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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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미즈 최순실 : 기억을 위한 투쟁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 미스 리플리, 미즈 최순실 몇 년 전 한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한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아! 그…’ 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한참이나 철 지난 드라마가 떠오른 건 최순실이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세상’에는 없던 사람으로 인해서다. 호텔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우연한 거짓말 한 마디로 신데렐라도 부러워할 성공가도를 달려가게 된다. 그나마 드라마라고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은 여주인공이 돈도, 학벌이나 변변한 뒷배도 없는, 요즘 말로 ‘흙수저’인데다 운까지 없어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찍소리 못하고 꾹꾹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낯익은 우리 이웃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건, 거짓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파국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드라마로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이 바라는 머릿속 세상을 진짜로 믿고, 자신이 놓인 현실을 부정하며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을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병리 현상을 말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신분 상승 욕구에 사로잡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다 결국은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살게 되는 인격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자신이 한 거짓말마저 사실로 믿기 때문에 스스로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때문에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이란 미로에 갇혀 서서히 인간성을 상실해가다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제 우리는 우리 눈앞에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이 체험이 너무도 부조리해 현실인지 상상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가늠하기 힘든 현실 앞에 ‘분노’마저 저만치 떠내려가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억’만큼은 결코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함께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진 출처 - 필자 - 기억을 위한 투쟁 사람은 고통스런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이 부정적인 기억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인 외상을 최소화하려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이 사람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걸 보면 자연에서도 오랜 연원을 가진 기제임이 분명한 듯하다. 기억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면, 생존을 위해 체득된 경험을 유지, 저장, 재생하기 위한 인간의 능력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살아남기 위해 학습과 정보의 재생을 수행하고, 관련된 정보 조각을 서로 연결시키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억력이 좋을수록 생존력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기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기제가 발동한다는 것은 그 기억이 오히려 개체의 생존에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참담한 일제 강점기에 이어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망각을 생존비법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 땅의 민중들에게 ‘기억하기’는 또 다른 아픔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 시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끝나지 않은 친일 청산 문제가 그렇고 위안부 문제, 민간인 학살, 제주 4·3항쟁, 군사독재와 정치공작…,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까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런 기억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왜인가. 당장은 아프지만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새살이 돋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과의 싸움 속에서 이제 그만 내려놓자고, 잊자고 하는 이들 대부분은 그런 말을 꺼낼 자격도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한 달여 새 우리 국민들의 기억에 상상도 못하던 블랙홀을 만들어놓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이름으로 불린 ‘아버지 박정희’가 그런 존재일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작업이 역사 국정교과서 발간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 돼버렸다. 이제는 '최순실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되게 됐으니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꼴이 됐다. ‘최태민’이라는 이름을 역사 속에서 근근이 지워갈 무렵에 터진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대통령이라는 기억을 국민의 뇌리 속에 새겨놓게 생겼다. 과거의 대통령들이 어른들의 입에서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코흘리개 아이들에게까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기억과의 투쟁, 역사와의 투쟁에서 참패한 지도자로 각인될 것이 분명하다. 그를 추켜세우던 이들도 마찬가지다. - 싸워야만 하는 이유 하지만 역사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방향으로만 전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기억하지 않을 때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다카키 마사오’에 대한 기억을 잃은 세대로 인해 그의 망령이 되살아나 오늘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억은 애초부터 없다. 개인의 과거 기억 또한 최소한 ‘부모’ ‘형제’ ‘가족’ ‘친구’ 등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개인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있고, 불완전하고, 독립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집단을 통해서 혹은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기억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를 새롭게 인식하며 되살려내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개인의 기억 또한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집단 기억’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우리가 직접 겪어보지 못했던 세월호 참사의 아픔부터 멀리 6.25전쟁의 고통까지 오늘 나의 것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이 ‘집단 기억’ 때문에 가능하다. 사진 출처 - 필자 우리 세대는 ‘최순실 게이트’를 분출하는 ‘광장’의 기억으로 승화시켜가는 중이다. ‘서울광장’ ‘광화문광장’은 그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집단 기억’이 켜켜이 쌓이고 역사로 열매 맺어가고 있는 장이다. 이 광장의 기억을 놓칠 때, 함께 기억하지 못하고 비켜설 때 ‘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부조리는 미래 어느 날 또 어떤 비극으로 닥칠지 모른다. 이것이 광장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 기억과의 싸움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은 2016년 11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44 | 추천: 2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고작 한 달 전의 뉴스였다. 새누리-한자로는 新天地-당 대표님의 밀실단식.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결국 결말은 “언니 나 여기 있어 잉~. 순시리 언니껀 내가 학실히 막고 있자너 나한테도 눈길 좀 줘여” 아양 떠는 초딩용 유머로 끝났지만. 그분이라고 쪽팔리는 걸 몰랐을 리가 없다. 언니가 베푸시는 송로버섯에 샥스핀 만찬에 초대받아 포식한 직후니까 다이어트용 단식이라는 비아냥도 미리 짐작 했을 테고 저 냥반 며칠 갈지 우리 내기할까? 나 같은 촌부의 술자리 안주감으로 잘근잘근 씹힐 것도 알았을 것이고 명색이 그럴듯한 완장까지 찬 냥반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쯧쯧~하는 조롱도 극복할 대상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굴하지 않고 국회의장 니가 나가나 내가 죽나 끝까지 해보자는 의지와 패기가 의사당 청색 돔의 피뢰침만큼 삐쭉 솟았으니 가상치 아니한가. “그래 모름지기 마름짓 할라믄 저 정도는 해야지. 신의 없이 제 살길만 찾는 세상에 오랜만에 충성스런 의리를 발견하니 내가 다 흐뭇허구먼.” 적어도 보름은 갈 줄 알았던 그분의 단식이 고작 일주일 만에 정리된 뒤의 내 관전평이었다. 7이라는 단위가 그렇게 허무한 숫자인줄도 그때 처음 알긴 했지만. 괜히 당 대표님 단식만 얘기하면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 같아 뭐 비스므레한 사람 없나 다시 머리를 굴려본다. 그보다 좀 뒤에 유행했던 지금은 퇴직한 경찰총수 님의 말씀도 인상적이다 “코너링이 좋아서” 이걸 허무개그라고 해야 하나. 아재개그라고 해야 하나. 초딩은 잘 못 알아듣고 중딩 정도 되면 “너 듁는다” 정도의 시니컬한 댓글을 얻을만한 명언을 남기신 그분. 그분 역시 쪽 다 파는 일이란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한다. 마치 그분(정확히 누군지는 모름)에 대한 충성이란 말 외에는 아는 단어가 없는 사람처럼. 國民학교때 “召使아저씨”라 불리는 분이 있었다. 학교의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서 하시는데 선생님들께는 꽤 친절하셨던 분이셨다. 다만 그분이 축구부 코치를 맡으면서는 나 같은 후보들조차도 괴로웠던 기억이 있다. 매일 구보에 오리걸음에 어쩌다 빠따질 까지. 그분의 인품은 따뜻했던 것 같은데 유독 훈련 때는 한 성질부리고는 하셨다. 그때는 召使가 무슨 의미인줄 몰랐다. 어제 팟캐스트 녹음하면서 소제목을 “따까리의 비애? 꼬붕의 곤조?” 정도로 정해놓고 선곡을 하다 보니 “惡의 召使”란 일본 애니메이션 OST가 나오는데 번역이 하인이다. 그제서야 국민학교때 잠시 품었던 용어에 대한 해답을 얻다니. “너 이** 한따까리 할래?”는 “당신 내 밑에서 한번 박박 기어보실래요?”의 다른 표현이다. 따까리. 어느 조직의 밑바닥에서 하찮은 일 도맡아 하는 하찮아도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꼬붕이 있다. 앞서 얘기한 마름 짓도 딱히 다를 건 없다. 천석지기 만석지기 지주의 오른팔이 되어 소작인을 관리한다는 꽤 쓸 만한 완장을 두르고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는 특징이 있다. 모셔야할 주인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지위를 높여줄 존재가 주인임을 명확히 알기에 주인 앞에선 생목숨 바칠 듯이 생색내며 같은 류의 따까리들은 생까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그러다 자리가 쪼끔 높아지면 또 특징이 생긴다. 자기 아랫것들은 처참하리만큼 짓밟는 다는 것. 질문하다 말 막히면 무조건 “사퇴하세욧” 외치는 수준은 봐 줄만 한 것이고 304명의 산목숨이 사라져간 바다를 조롱하며 선체의 인양을 반대 한다 물대포로는 골절이 안 되니 부검을 강행해야 한다, 따위의 비인간적 언사를 스스럼없이 내뱉기도 하고 “너 나 누군지 몰라?” 한마디로 한 가장의 밥줄을 끊거나 한 인생을 나락에 빠트리기도 한다. 행세하는 한줌 권력을 국민여러분이 주셨다고 말로는 떠들지만 실제로 그리 여기는 마름은 없다. 제 나와바리에서는 다들 지가 좀 먹어준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봤자 召使 나부랭이들이다. 순실 씨 얘기로 나라밖까지 술렁인다. 너무도 지독한 마름을 곁에 두었다고 그네 씨에게 울화통 터트리는 분들도 꽤 계시나 순실 씨도 그네씨 사람 만들라고 무척 오랜 시간 공들인 것도 같다. 일가에 측근에 그 많은 재산 끌어 모으고 삐딱하게 구는 아랫것들 단칼에 자르고 얼굴 이쁜 놈들 팍팍 밀어줘 출세시키고 그게 다 그네 씨에게 수 십년간 마름짓한 당연한 월급 봉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개성공단은 삐끼놈이 문닫고 일본군 위안부는 호빠놈이 타결하고 세월호는 무당년이 침몰시켰다는 한탄이 온 나라를 요동친다. 바야흐로 마름들의 세상이다. 마름 욕할 것 없다. 걔들은 적어도 자신의 주인이 누군지는 안다. 그러니 그 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마름 짓 한다. 마름의 정석코스를 성실히 수행하는 중이다. 오직 생전 밥 한끼 안 해본듯한, 택시한번 안 타본듯한, 젓가락질은 제대로 하나 몰라 싶은 자신을 여왕이라 생각하는 그네 씨만 모른다. 그 자리를 누가 앉혀놨는지. 11개월이나 정무수석이라는 마름자리에 앉혀놓고도 한 번도 독대를 허락하지 않은 그네께 살짝 귓속말로 속삭여 주고 싶다. “그네 씨가 앉혀놓은 저 마름것들 하는 것 봤지? 주군말이면 찰떡같이 알아듣자너. 그네 씨 그 자리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인 우리가 앉혀놓은 거거든. 저 소리 들려? 얼렁 내려 오라자너. 그네 씨의 주군인 국민들의 말을 들으라고 마름의 정석은 좀 배우라고”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그나저나 기껏 마름짓꺼리나 할라고 머리 터지게 공부해서 그 좋은 대학 나와 유학가 박사 받아 그 짓하지는 않았을 건데 참 그 넘들의 뇌구조도 신기하기도 하다. 역사가가 제대로 기록한다면 결국 죄다 召使 인생인데. 셰익스피어의 말 하나 둘러대고 자야겠다 졸립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1월 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27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고전적 작품, 고대의 신화, 세계 곳곳의 인류학적 자료들을 분석하면서, 모방이 인간 행위의 동력이자 문명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상세하게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인간은 ‘모방하는 인간’(호모 미메티쿠스)이다. 모방의 근간은 타인과 같아지거나 그 이상이 되려는 욕망이다. 욕망은 배고픈 이가 음식을 갈망하거나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식의 좁은 의미의 욕구와 다르다. 그보다는 과히 배고프지 않은데도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어떤 ‘모델’(매개자)을 보면서, 그 식당에 가고 싶다거나 실제로 찾아가도록 하는 동력에 가깝다. 욕망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주체적 감정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 그 누군가로부터 빌려온 감정이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의 감정에 의존해 고양시키려 한다. 늘씬하고 훤칠한 광고 모델의 욕망을 통해서 그 모델 너머의 성을 욕망하고, 그 모델이 소유한 상품을 욕망하는 경우가 그 사례다. 자본을 향한 어떤 이의 욕망을 모방적으로 욕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키려는 시도가 자본주의를 낳고 키우는 것도 비슷하다. 인간은 그저 물질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사용자를 상상하며 그가 누릴 것이라고 암시되는 내용에 종속된다. 권력도 모방 욕망의 집결지다. 인간은 더 큰 권력자를 매개로 그 이상의 권력을 모방적으로 추구한다. 그 과정에 너를 모방하며 넘어서려는 권력욕들이 서로 충돌하지만, 그 충돌로 인한 희생과 아픔은 안중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마치 사물처럼 간주하면서, 자신의 권력욕에 걸림돌이 되거나 그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배제해나간다. 지라르에 의하면, 이렇게 다양한 여러 모방 욕망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면서 집단 구성원 서로가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는 복잡한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그러다가 걸림돌이 집단화돼 전체의 문제가 되면, 집단적 걸림돌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희생양’을 만든다. 희생물로는 복수할 수 없는 주변적 존재가 선택된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배제되어 있거나 주변적인 인물들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주변인 혹은 경계인은 주류에서 밀려나 있기에 복수할 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희생양 시스템’이다. 오늘날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은 국가의 역할, 더 정확하게는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았다는 권력의 역할이다. 권력은 사회적 무질서를 경계한다. 설령 일부 국민을 희생시키더라도 중심질서가 잡히기를 바란다. 그런 뒤 자신의 능력 탓이라며 자신의 확대를 시도한다. 이것이 모방적 권력욕의 한결같은 태도다. 가령 ‘세월호 사건’으로 사회가 흉흉해지면 권력자는 희생으로 인한 고통을 국가화하려 시도한다. 수백 명이 죽은 고통스런 사건을 국가의 위기로 몰아가고, 희생자를 추상화해 희생을 국가가 기억하겠다고 한다. 개인과 가족의 고통은 가능한 희석시킨다. 백남기 농민의 희생을 기억하고 관리할 최종적 책임도 국가에 있는냥 호도한다. 하지만 이 때의 국가는 지극히 추상적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서류가 오가고 전화를 주고받지만, 그 속에 아픔에 대한 공감은 없다. 아픔을 추상화시키고 행정화하다보니, 아픔에 대한 기억의 주체도 사실상 없다. 그 비인간성이 들통 나 저항 세력이 형성되면, 권력은 다시 이들을 희생시키려 한다. 더 많이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을 지키는 길에 나선다. 개인의 기억은 주변화하고 국가의 기억을 전면에 내세운다. 기억의 중심화, 국가화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 혼란이 증폭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일부 개인에게 지우면서 자신의 책임을 완수한 듯 말한다. 이것이 권력욕의 자기 유지 방식이다. 그러다 혼란이 가라앉을 즈음 되면 이들의 희생 때문에 국가가 든든해질 수 있었다며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벗어나는 개인의 기억들은 가능한 제한한다. 기억의 최종적 주체는 국가라며 기억의 국가화를 지속한다. 그 과정에 희생자를 낳은 폭력은, 지라르의 표현마따나, 집단을 유지시켜주는 ‘성스러운 폭력’으로 ‘성화’된다. ‘성스러운 폭력’은 기억의 집단화를 통해 중심 질서를 잡아가려는 권력의 유력한 자기 유지 장치다. 사진 출처 - jtbc 권력은 자기중심적이다. 국민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 유지를 도모할 만큼 냉혹하다. 이 속성에 철저할수록 폭력적 구조를 남의 탓, 심지어 국민의 탓으로 돌린다. 그 탓을 찾는다며 다시 희생자를 만든다. 그렇게 증폭되는 희생의 크기가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능가할 때까지 권력은 자기중심성을 놓지 않는다. 그러다가 아픔을 기억하는 세력이 아픔을 지우려는 세력보다 커질 때가 온다. 권력의 변화 혹은 교체기다. 권력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져 자기 교체의 길로 들어선다. 새로 구성된 권력도 더 큰 권력에 대한 모방 욕망에 휘둘려 같은 길을 가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순환 고리가 끊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가 아픔을 겪고 있다면 그 때가 권력의 교체기다. 그 때 자의로 물러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권력욕의 속성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도 교체기를 향한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0월 2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85 | 추천: 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해마다 10월이면 노벨문학상 소식이 들린다. 몇 해 전부터 ‘한국문학에도 노벨문학상을’이란 분위기가 떠도는 까닭인지 주변의 관심이 더 높아진 듯도 하다. 물리학상이며 의학상이며 화학상 같은 다른 분야에서 가능성이 낮은 데 반비례해 문학에의 관심이 자라난 건지, 노벨상으로써 점점 시들어가는 한국문학에 물 한번 듬뿍 주고 싶은 건지. ‘나라 없고 가난할지언정 문화만은 빛난다’던 식민지시기부터의 자부심이 세계적 공인을 받지 못한 듯해 우리 스스로 불안한 건지. 노벨상만 문제라면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있었지만 그건 지금으로선 누구에게나 불편한 기억에 가깝고 말이다. 노벨상이 제정되던 1901년은 유럽에서 ‘문학의 시대’가 다 끝나지 않은 때였다. 에밀 졸라와 레프 톨스토이가 아직 살아 있었고 토마스 하디가 활동 중이었다. 그런데도 스웨덴 한림원은 제 1회 노벨문학상을 프랑스 고답파 시인 쉴리-프리돔에 안겨주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로도 한동안 노벨문학상의 ‘보수적’ 행보는 이어졌다. 제 2회 문학상은 <로마사>를 쓴 역사학자 몸젠에게 안겼지만 제 3회째는 입센을 제쳐두고 같은 노르웨이의 극작가 뵈른손을 수상자로 지명했고 이후로도 키플링이나 라게를뢰프처럼 애국적이거나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작가를 편애했다. ‘숭고하고 건전한 이상주의’. 초기 노벨문학상의 심사 기준이었다는 이 문구는 인생의 추악상에서 눈 돌리고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는 데 동원되곤 했다. 작품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유럽 문학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입센을 끝내 외면한 것이 그 증거로 대표적일 것이다. 하긴 입센은 무지막지하게 이상을 조롱한 작가가 아니었던가. 스스로 고결한 이상주의자입네 하면서 생활에선 무능력하고 권위적인 가부장을 그려낸 <들오리>에서 입센은 독설가인 조연을 내세워 “그 ‘이상’인지 뭔지 하는 잘난 말은 쓰지 않기로 합시다.”라며 일갈한다. “‘거짓’이라는 편리한 말이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소?” <들오리>의 결말은 가식적 가부장 때문에 그 선량한 딸이 자살을 택하는 파국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울부짖고, 그 옆에서 누군가는 “슬픔이 저 남자가 품고 있던 숭고함을 얼마나 일으켰”는지 보라며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독설가는 여전히 냉정하다.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면 대개는 숭고한 마음이 드는 법이지. 하지만(…) 언제까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딸의 죽음을 파티의 감상용 여흥으로나 쓰게 될 거라며 빈정거리는 독설가는, 그러니 ‘이상’의 강요를 그만두라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 이상의 요군지 뭔지를 강요하러 오는 오지랖쟁이가 우리 가난뱅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둬”야 한다며 연극의 종막을 고한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입센이라면 나부터 <인형의 집>을 연상하지만, <인형의 집>은 그렇듯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삶과 세계의 추악상을 똑바로 보는 데서 다시 모든 걸 시작해야 하는 입센의 일관된 생각이 낳은 작품 중 하나일 뿐이다. 자연주의의 파란을 겪었음에도 보수적 이상주의가 득세하고 있던 유럽 문단에서 그런 입센의 목소리는 위험한 것이었다. 종교의 위선과 결혼의 허위를 공격하고 성병 문제까지 들먹인 <유령>은 공연하는 곳마다 상연 금지며 관객의 분노에 찬 항의 같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입센 자신의 전반기에는 이상주의적 관습에 충실한 희곡을 창작한 바 있지만, 변방 노르웨이 출신이요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했던 입센으로선 낡은 ‘이상’을 끝끝내 믿을 수는 없었나 보다. 그리고 한 세기가 넘어 노벨문학상은 백 명이 훌쩍 넘는 긴 수상자 목록을 갖게 됐다. 역대 수상자 중 무려 여덟 명이 스웨덴 작가라는 노골적인 편파성을 논의로 하더라도 노벨문학상 주변은 늘 시끄럽다. 역대 수상자 중 적잖은 수는 문학적 선택이라기보다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직후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양됐을 때는 펄벅을,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패전국 독일의 반전 작가였던 헤세를, 몇 년 후에는 영국 수상 처칠을, 알제리전쟁이 한창일 때는 알제리를 사랑하면서도 독립에는 반대했던 카뮈를. 어쨌거나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서 노벨문학상은 그때마다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어쩌면 그 논란으로써 문학의 역사에 기여해 왔다. 밥 딜런을 수상자로 발표한 올해의 결정도 그렇듯 논란으로써 문학에, 문화에, 세계에 기여하는 바 있으리라 믿는다. 통쾌하면서 살짝 씁쓸한, 지레 웃어넘겼으나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하는, 그런 마음인데, 하긴 ‘노벨문학상’이란 부문의 제정 자체가 19세기 말~20세기 초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다. 노벨음악상, 노벨미술상, 노벨예술상이나 노벨문화상이면 더 나으려나. 문학이 고립될 대로 고립된 지금, 문학이 감당해 왔던 몫은 어떻게 이어지고 찢기고 재생산되려나. 그렇지만 스웨덴 한림원, 기왕 용감하려면 더 용감한 선택은 없었을까? 아니, 밥 딜런이 상을 받겠다고 나서긴 할는지 원.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13 | 추천: 2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즘 법정에서 북한영화를 재생하여 보는 경우가 잦다. 증거물로 압수한 동영상의 경우 증거조사의 방법은 재생이다. 공소사실에 이적표현물로 나오는 북한영화를 법정에서 재생해서 보는 것은 형사절차에서 보장되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북한영화를 법정에서 재생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 충실한 재판을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북한영화에 나오는 주인공과 스토리를 알아야 하겠지만, 영화 제목만 봐도 북한의 지도자를 찬양하는 이적성이 있음이 명백한데 계속 전체를 봐야 하는가 묻는 검사와 판사들을 상대로 북한 창작물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는가라는 주장은 고급 인력의 시간을 낭비하는 막무가내 주장으로 치부되곤 한다. 어떤 검사는 북한영화의 상세한 내용을 변호인은 잘 알고 있지 않냐며, 잘 알면서 꼭 법정에서 전체 내용을 재생할 필요가 있냐고 한다. 변호인이 아는 게 무슨 상관이냐며 증거조사의 주체인 재판부가 북한영화의 내용을 잘 알도록 하는 것이 재판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요즘 두 세 차례 법정에서 북한 영화를 1시간 30분 정도 재생하여 보고 있다. 요즘은 기술이 발전해서인지 디지털 저장매체에 담긴 북한영화의 수량이 수백에서 수천편이 된다. 그 중에서 몇 편을 취사선택하여 이적표현물로 기소하면 좋으련만 검사는 하나도 남김없이 별지 이적표현물 목록까지 만들어 공소장을 만든다. 검사는 기소 내용을 줄일 생각은 않고 증거조사를 대충 하자고 생난리를 피운다. 변호인으로서 단호하게 북한영화 전체 내용의 재생을 요구하고 있다. 검사도 판사도 대충 보고 제대로 스토리 전개도 모른 채 북한영화라는 이유로 그 가운데 북한 지도자를 찬양하는 일부의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기계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양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의뢰인 중에는 북한영화를 하나하나 꼼꼼히 다 본들 무죄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괜히 판사를 피곤하게 만들어 찍히지 않을까 걱정도 한다. 판사들도 북한영화를 법정에서 재생하여 보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닌지 전부 재생을 하기로 하여 보다가도 계속 이렇게 보아야 되는지를 변호인에게 묻기 일쑤다. 아마 판사도 국가보안법 재판에서 북한영화를 법정에서 증거조사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마뜩찮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충실한 재판을 위한 원칙을 무기로 북한의 것이라면 무조건 백안시하고 혐오스러워하며 그 내용도 모르면서 뻔 한 내용으로 치부하고 이적표현물로 단죄하는 이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동족 몰이해와 편견의 장벽에 부딪혀 나가고 있다. 사진 출처 - MBC 법정에서 북한영화를 재생해 보는 것이 법이 보장하는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저항에 부딪히며 재판절차의 원칙을 지키는 것조차 어려운 현실에서, 분단의 두터운 장벽과 우리들의 의식 속에 깊이 드리운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적대적 편견을 확인한다. 법정에서 강요당하는 분단적대의 현상은 나열할 수조차 없이 많다. 국정원이 뒷돈을 주고 나온 탈북자 증인조차 신원노출 우려와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신변안전 위험 등을 이유로 비공개 비밀재판에 서게 하거나, 피고인과 대면 금지를 위한 차폐막 설치 등을 검사가 주장하면 위축된 법원은 일사천리로 따르고, 변호인이 공정하고 민주적인 사법절차의 보장을 주장하며 아무리 이의제기를 하여도 재판은 막무가내로 진행된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탈북자들이 종편에 당당히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북한에 대한 온갖 혐오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의 이율배반적 모습이다. 분단적대의 혐오감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활동을 우리 삶의 곳곳에서 진행하여야 함에도 법정에서 북한영화를 재생하기가 힘든 것처럼 북한 바로 알기는 우리의 인식과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무관심과 회피 지대로 도피하거나, 북한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북한을 악마화하는 극우보수세력이 쳐놓은 덫과도 같은 장막 안에서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지적 향유와 정보 수용의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막아버린 채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없이 분단정신병 환자로 병명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분단정신병 치료를 위한 북한 바로 알기 노력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종북몰이 정권이 북한 체제가 국제공조 속 압박과 제재로 북한 고위층의 탈북러시가 이루어진 양 선동하며 여론을 왜곡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최근 북한 경제가 나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정보를 수용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해 우리가 같이 협력할 방도를 고민하며 북한의 정보를 찾아나가면 한국 경제 발전의 활로와 통일경제의 비전도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능동적으로 북한을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는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의 도발 때문인가? 미국을 추종하여 북한을 적대하며, 사드를 배치하고, 더 자주, 더 많은 미군 무력을 동원하여 한미군사훈련을 진행하며 국제적 제재와 압력을 더 강하게 하면서 군사적 긴장과 남북대결의 위기를 자초해 나가면 북한이 자멸하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인가? 북한에 물난리가 나서 국제기구의 구호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인도주의적 지원조차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북한은 줄곧 미국과 평화협정체결을 주장해 왔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 위협을 이유로 미군을 주둔시키며 북한의 위와 같은 주장은 위장 평화공세로 치부해 왔다. 분단적대의 군사적 대결상태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평화협정 체결의 길로 나아가고, 군사훈련과 핵실험 등의 긴장조성행위를 중단하고,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대화와 협상의 길로 나가야 하는 것이 적대 쌍방이 추구해야 할 길임이 명백하다.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북한의 상투적 공세로 규정하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북한의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북한의 주장이라면 듣지도 보지도 않고 거부하는데 익숙한 우리의 모습에서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후손들의 안전과 행복의 길은 요원하다. 분단적대의 장벽에서 탈주하기 위한 다른 대안과 길을 만들어나가지 못하는 것은, 분단적대의 정전체제에서 외국군대가 주둔한 현실과 민족 쌍방이 적대하며 대결하기를 강요하는 국가보안법 체제에 질식된 우리들의 편협한 사고와 인식에 기인한다. 비정상적, 기형적 인식을 갖고도 현실의 모순을 자각하기는커녕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논리에 세뇌당하고 겁박당한 채 이식된 비정상적 인식상태를 자기합리화하며 이성적이고 정상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북한을 그대로 이해, 존중하고 남과 북이 현재의 대결상태를 해소하고 관계를 개선하여 통일의 길로 나아가며, 무엇보다도 우리 안의 몰이해와 혐오감 및 편견을 없애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분단 비극 극복의 실천이라 생각한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0월 1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33 | 추천: 0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더불어 민주당의 박광온 의원이 아동수당을 도입하려는 취지의 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새누리당도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금고지기로서 아동수당이 출산율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돈만 허비할 수 있다고 우려를 내비쳤다. 일각에서는 청년수당에 이어 아동수당도 복지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보통사람들은 이 문제를 과도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덧칠하기보다는 해결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동수당이나 청년수당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소극적인 정부보다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장단기적으로 가동할 제도적인 프로그램을 가진 정부를 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유사회라는 미명 아래서 만사를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사주의(privatism) 교리에 강박되어왔다. 그래서 정치적 권력, 경제적 부,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한 개인들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미래에는 지금까지 운명으로 수용해왔던 바를 민주주의와 공동책임으로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동수당이 신설되더라도 자신의 자녀세대들에 더 좋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의도적인 혹은 비의도적인 출산파업을 계속할 것이다. 빈곤의 미래가 확정된 상황에서 자녀를 출산하겠다는 부모의 결단이 종족보존이라는 허망한 욕망일 뿐이라고 말하면 불합리한 것일까? 나는 현재의 정치와 경제가 무력한 대중들에게 어떠한 희망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대안적인 정치와 대안적인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적으로 보통사람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 이들의 자력갱생을 북돋아주는 체제가 그것인데, 이를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라고 부를 수 있다. 자유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동수당이나 청년수당은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으로 가는 초기 방책들 중 하나이다. 최근에 이러한 고민의 일단을 담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유작 <공정으로서의 정의: 재서술(이학사, 2016)>이 주목을 끌고 있다. 롤스는 자유주의의 철학 안에 있기 때문에 앞서 말한 자유사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자유사회주의자들의 요구사항인 사회상속제에 동조하고 나섰기 때문에 거론해볼 필요가 있다. 롤스는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경제체제를 ‘재산소유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라 표현하였다. 존 롤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롤스는 이미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1971)>으로 20세기 후반 정치경제의 담론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정의의 두 원칙을 기반으로 자유자본주의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수정자본주의나 복지국가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였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롤스의 이론이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실제로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 그러한 수정작업에서 어떤 장기를 보여주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극단적인 재산권 절대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유자본주의자들도 체제의 존속을 위해서 어느 정도 복지정책의 시행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색의 이론은 시저와 브루투스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지만, 롤스는 만년에 자신의 입장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롤스는 <정의론 수정판(2003, 이학사)> 서문에 재산소유 민주주의를 제시함으로써 복지강화론을 능가하기 시작하였다. 최근에 번역된 <공정성으로서 정의: 재서술>은 재산소유민주주의를 경제체제론의 관점에서 부연하였다. 롤스는 재산소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1977년 노벨상을 수상한 자유사회주의자 제임스 미드(James Meade 1907-1995)로부터 수용하였다. 미드는 이미 1930년대에 오늘날 기본소득으로 알려진 시민소득(citizen’s income)이나 국가배당금(state dividends)을 구상하였다. 물론 기본소득이나 사회상속 관념은 역사가 더 길다. 미국 독립전쟁기에 토마스 페인이, 1830년대에 토마스 스킷모어가 사회상속제를 제시하였으며, 오늘날에는 하버드 대학의 로베트로 웅거(Roberto Unger) 교수가 실험주의적 사회구상 안에서 상세하게 전개해 놓았다. 사회상속을 제도로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은 하나다. 사회에 진입하는 모든 개인들은 부모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자신의 삶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것이 재산에 대한 인권으로서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인생의 전환점에서 재정적 수요를 충족시킬 재원을 공급해준다. 그래서 개인은 대학입학, 취업, 결혼, 창업 시에 중요한 재원을 향유하게 된다. 개인은 일생동안 부를 보유하고 증식시킬 수 있지만, 사망시에 자신이 증식시키고 보유한 재산의 필수적인 부분만을 자녀에게 상속시킬 수 있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사회는 태어나는 모든 개인들 앞에서 사회의 모든 부를 들고 가서 심판을 받는다. 개인이 1/n의 몫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질서의 재편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수저가 기본적으로 1/n로 수렴되도록 하는 것이다. 증여세와 상속세는 사회상속 관념을 어느 정도 구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증여세와 상속세를 당연시하면서도 사회상속제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청년수당, 아동수당, 기본소득은 약자에 대한 배려에 기초한 전통적인 복지권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경제 질서에 대한 동등한 참여권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복지가 아니라 재산의 분산과 경제의 민주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앞서 말한 자유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혁신 논리를 기성의 자유자본주의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가동시키려는 운동이고,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도 생산수단과 경제적 부의 사회적 소유를 증강시키려는 운동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개인들의 자력갱생과 보통사람들의 삶을 밑받침하는 국가의 책임재산을 강화하고 증식시키는 정치론이다. 경제부총리의 말처럼 실제로 아동수당이 출산율 증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 경우 문제는 아동수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동수당과 연쇄반응을 선순환적이고 누적적으로 가져다줄 사회의 공정한 토대와 미래지향적 비전이 없다는 데에 있다. 민주적인 토대와 비전은 돈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돈이 없다면 결코 될 수 없는 일이다. 보통사람들은 지난 50년간 정치적 독재에 허덕여왔다. 최근 20년은 빠져나올 수 없는 경제적 독재와 빈곤 속에 갇혀 있다. 이미 내년 대선의 프레임은 복지에서 경제민주화로 이동하는 것 같다. 부자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빈곤계층에게 이전시키는 것만으로는 현안을 다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재산, 특히 생산수단을 소수의 수중에 두지 말고, 널리 확산시키고,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소유방식들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생산과 소유의 영역에서 혁신이 필요한 때이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0월 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970 | 추천: 0
-ㅈ일보 ㅎ형에게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형, 잘 지내죠? 얼굴 본 지 벌써 1년이 넘었네요. 곧 만나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정리된 생각을 먼저 전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형,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시청 부근에서 소주 마실 때 생각나요? 그때 형은 여권에 대선 후보로 나설만한 사람이 안 보인다고 했죠. 나는 반기문이 있지 않냐, 새누리당이 반기문을 후보로 옹립하게 될 거, 라고 말했죠. 그때 형은 그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흥미로워했죠. 그러고 나서 몇 달 있다가 반기문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입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대통령 후보가 누가 될지 맞히는 데는 나름 신통력이 있나봐 ㅎㅎ 노무현이 해양수산부 장관할 때니까, 대선 후보로 거론도 되지 않을 때인데, 민주당 보좌관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내가 노무현 대선 후보 어떠냐고 말했거든. 그때 이 양반들이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더라구. 한마디로 ‘깜’이 아니라는 얘기였지. 그런데 1년인가 지나서 노무현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됐죠. 뭐 내가 돗자리 깔고 나앉겠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별다른 비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때그때 시대정신을 읽으려고 노력하면 후보가 보이더군요. 아 그렇다고 반기문이 시대정신에 맞는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새누리당은 좀 다르거든. 새누리당은 철저하게 당선 가능성으로 후보를 고르죠.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요즘 안철수 새누리당 후보는 어떨지 상상해보고 있어요. 사실 요즘이 아니라 안철수가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을 때부터니까 아홉 달 전부터라고 해야겠네요. 안철수에 대한 내 생각은 예전에 몇 차례 얘기한 적이 있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래요. ‘안철수는 보수적인 사람이고 보수정당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어울리지 않는 야당 정치인이 돼서 저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야당 정치인 안철수’는 안철수 개인만이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에요. 안철수의 등판 시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선적·사기적 리더십에 대한 반발로 국민들은 합리적이고 정직한 인물을 원했고, 안철수는 그런 국민적 열망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죠. 안철수의 정치 참여는 시대적 요청에 응답한 행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대선 후보로 출마하면서 내놓은 공약은 이른바 진보적 테제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 많아요. 안철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정직과 교양, 겸손함까지 갖춘 훌륭한 민주 시민이지만 이 나라의 근본적인 갈등을 혁신적으로 풀어낼 수가 없어요. 그러기엔 자기가 가진 게 너무 많아요.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어정쩡한 스탠스를 거듭하자 인기 거품이 사라졌고, 결국 마땅한 대권주자가 없어 고민에 빠진 호남 정치인들과 손을 잡기에 이른 거죠. 요컨대 안철수의 정치적 우유부단함은 지금 입고 있는 정치적 의복이 맞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체형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특유의 우유부단함을 상당 부분 고칠 수 있을 거예요. 사진 출처 - 한겨레 자, 이제 안철수가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되면 우리나라에 뭐가 좋은지 이야기할 차례네요. 사실 지금부터가 내가 오늘 형에게 말하려는 핵심이에요. 우리나라 정치 지형에 대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들 하잖아요. 나는 그걸 ‘함몰된 운동장’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어요. 기울어진 건 맞는데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게 아니라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오른쪽에 엄청나게 큰 구멍이 있는 거예요. 그 구멍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워진 오른쪽이 들려있는 거죠. 왼쪽 운동장 선수들이 오른쪽을 공격하려고 해도 경사가 높아서 일단 기어오르기도 어려워요. 어렵사리 하프라인을 넘어 공격을 한다고 해도 거의 모든 볼을 이 구멍이 삼켜버리죠. 그 구멍의 이름은 ‘도덕성’ 혹은 ‘정직’입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밀실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데, 이 양반이 2년 전에는 국회의원이 단식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죠. 참여정부 당시 농민들이 경찰 진압과정에서 사망했을 때는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정현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처지에 따라 말을 180도 바꾸는데 능하다는 거죠. 비슷한 예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려면 타이핑하는 손가락이 아플 지경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막무가내 식으로 나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자기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고 주류라는 자의식에서 오는 자신감입니다. 아무리 개판을 쳐도 손해 볼 게 없기 때문이죠. 반면에 야당은 명백한 대선부정개입 사건에도 불구하고 선거무효소송조차 제기하지 못합니다. 사법부조차 권력에 장악돼 있는 상황에서 꼴만 우스워지고 역풍을 초래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균형 현상은 어느 조직에서나 흔히 나타나는 인간사회의 한 특징이에요. 예를 들어 여성, 흑인, 장애인, 동성애자들이 남성, 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보다 자기검열이 심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두 번째 해석은 이 사람들이 전두엽이 활성화되지 않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들. 우병우나 황교안 등 이 정권 고위 인사들 뿐 아니라, 이정현이나 김무성, 윤상현 등 새누리당 인사들의 행동 패턴을 보면 사이코패스의 정의와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집니다. 문제는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합리적 토론이나 개선이 불가능하죠. 새누리당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누가 이런 후진적 문화를 바꿀 수 있을까요. 이재오나 김문수 같은 출세형 변절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원희룡이나 남경필 등 상대적으로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군들도 그거 못합니다. 그들은 수십 년씩 새누리당(한나라당)에서 정치하면서 그 체제에 안주해 왔습니다. 가끔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건 일종의 부재증명에 불과하죠. 하지만 안철수는 할 수 있어요. 안철수는 박근혜보다는 이명박에 가까운 유형입니다. 자기 콘텐츠가 있고 CEO 출신으로서 집행력이 있지요. 비록 진보적 어젠다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안철수 정도의 합리성이면 우리 사회에 상당한 진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재벌 위주의 경제체제가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있는 한국경제 난맥상에도 일정한 변화가 올 수 있을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안철수는 야당으로는 안 됩니다. 될 수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된다 해도 성공적 대통령이 되기 어려워요. 진보적 개혁을 바라는 지지자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기 때문이죠. 아 반기문은 어떠냐고요? 반기문이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되고 만약 대통령까지 된다면 박근혜 정권이 5년 연장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해요. 반기문은 콘텐츠 없이 이미지만 존재하는 박근혜와 판박이거든요. 대한민국 보수가 일치단결해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건 자기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잖아요. 유능한 대통령이 아니라 무능하더라도 우리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사람이면 되는 거였죠. 반기문은 전형적인 ‘바지 사장’ 스타일이에요. 그런 점에서 지금 보수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유엔에서조차 ‘투명인간’이란 별명을 얻은 사람이 각종 이해관계가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하고 싶지도 않을 거구요. 내가 형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논조가 정반대인 신문사에 다니는 형을 계속 만나는 이유와 같아요. 형은 여전히 합리적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거든. 몸은 21세기에 있지만 마음만은 70년대를 사는 유체이탈 대통령 덕분에 보수 진영 내에서조차 형처럼 합리적 사고를 하는 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런 분들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당이 변하면 많은 게 변할 거고, 비로소 우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참여정부 때 김영란법을 시행하려고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라 전체가 난리가 났을 겁니다.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거구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모두들 숨죽이고 어찌 될까 눈치만 봐요. 이게 주류의 힘이죠. 새누리당이 정말 장기집권을 꿈꾼다면, 그러면서도 우리나라가 앞으로 한발짝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개혁을 접목해야 합니다. 형이 다니는 회사나 새누리당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야 해요. 그래야 우리에게 미래가 열릴 거예요. 정치공학 얘기 하나만 더하면, 나는 안철수가 진정한 정치9단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영남이 아니라 호남에 판을 깐 게 한 수가 아니라 두 수 앞을 내다본 포석 아니냐는 거죠. 안철수가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된다면 역대 새누리당 대선 후보 가운데 호남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는 나 같은 바보들은 안철수가 부산 출마를 거부하고 “그건 노무현의 길”이라고 선언했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보면 안철수가 처음부터 ‘동진’이 아닌 ‘서진’ 전략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상이 내가 안철수가 ‘기름장어’ 반기문을 제치고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되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이 합당을 해야겠죠? 3당 합당도 했는데 2당 합당쯤은 일도 아니죠. 가장 큰 난관은 반기문을 통해 퇴임 이후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박근혜 일파의 견제일 겁니다. 형네 신문사가 청와대와 맞장 뜨려했던 이유도 이거 아니었나요? ‘이미 민심이 떠난 청와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정권재창출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당장은 서슬이 무서워 숨죽일 수밖에 없겠지만, 레임덕이 더 깊어지면 반격이 가능할 거예요.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질문이나 반론은 술 한 잔 사면 받을게요 ㅎㅎ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9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42 | 추천: 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마크 트웨인은 고전을 ‘좋다고 칭찬은 하지만 읽지는 않는 책’이라고 했다. 제법 그럴듯하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고전이라 부를만한 책이 어디 일이십 권에 불과할 것이며 독서할 엄두는커녕 책 읽을 여유조차 없는 뒤숭숭한 시절이니, 좋은 책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정작 읽지 못한 고전들이 즐비할 법하다. 그러나 그럴듯한 말은 그저 그럴싸할 뿐이다. 내가 읽지 못했다고 모두가 고전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며, 상식적으로도 사람들이 읽지 않는 책이라면 애당초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모두 역사적 위인인 것은 아니듯이, 유명한 책이라고 해서 전부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다. 한 권의 책이 고전이 되려면 거기에 시간의 침식을 견뎌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지금 여기에서도 적용 가능한 진리의 메시지가 담겨있어야 한다. 시대를 넘어서는 진리의 메아리가 없다면 고전이 될 수 없다. 고전읽기와 관련 깊은 강의를 십여 년 하다 보니, 반복해서 읽게 되는 고전들이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1859)도 그 가운데 하나다. 주관적인 독서 취향을 보태서 하는 말이지만, 「자유론」은 본문의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밑줄을 칠만한 대목이 나오는 고전 중에 고전이다. 그럼에도 읽을 때마다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달라진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같은 책도 그것을 읽는 상황이 달라지면 주목하게 되는 대목도 바뀐다는 사정도 이유에 포함될 것이다. 올해 「자유론」을 다시 읽으면서 내 마음에 울림을 자아낸 두 대목이 있다. 그 한 대목은 이렇다. “큰 원칙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가 존재하는 곳, 그리고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곳에서는 인간 역사를 그토록 아름답게 빛내주던 거대한 규모의 정신 활동이 일어날 수 없다.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크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란을 봉쇄하게 되면 인간 정신의 깊은 곳을 뒤흔드는 일이 생길 수 없다.” -서병훈 옮김, 「자유론」(책세상) 72쪽 책 읽기란 단지 텍스트(Text) 읽기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놓여 있는 상황(Context) 읽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실감한 것은, 내가 이 대목을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이렇게 읽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고 겁박하는 정부여당이 존재하는 곳, 한반도의 평화와 한국인의 삶에서 가장 긴요한 문제인 분단 극복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정부여당이 있는 곳에서는 우리 역사를 그토록 아름답게 빛내주던 자유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한국인이 당연히 알아야 할 크고 중요한 문제-세월호참사의 진상, 고위 권력자들의 비리, 10엔짜리 ‘위안부’ 밀약의 내막 등에 대한 논의가 활짝 열려야만 맹목적 추종과 전도된 시각에 역동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 고전이란 지금 여기의 현실과 무관한, 그래서 읽기 힘든 책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의 상황을 원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책, 따라서 반복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물론, 좋은 책을 읽는다고 현실이 당장 좋아지진 않는다. 고전이라고 해서 ‘금 나오라고 하면 금이 나오는’ 요술을 부리진 못한다. 그러나 제1급의 고전(古典)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3류 만도 못한 정권 때문에 고전(苦戰)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수는 있다. 대다수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절망에 가까운 파국 상태로 내모는 사대매국 몰이꾼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여지도 커진다. 사진 출처 - 시사인 공명을 자아낸 「자유론」의 또 한 대목을 마저 소개하자.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이 대목을 꼭 새겨들었으면(설사, 그럴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좋겠다 싶은 사람을 마음속으로 꼽아보며 읽는다면 썩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실로 믿음직하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늘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까지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줌으로써, 옳은 의견 못지않게 그릇된 의견을 통해서도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명한 사람치고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없다. 인간 지성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 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 「자유론」 50쪽 현대국가의 지도자가 반드시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哲人)이어야 한다고 말하면 강변이겠지만, 적어도 밀이 말하는 ‘현명한 사람’이어야 민주국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독재자가 아니라 지도자라면, 최소한 사회에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이해관계가 다른 만큼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하다는 것쯤은 능히 알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국론분열’세력이라고 매도하지 않고, 오히려 경청·대화·토론을 통해서 이견과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에이, 우이독경이 될 뿐인 말은 접자. 차라리 권력이란 국민을 대신해서 행사하기 편리하도록 ‘국민의 대리인’ 손에 집중되어 있을 뿐, 그것은 본질적으로 국민의 권력임을 떠올리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바꿔버릴 수 있는 게 대리인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권력자가 국민의 이익에 어긋나게 함부로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는 최선의 길임을, 우리가 기억하자. 고전이라는 이름의 책은 이렇듯 개인이자 시민으로서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인간적 덕목과 권리를 새삼스럽게/새롭게 환기시켜준다. 바야흐로 언필칭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그간 미뤄둔 고전읽기에 나설 엄두라도 내보자. 함석헌 선생님의 일갈이 귀에 쟁쟁 울리는 듯하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9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00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른바 ‘먹방’ ‘쿡방’이 여전히 인기다. 이제 어지간히 물릴 때도 됐다 싶은데 휴일 TV 리모콘을 돌리다 보면 언제든 최소 대여섯 개 채널에서 뭔가를 먹거나 요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먹방도 그 사이 참 다양하게 진화했다. 전국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나 전문 요리사가 요리 시범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처럼 오래된 먹방도 여전히 잘 나가고 있고, 몇몇 연예인들이 외딴 곳에 모여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리얼리티 포맷도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아빠, 어디가?> <정글의 법칙> <1박 2일> <나 혼자 산다> 등 먹방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대부분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뭔가를 먹는 장면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점잖게 테이블에 둘러앉아 음식에 관해 품평을 나누는 프로그램도 있고 남의 냉장고를 통째로 들고 와 그 안에 든 재료로 정해진 시간 내에 음식을 만들어 겨루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에는 먹는 모습을 그냥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 인기다. 먹성 좋아 보이는 개그맨들이 식당에 모여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있고, 젊고 예쁜 여자 아이돌 멤버가 음식 먹는 걸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일부 인터넷 방송 채널 가운데는 젊은 여성이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대는 장면을 하염없이 보여주는 방송도 있다. 놀랍게도 이런 방송이 적지 않은 인기를 모으고 있고 방송 출연자가 단지 먹어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큰 돈을 버는 사례도 적지 않단다. 먹방의 인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나온 바 있다. 하나는 가족의 해체와 1인 가족의 증대가 먹방의 인기를 가속화한다는 설명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외로움을 가상으로나마 덜고 싶은 욕망이 먹방의 인기로 나타난다는 해석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다이어트에 대한 과도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에서 일종의 전복적 즐거움을 얻는다는 해석이다. 사실 최근의 먹방은 다이어트를 통해 체형을 가꾸고 소식으로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배적 담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일면 수긍이 가는 해석이다. 사진 출처 - 티브이데일리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대중의 욕구와 욕망을 드러내고 투사하는 대상이다. 영화를 보고 TV를 보면서 얻는 대중의 쾌락은 결국 그들이 가진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쾌락이다. 먹는 것에 대한 욕망과 섹스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적 욕구에 해당한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먹방은 포르노그래피와 그리 다르지 않다. 먹방을 두고 음식 포르노라는 비판이 나온 건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심리학자 매슬로우(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구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식욕과 성욕 등 가장 기본이 되는 생리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소속과 애정에 대한 욕구, 명예와 권력의 욕구, 그리고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하는 자기실현의 욕구로 단계화되어 있고, 아래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보다 상위 욕구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 그러니까 일단 배가 부르고 안전해야 사랑도 꿈꾸고 명예도, 자기 실현도 욕망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매슬로우의 이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설명하는 데는 일정하게 유의미한 점이 있다. 다수 대중의 인기를 얻는 대중문화일수록 대체로 낮은 단계의 기본적인 욕망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식욕과 성욕, 안전, 소속감과 애정 같은 욕구 말이다. 헐리우드 영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 중 하나는 대체로 가장 기본적인, 따라서 보편적인 욕구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최근 먹방의 인기는 지금 대중의 욕구가 가장 기본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집중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어떤 사회적 가치나 이념, 이상의 실현, 아름다움의 추구, 이런 것들은 끼어들 여지도 없이 당장의 생존과 최소한의 안전과 내 식구들의 먹을 거리가 더 중요한 시대를 드러내는 징후일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가 보수화되고 역사 퇴행의 조짐이 완연하고 최소한의 안전과 복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안과 의심이 강화되는 시점에 먹방이 유행하고 있다는 건 참 시사적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9월 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16 | 추천: 0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뜬금없이 도깨비 이야기냐고요? 역시 여름밤엔 옛날이야기가 아닐까요, 그것도 도깨비 이야기 말입니다. 이름 석 자 정도만 읽고 쓸 줄 알았던 외할머니가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가난한 김 서방이 살았어. 이집 저집 남의 집 허드렛일만 해주고 근근이 먹고살던 그 김 서방이 어찌어찌 해서 도깨비와 친구가 된 거야. 어느 날 도깨비가 김 서방한테 메밀묵을 좀 쑤어달라고 했대. 도깨비는 원래 메밀묵을 제일 좋아하거든. 김 서방이 쑤어준 메밀묵을 먹으면서 도깨비는 “아이구 맛있다... 아이구 맛있다!” 하면서 정신없이 먹더래. 그러고 나서 다음날 김 서방한테 고맙다고 하면서 가마솥을 하나 주더래. 그런데 이 가마솥이 보통 가마솥이 아니야. 뚜껑을 열기만 하면 하얀 쌀이 저절로 나오는 가마솥이었어. 도깨비는 그걸 줄 테니 자기한테 매일 밤 맛있는 메밀묵을 만들어달라고 했대. 김 서방은 그러자고 했지. 그깟 메밀묵 한 덩이하고 매일 쌀이 나오는 가마솥하고 바꾸자니 당연히 그러자고 했겠지, 쌀이 얼마나 나오는 솥이냐고? 할머니집 부엌에 있는 가마솥 있지? 그거보다 큰 거였어. 그 큰 가마솥에서 쌀이 날마다 한 가득씩 나오니 김 서방은 이제 먹고사는데 아무런 걱정이 없었어. 남의 집 허드렛일을 안 해도 되고, 이쁜 색시도 얻었지. 이제 김 서방은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었어. 그러고 나니까 이젠 매일 밤마다 집에 찾아와 메밀묵을 달라고 찾아오는 도깨비가 점점 귀찮아졌어. 그깟 메밀묵 따위야 얼마나 하겠어. 사람이 배가 부르면 다 그렇게 돼. 아무튼 도깨비가 성가시게 된 김 서방이 꾀를 냈지. 도깨비한테 “나는 이 세상에서 돈이 제일 무섭네. 자네는 세상에서 뭐가 가장 무서운가?” 하고 물었대. 그러자 도깨비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나는 말 피가 제일 무서워” 그러더래. 김 서방은 대번에 옳다구나 했지. 그리고 바로 다음날 김 서방은 대문 앞에 말 피를 발라 놓았지. 귀찮은 도깨비가 다시 오지 못하게 말이야. 말 피? 아, 말 피도 몰라? 이히힝 하는 그 말 있잖아. 그래 소 말고 말! 그 말의 피 말이야. 그래, 도깨비는 너무 화가 났지. 그래서 도깨비는 김 서방이 가장 무서워하는 걸 김 서방 마당에 던졌어. “이 못된 김 서방아, 너도 죽어봐라. 네가 제일 무서워하는 돈이다!” 그러면서 말이야. 그것도 매일매일 밤마다. 아무렴... 김 서방은 금세 고을에서 가장 부자가 됐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첩을 열둘이나 거느리게 됐지. 작은마누라 말이야. 응? 자기 색시가 아무리 이뻐도 돈 많은 사내들은 다 그래. 그렇다고 김 서방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는 부자로 살았냐고? 그건 아니야. 도깨비들은 자기가 줬던 것은 꼭 다시 가져가거든. 도깨비한테 받은 돈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나뭇잎이 된다는 거야. 그 돈으로 지은 집도 다 허물어지고. 결국 김 서방은 거지가 되어서 죽었대. 이제 그만 자자. 아! 그런데 혹시 니가 도깨비를 만나 횡재를 하게 되면 무조건 땅을 사야 되는 거야. 도깨비가 다른 건 다 줬다 뺏어가도 땅은 못 뺏어가거든. 내 말 명심해. 꼭 땅을 사야 된다, 알았지? 사진 출처 - yes24 일찍이 부동산 땅 투기만 한 것이 없다는 걸 예견하셨던 걸까요? 아무튼 외할머니는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도깨비가 실제로 살아 있었다고 믿는 분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제게 들려주었던 못된 도깨비, 바보 같은 도깨비, 무서운 도깨비 등 많은 도깨비 이야기는 그저 재미가 아니라 외할머니가 믿고 있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제가 어느 날 산길에서 도깨비를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밤길에 누가 너를 “김 서방” 하고 부르면 도깨비인 줄 알라든가, 씨름을 하자는 도깨비를 만나면 반드시 왼쪽 다리를 걸어 넘기라든가 등등의 도깨비에게 홀렸을 때의 대처법을 진지하게 말씀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뭘 믿고 저리 버티겠나 하는 이야기가 뜨겁습니다. 롯데그룹 부회장이 자살하기 전 남긴 유서에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다, 롯데그룹 비자금은 없었다.’고 썼다고 합니다. 어느 명망 있는 역사학자의 파렴치한 행태를 보며 ‘정말 그 사람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에 홀린 걸까, 저는 무엇에 홀려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마음 깊이 남아 있는 외할머니의 말씀이 있습니다. “도깨비의 키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도깨비는 원래 올려다볼수록 커지고 내려다볼수록 작아진다. 그러니 도깨비와 앞에 섰을 때 네 눈높이가 바로 도깨비의 실제 키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8월 3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0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