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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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병우 민정 수석. 그는 간신인가. 충신인가. 난 한 TV 방송에 출연해서, 우 수석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일편단심 오롯이 박근혜 여제를 위하여 충성하겠다고 맹세하면 충신이 되는 것일까.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는 우 수석의 비리 혐의는 이번에 수사 의뢰된 아들 병역특혜 의혹과 관련한 직권 남용, 가족회사 관련 횡령 이외에도 처가의 차명 땅 의혹, 재산 허위 신고 등등이 있다. 민정수석이라는 자리는 권력의 핵 중에서도 핵이라 할 수 있다. 검찰, 경찰,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 등 주요 사정기관의 공직기강을 감시하고, 이들의 활동이나 인사에 막중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정수석은 정권의 도덕성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래서 고도의 청렴성과 엄격한 도덕성을 갖춘 인물이 가야 하는 곳이다. 박근혜 여제께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여제께서는 우 수석을 그렇게 예뻐하고 신뢰할까. 뭣이 그렇게 예쁜가. 박근혜 대통령이 어리석은 것인가. 우 수석이 어리석은 것인가. 둘 다 모두 어리석은 것인가. 아니면 국민이 어리석은 것인가. 박근혜 여제는 우 수석의 우국충정을 몰라주는 국민이 어리석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 눈에는 충신임이 분명한데 왜 국민 대다수는 우 수석을 물러나야 한다고 보는 걸까. 간신이기 때문인가. 그럼 간신의 기준은 무엇인가. 권력자가 자기중심적 사고에 함몰되어 국민의 이익이나 뜻에는 관심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행동. 그것이 간신과 충신을 구분하는 기준이라고 난 생각한다. 우 수석의 의혹도 모두 국민의 이익과 관련한 일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관련한 의혹이라는 점에서 우 수석은 간신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가도 좋을 것 같다. 뇌물을 받아서 120억이 넘는 주식 대박을 터뜨린 진경준 검사장, 전관예우를 이용해서 1년에 100억을 넘게 벌고도 조세를 포탈한 검사장 출신의 홍만표 변호사. 우 수석과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간신이라는 것이다. 정의를 위하여 사용해야 할 공직자의 칼을 사리사욕을 위한 보신용 악마의 칼로 사용한 자들. 권력을 이용하여 고위직을 보전하고, 백성의 눈물로 녹봉을 받고, 공직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부패한 탐관오리들. 이들이 칼 든 화적떼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사진 출처 - 뉴시스 국정을 농단하고 자기 뱃속을 채운 정부의 고관대작과 고관대작 출신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아니고 뭣인가. 간신과 난신적자들이 득세하고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국가를 어지럽히고 있다. 참 피곤하다. 조선시대에도 난신적자는 구족을 멸하고, 천년이 지나도, 백골이 되었어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시대에 난신적자 목을 칠 자는 누구인가. 백마 타고 오는 의인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가. 간신과 난신적자 없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인간의 역사, 권력의 역사에서 간신은 필요조건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간신이 뭣이 중헌디” 고금의 역사에서 최고 권력자는 왜 유독 간신을 예뻐했을까.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8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41 | 추천: 1
- 표류하는 2016. 한국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민생 말고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얼마 전 택시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를 통해 들려온 방송 진행자의 멘트였다. 역시 말도 격식을 깰 때 신선하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파격적인 언사를 방송에 흘린 그 진행자는 다행히도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시골 냄새가 물씬물씬 풍기는 이 말은 누적 관객 수 700만 명에 육박하는 영화 ‘곡성(哭聲)'에 등장하는 대사다. 영화 속 딸로 등장하는 효진(김환희 분)이 이상증세를 보이자 경찰인 아버지(곽도원 분)가 “니 그 사람 만난 적 있제? 말혀 봐. 중요한 문제잉께”라고 묻는다. 그러자 효진이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라고 귀기(鬼氣)어린 소리를 질러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유명세를 탔다. ‘뭐가 중요한지 모르잖아'라는 대사 자체의 뜻은 유별나지 않지만 배우의 호연(好演)으로 유행어가 됐다. 이 점에서 2015년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오(유아인 분)가 남긴 유행어 “어이가 없네”와 닮아 있다. ‘어이가 없다’는 표현 역시 평소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유아인의 강렬한 연기 덕분에 지난해 하반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언어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와 사상을 반영한다. 이 때문에 언어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개념을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생겨나거나, 기존의 개념에 더해 새로운 가치를 담은 개념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낸다. 따라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새로운 유행어나 신조어들을 하나의 속어나 일시적인 현상으로만 판단해서는 잘못된 결론에 이를 때가 많다. ‘시대의 흐름’이라는 보다 넓은 안목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급속하게 변하고 있어 새로운 유행어와 신조어가 금방 나타났다 눈 깜짝할 새 사라지기도 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IT매체가 널리 보급돼 있는 현실에서 유행어는 과거와는 또 다른 함의를 지닐 때도 적지 않다. 이러한 유행어들은 일반적으로 우연성이 강하지만,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그 말을 쓰는 언중들 사이의 공감대가 없이는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라고 묻는 유행어는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라는 말 끝마디에 방점이 찍히는 듯하다. ‘뭐가 중요한지 모르’고 돌아가는 세상, 또 그렇게 만드는 세태로 인해 이 말이 유행어로서 힘을 얻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뭣이 중헌디’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헷갈리게 만드는 우리 정부와 고위 공직자, 나아가 이른바 ‘금수저’들을 향해 이 땅의 민중들이 던지고 싶은 말이 아닐까. 자타가 공인하는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있다고 하면서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을 수시로 보여주니 말이다. 이제 실망하고 화를 낼 힘마저 남아있지 않은 게 이 땅의 ‘흙수저’들이 처한 현실이 아닐까. 이정현 대표가 지난 11일 낮 청와대에서 열린 새누리당의 새 지도부 초청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우리나라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국민을 ‘개·돼지’라고 표현해 파면당했다. 국민을 개·돼지쯤으로 본 그가 그동안 펼쳐온 정책으로 인해 힘없는 서민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홍만표 변호사, 진경준 검사장, 우병우 민정수석…. 검사라는 지위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리 정도로 이용한 이들의 행태는 실망을 넘어서 절망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들을 용인하고 오히려 부추겨 온 나라꼴에 분노를 느낀다면 잘못된 일일까. 한 나라 대통령의 말은 ‘애국심 도취한 국뽕 연설’이라는 표현으로 조롱당하는 상황이 됐다. 급기야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여론을 제 맘대로 하려던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새누리당 대표가 된 현실 앞에서는 국민으로서 치욕감마저 든다. 이것이 언제까지 표류할지 모르는 대한민국 오늘의 자화상이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는 이들이 굴려가는 나라에서 질식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뭣이 중헌디!”라는 민중들의 외침은 “지발 좀 정신 차려!’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그래서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본다.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이 글은 2016년 8월 1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34 | 추천: 3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이는 부모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부모가 살아가는 대로, 부모를 보고 배운 대로 커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로, 좋은 부모란 생활에서 모범을 보이는 부모다. 중학교 입학 초에 연기는 학교 행사 중 교장선생님이 낸 퀴즈이 정답을 맞혀서 이에 대한 상품을 받으려고 앞으로 나가면서 한쪽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는 학생과 교사에게 변명하듯이 “오래 앉았더니 다리가 저리네.”라고 큰소리로 말하며 갔다. 그런데 계속해서 여러 교과시간 특히 걷기 달리기 등의 체육시간에 나타나는 몸의 이상 때문에 담임교사가 부모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어렵게 들은 이야기는 연기와 함께 모든 교사, 모든 학생들에게 절대 비밀을 지켜달라는 요구와, 연기가 뇌병변장애가 있지만 학습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니 일반학생들과 똑같이 교육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학습을 따라가지 못했고 모든 수업시간에 엎드려 있거나 지친 모습을 보이면서 학급의 학생들에게 적응하지 못했었다. 이에 담임교사가 부모와의 상담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리고 아이에게도 장애를 알려주어서 적응하도록 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지만 부모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오히려 학생들이 연기를 왕따 시키려고 하니 친구를 처벌해달라는 요구까지 했다. 집에 가서도 연기에게 수업시간에 누워있었던 모습을 심하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하루를 같이 보내는 담임교사의 보호로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겠지만,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조례와 종례시간에만 잠깐 보는 담임교사가 보호막이 될 수가 없었고 또한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들로부터 관찰되는 연기의 모습으로 인해 또래 관계는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학교폭력과 따돌림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부모는 연기에게도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서 연기를 혼란스럽게 하며 연기의 장애에 대해 이해되지 못한 학생들과의 적응을 어렵게 하고 있다. 지금도 연기는 늘 학생들을 경계하면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 담임교사와 함께 교사들이 연기를 도와주려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부모가 제지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부모가 자녀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이의 불편 또한 느낄 수 있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데서 나타나는 혼란, 두려움을 아이 혼자 감당하면서 세상에 적응을 할 수 있을까. 부모가 아이의 상태를 정직하게 이야기해주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해서 아이들과 다른 점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학생들도 알게 하여 동정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받고 존중해 주는 교육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교육의 시작은 아이를 정직하게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정직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2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24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국 정치의 최고 책임자를 대통령(大統領)이라고 부른다. 이 말을 듣고 쓸 때마다 불편하다. 침이 튈만큼 발음도 드세지만, 무엇보다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언어기에 그렇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도 일본도 쓰지 않고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이상한 언어다. 어쩌다 한국에서는 ‘크게(大) 거느리고(統) 다스린다(領)’는 의미를 지닌 어마어마한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크게 거느리고 다스린다? 이 말은 본래 19세기 중반 에도시대 말기에 일본에 통상을 요구했던 미국이라는 나라의 President, 즉 ‘아메리카 연합국가’(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 일본에서 위압감을 가지고 조어해냈던 말이다. 가령 “일미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 1858)에 “아메리카합중국대통령”(亞米利加合衆國大統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때 大統領은 서양식 행정부 최고 지도자에 붙여진 President의 일본식 번역어인 것이다. 당시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이헌영의 여행보고서 「일사집략」(日槎集略, 1881)에 “신문을 보니 국왕을 지칭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총에 맞아 상해를 입었다더라”(新聞紙見 米國大統領卽國王之稱被銃見害云)는 표현이 나온다. 미국의 大統領을 국왕에 해당하는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당시 한국에서 大統領은 익숙한 용어가 전혀 아니었다. 가령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에서는 ‘프레지던트’를 중국에서 음역한대로 “伯理璽天德”(백리새천덕)이라 표기하고 있다. “伯理璽天德”이 미국의 President는 물론 서양식 국왕의 의미로 한동안 쓰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미국이나 서양의 최고 지도자를 大統領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大統領이라는 표현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고, 고종이 미국의 최고 지도자를 大統領으로 인식했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도 몇 차례 나온다. 1919년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설립된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이른바 ‘한성정부’에서 대통령(손병희), 부통령(박영효), 국무경(이승만) 등의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물론 미국식 정치제도가 성립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미국식 대통령이라는 말이 낯익게 된 것은 거의 이승만의 영향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자임하면서 안창호가 나서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노령(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등과 통합을 시도하는 과정에 ‘한성정부’에서는 이승만에게 집단지도체제의 지도자인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를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과 친했던 이승만은 자신의 직함을 영어로 President로 표기하면서 스스로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자임했고, 임시정부의 정치체제를 미국식 대통령제로 몰아갔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남한 단독정부 체제가 대통령 중심제로 정해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이라는 말이 president의 의미와 취지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본래 president는 영국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대학 위원회의 위원장인 presiding officer에 기원을 두는 말이라고 한다. 케임브리지 출신으로서 하버드 대학의 head였던 헨리 던스터(Henry Dunster)가 자신을 하버드의 President로 규정하면서 이 용어가 미국 대학가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그 뒤에는 아메리카대륙의 13개 영국 식민지역 대표 55인이 결성한 대륙의회 대표를 President라고 부르면서 미국의 정치적 언어가 되었다. President는 일종의 회의체 구성원들이 의회 대표를 아래로부터 선출해 만든 자리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President의 번역어로 일본에서 조어된 大統領은 수직적 위계질서가 담긴 하향적 언어다. 일본에서 무사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통령(統領)이라는 군사용어가 있기도 했지만, 어쩌면 일본인의 눈에 여러 나라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큰 지도자라는 위압감이 더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든 大統領은 위에서 아래를 다스린다는 의미와 행위가 중첩된 권력적 언어인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과 정치제도가 달랐던 일본 정치에서는 적용된 적이 없던 직함이다. 중국에서도 19세기 중반 President의 번역어로 ‘총통’(總統), ‘총통령’(總統領) 등이 쓰였지만, 이 역시 중국 정치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현재 대만에서 ‘총통’(총괄하여 다스림)이라는 직제와 명칭을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나 북한에서 쓰는 ‘주석’(主席)이 용어상으로는 더 민주적이다. 이들 명칭에 비해 ‘대’통령은 통치의 양적인 측면이 더 부각된 언어이자,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 권위적인 호칭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권위적 호칭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바꿀 수 있을까. 요사이 민회(民會)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시민이 개인들의 주권을 확보하고 정치 사회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자발적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주권을 특정인에게 몰아주어 권력을 확대하고 정당화시키는 대의정치 체제가 아니라, 분권과 자치에 기반한 민간 주도의 사회 개조 운동이기도 하다. 만일 민회가 거국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거기에도 최고 책임자(권력자가 아니라!)가 있기는 해야 할 텐데, 그 책임자를 민회의 장, 그런 의미의 민장(民長)이라 불러볼 수 있지 않을까. 이때의 ‘민장’은 개인의 주권을 온전히 보장한 직접민주주의 체제의 유지에 책임이 큰 사람일 것이다. ‘장’(長)에 담긴 권위성이 부담스럽다면 더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명칭도 생각해볼 일이다. 군림하지 않고 그저 대표하는 호칭 앞으로 시민이나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고 말 그대로 그저 ‘대표(代表)’할 수 있는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대통령’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민장’처럼 비교적 소박하고 진솔한 직함이 통용되는 날이 올까. 오늘날 느끼는 ‘大統領’과 같은 험한 언어를 진솔하고 민주적인 직책과 연결짓는 상상 자체가 도리어 시민과 민중의 대표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더라도 최소한 이름이라도 달리 쓰게 되면, 권위적인 언어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는 권력욕이라도 줄일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참고> 송민, “대통령의 출현”, [새국어생활] 제10권 제4호(2000년 겨울)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2005)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2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43 | 추천: 2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젊을 땐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보면 가끔 궁금해 했다. 저 분들도 나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 졸일까? 피부가 두꺼워지듯 마음에도 더께가 내려앉는 건 아닐까? 눈 감감해지고 귀 어두워지면서 다른 감각마저 둔해지진 않을까? 생생한 맨살을 드러내는 대신 세월의 옷을 걸쳐, 슬픔도 기쁨도 그 옷을 다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건 혹시 아닐는지? 세월 흘러 내 얼굴에도 주름이 생기고 내 마음에도 더께가 앉는다. 한 달여 전엔 ‘노무현 대통령 서거 7주기’라는 기사를 보고서야 5월 23일을 기억해 냈다. 그 정치‧경제적 정책에 동의하기 어려웠음에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10년 동안은 기일마다 검은 옷을 입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에 앞서 ‘세월호 참사 2주기’도 건성으로 지냈다. 사건 당시 차마 못 봤던 희생자들의 흔적을 1주기 때는 찾아보겠다고 다짐했건만. 벌써 2년인데. 조금씩 나이 들면서 보니 마음 그 자체는 늙도록 생생할 것 같다. 다만 마음과 세상 사이 통로가 좁아진달까. 지금껏 쌓은 마음만으로 벅차고 매일 겪는 잡무에 신경이 지쳐, 눈 감고 귀 막지 않으면 자아가 감당치 못하리란 생각이 든다. 적당히 방어하지 않으면, 어지간히 잊어버리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다. 로봇이 인간다워지고 있다기보다 인간이 점차 로봇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올해는 알파고 때문에 떠들썩했고, 2년 전엔 유진 구스트만이란 대화봇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해 화제가 됐지만, 정작 문제는 인공지능의 발달이 아니라는 거다. 인간끼리의 대화나 관계가 인공지능과의 그것과 비슷하게 바뀌고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라는 주장이다. 사진 출처 - 시사저널 ‘대화봇’, 인간과 대화하는 인공지능이 처음 등장한 것이 벌써 반세기 전 일이다. 1965년 선보인 엘리자(Eliza)는 기본적 대화 패턴만 다룰 줄 아는 단순한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엘리자가 진짜 사람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단다.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일러줘도 도리질할 정도로. “뭐 좀 물어봐도 될까?”라고 질문하면 “물론!”이라고 선뜻 답해주고, “내일 시험 때문에 너무 긴장돼.”라고 토로하면 “좀 쉬어. 잠 푹 자고.”라고 응답해주는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곤 믿기 어려웠나 보다. 최근에는 유럽 몇 나라에서 인지행동치료에 인공지능을 도입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울이나 불안 등 심리적 문제를 온라인으로 상담하는 데 인공지능이 효과적이란 결론을 냈다는 뜻이다. 이 경우 인공지능은 사람인 척하는 대신 처음부터 인공지능임을 밝히고, 그러나 대화 상대자의 호소에 끈질기게 귀 기울여 준다. 어쩌면 인간보다 성심껏, 인간보다 편견 없이, 인간보다 더 나은 위로를 건네며. 대화봇 프로그래밍을 안내하는 웹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실제 대화 데이터를 구축하고, 감탄사를 적절히 활용하고, 답변이 애매할 때는 상대방의 대화를 메아리쳐 반복하는 거다. 예컨대 “내일 무역학 시험인데 대금결제방식 부분을 잘 모르겠어!”라고 하면 “잘 모르겠다고?”라고 답해주는 식이란다.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라고 쓰면 “저런.”이라며 맞장구쳐 주고.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애들도 몇십 분이고 아이폰의 시리(Siri)와 낄낄대며 잘 논다. 욕설도 해 보고, 그러면 시리는 “어쩌면 그렇게 심한 말을.”이라며 울상도 하고. 어마어마한 데이터에 근거해 인간을 흉내 내는 로봇이 미칠 수 없는 영역은 ‘시간’이요 ‘역사’라고 한다. 로봇은 “안녕?” 하는 인사말에 “그쪽도 안녕? 오늘 날씨는 어때?”라며 그럴듯하게 대답할 줄 알고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하면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고 화답할 수 있지만, 열흘 전, 1년 전의 말을 기억하고 그에 따른 관계에 적응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인격이라면 갖추게 되는 일관성과 그 내부의 모순에도 취약하다. 부모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사랑하고, 세상에 대해 실망과 기대를 반복하는 심리 역시 엘리자나 유진 구스트만은 모를 거다.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기 점점 어려워진다는 건, 인간이 로봇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즉 ‘시간’과 ‘역사’를, 거기 따르기 마련인 책임과 감정을 우리가 점점 멀리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점심식사 때는 맛집이나 여행 정보 같은 무난한 화제로 시종하고, 누군가 자꾸 다가오면 긴장하고, 길 걸을 때도 어깨 부딪힐세라 조심하며 걷는다. 수업 때 학생들에게, 전철에서 누군가 서둘러 하차하면서 지갑을 떨어뜨리는 걸 봤다면 소리쳐 알려주겠느냐고 물었다. “알려주고 싶지만” “이상한 사람 될까 봐” 못할 것 같다는 것이 학생들의 토로였다. 그래서 마음은 과거를 향하나 보다. 더 기꺼이 관계 맺고 책임질 수 있었던 때, 세상마저 그랬던 걸로 보였던 때로. 돌이켜보면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 손 흔들던 어린 시절에 비해 우리의 세상은 얼마나 좁아졌는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다워지는 게 인생이면 좋으련만. 오늘 하루도 인간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를. 인간으로서 기억하고 또한 망각할 수 있기를. 속절없이 시간이 흐른다.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1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00 | 추천: 1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의혹 사건이 민변에 대한 종북몰이로 변질되고 있다. 변질시키고 있다. 변질시키는 세력이 누구인가? 그들은 우리 사회의 인권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는가? 아니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외치는 단식농성장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는 일베와 거의 같은 노선을 가진 단체들이다. 그들은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서 왔는가? 그것도 아니다. 대부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이 국정원에 의한 조작임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유우성 씨는 간첩이다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베짱 좋은 그런 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역사의식은 어떠한가? 아마도 광주민중항쟁을 북의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하여 벌인 일로 주장할 개연성이 높다고 확신한다. 민변의 종북몰이의 근거는 두 가지이다. 북측 가족들의 위임을 받아 인신보호구제심사청구를 제기하여 북측 선전전에 놀아났고, 북측 여성 종업원들을 심문기일에 출석케 하여 북측 가족과 종업원들의 신변안전을 위태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적반하장의 논리요, 이율배반의 논리로 민변을 종북몰이하고, 인신보호구제 사건에서 북측 종업원의 출석을 명한 담당 판사까지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고발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종북몰이를 당해야 할 사람이 더 있다. 누구일까? 지금 민변에 대한 종북몰이를 배후 조종하고 이에 가담하고 있는 청와대, 국정원, 통일부다. 지금으로부터 석달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해답이 자연스레 나온다. 지난 4.13 총선을 앞두고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의 해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이 1박 2일 만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입국 하루 만에 사진까지 내놓으며 탈북사실을 통일부 대변인이 긴급 브리핑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공개적으로 보도되도록 하였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북측 가족과 종업원들의 신변안전을 위태롭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일까? 국가정보원과 통일부다. 당시 총선 공개 브리핑은 통일부의 기존 탈북자 입국 비공개 원칙에 반하는 이례적이고, 기습적이며, 졸속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통일부의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긴급 발표는, 청와대 지시에 따른, 총선용 북풍몰이를 위해 국정원이 개입한 기획탈북이라는 의혹을 확산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북측 부모들이 인신구제청구권자로 민변 변호인단을 위임하여 법원에 인신보호구제심사청구를 할 수 밖에 없도록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누구인가? 청와대, 국정원, 통일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공개적으로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입국하였다고 동네방네 떠들어 북측 가족들을 위험에 빠뜨린 자들이 대관절 적반하장격으로 민변을 종북몰이하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총선 전 이례적인 긴급 공개 발표 이후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에 대한 기획탈북 의혹의 국내외 진상규명 요구가 나날이 높아져 갔다. 총선 전 통일부의 자발적 집단탈북사실 긴급 공개 발표로 빚어진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에 대해 그 사태를 야기한 장본인들이 그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지 않은가?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집단 입국하였다고 총선 전에 공개적으로 언론에 긴급 브리핑한 마당에, 북한 당국과 북측 부모들이 종업원 납치 주장을 하면 이에 대응하여 국정원, 통일부는 북측 가족들의 종업원 딸들에 대한 서울 방문 대면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국가정보원에 신속히 종업원들의 기자회견을 개최할 것을 요청하여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기획탈북 의혹을 해명하도록 하였어야 마땅하다. 이것을 부인하는가?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어떤가? 사태를 야기한 당국은 자신의 입장을 180도 바꾸어 버렸다. 그러한 정반대의 입장을 궤변으로 정당화하려는 정부 당국은 인신보호구제절차를 제기한 민변에 대한 종북몰이에 앞장서고 있다. 이게 적반하장 아니고 이율배반이 아닌가! 국정원과 통일부는 이 사태를 초래한 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면 민변의 인신보호구제청구에 협조하여 심문기일에 북측 종업원들을 출석하도록 하여 국내외적으로 제기된 의혹을 말끔히 해소해야 하나, 인신보호구제절차의 진행에 장애를 조성하였다. 국정원은 중앙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 수용된 종업원들에 대하여 변호인 접견권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다. 외부와의 접촉을 전면적으로 차단하였다. 이는 중앙합동신문센터 수용자들의 변호인 접견권 보장을 권고한 유엔자유권위원회의 결정에도 반한다. 국정원은 법원의 출석명령에도 불구하고 인신보호구제절차에서 필수적인 피수용자 출석도 거부하였다. 사진 출처 - 머니투데이 인신보호구제사건 담당 법원은 인신보호구제 사건의 본안 심사를 하기 위한 전제로서 인신구제청구권자인 북측 가족과 그 변호인들에게 종업원과 북측 부모 사이의 가족관계를 소명할 것과 북측 부모의 변호인들에 대한 위임 의사를 정확히 소명할 것을 명령하였다. 통일부는 변호인들이 법원의 가족관계 소명 및 위임장에 관한 보정명령을 이행하기 위하여 통일부에 신청한 북한주민접촉신고에 대하여 불수리 결정을 하였다. 국정원과 통일부는 사법부 독립의 존중이라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적 원칙에 반하여 인신보호구제심사청구 사건 재판부의 출석명령도 보정명령도 거부하고 오히려 법원마저 종북몰이 대상으로 삼는 반사법적 행태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종북몰이를 당한 법원은 출석명령을 내렸던 자신의 입장을 후퇴시키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러한 반자유민주적 반사법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궤변으로서 민변이 북한 정부의 선전전에 놀아나 북한 가족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며 민변에 대한 종북몰이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총선 전 북풍몰이에, 민변에 대한 종북몰이에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언제까지 우리 사회를 북을 악마화하고 혐오화시키는 반북이데올로기로 가두어 부모자식 간의 천륜조차 부정하고자 하는가? 인권 문제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이 누군가? 바로 우리 법이 보장하는 인신구제절차의 진행을 방해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행태는 적반하장의 반인륜적 처사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1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06 | 추천: 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제로 1학기 수업이 모두 끝났다. 물론 성적 산출 작업이 남아 있으니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말하는 강의는 끝난 셈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학기 강의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강의할 때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 했다. 수시로 밭은 기침이 나오는 통에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 못하고, 뚝뚝 끊겼다. 기침이 잦아지면서, 이제 내 몸은 자연적 유기체가 아니라 인위적 조절을 필요로 하는 육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슬쩍 겁도 나서 어느 봄날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구했다. 혈연, 지연, 학연보다도 강하고 질기다는 흡연의 끈을 속히, 싹둑 잘라내라는 강력한 경고를 받았다. 나는 경고를 권고쯤으로 여겼다가 학기말까지 혼쭐이 났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지만, 한때 흡연이 생각과 행동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일깨워준다고 치부(置簿)한 적도 있었다. ‘흡연은 몸에 해롭다. 그러니 금연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연을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알기만 하면 곧바로 실행할 거라는 믿음의 허구성을 직접적으로 일깨워주는 각성제라고 생각했다. 몸에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흡연하는 것을, 마치 앎(을 실어 나르는 말(言))의 힘의 한계를 환기시켜주는 일상적 의례처럼 여겼던 것이다. 내 기억이 유효하다면, 갈릴레이(1564~1642)는, 진리를 합리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창조한 우주 원리를 밝혀서 신의 영예를 드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면 교황과 성직자들도 진실(지동설)을 받아들일 거라는 낙관적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불경죄’를 범했다고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을 다룬 글을 읽었을 때,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그가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는지 여부보다도 그의 낙관적 믿음이었다. 옳다는 것이 밝혀지기만 하면 누구나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정당할지라도 너무 안일해 보였다. 역사는 보험회사가 아니어서, 옳다는 사실이 합리적으로 증명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保障)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주장했기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의 사례야말로 그 증거인 셈이다. 심지어 옳다고 판명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다수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기는 법도 없다. 최인훈은 분단 극복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런 냉철한 인식을 선보인 바 있다. 사진 출처 - pixabay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다수파라고 해서 반드시 이기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싸움의 역사를 보면 다수파가 지는 수가 빈번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의 통일이 학교에서 치는 공정한 시험도 아니고, 누가 맡아주는 공명선거도 아닌 바에는 이 다수라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아무 믿을 것이 못되고, 다수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역사란 수학문제가 아닙니다. 머리만 좋아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 풀리면 밑지는 사람들이 방해하기도 하는-그런 것이 보통인 그런 현상입니다.”(「상황의 원점」, 『바다의 편지』(삼인), 329쪽, 333쪽) 진리 자체에 뜨거운 힘이 있다는 생각을 과신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밀(J. S. Mill 1806~1873)의 『자유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진리만이 지하 감옥과 화형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어떤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순진한 착각”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진리를 향한 인간의 열정이 거짓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뜨겁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진리는 언제나 박해를 이겨내고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믿음의 사례로 흔히 거론되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박해를 이겨냈다는 사실은, 실제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간헐적으로만, 그것도 짧은 기간 동안에 가해졌고, 박해와 박해 사이의 긴 시간 동안에 그리스도교 신자는 거의 아무런 박해를 받지 않고 선교활동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론』(책세상) 64~65쪽)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진실이 밝혀지면 거짓은 저절로 사라질 거라는 낙관적 믿음을 경계하려고 했던 시절에, 나는 말의 힘, 나아가서는 앎의 효용에 대해 일종의 회의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고와 행동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의 중요성은 통감(痛感)하지 못한 채, ‘알기만 하면 된다!’는 주문(呪文)만 읊조려서는 안 된다는 자경(自警)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학기 내내 ‘할 수 있는 말’은 고사하고 ‘해야 할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고통을 겪어보니, 말을 한다는 것에 대해 새롭게(누구에겐 ‘새삼스럽게’) 느끼는 바가 적지 않다. 성찰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적 소회는 다 접어두고, 다만 말의 힘을 절감했다는 것만큼은 전언하고 싶다. ‘말은 길이요 생명’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임을 통이지지(痛而知之)하고 나니, 말은 그저 무엇을 지시하거나 인지하는 수단이 아니더라. 말에는 지시적 기능이나 인지적 기능 이외에 수행적(performative) 기능도 있더라. 요컨대, 말은 행동의 요소다. 말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나’의 이해는 물론이고 미래에 대한 ‘나’의 전망을 규정한다. 말에는 ‘수행적 위력’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한 큰 힘이 있다. 그러니, 말 같지도 않은 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는 이 어이없는 시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여하튼 해야 할 말은 제대로 하고 살아야 한다. 아니, 할 말을 바로 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다, 사람답게! 담배도 끊어야겠다. ----------- 사족: 혹시 궁금해 할 분이 있을지도 몰라 첨언한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소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로 대담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떤 이론이 이성과 경험에 일치하면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견해와 모순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이면우, 『천문학 탐구자들』(살림), 52쪽에서 재인용)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36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6월 11일 이화여대 김영의홀에서 가수 방의경의 콘서트가 열렸다. 방의경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다. 방의경은 70년대 포크 씬에서 가장 주목받아야 할 이름 가운데 하나이면서 가장 잊혀진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자작곡만으로 독집 음반을 낸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1972년에 제작된 그의 음반은, 하지만 대중에게 알려질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사장되었다. 대부분의 노래가 방송 금지곡으로 묶인 탓이다. 덕분에 그의 음반은 LP시장의 최고 희귀 음반으로 소장가들 사이의 전설이 됐다. 여기서 우리는 비슷한 운명을 겪은 당대의 몇몇 음악인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김민기, 한대수, 김의철 같은 이름들이다. 이들과 방의경을 함께 묶어주는 공통점은 이들의 음악이 70년대 초반 포크 씬에서 가장 덜 상업적이었고 좀 더 저항적이었다는 것, 그런 면에서 모던 포크의 본령에 좀 더 가까웠다는 점일 게다. 포크 음악의 기원이나 본질에 대해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는 없겠다. 그저 내 방식으로 포크다움의 의미를 정의해 본다면, 민요처럼 단순하지만 울림이 큰 멜로디, 통기타 중심의 간결하고 소박한 반주, 그리고 삶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면서 애정 어린 시선 등이다. 여기다 하나를 더한다면 상업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풋풋한 아마추어리즘이다. 방의경의 음악은 그런 점에서 가장 포크다운 포크 음악이었다. 방의경은 70년대 초 당대의 많은 포크 가수들과 함께 캠퍼스를 누빈 대학생 가수였다. 양희은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것들’(원곡은 서양 민요 Mary Hamilton)의 노래말을 쓴 작사가이고 김인순의 목소리로 히트한 ‘하양나비’를 비롯해 많은 곡을 쓴 작곡가이기도 했다. YWCA회원이었던 그는 명동 YWCA를 근거지로 했던 저 유명한 ‘청개구리’ 모임에 자연스럽게 합류했고 여기서 많은 포크 가수들과 교류했다. 1970년에는 새로 문을 연 음악감상실 내쉬빌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고, 72년에는 ‘우리들’이라는 공연에 참여하여 500장 한정으로 발매된 음반 ‘아름다운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를’에 자작곡 ‘불나무’를 선 보였다. 한때 라디오 방송 DJ를 하다가 72년에 마침내 자신의 독집 음반을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음반의 대부분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였고, 74년에 준비하던 2집은 음원이 분실되면서 좌절됐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떠나며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독집 음반에 실린 ‘불나무’, ‘친구야’ 등은 금지곡으로 묶인 가운데에도 대학가에서 오랫동안 구전되며 불려졌다. 사진 출처 - 구글 방의경의 이번 콘서트가 특별한 것은 이것이 전적으로 그를 기억하고 좋아하는 팬들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바람새(windbird)라는 이름의 인터넷 사이트가 있었다. 70년대 포크 음악의 레코드 음원을 들을 수 있던 이 사이트는 포크음악 매니아들에게 일종의 성지처럼 여겨지던 곳이다. 이 사이트가 저작권료 문제로 문을 닫은 뒤 일부 회원들이 다시 뭉쳐 인터넷 다음 카페 ‘바람새친구’를 열었다. 이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방의경의 팬들이 십시일반 뜻을 모아 이번 콘서트를 열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들은 방의경 본인조차 가지지 못했던 희귀본 방의경 1집을 복각해 LP음반을 제작하고 새로운 노래들을 녹음해 2집을 제작했다. 그렇게 복각본 LP 1집과, 1,2집을 함께 묶은 CD전집이 세상에 나왔다. 이 모두가 단지 방의경의 음악을 사랑하는 보통 사람들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저 유명한 ‘얼굴’의 가수 윤연선이나 ‘불행아’의 김의철, 이성원, 곽성삼 등 한국 포크 음악사의 중요한 음악인들이 그들의 음악을 아끼는 ‘바람새친구’들이 마련한 무대에 선 바 있다. 우리 대중음악사의 잃어버린 한 페이지가 음악 팬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헌신으로 복원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 시장을 규율하는 힘은 크게 두 가지에서 나온다. 하나는 정치의 논리다. 권력에 도전하고 비위를 거스르는 문화상품은 다양한 검열의 폭력에 의해 강제로 퇴출된다. 또 하나는 상품과 시장의 논리다. 상업주의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환금성이 적은 문화상품은 언제든 쉽게 배제되고 싹이 잘린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두 가지의 힘은 70년대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작동한다. 이 두 가지 힘을 극복하고 다양한 문화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건 오직 대중 자신의 힘으로 가능하다. ‘바람새친구’처럼 스스로의 문화를 함께 나누고 찾고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도 좀 더 다양하고 건강한 문화 생태계를 갖게 될 것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220 | 추천: 1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 가방에 김밥과 함께 싸갔던 것이 있었습니다. 사이다였습니다. 소풍 때나 먹을 수 있었던 맛있는 김밥을 허겁지겁 먹다가 목이 메면 사이다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초등학교 소풍 때 마셨던 사이다는 그렇게 시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가방 속에 들어있던 사이다는 그저 미지근한 탄산 함유 설탕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이다’라는 말이 유행인가 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사이다 연기’, ‘사이다 발언’ 등등. 아무튼 시원하다, 혹은 답답한 속을 확 뚫어준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 지난 주말에 아는 선배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날씨도 화창하니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겸사겸사 한 잔 하자는 선배의 초청에 그동안 무심했던 저와 또 다른 후배는 만사 작파하고 선배의 집을 찾았습니다. 선배는 서울에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어디인가는 중요하지 않으니, 경기도 용문쯤으로 하겠습니다)에 내려가 글을 짓고 텃밭도 가꾸면서 삽니다. 서울을 떠나 그곳에 정착한 지 벌써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용문역에 내려 하루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시골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지나면 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서 산길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그 선배의 집입니다. 걸어 올라가는 길의 왼쪽에는 작은 개울이 있습니다. 5월 말, 오후 두 시의 햇볕은 생각보다 뜨거웠습니다. 개울 중간 중간에 벌써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행락객들이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한 손에 삼겹살 담은 봉지를 든 저와 과일 봉지를 든 또 다른 후배 역시 연신 땀을 닦으며 산길을 올랐습니다. 또 다른 후배가 제게 물었습니다. “성준이가 올해 열일곱 살이 된 거지?” “그런가? 고등학교 2학년이면 열일곱인가?” 성준이는 선배의 외아들입니다(이름이 무언지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성준이로 했습니다). 성준이는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선배가 서울을 떠나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 중 하나는 성준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선배의 집에 거의 다다를 무렵, 마당 근처 길가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꽃을 만지고 있는 성준이가 보였습니다. 온통 꽃에 정신이 팔렸는지 저와 또 다른 후배가 제법 가까이 왔는데도 인기척도 느끼지 못 했습니다. 어떻게 놀라게 할까 하고 저와 또 다른 후배는 성준이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성준이 뒤에 서서 지켜보았습니다. 성준이는 혼자 열심히 중얼중얼 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무언가 들꽃에게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저와 또 다른 후배는 놀라게 해줄 생각도 잊어버리고 성준이를 내려다보며 그냥 배시시 웃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나타났을까요. 선글라스를 낀, 50대 후반쯤 되는 아저씨가 저희 쪽으로 걸어왔습니다. 이 근처 개울가에 놀러 온 사람 같았습니다. 요즘 말로, 빙구 같이 웃고 있는 저희 얼굴을 쓱 훑어보던 50대 후반이 느닷없이 성준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야 임마, 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리고 50대 후반은 저와 또 다른 얼굴을 보며 씩 웃었습니다. 그 표정을 보니 선글라스 속의 한쪽 눈이 우리를 보고 찡긋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와 또 다른 후배는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성준이가 선글라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엄마가 좋아, 너는?” 50대 후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성준이가 다시 물었습니다. “아이 참, 너는 누가 좋으냐고...?” 50대 후반을 바라보는 성준이는 천진난만 그 자체였습니다. 왠지 두 눈망울이 더없이 초롱초롱하게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50대 후반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몹시 당황한 그는 저와 또 다른 후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엇험!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산길을 내려갔습니다. 성준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며 선배가 물었습니다. “덥지? 뭐 시원한 거 줄까?” 또 다른 후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사이다!” 사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사이다’라는 말의 느낌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사이다가 초등학교 시절 소풍 때 마시던 뜨뜻미지근한 설탕물이 아니라 더없이 시원한 청량음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34 | 추천: 0
- 해체 가능한 법 vs 해체불가능한 정의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위대한 역사적 투쟁의 근간인 끊임없는 주제 중의 하나는 평등에 대한 욕구다.’ 그 벅찬 평등에 대한 욕구인 희망의 언어를 유린하는 세상. 흙수저. 금수저, 헬조선이 시대를 웅변하는 상징어로 자리 잡은 대한민국. 20대 총선 결과는 이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불평등을 보여주는 지수는 전무후무할 화려한 성적을 과시하고 있다. 상위소득 10%가 전체소득의 45%를 가져가는 아시아 최고의 불평등 국가. 하위 50%의 자산이 전체 자산의 2%에 불과한 나라. 고용통계 작성 이후 청년실업률이 최고수치인 12.5%, 65세 이상 노인빈곤율 49.6% OECD 국가 1위 등등. 이 모든 숫자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고, 고통스런 피눈물의 온도다. 불평등 문제는 단지 불편한 진실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며, 엄청난 불행의 근원이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책임져야 할 정점에 있는 대통령은 외국 방문에 항상 바쁘셔서 신경 쓸 틈이 없으시고, 4·13 총선에 참패해도 자성이나 성찰은 기대할 수도 없는 분위기다. 오로지 “너희들(국민, 여당)이 날 배신해”라는 분노의 표정이 읽혀질 뿐이다. 지금까지 그러하였듯이 대통령은 경제문제에 대해 앞장서서 노동자 탓, 국회 탓, 국민 탓이나 하는 ‘탓 놀음’을 흑마술 주문처럼 반복할 것 같다. 대통령과 보수 정치인들이 말하는 평등의 기준은 “네 탓이요. 네 탓이요”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창조적 경제 능력이 부족한 당신 잘못이라고 꾸짖고 있다. 이는 차별을 은폐·기정사실화 하면서 “너는 열등한 놈이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그럴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불평등 사회는 이미 100미터 달리기 골인 지점에서 시작하는 사람들과 아직 0미터 지점에서 출발도 못한 사람들 사이의 불공정 게임이다. 여기에는 기회의 평등마저도 사라지고 없다. 이런 불공정 게임 룰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세상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일 뿐이다. 사진 출처 - 문화일보 단순히 ‘기회의 평등’만을 외치는 것도 면피성 주술일 뿐이고, ‘결과의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이고, 평등사회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불평등 탈출 해법은 이렇다. ①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 ② 노동시간 8시간 법정제로 일자리를 나누는 방법, ③ 최저임금을 생활임금 수준으로 올리는 것, ④ 정부 고용 비중이 OECD 꼴찌인 6.5%인데 OECD 평균 15.5%로 고용을 늘리는 방법. 이런 방법은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해법들이다. 불평등 해소법을 모르고 있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을 바꾸고 만들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정답이다. 비정규직도 1998년, 2007년에 법을 만들어서 생긴 제도일 뿐이고, 원래는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법이었다. 일부 법의 긍정적 작용도 부정할 수 없으나 거꾸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차별을 합리화하는 정의훼손법으로 전락해 버린 법. 이런 법을 바꾸면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 법이 반드시 정의를 담보하는 이상적인 장치는 아니며, 정의를 구현할 수 없는 법은 없애고 바꾸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법은 해체 가능성이고, 정의는 해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도 행정부 수반으로서 법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으나, 법률 제정권은 없다. 짐이 곧 국가라고 행세하는 경찰국가 대장 박 대통령에게 평등사회 구현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바보짓이라는 점도 익히 알고 있다. 보다 더 궁극적인, 권력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조항은 공허하고 허무한 문장으로 다가오고, 허수아비처럼 느껴지는 현실이다. 국가의 주인에 해당하는 집주인을 임차인에 불과한 권력자들이 구박하고, 핍박하고 거꾸로 쫒아내는 행위를 수없이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평범한 시민이 느끼는 권력은 더러운 좀비의 칼일 뿐이다. 그동안 대통령은 물론 국회도 불평등 해소를 위한 법의 해체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총선에서 정당들은 더욱 보수·우경화의 깃발을 꽂았으니 앞으로 기대할 것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어찌 하겠는가. 현 정치지형에서 결국 기댈 곳은 입법기관인 국회밖에 없는 것을. 그런데 국회도 움직이지 않으면, 시민이 죽창 들고 불평등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써 반란을 일으키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보호가 필수적”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역사의 시간은 흘렀어도 폭군방벌론은 여전히 유효하며,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까지도 “악한 군주에게 저항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강도에게 저항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는 시민이 마지막 수단으로 죽창 들고 불평등 세상을 바꾸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는 역사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시민이 마지막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할 막중한 책무가 20대 국회에 있다. 다시 헌법을 꺼내들고 읽어본다. 제11조(국민의 평등)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자유와 평등은 인간의 존재를 완성하기 위한 필수·필요조건이다. 자유와 평등은 헌법의 두 바퀴여서, 어느 한 바퀴만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도 넘어지고 나아갈 수 없다. 시민이 죽창들 필요 없는 자유와 평등 국가 실현을 20대 국회가 풀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보태며.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71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