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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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강사법 개정과 대학, 교수-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그렇게도 기를 쓰고 보내려는 대학의 민낯을 보여주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대학 교육자가 교육을 담당하기 위한 최소한의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달 중 시행령 예고를 앞두고 있는 강사법의 주인공, ‘시간강사’ 얘기다.  역사를 공부한 나의 짧은 식견으로 볼 때 몰락은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는다. 먼저 작은 조짐들이 있다. 대개 많은 경우 어리석어서 그 조짐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결국 조짐은 어느 틈엔가 홍수처럼 손쓸 틈도 없을 만큼 커지고, 모른 척했던 ‘생각 없는 자들’을 덮친다. 강사법 개정에 즈음하여 대학과 교수사회가 보여주는, 작태라는 어감으로도 감당키 어려운 타락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상식과 협잡  음지에 은폐되어 있던 '대학교원 강사'의 참혹한 처우가 공론화되어 강사법 개정이 논의, 추진된 지 30년째다.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표류하던 강사법은, 한해가 저물어가던 작년 11월 들어 강사의 교원신분보장, 처우개선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도출할 수 있었다. 대학 교육의 30% 이상을 담당하면서 '교원'조차 아니었던 신분, 평균 800만원이라는 연봉 아닌 연봉을 조금씩이나마 정상화, 현실화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학 중 임금지불이나 임용조건, 처우 등은 정관이나 학칙에 맡겨져 있어 대학이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사법 시행에 즈음한 대학의 대응은 사회의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보기 힘든 꼼수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4대보험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강사들에게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면 강의초빙교수로 채용해주겠다고 제안하거나, 학부 졸업에 필요한 졸업학점을 축소함으로써 강사 인건비를 줄이거나, 강의 당 폐강 기준을 20명에서 30명으로 늘리는 등(KBS 보도) 강사법의 시행이 목표로 했던 교육의 질 향상과 강사 처우 개선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잘난 자들  올해 들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와 강사노조, 대학 등으로 구성된 ‘대학 강사제도 개선 협의회’의 합의안 가운데, 대학평가지표에서 강사지표를 빼달라는 집요한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책동은 국립대나 사립대, 이른바 명문대나 아닌 데나 마찬가지이다. 한국 대학이, 대학 행정가들이 어쩌다 이렇게 측은한 존재들이 되었을까?  강사라는 위상은 대학교육에서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비록 강사 지위의 열악한 구조로 퇴색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사는 역사학, 법학, 의학 등 해당 학문의 새로운 세대들이자, 정규직 교수들의 동료이다. 학생들에게는 해당 학문이 사회에 갖는 가치와 기여를 전달하는 엄연한 교육자이다. 또한 가족과 함께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속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다. 허나 이들 학문의 허리이자 동시대 시민들은, 그들의 터전인 대학과 동료이자 선배이며 스승인 정규직 교수들에게 외면 받으며 학문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던져야 했다.  강사법 시행을 앞둔 지난해 11월 20일, 서울대 단과대 학장과 대학원장 22명은 강사법 개정이 “대학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국회의장 등에게 보냈다. '강사법으로 유발되는 재정적 적자'에 대한 우려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고생하는 학문혁신세대인 시간강사들에 대한 처우와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는 원칙에 동의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고생하는 학문혁신세대'의 현실을 개선할 어떠한 조치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의 말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사진 출처 - 미디어숨 대안과 실증  이들의 공허한 말이 나는 왜 이리 측은할까? 학문과 교육과 동시대인들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결여한 지식인들의 빈 깡통 같은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대학 등록금과 정부지원금으로 평균 1억 원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 교수들과 직원들에게 연봉 800만원의 강사의 삶은 정녕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일까?  아니라고? 그러지 않다고? 공감하고 있다고? 그럼 제안 하나 하자. 얼마 전 동료교수의 말에서 얻은 힌트이다. 대학 별로 교수들이 연봉의 10%를 삭감해서 그 재원으로 강사처우를 개선하는 데 쓰자. 세세한 방법은 각자 찾자. 《참고자료》(고려대학교 강사법관련구조조정저지 공동대책위원회 2018년 11월 22일 문건)를 바탕으로 논증 겸 사례를 연구해보자. 물론 반론도 환영한다. ○ 2017년 고려대학교 결산안을 바탕으로 추산한 결과, 전체 수업의 약 30%를 담당하는 시간강의료는 서울, 세종, 의대를 모두 포함하여 101억 정도(서울 83억, 의대 1억6천, 세종 16억). - 101억 원은 고려대학교의 2017년도 총 수입인 6,553억 원 중 1.55%이며, 산학협력단 예산 약 3천억 원까지 포함하면 이 비율은 1%로 떨어진다. - 다시, 101억 원은 전체 교원보수 약 2,296억 원 4.43%. 이에 반해 대학 측에서 강사법 개정으로 추가되는 비용의 추정 최대치는 55억 원으로, 2017년 기준 학교 총 수입의 0.8%.(55억 원인 시간강사료의 인건비는 또한 교수 수당인 ‘교원각종수당’ 296억 원의 약 1/3에 해당) ∴ 고려대의 경우, 추가 증가 비용 55억 원은 교원보수 2,296억 원의 약 2.4%이므로, 10%가 아니라, 3% 이하만 삭감해도 강사법 정착에 문제가 없다. 이건 정부지원금을 뺀 수치이므로 그걸 보탤 경우 실제 수치는 더 내려갈 수 있다.  이 정도의 노력으로 제자이자 후배들이 편히 또 그들의 후배이자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대학이 몰락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학자의 체면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보다 양심이 조금 편해질 수 있다면,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대부분 속으로 이 10%를 삭감하지 않을 이유부터 찾으리라는 것, 잘 안다. 또 구조적인 해결이 중요하네 어쩌네 하며 쌈짓돈이 줄어들 것을 걱정할 수도 있다. 허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대학이 측은할 정도로 천해져있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연변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9-01-23 | hrights | 조회: 1608 | 추천: 19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연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난 자리에서 ‘썩소’가 화제에 올랐다. 썩소는 고3 때 나의 담임선생님 별명이다. 그는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 같은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폭력 교사’였다. 얼굴이 심하게 얽은 분이었는데(그때는 그걸 곰보라고 불렀다), 아주 가끔 웃을 때면 하얀 치아가 검은 얼굴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뤘다. 미소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웃을 때 그러하듯 영 어색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썩은 미소’, 줄여서 썩소였다.  어느 날 썩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들어와서는 수업을 하지 않고 자습을 시켰다. 그는 이어폰을 꺼내 휴대용 라디오를 들었다. “쉿! 지금 각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는 강시 같은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우리를 침묵하게 한 뒤 이어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당시 각하는 전두환이었다. 나중에 추론해 보니 그 방송은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4·13 호헌조치’ 담화문 발표 방송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경기도 한 위성도시의 삼류 학교였고, 우리는 6월 항쟁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던 무지렁이들이었으며, 선생님은 요즘 말로 하면 ‘전빠’였다.(이 분이야말로 전두환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믿어의심치 않으실 분이다.)  썩소 선생님은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분이라 말수가 적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례적으로 길게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울산에서는 너희들보다도 공부를 안 한 무식한 놈들이 대졸자들 만큼 월급을 올려달라고 파업을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느냐.’는 취지였다. 현대차라는 고유명사도 거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나중에 알고보니,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날의 일장훈시는 내 인생 최대의 화두로 남았다. ‘공부 안(못) 한 사람은 월급을 많이 받으면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우리 사회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입시 제도를 수십번 바꿔도 입시 경쟁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심해지는 현상의 원인도 이 질문과 관련이 있다. 화제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의사 아버지의 승진 경쟁보다도 자녀들의 성적 경쟁이 더 중요한 일처럼 묘사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우리 사회가 확립한 대답과 관련이 있다. 미국의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에 올라왔던 만화. 한국인의 육체 노동 경시 풍조를 풍자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속한 세대는 썩소 선생님이 메시아처럼 떠받들던 전두환-나는 이들을 아버지 세대라고 부른다-을 상대로 싸웠지만(그리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성과를 이뤘지만), 이들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 놓은 체제의 규칙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자식들에게 전수했다. 그냥 전수만 한 게 아니라 그 규칙에 뼈와 살을 붙여 훨씬 공고한 시스템을 완성했다. <스카이캐슬>의 7년 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방송사의 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본 사람이라면 <스카이캐슬>의 설정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학부모를 쥐고 흔드는 강남의 초엘리트 사교육 권력이 더 강력해진 캐릭터(입시코디네이터 김주영)로 돌아온 것이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초등학생에서 고3과 중3으로 자랐고, 사교육 시스템은 복잡해진 입시제도 만큼 더 치밀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서울대 의대를 강요하는 부모를 상대로 복수를 기획하고 감행할 정도로 끔찍한 인간성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공부 강요하는 부모를 자식이 살해하는 일은 실제로 왕왕 일어난다.)  다들 알다시피 사교육 시장의 주요 공급자와 수요자는 이른바 86세대다. 86세대 일부는 한때 대안학교 붐을 일으키며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자 시도했으나, 이제 대안학교조차 서울대에 몇 명 보내느냐가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돼버렸다. 조희연 교육감의 최근 발언을 보라.(“서울대 의대 두 명 보냈다.”) 물론 혁신학교의 학력 저하 주장을 반박하느라 나온 말이긴 하지만 이 시대의 욕망을 정확히 반영하는 장면이다. 학력숭배(간판숭배)는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가 된 지 오래다. 썩소 선생님의 소신은 이 시대의 종교가 되었다.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학력주의를 비난하지 않는다. 노력과 능력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력에 따라 직업과 연봉이 달라지고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오로지 평가 과정의 공정성이다. 평가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다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경쟁은 당연한 것이고 승자독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물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게 86세대만의 탓은 아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경쟁주의 세력은 전교조로 대표되는 참교육 진영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예봉을 꺾었고, 이명박 정부 들어 학력경쟁을 초등학교로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아내의 자격>이 <스카이캐슬>로 진화한 지난 7년 동안 이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아내의 자격>의 대결 구도-국제중 전문 입시학원 대표 홍지선(이태란) vs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고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윤서래(김희애)-에서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윤서래를 응원했었다. 돈과 성공에 눈이 먼 홍지선과 착하고 인간적인 윤서래 사이에서, 윤서래가 비록 불륜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윤서래를 지지했었다. 그런데 <스카이캐슬>은 좀 다르다. 딸 예서의 서울의대 입학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서진(염정아)과 역시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이수임(이태란)의 대결 구도에서 시청자들은 맘 편히 이수임을 응원하지 못한다. 한서진이 감추려던 과거(시장에서 내장과 선지를 팔던 집 딸이었다는) 치부를 드러낸 이수임을 비난하는 시청자들도 꽤 있다.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진 이 설정은 사교육이 우리 안에 더욱 깊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메타포가 아닐까. 사교육을 줄이고 획일적인 입시 교육에서 벗어나자는 참교육의 이상은 점점 더 딴 세상 이야기가 되어간다. 문재인 정부도 그런 방향으로의 교육 개혁은 꿈도 꾸지 않는 것 같다. 이대로 가면 학력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 역시 더욱 커질 것이다. 아이들은 더욱 심각한 입시 지옥에 빠져들 것이고, 부의 편중 또한 심화할 것이다.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을 체제의 작동 원리로 설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사슴은 뿔로 싸우고, 기린은 목으로 싸우듯이, 지능이 발달한 인간이 머리로 경쟁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러나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 경쟁을 죄악시했던 사회주의가 지나친 획일주의로 망했듯이, 경쟁만을 최고의 덕목으로 떠받들며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는 바로 그 획일적 경쟁주의 때문에 망할 수 있다.  교육과 노동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으며, 입시경쟁 완화의 근본 대책이 노동 및 분배 정책에 있다는 주장은 새롭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이 낡은 주장조차도 제대로 인식하고 실행에 옮기려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대신 이렇게 저렇게 교육 정책을 바꾸는 대증 요법에만 치중해 왔고, 그 실패 앞에서 자못 허탈한 심정으로 망연자실해 있는 것 아닌가. 또는 <조선일보> 따위의 논리에 굴복했다는 치욕감에 아예 잊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노동 존중론이 나의 이 낡은 주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낀다. 최저임금 천원 올렸다고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어대는 자들이 여전히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후진적 풍토에서 육체노동의 사회적 가치와 평가를 높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 나라의 하드웨어를 바꾸는 데 성공했듯이, 운영체제에 해당하는 교육과 노동 정책도 바꿀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세대의 마지막 과제가 아닐까.  한 가지 유념할 것은, 정책을 바꾸는 것보다 인식을 바꾸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공부도 못(안)한 것들이 어따 대고….’ 우리 아버지 세대의 이 천박한 인식이 지금 우리와 무관한 것이라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이 인식을 바꿔내는 것이 진정으로 전두환을 이기는 길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9-01-16 | hrights | 조회: 1897 | 추천: 18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새해 벽두에 이순자 씨의 ‘민주주의의 아버지 전두환…’ 운운의 기사를 보고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육군사관학교에 가려고 필사적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꿈은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다부진 몸, 절도 있는 몸짓 등. 키가 약간 작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당시 제 눈에는 그 친구가 이미 군인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육사 입학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첫 단계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죽고 나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였으니 그의 말에는 더욱 확신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을 뿐, 그다지 친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굣길에 그는 저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책을 한 권 권했습니다. <황강에서 북악까지>라는 전두환 자서전이었습니다. 지금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부분의 위인전이 그렇듯 뭐 그랬겠지요. 어떤 장면보다 인상에 남아 있던 것은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의 결혼 이야기였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영화 같은 사랑과 운명이라는 것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은데 너무 감정적이고 과장되어 있어 오히려 코미디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 - jtbc  이순자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황강에서 북악까지>의 자료를 검색해보았습니다. 인터넷에 혹시 누군가 그 장면을 옮겨놓지 않았을까 해서였습니다. 책 내용은 찾을 수 없었고 책에 관한 글들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 책을 썼던 작가와 당시 문단에 관한 글을 보았습니다. …허문도를 만난 천금성은 뜻밖에도 ‘전두환 장군의 전기를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천금성은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도 그에 뒤따를 ‘반사이익’도 염두에 뒀을 법하다.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70년대 중후반 무렵 박목월과 박재삼이 ‘육영수 전기’를 써서 각각 억대를 챙겼으리라는 풍문도 순간적으로 천금성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천금성의 40대 이후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잘못된 판단이었다. 어쨌거나 그 자리에서 천금성은 허문도로부터 착수금조로 50만원을 건네받았다.  원고지 1,200장 분량의 전두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는 착수한 지 약 3개월 만인 10월 말에 완성됐고, 제5공화국이 출범하기 약 한 달 전인 81년 1월 말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천금성이 챙긴 돈은 취재 과정 중 추가로 받은 200만원과 후에 인세로 받은 700만원을 합쳐 약 1,000만원에 불과했다. 그나마 시중에 깔린 책은 별로 팔리지 않아 몇 달 뒤 민정당과 평통자문회의가 1만여 권의 재고를 모두 구입해줘 그 정도의 인세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천금성의 막연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문단에서는 천금성을 기피인물로 따돌렸고, 출판사나 잡지사들도 공공연히 냉대해 아무리 소설을 써도 발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소설가로서의 기능마저도 상실할 위기에 빠진 것이다. 자업자득이기는 했지만 5공의 권력층에 대한 천금성의 불만은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불평을 털어놓았고 이런 행태는 고위층에까지 전해져 특수수사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2011년 글, 정규웅,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에서  당시 마땅한 원고료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천금성 작가가 어느 기업 사보에 쓴 글도 보았습니다. 제 기억 속의 사랑 이야기는 전두환 씨가 중위, 이순자 씨가 고교 시절이었는데 다른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기 자료수집을 위해 필자는 두루두루 측근과 관련자들을 만났는데, 내용 가운데 하나인 ‘결혼’ 장(章)에서 육사 2년생(전두환)과 진해여중 2년생(이순자)의 만남을 묘사한 대목이 영부인으로서는 눈에 거슬렸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내용은 인쇄기에 걸리기 전 삭제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지만, 증언자인 경기여고 동창생(당시 불광여중 강경옥 교사)을 호되게 나무란 다음 내쫓다시피 미국으로 출국시켰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면 영부인으로서는 필자가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 -2014년 글, 천금성, <자손대대의 영광이라니!>에서  아뿔사!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새해에는 무언가 희망과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갑자기 오랜 기억이 떠올라서, 호기심에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그만 두서없는 이야기만 옮겨놓고 말았습니다. 이순자 씨의 인터뷰 때문에 제 넋이 빠져버린 게 틀림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니! 저는 신년벽두부터 우두망찰… 천장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집필한 천금성 작가는 2016년에 별세했습니다. **육사에 가겠다던 고교동창은 체육대학에 진학했으며, 한 10년 전쯤 서울 강남 지역 어디서 시의원에 당선, 좋지 않은 일로 의원직 상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9-01-09 | hrights | 조회: 1397 | 추천: 6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보헤미안 랩소디’에 매혹된 연말이다. 봐야지 봐야지 하던 영화를 지난 주말 봤다.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지루한 줄 몰랐다. 극장에 울려퍼지는 노래도 멋지지만 영화를 통해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되새기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잔지바르”와 “파시”라는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기억도 안날만한 꽤나 생소한 이름이 등장한다. 영화에는 프레디 머큐리를 “파키스탄 사람”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하는데 사실 프레디 머큐리의 일생을 따라가다보면 중측으로 얽혀있는 소수자의 삶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잔지바르는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곳이다. 탄자니아 동쪽 해안에 자리 잡은 섬으로 유서깊은 교역 중심지다. 서울보다 약 4배 크고 인구는 130만 명 가량으로 일찍이 이슬람 세계에 편입된 덕분에 지금도 인구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16세기 포르투갈을 거쳐 17세기 말 오만 제국의 통치를 받으며 노예 중개무역지로 번영을 누렸다. 19세기 짧은 독립 뒤엔 영국 식민지가 됐다. 그렇다고 프레디 머큐리가 아프리카 사람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의 뿌리는 영화에서 “파시”라고 표현한, ‘파르시’다.  파르시는 페르시아, 즉 이란에서 살다가 8세기에 무슬림에 쫓겨 인도에 정착한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조로아스터 혹은 자라투스투라가 창시했다는 이 종교는 천사와 악마, 최후 심판, 구세주, 천국과 지옥 등 현대 세계 주요 종교의 교리의 원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산조 페리시아 때는 국교로서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인도를 대표하는 재벌인 타타 그룹 설립자 가문 역시 파르시다. 사진 출처 - The Verge  프레디 머큐리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였다.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는 인도 구자라트 주에 있는 불사르에서 태어나 잔지바르로 이주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8살 때 인도 뭄바이 인근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 복싱 교내 챔피언도 했다. 영화에서 프레디 머큐리 아버지는 잔지바르에서 맨손으로 쫓겨났다고 말하는데, 바로 영국에서 독립한 1964년 오랫동안 누적된 차별과 갈등이 폭발하면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했던 걸 말한다. 영국 총독부 하급 공무원으로 나름 유복했던 프레디 머큐리 가족은 영국으로 건너갔다.  파르시는 인도에서 소수자로서 천년 넘게 살아오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왔다. 하지만 파르시 어머니와 파르시 아버지한테서 난 자녀만 파르시로 인정하는 전통 때문에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프레디 머큐리 부모로선 아들이 파르시 여성과 결혼해 손주를 보는걸 원했겠지만 사실 영국에서 파르시 출신 아가씨를 만난다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어차피 파르시가 아닌 여성과 결혼하면 손주는 파르시 일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게다가 게이라니.  프레디 머큐리는 아프리카 사람도 아니고 인도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파르시도 스스로 거부했다. 그렇다고 온전히 영국 사람도 아니었다. 주변의 영국인이 보기엔 그저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파키스탄 사람”일 뿐이었다. 거기다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은 프레디 머큐리를 향한 비난과 조롱의 원천이 됐다. 불가능해 보이던 독일군 암호를 해독해 2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을 구한 영웅이었던 엘런 튜링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화학적 거세를 당하는 수모 끝에 자살한 게 보헤미안 랩소디를 발표하기 21년 전이었다.  이게 과연 실화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인신공격과 모욕이 난무하는 기자회견 장면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퀸의 음악에 대한 질문은 없고 그저 끊임없이 프레디 머큐리의 사생활과 외모만 물고 늘어지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프레디 머큐리가 ‘영국인 이성애자’였어도 저랬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프레디 머큐리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음악으로 모든 번뇌와 방황을 이겨내는 장면은 더욱더 감동스러울 수밖에 없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8-12-26 | hrights | 조회: 1390 | 추천: 1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평화가 경제라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들어가기 전부터 “평화가 경제”라는 말을 해왔다. 더불어민주당도 곳곳에 “평화가 경제다”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집권당으로서 청와대와 동행한다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평화로 경제를 살린다니 좋은 얘기다. 그런데 정작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설은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려온다. 남북간 교류를 통해 한반도에 긴장이 완화되면 투자가 늘어서 경제도 좋아질 것이라는 메시지 정도로 해석되기는 한다. 국민이 그 정도로만 해석해도 큰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평화 보다 안보가 우선이며 평화가 경제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즉 경제가 평화라는 대응적 목소리도 크다. 평화라는 말만 같을 뿐, 같은 말로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평화가 무엇이기에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국민적 공감대를 더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가 발전되어야 따라오는 평화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평화라는 말만 하지 말고, 무엇이 평화인지, 어떻게 평화를 이루는지 웬만큼 설득력 있는 메시지가 나와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요사이 평화학을 공부하고 있는 마당에 정말로 평화가 경제이기를 바라며 평화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설부터 좀 해보련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  흔히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일견 그럴 듯한 정의이다. 하지만 인류에게 폭력이 없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정의는 비현실적이다. 주먹질이나 전쟁과 같은 물리적 폭력 정도만이 아니라,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에 의해 구조화된 폭력, 성차별 같은 것을 당연시하는 문화적 폭력 등까지 염두에 두면 인간은 폭력 없는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는 기존의 정의는 경험에 따른 정의라기보다는 일종의 희망적 정의라 할 수 있다. 희망적 정의도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경험해보지 않은 내용으로 채워진 평화는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 희망적 정의를 넘어, 현실을 반영하는 실감나는 정의가 필요하다.  평화를 ‘폭력이 없는 정적 상태’로서보다는, ‘폭력을 줄이는 동적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폭력을 줄여나가는 동적인 행위가 실제로 평화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이다. 현실은 언제나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평화를 이룬다고 하면서도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고, 자기만을 위해 이루어지길 바라는 이른바 ‘자기중심적 평화들’이 도리어 갈등과 폭력을 부추긴다. 자기중심적 평화들이 충돌하며, 설령 전쟁 같은 물리적 폭력은 없어도 세상은 자꾸 ‘비평화’로 나아간다.  인도의 평화학자 다스굽타가 전쟁과 같은 직접적 폭력이 없는데도 평화롭지 못한 상태를 peacelessness라는 신조어로 표현해낸 바 있다. 우리말로는 ‘평화 없음’ 혹은 ‘무평화’라고 표현해야 하지만 흔히 ‘비평화’로 번역하곤 한다. 전쟁은 없는데도 평화롭지도 않은 상태를 요한 갈퉁은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는 말로 재구성한 바 있다. 일단은 직접적 또는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감폭력의 길  평화에 ‘소극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실제로 싸움이나 전쟁이 없기를 바라고 실천하기도 벅차다는 뜻이다. 그 정도도 간단하지 않은 일이고, 나아가 귀중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가 평화의 모든 것은 아니다. 실제로 폭력을 더 줄여가는 길에 나서야 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없는데도 남북이 서로 갈등하고, 개인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은 없어도 저마다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억압을 받고 있지 않는가. 일종의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나아가 문화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극적 평화의 단계를 넘어 일체의 폭력이 없는 상태, 즉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의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평화가 ‘소극적’과 ‘적극적’이라는 두 가지 상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그다지 단계적이지 않다. 여러 상태와 단계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 폭력을 방지하며 동시에 폭력을 줄여나갈 수 있어야 한다. 소극적 평화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 이상의 평화를 지향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적극적 평화의 행위인 것이다. 적극적 평화는 폭력이 전혀 없는 상태라기보다는,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그 폭력이 지금보다 더 줄어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reducing violence)’, 한 마디로 ‘감폭력(減暴力, minus-violencing)’의 과정으로 간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 타자에게 아픔을 주는 ‘사나운[暴] 힘[力]’이 타자를 살리는[活] 힘[力]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평화이다. 폭력(violence)의 벡터, 즉 폭력의 힘과 방향을 반대로(minus) 이끄는 과정(ing)이다. 아픔에 대한 공감, 폭력 축소의 동력  폭력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폭력으로 인해 누군가 어디서 아픔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픔 때문에 그 아픔을 보거나 상상하는 이도 불편하거나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픔을 내 안으로 가져오게 되고, 폭력을 줄이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아픔에 대한 공감이 평화연구와 운동의 시작인 것이다.  특히 약자 혹은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아픔의 근원을 통찰하고 아픔을 줄이는 동력이 된다. 성폭력 폭로 운동인 ‘미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폭력을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폭력의 피해자다. ‘사나운[暴] 힘[力]’의 피해자가 그 힘을 폭력이라 느끼면 그것은 폭력이다. 평화학도 대체로 이 같은 기준에 동의한다. 가능한 한 약자의 아픔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아픔의 원인에 대해 탐색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평화 연구도 평화 운동도 이러한 공감을 기반으로 하면서 폭력을 줄여나갈 때 진정성을 확보한다.  폭력을 줄인다는 것은 더 큰 폭력에 대해 일부러 작은 폭력을 선택해 더 큰 폭력을 폭로하는 것이다. 가령 백남기 농민이 경찰차를 흔드는 행동을 했던 것은 전적으로 비폭력적이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작은 폭력을 선택해 거대한 폭력적 권력을 폭로하는 행동이었다. 전적인 비폭력은 불가능한 언어이다. 사람이 고기를 먹는 행위조차 짐승에 대한 폭력의 결과인 마당에 순수한 비폭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큰 폭력을 폭로하는 작은 폭력을 선택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육식을 줄이는 것도 폭력을 줄이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큰 폭력 앞에서 일부러 작은 폭력을 선택하다보면 희생이 뒤따를지도 모른다, 백남기 농민이 그랬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폭로하는 행위를 통해 폭력은 줄어들고 줄어든 그만큼 평화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평화는 감폭력이다. 그렇다면 감폭력이 어떻게 경제에 도움을 준다는 말일까. 다소 길어졌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써보련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8-12-19 | hrights | 조회: 1586 | 추천: 7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시민들의 발걸음이 활기차다.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차가운 날. 두툼한 외투에 손 장갑 털모자를 쓴 사람들은 추위를 털어내듯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활보 중이다. 때 마침 오후에는 눈 예보가 있었는데 거기에 맞춰 얕은 눈발이 거리를 덮기 시작 했다. 구름이 짙게 깔려서인지 해가 지기전인데도 대동강 유람선은 반짝이는 조명을 켜고 양각도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강가의 의자에 앉은 연인은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그 광경을 감상하고 있다. 내리는 어둠이 내리는 속도를 따라 눈발이 굵어지면 멀리 유경호텔의 벽면위로 수 백 만개의 등불이 밝혀지고 거대한 호텔은 그새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해 성탄을 축하한다.  ‘성탄을 축하 합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씩 새겨놓은 화사한 조명이 대동강 물속으로 스며들면 그때 먼데 아득한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가느다란 노래 소리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유경호텔의 크리스마스트리가 긴 그림자가 되어 대동강 변에 닿을 때쯤 유람선도 그림자가 낸 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들어오고 어느새 모인 시민들이 노래를 합창한다. 노랫소리가 더 귀해서였을까. 눈발은 더욱 굵어져서 함박눈. 장난기 많은 아이가 이리저리 눈망울을 굴리더니 강변으로 뛰어나가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위에 큼지막한 글씨를 쓴다.  ‘아기 예수님 어서 오세요’  상상을 하다 보니 점점 더 범위가 넓어진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벌어진 캐럴 플레시 몹은 ‘평양발 평화의 메시지’가 되어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이를 중계한 각 언론사의 웹사이트는 접속 폭주로 잠시 서버가 다운 된다는 것까지.  그저 막연한 상상을 해 보았을 뿐 현재의 평양에서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상이 실제가 될 날이 있을까 기대도 해 보지만 굳이 실제가 아니어도 큰 상관은 없다. 성탄 트리가 없어도 눈발은 나뭇가지위에 쌓이고 성탄 축하 카드가 없어도 아이는 엄마의 손을 놓고 강변의 눈밭을 뒹굴 테니까. 포탄은 아이와 군인을 구별하지 않았네   그들이 퍼붓는 포탄은 병원과 군수공장을. 전차와 교회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들이 난사해댄 기관포는 군인과 아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낮이면 무너진 집 더미를 배회하는 어린아이의 울음조차 용납하지 않았고 밤이면 숨죽이며 깜빡이는 호롱불까지도 가만두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가 그들의 표적이었고 그들이 뿌려 대는 포탄은 한겨울을 견디고 봄을 기다렸던 어린 새싹들마저 초토화 시켰다. 1951년 1월 미군의 공습을 받은 평양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거의 모두가 사라졌다.  난리 통에 피란을 가던 한 가족이 폭격을 당했다. 작은 시골교회 장로였던 아버지가 피난처로 생각한 것이 교회였다. 미국은 기독교의 나라이니 교회는 폭격을 안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가장 먼저 폭격을 당했고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겨우 피를 흘리며 살아나온 한 아이가 70의 노인이 되어 대동강 변을 걷는다. 그이에게 미국과 기독교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일은 어리석다. 그 노인에게 교회나 기독교는 평생을 가족 없이 살게 한 증오의 이름 ‘미국’과 동일하다.  황해도 신천의 리명희 할머니는 양팔이 없다. 신천리 학살 사건 당시 음식을 구하러 나왔던 어린 소녀는 미군의 무차별 사격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결혼을 한 그녀는 삼남매를 낳았다. 큰아들 이름이 ‘복수’ 둘째가 ‘하’ 셋째가 ‘리라’이다. 복수 하리라. -북한의 교회를 찾아가다. 최재영 통일뉴스 2015.12.21-.  북한이 신천 대학살이라고 부르는 신천 사건은 1950년 10월 평양으로 진격하던 미군이 황해도 신천을 비롯 산천, 안악, 은률, 재령 등지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당시 신천 인근 인구의 1/4인 35.000명이 희생되었다고 기록한다. 1958년 개관한 신천 박물관은 한국전쟁 당시 가장 많은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현장을 생생히 묘사한다. 2016년 한해만 72만 2000명이 관람했다. 작가 황석영은 2007년에 발표한 소설 ‘손님’으로,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그린 ‘게르니카’의 화가 피카소는 1951년 다시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a)’로 이들의 죽음을 고발한다. 신천 사건은 황해도 내 기독교 우익세력과 해방 후 사회주의 세력이 부딪힌 첨예한 갈등의 결과였다는게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모든 죽음은 다 아프다. 죽어 마땅한 죽음은 세상에 없다. 그 단순한 명제에 수긍하지 않는 것은 모든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주관하는 신의 영역에 반기를 드는 일이다. 신천 사건에서 어느 편이 먼저 또 누가 더 많이 학살을 자행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학살이 있었고 그 이유가 신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부끄러운 사실만 남았다.  토지 개혁의 피해자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엔 약 3,035개의 교회가 존재했으며 그중 2,349개는 평북, 평남, 황해도 등 북한의 서부지역에 있었다. -해방 전 북한 교회 총람.이찬영-. 전체 기독교 인구의 60%가 넘고 약 20만 명에 달하는 숫자다.  1946년 3월 5일 북한 최초의 중앙권력기관인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공포했다. 일본인 토지 소유와 조선인지주들의 토지소유 및 소작제를 철폐하고 몰수된 토지를 농민의 소유로 넘기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북한 전체 182만 98 정보 중 55.4%에 해당되는 100만 8,178정보가 몰수되었다. 몰수된 토지는 고용농민, 토지 없는 농민, 토지 적은 농민, 이주한 지주 등에게 평균 1.35정보씩 분배되었다. 총 농업호수 112만호 가운데 토지분배를 받은 농가 수는 72만호로 약 70%가량이 토지개혁의 혜택을 받았다. 당시 북한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했고 그중 80%가 소작인이었으며 4%의 지주들이 약 58%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토착 질서를 뒤흔든 혁명, 토지개혁. 한국 역사 연구회 2004-  큰 사찰이나 성당명의의 땅도 몰수 되었으나 공동의 재산이었으니 큰 저항은 없었던 반면 1만 5000평 이상의 토지를 소작으로 부려 먹던 개인은 지주 계급이 되었고 땅을 빼앗겼다. 그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반대편에 서야만했고 그것이 민족주의였다. 같은 민족주의라도 일제시대에 대항했었다면 좌익으로 몰렸을 테지만 그들이 저항한 대상은 사회주의였다. 그들은 스스로 우파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반공운동이 거셌다.  해방 후 1953년 까지 약 7만-10만의 기독교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왔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권을 장악하며 개신교의 여론을 주도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극단적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한국 예수교 장로회의 큰 어른으로 추앙받는 고 한경직 목사의 증언은 1948년 제주도로부터 벌어진 한반도 남녘의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섬뜩해진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윤정란, <한국 전쟁과 기독교>, 한울, 2015  해방당시 남한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의 1% 미만이었지만 2018년 현재는 약 20%를 상회한다. 세계 50대 교회의 반이 한국교회다. 전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이 놀랄만한 부흥의 성과가 있었다. 신앙이라는 소중한 열매의 자양분이 전쟁과 분단 그리고 반공 이었다면 이제는 대립이 아니라 남북의 화합을 위해 그 열매를 나누어야 할 때다. 평양 보통강호텔에 설치된 성탄트리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북한에도 크리스마스가 있을까  북한주민 열에 아홉은 무감하거나 모르고 지나가지만 북한에도 크리스마스가 있다 .전 세계 어디든 십자가를 신앙하는 이들이 있는 곳에 울려 퍼지는 찬송이 거기에도 있다. 북한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조그련) 소속으로 보통강 지류 봉수산기슭에 봉수교회. 만경대 구역 룡악산의 일곱 번째 골짜기엔 칠골교회. 그리고 교회 건물은 없이 각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가정교회(처소교회)가 있다. 한국전쟁 후 벽돌하나 남아있지 않았던 교회의 흔적은 1972년 즈음, 전후 복구 사업의 성과를 토대로 북한 경제의 재도약 시기에 들어서서야 재건의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사막에도 꽃이 핀다. 전후의 폐허 이후에도 신앙의 전통을 품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빛 하나 없는 가난한 마을에도 주일이면 소박한 찬송이 울려 퍼졌고 그것이 가정교회다. 이들은 당연히 북한당국의 승인에 의해 법에 의한 보호를 받고 자연스러운 북한 주민으로 살아간다. 평양으로만 따지면 낙원동 처소교회. 경상골 예배처소, 대동강 구역 예배처, 성천구역 예배처. 남산구역 처소교회 같은 것이다. 신도수가 적은, 건물 없는 소박한 교회다. 이런 형태로 평양에 30개소를 비롯해 남포에 30개소, 개성 30개소, 평안남도에 무려 60개소 등 현재에도 약 515개의 가정교회가 있고 1만 5000여명의 신앙인들이 드리는 기도가 존재한다. 그들이 드리는 찬송은 내가 부르는 그것과 동일하다. 그들이 부르는 주님은 우주의 창조주로 고백하는 나의 주님과 동일하다. 다만 그들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 동일하지는 않다. 나는 미국의 자본주의식 교회에 익숙해 있고 첨탑이 높은 건물에 익숙해 있다. 그리고 오직 한분인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땅 끝 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열성으로 타 종교를 묵살 하는데도, 또한 주일날 한 번의 뜨거운 기도로 한 주간의 온당하지 못한 행위를 죄 씻음 받는데도 익숙하다. 내가 쌓은 재산이 타인의 눈물과는 무관하며 순전히 성전에 바친 헌금의 대가라는 사실에도 익숙하다. 내가 종교의 자유가 한 치도 없는 북한의 비참함을 주님께 기도하는 동안 그들은 자본주의의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 받는 미국의 혹은 한국의 ‘인민’들을 위해 기도할지도 모른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소복한 눈 알갱이 몇 개가 날아와 성에가 자욱한 유리창에 붙어 집안을 들러본다. 십자가도 없는 집안의 작은 방 안에는 몇몇 가족이 성탄축하 예배를 드리며 웃고 있다. 갓 평양 신학원을 졸업한 전도사가 성탄 축하 설교를 하는 동안 50여년 이 예배 처소를 지킨 노부부가 깊은 묵상을 하고 신앙의 대를 이을 어린 아기의 칭얼거림을 아기 엄마가 찬송을 부르며 달랜다. 북한에 있는 515개의 가정 예배소는 해 마다 이렇게 성탄을 맞을 것이다.  이들의 신앙을 선전에 의한 가짜라고 얘기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가난한 어부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고 사마리아 여인의 눈물을 닦아주었으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거지 나사로를 구원한 아기 예수에게 심판을 구한다면 그이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사실 높은 곳은 다 위태롭다. 보기만 해도 까마득히 솟아있는 대형교회의 십자가도, 어둠의 군주 사우론의 성(城)을 닮은 주상복합 아파트 꼭대기도, 나도 좀 살려달라고 하루에도 몇 명씩이나 오르려 한다는 한강대교의 아치도 모두 위태롭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만의 호화로운 삶을 위해 높은 곳으로 가고 어떤 이들은 가난한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아니면 더 이상 추락하지 않기 위해 높은 곳으로 간다. 나는 신이 있다면 하늘에는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구의 가장 중심부에서 더 낮은 곳을 향해 진지하게 기도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중력에 의해 삶을 보장받고 중력은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삼인. 이지상 2015-    북한 사회주의 헌법 5장 68조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 수 없다’로 규정 하고 있다. 주체적 사회주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북한의 체제에서 자본주의는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식의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 수 없다는 북한 헌법에 전면적으로 위배 된다. 자국민이면 국가 반역죄에 해당 되지만 외국인 신분이면 간첩죄가 적용된다. 북한이 소위 ‘지하교회’를 금지하고 있는 이유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8-12-06 | hrights | 조회: 1558 | 추천: 3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봄과 여름에 걸쳐 5개월간 독일 베를린에서 안식 학기를 보냈다. 5년 전에 이어 두 번째 베를린 체험이다. 베를린의 일상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가운데 하나가 전철과 버스다.  베를린 전철은 두 종류가 있다. 주로 지하를 다니는 U-Bahn과 좀 더 빨리 지상과 지하를 다니는 S-Bahn이 있다. 베를린의 전철은 매우 심플하다. 지상에서 몇 계단 내려가면 바로 기차를 탈 수 있다. 개찰구도 없고 승무원도 없다. 표를 사는 판매기와 표를 체크하는 기계가 덩그마니 서 있을 뿐인데 이 앞에 서서 표를 사거나 체크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있어도 대부분 잠시 다녀가는 관광객들로 보인다. 관광객들은 필요에 따라 1회용 티켓, 하루 티켓, 48시간 티켓 등 다양한 티켓을 사서 쓸 수 있다. 전철을 많이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기권을 사서 쓴다. 예컨대 79유로 짜리 패스를 사면 한 달 동안 전철, 버스, 트램을 횟수 상관없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일찍 다닐 일이 별로 없는 나는 오전 10시 이후에만 사용할 수 있는 패스를 샀는데 이건 59유로다. 개찰구도 없고 승무원도 없으니 얼마든지 무임승차가 가능하다. 버스의 경우에는 앞문으로 타면서 운전기사에게 표를 보여주는 게 원칙이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은 건성으로 보거나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게다가 중간문이나 뒷문으로 타는 승객들은 아예 표를 꺼내지도 않는다. 물론 이따금 검표원이 다니면서 버스나 전철 승객의 티켓을 확인하기도 한다. 티켓 없이 무임승차한 게 걸리면 당연히 적지 않은 벌금을 물어내야 한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더라도 검표원을 만날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러니 독일에도 당연히 무임승차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방식을 계속 유지하는 건 그만큼 시민들의 의식을 믿기 때문일 게다. 말하자면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규정을 지킬 것이라는 전제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가만 놔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규정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모든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비용이 적지 않게 들어간다. 만일 한국 전철을 이런 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표를 안 사서 결국 전철 사업이 망할까? 글쎄, 그럴 것 같지 않다. 아마 한동안은 조금 문제가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런 방식이 정착할 것이라 생각한다. 국가가, 혹은 시스템이 시민을 신뢰하면 시민의 의식과 행동도 그에 맞게 변하지 않을까? 국가가, 혹은 시스템이 시민을 신뢰하면 결국 시민도 국가와 그 시스템을 신뢰하게 되지 않을까? 사진 출처 - 필자  베를린에서 버스를 타다보면 몇 가지 한국과 다른 점을 발견한다. 우선 버스 모양이 다양하다. 두 칸을 연결해 엄청 긴 버스도 있고 2층 버스도 많다. 내부의 구조도 버스마다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버스에는 반드시 중간 쯤에 의자가 놓여있지 않은 꽤 널찍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처음엔 왜 이렇게 비어놓았을까 싶었는데 궁금증이 해소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 공간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 보행기를 끌고 다니는 노인,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부모들을 위해 확보된 공간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탈 때 버스 운전기사의 가장 우선적인 임무는 이 장애인을 안전하게 태우고 내리는 일이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면 우선 버스 전체가 인도 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운전기사는 출입문 안쪽 바닥에 접혀진 채로 있는 보조 판을 젖혀 인도 쪽으로 펼치고 휠체어가 버스로 올라올 수 있게 돕는다. 휠체어 탄 장애인이 안전하게 탑승한 게 확인되면 그때 다른 승객들이 탈 수 있게 앞문을 연다. 다른 승객들은 휠체어 탄 장애인이 안전하게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릴 때도 다르지 않다. 운전기사는 우선 장애인이 편하게 내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내가 목격한 모든 경우에서 버스 기사가 장애인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투덜거리거나 볼 멘 소리를 하는 승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탑승, 혹은 하차시키는 운전기사의 조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휠체어나 유모차가 접근할 수 없는 한국의 버스들이 떠올랐다. 우리 버스도 저런 식으로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장애인 승하차로 생기는 잠깐의 지체와 불편을 참지 못해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건 아마 앞의 티켓 시스템보다 실행되기 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8-11-28 | hrights | 조회: 1554 | 추천: 9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말에는 말하는 사람의 인생체험이 담겨있다. 그래서 ‘말이란 삶의 각주’라거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표현이 생겼다. 사실이 있어야 사실에 대한 해석이 나올 수 있듯이, 말에 앞서 삶이 있다. 그러므로 말의 힘은 ‘말의 강도(强度)’보다는 ‘삶의 정도(正道)’에 좌우된다. 바르게살기와 무관한 ‘세게 말하기’는 막말을 낳기 십상이다. 조리 없이 마구 말하는 사람은 원칙 없이 마구잡이로 산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까 문제는 막말이 아니라 막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후안무치한 것은 삶이지 말이 아니다.  이치에 맞는 말을 하려면, 도리에 맞게 살아온 삶이 먼저 있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도 필요하다. 삶의 경험을 말로 옮기려면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겪자마자 그것을 조리 있게 정리해서 말하기란 어렵다. 경험을 되새기는 반추(혹은 성찰)라는 사유 활동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저절로 일어나지도 않는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가 되고, 보물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생각에 공을 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사유 절차를 생략하고도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되는 대로 내뱉는 말은 보배가 아니라 막말이 되기 쉽다.  우리네 마음의 공명통을 울리거나 미혹(迷惑)을 일깨워주는 말은 옳게 살아온 삶에 기초한 성찰적 사유의 산물이다. 살아온 삶에 대한 정직하고 치열한 성찰이 뒷받침되었을 때만 심금을 울리는 말, 정신을 차리게 하는 말을 할 수 있다. <광장>과 <화두>의 작가  최인훈은 치열한 자기 성찰적 글쓰기를 통해 그런 보배로운 말을, 그것도 한국어로(!) 많이 남긴 대표적 인물이다. 운 좋게(아니 복되게) 가까이서 그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시절의 인연에 연연해서 사심을 담아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이미 “한국 근대정신사 최고의 봉우리”(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로 상찬되고 있다. 사사로운 게 있다면, ‘역사 서당’ 출신이기 때문에 최인훈을 작가보다는 역사철학자로 보려는 욕망이 문인 마을에 거하는 분들보다 크다는 것 정도다.(물론, 나는 최인훈이 “전후 최대의 작가”라는 김현과 김윤식의 평가에 동의한다.)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최인훈의 치열한 자기 성찰적 글쓰기와 관련하여 흔히 부정적 뉘앙스로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작 ‘관념적’이라는 말의 힘을 알지 못하는 소치다. 관념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지적 제스처나 오로지 작위적으로 꾸며낸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현실경험을 이모저모 깊이 생각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의식의 힘을 뜻한다. 현생인류를 지칭하는 호모사피엔스(슬기인간)라는 말의 뜻을 떠올린다면,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가장 확실한 존재증명이다.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최인훈, 「하늘의 뜻 인간의 뜻」)가 관념인 것이다.  문학 창작과 비평을 포함해서 일체의 지식과 사상은 관념의 움직임이 빚어낸 사고실험(thinking experiment)의 산물이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하가 처음 사용한 용어인 ‘사고실험’은 단순히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상황을 변화시키며 상상하고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우리는 현실에서는 중력을 없앨 수 없지만 사고 속에서는 중력을 없앨 수 있다. 이렇게 중력이 없는 상황을 가상하고 그런 상태에서 지적 실험=상상을 하는 것이 사고실험이다. 아인슈타인은 현대의 우주비행사들이 실제 우주공간에서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기 한참 전에, 바로 이런 식의 사고실험을 통해서 아주 적은 질량이라도 에너지로 변화하면 빛의 속도의 제곱을 질량에 곱한 천문학적인 값이 생긴다는 유명한 E=MC²이란 식을 만들어냈다. 그의 상대성이론이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만들어진 우주적인 과학이론이라는 우스개가 나온 것도 그것이 종이와 연필 그리고 생각이라는 재료로만 이루어지는 사고실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실험을 관념적이라고 치부하거나 폄하할 수 없다면, 최인훈의 ‘사고실험’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최인훈 스스로 “사고실험”으로 썼다는 소설 <가면고>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고실험이란 “전통적인 윤리 질서와 정치적 합리성을 현실에서 발견하지 못한 의식이 정신의 실험실에서 그것들을 탐구해 보는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삶에 요구되는 윤리적 덕목과 ‘시민으로서의 인간’의 생활에 적합한 합리적 정치제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탐구하려면, 궁리(실험)하는 과정에서 의식이 주어가 되어서 “의식을 가장 높은 효율로 조작”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의식 바깥에 있는 역사적 현실도 그것이 자연이 아닌 이상 모두 “인간 의식과의 상관물”일 수밖에 없다. 즉 외부의 현실이라는 것이 산천초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와 사회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현실”일 수밖에 없다.  사실 누구라도 자기 인생 문제를 가장 철저하게 해결하려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관념적’이 될 수밖에 없다. 최인훈의 말로 정리하자면, ‘관념적’이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도 정확하려 할 때, 인간에게만 가능한 고유한 능력인 사고를 통해, 직접 견문으로 경험하지 않은, 앞서 생존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판단을 거듭하여,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눈앞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결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응답하는 행동”이다. “인간이 자기 당대의 경험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객관적 사실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념적이다. 요컨대 관념적이란 인간이 로봇처럼 기계적 에너지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타인들이 업적까지도 자기 것으로 지닐 수 있는 의식의 힘”이다.(「⌈광장⌋의 이명준, 좌절과 고뇌의 회고」)  인간에게는 알면서 동시에 모를 수도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무엇에 관해 진지하게 공을 들여 생각하면 알 수도 있지만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생명과 평화의 길을 걷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가치에 반하는 삶을 살아온 자들이 ‘너희는 너무 관념적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이야말로 생각 없이 막 살아온 삶에서 나온 막말이라는 것은 모른다. 힘세고 배부르다고 짐승이 아닌 것은 아닌데.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8-11-21 | hrights | 조회: 2735 | 추천: 13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유인납치 범죄의 피해자들이 성도 이름도 바꾼 채 우리 사회 여기 저기 숨어 지내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2016년 4·13 총선승리를 위해 유인납치해온 북한 해외식당 12명 종업원들의 이야기다.  납치 피해 종업원들이 입국한 날,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 들어가는 모습을 동의도 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당황한 종업원들에게는 입소에 따른 형식적 절차라고 둘러댔다. 그리고는 다음날 그 사진을 통일부로 넘겨 언론에 집단탈북 선전을 하였다. 박근혜 정권의 2016년 2월 개성공단 가동 중단 등 대북제재에 따른 북 붕괴 징조로 종업원들이 한국사회를 동경하여 집단입국했다고 선전하였다.  종업원들은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TV에 자신들이 나온 것을 알고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들이 중국에서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게 유인납치 피해자로 전락한 빌미가 되었다는 자책에 사로잡혔다. 북한 해외식당에서 근무하는 종업원 13명이 집단 탈출해 7일 국내에 입국했다고 통일부가 8일 밝혔다. 2016.4.8 통일부 제공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조사관들이 북의 지도자에게 하는 반말에도 종업원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북의 여권도, 생활총화장도, 북 지도자의 뱃지도 다 가져갔다. 종업원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를 찾아 종업원들을 접견하겠다고 찾아온 민변 변호사들은 종북세력이라고 교육받았다. 민변 변호사들을 만나게 되면 종업원들의 잘못으로 북의 부모들이 다 죽게 된다는 거짓말도 그냥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언론에 노출된 종업원들을 북의 테러로부터 지켜주겠다며 성과 이름까지 바꿔 가족관계등록을 허위로 신청케 하였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성과 이름까지 다 바뀌었다.  종업원들은 흔적도 없이 숨기로 작정했다. 부모형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십 청춘의 나이에 낯선 곳에서 새 인생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보내준다는 말에 대학공부라도 해서 부모형제들을 떳떳하게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사회로 나왔다. 대학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말씨도 고쳐가며 탈북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신변보호관 이모들은 늘 곁에 있었다. 수시로 연락하고 집도 찾아오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민변 변호사들은 참으로 질겼다. 잊힐만 하면 이들의 활동으로 인해 번번이 종업원들 문제가 이슈가 되었다. 혹시나 주변에서 알아볼 것만 같았다. 대학에서 공부하랴, 알바하랴 정신없이 살며 생이별의 고통을 잊으며 지내는데 자신들의 신원이 노출될까 불안해졌다.  정권이 바뀌었다. 남북관계도 좋아졌다. 이산가족 상봉에서 부모들도 만나고 싶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자유의사로 입국했단 거짓말에 화가 났다. 종업원들에게 여권도 발급해 주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이렇게 바보처럼 마냥 숨어 지낼 수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언론에 인터뷰를 하고 민변 변호사들을 만났다.  민변 변호사들과 여권발급거부처분 소송을 준비했다. 신변보호 운운하며 여권 발급을 거부하던 국정원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여권을 발급해줬다. 유인납치 범죄를 저지르고 선거 승리를 위해 마음대로 사진을 찍어 언론에 내고 성과 이름을 바꾸도록 낸 피해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하기로 하였다. 유엔에도 종업원들 스스로 피해를 진정하기로 하였다.  지금 종업원들 중 일부가 용기를 내어 민변 변호사들과 접촉하고 있다. 같은 처지의 나머지 피해 종업원들도 용기를 낼 게 틀림없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피해자들은 철저히 방치되고 있다. 검찰은 고발한지 여섯 달이 지나도록 손을 놓고 있다. 자유의사로 입국했단 통일부의 거짓말은 전임 정권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범죄를 묵인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더더욱 유인납치 범죄 피해자인 종업원들의 입장에서 그 처지를 헤아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커져야 한다. 하지만 유인납치 범죄의 진상규명 요구에 종북몰이로 대응하는 패륜아들이 여전히 큰 소리를 치는 형국이다. 이제 여권발급 받았으니 북으로 알아서 가면 되지 않느냐며 문제해결이라도 된 듯이 떠든다. 여기 계속 남아 생활하고 있으니 잔류의사를 보인 것 아니냐는 식의 목소리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인권을 옹호하며 피해자를 지원하는 이들을 종북몰이 하는 사회는 지구상에 이곳이 유일하다. 분단의 비극이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지금도 종업원들의 신변을 보호하며 진상조사를 가로막고 있다.  이곳에 끌려와 고통 받는 종업원들을 대변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부모의 심정으로 피해자들을 믿어주고 껴안아주는 피해자 지킴이가 많아질 때 우리는 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8-11-09 | hrights | 조회: 2970 | 추천: 64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얼마 전 티브이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한 사기꾼의 수법을 보며 인간의 생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여러 교회를 동시에 다니며 명함을 뿌렸고, 성경 공부를 하자고 접근했다. 일단 개인적인 만남이 이뤄지면 고민을 들어주고 자기 일처럼 아파했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낚이는 대목은 함께 기도하며 울어주는 순간이었다. 부모자식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데 생판 남인 사람이 나의 내면을 이해해주고 같이 울어주니 감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신뢰를 확보한 사기꾼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무조건 복종을 강요했다. 돈을 요구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기꾼은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돈으로 해외여행을 다니며 잘 살았다고 한다. 마침내 맞아죽은 피해자-학교 선생님이었다-가 생기고 나서야 그 마각이 세상에 드러났다.  피해자들은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그 중엔 사기꾼의 학교 동창도 있었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던 그는 같이 울어주던 친구의 노예가 되었다. 돈을 갖다 바치고 사기꾼의 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했다. 친구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떠나지 못한 이유에 대해 그는 ‘그래도 이 친구만이 내 편이다, 이 친구를 따라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기가 막힌 사기담인데, 비결은 단순하다. 외로운 사람 곁에 함께 있어주기(연대)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질수록 더 외로워지는 현상은 현대 자본주의가 가져온 질병 같은 것이다. 가족과 공동체는 파편화하고 모든 사회적 관계는 돈으로 환산된다. 사실 나는 외로움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슬기롭게 즐길 수 있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만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줄 누군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자주 만나는 사이라면 더욱 좋다. 인간은 좋은 공동체-가족이나 친구, 지역사회, 동창회, 동호회, 교회 등 각종 모임-에 속해 있을 때 외로움을 덜 느낀다. 무릇 좋은 사회라면 사람들이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쟁을 완화하고 공동체와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영국 정부가 지난 1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정책이 성공하기 어려울 거라는 전망이 많다. 그동안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사회적 연대를 깨는 데 주력해 온 집권 보수당의 정책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최근 보수당은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외로움 담당 장관 트레이시 크라우치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외로움 담당 장관직을 신설한) 보수당이 집권한 2010년 이후 수백 개의 공공도서관과 아동복지센터들(Sure Start Centers)이 문을 닫았다”고 지적했다. 외로움을 달래줄 커뮤니티(공동체)를 파괴해 놓고 외로움 담당 장관을 임명하면 뭐하나, 라는 힐난으로 나는 읽었다. 경제발전과 기업실적 향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우파적 세계관은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소외 현상’을 불러 올 수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면, 소유에 집착할수록 존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 출처 - KBS  ‘외로움 정책’을 처음 제안했던 사람은 노동당 소속 의원 조 콕스다. 그는 2016년 6월 브렉시트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 직전  “브리튼 퍼스트”를 외친 한 외로운 극우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브렉시트 선거 과정에서 극우파들이 난민과 유럽연합에 관한 각종 가짜뉴스를 양산하며 혐오를 증폭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의 죽음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살인자는 조 콕스를 “유럽연합의 부역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최근 미국의 피츠버그 유대교 회당 대량 학살도 외로운 백인 극우파의 소행이었다.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반트럼프 인사들에게 사제 폭발물을 보낸 범인도 경제적으로 파산한 채 승합차(밴)에서 홀로 지내던 트럼프 지지자였다. 대통령 선거 이후 꾸준히 혐오와 편견을 부추겼던 트럼프 효과가 뒤늦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난민과 자유무역이 사라지면 이들은 부유해질 수 있을까. 사회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올해도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뒹구는 플라타너스 이파리를 보며, 문득, 외로움의 이념적 뿌리에 대해 생각했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8-10-31 | hrights | 조회: 1545 | 추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