 주인의 오래된 습관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좋은 삶은 착한 삶과 동일하지 않다. 착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바보’는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이지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교활해서는 안 되지만 영리할 필요는 있다. 영리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만 우리는 좋은 삶을 지키기 위한 방어술을, 그리고 좋은 삶을 훼방 놓는 악한 의지의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공격술을 모두 터득할 수 있다. 좋은 삶은 그래서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요구한다. 좋은 삶은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능숙히 사용해서 세상과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다. 좋은 삶을 기대하는 유토피아적 희망은 삶의 무시무시한 리얼리티와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먹고 자란다. (사회학자 노명우의 책 “세상물정의 사회학”중) 김영미 위원은 현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1월 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89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미국에서 살게 된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그동안 겪은 미국인들은 대체로 상냥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반갑게 안부를 묻고 1m 이내로 근접할 때는 반드시 ‘나를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들 잘 아시겠지만, 아무리 줄이 길어도 불평 한마디 없이 서서 기다린다. 한국 같으면 진즉 고성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관공서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은 마치 다른 나라 사람 같다.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고압적이다. 이 기묘한 불일치는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착한 미국 서민들을 보면서 나는 양처럼 순한 일본인들을 떠올렸다.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迷惑を 掛けるな, 메이와쿠오 가케루나) 교육을 어릴 때부터 철저히 받는 일본인들은 미국인 이상으로 착하다. 일본의 ‘메이와쿠오 가케루나’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분석은 그 뿌리를 사무라이 지배에서 찾는 것이다. 함부로 나대다가 언제 칼 맞을지 모르니 스스로 조심하는 문화가 형성됐을 거라는 얘기다. 사무라이들이 새 칼을 시험하려고 지나가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미국인들이 상냥하고 양순한 이유도 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함부로 나대다가 언제 총 맞을지 모르니 그럴 법 하다. 무지막지한 경찰의 폭력이 합리화되는 지점도 결국은 총이다. 경찰이 스스로 위협받았다고 판단하면 폭력은 정당화된다. 경찰의 폭력은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는다. 무기도 없는 시민을 길바닥에 눕혀놓고 주먹으로 때리는 경찰관의 모습이 거의 매일 아침 방송 뉴스를 장식한다. 세계 일류 국가이자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고도 참고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방인으로서 약간의 만용을 부려 추측해 본다면, 나는 그것이 국가주의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미국 초등학교는 지금도 수업 시작 전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1년 365일 집 앞에 미국 국기를 게양하고 있는 집이 수시로 눈에 띄는 것은 이렇게 철저한 국가주의 교육의 결과일 것이다. 나보다 국가를 앞세우게 되면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일이 된다. 강력한 국가와 나약한 국민.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고압적인 태도는 자신들이 국가의 대리인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 질문은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다. 세계 일류 국가인데도 왜 참느냐가 아니라 세계 일류 국가이기 때문에 참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유보하는 대신 세계 최강 국가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미국인들을 지탱하고 있다. 온순하기 때문에 제국의 신민이 된 것이라기보다는 제국의 신민이기 때문에 온순해 진 것이다. 가까이서 본 미국은 애국주의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전형적인 제국의 논리를 갖고 있다. NBC방송의 <제리 스프링거 쇼> 사진 출처 - 구글 스트레스는 3S(Sports, Screen, Sex)로 푼다. 지구상에서 가장 과격한 스포츠인 미식축구, 세계 최고의 자본과 인력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포르노 산업. NBC방송의 <제리 스프링거 쇼>처럼 일반인들이 스튜디오에 나와 서로 주먹다짐을 하는 막장 프로그램이 한낮에 티브이에서 방송되기도 한다. 애인을 빼앗겼다며 주먹을 날리는 여자들의 악다구니를 보며 미국인들은 국가권력 앞에 왜소해진 자신의 폭력 본능을 쓰다듬는 것일까. 국가주의라는 점에서도 미국과 일본은 닮은 구석이 많다. 한때 제국이었고 다시 제국이 되고 싶어 하는 일본과, 그런 일본을 응원하고 이용하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제국인 미국. 그리고 새로운 제국으로 떠오르는 중국. 그 틈바구니에 낀 한반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법은 통일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린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룬다고 해도 우리는 제국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나는 온순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좋다. 그리고 벌써 그립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0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97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고영주는 2013년 천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 ‘변호인’의 모델이 된 세칭 ‘부림사건’ 수사검사다. 단지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상상 인물이 아니라, 현재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공안검사 출신의 실제 인물이다. 고영주는 국사학자 90% 이상이 좌경화된 사람들, 제1야당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확신, 문재인을 지지한 사람은 이적행위 동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변형된 공산주의자로 각 호칭하고, 5·16군사쿠데타는 정신적 혁명이라는 극단적 망언을 날리며 매카시즘을 선도하려 하고 있다. 부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부산 지역에서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등을 영장 없이 체포하여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하여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하였다고 용공 조작한 공안사건을 통칭한다. 그가 이 사건과 관련해 했던 거짓말을 분석해보자. 첫째, 고영주는 부림사건을 수사하면서 고문을 당했다는 말도 들을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고영주가 피해자들의 고문 호소를 묵살하였다는 증언은 여러 차례 나왔고, 당시 재판과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법원이 발부한 구속영장 없이 최대 60여 일간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수사를 받아야 했다. 불법 구금은 검사라면 수사기록을 한번만 훑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만일 불법구금을 몰랐다고 한다면 그것은 검사 자질이 원초적으로 없는 무능력자라는 뜻이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영주의 주장이 뻔뻔스러운 거짓말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둘째,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들이 고문을 호소하였다면 법률상 공익의 대표자이고 인권옹호자인 검사는 고문 여부를 밝히는 수사를 반드시 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러나 그는 고문 호소를 묵살하였다. 진실을 외면한 직무유기 그 자체로 충분히 비난받아 마땅하다. 고문과 가혹행위를 모르쇠하면서 독재자의 하수인 노릇을 한 자가 아직도 국가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정의가 실종된 믿기지 않은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셋째, 부림사건이 재심절차를 거쳐 무죄로 확정된 이후에도 고영주는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며 오늘날 종북세력의 뿌리이고,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사법부가 좌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사법부에 김일성 장학생이 있다.”고 까지 한다. 시정잡배의 사적 농담도 아닌 공적인 자리에서 법조인이 한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이러한 발언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정하고 있는 적법절차를 부인하는 것이다. 적법절차를 위반한 수사와 재판을 정당하다고 옹호하는 주장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 변호인에서 ‘차동영’이 자행한 잔혹한 고문을 잘했다고 칭찬하는 짓이다. 사법부는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을 빨갱이로 간주하고 빨갱이는 때려죽여도 되고, 법도 필요 없다며 내뱉고 있는 말이다. 현대판 마녀사냥인 것이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세운 IS(이슬람 국가)가 중동을 피바다로 물들이고 있다. 국내에서도 고영주 같은 이념적 극단주의자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이념 전쟁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들겠다는 자들의 행동도 똑같은 이념 전쟁을 원하는 자들이다. 극단주의자들은 “흑과 백 둘 중 하나를 골라라. 네가 나의 적이 될 것인지 아군이 될 것인지 선택하라.”고 시민을 윽박지르고 있다. 나와 다른 것은 모두 적(공산주의자, 빨갱이)으로 여기는 극단적 이분법만을 가진 자들이 불행하게도 현실을 장악하고 있다. IS 이슬람국가와 국내의 극단주의자들은 모두 폭력과 증오를 근본 뿌리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닮아 있다.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은 공통적으로 극단적 이념을 신봉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항상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살인과 억압, 고문, 사건 조작을 정당화하는 폭력신봉자들이다. 이들의 말로라도 비참해야 하는 것이 인과응보에 맞다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반성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오히려 이런 자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이 되어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헬(지옥)조선이라고 부르는 것 아니겠는가. 자유 수호와 인권을 금기시하고, 통일된 문화국가를 꿈꾸는 것조차 금지하고, 평화를 거론하는 것도 반역자로 치부하는 극단주의자들이 꿈꾸는 세상. 그것은 조국에 대한 봉사와 헌신이 아니다. 단지 조국을 더럽히고 질식하게 만들 뿐이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0월 2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27 | 추천: 0
- 안철수의 리더십과 아마추어 정치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아마추어’라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이는 누굴까. 몇몇 정치인이 떠오르겠지만 단연 압권은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서울 노원구병)이 아닐까. 꼭 안 의원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는 아쉬움을 넘어서 가슴 칠 일로 기억될 것이다. 당시 안철수 후보는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격적으로 후보직을 사퇴했다.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광화문 유세가 끝난 뒤 안 의원은 측근들에게 “새정치는 없고, 친노만의 선거다. 민주당과 앞으로 더 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 후보가 대통령이 되건 안 되건 나는 내 정치를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역사적인 대선 투표 당일 가방을 싸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천생 ‘아마추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그 후과가 얼마나 큰지 자신은 알고 있는지. 안 의원은 대선이 끝난 뒤 신당(新黨) 창당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사람은 안 모이고 최장집 교수 같은 멘토들이 떠나자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전격 합당을 선언했다.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이다. 안철수가 ‘새정치’라는 깃발을 내걸고 창당했지만, 창당을 하자마자 정글의 법칙에 익숙한 그의 측근들은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안철수는 떠나는 사람을 잡지도 않았다. 그 결과 어느 순간, 안철수의 우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됐다. 호시탐탐 안철수의 입만 노리는 하이에나 떼들이 지천에 널려있다는 것을 자신만 모르고 있는 듯하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부산 시내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함께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사진 출처 - 한겨레21 안 의원의 정치 입문(入門)은 이제 고작 3년을 넘겼다.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청춘콘서트’가 인기를 끌고 젊은이들이 그를 신데렐라처럼 떠받들자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다고 바람을 잡기 시작한 게 2012년 3월이다. 당장 서울시장 후보 지지율 1위를 달렸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박원순 변호사를 만난 뒤 후보를 전격 양보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봐줄만 하다. 안 의원이 대표로 있을 당시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안 대표가 세월호 사고 수습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기억에 남는 일이 전혀 없다. 아니, 안철수가 대표로 있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진단일지 모른다. 무늬만 대표였지 그에 걸맞은 실력과 전략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관전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안철수 자신만 모르고 있다. 정당의 대표는 주식회사 대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안철수 의원은 정치 입문 3년이 지나도록 이점을 간과하고 있는 모습이다. 안 의원이 회사를 운영할 때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정당 운영도 회사 대표처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아마추어적 행태는 여기서 비롯된다. 특히 안철수는 정치판이라는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칙조차도 모르고 있다. 그랬으니 추진하고자 한 일마다 파토가 났던 것이다. 또한 공작과 음해와 역공이 난무하는 정치판의 생존원리조차 알지 못했다. 이것이 안철수 정치의 한계이자 현주소다. 안철수가 정치인으로 적어도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안목이라도 있었다면 결코 구 민주당과 합당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6.30 지방선거에서 단 한 석의 기초단체장을 배출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또 지난해 7.30 재보선에서 전멸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며 고집스럽게 갔다면 지금쯤 대안정당으로 국민들 뇌리에 자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 당장 죽어도 내일은 살아날 길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안철수는 역시 아마추어라는 확신이 강해진다. 그는 여의도 정치판으로 진입한 이후 눈에 띄는 대권 주자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인지도는 대권에 도전했을 당시보다 한참이나 떨어진다. 정치는 상대가 있다. 구호와 선전, 이미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상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정치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전장에서 전투력으로 드러나게 된다. 정치는 더러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다른 면에서 명분과 실리를 챙기는 대화와 타협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의 경우 일방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거나 청와대 근처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정치적 쇼를 통해 이미지 정치에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그에게서 전투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든 이유다. 지금까지처럼 아마추어 같은 모습에 머문다면 정치인 안철수의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불어 역사의 아픔도 깊어질 것이다. 안철수가 정치를 그만두든지,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가, 이 아마추어를 말릴 수 있을까. 이 글은 2015년 10월 2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29 | 추천: 11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은행잎은 애초에 노랗지 않다. 봄볕이 무르익을 때 쯤 연두색 아주 여린 이파리로 태어난다. 한여름의 뙤약볕. 심지어는 아파트 창문까지 날리는 태풍까지 다 받아내고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일생을 나무에게 필요한 엽록소를 공급하기 위해 제 할일을 다한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의 계절이 되면 나무는 이제야 스스로 겨울날 걱정을 한다. 나뭇잎이 나무 본체로부터 영양분을 받았던 유일한 통로인 떨켜를 막는다. 나무 본체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 추운겨울 내가 살아야겠으니 너는 이만 내 인생에서 사라져” 아침드라마에서 나오는 아주 못된 배우자의 대사 같은 것이다. 매정한 이별통보 혹은 절교 선언이다. 신호를 받은 나뭇잎은 그제서야 이별을 준비한다. 더 이상 나무 본체를 위해서 광합성을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고 사랑의 대상을 잃은 나뭇잎은 서서히 말라간다. 제 몸속에 남겨두었던 초록의 엽록소가 점점 옅어지고 노란색 낙엽으로 변한다. 봄날 태어날 때부터는 카르티노이드라고 하는 노란색 색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무의 일원이 되어서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를 위해서 노동했던 그 순간에는 단 한 번도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나무 본체와 이별하고 난 뒤의 단 며칠 혹은 2,3주 그제서야 자기 색깔을 드러낸다. 참담한 이별의 결과다. 그게 우리들의 책갈피에 곱게 모셔둔 노란 은행잎의 실체이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자꾸 낮은 곳으로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가을엽서. 안도현 - 은행잎이 거리를 뒹구는 이유는 너무 간단하게도 지구가 가지고 있는 중력이란 것 때문이다. 지구 가장 깊은 곳의 중심에서 모든 사물들을 낮아지라고 잡아끄는 힘이다. 그 중력 때문에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은 땅위를 걷는다. 지구상의 모든 자연이 사는 모든 행위들은 모두 이 중력의 힘에 의존한다. 너무도 당연해서 일상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힘이 바로 중력이다. *사실 높은 곳은 다 위태롭다. 보기만 해도 까마득히 솟아있는 대형교회의 십자가도, 어둠의 군주 사우론의 성(城)을 닮은 주상복합 아파트 꼭대기도, 나도 좀 살려달라고 하루에도 몇 명씩이나 오르려 한다는 한강대교의 아치도 모두 위태롭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만의 호화로운 삶을 위해 높은 곳으로 가고 어떤 이들은 가난한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아니면 더 이상 추락하지 않기 위해 높은 곳으로 간다. 나는 신이 있다면 하늘에는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인간들이란 자기가 믿는 신을 가장 위태로운 하늘 꼭대기에 매달아 놓고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같은 종족들을 얼마나 많이 착취해 왔는가 말이다. 나는 다시 신이 있다면 지구의 가장 중심부에서 더 낮은 곳을 향해 진지하게 기도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중력에 의해 삶을 보장받고 중력은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은행잎은 죄가 없다.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적도 없고 원해서 사라지는 적도 없다. 오직 나무 본체만을 위한 끊임없는 노동을 해 왔을 뿐이다. 그 지나치리만큼 가혹한 노동의 대가는 당연히 은행이라는 열매로 맺어진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똥 냄새라고 했다. 은행잎의 숭고한 희생으로 만들어진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인간의 발끝에서 뭉개지면 풍기는 지독한 냄새다. 가을 바람맞은 풀섶이거나 메뚜기 폴짝대는 잔디밭이거나 냇물 졸졸 흐르는 도랑가에만 떨어졌다 해도 그런 냄새를 풍기지 않았을 터이다. 썩을 수 없어 돌아갈 고향도 잃어버리게 만든 시멘트 바닥을 깔아 놓은 것도 인간이다. 서울시만 해도 11만 4천 그루나 되는 은행나무가 스스로 손들어 가로수가 되겠다고 자원 했을 리 만무하다. 허니 은행의 똥 냄새가 아무리 지독하다 한들 바닥을 아니 도시 전체를 온갖 콘크리트로 도배해놓고 경제성장 축제(economic growth festival)를 벌이기에만 여념이 없는 인간들의 치졸한 욕망의 냄새에 비할 수 있을까. 서울시는 은행 열매가 열리는 암컷나무 3만여 그루 중 매년 300그루씩을 제거하기로 했단다. 올 가을이 더 슬퍼지게 생겼다. 대지와 겨우내 뒤엉겨 봄의 새싹을 만들어 내는 생명의 이파리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희생으로 점철된 고단한 낙엽의 일생을 마감하며 마땅히 겨울잠 청할 곳 하나 만들어주지 못하는 도시라는 몰인정한 생태계가 고작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암나무를 베어 버리는 인정머리란 게 도대체 이 가을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똥냄새가 싫다는 이 도시를 포기해야 할까보다. 은행잎으로 상징되는 가을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 * (스파시바, 시베리아에서 인용)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0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66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및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려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방기(放棄)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지(保持)하지 않는다. 나라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국헌법(평화헌법) 제9조)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군정의 주도로 헌법을 개정했다. 당시 개정 헌법의 핵심은 위에 인용한 일본국헌법 제9조, 즉 일본 국민은 평화를 추구하고 무력의 행사를 영원히 포기한다는 선언에 잘 담겨있다. 1954년 자위대가 창설되었지만, 자국 영해 근처에서 직접 공격을 당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는 전제는 견지해왔다. 그런 까닭에 일본에서는 이 헌법을 이른바 ‘평화헌법’이라고 불러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일본 중흥을 외치며 우편향적 드라이브를 강력하게 걸어오다가 급기야 전후 70년째인 올해 헌법에 기반해 만들어진 안보 관련 법안 열 가지를 개정하고 한 가지를 신설해 국회의 승인을 얻어냈다. 일본의 평화를 지킨다는 ‘소극적 평화주의’에서 세계의 평화를 개척하겠다는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워, 자위대가 사실상 세계 곳곳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미국을 후방 지원할 수 있다는 기존의 좁은 원칙에서 ‘미일안보조약’에 기여할 만한 국가, 한마디로 미국과 일본의 동맹국이 위협을 당하면 일본 군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해둔 것이다. 기존 일본 중심의 ‘개별적’ 자위권에서, 동맹국까지 포함하는 ‘집단적’ 자위권 개념을 내세워, 일본 정권의 의도에 따라 자위대의 무력 혹은 무기사용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한 것이다. 2016년 총선 결과에 따라 현행 헌법, ‘평화헌법’마저 수정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니, 아베 정권의 선전과는 반대로, 일본의 군대가 과연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보전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이러한 때, 무력의 행사를 포기하고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나라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는 현 일본국헌법 9조를 지키려는 일본 내 시민운동은 가상하고 의미 있다. 그리고 헌법 9조를 지키려는 일본 시민단체와 연대해 헌법의 평화적 정신을 국내외적으로 알려나가는 일도 주변국에서 할 수 있는 효율적인 협조 수단이 된다. 일본국헌법 9조에 노벨평화상을 청원하는 운동이 그 좋은 대안이다. 실제로 2014년 일본국헌법 9조는 유력한 노벨평화상 후보였다가, 사람이나 단체로 수상 자격을 제한하는 노벨평화상 규정에 맞지 않아 최종 탈락한 적이 있다. 사진 출처 - 레디앙 그러자 한국에서는 올해 이홍구 전 총리, 이부영 전 의원 등의 주도로 원로 정치인과 교수 등 50명이 헌법 9조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고, 국회의원 140명이 “‘헌법 9조에 노벨평화상을’ 실행위원회”의 취지에 동의하는 서명을 해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일본에서는 대학교수와 국회의원들 84명이 “일본국헌법 9조”와 “헌법 9조를 지키는 일본국민”들을 2015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고, 현재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에 평화상 후보로 접수된 상태이다. ‘일본국헌법 9조’와 ‘헌법 9조를 지키려는 일본국민’이 실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동북아는 물론 세계 평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집단자위권을 정당화시킨 개정 안보법안이 폐기될 가능성도 별로 없고, 도리어 이 기회를 노려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할 공산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에 대한 염원이 비할 바 없이 소중하다는 여론을 전 세계인에게 각인시키는 계기는 분명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전쟁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고 현재 수준의 평화라도 유지하려는 일본 국내외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또 노벨상을 받는다고 해서 한국인이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리어 큰 박수 소리로 환영할 일이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10월 9일에 발표될 예정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9월 2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82 | 추천: 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큰애 담임선생님을 두고 학부모 몇 명이 해임을 요구했다. 교장실을 방문해 육박했다는데, 그 이유로 11개조를 제시했다고 들었다. 금품수수, 불법찬조금 모집, 차별대우 등의 내용이었단다. 금품수수? 그 중 두 명이 각각 옷과 화장품을 내밀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받았다고 한다. 불법찬조금이라면 나도 안다. 학생들이 2박3일 여행을 갈 때 간식비 등이 필요하다고 해서 기꺼이 냈다. 급식 모니터링이며 교통지도며, 학교엔 이런저런 눈길과 손길 필요한 데가 많다. 직장 다닌다는 이유로 그런 일을 면제받다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돈 자랑인지 모르겠지만, 대신 학급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좀 과하다 싶게 열정적인 타입이다. 시험 전날 밤이면 학생들에게 일일이 전화하고, 학교 행사도 꼬박꼬박 챙긴다. 애들 사진도 자주 보내준다. 사실, 나처럼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한 성격으로선 좀 버거웠다. 말도 어찌나 직설적인지 딱 한 번 학부모회에 갔을 때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남학생들은 무난한 것 같은데 여학생들 문젭니다. 얌체가 너무 많아요. 제 것만 챙겨요. 그럼 안 됩니다!” 아이도 힘들어했다. 숙제도 많고 일도 많으니 나중엔 불평도 했다. “공동체란 말이 싫어졌어요.”라고도 했다. 담임선생님은 심지어 교실 앞에 본인 사진을 걸어두기까지 했단다. ‘내가 늘 너희를 보고 있다’는 표식이라며. 요컨대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인 교사였다. 학부모 몇 명이 단도직입 해임을 요구했다는 소식은 그래서 뜻밖이었다. 귀가 어두워 며칠 후에야 들었는데, 바로 그 날 교장선생님이 학생들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긍정적 응답이 많을 테니 그걸 증거 삼아 학부모 요구를 물리칠 요량이었는데, 의외로 다수 학생이 담임 교체를 바란다고 적어냈다고 한다. 그때부터 문제가 더 불거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담임선생님을 옹호하는 이들에 따르면, 문제 제기하고 나선 학부모 중 일부는 열성적 임원이었단다. 학교에 붙어살다시피 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데도 담임선생님이 자녀를 꾸짖고 못마땅해 한 탓에 마음을 다친 것 같다고 한다. 좀 시간이 지나자 그 자녀들이야말로 문제라는 사람들이 나섰다. 교사 말을 우습게 알고 급우들에게도 함부로 대한 게 학교폭력으로 문제 삼아야 할 정도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학부모들이 방문한 예의 그 날 학생들이 담임선생님 사진을 떼어 내 쓰레기통에 버렸단다. 당연히 몇 명이 주동했을 테고 대부분은 어리둥절한 채 지켜봤을 거다. 지금은 그 학부모 중 한두 명이 출근하다시피 교실을 감시하고 있다고 들었다. 담임선생님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다는 거다. 부담임 교사가 업무를 대신하고 있다는데, 그런 지 1주일여다. “교장선생님은 왜 이대로 계신 거예요…?” 교육청에 고발할 테면 하시라, 강경하게 나서도 될 것 같은데 분위기가 묘하다. 글쎄요, 교육청 감사 나오고 해서 학교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 같아요. 은퇴 앞두고 있는데 말썽이 싫으시겠죠. 전화라도 한 통 하고 싶지만 당최 사정에 어두운 터라 조심스럽다. 기껏 담임선생님에게 소심한 문자를 넣는다. 선생님, 모든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되길 빕니다. 마음 너무 다치지 마시고요.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문제 제기한 학부모들은 나름의 정의감이 충천한 모양이다. “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문자가 돌았다고 한다. 다른 한편에선 그 자녀들을 겨냥한 분노가 자라난다. 담임 교체까진 혹시 몰라도 그런 학생들이 기승스러운 교실에 애들을 둘 수 없다는 거다. 학교폭력에 대한 증언이 모이기 시작하고, 최악의 경우 차라리 아이를 전학시키겠다는 학부모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직 중학생들이다. 교실은 지금 어떨까. 어떤 악의와 혼란이 번지고 있을까. 학부모들도 난장이다. 문제 제기한 학부모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고, 담임 해임이나 교체라니 말도 안 된다며 강경한 사람들도 있고, 상당수는 주저주저, 무기력하게 걱정하는 걸로 시간을 보낸다. 선생님도 걱정되고 아이들도 걱정되고 물의를 일으킨 학부모들마저 걱정된다. “휩쓸리지 말고, 차분히 보렴.” 기껏 아이에게 한다는 말이 이 따위라니. 2015년 가을, 대한민국의 어느 평범한 중학교.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9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7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