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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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의 역사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게 있을까?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단했던 진리도 시대가 변하면 물렁해지거나 부서진다. 영원하리란 사랑도 세월이 가면 식거나 사라진다. 권력의 철옹성도 쇠하거나 허물어진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이 아무리 권세가 높다한들 오래가지 못한다.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거의 모든 진리, 가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역사적인 것들은 시간의 침식을 거치면서 상대화된다. 기실, 역사 자체가 고정불변의 정태(靜態)가 아니라 가변적인 동태(動態)이지 않은가. 인간의 의지적 노력이 없다면 역사의 변화도 없다 항상(恒常)과 영원(永遠)이 없으니 역사 세계의 만물(萬物)은 가만 놔두면 알아서 유전(流轉)할까?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둬도 역사는 저절로 변할까? 그럴 리는 만무하다. 자연의 변화는 인간의 소망이나 기대와 무관하게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 역사의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 위에 생각을 쌓는 데 일가견이 있던 철학자 헤겔조차 인간의 정열이 없다면 세계사는 이성의 자기실현과정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역사의 변화는 자연적 필연성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적 노력에 의해 생겨난다. 노예제만 봐도 그렇다. 노예제도가 원래 나쁘다는 선험적 윤리 따위는 없었다. 노예들이 예속과 굴종을 거부하면서부터 노예제는 타파되어 마땅한 악이 되었다. 역사적 변화는 알아채기 쉽지 않다. 인간은 지구에 살지만 지구의 모든 일을 다 볼 수 있는 지구만한 눈을 갖고 있진 못하다. 장구한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난 숱한 변화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할만한 역사의 눈을 갖추기도 어렵다.(그 어렵고 힘든 일을 해냈다고 자부한 사람들도 없진 않았지만 ‘자부’를 ‘자뻑’=자만으로 바꿔 읽어야 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크고 근본적인 역사적 변화일수록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인간의 유한성과 인식의 불완전성, 역사적 변화의 심대함 말고도 역사적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역사적 변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 농간(弄奸)을 부리기 때문이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들의 농간 작가 최인훈의 역사적 통찰에 기대어 말하자면, 옳은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하더라도 역사가 저절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그런 변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것은 그런 사람들이 소수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옳은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하더라도, 그 정의로운 다수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보장 같은 것은 역사에 없다. 만일 거짓이라는 것이 거짓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효력이 없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불의와 혼란은 아예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거짓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이 옳지 않았거나 그런 민중의 요구가 약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득세했는가, 87년 6월 항쟁에서 내건 군부독재의 종식이 정의롭지 않아서 노태우정권이 들어섰던가, 과연 ‘세월호’ 진상을 규명하려는 요구가 부당하고 약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인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 · 인간다운 세상을 지향하는 변화가 일어나면, 자기 정체가 탄로 나서 손해를 보는 자들은 역사적 변화를 방해하려 했다. 거짓이 밝혀져서 문제가 풀리면 밑지는 자들은 한사코 거짓의 힘으로 현상유지=사실상 역사적 반동(historical reaction)을 획책해 왔다. 그들은 변화를 ‘무질서’ 혹은 ‘혼란’으로 매도해 왔다. 통제할 수 없는 변화로 인해서 자신이 누려온 ‘신성불가침’의 특권이 흔들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백날 (탄핵을) 외쳐봐라,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촛불을 들어봐야 너만 손해고, 너 인생만 고달파진다>, <지금부터 진실과 민주를 운운하는 자들은 혼란을 부추기는 불순세력이다>라는 수사적 무기를 동원한다. (앨버트 허시먼(A. O. Hirshman)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이근영 옮김)에서 이와 같은 수사를, 프랑스혁명 이후 서양의 기득권 세력이 구사한 대표적인 세 개의 “반동명제”라고 손꼽은 다음에 각기 <무용(無用)명제>, <역효과명제>, <위험명제>로 명명한 바 있다.) 남과 다른 특권을 누리려는 기득권 세력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의 옹호자들이다. 그들은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고, 수용할 생각도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법전 바깥의 현실로 나오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언필칭 오피니언 리더니 퍼스트 레이디였다느니 경제성장의 주역이니 해대며 현실세계에는 <지도하는 주체인 나-지도 받아야 할 남>이라는 차별이 있는 게 정상이라고 농간을 부린다. 자기들처럼 믿는 자들은 정상이고 순수이지만, 믿지 않고 현실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불순하고 위험하니 ‘발본색원’하여 격리 · 배제 · 처벌하려 든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실감(實感)은 수사(修辭)보다 힘이 세다. 그러나 정작 위험하고 착란에 빠진 무리는 자신들이라는 것을 모른다. 개돼지 취급한 대다수 국민들이 ‘니들이야말로 치료제라고 우기는 병균’임을 이미 감지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지들이 내세운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민의 뜻을 대의할 능력은 고사하고 애당초 그럴 의사와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것을 경시하거나 호도하려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남녀노소는, 이제 기득권 세력이 인민주권을 불완전하게 대의하는 게 아니라 대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촛불집회를 통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거나 않았더라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봤다. 민주공화국의 참된 뜻과 인민주권의 힘을 실감했다. 물론, 개인적 삶에서건 역사의 변화에서건 일다운 일이라면 그게 저절로 쉽게 될 리 없다. 응당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리했더니, ‘따로 또 같이’ 촛불 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더니, 역사가 조금 변하더라는 것을 실감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이로운 실감(實感)이야말로 저들의 경악스런 수사(修辭)를 물리칠 최대의 무기다. 그러니 허투루 무기를 내려놓아서는 안 될 줄 안다. 아직 ‘실감의 시절’이 ‘실제의 시대’가 되기 않았으므로! 희망과 절망은 고작 한 글자 차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2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48 | 추천: 0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비극은 왜 되풀이되는가. 비극을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비극을 잊어버리면 문밖에 또 다른 비극이 우리를 기다린다. 비극을 기억에서 가장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비극에 가장 책임이 있는 동시에 망각을 통해 가장 이득을 얻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라는 ‘단군 이래 최대 비극’을 통해 뼈저리게 그걸 느꼈다. 이제는 대통령이 맞는지조차 알쏭달쏭한,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박 모 씨 얘긴 더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박 모 씨를 쫓아내고 나서 책임감있는 국가를 같이 만들기 위해 무척 중요한 문제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한마디로 ‘국민안전처를 어찌할꼬’에 관한 고민의 산물이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한다. 2년 전 국민안전처가 왜 생겼는가? 세월호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국민안전처에게 세월호란 이름을 입에 담기만 해도 큰 일이 날 것 같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볼드모트’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국민안전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활빈당에 뿌리를 둔 조직인건가. 홍길동은 명백히 아버지를 인지했다. 하지만 국민안전처는 아버지를 숨기느라 바쁘다. 국민안전처는 2014년 11월19일 출범했다. 국민안전처는 출범 이래 지금까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사와 분석, 연구 과제라도 한 번 한 적이 있었을까? 국민안전처 장관 박인용이 지난달 출범 2주년을 맞아 소속 공무원들에게 보낸 공개 편지 어디에도 세월호는 없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지난달 23일 한국행정연구원이 주최하는 '재난안전정책연구' 공동학술대회에서는 국민안전처 차관 이성호가 기조강연을 했다. 그는 그동안 국민안전처가 이룬 성과를 자세히 설명했다. 안전처가 문을 열게 된 배경도 설명했다. 어디에도 세월호 얘긴 없었다. 심지어 국민안전처 출범 배경을 설명할 때도 세월호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뿌리를 숨기느라 바쁘니 자신들이 뭘 해야 하는지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성호는 기조강연에서 국민안전처가 갖가지 성과를 자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도로복구 실적이었다. 그걸 왜 국민안전처가 내세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로복구는 국토교통부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할 일인데 말이다. 예산 낭비 논란을 빚은 안전신문고 애플리케이션은 또 어떤가. 국민안전처는 예방이나 안전교육을 부쩍 강조하는 듯 한데 그것 역시 국민안전처 업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전이란 이름 붙은 게 모두 국민안전처 소관은 아니다. 식품안전을 다루는 1차 책임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하는 1차 책임은 교육부에 있다. 군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안전사고 주무부처는 국방부다. 그럼 국민안전처는 뭘 해야 할까. 재난대응이다. 자연재난이나 사회재난이 일단 발생하면 안전처가 총괄 지휘감독을 해야 한다. 지금 국민안전처에 필요한 건 안전캠페인이나 예방교육이 아니라 좀 더 실질적으로 현장 인력들이 자율성과 책임성을 갖고 재난대응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국민안전처는 장관과 차관이 모두 직업군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상당히 군대식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길 자주 듣는다. 유감스럽게도, 군대라는 곳이 얼마나 현장인력에게 자율성과 책임성을 부여하고, 안전문제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곳인지 군대 갔다 온 나는 아는게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는 꼭 지적하고 싶다. 박인용은 취임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아침에 상황점검회의를 한다. 그게 재난대응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말도 없이 회의 참석하느라 국민안전처 본부 공무원들이 겪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지난해에는 회의 준비 때문에 국민안전처 주변에 방까지 구했던 실장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국민안전처는 매우 독특한 조직이다. 외국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도 어렵다. 정권 바뀔 때마다 정부조직을 이리 붙였다 저리 붙였다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명확한 조직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가장 적합한 조직구조를 만들고 적절한 예산과 인력을 배치하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연 국민안전처가 ‘다시는 세월호같은 비극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출생의 비밀을 언제까지 숨기고만 있을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2월 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60 | 추천: 0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의 불찰로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 번 깊이 사죄드립니다. 이번 일로 마음 아파하시는 국민 여러분의 모습을 뵈면서 저 자신 백 번이라도 사과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 해도 그 큰 실망과 분노를 다 풀어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제 가슴이 더욱 무너져 내립니다. 국민 여러분, 돌이켜보면 지난 18년 동안 국민 여러분과 함께 했던 여정은 더없이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1998년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부터 대통령에 취임하여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단 한 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저의 큰 잘못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경위는 가까운 시일 안에 소상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그동안 저는 국내외 여건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길인지 숱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이 자리에서 저의 결심을 밝히고자 합니다. 저는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말씀해주시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저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하루 속히 대한민국이 혼란에서 벗어나 본래의 궤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정치권에서도 지혜를 모아 주실 것을 호소 드립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어린 시절, 제가 살았던 도시 변두리 동네에 제정신이 아닌 분이 살았습니다. 저희 집에서 두 집 건너, 근호네 엄마입니다. 근호 엄마는 비가 오는 날이면 부엌칼을 들고 나와 온 동네의 빨랫줄을 끊고 다녔습니다. 평소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근호 엄마는 날이 궂으면 그 정도가 더 심해졌습니다.’ 라고 글을 시작해놓고 오래전 기억을 더듬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를 ‘경청’했습니다. 거짓말처럼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아마 근호 엄마 이야기로 시작해서 버스나 기차 종점에는 왜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꼭 한두 명쯤 있는 걸까 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마땅히 할 말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기가 차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기가 막혀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뜬금없이 근라임 담화문을 옮겨놓고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죄송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말인지 방귀인지도 구분이 안 됩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드리면서 제정신이 아닌 저를 용서해주실 것을 호소 드립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1월 3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81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법치주의는 우리 헌법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핵심입니다. 법치주의가 무너지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지배할 것입니다. 사람에 의한 지배의 위험성을 실감한 인류는 법에 의한 지배를 근대 입헌주의 원리로 채택하였고, 현재도 마찬가지 입니다. 박대통령 게이트의 핵심은 법치주의 유린이고,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닌 박근혜라는 개인의 지배가 초래한 국헌문란입니다. 그래서 대통령님의 헌법과 법치주의 관련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지면상 간략히 몇 개만 볼 수밖에 없어 서운하기도 합니다. 2013. 4. 25. (법의 날 축사)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원칙 아래 공정하고 엄정한 법집행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보다 성숙한 법치주의를 구현해서 국민이 행복한 희망의 새 시대를 열어갑시다.” 2015. 10. 21. (경찰의 날 축사)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세력에게는 엄정한 법집행을 해주기 바란다. 법의 권위가 바로 설 때 진정한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이 가능하다.” 2016. 10. 21. (경찰의 날 축사) “법위에 군림하는 떼법 문화, 불법과 무질서가 용인되는 사회에는 발전도, 희망도, 미래도 없다. 사회근간을 흔드는 헌법파괴행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 지당한 말씀을 대통령님께서 지키지 않으시고, 거꾸로 짓밟은 것이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이라는 오늘의 사태를 야기하였다는 사실은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고 저도 배웠는데, 그것도 틀렸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니 제 혼이 비정상이 되었습니다. 대통령만이 법치주의 예외인 법치주의는 법치주의가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법치주의와 헌정을 유린하신 대통령님께서는 검찰 수사까지 뭉개면서 부산 엘시티 비리 의혹 사건에 대해서는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하라는 지시를 하셨다니 입이 그저 딱 벌어질 뿐입니다. 대통령님 말씀은 나는 국가 원수이니 법의 예외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치주의에 대한 모독이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역사는 나치 치하에서 횡횡했던 형식적 법치주의가 민주주의를 파괴한 주범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형식적 법치주의에서는 권력이 법률을 사적 이익보호를 위한 장치로, 개인을 억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통령님과 순siri는 형식적 법치주의마저 유린하였습니다. 그런 사실을 개·돼지과에 속하는 저는 정말 몰랐으니 얼마나 아둔한 사람입니까. 개·돼지 아닌 분들은 다 알고 있었던 대통령님의 국헌문란 행위였는데 말입니다. 대통령님과 청와대 참모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돈을 챙긴 행위가 범죄단체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도 대통령님은 독야청청인 듯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하라는 지시를 어떻게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두툼한 배짱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5%를 제외한 전 국민이 분노하고,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광장에 모여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데도 대통령님께서는 헌정 중단은 안 된다고 하시면서 국민에게 선전포고하시는 오만한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배짱을 튕길 수 있는 이유는 임기 중 형사소추 불가능이라는 최강의 ‘헌법 방패’로 보입니다. 모든 것을 막아 낼 수 있는 어벤져스의 캡틴 아메리카 슈퍼 히어로 같은 방패를 갖고 계시고, 우주의 기운이 넘치시니 무서울 게 없으시다는 자신감입니다. 하기야 오죽하면, JP께서 “5000만 국민이 내려오라 해도 안 내려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대통령의 실질적인 2선 후퇴나 하야는 군 통수권 등 국가원수에게 부여된 권한을 양보·포기하는 것으로 반 헌법적이고, 헌정 중단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기괴하기까지 합니다. 헌법재판소는 ‘국민은 최고의 헌법제정권력이기 때문에 헌법의 제정·개정에 참여할 뿐 아니라 헌법전에 포함되지 아니한 헌법 사항을 필요에 따라 직접 형성할 수 있다.’고 판시한 사실도 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 주권자이기 때문에 헌법을 제정할 수도 있고, 심지어 헌법을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헌법 원칙입니다.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헌법 정신에 다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법치주의를 유린한 대통령님의 2선 후퇴나 하야는 헌법제정권력인 국민 앞에서는 반헌법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헌법질서에 부응하는 행위입니다. 주인이 잠시 빌려준 것을 되찾아 오겠다는 것이 어찌하여 반헌법적입니까. 유린된 헌정질서를 다시 세우자는 국민의 함성이 왜 초헌법적인 여론 몰이입니까. 4·19 혁명과 6월 민주항쟁 등의 역사가 이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통령께서 비장의 카드로 움켜쥐고 있는 ‘헌법 방패’도 결코 ‘만능 방패’가 아니며, 헌법제정권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헌정 중단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헌법은 헌정 중단을 이미 예정하고, 대비하고 있습니다. 헌법에서 규정하는 대통령 탄핵제도, 대통령 궐위 등에 대한 대비조항 등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헌정 중단 역시 헌법에서 정하고 있기 때문에 헌정 중단 때문에 하야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학자들은 헌법에서 인정하고 있는 헌법 정지 뿐만 아니라 헌법에서 인정하지 않는 헌법 정지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헌정 중단이라는 말씀이 옳은 말씀이라 하더라도, 이는 헌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헌법 회복 과정일 뿐입니다. 대통령 말씀대로라면 헌법과 법치주의가 파괴되었어도 그냥 두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까. 따라서 대통령님 말씀은 어불성설이고 궤변입니다.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헌법 수호 책무를 부여하고 있는데, 대통령님께서 스스로 헌법을 파괴하고 국헌을 문란케 하시고, ‘모든 길은 순siri로 통한다.’는 원칙 아래 헌법 수호 책무도 양도하고 포기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순siri에게 양도·포기하는 것은 합헌이고, 국민에게 양도·포기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하니 저 같은 개·돼지 머리로는 어안이 벙벙합니다. 대통령님의 헌정 중단이라는 무거운 고민과 걱정은 이제 내려 놓으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헌정 중단이라는 무거운 짐은 국민이 현명하게 나누어 해결할 테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국민이 대통령님께 퇴로를 열어 줄 아량이라도 있을 때 스스로 물러나시어 그 좋아하시는 ‘길라임’ 드라마와 연예인을 실컷 보시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시는 것이 법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 진정한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을 이루고, 희망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사회근간을 흔드는 헌법 파괴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이 말도 모두 대통령님 말씀이십니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1월 2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81 | 추천: 0
미즈 최순실 : 기억을 위한 투쟁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 미스 리플리, 미즈 최순실 몇 년 전 한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한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아! 그…’ 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한참이나 철 지난 드라마가 떠오른 건 최순실이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세상’에는 없던 사람으로 인해서다. 호텔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우연한 거짓말 한 마디로 신데렐라도 부러워할 성공가도를 달려가게 된다. 그나마 드라마라고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은 여주인공이 돈도, 학벌이나 변변한 뒷배도 없는, 요즘 말로 ‘흙수저’인데다 운까지 없어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찍소리 못하고 꾹꾹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낯익은 우리 이웃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건, 거짓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파국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드라마로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이 바라는 머릿속 세상을 진짜로 믿고, 자신이 놓인 현실을 부정하며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을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병리 현상을 말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신분 상승 욕구에 사로잡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다 결국은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살게 되는 인격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자신이 한 거짓말마저 사실로 믿기 때문에 스스로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때문에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이란 미로에 갇혀 서서히 인간성을 상실해가다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제 우리는 우리 눈앞에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이 체험이 너무도 부조리해 현실인지 상상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가늠하기 힘든 현실 앞에 ‘분노’마저 저만치 떠내려가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억’만큼은 결코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함께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진 출처 - 필자 - 기억을 위한 투쟁 사람은 고통스런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이 부정적인 기억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인 외상을 최소화하려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이 사람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걸 보면 자연에서도 오랜 연원을 가진 기제임이 분명한 듯하다. 기억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면, 생존을 위해 체득된 경험을 유지, 저장, 재생하기 위한 인간의 능력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살아남기 위해 학습과 정보의 재생을 수행하고, 관련된 정보 조각을 서로 연결시키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억력이 좋을수록 생존력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기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기제가 발동한다는 것은 그 기억이 오히려 개체의 생존에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참담한 일제 강점기에 이어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망각을 생존비법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 땅의 민중들에게 ‘기억하기’는 또 다른 아픔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 시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끝나지 않은 친일 청산 문제가 그렇고 위안부 문제, 민간인 학살, 제주 4·3항쟁, 군사독재와 정치공작…,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까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런 기억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왜인가. 당장은 아프지만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새살이 돋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과의 싸움 속에서 이제 그만 내려놓자고, 잊자고 하는 이들 대부분은 그런 말을 꺼낼 자격도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한 달여 새 우리 국민들의 기억에 상상도 못하던 블랙홀을 만들어놓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이름으로 불린 ‘아버지 박정희’가 그런 존재일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작업이 역사 국정교과서 발간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 돼버렸다. 이제는 '최순실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되게 됐으니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꼴이 됐다. ‘최태민’이라는 이름을 역사 속에서 근근이 지워갈 무렵에 터진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대통령이라는 기억을 국민의 뇌리 속에 새겨놓게 생겼다. 과거의 대통령들이 어른들의 입에서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코흘리개 아이들에게까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기억과의 투쟁, 역사와의 투쟁에서 참패한 지도자로 각인될 것이 분명하다. 그를 추켜세우던 이들도 마찬가지다. - 싸워야만 하는 이유 하지만 역사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방향으로만 전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기억하지 않을 때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다카키 마사오’에 대한 기억을 잃은 세대로 인해 그의 망령이 되살아나 오늘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억은 애초부터 없다. 개인의 과거 기억 또한 최소한 ‘부모’ ‘형제’ ‘가족’ ‘친구’ 등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개인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있고, 불완전하고, 독립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집단을 통해서 혹은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기억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를 새롭게 인식하며 되살려내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개인의 기억 또한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집단 기억’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우리가 직접 겪어보지 못했던 세월호 참사의 아픔부터 멀리 6.25전쟁의 고통까지 오늘 나의 것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이 ‘집단 기억’ 때문에 가능하다. 사진 출처 - 필자 우리 세대는 ‘최순실 게이트’를 분출하는 ‘광장’의 기억으로 승화시켜가는 중이다. ‘서울광장’ ‘광화문광장’은 그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집단 기억’이 켜켜이 쌓이고 역사로 열매 맺어가고 있는 장이다. 이 광장의 기억을 놓칠 때, 함께 기억하지 못하고 비켜설 때 ‘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부조리는 미래 어느 날 또 어떤 비극으로 닥칠지 모른다. 이것이 광장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 기억과의 싸움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은 2016년 11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75 | 추천: 2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고작 한 달 전의 뉴스였다. 새누리-한자로는 新天地-당 대표님의 밀실단식.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결국 결말은 “언니 나 여기 있어 잉~. 순시리 언니껀 내가 학실히 막고 있자너 나한테도 눈길 좀 줘여” 아양 떠는 초딩용 유머로 끝났지만. 그분이라고 쪽팔리는 걸 몰랐을 리가 없다. 언니가 베푸시는 송로버섯에 샥스핀 만찬에 초대받아 포식한 직후니까 다이어트용 단식이라는 비아냥도 미리 짐작 했을 테고 저 냥반 며칠 갈지 우리 내기할까? 나 같은 촌부의 술자리 안주감으로 잘근잘근 씹힐 것도 알았을 것이고 명색이 그럴듯한 완장까지 찬 냥반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쯧쯧~하는 조롱도 극복할 대상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굴하지 않고 국회의장 니가 나가나 내가 죽나 끝까지 해보자는 의지와 패기가 의사당 청색 돔의 피뢰침만큼 삐쭉 솟았으니 가상치 아니한가. “그래 모름지기 마름짓 할라믄 저 정도는 해야지. 신의 없이 제 살길만 찾는 세상에 오랜만에 충성스런 의리를 발견하니 내가 다 흐뭇허구먼.” 적어도 보름은 갈 줄 알았던 그분의 단식이 고작 일주일 만에 정리된 뒤의 내 관전평이었다. 7이라는 단위가 그렇게 허무한 숫자인줄도 그때 처음 알긴 했지만. 괜히 당 대표님 단식만 얘기하면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 같아 뭐 비스므레한 사람 없나 다시 머리를 굴려본다. 그보다 좀 뒤에 유행했던 지금은 퇴직한 경찰총수 님의 말씀도 인상적이다 “코너링이 좋아서” 이걸 허무개그라고 해야 하나. 아재개그라고 해야 하나. 초딩은 잘 못 알아듣고 중딩 정도 되면 “너 듁는다” 정도의 시니컬한 댓글을 얻을만한 명언을 남기신 그분. 그분 역시 쪽 다 파는 일이란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한다. 마치 그분(정확히 누군지는 모름)에 대한 충성이란 말 외에는 아는 단어가 없는 사람처럼. 國民학교때 “召使아저씨”라 불리는 분이 있었다. 학교의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서 하시는데 선생님들께는 꽤 친절하셨던 분이셨다. 다만 그분이 축구부 코치를 맡으면서는 나 같은 후보들조차도 괴로웠던 기억이 있다. 매일 구보에 오리걸음에 어쩌다 빠따질 까지. 그분의 인품은 따뜻했던 것 같은데 유독 훈련 때는 한 성질부리고는 하셨다. 그때는 召使가 무슨 의미인줄 몰랐다. 어제 팟캐스트 녹음하면서 소제목을 “따까리의 비애? 꼬붕의 곤조?” 정도로 정해놓고 선곡을 하다 보니 “惡의 召使”란 일본 애니메이션 OST가 나오는데 번역이 하인이다. 그제서야 국민학교때 잠시 품었던 용어에 대한 해답을 얻다니. “너 이** 한따까리 할래?”는 “당신 내 밑에서 한번 박박 기어보실래요?”의 다른 표현이다. 따까리. 어느 조직의 밑바닥에서 하찮은 일 도맡아 하는 하찮아도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꼬붕이 있다. 앞서 얘기한 마름 짓도 딱히 다를 건 없다. 천석지기 만석지기 지주의 오른팔이 되어 소작인을 관리한다는 꽤 쓸 만한 완장을 두르고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는 특징이 있다. 모셔야할 주인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지위를 높여줄 존재가 주인임을 명확히 알기에 주인 앞에선 생목숨 바칠 듯이 생색내며 같은 류의 따까리들은 생까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그러다 자리가 쪼끔 높아지면 또 특징이 생긴다. 자기 아랫것들은 처참하리만큼 짓밟는 다는 것. 질문하다 말 막히면 무조건 “사퇴하세욧” 외치는 수준은 봐 줄만 한 것이고 304명의 산목숨이 사라져간 바다를 조롱하며 선체의 인양을 반대 한다 물대포로는 골절이 안 되니 부검을 강행해야 한다, 따위의 비인간적 언사를 스스럼없이 내뱉기도 하고 “너 나 누군지 몰라?” 한마디로 한 가장의 밥줄을 끊거나 한 인생을 나락에 빠트리기도 한다. 행세하는 한줌 권력을 국민여러분이 주셨다고 말로는 떠들지만 실제로 그리 여기는 마름은 없다. 제 나와바리에서는 다들 지가 좀 먹어준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봤자 召使 나부랭이들이다. 순실 씨 얘기로 나라밖까지 술렁인다. 너무도 지독한 마름을 곁에 두었다고 그네 씨에게 울화통 터트리는 분들도 꽤 계시나 순실 씨도 그네씨 사람 만들라고 무척 오랜 시간 공들인 것도 같다. 일가에 측근에 그 많은 재산 끌어 모으고 삐딱하게 구는 아랫것들 단칼에 자르고 얼굴 이쁜 놈들 팍팍 밀어줘 출세시키고 그게 다 그네 씨에게 수 십년간 마름짓한 당연한 월급 봉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개성공단은 삐끼놈이 문닫고 일본군 위안부는 호빠놈이 타결하고 세월호는 무당년이 침몰시켰다는 한탄이 온 나라를 요동친다. 바야흐로 마름들의 세상이다. 마름 욕할 것 없다. 걔들은 적어도 자신의 주인이 누군지는 안다. 그러니 그 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마름 짓 한다. 마름의 정석코스를 성실히 수행하는 중이다. 오직 생전 밥 한끼 안 해본듯한, 택시한번 안 타본듯한, 젓가락질은 제대로 하나 몰라 싶은 자신을 여왕이라 생각하는 그네 씨만 모른다. 그 자리를 누가 앉혀놨는지. 11개월이나 정무수석이라는 마름자리에 앉혀놓고도 한 번도 독대를 허락하지 않은 그네께 살짝 귓속말로 속삭여 주고 싶다. “그네 씨가 앉혀놓은 저 마름것들 하는 것 봤지? 주군말이면 찰떡같이 알아듣자너. 그네 씨 그 자리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인 우리가 앉혀놓은 거거든. 저 소리 들려? 얼렁 내려 오라자너. 그네 씨의 주군인 국민들의 말을 들으라고 마름의 정석은 좀 배우라고”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그나저나 기껏 마름짓꺼리나 할라고 머리 터지게 공부해서 그 좋은 대학 나와 유학가 박사 받아 그 짓하지는 않았을 건데 참 그 넘들의 뇌구조도 신기하기도 하다. 역사가가 제대로 기록한다면 결국 죄다 召使 인생인데. 셰익스피어의 말 하나 둘러대고 자야겠다 졸립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1월 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54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고전적 작품, 고대의 신화, 세계 곳곳의 인류학적 자료들을 분석하면서, 모방이 인간 행위의 동력이자 문명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상세하게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인간은 ‘모방하는 인간’(호모 미메티쿠스)이다. 모방의 근간은 타인과 같아지거나 그 이상이 되려는 욕망이다. 욕망은 배고픈 이가 음식을 갈망하거나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식의 좁은 의미의 욕구와 다르다. 그보다는 과히 배고프지 않은데도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어떤 ‘모델’(매개자)을 보면서, 그 식당에 가고 싶다거나 실제로 찾아가도록 하는 동력에 가깝다. 욕망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주체적 감정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 그 누군가로부터 빌려온 감정이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의 감정에 의존해 고양시키려 한다. 늘씬하고 훤칠한 광고 모델의 욕망을 통해서 그 모델 너머의 성을 욕망하고, 그 모델이 소유한 상품을 욕망하는 경우가 그 사례다. 자본을 향한 어떤 이의 욕망을 모방적으로 욕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키려는 시도가 자본주의를 낳고 키우는 것도 비슷하다. 인간은 그저 물질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사용자를 상상하며 그가 누릴 것이라고 암시되는 내용에 종속된다. 권력도 모방 욕망의 집결지다. 인간은 더 큰 권력자를 매개로 그 이상의 권력을 모방적으로 추구한다. 그 과정에 너를 모방하며 넘어서려는 권력욕들이 서로 충돌하지만, 그 충돌로 인한 희생과 아픔은 안중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마치 사물처럼 간주하면서, 자신의 권력욕에 걸림돌이 되거나 그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배제해나간다. 지라르에 의하면, 이렇게 다양한 여러 모방 욕망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면서 집단 구성원 서로가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는 복잡한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그러다가 걸림돌이 집단화돼 전체의 문제가 되면, 집단적 걸림돌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희생양’을 만든다. 희생물로는 복수할 수 없는 주변적 존재가 선택된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배제되어 있거나 주변적인 인물들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주변인 혹은 경계인은 주류에서 밀려나 있기에 복수할 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희생양 시스템’이다. 오늘날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은 국가의 역할, 더 정확하게는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았다는 권력의 역할이다. 권력은 사회적 무질서를 경계한다. 설령 일부 국민을 희생시키더라도 중심질서가 잡히기를 바란다. 그런 뒤 자신의 능력 탓이라며 자신의 확대를 시도한다. 이것이 모방적 권력욕의 한결같은 태도다. 가령 ‘세월호 사건’으로 사회가 흉흉해지면 권력자는 희생으로 인한 고통을 국가화하려 시도한다. 수백 명이 죽은 고통스런 사건을 국가의 위기로 몰아가고, 희생자를 추상화해 희생을 국가가 기억하겠다고 한다. 개인과 가족의 고통은 가능한 희석시킨다. 백남기 농민의 희생을 기억하고 관리할 최종적 책임도 국가에 있는냥 호도한다. 하지만 이 때의 국가는 지극히 추상적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서류가 오가고 전화를 주고받지만, 그 속에 아픔에 대한 공감은 없다. 아픔을 추상화시키고 행정화하다보니, 아픔에 대한 기억의 주체도 사실상 없다. 그 비인간성이 들통 나 저항 세력이 형성되면, 권력은 다시 이들을 희생시키려 한다. 더 많이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을 지키는 길에 나선다. 개인의 기억은 주변화하고 국가의 기억을 전면에 내세운다. 기억의 중심화, 국가화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 혼란이 증폭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일부 개인에게 지우면서 자신의 책임을 완수한 듯 말한다. 이것이 권력욕의 자기 유지 방식이다. 그러다 혼란이 가라앉을 즈음 되면 이들의 희생 때문에 국가가 든든해질 수 있었다며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벗어나는 개인의 기억들은 가능한 제한한다. 기억의 최종적 주체는 국가라며 기억의 국가화를 지속한다. 그 과정에 희생자를 낳은 폭력은, 지라르의 표현마따나, 집단을 유지시켜주는 ‘성스러운 폭력’으로 ‘성화’된다. ‘성스러운 폭력’은 기억의 집단화를 통해 중심 질서를 잡아가려는 권력의 유력한 자기 유지 장치다. 사진 출처 - jtbc 권력은 자기중심적이다. 국민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 유지를 도모할 만큼 냉혹하다. 이 속성에 철저할수록 폭력적 구조를 남의 탓, 심지어 국민의 탓으로 돌린다. 그 탓을 찾는다며 다시 희생자를 만든다. 그렇게 증폭되는 희생의 크기가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능가할 때까지 권력은 자기중심성을 놓지 않는다. 그러다가 아픔을 기억하는 세력이 아픔을 지우려는 세력보다 커질 때가 온다. 권력의 변화 혹은 교체기다. 권력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져 자기 교체의 길로 들어선다. 새로 구성된 권력도 더 큰 권력에 대한 모방 욕망에 휘둘려 같은 길을 가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순환 고리가 끊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가 아픔을 겪고 있다면 그 때가 권력의 교체기다. 그 때 자의로 물러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권력욕의 속성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도 교체기를 향한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0월 2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09 | 추천: 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해마다 10월이면 노벨문학상 소식이 들린다. 몇 해 전부터 ‘한국문학에도 노벨문학상을’이란 분위기가 떠도는 까닭인지 주변의 관심이 더 높아진 듯도 하다. 물리학상이며 의학상이며 화학상 같은 다른 분야에서 가능성이 낮은 데 반비례해 문학에의 관심이 자라난 건지, 노벨상으로써 점점 시들어가는 한국문학에 물 한번 듬뿍 주고 싶은 건지. ‘나라 없고 가난할지언정 문화만은 빛난다’던 식민지시기부터의 자부심이 세계적 공인을 받지 못한 듯해 우리 스스로 불안한 건지. 노벨상만 문제라면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있었지만 그건 지금으로선 누구에게나 불편한 기억에 가깝고 말이다. 노벨상이 제정되던 1901년은 유럽에서 ‘문학의 시대’가 다 끝나지 않은 때였다. 에밀 졸라와 레프 톨스토이가 아직 살아 있었고 토마스 하디가 활동 중이었다. 그런데도 스웨덴 한림원은 제 1회 노벨문학상을 프랑스 고답파 시인 쉴리-프리돔에 안겨주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로도 한동안 노벨문학상의 ‘보수적’ 행보는 이어졌다. 제 2회 문학상은 <로마사>를 쓴 역사학자 몸젠에게 안겼지만 제 3회째는 입센을 제쳐두고 같은 노르웨이의 극작가 뵈른손을 수상자로 지명했고 이후로도 키플링이나 라게를뢰프처럼 애국적이거나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작가를 편애했다. ‘숭고하고 건전한 이상주의’. 초기 노벨문학상의 심사 기준이었다는 이 문구는 인생의 추악상에서 눈 돌리고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는 데 동원되곤 했다. 작품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유럽 문학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입센을 끝내 외면한 것이 그 증거로 대표적일 것이다. 하긴 입센은 무지막지하게 이상을 조롱한 작가가 아니었던가. 스스로 고결한 이상주의자입네 하면서 생활에선 무능력하고 권위적인 가부장을 그려낸 <들오리>에서 입센은 독설가인 조연을 내세워 “그 ‘이상’인지 뭔지 하는 잘난 말은 쓰지 않기로 합시다.”라며 일갈한다. “‘거짓’이라는 편리한 말이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소?” <들오리>의 결말은 가식적 가부장 때문에 그 선량한 딸이 자살을 택하는 파국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울부짖고, 그 옆에서 누군가는 “슬픔이 저 남자가 품고 있던 숭고함을 얼마나 일으켰”는지 보라며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독설가는 여전히 냉정하다.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면 대개는 숭고한 마음이 드는 법이지. 하지만(…) 언제까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딸의 죽음을 파티의 감상용 여흥으로나 쓰게 될 거라며 빈정거리는 독설가는, 그러니 ‘이상’의 강요를 그만두라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 이상의 요군지 뭔지를 강요하러 오는 오지랖쟁이가 우리 가난뱅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둬”야 한다며 연극의 종막을 고한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입센이라면 나부터 <인형의 집>을 연상하지만, <인형의 집>은 그렇듯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삶과 세계의 추악상을 똑바로 보는 데서 다시 모든 걸 시작해야 하는 입센의 일관된 생각이 낳은 작품 중 하나일 뿐이다. 자연주의의 파란을 겪었음에도 보수적 이상주의가 득세하고 있던 유럽 문단에서 그런 입센의 목소리는 위험한 것이었다. 종교의 위선과 결혼의 허위를 공격하고 성병 문제까지 들먹인 <유령>은 공연하는 곳마다 상연 금지며 관객의 분노에 찬 항의 같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입센 자신의 전반기에는 이상주의적 관습에 충실한 희곡을 창작한 바 있지만, 변방 노르웨이 출신이요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했던 입센으로선 낡은 ‘이상’을 끝끝내 믿을 수는 없었나 보다. 그리고 한 세기가 넘어 노벨문학상은 백 명이 훌쩍 넘는 긴 수상자 목록을 갖게 됐다. 역대 수상자 중 무려 여덟 명이 스웨덴 작가라는 노골적인 편파성을 논의로 하더라도 노벨문학상 주변은 늘 시끄럽다. 역대 수상자 중 적잖은 수는 문학적 선택이라기보다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직후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양됐을 때는 펄벅을,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패전국 독일의 반전 작가였던 헤세를, 몇 년 후에는 영국 수상 처칠을, 알제리전쟁이 한창일 때는 알제리를 사랑하면서도 독립에는 반대했던 카뮈를. 어쨌거나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서 노벨문학상은 그때마다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어쩌면 그 논란으로써 문학의 역사에 기여해 왔다. 밥 딜런을 수상자로 발표한 올해의 결정도 그렇듯 논란으로써 문학에, 문화에, 세계에 기여하는 바 있으리라 믿는다. 통쾌하면서 살짝 씁쓸한, 지레 웃어넘겼으나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하는, 그런 마음인데, 하긴 ‘노벨문학상’이란 부문의 제정 자체가 19세기 말~20세기 초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다. 노벨음악상, 노벨미술상, 노벨예술상이나 노벨문화상이면 더 나으려나. 문학이 고립될 대로 고립된 지금, 문학이 감당해 왔던 몫은 어떻게 이어지고 찢기고 재생산되려나. 그렇지만 스웨덴 한림원, 기왕 용감하려면 더 용감한 선택은 없었을까? 아니, 밥 딜런이 상을 받겠다고 나서긴 할는지 원.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38 | 추천: 2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즘 법정에서 북한영화를 재생하여 보는 경우가 잦다. 증거물로 압수한 동영상의 경우 증거조사의 방법은 재생이다. 공소사실에 이적표현물로 나오는 북한영화를 법정에서 재생해서 보는 것은 형사절차에서 보장되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북한영화를 법정에서 재생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 충실한 재판을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북한영화에 나오는 주인공과 스토리를 알아야 하겠지만, 영화 제목만 봐도 북한의 지도자를 찬양하는 이적성이 있음이 명백한데 계속 전체를 봐야 하는가 묻는 검사와 판사들을 상대로 북한 창작물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는가라는 주장은 고급 인력의 시간을 낭비하는 막무가내 주장으로 치부되곤 한다. 어떤 검사는 북한영화의 상세한 내용을 변호인은 잘 알고 있지 않냐며, 잘 알면서 꼭 법정에서 전체 내용을 재생할 필요가 있냐고 한다. 변호인이 아는 게 무슨 상관이냐며 증거조사의 주체인 재판부가 북한영화의 내용을 잘 알도록 하는 것이 재판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요즘 두 세 차례 법정에서 북한 영화를 1시간 30분 정도 재생하여 보고 있다. 요즘은 기술이 발전해서인지 디지털 저장매체에 담긴 북한영화의 수량이 수백에서 수천편이 된다. 그 중에서 몇 편을 취사선택하여 이적표현물로 기소하면 좋으련만 검사는 하나도 남김없이 별지 이적표현물 목록까지 만들어 공소장을 만든다. 검사는 기소 내용을 줄일 생각은 않고 증거조사를 대충 하자고 생난리를 피운다. 변호인으로서 단호하게 북한영화 전체 내용의 재생을 요구하고 있다. 검사도 판사도 대충 보고 제대로 스토리 전개도 모른 채 북한영화라는 이유로 그 가운데 북한 지도자를 찬양하는 일부의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기계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양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의뢰인 중에는 북한영화를 하나하나 꼼꼼히 다 본들 무죄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괜히 판사를 피곤하게 만들어 찍히지 않을까 걱정도 한다. 판사들도 북한영화를 법정에서 재생하여 보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닌지 전부 재생을 하기로 하여 보다가도 계속 이렇게 보아야 되는지를 변호인에게 묻기 일쑤다. 아마 판사도 국가보안법 재판에서 북한영화를 법정에서 증거조사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마뜩찮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충실한 재판을 위한 원칙을 무기로 북한의 것이라면 무조건 백안시하고 혐오스러워하며 그 내용도 모르면서 뻔 한 내용으로 치부하고 이적표현물로 단죄하는 이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동족 몰이해와 편견의 장벽에 부딪혀 나가고 있다. 사진 출처 - MBC 법정에서 북한영화를 재생해 보는 것이 법이 보장하는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저항에 부딪히며 재판절차의 원칙을 지키는 것조차 어려운 현실에서, 분단의 두터운 장벽과 우리들의 의식 속에 깊이 드리운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적대적 편견을 확인한다. 법정에서 강요당하는 분단적대의 현상은 나열할 수조차 없이 많다. 국정원이 뒷돈을 주고 나온 탈북자 증인조차 신원노출 우려와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신변안전 위험 등을 이유로 비공개 비밀재판에 서게 하거나, 피고인과 대면 금지를 위한 차폐막 설치 등을 검사가 주장하면 위축된 법원은 일사천리로 따르고, 변호인이 공정하고 민주적인 사법절차의 보장을 주장하며 아무리 이의제기를 하여도 재판은 막무가내로 진행된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탈북자들이 종편에 당당히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북한에 대한 온갖 혐오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의 이율배반적 모습이다. 분단적대의 혐오감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활동을 우리 삶의 곳곳에서 진행하여야 함에도 법정에서 북한영화를 재생하기가 힘든 것처럼 북한 바로 알기는 우리의 인식과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무관심과 회피 지대로 도피하거나, 북한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북한을 악마화하는 극우보수세력이 쳐놓은 덫과도 같은 장막 안에서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지적 향유와 정보 수용의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막아버린 채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없이 분단정신병 환자로 병명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분단정신병 치료를 위한 북한 바로 알기 노력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종북몰이 정권이 북한 체제가 국제공조 속 압박과 제재로 북한 고위층의 탈북러시가 이루어진 양 선동하며 여론을 왜곡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최근 북한 경제가 나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정보를 수용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해 우리가 같이 협력할 방도를 고민하며 북한의 정보를 찾아나가면 한국 경제 발전의 활로와 통일경제의 비전도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능동적으로 북한을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는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의 도발 때문인가? 미국을 추종하여 북한을 적대하며, 사드를 배치하고, 더 자주, 더 많은 미군 무력을 동원하여 한미군사훈련을 진행하며 국제적 제재와 압력을 더 강하게 하면서 군사적 긴장과 남북대결의 위기를 자초해 나가면 북한이 자멸하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인가? 북한에 물난리가 나서 국제기구의 구호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인도주의적 지원조차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북한은 줄곧 미국과 평화협정체결을 주장해 왔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 위협을 이유로 미군을 주둔시키며 북한의 위와 같은 주장은 위장 평화공세로 치부해 왔다. 분단적대의 군사적 대결상태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평화협정 체결의 길로 나아가고, 군사훈련과 핵실험 등의 긴장조성행위를 중단하고,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대화와 협상의 길로 나가야 하는 것이 적대 쌍방이 추구해야 할 길임이 명백하다.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북한의 상투적 공세로 규정하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북한의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북한의 주장이라면 듣지도 보지도 않고 거부하는데 익숙한 우리의 모습에서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후손들의 안전과 행복의 길은 요원하다. 분단적대의 장벽에서 탈주하기 위한 다른 대안과 길을 만들어나가지 못하는 것은, 분단적대의 정전체제에서 외국군대가 주둔한 현실과 민족 쌍방이 적대하며 대결하기를 강요하는 국가보안법 체제에 질식된 우리들의 편협한 사고와 인식에 기인한다. 비정상적, 기형적 인식을 갖고도 현실의 모순을 자각하기는커녕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논리에 세뇌당하고 겁박당한 채 이식된 비정상적 인식상태를 자기합리화하며 이성적이고 정상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북한을 그대로 이해, 존중하고 남과 북이 현재의 대결상태를 해소하고 관계를 개선하여 통일의 길로 나아가며, 무엇보다도 우리 안의 몰이해와 혐오감 및 편견을 없애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분단 비극 극복의 실천이라 생각한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0월 1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58 | 추천: 0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더불어 민주당의 박광온 의원이 아동수당을 도입하려는 취지의 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새누리당도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금고지기로서 아동수당이 출산율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돈만 허비할 수 있다고 우려를 내비쳤다. 일각에서는 청년수당에 이어 아동수당도 복지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보통사람들은 이 문제를 과도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덧칠하기보다는 해결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동수당이나 청년수당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소극적인 정부보다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장단기적으로 가동할 제도적인 프로그램을 가진 정부를 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유사회라는 미명 아래서 만사를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사주의(privatism) 교리에 강박되어왔다. 그래서 정치적 권력, 경제적 부,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한 개인들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미래에는 지금까지 운명으로 수용해왔던 바를 민주주의와 공동책임으로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동수당이 신설되더라도 자신의 자녀세대들에 더 좋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의도적인 혹은 비의도적인 출산파업을 계속할 것이다. 빈곤의 미래가 확정된 상황에서 자녀를 출산하겠다는 부모의 결단이 종족보존이라는 허망한 욕망일 뿐이라고 말하면 불합리한 것일까? 나는 현재의 정치와 경제가 무력한 대중들에게 어떠한 희망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대안적인 정치와 대안적인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적으로 보통사람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 이들의 자력갱생을 북돋아주는 체제가 그것인데, 이를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라고 부를 수 있다. 자유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동수당이나 청년수당은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으로 가는 초기 방책들 중 하나이다. 최근에 이러한 고민의 일단을 담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유작 <공정으로서의 정의: 재서술(이학사, 2016)>이 주목을 끌고 있다. 롤스는 자유주의의 철학 안에 있기 때문에 앞서 말한 자유사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자유사회주의자들의 요구사항인 사회상속제에 동조하고 나섰기 때문에 거론해볼 필요가 있다. 롤스는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경제체제를 ‘재산소유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라 표현하였다. 존 롤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롤스는 이미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1971)>으로 20세기 후반 정치경제의 담론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정의의 두 원칙을 기반으로 자유자본주의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수정자본주의나 복지국가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였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롤스의 이론이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실제로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 그러한 수정작업에서 어떤 장기를 보여주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극단적인 재산권 절대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유자본주의자들도 체제의 존속을 위해서 어느 정도 복지정책의 시행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색의 이론은 시저와 브루투스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지만, 롤스는 만년에 자신의 입장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롤스는 <정의론 수정판(2003, 이학사)> 서문에 재산소유 민주주의를 제시함으로써 복지강화론을 능가하기 시작하였다. 최근에 번역된 <공정성으로서 정의: 재서술>은 재산소유민주주의를 경제체제론의 관점에서 부연하였다. 롤스는 재산소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1977년 노벨상을 수상한 자유사회주의자 제임스 미드(James Meade 1907-1995)로부터 수용하였다. 미드는 이미 1930년대에 오늘날 기본소득으로 알려진 시민소득(citizen’s income)이나 국가배당금(state dividends)을 구상하였다. 물론 기본소득이나 사회상속 관념은 역사가 더 길다. 미국 독립전쟁기에 토마스 페인이, 1830년대에 토마스 스킷모어가 사회상속제를 제시하였으며, 오늘날에는 하버드 대학의 로베트로 웅거(Roberto Unger) 교수가 실험주의적 사회구상 안에서 상세하게 전개해 놓았다. 사회상속을 제도로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은 하나다. 사회에 진입하는 모든 개인들은 부모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자신의 삶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것이 재산에 대한 인권으로서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인생의 전환점에서 재정적 수요를 충족시킬 재원을 공급해준다. 그래서 개인은 대학입학, 취업, 결혼, 창업 시에 중요한 재원을 향유하게 된다. 개인은 일생동안 부를 보유하고 증식시킬 수 있지만, 사망시에 자신이 증식시키고 보유한 재산의 필수적인 부분만을 자녀에게 상속시킬 수 있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사회는 태어나는 모든 개인들 앞에서 사회의 모든 부를 들고 가서 심판을 받는다. 개인이 1/n의 몫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질서의 재편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수저가 기본적으로 1/n로 수렴되도록 하는 것이다. 증여세와 상속세는 사회상속 관념을 어느 정도 구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증여세와 상속세를 당연시하면서도 사회상속제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청년수당, 아동수당, 기본소득은 약자에 대한 배려에 기초한 전통적인 복지권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경제 질서에 대한 동등한 참여권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복지가 아니라 재산의 분산과 경제의 민주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앞서 말한 자유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혁신 논리를 기성의 자유자본주의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가동시키려는 운동이고,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도 생산수단과 경제적 부의 사회적 소유를 증강시키려는 운동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개인들의 자력갱생과 보통사람들의 삶을 밑받침하는 국가의 책임재산을 강화하고 증식시키는 정치론이다. 경제부총리의 말처럼 실제로 아동수당이 출산율 증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 경우 문제는 아동수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동수당과 연쇄반응을 선순환적이고 누적적으로 가져다줄 사회의 공정한 토대와 미래지향적 비전이 없다는 데에 있다. 민주적인 토대와 비전은 돈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돈이 없다면 결코 될 수 없는 일이다. 보통사람들은 지난 50년간 정치적 독재에 허덕여왔다. 최근 20년은 빠져나올 수 없는 경제적 독재와 빈곤 속에 갇혀 있다. 이미 내년 대선의 프레임은 복지에서 경제민주화로 이동하는 것 같다. 부자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빈곤계층에게 이전시키는 것만으로는 현안을 다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재산, 특히 생산수단을 소수의 수중에 두지 말고, 널리 확산시키고,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소유방식들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생산과 소유의 영역에서 혁신이 필요한 때이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0월 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99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