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헌법 제32조 제5항은 “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청소년의 노동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는 미비하거나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으며 교육당국이나 노동당국도 10대 알바의 문제점을 살피는 전담 관리 부서를 갖춘 곳이 없다.(한겨레 신문 중)  중인이가 다니는 학교는 일반고 3학년 가운데 뒤늦게 직업교육을 받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탁받아 가르치는 산업정보학교다. 학급의 학생들 대부분은 가정경제, 수습생 등의 이유로 오후에 알바를 하고 있다.  일반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업에 필요한 자격증(조리사, 제빵사, 미용사 등)을 취득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는 산업정보학교는 사설학원서 방과 후 많은 돈을 지불하고 받던 교육을 1년 동안 무료로 실시하는 공교육 기관이다. 증설의 요구가 높아, 2011년 서울에 3곳(서울, 종로, 아현)이던 것이 현재는 6개로 늘어났다.  얼마 전 중인이는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으려고 늦게 줄을 섰다가 학생들이 즐겨먹는 돈가스가 모자라 다른 음식으로 주겠다며 양해를 구하는 영양사에게 급식판을 바닥에 던지며 욕설과 폭언을 하며 당장 돈으로 보상하라며 난동을 부렸다 이런 상황에 너무 놀란 영양사가 울면서 급식실로 가는데도 화를 참지 못한 중인이는 교사들의 제어가 힘들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시간이 지난 후 중인이는 “식당에서 알바를 하다보면 손님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항의와 욕설을 받고, 식당주인에게서 또다시 접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야단”을 맞는 이런 억울하고 불쾌한 기억들로 인한 감정들이 오랫동안 누적되었다가 폭발해 영양사에게 화를 내게 되었다고 했다.  경계선 지능(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아닌 지능지수(IQ) 70에서 85 사이, 정상지능과 지적장애 사이)인 택이는 알바 하는 주점에서 늘 혼자 식당 뒷정리 후 문을 잠그고 퇴근하면 새벽 1~2시에 집에 간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수업시간에는 늘 졸고 있고 식사가 불규칙한 관계로 위장병에 걸려 병원을 들락거린다.  연소자의 근로로 규정된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면 손님들의 부당한 폭언에 노출되지도 않고, 뒷정리를 시키는 부당한 처우에 위장병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최근까지 청소년의 아르바이트로 위험천만한 문제가 발생하지만 청소년 노동에 대한 인식은 바닥이다. 학교에서도 최소 18시간 이상의 노동인권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반항으로 생각하는 업주가 많고 이를 빌미로 해고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당한 사례로부터 노동부나 정부기관으로 도움을 받기도 힘들고 부당함을 알지만 어쩌지 못하고 그냥 참고 견디는 가운데 청소년 노동인권은 무너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법제적 장치가 필요하다. 청소년 노동인권에 대한 전인적인 교육을 실시해야하고, 청소년 노동자 스스로도 목소리를 내어 자신들의 노동권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청소년 노동문제와 그 해결을 전담하는 감독관을 만들고 업주에 대한 사전 감독을 실시해야한다. 또한 미래의 어른인 청소년 노동자의 마음이 치유되기 위한 시설도 만들어 진다면 좋겠다.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청소년 아르바이트 10계명  1. 만 15살 이상만 근로 가능 2. 청소년의 부모님 동의 필수 3. 근로계약서 작성 및 교부 4. 성인과 같은 최저시급 보장 5. 하루 7시간, 주 40시간 이하 근무 6. 야간·휴일근무 땐 50%↑ 가산임금 7. 주 15시간 이상 일하면 주1회 유급휴일 8. 위험한 업무, 유해업종 불가 9. 산재보험법·근로기준법 적용10. 체불임금 등 국번 없이 1350 상담 자료:부산시교육청 김영미 위원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12-27 | hrights | 조회: 1960 | 추천: 3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책 읽고 말하기를 업으로 삼기 시작할 무렵,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책의 세계가 현실 세계에 지지 않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었다. 신의 섭리나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힘으로 거짓과 기만을 타파하고 정의롭고 계몽된 사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힘이 아니라 말로, 물리적 탄압이 아니라 합리적 대화로, 이성적 논증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었다. 감춰진 진리가 드러나면,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그동안 무지와 편견을 조장했던 어둠의 세력에 대해 단죄(斷罪)를 외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라고 말한 독일의 어느 철학자의 말을,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어야 하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새겼다.  역사에 관해 당구풍월(堂狗風月)한지 서른 성상(星霜)도 더 지난 지금은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꿈꾸지 않는다기보다는 꿈이 실현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만큼 더 현실적으로(/더 이성적으로?) 되었다. 2018년을 한 달 앞둔 지금도 현실 세계는 여전히 책의 세계보다 힘이 세다. 책의 세계를 지배하는 명징하고 싱싱한 이성적 주장이 널리 알려지면, 필연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되리라는 생각은 틀렸다. 이성적 논증으로 거짓 주장을 반박하면 사람들이 기꺼이 그릇된 주장을 버리리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거짓과 기만에 사로잡힌 편견인데, 누구는 그것을 확고한 신념으로 받아들인다. 확신에 찬 사람이 바뀌기란 어렵다.  왜 그럴까? 특히 정치적으로 보수를 자처하거나 보수주의적 정견을 지닌 사람들의 속내가 나는 궁금했다.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와 행동은 대체로 이해관계의 속셈에 따라 갈라진다는 학설도 들어 보았다. 가진 게 많고, 지킬 게 많은 사람일수록 정치적 보수주의에 경도된다는 언설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지킬 권력은 더욱 없는 사람들은 왜 ‘보수’(편의상 ‘보수’라고 쓰지만 ‘수구’라고 새기는) 정당을 지지하는 걸까? 명명백백한 사실을 보고도 저 지역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럴까? 오랜 세월 알게 모르게 이루어진 ‘이데올로기 공세’나 허위의식 조장 탓이라는 해석에 일견 수긍하면서도 앓던 이가 빠지는 개운함은 얻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에 그들의 머릿속을 환히 들여다보았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책 한권을 발견했다. 사진 출처 - yes24  ⌈똑똑한 바보들-틀린데 옳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의 심리학 The Republican Brain: The Science of Why They Deny science and Reality⌋. 원제와는 다소 다르지만 책 제목부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지정보를 확인해 보고서야 2012년에 번역 출간된 책이며, 저자인 크리스 무니(Chris Mooney)은 과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았다.(부끄럽다!)  저자는 보수주의자를 무작정 공격하거나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보수와 진보는 뇌부터 다르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다양한 과학적 실험 자료를 활용하여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뇌(심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굉장히 흥미롭게 분석한다. 이 책의 큰 전제는 모든 사람은 동기에 영향을 받으며 편향되게 사고한다는 ‘동기화된 추론’이다. 즉 자신의 신념을 지지하는 증거만을 선택하고,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는 증거들을 무작정 거부하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동기화된 추론’은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이 불편한 사실을 부정하고 반증이 나와도 버티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특히 내게 흥미진진한 대목은 명백하고 과학적인 사실을 갖고 반론을 펼칠 경우에 “백파이어 효과(backfire effect)”라고 불리는 현상을 촉발하기도 한다는 분석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신념을 굳건히 견지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으며, 모순되는 증거나 논박을 보고 나면 더 집요하게 자신의 틀린 관점을 고집하는 현상”을 말한다(71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장문의 출생증명서를 공개했을 때 그의 미국 출생을 믿지 않는 자들의 행동이나 사담 후세인과 911테러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게 밝혀졌음에도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태도 등이 그렇다. 저자는 이처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하는 보수주의를 “똑똑한 바보 효과”라고 부른다.(74쪽)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들의 핵심적 ‘신념체계’는 뭘까? 저자는 “보수주의의 가장 깊숙한 요소”는 변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규정한다. 아니, 그들도 변화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이 이전에 좋았다고 느끼는 것을 회복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다(133쪽). 역사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반동(reaction) 혹은 퇴행이다. 그 방향을 낭만적으로 포장한 자신의 상상 속의 과거이다. 그들은 이전의 상황을 선호하며, 그 이전의 상황이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 필요도 없다. 존재했다고 그들이 생각하고 열망하는 것이기만 하면 된다.  요컨대, 보수주의자는 자신의 잘못된 신념에 부합되지 않은 과학적 증거라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 진보주의자보다 더 강하게 자신의 신념을 방어하며, 최소한 정치 분야에서는 합리적 논증으로 인해 마음을 바꾸는 경우가 더 적다! 역사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언제나 평등을 증가시키는 진보적 변화와 정책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보통선거권의 확립 운동 때도 그랬고, 여성참정권의 확보, 인종차별의 철폐, 인종의 혼인,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폐지 때도 그랬다. 그들의 욕망은 존재한 적도 없는 것을 회복하려는 희망이다. 그래서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인지부조화 타령을 읊어댄다.    책 한권 읽고 보수주의(자)를 심리적 차원에서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오해를 두려워 않고 말하자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똑똑한 바보가 된다. 똑똑한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고정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개방적 태도가 필요하다. “진보주의자들을 과학과 팩트에 더 가깝게 데려다 주는 것은, 그들이 동기화된 추론을 일반적으로 덜 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개방성을 갖고 복잡한 세상을 알아 가는데 흥미를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341쪽)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7-12-13 | hrights | 조회: 2489 | 추천: 7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틈만 나면 반만년 이어온 역사를 강조하는 것과 달리 한국 사회는 역사적 맥락에 참 둔감하다. 사회현안을 둘러싼 토론에서 역사적 맥락을 따지는 건 꽤나 낯선 모습이다. 몇 년 전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초(史草) 폐기 소동’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조선 시대 사관이 현장을 기록하는 게 사초다. 그걸 다 모은 뒤 정리해서 실록을 만든다. 실제 조선시대에 사초를 폐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건 심각한 중대범죄다. 그게 조선시대 법이었다.   당시 실록을 편찬하고 나면 자하문 밖 세검정 차일암에서 사초를 모두 물에 빨아 내용은 없애고 종이는 재활용했다. 그걸 세초(洗草)라고 한다. 혹시라도 사초 내용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조선시대 법이었다. 그런데도 21세기 한국에선 느닷없이 ‘연산군도 하지 않은 사초 폐기’라는 황당한 주장을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내놓았고, 그게 또 어느 정도 먹혔다. 한마디로 뿌리 얕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쪽팔린 자화상이다.   세금인상 문제는 갈수록 중요한 정치쟁점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안은 거센 논쟁 끝에 국회 문턱을 넘었다. 그나마 정권 초기이고 ‘선별증세’에 대한 지지여론이 높은데도 이 정도였다. 이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선은 남북관계보다는 오히려 세금문제다. 세금을 기준으로 해서 노무현 정부는 세금폭탄,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 박근혜 정부는 서민증세로 시대구분이 가능할 정도다.  지난 6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2018년도 예산안 및 부수법안 처리를 위해 열린 본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야당에선 증세를 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럼 다음 인용문은 어떤가. “세금 안 내고 국가가 발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금 없이 국가를 튼튼하게 할 수 없는 것이고, 세금 안 내고 우리가 경제 건설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도 없는 것이며, 여러분들 자녀들에 대한 의무 교육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71년 대선에서 야당후보였던 김대중이 내놓은 감세 공약을 비판하면서 박정희가 수원유세에서 직접 했던 발언이다.  사실 박정희야말로 한국현대사에서 첫 번째 증세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장본인이다. 국세청을 처음 설립한 것도 박정희였다. 종합소득세와 부가가치세도 모두 박정희 정부 작품이다. 당시는 산업화를 위한 자원동원을 위해 세수증대에 몰두했던 시기였다. 첫 국세청장 이낙선은 세입 700억 원 달성을 독려한다며 자동차 번호판에 ‘700’이라고 써놓고 다녔다. 하지만 당시 증세정책은 ‘복지없는 증세’였다. 국민들은 동원대상일 뿐이었고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권위주의는 국가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갉아먹었다.  유신체제는 폭압적이지만 또한 취약했다. 세입확대를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부문의 자본축적 지원을 위한 감세정책으로 조세정책의 초점을 바꿨다. 1974년 1월 14일 ‘긴급조치 3호’는 상징적이었다. 대통령 뒷담화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른 긴급조치와 달리 긴급조치 3호는 소득세 면세기준을 월 1만 8000원에서 5만 원 이하로 대폭 올렸다. 소득세 납세자의 85%가 소득세를 내지 않게 됐다. 그렇게 박정희 정부는 ‘복지없는 감세’로 돌아섰다.  아시아 최초로 1977년 시행한 부가가치세는 박정희 정부 조세정책이 갖는 모순을 보여준다. 사실 엄청난 증세정책이고 조세저항과 여론악화도 상당했지만 막상 조세부담률은 1976년 16.1%에서 1979년에는 16.7%로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각종 공제 인상과 비과세소득 범위 확대와 함께 부가가치세를 시행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부가가치세는 ‘감세를 위한 증세’였던 셈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열어제낀 ‘감세 국가’는 오랫동안 한국의 국가정책의 근간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열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집권한 노태우 정부 전반기와 대통령이 나서서 증세문제를 공론화하려 시도한 노무현 정부 후반기가 예외였을 뿐이다. 아직까지는 문재인 정부가 오랜 관성을 깨려는 명확한 시도를 갖고 있는지 확신이 서진 않는다. ‘핀셋 증세’라고 이름붙인 ‘선별증세’는 부자들한테만 세금을 더 걷으니 좋은 정책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정치적 갈등에 비해 실제 세입은 기대에 못미친다는게 치명적이다.  어쨌든 박근혜조차 ‘증세 없는 복지’를 천명했을 만큼 이제 복지강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리고 박근혜조차 실제로는 각종 증세정책(금융소득종합과세 인상,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 연말정산 개혁 등)을 했을 만큼 이제 증세는 불가피하다. 대선을 통해 확인된 정의로운 국가, 나라다운 나라, 더불어 잘사는 나라는 모두 더 많은 ‘국가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그러려면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우리가 더 많은 세금을 내지 않으면 나라다운 나라는 불가능하다. 모두가 세금을 더 내고, 이건희 손자에게도 억지로라도 무상급식을 먹게 해야 한다.  두 가지 비교를 해보고 싶다. 한국은 부가가치세율이 10%인 반면 복지국가라는 북유럽 국가들은 25%(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와 24%(핀란드)나 된다. (모든 국민한테서) 부가가치세를 더 걷어서라도 더 많은 재원을 마련해 그 돈으로 (모든 국민을 위한) 복지에 쓴다. 인권선진국일수록 세금을 더 많이 내고 인권후진국일수록 세금을 더 적게 내는 이유를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싶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12-12 | hrights | 조회: 1709 | 추천: 3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11월 24일, 중학교 동창을 만난 이야기 한 열흘 전, 동창 A를 만났습니다. 거의 30여 년 만에 만난 셈입니다. 중학교 때만 해도 꽤 활발하고 명랑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그는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도 오랜만에 만나게 되니 중학시절 때 서로가 공유했던 추억 거리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로 이민 갔던 동창 B가 십여 년 만에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잘됐다 싶었습니다. 저: 오늘 너 만나기를 잘했다. B가 12월에 온다는 소식 들었지? A: 음… 나는 못 가…. 제 기억 속의 A와 B는 단짝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B의 이야기를 꺼내면 A가 중학교 시절의 명랑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A는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자꾸 캐묻는 저에게 A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A와 B는 사소한 의견 차이로 말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비난하며,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합니다. B: 너는 돌대가리야. A: 너는 새대가리야. B: 육갑하네! A: 지랄하네! B: 미친 새끼! A: 병신! B: ……. A는 이제야 알겠냐는 듯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그게 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유치한 말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저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B는 소아마비였습니다. A는 물론 소아마비인 B를 겨냥해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B에게 내뱉은 한마디에 화들짝 놀란 것은 A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A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B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30여 년이 지나도 그 미안함은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A의 말을 듣고 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 B가 그걸 기억이나 하겠어? 그리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A는 이렇게 말하고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11월 27일,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습니다. 며칠 전,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세월호 유골 은폐 사건은 국정조사해야 한다는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출연했습니다. 그때 그가 김현정 앵커와 나눈 이야기 중 일부를 옮겨 봅니다. 정: (…) 유골 은폐 문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다 (…) 정말 국정조사감이다 (…) 이것은 아마 국민과 유족 가슴을 몇 번 더 아프게 한 사건이 아닌가 (…) 김: (…) 그런데 세월호 유족들은 (…) 그동안 세월호 진상규명에 그렇게 소극적이었던, 심지어는 방해가 되는 말까지 해왔던 자유한국당이 지금 그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느냐. 가족협의회 입장 어떻게 보세요? 정: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진상규명에 그렇게 반대를 했습니까? 진상규명은 밝혀져야죠. 그리고 같이 세월호 특조위도 했기 때문에…. 김: 세월호의 ‘세’ 자도 입에 담지 말라는 게 가족협의회 위원장 이야기더라고요. 정: 그건 그분들의 생각이고요 (…) 그것 참….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저는 한참 동안 생각이 툭 끊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니 2,000년 전의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지요? “네가 유대의 왕이냐?”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대의 말일 뿐!”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11-29 | hrights | 조회: 1678 | 추천: 1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재난(disaster, 災難)의 한자상 의미는 자연(물巛과 불火)의 힘이 커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게 된 곤란한 상황이다. disaster의 어원적 의미도 ‘별(aster) 또는 천체(astrum)의 어긋남(dis)’이다. 자연의 질서가 기존과 어긋난다고 느껴지는 현상을 재난이라고 한다. 이 때 자연 현상 또는 질서를 곤란한 상황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이다. 자연의 힘에서 인간이 곤란을 겪지 않고 피해로 느끼지 않으면 그것은 재난이 되지 않는다.  가령 지진(地震)은 맨틀 위에 떠 있는 지각 판들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움직임 자체는 자연의 질서이고 조화이고 끝없는 균형 과정이며, 지각들이 ‘빈틈’을 향해 움직이는 현상이다. 폭풍도 태양열로 데워진 대기의 순환 현상과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기압의 변화 과정이다. 그것은 ‘약한 곳’과 ‘낮은 곳’을 향해 움직이는 공기의 이동 과정이다. 대기가 급격하게 움직여 인간에게 피해가 닥치면, 우리는 그것을 천재(天災)라 하는데, 천재도 원칙적으로는 자연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문명이 시작되면서 자연의 힘이 재난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연이 인간적 성취의 과정이자 산물인 문명을 파괴하자, 인간은 그것을 재난으로 명명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문명이 자연의 흐름에 비해 대단히 나약하다는 뜻이다. 애당초 자연의 힘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문명을 인간의 대단한 성취인 양 여기는 태도에 이미 인간의 오만함이 들어있다. 자연에 의한 문명의 파괴는 천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재(人災)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 인명이 살상되고 온갖 성취가 인간을 덮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2017년 11월 15일 포항에서 진도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건물이 부서지고, 기울고 사람이 다쳤다. 땅이 흔들려 사람이 다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문명에 사람이 다쳤으니 천재이자 인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지진의 경우는 이전과는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든다. 진앙에서 2km 떨어진 곳에 건설 중인 포항지열발전소가 지진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다. 지열발전소의 원리는 대강 이렇다. 지하 암반과 암반 사이의 틈을 벌려 그곳까지(포항의 경우는 땅속 4.3km 지점까지) 관을 심고 강한 압력으로 물을 주입하면 뜨거운 암반 사이에서 물이 데워지고 그 물과 수증기를 다른 관으로 끌어올려 터빈을 돌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전기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상에서 고압으로 물을 주입할 때마다 다음날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일이 수십 차례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지진도 그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스위스 바젤 등 해외에서도 지열발전소로 인해 소규모 지진이 계속 발생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물론 발전소 건설사측에서는 지열발전과정과 이번 지진은 무관하다면서 나름 해명 중이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 5천8백t 정도의 소량만(?) 주입했기에 지진이 발생할 정도의 양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열발전 전문가가 아닌 마당에 나로서도 무엇이 옳다 그르다 단언할 능력은 없다. 다만 기존 암반 사이를 인공적으로 벌려서 외부에서 엄청난 양의 물을 주입하는 이런 방식과 발상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땅속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하 10m에서 섭씨 15도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땅속 열에너지를 가정용 냉ㆍ난방 에너지로 활용한다는 소규모 지열 시스템만 상상해보던 나로서는 땅속 수천m 아래에 있는 암반의 간격을 강제로 벌린다거나, 암반 사이에 적게는 수천t, 많게는 수백만t의 차가운 물을 강제로 넣는다거나 하는 발상과 방식이 자못 두렵기까지 하다. 지진 그 이상의 천재, 아니 인재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평창올림픽을 대비해 인공강설 실험을 한다거나, 서해에 인공강우 커튼으로 중국발 미세먼지의 유입을 막겠다거나 하는 소식을 기술과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는 뉴스를 보면 인간의 무모함에 겁이 나기도 한다. 어딘가에 홍수가 내리면 어딘가는 가물기 마련이다. 북경에 나비가 날자 뉴욕에 폭풍이 인다 하지 않던가. 인위적인 변화는 늘 위험을 초래한다. 자연을 독점할 권리가 특정 국가나 특정인에게 있다는 말인가. 자연은 반드시 빈틈을 따라 흐르면서 인간의 성취에 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자연의 힘을 무모하게 강탈하는 행위를 대체에너지라는 이름으로 눈감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개인, 사회, 국가 간 합의를 통해 피차 자연에 대한 좀 더 겸손한 자세를 갖자는 합의를 어렵더라도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북한의 핵실험으로 지진이 발생하고 백두산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던 그 비판의 눈길을 이번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도 거두면 안 될 것 같다. 인간이 지진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다 보니 인류의 미래가 더 불길하게 다가온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11-28 | hrights | 조회: 1777 | 추천: 12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쉰이 다 돼서 생전 안 하던 아이돌 덕질에 빠졌다. 앨범도 안 사고 댓글 한번 달아본 적 없으니 ‘프로 덕질러’들이 보기엔 우스운 수준이겠다만. 연예인을 좋아하기는커녕 TV도 변변히 보지 않고 살아온 인생으로선 신기한 경험이었다. 대체 중독 소양이 있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뭐든 데면데면으로 일관해 온 성격으로서도 그렇고.   덕택에 당최 알 수 없었던 ‘빠순이’들의 속내를 조금은 짐작하게 됐다. 이번 학기는 유난히 현생(현실 인생)이 바빠 쉴 짬이 드물었지만, 밤이면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인터넷을 뒤지곤 했다. 맘에 박힌 아이돌의 사진과 동영상을 찾는 것도 즐거웠지만, 비슷하게 열광하는 사람들의 글을 살피는 게 더 재밌었다. 얼라, 빠순학 개론? 그러고 보니 그 세계도 넓디넓다. 지금 같은 아이돌 팬덤이 시작된 게 H.O.T.와 젝스키스가 등장한 무렵이라고 생각하면 벌써 20년. 그 때부터 줄기차게 덕질을 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은가 보다.   한 서너 달, 그 사이 세상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렇잖아도 귀 닫고 살던 걸 더더구나 닫았다. 전쟁 상황에서도 아이돌 팬들은 각자 좋아하는 스타를 더 걱정하려나, 그 사람을 떠올리며 겨우 잠을 청하려나 생각해 보긴 했다. 대부분 여성인 아이돌 팬 중에는 그야말로 ‘덕질을 위해 현생을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이돌 얼굴을 보기 위해 공항으로 달려가고, 콘서트마다 예매 전쟁을 벌이고, 밤새 줄 서 무료 공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체 웬 한가한 사람들인가 했더니, 멀쩡하게 정치를 토론하고 문화를 사랑하고 직업에 열심인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사진 출처 - 시사인     사랑의, 친밀성의 이 새로운 형태는 뭐지? 내가 경험하면서도 그 갈피를 다 잡진 못하겠다. 지금의 팬덤은 근대 대중문화와 더불어 출현했던 스타덤과는 크게 다르다. 스타덤이 환상을 소비한다면 팬덤은 환상과 현실 사이 줄타기를 욕망하고, 스타덤이 스타와의 수직적 관계를 중시한다면 팬덤은 팬들 사이 수평적 관계를 통해 스타를 경험한다. 20년 사이 한국에서 팬덤은 무럭무럭 자라나 감정을 훈련하고 관계를 학습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돼 버리지 않았나 싶다. 작년의 촛불집회 때도 그렇고, 굵직한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응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팬덤의 행동양식이 눈에 띌 때가 있다.   아들 같아서 좋은 것 아녜요? 절대 아니라고 손을 흔든다. 바람피우고 싶은 마음 아뇨? 그건 더더구나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스타가 광고하는 상품을 사고 스타가 나온 잡지를 구매하지만 직접 만나고프진 않고, 스타가 즐거워하는 걸 보는 게 너무나 좋지만 그와 생활을 접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게 좋다. 이해관계 없이 좋아할 수 있어서 더 좋다. 그러고 보면 뭔가를, 누군가를 이렇듯 좋아해 본 게 얼마만인가.   이 마음이 지속되고 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유지된다면 가족을 만들지 않고도 살 수 있으려나. 1987년 이후 지켜봐 온 한국 사회의 변화 중 ‘혁명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은, 그야말로 세계의 근간이 바뀔 수 있겠구나 싶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근 젊은 여성들의 가족 거부다. 명절증후군과 출산율 저하에서부터 페미니즘 논쟁 재점화까지 다양한 상황을 거쳐 온 결혼의 거부, 가족의 거부야말로 장기적 삶의 형태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10년, 20년으로 그칠지, 그 이상 지속돼 그야말로 개인-가족-사회-국가라는 근대적 시스템을 흔들게 될지, 점치기는 아직 이르지만, 어느 쪽이든 젊은 여성들의 가족 거부가 오래 갈 영향력을 미치리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팬덤이 이런 상황의 예고이자 징후이기도 하려나. 덕질이 곧 현실도피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 나는 지금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오래된 관성대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저항할 의욕은 없이 새로운 감정과 관계를 더듬어 보고 싶은 건가. 괜시리 잡생각이 많아지지만, 분명한 건 지금도 그 아이돌의 얼굴을 생각하면 흐뭇해진다는 것. 이것 참, 이제 게임에 빠져보기만 하면 젊은 세대를 좀 더 알 것도 같은데.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11-15 | hrights | 조회: 2314 | 추천: 11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문구는 이 시대 공직사회를 상징하는 명징한 단어일 것이다. 공무원 중에는 영혼을 버리고 사는 것을 훌륭한 처세술로 여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영혼 없이 살면 고민할 필요도 없고, 불만도 있을 수 없고,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권력자는 영혼 없는 공무원을 총애하고 간택함으로써 이들은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렸고, 이로 인해 악순환의 고리가 쌓였다.   유사 이래 국가의 녹을 먹는 수많은 공직자가 영혼을 버린 사례는 역사가 켜켜이 보여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 이지용 같은 을사오적도 그 정점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타락하고 부패한 공무원 영혼은 세상을 곪을 대로 곪고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어 결국, 국가가 멸망하기도 하였다.   독재 권력이 시민을 핍박하고 헌법 가치를 짓밟는데 앞장선 중심축 중 하나도 완장 찬 영혼 없는 군인·정보기관·경찰·검찰 등의 공무원이었다. 3·15 부정선거, 5·16 군사쿠데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항쟁, 민간인 학살, 각종 간첩 조작사건 등 이루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폐가 쌓여있다.   박근혜 정권의 헌정 농단 사태에서도 어김없이 확인되는 사실은 영혼 없는 공무원이 중심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완성하고 고도화하고 있을 때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는 근거 없는 북한붕괴론이나 퍼뜨리면서, 기껏 한다는 짓이 댓글이나 쓰면서 최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것이었다. 너무 한심해서 한숨도 안 나온다.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국정원 댓글과 특수활동비 상납, 국정 역사교과서 이런 것도 전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가 아닌 최고 권력자에 대한 헌사였다. 청와대와 행정부의 각 요직에 있는 공무원들은 마치 범죄 집단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국정 농단과 헌법 가치 파괴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합동하여 시민을 개, 돼지 취급하면서 쥐어짜고 괴롭혔다. 사악하고 부패한 공무원 영혼의 감염 속도는 빛의 속도로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다.   법치주의를 빙자하여 법치주의를 짓밟은 대표적인 관료 집단이 검찰이었다. 검찰 적폐 사례는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검찰이 요즘 매우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적폐청산의 대상인 검찰이 적폐를 청산한다고 부지런을 떨고,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법무·검찰개혁위원회를 가동하고 있다. 다른 기관도 비슷하다. 이런 조치를 공무원 영혼이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귀환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는가.   헌정 농단 사태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은 검찰과 법원에서 고해성사를 이어가고 있다. 공무원의 고해성사는 공무원 영혼 부활의 출발점이다. 이들을 용서하기 힘든 심정도 있으나, 고해성사를 통해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워나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부 공무원들의 고해성사를 통해 최소한 이들의 진정성을 긍정할 수 있지만, 검찰은 그 누구도 자신의 죄상을 고해성사하는 일도 없었다. 검찰의 진정성을 추측하는 것조차 지금으로서는 어리석은 짓이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과연 검찰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한 부정의 한 작태를 반성하고 있어서 이런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국민을 속이는 거대한 사기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일까. 반성하지도 않는데 마치 참회하는 것처럼 위장 전술을 펼치는 자기기만일까.   수십 년 동안 검찰과 공직사회 개혁을 수없이 부르짖어 왔지만 끝내는 실패했다. 오히려 검찰과 행정관료 권력은 확고부동하게 유지·확대되었다. 검찰과 관료는 국민과의 싸움에서 항상 백전백승하였고, 백전백패는 항상 시민의 몫이었다. 이번에도 개혁에 실패한다면, 제도를 바꾸지 못한다면 적폐 양산은 계속 될 것이다.   사기가 성공하려면 속는 자가 속이려하는 자의 의도를 몰라야 가능하다. 그래서 속이는 자는 속이려는 맘을 들키지 않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획책한다. 그러나 시민은 영혼 없는 검찰과 공무원 관료의 DNA를 명확히 보았고, “이게 나라냐”고 부르짖으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분명히 목도하였기 때문에 쉽사리 속지 않을 것이다.   공무원의 ‘영혼’을 판별하는 핵심 기준은 헌법이 제시하는 것처럼 정치적 중립성과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다. 여기서 정치적 중립성은 헌법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말이지, 헌법가치가 짓밟히고 조롱·왜곡당하는 상황에서 팔짱끼고 있으라는 중립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헌법을 수호하며 권력자와 정권 아닌 국민전체에 봉사하라는 정의 명제가 공무원 영혼의 핵심 가치다.   공무원이 단순히 철밥통으로 사는 것은 시민과 헌법 질서를 모독하는 것과 같다. 시민 대다수는 영혼 있는 공무원을 간절히 원하고, 기다리고 있다. 민주공화국을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1332 | 추천: 3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촛불혁명을 통해 등장한 정부는 적폐청산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연일 실시간으로 지난 정권의 추악한 뿌리를 보고 있다. 이제 처벌과 응징이 기본이다. 악인에게 처벌가능성을 배제하고 설거지만 해준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잔뜩 움츠리고 있다가 원점에서 불법과 범죄를 자행하는 것이 그간 국정원의 행태였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의 이 건전한 판단과 그들의 저 건전한 희망을 이번에는 여지없이 깨뜨려주기를 기대한다. 적폐청산은 현 정부의 슬로건이 아니라 촛불시민의 구호였다.   적폐의 밑바닥에 또 적폐가 있다. 적폐중의 적폐는 공권력이 자행한 학살(제주4.3학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이고, 그 학살을 유야무야, 값싸게 뭉개버리는 역대정부와 관료들의 방침이다. 현 정부가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더라도 국가가 피해자를 구제하지 않는 한 그것은 현 정부의 적폐이다. 국제인권법은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실효적인 구제가 없는 상황 자체를 계속적 침해나 계속범(CONTINUOUS CRIME)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피해구제가 없는 한 시효(소멸시효, 공소시효)가 없다는 논리가 국제법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필자는 최근에 제주4.3사건법의 개정시안 준비작업에 관여하고 있다. 제주4.3사건법은 2000년 김대중 정부 아래서 제정되었고, 2007년 노무현 정부에 의해 약간 개정되었다. 원래 법안은 진상조사와 보고서작성을 목표로 한 낮은 수준의 과거청산법이었다. 제주4.3사건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도 진상조사보고서 발간, 대통령의 공식사과, 제주4.3평화공원 및 재단의 설치, 기념일 지정, 약간의 생활지원비 지원 등이 전부였다. 가장 중요한 명예회복과 피해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준비작업단은 바로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다행히 지난 대선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를 포함해서 주요정당의 후보들이 한결같이 제주4.3사건의 해결을 약속하였고 문재인 정부는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정리’를 100대 국정과제로 확정하였다.   그런데 <국정과제>를 들여다보면 지시 관계의 교묘함으로 인해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완전한 해결을 목표한다고 써놓고 피해회복, 보상에 대해서는 서술을 일부러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국정과제를 확립한 그룹이 2005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이른바 ‘피해자 권리장전’을 읽어보았는지 궁금하다. 국정과제의 제1고지가 집권하자마자 물러서기 전술인 모양이다. 현 정부는 금세 관료들의 품안에서 퇴행을 보이고 있다. 지난 9월 행자부 장관은 제주4.3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을 면담한 자리에서 과거사정리를 약속하면서도 공무원들의 발언이라며 “돈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표현을 에둘러 인용하였다. 올바른 일을 하는데 돈쓰는 것이 아까우면 권력은 왜 잡고 정의는 왜 외치는 것인가? 정의를 정권장악에는 동원하고 정책에는 반영하지 않으려는가! 유엔 피해자 권리장전 사진 출처 - 구글     피해보상은 돈 드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가 하는 일중에 돈이 들어가지 않는 일은 없다. 학살이라는 불량한 정치를 자행했던 국가에서 공직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학살에 어울리는 경제학을 가져야 한다. 곳간 열쇠를 쥐고 있다고 그 자신이 국가인 것은 아니다. 공직자는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 법”을 배우기 전에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법”을 터득했어야 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다가 숨 돌릴만하면 국가가 자기 것인 양 하는 공직사회를 보기에 민망하다. 4대강이라는 어리석은 일을 반대하다가 잘려 나간 공직자가 몇이나 되는가? 4대강 사업에 반대한 사람들 명단이나 작성했던 그들이 아닌가! 학살에 반대한 군인이나 경찰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그저 시키는 일이라며 총질을 해대는 것이 이 땅의 공직자들이었다.   1년 전에 촛불을 든 시민들이 현 정부가 제시한 국정과제에 모두 합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공통될 것이다. 국민은 정권교체만 바란 것이 아니라 권력의 성질을 바꾸고자 한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백남기 사건에서, 국민은 인간을 멸시하는, 그 징그럽게 차가운 권력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촛불을 든 것이다. 다시 한 번 공직자들에게 ‘피해자 권리장전’을 읽기를 권유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관계에 혁명을 생각하게 한다. ‘피해자 권리장전’은 <만족>, <재발방지의 보증>이라는 항목에서 군인 경찰, 공직자에 대하여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점을 깨알같이 명시하고 있다.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던 공직자들도 정의의 적이 되기는 매우 쉽다. 천부적 공직자는 없어도 천부인권은 존재한다. 학살의 피해자들은 정부에게 시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로서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국가는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11-07 | hrights | 조회: 1334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2012년 2월 17일 장충체육관에서 당시 파업 중이던 MBC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콘서트가 열렸다. 방송인 김제동, 김미화, 가수 이은미와 강풀, 김어준, 주진우 등 유명인들이 함께 한 이 자리에 나도 한 자리 끼어 무대에 올랐다. 그런 자리에 낄 만큼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영향력도 없지만 제대로 된 공영방송을 위해 파업에 나선 방송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MBC노조는 그해 무려 170일간에 걸친 파업을 했다. 파업을 마무리할 때 노조원들은 그 정도로 뜻을 보여주었으니 이제 김재철 사장이 해임되고 MBC가 공영방송으로서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후 사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김재철은 건재했고 그를 비롯한 경영진은 파업이 끝나자마자 노조원들에 대한 철저한 복수와 응징에 돌입했다. 파업 종료를 선언한 그날 밤 대규모 인사 발령을 통해 50명 이상의 노조원들이 취재와 제작 일선에서 벗어난 엉뚱한 외부 부서로 전출되었다.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스케이트장 관리를 해야 했고 이른바 ‘신천교육대’라 불리던 신천역 근처 MBC아카데미에 강제로 소집되어 브런치 만들기, 요가 연습 같은 교육을 받아야했다. 심지어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강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추방’과 ‘격리’ ‘왕따’는 끝없이 계속되었다. SNS에 경영진을 비판하는 만화를 그려 올린 PD가 해고되었고, 국정원 댓글 공작을 취재하려 한 기자, 세월호 보도에 항의하던 기자들은 징계받거나 방출되었다. 파업 가담자들이 빠진 자리는 졸속으로 채용된 시용기자, 경력기자들이 채웠다.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우리는 모두 잘 기억하고 있다. 심층 취재보도나 드라마, 예능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고 가장 높은 신뢰를 얻었던 MBC의 위상은 속절없이 추락을 거듭했다. 오죽했으면 지난 해 촛불 광장을 취재하던 기자들이 MBC로고를 가려야 했을까. KBS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며 벌인 온갖 공작과 추태에 대해, 해직되고 방출되며 거리로 쫓겨난 언론인들에 대해 굳이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2012년 7월 17일 170일간의 파업을 종료했던 MBC노조는 지난 2017년 9월 4일 다시 파업에 돌입했다. KBS노조도 함께 파업에 들어가면서 양대 공영방송 노조가 함께 파업 상태에 있다. 정권이 바뀐 터라 2012년의 파업과 달리 이번에는 분명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크지만 파업이 장기화될수록 두 방송사 노조원들의 고충은 커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두 거대 방송사가 파업 중임에도 시청자들의 관심이 그리 높지 않다는 데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JTBC나 tvN 같은 채널에 시선을 빼앗긴지 오래다. 게다가 수많은 팟캐스트와 뉴스타파 같은 대안매체, 인터넷 방송들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더 이상 공중파 방송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KBS와 MBC를 보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파업에 큰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뉴스타파가 다큐멘터리 <공범자들>을 10월 20일부터 11월 3일까지 2주간 유튜브에 무료 공개하기로 했다. MBC에서 해고된 최승호 피디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공범자들>은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방송장악의 실태와 그 과정에 부역했던 언론인(그리고 언론학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극장에서 절찬리에 상영 중인 영화를 한시적이나마 무료공개하기로 한 것은 공영방송의 파업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공영방송 파업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이렇게 말한다. “그 까짓 거 KBS, MBC 없으면 어때. 안 그래도 볼 거 많은데. JTBC가 잘하고 있잖아” 일리 있는 말이긴 하지만 그건 지극히 짧은 생각이다. JTBC를 비롯한 많은 채널들은 모두 사적인 자본에 의해 지배받는 상업방송이다. 만일 손석희 사장이 어떤 이유로든 자리를 떠난다면 JTBC가 과연 현재의 기조와 색깔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공영방송다운 공영방송이 꼭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자본의 입김에서 벗어나 공익성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장치인 까닭이다. 공영방송이 정권의 추이에 따라 권력에 휘둘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뉴스타파가 공개한 <공범자들>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면 좋겠다. 좀 더 많은 시민들이 양대 공영방송 노조의 파업에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하루 빨리 KBS와 MBC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고 신뢰받는 공영방송의 제자리를 찾으면 좋겠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10-25 | hrights | 조회: 1093 | 추천: -2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1997년 12월 30일. 새해를 불과 이틀 앞두고 있던 그날을 떠올리면, 스무 해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슴 어드메가 무거워 온다. 서울구치소를 비롯한 전국의 5개 구치소에서 23명의 생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이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몇몇 종교위원들과 서울구치소를 찾은 그날 풍경은 지금도 그릴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전날 사형이 집행된 네 사형수의 시신이 든 검은색 관이 구치소 뒷문을 빠져나올 때마다 곡소리가 겨울 하늘을 찢었다. 쓸쓸한 하늘에서는 부슬부슬 싸라기눈이 관 위로 내려앉았다. 누군가의 곡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을 훔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 한켠이 아려 숨을 삭이느라 손놀림까지 더디다.   그날을 끝으로 우리나라에서 사형집행이 중단된 지 20년이다. 마지막 사형 집행이 이뤄진 그날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2007년 12월 30일, 우리나라는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실질적 사형폐지국가’ 대열에 들어섰다. 전 세계에서 134번째로 사형폐지국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사형제도가 존치하고 있어 우리 사회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사형제도 존치 여부가 인권 선진국의 가늠자가 되고 있지만,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이런 인식조차 멀지 않은 시간, 어렵게 이뤄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상 가능한 것처럼, 엄혹한 군사독재 시대에는 ‘사형제 폐지’를 외치는 것만도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자임하는 일이었다. ‘사형 폐지’라는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자기 목숨이 위태로울 판이었다. 이런 흐름이 분수령을 맞은 것은 1987년 ‘6월 항쟁’ 때였다. 숨통이 트인 광장으로 나선 뜻있는 이들이 1989년 5월 30일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창립을 이뤄내면서야 이 땅에 사형제도 폐지를 향한 물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형폐지운동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2001년 1월 19일 가톨릭을 비롯한 불교 개신교 원불교 천도교 등 7대 종단 지도자들이 망라된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범종교연합’이 발족하면서다.   이후 범종교연합은 우리나라의 사형제도 폐지운동을 이끌며 국내외 인권단체 등은 물론 정부기관, 국제기구 등으로 연대의 폭을 넓히며 생명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왔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지난 제15대 국회(1996~2000년) 때부터 19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매 국회 때마다 ‘사형제도 폐지 특별법’(안)이 발의돼 왔다.     사진 출처 - 필자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사형제도 존치는 물론 당장 사형을 집행하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교리’로서 사형을 반대하는 종단 신자들마저 앞장서 사형 집행을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적잖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인류를 원죄에 물들게 한 하와의 마지막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유혹은 대체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 복수, 왜 아까운 돈으로 짐승을 먹여 살리느냐는 경제적 접근, 위험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는 논리 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인식은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이성에 대한 몰이해, 또는 무지에서 비롯된 바 크다.   “생명의 권리는 최우선적이며 근본적인 권리로서 다른 모든 인권의 필수 조건이다…인간은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자연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발전의 모든 순간에서 그리고 건강하든 병들었든 성하든 불구이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상황에서 생명권의 주체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38항)   어느 시대든 그 시대가 뛰어넘기 힘든 한계가 있다. 우리 시대에는 사형제도가 그것이다. 그 필연을 뛰어넘지 못할 때 100여 년 전 노예제도에 묶여, 신분제도에 얽매어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나가지 못했던 선조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암흑의 시대에 균열을 내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들의 조그만 몸짓이다. 사랑 어린 실천이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10-25 | hrights | 조회: 1420 | 추천: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