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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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신영복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어느새 두 달이 훌쩍 지났다. 장례를 치루면서 3킬로 정도 빠졌던 내 체중도 다시 원 상태로 회복되었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늘 하던 대로 그럭저럭 살아간다. 여전히 ‘신영복 선생님 안 계신 세상’에 산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언제든 전화 드리면 반갑게 받아주실 것 같고, 찾아뵈면 늘 그랬듯 정감어린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주시고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나를 웃겨 주실 것 같다. 영결식 날 김제동 군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냥 선생님 안 돌아가신 걸로, 늘 곁에 계신 걸로 생각하며 살고 싶다”던 말.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서너 군데 언론사에서 추도사를 청탁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추도사란 어느 정도 객관적 거리를 가진 사람이어야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 선생님을 부모처럼, 스승처럼, 형님처럼,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사실 상주나 다름없는 처지였으니 추도사를 쓸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 두 달이 넘어 지나 조금은 마음을 추스르고 신 선생님에 대한 개인적 추억을 떠올리며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지난 20년 성공회대에서의 내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신영복과 함께 한 삶’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이 학교를 사랑하고 이 학교의 일원임이 자랑스러웠던 이유를 단 하나만 대라면 여기 신영복 선생님이 계시고, 내가 바로 그 분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이었다. 나는 늘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도우려 했고 가시는 길에 동행하고자 했다. 선생님은 모자란 나를 마다하지 않고 받아주시며 함께 해 주셨다. 하지만 언제나 지나고 생각해 보면 내가 신 선생님을 도운 게 아니라 그 분으로 부터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받은 것임을 깨닫곤 했다. 신 선생님이 아직 퇴임하시기 전, 매일 아침 학교에 나오면 선생님 연구실에서 차를 마셨고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교수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어울리는 대화 소재를 갖고 계셨고 수많은 고전의 구절들과 징역살이의 일화들을 통해 숱한 배움을 주셨다.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지식과 기억들을 간직할 수 있을까, 늘 경이로웠다. 선생님은 어느 자리에서든 제일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며 우리를 웃게 하셨다. 선생님과 함께 한 날은 딱 그만큼 즐거웠고 안 계신 날이면 딱 그만큼 허전했다. 수요일에는 함께 축구를 했다. “감옥살이 20년만큼 나이에서 빼야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싶을 만큼 선생님은 건강하셨고 축구 솜씨도 빼어났다. 우리 축구단은 선생님이 즐겨 쓰시던 붓글씨의 글귀를 따 ‘여럿이 함께’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내가 신영복 선생님과 함께 축구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라며 부러워했다. 사진 출처 - EBS 신 선생님 정년퇴임 무렵부터 동료 교수들과 함께 선생님으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나는 수제자를 자처하며 서예회장을 맡았지만 재주도 없는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제자들이 선생님의 깊고 넓은 서도(書道)와 서예(書藝)의 경지를 흉내조차 내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할 수 있었지만, 그건 모두 게으른 제자들을 독려하며 한 자 한 자 써주다시피 하신 선생님의 헌신 덕분이었다. 물론 장학금의 대부분은 신 선생님 작품의 판매를 통해 얻어진 것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신 선생님이 퇴임하신 후 마지막 몇 년 간 인문학습원과 강연콘서트를 통해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영광이자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습원 일을 선생님 곁에서 조금씩 돕기 시작하다 결국은 내가 인문학습원장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밤늦게 강좌가 끝나고 나면 내 차로 선생님을 댁까지 모셔다 드렸다. 언젠가 내 차를 타고 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타면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을 붙여서 피곤한데 김 선생 차를 타면 아무 말 안하고 갈 수 있어 편해요.” 무뚝뚝하게 앞만 보며 운전하는 내 성격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선생님은 언제 누구와 함께 하든 상황에 가장 적합한 말씀으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시곤 했다. 2009년 무렵부터 선생님과 더숲트리오가 함께 하는 강연콘서트를 다녔다. 두 번의 전국 투어를 포함해 수십 번은 더 다닌 것 같다.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였다. 선생님은 늘 진심을 다해 강연하셨고 강연 끝내고 피곤하신 가운데에도 싸인을 받고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 주셨다. 강연콘서트를 함께 다니며 선생님의 강연을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선생님의 강연은 듣고 또 들어도 매번 재미있고 감동적이어서 똑 같은 얘기에 똑 같이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짠해지는 경험을 숱하게 했다. 지방 강연을 가면 늘 선생님과 내가 한 방을 썼다. 그렇게 오랜 세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이 허튼 소리를 하시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늘 단정하고 겸손하고 누구에게든 진심과 배려로 대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수양, 어느 정도의 내공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감탄하곤 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거동 못하고 누워계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마비가 다리 쪽부터 위로 올라오고 있어. 이제 가슴까지 왔네. 얼마나 다행이야. 위에서부터 내려오지 않는 게.”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 신영복 선생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눈과 삶의 태도를 새롭게 가다듬게 만드는 수많은 지혜를 남기신 사상가셨다. 언젠가 선생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 친구가 되지 못하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되지 못하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말씀. 그 분은 내게 최고의 스승이고 최고의 친구였다. 지난 1월 15일 나는 최고의 스승과 최고의 친구를 한꺼번에 잃었다. 그 빈 자리는 아마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성공회대학보(vol.270)에 실린 ‘신영복 선생님을 추억하며’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11 | 추천: 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신과 전문의 대부분이 절대로 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하는 푸닥거리를 꼭 해야 한다고 홀리는 자가 있다면 선무당이거나 사이비 의사일 가능성이 높다. 선무당이나 사이비 의사는 십중팔구 사람을 잡는다. 역사학 분야의 전문가들 대다수가 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국정화'를 곧 죽어도 해야 한다고 우기는 자가 있다면, 모리배이거나 얼치기 어용일 개연성이 크다. 모리배나 얼치기 어용은 십중팔구 사회를 망친다. 잡기는 쉬울 지라도 살리기는 어려운 게 사람 생명이듯이, 무너뜨리긴 쉬울 수 있어도 다시 세우긴 힘든 게 사회 윤리요 정의다. 그럼에도 '정치 선무당과 모리배'들은 남들이 죽건 말건, 세상이야 어찌되건, 역사가 퇴행하건 말건, 제 잇속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투로 극성스럽게 패악을 떤다. “함께 모인 사람들을 갈라놓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면,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분열의 씨가 뿌려질 수 있다면, 또한 권리나 이해의 대립을 통해 상호 불신과 증오를 불어넣어 여러 계급을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조장하는 통치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무질서와 변혁 속에서 전제군주제는 그 추악한 머리를 서서히 쳐들어, 국가의 어느 부분에서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짓밟고 공화국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전제 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올바름이나 의무는 이미 사라지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주경복, 고봉만 옮김, 책세상)의 끝자락에 나오는 언설이다. 앙시앵레짐의 폐단과 통치 집단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루소의 이런 언술에서 1756년 프랑스만이 아니라 2016년 지금 여기의 현실을 본다. 오호(嗚呼) 통재(痛哉)라! 오호 애재(哀哉)라! 아니, 혹세무민의 모리배들을 놓고 굳이 18세기 프랑스를 떠올릴 필요도 없겠다. 구한말, 이 땅의 언필칭 ‘통치계급’의 시나리오를 떠올려볼 수도 있으므로. "실정과 졸정 그리고 폭정과 악정을 거듭한 끝에, 밑으로부터 오는 심판을 두려워한 나머지, 본인들의 파멸을 면하기 위해서 차라리 나라를 파멸시켜 버린다는 시나리오"를(최인훈, 『바다의 편지』).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는 이유의 일단은 이런 “두려움”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라고 시나리오를 써보자). 권력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은 다를 수 있다는 것, 집권층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역사에서 배운 시민들이,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국가의 헌법마저 훼손한 '지배세력'을 심판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렇다! 앉으나 서나 뭐든지 '남 탓'만 하는 정치권력은 역사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서…>,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팔아서…>, <청년들 눈이 높아서…>, <여성이 출산을 기피해서…>, <노동자 임금이 높아서…>, <교사와 교수들이 좌파여서…>, <학생들이 물들어서…>, <농민이 시위를 해서…> 따위의 생각밖에 못하는 소아병적 집단이라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역사(교육)을 두려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진 출처 - 헤럴드경제 “너희는 '나라의 하인'일 뿐이다. 소수에 불과한 너희들 잇속 두둑하게 챙기자고, 닥치는 대로 매도하고 내동댕이친 다수의 시민-부모-청년-여성-학생-노동자-교사-학자-농민이야말로 국가의 주인(주권재민!)이로다!”라고 읊조리는 역사 가라사대를 지배집단이야 좋아할 턱이 있겠는가? 자신이 잘나서 지배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하인(=국가의 공복)이고, 종 부리듯 막 대한 국민이 진짜 주인이라고 언술하고 떠들어대는 역사라니, '이런 젠장,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라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제에 진짜 주인을 물리고 주구장창 주인해 볼 욕심으로 '역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라고 쓰고, '내 맘대로 뜯어고치기'라고 읽는다)를 획책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저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투철한 국가관이 부족하기에 헌법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주인을 기만하고 주인의 생각에 반하는 짓을 하려는 하극상을 벌이는 것이니 국민적 동의를 얻기도 어렵다. 전문 역사가 집단을 무더기로 매도하고 능멸했으니 역사(학)의 지원을 받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람 잡고 세상 망치고 역사를 뒤집으려는 망발을 멈추지 않는다면, 주인들이 줏대 있게 나서서 미쳐도 곱게 미쳐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수밖에는 없지 싶다. 어설픈 ‘종북’ 타령하지 말고 주어진 ‘종복’ 노릇이나 잘 하라고 지도(指導)해줘야 한다. 그리 안 하면 '역사의 멍석말이'를 당하는 법이라고 힘차게 편달(鞭撻)해줘야 한다. 눈 뜨고 못 볼 꼴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루소는 앞서 인용한 구절에 이어서 주인노릇하려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응원한다. “오직 힘만이 지탱하고 있었던 전제군주를 타도하는 것도 힘뿐이다. 모든 일은 이와 같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거의 40년 전에 쓰인 에세이이지만 최인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주객전도의 목불인견(目不忍見)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힘과 슬기를 얻을 수 있다. “*나쁜 과거를 숨기려는 자는 미래를 숨기려는 의도에서다. 그는 반드시 재범한다. *역사란 미래의 희망이다. *바쁜 사람은 역사를 읽을 틈이 없다. 역사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다만 그가 나쁜 역사를 만들고 있을 때가 문제다. *그런 경우에는 그가 죽든지 그를 죽이든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감정이 흐르는 하상」, 『바다의 편지』)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51 | 추천: 0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설날이었습니다. 차례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시쳇말로 ‘노빠’임을 자랑스러워하는 형이 안모 철수 씨 욕을 시작했습니다. 음복을 조금 과하게 할 때부터 약간 불안했던 저는 속으로 ‘이런... 결국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안 모 그 머시기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둥, 깜냥도 안 되는 인간이 정치판에 들어와서는 결국 새누리당에 좋은 일만 시킨다는 둥... 형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가족들이 모처럼 다 모여 있는 설날 아침부터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는 별 수가 없습니다. 입을 다물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척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제풀에 잠잠해질 테니까요.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 장남으로서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요? 어쩌면 형은 조카들에게 무언가 가르치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정의 세력과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악의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멈추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자꾸 반복해서 하는 걸 보면 이제 이야기를 그칠 만도 한데 마무리가 잘 되지 않는지 형은 느닷없이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엄니!” 저희 어머니는 공화당 시절부터 박정희를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분입니다. 지난 대선 때 가족 중 유일하게, 당연히 박근혜에게 한 표를 던졌던 어머니에게는 형이 하는 말이 좋게 들릴 리 없었겠지요. ‘저 놈이 또 저런다’는 표정으로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어머니에게 형이 물었습니다. “엄니는 이번에도 박근혜 당 찍을 거지?” 일찍이 시장통에서 잔뼈가 굵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작을 리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버럭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그래, 왜? 박근혜가 너한테 돈을 달래, 뭘 달래?” 형은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씨익 웃으면서 저와 조카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 거예요.” “꼴이 뭐 어때서? 니 놈이나 정신 차려!” 왜 이렇게 애국자들이 많은 걸까요. 나라 꼴 걱정하다가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박근혜가 얼마나 죽일 X인지에 대해 형이 한 마디 할 때마다 어머니는 빨갱이, 빨갱이 때문이라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두 사람은 점점 어린애가 되어 다투었습니다. 지난 선거 무렵과 거의 같은, 지겨운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장남은 전생에 부부 사이여서 그렇게 애틋하다고 하던데 우리 집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시끄러워!” 형이 나름 조리 있게 설명을 하려고 말수가 많아질수록 어머니의 대사는 단순 명료했고 목소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못 꺾은 어머니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말다툼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너는 니 좋은 놈 찍어, 나도 내 좋은 놈 찍을게! 그럼 됐지?” 백 번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제가 나섰습니다. “자, 자! 이제 그만하면 됐어요. 애들도 있는데....” 저는 형의 손을 끌고 작은방으로 갔습니다. 형은 답답함과 아쉬움이 반반인 얼굴이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제게 하소연하듯이 말했습니다. “너는 내 말 이해하지?” “아무렴 이해하지... 그래도 어머니한테 그러지 마....” “아, 진짜... 우리나라는 노인네들이 문제야...” 형의 나라 걱정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습니다. 그만큼 어머니의 나라 걱정도 대단한 것이었겠지요. 두 달 뒤, 4월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이런 애국적 희극이 또 벌어질 텐데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지난 선거 무렵 몇몇 지인들과의 술자리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재기발랄한 한 분이 우스갯소리로 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를 형에게 했습니다. “그렇게 걱정이면, 선거일에 어머니를 어디 온천이라도 보내드릴까?” 형이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그거 되게 웃긴다.” 형은 실없지만 재미있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설날은 지나갔습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누가 무슨 당을 탈당하느니 마느니 하고, 테러방지법과 필리버스터니 하면서 시끄러워질 때였습니다. 형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야, 그때 어머니 온천 보내드리자고 한 거...” “하하... 그거 왜?” “진짜로 보내드릴까?” 지난 설날 때와는 달리 형은 웃지 않았습니다. 심각하고 진지한 것 같았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76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안녕들 하십니까. 인사를 이렇게 시작하니 몇 년 전 한 대학생이 붙였던 대자보가 생각나는군요. 그때 이후로 거의 모든 상황이 더 열악해 진 것이 분명한데, 다들, 정말, 안녕들 하십니까. 모든 사회가 그렇겠지만, 한국 사회 역시 조용히 흐르던 시냇물이 특정한 국면을 만나 급류로 몰아치곤 합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그러했고, 노동자 김진숙 씨와 배우 김여진 씨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이 그랬죠. 별 것 아닌 것 같은 작은 움직임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공감대를 건드렸기 때문일 겁니다. 요즘엔 누가 만들어냈는지 모르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일종의 정신적 급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결국은 우리 공동체가 내는 사회적 비명인 셈이고,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정치가 작동해야하는 지점일 겁니다. 그러나 제도권 정치가 불구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안으로 곪아가고 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또다시 국내 정치를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인터넷 덕분에 실시간으로 국내 소식을 접하면서도 몸이 떨어져 있으니 체감이 잘 안 되는 게 사실입니다. 전 정권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면서 집권한 박근혜가 선거철이 다가오자 예외 없이 북풍 몰이를 시작한 것도, 안철수가 급기야 야권을 분열시키고 호남 식탁에 숟가락을 얹었다는 소식도 먼 나라 일처럼 느껴집니다. 안철수라는 문제적 인물에 대해서는 몇 해 전 발자국 통신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안철수의 정치가 의심스러운 이유(13/7/3)」(원문보기 클릭) 이 글을 썼을 때가 안철수와 김한길이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들기 한참 전이었는데 이제 두 사람이 ‘더불어’ 민주당을 탈당해 새 정당을 만들었으니 다시 그때로 돌아간 셈이군요. 역시 사람 잘 안 바뀐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합니다. 영남 공략은커녕 야당 텃밭인 호남에서 편하게 시작하려는 ‘범생이’ 정치의 속셈도 여전하고, 애매모호한 중도 전략도 여전하네요. 그런데 그가 국민의당 경제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버니 샌더스와 자신을 비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안철수의 샌더스 ‘빙의’는 소가 웃을 일이지요. 더불어민주당의 오른쪽에서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하는 안철수와 미국 민주당의 왼쪽에서 민주당을 비판하는 샌더스의 정치적 스탠스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샌더스는 부자세 신설과 월스트리트 투기 자본 과세 강화 같은 구체적인 좌파적 공약을 내걸고 있지만 안철수는 여전히 ‘공정성장’ 같은 애매한 수사를 반복할 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국내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만 생략하겠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미국과 한국의 정치 지형에 대해서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 미국 대선은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민주당 후보 버니 샌더스의 ‘이상’ 돌풍 현상으로 요동치고 있습니다. 둘 다 비전형적 정치인들로서 평상시라면 후보조차 되지 못했을 사람들인데, 오히려 각 당의 전형적 정치인들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은 공화당의 전통적인 캐치프레이즈라고 할 수 있지만, 외국인 혐오증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종교적 차별까지 공언한다는 점에서 트럼프는 히틀러의 초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샌더스는 미국 역사에서 사회주의(정확히는 사회민주주의) 이름을 걸고 의미 있는 후보가 된, 과문한 제가 알기론 최초의 사례입니다.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폴 크루그먼(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이자 경제학자) 같은 사람이 샌더스의 공약이 비현실적이라고 강력히 비난하고 나선 걸 보면 힐러리 진영의 위기감을 짐작케 합니다. 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렇게 미국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좌우의 진폭이 큰 상태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민주당 정부 8년에 갑갑함을 느낀 공화당원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면, 샌더스는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으로 대변되는 미국 청년층의 변화의 갈망에 대한 정치적 응답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최소한의 합의 위에서 움직여오던 미국 정치의 갭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미국 사회의 모순이 심화하고 있고, 갈등도 커지고 있는 겁니다. 갈등이 크다고 해서 미국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정치의 본령이 갈등을 푸는 것일진대, 갈등 없이는 정치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적 갈등이라는 게 결국 부의 재분배 방식을 놓고 벌어지는 견해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므로(좌파와 우파의 차이도 여기서 비롯하죠), 갈등이 없는 게 이상한 일일 겁니다. 오히려 엄연히 존재하는 갈등을 은폐하거나 갈등에 대한 논의 자체를 사회악으로 몰아가는 사회가 건강하지 않은 사회겠지요. 한국 사회가 바로 후자에 속합니다. 안철수라는 정치인이 위험한 이유는 그가 갈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통합은 주류이자 우파의 언어입니다. 거대한 사기극이 되어버린 박근혜의 국민대통합 공약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사람이 야당을 택했을까요. 지금 여당이 워낙 후지기 때문이겠죠. 아시다시피, 새누리당은 보수라기보다는, 지역감정에 기생하는 시대착오적인 이익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재야의 현인’이었던 안철수가 택하기에 무리가 있었습니다. 안철수처럼 상식과 합리를 앞세우는 분이 새누리당에 들어갔다면 새누리당이라는 비정상적 집단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는 데 기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안철수 개인으로도 지금보다는 더 성공한 정치인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야당을 택했고, 이 때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갈등의 본질을 은폐하고 흐리는 게 여당의 목적이라면 야당은 갈등을 드러내고 해결을 촉구하는 구실을 해야 하는데 지금 야당은 여당이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견인하고 있는 사람이 안철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물론 문재인의 ‘착한남자 콤플렉스’도 한 몫 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도전쟁을 벌여야 할 만큼 상황이 한가한가요. 부의 집중이나 불평등 정도는 미국이나 우리나 비슷합니다. 이 문제의 해법으로 트럼프는 더 강한 미국을 만들어야 경제도 나아진다는 우파 논리를 펼치고 있고, 샌더스는 부자들과 투기자본의 부를 하향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샌더스의 공약도 매우 단순하고 명쾌해서 과격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안철수가 이런 사정을 알고도 샌더스와 자신을 비교한 건지 궁금합니다. 같은 동네 사는 한 대학 교수는 은퇴 뒤에 이곳 미국에 와서 살겠다고 공언하더군요. 한국 정치에 미래가 보이지 않아 돌아가기 싫다는 겁니다. 자민당이 장기 집권한 일본처럼 한국도 정말 새누리당의 장기집권으로 가는 걸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끝은 부의 집중 심화와 일본식 장기불황이 될 겁니다. 일본은 그나마 제조업체들이 탄탄하게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버티고 있지만, 우리 경제는 4대재벌과 몇 개 공기업을 빼면 거의 빈 깡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식 저성장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가계부채의 뇌관을 건드리는 재앙적 붕괴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이 부러운 건 여전히 갈등하며 토론하고 해법을 찾느라 분주하다는 겁니다. 젊은층의 목소리도 확실한 방향성과 힘을 갖고 있습니다. 200살이 넘은 미국이 70살도 안 된 한국보다 더 젊어 보입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확실히 보수적이고 노인스럽습니다. 정치든 경제든 외교, 대북정책이든 새로운 발상이나 시도는 보이지 않고 과거로 급격히 퇴보하고 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10년 집권이 남긴 유산이겠지요. 한국 사회가 다시 젊어지려면 청년들의 목소리가 커져야 합니다. 한국의 조로증은 386세대의 노화와 관련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때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386의 정치실험은 ‘정신적 386’인 노무현의 퇴임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386을 포함한 기성세대에게서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미국의 청년들처럼 한국의 청년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직접 찾아내야 합니다. 앞에서 샌더스가 미국 청년들의 변화의 갈망에 대한 정치적 응답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표현을 좀 더 정확히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샌더스가 응답한 게 아니라 미국 젊은이들이 샌더스를 찾아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샌더스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일을 해왔고 그를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불러낸 건 불평등에 분노한 미국의 청년들입니다. 이런 걸 시대정신이라고 하죠. ‘안녕들하십니까’ 운동에서 청년들이 보여줬던 날카로운 시대정신이 정치의 영역에서 발휘되길, 그리하여 이 답답한 정치판을 확 쓸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져주길 바라는 수 밖에요. 조로한 서생의 소심한 바람입니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2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30 | 추천: 0
- 최선을 다했다는 정부와 대통령 작품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본군이 조국의 처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 성노예로 부려 먹은 만행의 죗값은 얼마나 될까요. 한마디로 성노예 위자료를 총 10억 엔으로 합의했으니, 한국 돈으로 약 100억 원 정도죠. 일본 학자에 따르면 일본군이 성노예로 짓밟은 숫자는 최소 5만 명 내지 20만 명 정도이고, 약 52%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조국 처녀 성노예 1명당 40만 원 내지 10만 원이 현재 화폐로 환산한 죗값이라는 계산이랍니다. 10만 원에 팔아넘긴 당신들 죗값은 얼마나 될까요. 조국을 팔아넘긴 이완용 같은 놈이 더 나쁜 놈일까요. 누가 더 나쁜 놈일까요. 무슨 놈의 돈으로 환산하느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현 헌법과 법률에 따라 법원은 사람의 목숨 값과 죄의 값, 위자료를 모두 돈으로 환산하여 판결하니까요. 그리고 빌어먹을 법을 공부한 나도 법대로 말하는 것이니까요. 대통령이 최선을 다했다고 목소리를 높이시는데, 그 결과가 성노예 1명당 10만 원이 맞습니까. 최소한의 법원 판결 위자료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금액이라는 것은 아시나요. 4·16 세월호 참사에서 매몰차게 국민의 생명을 헌신짝만도 못하게 내 던지는 당신들 모습을 목도하였기에 국민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환상 따위도 집어 치운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팔아먹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억울해서 눈물도 메말라 버린 나이 드신 할머니들 팔아먹지 말고, 나 같은 놈들이라도 팔아서 국고에 보태 쓰는 것이 더 실속 있지 않겠습니까. 이 정부는 성노예 1명당 위자료 10만 원에 팔아넘기면서 국제협약도 지키지 않았는데, 그 죗값은 또 얼마일까요. 정부를 대표하신 윤병세 고관대작께서는“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 마침표를 찍고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고 의연하게 말씀하셨네요. 윤병세 나리. 혹시‘전쟁범죄와 인도의 죄에 대한 시효부적용에 관한 협약’이나 ‘인신매매금지 및 타인의 매춘행위에 의한 착취금지에 관한 협약’은 아시나요. 국제 협약에 성노예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합의하라고 적혀 있던가요. 합의하면 끝난다고, 그것이 가능하던가요. 성노예 문제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중국, 동남아시아 각국도 모두 피해자인 사실도 아시지요. 그런 피해 국가들로부터 합의하라는 위임이라도 받으셨나요. 왜 권한 없이 국제문제에서 피해 국가의 권한과 자존심까지 짓밟고 난리입니까. 성노예 1명당 10만 원에 팔아먹더라도 명색이 국가이고 정부이니 법은 당연히 지키고, 피해자 국가들의 자존심도 존중해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힘없는 시민들한테는 법치주의, 법치주의 하면서 왜 당신들은 법도 지키지 않는 겁니까. 평화의 소녀상 사진 출처 - 주간경향 대통령과 고관대작 나리들. 당신들이 성노예로 인격말살을 당한 피해자들에 대해 최종적으로 해결했으니,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까. 피해자들로부터 위임을 받아서 당신들이 합의했다면 그래도 자격은 있겠지만, 고관대작들께서 합의에 대한 위임을 받은 사실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합의 주체로서 자격도 없어서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 아시지요. 또 고관대작 나리들이 정부를 대표하면 대표하는 것이지, 당신들이 무언데 일본대사관 앞에 민간단체들이 세운 소녀상에 대해서까지 왈가왈부 합니까. 당신들이 무슨 자격이 있는가요. 소녀상이 정부 소유입니까. 그러니 이것도 원천무효라는 것 아시지요. 과거에 잘못하였으니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없지 않습니까. 일본 아베 총리가 진정으로 사죄를 한 사실은 있습니까. 앞으로 또 다시 그런 만행을 저지르면 그때도 1명당 10만 원에 팔아넘기고 땡처리 하실 겁니까. 국민을 팔아넘기는 자와는 천 년이 지나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가로, 국민을 팔아넘긴 역사의 죗값은 얼마인지 당신들이 계산해서 내역서를 제출해 보시지요.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월 2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70 | 추천: 0
- “아직은 할 일 있어 못 죽겠다고 전해라.”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헬조선(hell 朝鮮)」 ‘야…! 누가 만들었을까, 이 말?’ ‘헬조선’이라는 말을 처음 대하는 순간 찬탄과 함께 궁금증이 일었다. 21세기를 10여 년 경과한 현재 한국 사회를 이처럼 교묘하면서도 적확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정말 궁금해서 몇 날 며칠을 시간 날 때마다 인터넷이나 SNS 등을 뒤졌다. 2012년 6월경에 처음 등장한 인터넷 신조어라는 사실까지는 어떻게 알아냈지만 이 기막힌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특정 사이트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국민적 유행어가 된 ‘헬조선’ 신드롬에 대해 어떤 이는 '노력하지 않는 이들의 과장된 엄살'이라 평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삶의 위기에 처한 젊은이들의 절절한 구조 요청'이라고도 한다. 내 생각은 후자에 가깝다. 토마스 홉스(T. Hobbes)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갈수록 벗어나기 힘든 현실이 되면서 우리 삶에서 ‘인간미’가 사라지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더불어 살아가던 그 ‘인간’ 말이다. 인간 간의 유대는 점차 상상하기 어렵게 되고, 그래서 각자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절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오로지 권력과 자본만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숨 막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은 현실은 젊은이들의 73%가 ‘탈(脫)조선’, 한국을 떠나고 싶도록 만드는 게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을 대면하면서도 '청년들이여 도전하라', '진취적인 젊은이가 되라'는 등의 멘토링이라니…. 그러나 이 말은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모순을 은폐하려는 논리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기성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면서 젊은이들을 어루만져주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삶의 만족도 117위. 이라크나 남수단과 같은 나라보다 더 낮은 수준 때문에 ‘헬조선’을 외치며 ‘탈조선’만을 꿈꾸는 현실. 2014년도 현재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 수는 2만 명이었지만 한국국적을 포기한 사람이 5만 명을 넘어선 것도 이 같은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탈조선’의 일환으로 호주나 캐나다 등지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그러나 그런 시도조차 못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우리의 가까운 현실이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지잡대'라는 말이 이러한 현실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말 그대로 지방의 잡스러운 대학을 줄인 단어다. 이미 관용어가 되다시피 한 이 말에는 대학 서열화가 낳은 비아냥과 패배주의 등 우리 사회의 모순이 짙게 배어 있다. '지잡대'는 요즘 유행하는 ‘수저 계급론’으로 보면 '흙수저'에 해당한다. ‘헬조선’에서도 맨 밑바닥인 셈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헬조선의 젊은이들 중에서도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대학을 나온 이들이 겪게 되는 몇 겹의 절망이 '지잡대'를 만들어낸 배경이다. 어떠한 모습의 발전도 결국 사람이 이뤄내는 일인데 지역 인재들이 모두 서울로 가 버리고 지방대 졸업생조차 서울로 갈 수 있는 기회만 엿보고 있는 상황. 문제는 현재의 격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에 있다.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고 한국을 탈출하는 것이 꿈을 위한 도전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탈출이기에 더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 누구나 탈출을 꿈꾸는 세상. 하지만 각자가 꿈꾸는 그런 탈출이 가능할까. 역으로 굳이 그런 탈출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가능한 것일까.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 먼저인가, 탈출을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 먼저인가. 결국 내 고민의 지점은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헬조선’의 현실 속에서 혼자서는 아무리 ‘지◯발광’을 해봐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그것이 우리가 겪어온, 지금도 겪고 있는 생생한 현실 아닌가. TV나 영화 등 매스미디어에서는 ‘흙수저’들의 절망과 분노를 미끼로 ‘정의의 사도’나 예의 ‘신데렐라’를 양산해내고 있지만, 그 또한 해당 매체 앞에 앉아있을 때뿐이다. 절망은 더 깊어진다.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심연이 더 크게 자각될 뿐이다. 결국 죽지 않는 한 ‘도망갈 데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기에, 그냥 죽기는 너무 억울하기에 ‘탈조선’의 대열에 끼어보려고도 하나 그마저도 쉽지 않다. 왜 이럴 때 영화나 드라마 속 단순한 장면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깊은 구렁이나 함정에 빠진 주인공이 제 힘으로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는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어깨를 받쳐주는 조력자나, 줄이나 사다리를 내려주는 이가 등장한다.(007시리즈의 경우만 빼고.) ‘나’ 이외의 ‘타자’, 그것도 나 혼자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바꿔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전제될 때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물론 그것이 해피엔딩을 보장해주진 않지만.) ‘나’의 문제를 나 혼자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또는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게끔 조작된 현실이 오늘의 ‘헬조선’이다. 사람이란 원래 더불어 살아가게 지어진 존재임을 망각하게 만들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을 부추기는 게 오늘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자본주의다. 이제, 지금 이 자리에서 ‘탈조선’의 씨앗을 찾아보자. 나를 도와줄 우군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없다면 지금부터 만들면 된다. 한 사람의 우군 정도는 만들 수 있도록 지어진 존재가 사람이다. 그런 다음은, 그런 우리끼리 연대의 고리를 맺어가는 것이다. 이 연대의 고리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탈조선’을 위해 딛고 설 사다리는 강고해진다. 이 연대의 폭을 넓혀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참여와 소통이 전제돼야 한다. 현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힘들어하는 ‘나’ 같은 ‘나’를 발견하고 먼저 다가가는 길이 참여의 첫걸음이다. 수많은 좌절과 슬픔으로 빚어진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보자는 말이다. 까짓것 죽기밖에 더할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솔직히 용기 내기가 쉽진 않다. ㅋ.. ‘탈조선’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던지고 싶다. 아니, 함께 외치고 싶다. “아직은 할 일 있으니 못 죽겠다고 전해라.”, “내가 희망이 될 터이니 걱정일랑 잠시 제쳐두라고 전해라.” 이 글은 2016년 1월 1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63 | 추천: 5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법 철학자 칼 슈미트는 “주권자는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규정한 바 있다. 주권자, 다시 말해 권력자는 “긴급 상황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평정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한다.” 권력자는 어떤 상태를 예외 상태로 규정하고 그 상태 ‘밖’에서 그 예외 상태를 판단하고 평정하려 할 뿐이다. 그래서 가령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등 있어서는 안 될 예외적인 사건들이 벌어져도 권력자는 그 사건 ‘밖’으로 물러나 있다. 설령 일말의 도덕적 책임은 느낄 수 있을지언정, 법적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처럼 예외를 몰아붙여 일상으로 여기게 하기도 한다. 2015년 12월 29일, 한국과 일본의 외교장관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합의문의 관건은 “이번 발표를 통해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대단히 비약적인 문장에 있다. 수십 년 이상 거의 전 국민적 관심사로 작용해오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마치 특정인이 일거에 처리할 수 있는 간단하고 예외적인 일인 냥 단번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합의문이 나오게 된 ‘배경’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윤병세 외교부장관이 발표한 경위서에 따르면, “지난 11.2 한·일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님과 아베 총리께서 ‘금년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라는 전환점에 해당되는 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조기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협의를 가속화하자’는 정치적 결단을 내려주셔서” 양국 당국자 간 협의를 통해 이런 합의문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요미우리신문」에 의하면, 아베 총리가 기시다 외무상에게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이라는 문언이 들어가지 않으면 교섭을 그만두고 돌아오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정치적 책임자들이 결단하자 단박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이 되었다고 말하는 셈이다. “체포되는 순간 정확히 판결이 내려졌다”는 법학자 살바토레 사타의 말과 거의 같은 구조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사건의 당사자가 완전히 빠져있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는 직접 피해자들이고, 관계자들이며, 이 문제 때문에 마음 아파하던 시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피해 당사자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여론 수렴 과정이나 국회에서의 논의도 없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는 합의문이 덩그러니 나오고 말았다. ‘합의’(合意)의 국어사전적 의미가 “사건이나 사고의 당사자가 다른 당사자와 그 사건이나 사고에, 또는 둘 이상의 당사자가 사건이나 사고에 대하여 의사가 합치하다”라면, 당사자가 빠진 합의는 분명히 합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박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언제 위안부 사건의 직접 당사자였던 적이 있던가. 지난 29일 임성남 외교부 제1차관이 한일 회담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연남동 정신대대책협의회 쉼터를 찾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고 있다. 이용수 할머니가 “왜 피해자들과 상의없이 협상을 했냐”며 항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게다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의라면서도 ‘법적 책임’ 문제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 도덕적 책임을 느낀다는 비도덕적인 언사만 포장지처럼 들어있을 뿐이다. 아베 총리가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문구는 들어있지만, 그 마음이 진심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합의문이 발표된 바로 다음날 아베 총리의 부인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이렇게 사건의 당사자도 배제되었고, 법적 배상도 빠져 있고, 진정성 있는 사과도 없는데, 자랑스럽게 합의문이라고 내놓는 일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진심이 아니어도 상관없고, 모순되어도 상관없고, 도덕적 책임을 느낀다는 비도덕적 언사만으로 역사적 사건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해내는 능력은 기묘하기까지 하다. 이런 일은 극복될 수 있을까. 당사자의 일이 당사자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모순은 전복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권력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권력자는 법 ‘밖’에서 긴급 상태를 결정하는 이들로 머물 뿐이다. 모순을 극복해야 할 주체는 모순을 모순으로 느끼는 당사자들뿐이다. 암담하기 짝이 없어도 예외가 상시가 된지 오래인 모순적 상황을 아래로부터 꿰뚫어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도리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2월 3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08 | 추천: 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초등학생인 둘째가 묻는다. “엄마, 태어나서 지금까지 다섯 번째로 잘한 일이 뭐예요?” 음?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니고 다섯 번째? 되물어 봤으나 다섯 번째가 맞단다. 보자… 그럼 처음부터 차례로 헤아려야 할 텐데. 지금까지 젤 잘한 일은 너희를 낳은 거고. “그럼 두 번째로 잘한 일은 아빠랑 결혼한 거?” 에— 에취. 그건 아직 잘 모르겠구나, 얘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애를 낳지만, 새로울 것 없는 그 과정은 낱낱이 경이롭다. 여러 해 전 아이들과 함께 출석한 강연회에서 연사가 불쑥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저기 뒤에 엄마들,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으세요?” 아유, 그럼요, 기꺼이, 몇 번이라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는데 절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주변에서도 다 비슷한 표정으로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내 한계를 초월한 것이라 비교 불가능하다. 목숨을 넘어선 가치를 어떻게 서로 견주겠는가. 아무리 자식을 여럿 두어도 그 열 손가락은 저마다의 무한일 거다. 그러나 한편 그런 개인적 무한은 얼마나 초라한지. 내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애들이 어렸을 적 날 사랑하듯 무조건한, 절대적인, 열렬한 사랑을 바칠 수는 없다. 희미하게나마 계산속도 있고 기대 심리도 있다. 아이들은 강아지 같다. 무조건한 애착으로 양육자에게 매달린다. 그러나 강아지와 달리 인간이 될 존재라, 갓난아이의 애정은 인간의 애정인 양 느껴진다. 부모로부터도 받아본 적 없는 절대적 사랑을 그 작은 존재로부터 받는다고 절감케 된다. 상처가 아물고 마음이 흡족해진다. “고달프고 바빴던 건 맞는데, 그래도 참 좋았단다.” 사진 출처 - 맘앤앙팡 그럼 두 번째로 잘한 일은 뭐예요? 두 번째는 단연, 공부하기로 맘먹은 거지. 운이 좋아서 교수 자리를 얻은 덕이 크겠지만, 공부하고 가르치는 삶은 갈수록 감사하다. 매일 조금씩이나마 문제를 생각하고, 나노밀리미터나마 낑낑거리고 기어가 본다. 보수화되고 심지어 퇴보하는 구석이 있겠으나 나날이 과제를 붙잡고 있는 기쁨이 더 크다. 의대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고 방송국 쪽을 기웃댔던 적도 있다. 공부가 무슨 짝에 소용 있으랴 싶은 건 지금도 가끔 부딪히는 난제다. 다만 이젠 사회적 용법을 따지기 전에 공부가 나를 조금씩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수긍하게 됐달까. 미혹과 비겁과 부조리, 그 원인을 더듬어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은 바뀔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세 번째는?” 세 번째, 세 번째, 세 번째라…. 아, 생각났다! 20년 전쯤이었을 텐데, 노량진역인지 영등포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어. 아마 방송국에서 밤샘 작업을 한 후 집에 가던 중이었나 봐. 낮인데도 걷잡을 수 없이 피곤하고 우울했던 기억이 나니까. 인천행 전철이 도착해 문이 열렸는데, 두어 살 먹었으려나, 아장거리는 아이가 전철에서 내리다 객차와 플랫폼 사이로 발을 헛디딘 거야. 아이가 틈으로 쑥 빠져드는데, 내 생애 최고의 순발력이랄까, 모르는 새 손이 나가 아이 겨드랑이를 잡았다. 망설임 없이 당겨 올려 플랫폼에 올려놓았다. 너무들 놀라선지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곤 전철을 타고, 마침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 인천 집을 향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투명하게 차오르는 만족감에 잠겨서. 부끄럽지만 그게 내 생애에서 생명을 구하는 데 가장 가까운 행위였나 보다. 그렇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를 꼽고 나니 더 생각나는 일이 없다. 다섯 번째는커녕 네 번째도 없다. 일도 어지간히 벌여 봤고 관계도 남부럽잖게 많건만, 지금까지 해온 건 다 뭐라지? 아이 낳고 공부하고, 그렇듯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만족 외에 자랑 삼을 수 있는 게 딱 하나, 전철역에서 우연히 아이 겨드랑이를 잡아 올린 거라니. 그러나 그 밖의 일은 아무래도 헛갈린다. 가치에 대한 확신도, 지속되리란 믿음도 없다. 새해엔 몰라도 종생할 때쯤엔 다섯 번째로 잘한 일까진 채워야 하지 않을까. 고작 다섯인데. 둘째가 던진 질문을 미뤄놓고 생각해 본다. “엄마가 나중에 얘기해 줄게. 나중에. 근데 넌 대체 다섯 번째로 잘한 일이 뭐냐?”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2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805 | 추천: 3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즘 변호인으로서 국가정보원을 거의 한달 째 내 집처럼 드나드는 일이 생겼다. 국정원발 국가보안법위반 사건 때문이다. 종북몰이 정권의 노동개악 시도에 맞선 민중총궐기 배후로 몰아가고 있다. 극우보수세력은 정치적 위기 때마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효과를 노리려, 국가정보원을 내세워 그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절대무기인 국가보안법을 휘둘러 왔다. 그 전처를 밟아 지금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국가정보원에 맞서 함께 싸우는 이들이 많아졌다. 국가정보원 간첩 조작 사건을 극복한 힘이 생겨서인가 보다. 자기도 다칠세라 위축되거나 회피하는 현상을 보며 씁쓸해하던 기억이 많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적극적으로 국가보안법과 국가정보원에 맞서 대응하는 힘이 놀랍다. 이제 곧 이 비극의 분단체제를 극복할 커다란 힘도 생겨나리라는 확신이 든다. 지금 국가정보원 청사 피의자신문 조사실에서는 국가정보원 수사관과 피의자 및 변호인 사이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곳은 여전히 피 말리는 현장이다.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은 피의자신문 과정에서 피의자가 자세가 불편하여 다리를 꼬고 앉았다는 이유로 “다리 꼬지 마라, 예의를 지켜라”고 시비를 건다. 국정원 수사관에게 피의자의 신체를 통제할 권한은 없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받는 피의자는 수사관과 상명하복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피의자가 편안한 자세로 앉는 것조차 제지한다. 불구속 피의자가 변호인의 사정으로 함께 오전 조사를 마치고 조사실에서 퇴거하려고 하자, 난데없이 수사책임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성명과 직위는 끝까지 밝히지 않으면서 “오후까지 조사하려 점심을 준비했다. 식사하고 오후에도 조사하면 안 되나. 앞으로 국정원밥 많이 먹을 텐데...”, “저 사람이 여기에 왜 왔겠냐. 켕기는 게 있으니 온 게 아니냐”, “당당하면 안 오면 되는 것 아니냐” 등의 말을 하여 변호인이 “그렇다면 안 와도 된다는 말이냐”고 하자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체포영장 발부해서 구속하겠지”라고 태연히 대답한다. 그리고 피의자에게 “어차피 묵비할건데 변호사 보내고 오후에 조사 계속하면 안 되냐”고 다가서 권유하기도 하며 당사자를 위축시킨다. 수사책임자라는 성명 불상의 수사관이 갑자기 나타나 퇴거의 자유가 있는 피의자와 변호인을 상대로, 피의자가 마치 유죄인 듯 단정하며 체포 또는 구속을 시키겠다는 취지의 협박성 발언을 하며 성명 및 직위조차 알려주지 않고 사라진다. 이것은 피의자와 변호인을 상대로 대놓고 인권을 유린하는 위법행위를 저질러도 자신의 성명과 직위를 알수 없어 직접적인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한 행위로 필히 금지되어야 한다. 변호인을 대동하여 피의자신문을 받기 위해 수사기관에 출석하였고, 스스로도 변호인의 조력 하에 조사받겠다는 의사를 밝힌 피의자에게 변호인을 보낸 다음에도 변호인 참여 없이 계속 피의자신문을 받으라고 권유하는 것은 결국 피의자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오후 조사’, ‘국정원밥 많이 먹을 텐데’라는 말을 듣는 피의자로서는, 자주 소환되어 조사 도중 식사를 해야 할 정도의 장시간에 걸쳐 수사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의 말만 들어도 충분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다. 더욱이 국정원 수사관이 피의자를 유죄로 단정하고 마치 스스로도 죄를 인정하기 때문에 출석요구에 응한 것인 양 모욕하는 발언을 하며 국가정보원의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신체를 구속당할 것이라는 내용의 발언은 피의자에게 충분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다.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은 변호인이 국가정보원에 도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신문 시 변호인 참여를 요구하는 구속 피의자를 상대로 변호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피의자를 기망하여 변호인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문을 강행하였다. 변호인의 필연적인 사정상 변호인들이 피의자신문에 참여할 수 없거나 변호인들이 피의자신문 참여 중 퇴거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속된 피의자가 일체의 진술거부권 행사 의사 및 변호인 참여 하에서만 피의자신문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명백히 하였음에도 변호인이 참여할 수 있는 기일로 피의자신문 기일을 변경하거나 피의자신문을 마치고 다시 변호인의 참여가 가능한 기일로 피의자를 소환하는 등의 조치 없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피의자를 상대로 변호인의 참여 없이 장시간의 신문을 강행하였다. 헌법이 보장하는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고 변호인 참여 하에서만 조사받겠다는 구속된 피의자를 장시간 신문장소에 강제로 머무르게 하고 변호인 참여 없이 피의자신문 문답을 계속한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피의자의 자백을 강요하는 방법 외에는 물적 증거의 확보, 참고인 조사 등 실체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수사방법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국정원 수사관들은 변호인들과 기일이나 시간을 조절하여 조사시각을 정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피의자를 강제로 인치하여 변호인들이 그 시간에 참여할 수 없더라도 피의자신문을 강행하였다. 그들은 변호인들에게 공동변호인의 수가 네 다섯 명이나 되면서 조사 참여가 가능한 변호사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출정을 거부하는 구속 피의자를 강제인치하여 일방적으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구속 피의자가 변호인의 참여 없이 조사받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하였으나 포승줄과 수갑으로 묶어 조사실로 끌고 가 강제로 자리에 앉힌 다음 조사를 시작하며 질문을 계속하여 진술거부권을 포기하도록 압박하였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형사소송법 제244조의 3 제1항 제4호는 피의자의 권리로서 ‘신문을 받을 때에는 변호인을 참여하게 하는 등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열거하고 있는 바, 이는 단순히 피의자신문 이전에 피의자에게 이를 고지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피의자가 변호인의 참여 하에 신문을 받겠다면 변호인과 연락하여 그를 조사장소에 오게 하든가, 변호인과 시각을 협의하여 피의자신문기일을 새로이 정하든가 하여 실질적으로 피의자에게 변호인의 조력을 받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헌법 제12조 제4항의 변호인의 조력은 “변호인의 충분한 조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술거부권 행사 의사를 밝힌 피의자에게 질문을 계속한 것은 국정원 수사관이 수사에 관한 권한을 남용하여 진술할 의무 없는 피의자에게 진술을 하게 하였다거나, 진술거부권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다.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은 지금 변호인을 상대로 이중 보안검색을 강요하고 있다. 변호인이 국가정보원 청사에 도착하여 면회실에 설치된 보안검색절차를 샅샅이 거친 다음 바로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감시 하에 그들이 운전하는 사방이 커튼으로 가려진 뒷좌석에 올라타고 조사동으로 이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사동 입구에서 다시 보안검색대 통과를 강요하며 휴대용 스캐너로 몸수색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중 검색의 불필요성과 위법성을 설명하였으나 조사동에서의 보안검색절차를 다시 거칠 것을 계속 요구하였다. 조사동의 검색절차를 다시 거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속된 피의자의 경우 변호인 접견과 피의자신문 시 변호인 참여를 불허하였다. 또한 조사동까지 올라갔다가 이중 검색 문제로 변호인과 함께 퇴거하는 대동한 불구속 피의자들에게는 ‘조사를 거부하는 것이냐’며 ‘불출석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들은 변호인이 이중 검색에 응하지 않을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중 검색 강요에 항의하는 변호인을 에워싸고 허락 없이 촬영하기도 하였다. 이에 변호인이 조사동의 이중 검색으로 인하여 피의자에 대한 변호인 접견을 거부당하고, 피의자신문 시 변호인 참여권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국가정보원의 위법한 검색절차로 인한 변호인 접견 및 변호인 참여권 침해의 시정을 구하는 준항고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며칠 간격으로 불구속 피의자를 상대로 출석요구서를 보내며 계속 소환하고 있다. 변호인은 진술거부권 행사 의사를 명백히 하는 불구속 피의자들을 계속 조사동으로 불러 이를 거부하는 피의자들과 변호인을 상대로 불출석 간주로 위협할 것이 아니라 국가정보원의 보안검색절차를 거친 면회실 2층 조사실로 조사장소를 변경하여 조기에 피의자신문을 마쳐줄 것을 요구하였음에도 조사장소는 수사기관의 권한이라고 하며 계속하여 출석요구를 하고 있다. 계속하여 준항고장만 법원에 쌓이고 있다. 그들은 변호인의 접견권과 변호인의 참여권과는 무관한 보안검색절차일 뿐이라고 ‘IS 테러’ 운운하며 이중 검색을 강요하고 있으나, 1차 보안검색에서 국가정보원 청사에 보안상 위해를 끼칠 염려가 인정될만한 물건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피의자신문에 변호인으로서 참여하거나 구속된 피의자를 접견하기 위하여 변호인 신분증을 갖고 이와 같은 목적으로 국가정보원에 들어가는 변호인을 상대로 불필요한 이중 검색을 강요하며 다시 신체 및 소지품을 검사하려는 것은 변호인을 심리적으로 제압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변호인이 피의자신문에 참여하거나 변호인이 접견을 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도 가끔 변호인의 말을 듣는다. 간첩 조작을 밝힌 이후 변호인의 말이 와 닿은 모양이다. 자정이 넘자마자 체포와 압수수색을 시작한 당일 새벽 3시에 체포현장에 도착한 변호인이 체포영장의 등사를 청구하였음에도 열람만 가능하다며 고집을 부렸다. 수차례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시정을 하지 아니하여 변호인 조력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퇴거하였다. 그리고 통화와 문자 메시지로 수차례 직권남용의 범죄가 될 수 있으니 법률자문을 구하라고 여러 차례 경고를 하자 어디서 변호인의 말이 맞다는 것을 들었는지 얼마나 켕겼으면 국가정보원 조사실에서 다른 문제로 항의하는 변호인에게 당시까지 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았음에도 미리 복사하여 준비한 체포영장 등본을 슬며시 교부하는 것이다. 그래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은 여전하다. 변호인이 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청구서에 사선변호인으로 선임된 변호인의 이름을 누락하여 변호인에게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실질심사가 통지되지 않아 피의자는 사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고 영장실질심사를 받게 되었다. 변호인으로서 경계를 늦출래야 늦출 수가 없다. 여전히 국가정보원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정상적이고 공정한 사법절차의 게임의 룰을 전혀 준수하지 않는다. 수시로 전근대적 낡은 수사관행을 고집하고 있다. 절대 물러서지 않고 그 잘못된 수사기법에 이의를 제기하며 반드시 바꿔나가고자 한다. 국가보안법과 국가정보원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한국의 사법인권 수준은 획기적으로 높아져 왔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인권발전의 역사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2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913 | 추천: 0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는 2015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독일영화이다. 필자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해서 인터넷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원제가 Der Staat gegen Fritz Bauer(국가 대 프리츠 바우어)이니까 실제로 ‘과거를 덮으려는 국가에 저항하는 프리츠 바우어’, ‘나치제국과 대결하는 프리츠 바우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작품은 아이히만의 체포와 소송, 나치청산에 관여하는 검사 프리츠 바우어와 주변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나치를 처벌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국경을 넘어 계속되었다.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 외에도 그에 관한 영화나 방송물들이 다섯 편도 더 있다. 필자가 아직 보지도 않은 영화와 자료들을 이렇게 거론하는 것은 과거청산의 역사에서 프리츠 바우어(1903-1968) 만큼 중요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1903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며, 문화혁명기인 6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뮌헨, 튀빙엔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28년에 슈투트가르트 지방법원의 법관시보가 되었고, 2년 후에 최연소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법관에 임용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적극적이어서 십대 후반인 1920년에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으며, 22년에 <공화주의 법조단(Republikanischer Richterbund)>의 일원이 되었다. 공화주의 법조단은 판사뿐만 아니라 검사, 법학자,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단체로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정치적으로 옹호하였다. 바우어는 33년 나치의 집권에 맞서 총파업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수용소에 8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34년 숙청법에 의해 해직된 후 36년에 덴마크로 망명을 하였다. 40년에 덴마크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체류자격을 상실하였으며, 43년에 덴마크에 거주한 유대인의 강제이송이 시작되자 스웨덴으로 탈출하여 빌리 브란트 등과 더불어 <사회주의 트리뷴>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나치가 패망한 후 49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영화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동경심판>을 통해서 추축국인 독일이나 일본이 처음에는 연합국의 군사재판을 연합국의 마지막 공습으로 보거나 승리자의 법정으로 비아냥거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8.15에 제2차 대전과 연합국의 군사재판에 대해 아베 수상이 했던 발언을 듣고 일본정부 당국은 아직도 그런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이 연합국의 군사재판 당시와 그 후에 보여준 국제규범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다르다. 독일 사회는 연합국의 판결을 외부에서 강요된 규범이라고 부인하고 제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규범으로 내면화 또는 맥락화하였다. 그 규범의 내면화 운동의 중심에 바로 프리츠 바우어라는 걸출한 인물이 서 있다. 바우어는 브라운슈바이크 주의 부장검사였을 때에 레머라는 예비역 장군이 사회주의제국당(1952년 위헌정당으로 해산됨)의 당집회에서 1944년 7월 20일 모의가담자(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한 신학자 본회퍼, 카나리스 제독,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을 말한다. 이 사건은 <발퀴레>로 영화화되었다)를 반역자로 비방하자 그를 기소하여 사자 비방 및 추모감정 모독죄로 유죄판결을 끌어내었다. 그런데 이 유죄판결에서 바우어는 재판부로부터 엄청난 정치적 언명을 받아낸다. “나치국가는 법치국가가 아니라 독일 국민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았던 불법국가였다. … 제국의사당방화사건에서 시작하여 제국장검의 밤과 제국수정의 밤을 거치며 독일 국민이 감수해야만 했던 모든 것이 소스라치게 하는 불법이다.” 바우어는 독일 법원으로 하여금 자기 역사에 대한 총체적 고백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법원은 유신체제의 저항자들, 예컨대, 75년의 인혁당사건의 희생자들을 구제해주면서도 유신체제를 불법체제라고 선언하지 않았고, 일본 역시도 공식적으로 전쟁과 식민 지배를 관철시켰던 일본제국을 불법국가라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영화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 사진 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더욱 중요한 바우어의 행적은 헤센주 검찰총장으로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또 다른 아우쉬비츠 재판을 진행한 것이다. 원래 연합국은 주요 전범재판 이외에 다각도로 후속재판을 진행하였는데, 그 중 수용소재판이 상당히 중요하다. 나치 독일은 독일과 폴란드 등에 70개의 수용소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종전 후에 각 수용소마다 연합국들이 수용소 관리자들에 대해 재판을 진행하였다. 아우쉬비츠는 폴란드 관할에 속하였기 때문에 폴란드 당국은 1947년 11월 24일부터 12월 22일까지 한 달 동안 크라쿠프에서 40명의 아우쉬비츠 수용소 직원들을 단심으로 재판하여 그중 21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더 많은 수용소 직원들은 체포를 피해 잠적하였고, 50년대에 이르러 이들이 하나둘 검거되자 프리츠 바우어는 연방법원과의 협의를 통해 1963년부터 1965년까지 2년간 프랑크푸르트에서 재판하였다. 새로 출범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헌법에서 사형 제도를 폐지한 덕분에 그들은 모두 사형을 면하였다. 6인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11인은 유기징역을 선고받고, 나머지 3인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로도 두세 명씩 세 차례 아우쉬비츠 재판이 프랑크푸르트 법정에서 진행되었다. 영화 <책 읽어 주는 남자>는 바로 이 재판을 배경으로 삼았다. 프랑크푸르트 아우쉬비츠 재판은 연합국이 떠났으니 이제는 모르쇠가 아니라 독일인 스스로, 독일인에 대하여 나치범죄를 처벌하기 시작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 후 독일은 나치범죄를 처벌하기 위하여 살인죄(모살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연장하다 급기야 폐지하였다. 그래서 2015년 독일법원은 아우쉬비츠로 이송되어온 유대인들의 현금을 장부에 기재하는 일만 했다는 그뢰닝(93세)에게 살인방조죄로 4년형을 선고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책임은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고 있다. 아우쉬비츠 수용소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자체가 범죄이다. 1969년 바우어가 사망하자 프리츠 바우어 상이 생기고, 프랑크푸르트에는 95년에 프리츠 바우어 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그가 거쳐 간 법원이나 지역에 그를 기념하는 홀과 길이 생겨났다. 나치범죄를 수치로 묻어버리고 망각하려는 시대 분위기를 철저하게 타파하고 국제규범을 독일인의 것으로 전환하는 일을 바우어가 수행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법조는 어떤가? 대법원은 6.25전쟁 중 정부 정책과 명령에 따라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유신시대에 긴급조치를 적용한 판사의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검찰은 어떤가? 실제로 권위주의 시대에 수많은 시국사건에서 자행된 인권침해는 수사기관과 검찰의 협력 아래서 가능하였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재심재판 과정에서 상부의 지침을 거부하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했던 임은정 검사에게 그 구형과 관련하여 모종의 불이익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소문이 인터넷에 무성하다. 그 많은 인권침해사건에서 인권친화적인 재심 매뉴얼조차 마련하지 않고 권위로 일관한 검찰은 도대체 자신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기는 하는 걸까! 검찰제도를 민주화하기 위해 권역별로 지역자치제나 공선제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쟁범죄나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지른 자를 한번 낚아 올리게.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2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84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