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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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 희망과 실망의 변주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요즘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선후보가 어떤 모습으로 정치판을 떠날지 상상해보고 있다. "안철수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대선 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하던 그때가 다시 떠오르네요. 당시 안철수가 내건 슬로건이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였죠? 저는 이 문구가 참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사회에, 정치판에 희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미래가 태풍처럼 밀려올 것만 같은 떨림이랄까." (강연재, 「안철수는 왜」 23쪽)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새 정치'에 공감한다며 관련 저서까지 펴냈던 강연재 전 국민의당 부대변인이 7월 6일 탈당계를 냈다. 앞서 강 전 부대변인은 "(현재의 국민의당이) 제3 중도의 길을 가는 정당도 아니고, 전국 정당도 아니고, 안철수의 새 정치도 없다고 판단했다"고 탈당 사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안철수의 새 정치는 저뿐만 아니라 국민들께서도 원했다. 그런데 새 정치라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이걸 안착시키는 데 있어 정말 사생결단 각오나 결기,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렇게 하기에는 안철수라는 정치인과 저를 포함한 주변 분들의 역량이 다 부족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ㅋㅋㅋ 이러~언. 그걸 지금에서야….)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 준용씨에 대한 '취업특혜 의혹 제보조작' 사건 혐의로 이준서 전 당 최고위원이 구속되는 등 바람 잘 날 없는 국민의당에 쏠린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감정은 ‘실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듯하다. 스스로 ‘안빠’임을 자임하던 강연재마저도 "안철수 대응에 실망"이란 말을 날리고 탈당하는 판이니….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실망’이라니…. 그렇다면 무슨 ‘희망’이라도 걸었다는 말인데…. 나는 이 자리에서뿐 아니라 기회가 닿는 여러 자리에서 안철수라는 인물이 희망, 그것도 ‘정치적’ 희망을 걸 정도의 사람이 못 된다는 말을 줄곧 해왔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당장 ‘이명박근혜’ 정권 9년의 아픔을 낳는데 톡톡히 한 몫 한 이가 정치인 안철수임을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기억의 테이프를 감아 정치인 안철수의 등판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이명박 정권에 실망한 국민들은 합리적이고 정직해 보이는 안철수에 희망을 뒀다. 하지만 이 희망 안에 ‘패착(敗着)’이 도사리고 있었다. 성공한 벤처사업가, ‘국민 멘토’라는 이미지에 너무 빨리 ‘성공한 정치인’이라는 희망을 결합시켜버린 것이다. 희망 걸 데를 찾지 못하던 이들의 조급증이 만들어낸 결과다. 당시 정권에 대한 실망이, 오도된 희망 안에서 악수(惡手)를 변주해낸 것이다. 그 끝이 어떠했는지는 다 아는 사실이다. 당시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광화문 유세가 끝난 뒤 안철수는 “문 후보가 대통령이 되건 안 되건 나는 ‘내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역사적인 대선 투표 당일 가방을 싸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고, 정치인으로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때도 지금도 안철수 ‘정치’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아니, 있기나 한지….) 그 후과는 ‘이명박근혜’ 정권 9년간 이어졌고 오늘,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또 다른 변주를 낳고 있다. 준용씨에 대한 '취업특혜 의혹 제보조작' 사건은 그 한 조각일 뿐이다. 그래도 정치인 안철수에 희망을 거는 이가 있다면 ‘예정된 파국’에 눈감은 무감각, 무지를 탓하는 걸 넘어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철수 전 대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지난 7월 2일 당 차원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국민과 당에 정말 죄송한 일이 발생했다"고 말한 것, 그게 전부다. 많은 국민이 공분하고, 자신이 만든 당이 존폐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데, 이런 수준의 언명이라니. 그럼에도 그때도 지금도 안철수 전 대표의 긴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 할 말을 참고 있는 게 아니라, 타이밍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제 어떤 말을 해도 좋은 소리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나 있긴 한 걸까. 나는 최소한 안철수가 그 정도 판단은 하고 있으리라 기대를 걸어보지만, 역시나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다. ‘정치인’ 안철수는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앞으로는 정치인 안철수로 인해 ‘물 먹는’ 이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헛된 ‘희망’의 변주 놀음에 정신이 뺏겨 실망에서 더 나아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이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7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32 | 추천: 8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촛불의 힘으로 새 정부가 국민적 기대를 모으며 출범하였다. 새 정부의 개혁적 행보에 우리 모두가 연신 감동을 받고 있다. 국민과 함께 소통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수갑을 차고 법정을 오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처참한 모습은 촛불혁명의 시대를 맞아 몰락해가고 있는 친미극우보수세력의 말로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탄생한 새 정부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한국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열망하고 있다. 우리사회를 짓누르는 온갖 적폐의 완전한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강력하고 시의적절한 개혁드라이브로,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뚫어내고 적폐를 청산해야 할 역사적 과제가 주어졌다. 다시는 도돌이표를 그리지 않는 진보적 개혁 실현이 새 정부의 시대적 소명이다. 한국사회의 적폐를 청산하고 진보개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부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방향을 정해야 할 핵심적 정책과제는 무엇일까? 남북관계의 개선과 대등한 한미관계의 실현이다. 우리사회에서 친미수구보수세력의 기득권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사대의존과 동족대결에 기댄 반북 종북몰이로 부패기득권을 유지해 온 냉전잔재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 수구보수세력의 뒷배를 없애야 한다. 종북몰이가 판치는 우리사회의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는 질식당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정책과 같거나 유사한 주장을 하면 수사와 재판을 받고 감옥을 가야하는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국민주권은 제약당하기 일쑤다. 대통령조차 ‘NLL(북방한계선)은 영토선이 아니다’라고 토론할 수 없는 사회,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면 미국의 전략자산과 한미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외교안보특보의 발언조차 종북몰이 당하는 현실에서 국민 다수의 자유로운 민주적 의사로 국가정책이 정해진다는 말은 허위의 수사에 불과하다. 사진 출처 - 뉴스1 새 정부의 등장으로 종북몰이가 소멸될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종북몰이가 소멸될 리 만무하다. 친미극우보수세력의 뒷배가 여전히 든든하기 때문이다. 소위 이적동조, 이적단체, 이적표현물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 제7조의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국가보안법 제7조에 의해 온 국민이 겁박당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제7조는 국가보안법의 핵심조항으로 국민 전체를 국가보안법의 포로로 만드는 조항이다. 이 조항은 국민 전체를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로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이 조항으로 인하여 자신이 스스로 사상, 양심, 표현, 결사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억압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처지를 망각하기 쉽다. 마치 북한보다는 나은 인권국가에 사는 것으로 세뇌당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적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이 조항으로 인하여 우리사회는 동족에 대한 혐오와 증오, 비방과, 폄훼만이 자유로운 의사표현인 양 득세하게 되었다. 외세와 극우보수세력들의 반북 적대 수구기득권 유지정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식민지 노예와 같은 삶을 정상적 삶으로 착각하고 분단정신병동에 갇힌 줄도 모르고 숙명으로 알고 지내도록 강요하는 국가보안법 제7조를 없애지 않고서는 진보적 개혁은 요원하다. 수구기득권세력의 종북몰이를 극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도돌이표를 그리는 우물 안 개구리식의 면피용 개혁 행세에 그칠 공산이 크다. 수구보수세력의 뒷배를 없애기 위해서는 외세의 동족대결정책을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외세를 추종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을 절대무기로 분단냉전구조에 기생하여 종북몰이로 한국사회를 짓눌러 온 극우보수세력들의 것이다. 동족대결을 강요하는 종속적 한미관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남북관계의 개선도, 종북몰이의 청산도, 수구보수세력의 퇴장도 불가능하다. 수구보수세력들에게 회생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뒷배가 무너지지 않는 한 새 정부의 개혁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가로막힐 공산이 크다. 새 정부가 나갈 길은 사대의존과 동족대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촛불 민심과 함께 민족대단결의 힘을 믿고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6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023 | 추천: 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딱 백일 전이었다.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만장일치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한다”는 ‘법의 말’은 아름답고 빛나는 시(詩)였다. 정당하고도 합법적으로 역사의 기사회생을 선언한 역사의 시였다. 그에 힘입어, 사필귀정(事必歸正)은 글자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왔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은 ‘힘없는 말’이 아니라 ‘말로 된 힘’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주문(主文)만 빛났던 것은 아니었다. 탄핵 인용의 이유들도 두고두고 새겨둘 만했다. 헌재는 “헌법과 법률의 위배행위가 재임 기간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런 위헌·위법행위는 국민 신임의 배반인 동시에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탄핵을 인용했던 것이다. “피청구인 박근혜”만 탄핵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재임 기간 전반에 걸쳐” 국가 공권력을 사유화한 박근혜식 정치 방식과 노선도 함께 위헌으로 탄핵된 것이었다. 더불어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정치집단도 국민의 신임을 배반하고 헌법질서의 수호에 실패한 세력으로 탄핵되었다고 봐야 마땅하다. 문재인 정부를 선택한 대통령 선거 결과는 위헌적이고 수구적인 집권세력에 대한 정치적 심판이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숙과 반성을 모른다. 탄핵 인용과 정권교체 이후에도 고약하고 거친 언행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말도 안 되는 일’은 하기 어렵게 됐으니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도 내뱉어서 ‘나라다운 나라’를 오염시키고 말겠다는 것인지. 저들이 내뱉은 정치적 언어의 특징은 뻔뻔함이다. 어쩌면 나도 그런 막말에 오염(/면역)되었나 보다,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라도 막 써보자는 심보가 생겨난다. 사진 출처 - 뉴시스 ------- 태극기를 흔든다고 누구나 애국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귀를 자른다고 누구나 고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애국, 예술은 제스처에 있지 않다. 당명만 바꾼다고 해서 언행이 바르거나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제스처일 가능성이 크다. 물이 맑으면 살 수 없는 고기가 있다. 그들이 살려면 물이 맑아져서는 안 된다. 사회가 맑아지고 시민들의 생각이 밝아지면 견딜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일자리가 늘어나건 말건, 정부가 꾸려지건 말건, 남이 죽건 말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자들. 말 같지도 않는 말, 말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말을 쏟아내는 정치 모리배들이 있다. 그들이 정당한 대의를 반영하거나 다수의 동의를 얻었기에 그런 가당치도 않은 말을 내뱉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 국회의원 자리를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막말을 최소한의 분별도 없이 마구잡이로(사실은 ‘마구잡이로’가 아니라 ‘마침맞게’겠지만) 보도하는 방송과 신문이 있다. 그리고 그런 망언과 무분별이 판치는 세상이 주구장창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다. 이제는 줄었길 희망한다. 이념문제에서든, 한미관계에서든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들도 있다. 자기보다 더 나가면 과격하고, 자기보다 덜 나오면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치들이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종북, 반미주의자라고 부름으로써 ‘비인간화’하는 사람들. 미워하는 사람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규정/차별해 놔야, 죄책감 없이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일까. 이런 자기중심주의에 인권과 다양성(diversity)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은, 물론 구분해야 한다. 차이(difference)를 차별(discrimination)로 몰아서는 안 되지만 옳음과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서도 안 된다. 1+1은 2이지 3이 아니다. 그릇된 것을 차이라고 용인하거나 다양성의 이름으로 관용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것은, 법적 판단이 나오기 전이라도 대개 잘못된 것이다. 나는 네 생각과 ‘다르다’면서 ‘잘못된’ 생각을 또박또박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개혁은 위험하고 성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구체제에서 이익을 누리던 모든 사람들은 개혁적 인물을 공격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온 힘을 다해” 공격하는 반면에, 새로운 질서로 이익을 누리게 될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 개혁의 잠재적 수혜자들의 지지가 약한 이유는 뭘까? 과거에 법제도를 전횡하던 적들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눈으로 확고한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새로운 제도를 신뢰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회의적 속성 때문이란다. 하여, 마키아벨리는 개혁에 성공하려면, 주도세력이 정의로운 비전에다가 그것을 실천할 역량까지도 갖춘 “무장한 예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렇다, ‘정의 없는 힘’은 무도하고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 이제 근 10년 만에 시민의 힘으로 ‘정의’를 구현함직한 정부를 세웠다. 얍삽하게 정치하는 방법만 알고 정치하는 의미(공공의 정의)는 묻지도 않는 자들의 언필칭 “협치”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 저들처럼 “힘만 숭상하는 자들의 내일이 어떤 몰골일지는, 어제 똑같이 그리했던 자들의 오늘을 보면 알 수 있다.”(기억이 나지 않아 저자를 명기하지 못했다. 저자의 양해를 구합니다.) 옳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데 옳고 그른 때도 없다.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고, 해본 것은 이해한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약해지면 민주주의의 빈민이 되고 만다는 통각(痛覺)과 ‘각자의 싸움을 함께’ 해본 촛불의 체험이 우리에게는 있다. 탄핵 백일, 사불범정(邪不犯正)을 심인(心印)한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6월 2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87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시가 한 시대의 환부를 짚어내는 진단서 같은 것이라면 노래는 바로 그 환부의 깊은 곳에서 그것을 치유해 나갈 가장 현실적인 자양분이다. 시가 다만 시대의 진단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노래를 필요로 하며 노래가 환부로 함께 곪아 들어가지 않기 위해 시의 정신을 필요로 한다. 시와 노래의 만남은 필연적이며 그것은 양자가 함께 시대의 진정한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김창남- 말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러나 그 말들이 시가 되지는 못했다. 시를 필요로 하는 시대는 당연히 아프다. 그러나 시 조차 필요 없는 시대는 아픈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무지의 시대다.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다. 그 가시들은 바람처럼 유영하다 정확한 목표지점을 찾아 화살처럼 꽂힌다. 그러나 모른다. 그 가시로 인해 어느 누가 상처를 입고 썩어 들어가는 가슴을 안고 사는지를. 어떤 이의 말은 사람을 살린다고도 하는데 그런 포근함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시다. 시는 언어 속에 숨은 가시의 뾰족함을 감싸는 방패다. 태생부터 방어이니 누구를 해칠 여력이 없다. 진정한 날카로움이란 이런 것이다. 잘 벼린 칼을 휘둘러 단칼에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무뎌진 화살로 상대의 환부를 두드려 새살 돋게 하는 것이다. 시를 필요로 하는 시대는 아프다고 했지만 자신이 아픈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이가 많은 시대이기도 하다. 자성과 자각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많을수록 사회는 깊어진다. 살아볼만한 시대가 된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 머리를 세고 지금은 침 발라 돈을 세지 먼 훗날엔 무얼 셀까 –김준태 “감꽃” 시언지가영언(詩言志歌永言) -시는 말을 뜻하고 노래는 그 말을 길게 늘어뜨린 것- 이라 했으니 노래 또한 같은 기능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침 발라 돈을 세는 세상의 첨병이 되어 감정의 배설물 이외에 다른 기능이 없는 노래는 마취제를 잔뜩 바른 화살이 되어 시대의 환부조차 가늠하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 무기가 된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가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을 때 그것을 극복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예술이었다. 실제로 인구 60만의 도시 이르쿠츠크에는 1000명 이상 수용이 가능한 대극장이 7개나 있었고 몰려드는 시민들로 인해 자리가 남아나지 않았다. 어느 해 겨울엔 나도 그곳에서 뮤지컬을 관람했었다. 톨스토이와 체호프로, 볼쇼이와 레드아미 코러스로, 노보시비리스크 오케스트라로 대륙을 섬세하게 읊어대는 수많은 예술가의 혼으로 배고픔을 극복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시 한 수 소설 한 구절 기억하지 못하고 유행가나 한 소절 겨우 부르며 오직 그날의 돈벌이를 위해 매진하는 우리들의 삶을 반추해보면 그 땅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주변이 온통 시 인 세상을 꿈꾼 적이 있었다. 가슴에 담아둔 시 한 구절 없다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영화 한 장면 없다면 눈물 글썽이며 부를 노래 한 자락 없다면 그 시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며 회의를 품은 뒤였다. 바이칼 호수 사진 출처 - 필자 지난해 말의 촛불은 온 나라를 뒤집었다. 시민들의 열망을 표출하는 공간마다 노래도 넘쳐났다. 마치 노래 없이 무슨 집회를 열 수 있냐는 듯이. 그러나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에 바쁘게 함께 했던 예술인들 중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는 친구는 없었다. 노래 불러달라는 요구는 많았지만 노래 값을 준다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얘기다. 노래는 도구일 뿐 결코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사회적 비아냥을 그들만 감내한 꼴이다. “스케줄은 아이돌인데 벌이는 김춘삼이에요” 넉살좋은 후배가수가 넋두리 할 때면 은근히 꼬드기고 싶었다. 우리 시베리아 가자. 거기는 우리 같은 사람 절대 밥 굶기지는 않아. 대선전 차기정부의 문화부 장관의 조건을 내게 묻는 이가 있었다. 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제2의 최고은이 생긴다면 평생 무릎 꿇고 살겠습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좋다고. 모든 것이 화살인 시대. 그 화살을 쏘고도 혹은 맞고도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는 이들의 가슴을 꽃 한 송이로 피어 위무해야 할 청춘이 굶어 죽는 야만의 시대를 살았다는 자각이 있다면 누구라도 충분하다. 인기 아이돌의 노래 세 곡을 들을 수 있는 값이면 적어도 열 개의 시노래 향연을 펼칠 수 있다. 자본의 화살이 깊어짐의 씨알이 되는 지점이다. 바이칼의 심연 같은 깊이 있는 시대를 살고 싶다. * 글의 일부는 작은책 6월호 필자의 원고와 겹칩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6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88 | 추천: 0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이를 키운다는 건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동시에 힘든 일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성공하고 싶은 능력과 열정이 넘치는 여성분이 하루 종일 갓난아기와 씨름해야 한다는 상황에 처하면 십중팔구 복잡 미묘한 감정에 노출될 것이다. 현모양처가 장래 희망이었던 여성분조차도 힘든 육아에 지치다보면 자괴감을 느낄 수 있다. 갓난아기와 씨름하다 우울증에 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듣기라도 하면 육아란 게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말로 대충 뭉갤 일이 아니다. 그런데, 육아에 지친 여성에게 “나도 직장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고 싶다”거나 “넌 하루 종일 아가랑 있으니 복받은 줄 알아라”라고 말하는 걸 위로라고 불러야 할까 폭력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이들에겐 야구 한 경기가 5시간밖에 안 걸린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또 어떤 이들에겐 야구란 ‘금수저는 금수저 자리에, 흙수저는 흙수저 자리에서 맡은 일만 하도록 하는 세계관을 반영하는 선전활동’처럼 느껴진다. 일부 삐딱한 분들이 느끼는 야구란 ‘던졌다, 쳤다, 받았다, 던졌다, 디졌다’의 무한반복에 다름 아니다. 어떤 이들에겐 축구경기가 날마다 없는 게 슬픈 일이겠지만 또 어떤 이들에겐 5000만 ‘전문가’들이 국가대표팀 감독 1년마다 모가지 날리는 국뽕경연장에 불과하다. 어떤 분들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열정적인 거리응원을 보며 한민족의 저력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 호기심으로 거리응원 나가봤다가 하필이면 소나기 맞아서 생쥐꼴이 되고 보니 ‘내가 뭐 하러 이러고 있나’ 싶어서 관뒀다. 그 뒤로는 거리응원에 동참하지 않았다. 솔직히 내겐 그 열기가 광기 비슷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좀 무서웠다. 어떤 이들에겐 야구와 축구를 억지로 봐야 하는 것 자체가 곤욕이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분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에겐 축구와 야구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걸 말 그대로 일로 해야 하느라 축구와 야구가 싫어져 버렸을 수도 있다. 어떤 체육부 기자는 야구 보며 기사 쓰는 게 천직일 테고, 또 어떤 이들에겐 ‘내가 이러려고 기자됐나’ 자괴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이런 분들에게 야구란 그냥 야근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얼마 전부터 야구를 담당하게 되면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딱 하나다. 일주일에서 주말 빼고 닷새 가운데 최소 두 번은 야근이다. 한 번은 야구 담당 야근, 한 번은 내근 겸 야근. 역사는 두 번 반복되는데 한 번은 비극, 또 한 번은 희극이라고 했던가. 내게 야근은 두 번 반복되는데 한 번도 피곤하고 두 번은 더 피곤하다. 거기다 첫인상도 너무 안 좋았다. WBC 경기 취재가 내게 첫 야구 취재였다. 다섯 시간이 넘도록 경기가 안 끝났다. 그리고는 졌다. 페이스북에 야구 때문에 야근 하는 게 너무 피곤하고 힘들다고 썼더니 온 동네 야구팬들이 주렁주렁 댓글을 단다. ‘너는 야구를 보면서 월급 받는구나’ ‘나도 날마다 야구 보면 소원이 없겠다’ 뭐 그런 댓글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그 분들 입장은 이해한다. 나도 그냥 집에서 두 다리 뻗고 병맥주를 홀짝거리며 야구를 보면 야구가 좀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나도 어느 야구팀 1번부터 9번 타자 이름을 줄줄 외우며 1회부터 9회까지 ‘정주행’했다. 새벽에 일어나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에 출전해 올드 트래포드를 누비는 모습을 응원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 댓글을 봤을 때는 야구 보느라 너무 지쳐 있어서 싸울 기운도 없었다. 기운을 차린 뒤 그냥 페이스북 계정을 없애 버렸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다 좋지도 않고, 반대로 자신에게 싫은 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다 싫지도 않다. 고기를 못 먹는 사람 앞에서 육식을 자랑하거나 육식을 강권하는 걸 우리는 ‘폭력’이라고 부른다. 담배 피우기 싫다는 사람에게 담배 연기 내뿜으며 담배 예찬해봐야 개저씨 소리 듣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이 든다. 인권의 기초란,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아닐까. 세상 모든 종교를 존중한다. 나한테 전도하려고 치근대기 전까지는. 이쯤 얘기했는데도 “난 야구 좋은데” 하며 나를 질책하려는 분들이 꼭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을 위해 일부러라도 최대한 삐딱하게 말해주고 싶다. “야구를 담당하기 전에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야구를 정말 좋아하지 않습니다. 야구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6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39 | 추천: 0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번 모임은 여의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서 사흘쯤 지난 후였습니다. 오랜만에 다들 모여서 저녁을 먹자는 문자가 왔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만남을 이어오고 있으니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만나왔던 친구들이었습니다. 1년에 서너 번쯤, 정기적인 모임 같은 것도 없이 그때그때, 시간이 서로 맞을 때 10여 명 내외가 그렇게 만나온, 특별한 성격도 이름도 없는 그런 모임입니다, 모두들 사는 곳이 제각각이어서 강남과 강북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만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로나 광화문에서 만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여의도에서 모이게 된 것은 오랫동안 더불어민주당에서 일해 왔던 친구 C 때문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던 C에게 위로 겸 축하를 해준다는 명분으로 그렇게 열 명 가까운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모두들 C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C야, 고생했다. 나 이번에 문재인 찍었다.” 그동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나도!” “나도!” C와 악수를 나누며 이번 선거에서 자신도 한 몫 거들었다는 듯이 모두들 축하의 말을 건넸습니다. “안철수 지지율이 그렇게 갑자기 확 빠질 줄 예상하지 못했어. 막판 홍준표 지지율이 올라갈 때는 긴장도 했지.” 친구들의 축하인사에 화답하듯 C는 선거 막판까지 가슴을 졸이게 했던 여론 조사의 추이를 되짚으며 이번 선거의 결과를 정리해주었습니다. 사회 문제는 물론, 아이들 교육 문제, 부부관계 등 만날 때마다 각기 다른 견해로 부딪쳤던 그동안의 모임과는 달리 이번에는 어떤 이견도 없었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할 때마다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무엇보다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의견 대립을 했던 친구들이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래, 그렇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이번 선거 결과에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직업도 다르고 성격도, 취향도 다른 친구들이 그야 말로 대동단결하는 오랜만의 모임이었습니다. 단 한 가지 누가 이번 선거 결과를 만들었나에 대한 의견은 조금 달랐습니다. “문재인 당선의 1등 공신은 박근혜지!” “최순실이지!” “jtbc!” “문재인 찍은 내가 1등 공신!” “위대한 촛불 시민들이지!” “무슨 소리? 그동안 고생한 C야 말로 1등 공신!” 술자리는 점점 달아올라 어느새 왁자지껄해졌습니다. 싱거운 우스갯소리가 이어지며 몇 번의 술잔이 더 돌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쉬어가기로 약속이나 한 듯 대화가 멈춘 때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친구 K가 입을 열었습니다. “C야, 사실 나는 문재인 찍지 않았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노빠 싫어하잖아.” C는 ‘그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K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궁금한 듯했습니다. K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문재인이 당선되고 나서 TV를 볼 때 이상하게 안정감 같은 것, 왠지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야. 그가 이야기하는 게 뭐 특별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말야.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 도대체 왜 그럴까?” 사진 출처 - 한겨레 갑자기 진지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문득 저도 K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느낌이라는 것에 대해 딱 부러지는 답이야 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 또한 그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K의 말을 다 듣고 나서 C는 씩 웃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쉽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그동안, 그러니까 이명박, 박근혜 정권 동안, 너무 비상식적인 것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야. 그러다가 이제야 네가 지극히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장면을 보게 된 거지.” 정말 그렇게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그렇게 쉬운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싱겁고 당연한 사실 때문이었을까요? 2차까지 이어진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K의 질문과 C의 대답을 계속 되짚어보았습니다. 몇 번을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저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5월 3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43 | 추천: 2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곧 쉰인 나는 배우고 싶은 것투성인데, 10대 복판의 아들 녀석들은 하고 싶은 일이라곤 없단다. 스케이팅도 발레도 재즈댄스도,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목탄화와 캘리그라피도, 세상엔 재밌어 뵈는 일이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박정희 시대의 교육지상주의를 통과한 까닭인지, 나는 틈날 때마다 엿보고 기회 닿을 때마다 두리번거린다. 라틴어도 더듬거리고 스페인어도 배우고 아랍 문자와 씨름도 해 본다. 코딩 프로그램을 이수하는가 하면 리본 공예 강좌마저 듣고 언젠가 미용학원에 다닐 계획도 세운다. 가히 교육 시장의 모범적 소비자다. 배워서 남는 것? 사실 별로 없다. 호기심에 약한 만큼 싫증내는 것도 빨라서, 보통은 3개월이고 길어야 1‧2년이다. 친애하는 미셸 오바마 말마따나 ‘싫증날 때야말로 계속해야 할 때’라면 딱 낙제생이랄까. 해본 적 있다는 막연한 만족감만 남을 뿐, 단어는 휘발되고 기예는 망각되고 감각은 제자리다. 그런데도 세상 거의 모든 걸 해 보고 싶다. 수영과 에어로빅에서 시작해 섭렵해 본 운동만도 열 종목을 거뜬히 넘을 정도니 알조다. 반면 자식들은? 다 싫단다. 운동이나 외국어는 물론이고 컴퓨터도 춤도 노래도 배우기 싫단다. 기가 막혀서. 누가 들으면 학원깨나 다닌 줄 알겠다! 그나마 교과 학원 보낸 적은 드물다는 자신감을 갖고 빽 소리를 질러 보지만, 생각해 보면 애들이 섭렵한 종목도 적지 않다. 기껏해야 서너 번으로 끝낸 일이 많긴 하지만, 한문도 라틴어도 일본어도, 피아노는 물론 바이올린과 플루트와 드럼, 수영과 태권도에 탁구며, 게다가 목공과 코딩까지, 따져 보니 극성이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보통은 내가 가르치거나 나 배울 때 함께 배운 건데, 툴툴거려 보지만, 어쨌거나 아이들이 배우겠다고 먼저 나선 적은 없다시피 하다. 사진 출처 - 이미지투데이 궁금하기 전에 배움을 강요당한다는 건 얼마나 피곤할까. 어렸을 적 피아노 배우던 기억이 떠오른다. 1970~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중산층의 딸로서 피아노를 면할 수 있었던 사람은 별로 없었으리라. 우리 엄마들, 피아노를 동경했지만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들은, 숨 돌릴 만 하게 되자 생활비를 쪼개 딸들을 음악 학원에 보냈다. 엄마 때는 하고 싶어도 못 했던 거다, 요즘도 못 하는 사람이 훨씬 많단다― 나만 은혜 받았다는 죄책감마저 부둥켜안고, 직사각형 피아노 가방을 흔들며 다니던 음악 학원은, 그러나 날마다 새삼스레 지긋지긋했다. 10년쯤 피아노를 배웠지만 지금 남은 건 한두 소절이 전부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기는커녕 음악 일반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부작용만 남았다. 쉰이 다 돼서야 겨우, 피아노나 음악이 다시 조금 당긴다. ‘피아노 치는 딸’이란 환상에 거금을 투자한 부모님께는 크게 섭섭할 사연이다. 동기야 나쁠 리 없는데― 인생을 즐기는 데 예술과 스포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 공부 잘 하고 성공하라는 게 아니다, 평범하게 살더라도 자부심을 갖고 인생을 즐기라는 거야― 아마 내 아들들도 내가 내미는 ‘배움에의 권유’가 어지간히 지겨울 게다. 주말마다 엄마랑 DVD나 한 편씩 볼까? 좀 더 소프트한 권유에도 단호히 노!를 날린 후 아이가 몰두하는 건 그저 게임이다. 내가 모르고 또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장르라 그런지, 그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서야 아들은 비로소 행복해 뵌다. 소리 내 웃고 탄성을 올리고 만족스러워 한다. 게임만은 열 시간을 거푸 하고도 지치지 않는다. 아니, 그럼 게임 종류나 좀 바꿔 보든지. 멋지고 심오한 게임도 많더구만 넌 어째 줄곧 슈팅 게임이냐. 단순무식하게 쏘아대고 팀원들이랑 거친 말이나 주고받는 게 그리 좋으냐? 왜 이리 조급할까. 성공에의 강박 아니면 문화적 풍요에의 강박에 들린 듯. 다수의 삶, 평범한 삶은 어떻게든 거부해 보겠다는 듯.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고, 더구나 수명도 나날이 길어진다는데 말이다. 귀족제적 위계가 발달했던 역사에, 엘리트라야 삶이 그럴 듯 했던 최근 수십 년의 굴곡이 더해져, 대한민국의 교육은 계속 널뛴다. 다들 터질 듯 불만이 팽창했는데도 좀처럼 그 널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에. 오늘도, 나는 더 기다리는 대신 “그럼 이걸 배워 볼래?”라는 카드를 내밀고야 만다. 달라질 수 있을까? 지난 1주일여, 오랜만에 뉴스를 연속 시청하면서, 1987년 이후 지난 30년간이 아주 허송세월은 아니었구나 싶어 반가웠다. 어딘가에서 힘이 자라고 있었구나, 자산과 능력 자체는 많이 불어났구나, 어쩌면 조금만 배치를 바꿔도 많이 달라질 수 있겠구나. 궁금해지기 전에 배움을 강요당해 온 우리 아이들도,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으려나? 각자 하고 싶은 몫을 기다려 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될 수 있으려나? 그러려면 나부터 조금은 바뀌어야 할 텐데.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5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925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이고,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더 이상 의문을 품는 일이 없는 나라를 꿈꾼다. 이 나라가 몇 몇 권력자의 소유물이 아님을 영원히 확인하는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꿈꾼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 그 자체를 탐하지 아니하고, 그 권력이 국민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므로 오로지 국민을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청렴·강직한 나라를 꿈꾼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국헌문란 사태’처럼 사리사욕과 권력 유지를 위하여 법치주의를 무력화 시킨 자들에게는 법의 위엄을 단호하게 보여주는 공정한 나라를 꿈꾼다. ‘광우병 촛불 시위’같은 시민 불복종 운동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행하는 정당한 의사표시다. 국민의 절실한 목소리를 간교한 법의 이름으로 탄압하지 않는 나라, 법의 이름을 빌린 압제자 없는 나라를 꿈꾼다.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 ‘우병우 민정수석 사건’처럼 소수권력자의 눈치만을 살피고, 법을 조자룡 헌 칼 쓰듯하는 오만한 국가기관은 마땅히 해체하거나 대수술하는 올바른 나라를 꿈꾼다. 인간의 존엄성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니 모든 행위의 기본 지침을 인간의 존엄성에 두는 위대한 나라를 꿈꾼다. 재화와 물질만으로 인간 존엄성이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송파구 세모녀 사건’처럼 재화와 물질이 궁핍해지면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여 모진 한파에 인간의 존엄성이 흔들릴 때 같이 동행할 순 없다하더라도, 최소한 우산을 받쳐주는 따뜻한 나라를 꿈꾼다. 인간의 존엄성은 생명의 존엄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나라 하나하나의 모든 생명이 고귀하고 지구보다 무겁다는 것을 철칙으로 지키는 든든한 나라를 꿈꾼다. ‘4·16 세월호 참사’처럼 생명의 존엄성이 짓밟히거나 사라져 갈 때 사랑의 가슴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자비로운 나라를 꿈꾼다. 4·16 참사나 ‘백남기 농민 사건’처럼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었을 때 진실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아니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를 꿈꾼다. 그 진실이 아무리 참혹하고, 더럽고, 역겨워도 그 진실을 밝혀내고, 그 진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건강한 나라를 꿈꾼다. 국가가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것은 오로지 평화를 지키려는 것임을 알고, 이 땅에 전쟁의 참화를 막아내는 진정 강한 나라를 꿈꾼다. ‘사드 배치’처럼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네 탓 하지 아니하고, 겁에 질려 움츠린 평화의 모습이 내 탓이라는 것을 알고, 주체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줄 아는 자존감 있는 나라를 꿈꾼다. 형제 나라를 죽이겠다고 으르렁 거리고, 겁박을 일삼는 나라가 아닌 형제의 과오까지도 함께 안고 화해하는 너그러운 나라를 꿈꾼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모두가 하나 되는 미래를 이루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나라를 꿈꾼다. 사진 출처 - 뉴시스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생래적인 고유 요소이기 때문에 다수와는 다른 소수가 항상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소수자를 배척하지 아니하고,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포용의 나라를 꿈꾼다. 나아가, ‘성소수자’처럼 영원한 소수자가 존재하기에 다수결로 소수자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는 문명국가를 꿈꾼다. 자유의 억압은 국가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고, 평등의 부정은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시민의 자유를 지켜주고, 평등 구현을 위해 맹진하는 자랑스러운 나라를 꿈꾼다. 최저임금만을 받아도 친구에게 한 달에 한두 번 소주 한잔 사줄 수 있는 정도의 정당한 노동 대가가 주어지는 나라, 나라 전체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현실적으로 어렵더라도 최소한 동일사업장에서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도 지켜내어 노동자의 자긍심을 지켜주는 나라를 꿈꾼다. 벌금은 경미한 범죄에 대하여 내리는 가장 가벼운 형벌이다. 부자에게는 껌 값도 안 되는 금액에 해당하는 벌금을 낼 돈이 없어서 1년에 4만 명 가까운 사람이 감옥에 가야한다. 돈이 없어서 감옥에 수감되는 현대판 노예 장발장이 없어지는 형벌이 평등한 나라를 꿈꾼다. 법률이 흉기와 살상무기가 아니라 정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나라, 법 앞에 모든 국민이 실질적으로 평등한 나라를 꿈꾼다. 정의가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지는 못하더라도 정의가 짓밟히는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5월 1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32 | 추천: 0
- 늑대의 시대 양으로 사는 길 보여주길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하필 이 원고 마감일이 제19대 대통령선거 당일로 예정돼 있었다. 대세가 아니라 결과가 이미 결정 난 판이라지만, 주위에서 간헐적으로 나오는 ‘혹시나 하는’ 견제나 재수 없는 ‘꿈’ 얘기 때문에…. 마감 날짜까지 늦춰가며 원고를 잡아두고 있었던 것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원고는 미리 써놓기로 했다. 알려진 대로 문재인 대통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이 ‘독실하다’는 말을 께름칙하게 만든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서석구 변호사 같은 이들이 있어 평소 이 말은 잘 쓰지 않는 편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기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독실한 신자 축에 든다고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유력한 후보시절 사전 취재를 위해 몇 차례 그의 근거지(?)를 찾았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자나 사목자의 활동 근거지가 주로 당사자가 교적(敎籍)을 두고 있는 본당이 된다. 따라서 당시 문 후보의 근거지는 그가 교적을 둔 천주교부산교구 양산 덕계본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취재에 돌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덕계본당에서는 별로 건질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예의 ‘색깔론’과 ‘지역감정’이 본당 신자들마저 갈라놓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했지만 쓸 만한 게 없었다. 마음먹고 찾았는데 ‘건질 게 없다니….’ 난감한 상황에 생각이 미친 게 문 후보의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오히려 메리트가 있다 싶었다. 급하게 방향을 틀어 그의 어머니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문 후보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꼭꼭 숨어있었다. 어렵사리 그가 다닌다는 성당을 찾았지만 연락처는 고사하고 주소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당 교우들한테 외부 사람에게는 절대로 어떤 얘기도 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놓은 터였다. 할 수 없이 속칭 ‘뻗치기(취재 대상을 무작정 기다리는 전통적인 취재 기법)’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몇 번이고 그물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몇 차례 허탕을 치고 허탈해 하고 있는 찰나에 우연히 성당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김 모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당시 문 후보를 그냥 ‘재인이’라고 불렀다. 솔직히 처음엔 허세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에겐 정말 문 후보가 그냥 ‘재인이’였다. 지금의 문 대통령과 같은 초등학교와 같은 성당을 다닌 오랜 ‘친구’라는 김 회장 입에서 나온 대통령에 대한 기억들은 의외였다. 문 대통령이 살던 집, 그의 부모님과 가족들, 학교생활 등에 관한 김 회장의 기억은 어떻게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의 날짜 단위까지 사실에 근접해 있었다. 김 회장의 호의로 어렵사리 문 대통령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결국 연로한 그의 어머니는 못 만나고 그를 모시고 사는 여동생을 근근이 만날 수 있었다. 첫 대면에 문 대통령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어머니의 당부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다. 다시 김 회장의 호의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성당 마당에서 여러 친구들 속 문 대통령과 뛰놀던 일, 성당 수녀님들의 사랑을 받던 모습, 가난했던 집안 내력, 초등학교 5~6학년 시절 미사 때 함께 복사(服事:미사를 거행할 때 주례 사제를 도와 전례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봉사자를 이르는 복사는 보통 신앙이 독실한 아이들 중에서 뽑힌다.)를 서던 기억들…. 사진 출처 - 문재인 대통령 가족 제공 꼬박 하루를 함께 동행한 김 회장은 그 또래가 지닌 평균적인 모습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그간 내가 알고 있던 문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재인이한테는 뭐 특별하다고 할 만한 게 없었어요. 가(걔) 어머니 신앙과 정성이 그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김 회장을 비롯한 성당 신자들에게 각인돼 있는 문 대통령 어머니 모습은 충실하고 겸손한 신앙인 그 자체였다. ‘얌전해서 도드라지는 게 없는 친구’라는 평 다른 쪽에는 ‘어머니를 닮은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거였다. “재인이한테는 하느님, 하느님의 정의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니 이 시대가 부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김 회장은 이 시대의 징표를 ‘정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사람으로 오랜 친구 ‘재인이’를 꼽았다. “내가 알아 온 재인이가 우리 모두의 재인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지는 모르겠지만, 지(자기) 잇속 차리는 일만 하지는 않을 거구만…. 그게 재인이 모습입니다.” 김 회장이 오랫동안 품어 온 ‘나의 문재인’이 확장되고 보편화될 때 세상에는 좀 더 희망이 들어차지 않을까.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5월 1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27 | 추천: 11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당은 정치적 입장이 비슷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단체다. 이념이나 정책들은 정당마다 다르다. 정당의 정체성도 다양하다. 정체성이란 자기를 자기되게 해준다는,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이다. 영어 아이덴티티(Identity)가 정체성과 동일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체성의 이름으로 동일성을 추구하는 과정은 타자를 배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차이를 차별하기도 한다.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척하거나 주변부로 몰아낸다. 게다가 이러한 행태에 공감하는 이들, 즉 ‘공범자’가 많아지면, 공범들의 힘에 의지해 더 자신 있게 자기 밖의 타자를 차별한다. 차별과 배제가 자기 정체성의 확보에 비례한다. 국익의 이름으로 외국을 공격하고, 민족의 이름으로 이민족을 배척하며, 종교를 내세워 타종교를 배타하는 과정에 자기 정체성을 강화시켜나간다. 가령 미국 백인의 정체성(동일성)은 흑인을 거부해왔고, 남성의 정체성(동일성)은 여성을 소외시켜왔다. 흑인을 거부하며 백인의 정체성을 확인해왔고, 여성을 차별하며 남성의 정체성을 확보해왔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영국의 이주민들이 한 동안은 영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자기정체성(동일성)을 찾으며 모국과의 관계를 단절한 것이 이른바 미국의 독립이다. 미국적 정체성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확립되고 강화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일본은 제국주의 시절 한국을 차별하며 일본적 정체성을 확인해왔고, 한국은 피식민지 시절 일본에 저항하며 한국적 정체성을 확보해왔다. 식민과 피식민, 지배와 피지배는 현상적으로는 남을 거부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외적 ‘형식’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정체성이라는 것은 자기가 주장한다고 확립되는 게 아니다. 타자에게 동의를 받을 때 확립된다. 타자로부터 동의를 받으려면 자신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 타협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타자가 동의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개방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정체성의 확립 과정이 폭력적이지 않게 된다. 이것은 정체성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억압하며 강화되는 정체성과 해방을 위해 저항하는 정체성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들이 많고 정체성도 여럿이어야 한다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다양성의 내용에도 우열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다양성이지, 권력을 잡으려는 의도와 목적을 잘 보면, 정당에도 옳고 그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은 자칫 아무나 존중해야 한다는 몰가치적인 말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다양성이냐를 물어야 한다. 정체성을 분명히 하되, 국민을 인간답게 하고 갈등을 조화시켜 질서를 잡아나가며, 그렇게 모든 국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한 저항적 정체성이 요청된다. 사진 출처 - 뉴시스 대선을 목전에 둔 마당에, 후보들이 갖고 있는 정체성의 ‘내용’을 판단해야 한다. 그 내용으로 ‘옥석’(玉石)을 가려야 한다. ‘옥’인지 ‘석’인지를 가르는 기준은 사람을 살리는 정책을 얼마나 입안하고 시도하느냐에 있다. 그 과정에도 가능한 한 사람들을 해치지 않으려는 따뜻한 자세가 얼마나 반영되어 있느냐에 있다. 기득권을 편들고 은근히 양극화를 누리려는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저항하는 자세에 있다. 그리고 저항의 과정에도 가능한 한 전체 국민을 정책의 중심에 두려는 민주적 정체성을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을 위한 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이를 동일하게 살릴 수도 없다. 그렇기에 고통 받는 이, 소외된 이를 먼저 살리려는 정책을 펼칠 도리 밖에 없다. 그러는 이가 있다면 그이가 바로 ‘옥’이다. 고통의 구조적 원인을 보며 그 구조를 바꾸려는 이가 ‘옥’이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정책과 실천이 ‘옥’이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정권의 허구를 의식하며 아래로부터의 ‘촛불’을 마음에 새기는 이가 ‘옥’이다. 개인과 국가의 주체성을 당당하게 세워가되, 약한 자 앞에서는 따듯해지는 자세가 ‘옥’이다. 이와 달리 각종 현란한 정책을 쏟아놓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을 은근히 활용하며 결국 자기의 기득권을 강화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석’이다. 사람보다 조직을 우선하는 이는 ‘석’이다. 자본을 우선하고 기술에 인간이 없으면 ‘석’이다. 북한에 대한 장기적 지원과 교류가 당장의 갈등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이는 ‘석’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자기중심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싸드 배치 전략에 그저 동의하는 이는 ‘석’이다. 대선 후보들의 각종 언술에 자기 권력의 확장을 우선하는 음험한 욕망이 들어있는지 아닌지 잘 보아야 한다. 단순한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그동안 자기를 위해 살아왔는지 전체를 위해 살아왔는지, 전체 중에서도 주변을 먼저 생각했는지 어떤지를 잘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런 정치적 행위도 자기 정체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런 정체성이 확보되지 않고서는 민주적 정치 자체도 불가능하다. 정체성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며, 도리어 지속적으로 세워가야 한다. 자기 주체성을 확보하며 저마다의 정체성을 유지해가야 한다. 다만 그 정체성에 타자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야 한다. 자기만의 배타적 정체성에서 상생적 정체성으로 전환하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더 그렇게 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정체성의 어느 한 면에 경도되지 말아야 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5월 1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60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