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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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 지난 칼럼에서 강사법 시행과 관련된 대학의 졸렬한 수작을 지적하며 급한 대로 교수들이 급여를 조금만 깎아 부족한 예산을 메워보자고 제안한 바 있다. 국외에 있어 자세한 대학 사정은 모른다. 전주대학교 교수회에는 교수의 연봉 삭감을 비롯한 대학의 포용 정책을 공론화하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전주대학교는 정말 일 년에 10억 원이 없어서 강사들을 내쳐야만 하는 대학입니까?”로 시작한 글은, “우리 민족에게는 ‘좀도리’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습니다. 급여에서 5만원, 혹은 10만원이 덜하더라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고 여기실 수 있다면, 우리 전임교수들이 ‘좀도리’ 운동을 벌이는 것은 어떨까요?”라고 제안하고,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되어 안정된 환경에서 강의에 전심을 기울여줄 강사들과 함께 전주대학교의 교육을 우리나라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립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미래에 대한 준비가 될 것”이라고 끝맺었다. 글의 분량과 내용은 더 깊고 많다. 1.  사람이든 세상이든 바뀌는 형식에는 배움(교육)과 혁명(또는 그 짝인 반동)이 있는 듯하다. 당연히 두 형식이 배타적이지는 않다. 교육과 혁명이라는 두 가지 형식이 구현되는 방법에는 다시 크게 네 가지 트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변하는 것이다. 거룩한 일이지만 드물게 나타난다.  둘째,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어 방향을 잡는 경우이다. 현명한 처사이다.  셋째, 의견을 달리하는 개인(집단)이 고집을 부리면서 버티다가 제3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여전히 갈등은 남는다.  넷째, 입장이 다른 상대를 제거해 버린다. 피를 본다.  대개 배움은 네 가지 트랙에서 앞쪽을, 혁명은 뒤쪽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트랙은 현실에서 뒤섞여 나타난다. 1.  나는 2017년 2월 11일을 토요일 광화문을 기억한다. 날씨가 유래 없이 추우리라는 예보에 집회 참가자가 줄어들지 모른다는 걱정에 우리라도 가야한다고 아내와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매서운 바람이 귀를 때리던 그 추운 날씨에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심전심, 다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 날짜만 기억나는 것은 내가 중국 여행으로 얻은 동상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동상에 걸린 나에게는 추위가 남다른 공포로 다가온다. 장갑으로도 안 되어, 유자차를 사서 그 온기로 손을 녹였으나 이 역시 잠시 뿐이었다. 동상 걸린 손은 추위에 노출되면 기분 나쁘게 얼얼하고 아프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이렇게 촛불의 역사는 내 몸에 기록되었다. 1.  그 무렵 나는 빅토르 위고에 빠져있었다. 《레미제라블》(민음사, 정기수 옮김)을 읽으면서 빠리의 하수구와 워터루 전투를 근 150쪽에 걸쳐서 묘사했던 위고의 고증을 비롯한 구성, 이야기에 흥분하였다. 나는 “살아생전에 이 책을 읽은 게 다행”이라며 《레미제라블》의 전도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입이 마르게 추천하였고 친구들과 세미나를 했다.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은 빅토르 위고의 《93년》(열린책들, 이경식 옮김)을 선물로 주었다. 영화 "레미제라블" 사진 출처 - 씨네21 1.  프랑스 시민들이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체제의 목을 쳤다면, 이 땅의 시민들은 촛불로 박근혜-체제를 권좌에서 쫓아냈다. 그런 까닭에 세계사에 유례없는 평화혁명으로 언급된다. 프랑스혁명과 촛불혁명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후세에 촛불혁명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다. 촛불혁명이 진행 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만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후일 남북의 평화가 정착되어 적대적 체제를 공존, 공영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면 촛불대혁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프랑스혁명에 비길 수 없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뀐 말 그대로 ‘대혁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촛불혁명이 위대한 경험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나는 그 평화로움이 석연치 않았다. 나는 시민이 절대군주의 목을 친 프랑스혁명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조선이 망할 때도 백성의 힘으로 임금 목을 칠 기회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겼고, 4·19혁명 때도 못했다. 독재 말기에 부하의 손에 죽은 박정희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광주시민을 학살했던 전두환은 잠시 가두었다가 풀어주지 않았는가? 1.  다행히 내 석연치 않음은 두 가지 점에서 무의미하다. 첫째, 혁명의 과정이나 결과는 기획되지 않는다. 혁명은 그 사회의 구조나 조건, 숱한 인간들의 욕망, 그것이 빚어내는 우연이 맞부딪힌 결과이다. 그러므로 프랑스혁명, 4.19, 10.26, 촛불혁명을 놓고 아쉬워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  둘째, 혁명이 가지고 있는 격렬성과 그에 따른 희생에 대한 역사의 기억을 반추할 때 아무려면 평화로운 것이 천 번 백 번 바람직하다. 혁명은 닥터 지바고를 만들고, 반동은 아이들에게도 총을 겨누는 법이다. 유모차 위로 최루탄이 터지지 못하는 광화문이 얼마나 다행이었는가. 평화는 그 자체로 선(善)이다. 1.  “그러게요! 그래도 한 때 임금이었던 사람이잖아요!”  제주에서 있었던 ‘광해군(光海君)’을 주제로 한 토론 때 사회자가 한 말이었다. 민생과 나라재정을 파탄 내다가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20여 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누군가가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어 사람들이 그가 광해군인지도 몰랐다.”라고 하자, 그에 대한 반응이었다. 사회자는 좀 생각이 있다고 알려진 배우였기에, 그의 말은 참 의외였다. 한 때 임금이었으니 어쩌라는 말인가?  내가 그 사회자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되었다. 지난 4월 강화에 있는 소규모 극장에서 아내와 함께 ‘마리 앙뜨와네트’(1938년 작)를 보았다.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자라 프랑스로 시집와서 살던 귀하고 고운 여자. 이 여자가 혁명으로 갇히어 폭력적인 군중에게 위협당하고, 탈출하려다 잡혔을 때, 내 마음 속에 안쓰러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역시 할리우드 영화는 교활하다. 2시간 만에 나를 세뇌시키다니. 아니지, 내가 2시간 만에 넘어가다니! 1.  역사적 조건을 빼고 촛불과 단두대의 의의를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아직 혁명이 끝나지 않았을 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내놓는 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또 나는 그걸 논할 능력도 시간도 없다. 다만 2년 전 겨울에 느꼈던 찝찝함을 명료하게 해주었던 다음 대화를 함께 상기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5백 년 전, 전국시대 제나라 선왕과 맹자(孟子)의 대화이다.  제나라 선왕 : “탕왕(湯王)이 걸왕(桀王)을 내쫓고, 주나라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토벌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신하가 군주를 시해해도 됩니까?”  맹자 : “사람들을 모질 게 만드는 것을 적(賊)이라 하고, 사회의 의로움을 해치는 것을 잔(殘)이라 합니다. 무자비한 도적은 임금이 아니라 무뢰배 하나일 뿐입니다. 나는 무뢰배인 주(紂) 하나를 베었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1789년부터 1792년까지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밖으로 탈출하려다 잡혀서 단두대로 간 것이다.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 누군가가 취해야 할 현명한 처신은, 탈출을 기도하지 않아야 단두대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받을 건 받고 가야 역사가 평온하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연변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9-05-02 | hrights | 조회: 1527 | 추천: 7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른바 ‘김정은 대자보’라는 걸 찾아 읽었다. 김정은 위원장 명의로 <남조선 학생들에게 보내는 서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패러디물인데, 남북대화를 비롯한 현 정부의 각종 정책을 조롱하고 비트는 내용이다. 북한식 어투와 서체를 이용한 형식은 참신하다 할 수 있으나 문학적 재능이 부족하고 사실 왜곡이 많아,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으로선 실패한 패러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은 대자보’와 함께 쌍으로 나붙은 <남조선의 체제를 전복하자>는 ‘전대협’ 명의 대자보는 더 한심한 수준이다.(전대협 앞에 ‘구국의 강철 대오’라는 수식어까지 80년대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과장과 억지로 가득찬 조악한 선동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이 조악한 대자보에서 한국 사회 20대 남성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예를 들어 김정은 위원장이 교시했다는 <3대 전술 강령>의 세 번째 항목을 보자. “20대 남성들을 모조리 탄압하고 그들의 모든 권리를 빼앗아라. (…) 외국인 노동자와 경쟁을 시키고, (…) 이들이 취업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빼앗아 공무원 시험의 낭인이 되게 만들라.” 가혹한 취업 경쟁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남성 역차별을 언급하는 대목도 있다. “그들을 성범죄자로 만들고, 사회적으로 거세하라. 언론, 뉴스, 미디어, 드라마, 예능, 문학, 교육 모든 수단을 통해 이들을 추악한 성욕의 괴물로 만들고 더욱 억압하고 옥죄어 세대 자체를 말살시켜라. (…) 기성세대가 여성의 편을 들게 하여 이들을 수평, 수직 구조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라.” 문재인 정부가 여성 편을 들며 20대 남성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들을 논리적으로 제압할 역사적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다.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 낭인이 된 이유는 재벌 위주의 압축 성장 이후 부의 재분배에 실패하면서 일부 재벌과 국가직 말고는 양질의 일자리를 찾아 보기 어렵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부의 재분배 시도를 줄기차게 좌절시키고 재벌의 이익을 옹호한 자들은 ‘김정은 대자보’를 지지하며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바로 그 세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세력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과, 검찰 개혁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는 공수처 설립에 대해 지금 이 순간에도 나홀로 몽니와 땡강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말할 수 있다. ‘전대협’, 당신들은 이용당하고 있다고.  사진 출처 - 전대협 페이스북  젠더 문제는 또 어떤가. 이들이 군복무 가산점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면 오히려 생산적인 논의를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아 아쉽다. 대자보가 언급한 것처럼 성범죄를 처벌한다고 해서 20대 남성이 “추악한 성욕의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성세대가 여성 편을 든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수백 년 이어온 가부장제 사회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정하려는 노력이 일부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 사회의 변화가 워낙 급격해서 성차 문제에 대해 50대 이상 기성세대와 20대가 느끼는 현실이 거의 정반대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게 함정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조차 가지 못하고 결혼 이후에도 온갖 불평등과 불이익에 시달렸던 50대 이상 여성들과, 지금 20대 여성의 현실은 다르다. 가만히 있어도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었던 50대 이상 남성들과, 웬만해서는 여성을 따라잡기 어려운 20대 남성의 현실 또한 많이 다르다. 젠더 문제에 대한 20대와 기성세대의 인식 차이는 세대 차에 따른 현실의 극적인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 터놓고 대화하지 않는 한 20대 남성은 현재처럼 삐딱한 노선을 계속 강화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평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1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조선왕조 500년의 변화보다 지난 5년의 변화가 더 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년이 아니라 ‘한 달이면 강산이 변한다’로 바꿔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이 계산법을 적용하면, 현재의 20대와 50대인 86세대의 차이는 30년이 아니라 300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기성세대는 300살 어린 후세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사실 우리가 안고 있는 모순의 대부분이 압축성장과 급격한 사회 변화에 기인한다.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인구 축소와 국가 소멸을 걱정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유례 없는 세대 갈등과 젠더 갈등의 원인이 압축 성장에 따른 급격한 사회 변화에 있다는 견해에 동의한다면 갈등 해소의 실마리가 보일 수 있다. 각자 다른 경험과 처지를 이해하면서 서로 존중하며 대화로 풀어야 한다. 비난하는 태도로 접근하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특히 20대를 대하는 기성세대의 자세는 신중하고 어른스러워야 한다. 이들의 처지에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와 배경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숙의하고 실천해야 한다. 86세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던 김기춘세대-독재(향수)세대-의 실수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설훈, 홍익표 등 일부 민주당 중진 의원들의 20대 비하 발언은 어른으로서 부적절할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도 기본이 안 된 대응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20대는 지난 정권 때 10대로서 촛불을 들었고,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로 우리를 감동하게 했던 바로 그들 아닌가. 민주당 의원들의 이런 태도는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는 환호하고, 불리하면 비난하는 감탄고토의 전형이다. ‘오만과 편견’이 하늘을 찌르는 더불어민주당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무엇보다 ‘20대 남성’ 문제 이전에 ‘20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20대 사이에 유행했던 자조적인 표현인 ‘삼포세대’ ‘헬조선’으로 대변되는 사회경제적 불만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지나친 입시 및 취업 경쟁과 과도한 주거비용, 저임금 및 장시간 노동, 결혼 비용 및 육아 부담 같은 것들 말이다. 20대 여성의 현 정부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미투 운동 등으로 표출된 젠더 문제를 해결할 최초의 기회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지 기존 사회경제적 불만이 해소됐기 때문이 아니다. 이에 더해 남성이라면 군복무에 따른 기회비용을 사회적으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상대적 박탈감, 전세금을 비롯한 결혼 비용 마련의 어려움 등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시장에서는 같은 나이대 여성들이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적대감이 날로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가부장제의 마지막 세대였던 아버지를 통해 학습한, 결혼하면 가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모순적 상황이 20대 남성을 반여성 전선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 아닐까.  요컨대 20대 남성 문제의 해결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척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화석처럼 굳어버린 재벌 위주의 독점을 허물고, 사회 전반적으로 경쟁을 줄여 좀 더 느슨하게 살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게 자유한국당 때문이라고 핑계 대지 말자. 민주당은 태스크포스(TF)까지 만들어 기업들의 상속세 줄여줄 방안을 마련하느라 바쁘다. 박근혜 정부 때 20대 사이에 유행했던 용어를 하나 더 인용하면, ‘금수저’들의 특권 강화에 여당이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서민을 말하지만 민주당 역시 기득권 체제의 기둥임을 고백하는 행위다. 사정이 이럴진대 20대가 어떻게 현 정부와 여당을 지지할 수 있겠나.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도가 낮은 현상을 ‘보수화’로 규정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젠더 문제에 관한 한 보수화가 맞다고 볼 수 있지만, 앞서 말한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를 고려한다면 20대 남성이 현 정부와 여당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20대 남성의 경우 무당파가 압도적으로 많다.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대변할 세력을 찾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 등 낡은 도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누가 이들의 아우성에 응답할 것인가. 한국 정치의 미래가 이곳에 있다.  PS. 뻔 한 소리라고 생각해 건너뛰려다 사족을 붙인다. ‘김정은 대자보’의 저열함보다도 나를 더 실망시킨 건 한국 사회의 저열한 반응이었다. 특히 경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운운하며 가택 침입까지 불사하는 구태의연한 대응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보안법 적용이 무리하다고 판단했는지 나중에 옥외광고물 관리법 위반 혐의로 적용 법률을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정권이 바뀌어도 경찰의 유전자는 그대로라는 사실을 역설하는 장면이었다. 국회에 폭탄을 설치한 것도 아니고, 만우절에 장난처럼 벌인 퍼포먼스에 대한 경찰이 나서는 건 청와대에 대한 과잉 충성이거나 담당자들의 승진 욕심 말고는 달리 이유를 찾기 어렵다.  나도 대자보를 붙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전국 450개 대학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서초구 대법원 등에 일제히 붙인 걸 보면 일시에 전국적 동원이 가능한 조직인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지적인 호기심이고, 그걸 해소하는 건 저널리즘 영역이다. 수사기관이 나설 일이 아니다.  일부 야당 의원과 우파 매체들의 반응도 예상대로 천편일률적이다. 표현의 자유 탄압에 앞장섰던 불과 몇 년 전 과거를 잊은 채 환호작약하는 일부 정치인과 매체들의 후안무치함에 화가 난다. 경찰의 과잉 대응이 표현의 자유 탄압이라는 주장에 충분히 동의하지만, 당신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신들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려면 ‘미네르바’ 박대성씨와 ‘쥐그림 포스터’의 박정수씨, ‘근혜공주’의 작가 이하씨와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기자, 그리고 홍가혜씨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부터 하기 바란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9-04-24 | hrights | 조회: 1679 | 추천: 5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갱년기가 온 것일까요?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툭하면 마음이 울컥하는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그걸 알고 나서 콧등이 찡해질 때마다 참아보려 애쓰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눈물이 많아지면 눈물이 점점 싱거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 일요일, 세느 강에서  “오랜만에 세느 강변에나 나가볼까?”  지난 일요일, 아내가 지금 한창인 벚꽃 구경을 하러 가자고 재촉했습니다. 저희는 집 근처에 흐르는 작은 하천을 그냥 싱거운 우스갯소리로 ‘세느 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느 강’을 경계로 한쪽은 제가 살고 있는 oo구(區), 다른 한쪽은 ㅁㅁ구로 행정구역이 나뉩니다.  비록 도시 변두리의 그만그만한 하천이지만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가 있어 휴일이면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듭니다.   4월 중순, 세느 강에 나가 보니 벚꽃은 그야말로 만발입니다. 아내는 넋이 나간 듯 눈부신 꽃송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꽃들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다가 울컥! 갑자기 콧등이 찡해졌습니다. 부랴부랴 아내가 알아차릴까 봐 가슴을 꾹 눌러 겨우 눈물을 참고 있는데, 아내가 불만스럽게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oo구청장 이 사람, 안 되겠네.”  꽃구경에 취해 있던 아내의 뜬금없는 소리에 눈물이 쏙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아내의 태세 전환에 깜짝 놀라 묻자, 아내는 우리가 서 있던 개천 건너편, oo구의 천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가만 보니 우리가 서 있는 ㅁㅁ구 쪽의 천변에만 꽃이 만발입니다. 겨울에는 잘 몰랐었지만 이렇게 꽃이 피고 나니 oo구에서 관리하는 천변과 ㅁㅁ구에 속한 천변의 풍경이 확연히 다릅니다. 꽃나무가 잘 관리된 ㅁㅁ구는 제가 살고 있는 oo구보다 산책로며 운동기구며 주변 환경이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다리를 이쪽저쪽으로 건너다니며 실컷 벚꽃 구경을 하던 아내는 어느새 oo구 주민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래도 간만의 꽃구경이 좋았는지 얼굴에는 오랜 동안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야 말로 찬란한 봄입니다, 눈부신 계절입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정말 갱년기 때문일까,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빠졌습니다. 꽃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저를 아내가 봤다면 한마디 했을 것 같습니다.  “주책바가지!” 사진 출처 - 경향신문 #2. 화요일, 파리바게뜨 근처 술집에서  개인적인 볼일 때문에 약속된 술자리에 뒤늦게 합류했습니다. 벌써 세 친구들의 얼굴이 불쾌하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술자리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술자리에서는 가급적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것이 친구들의 묵시적인 금기였습니다. 박근혜 탄핵 이후, 어떤 정치적인 뉴스가 나올 때마다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서 “다신 보지 말자”는 말로 헤어지는 일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아홉시 반 정도 지난 시간, 그런데 벌써 준한 사태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다른 두 친구는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등을 돌린 친구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친구가 뒤늦게 자리에 앉은 저를 보고 어떻게 하냐는 듯이 쓴 웃음을 지으며 제게 말했습니다.  “쟤들 세월호 때문에 한바탕했다.”  4월 16일, 예상했던 바였습니다. 등을 돌리고 있다가 한 친구가 일어섰습니다. 조그만 음식점을 하는 친구였습니다.  “미안하다, 나 먼저 간다.”  말릴 새도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을 친구가 일어서 나갈 때 다른 친구가 소리쳤습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먼저 너, 다시는 안 봐!”  술자리는 금세 누가 먼저 입을 떼기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소 긴 침묵이 이어졌다고 생각되는 때에 ‘다시는 안 보겠다’는 말을 했던 친구가 저를 보며 말을 꺼냈습니다.  “야, 저 새끼가 어쩌다 저런 놈이 되었냐? 너도 차명진이 같은 새끼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그 말을 하고 있는 친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당황하며 말을 받았습니다.  “정치 얘기 안 하기로 했었잖아, 근데 오늘 작정하고 나온 것처럼 왜 그랬어?”  그러자 눈물을 참고 있던 친구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습니다.  “너도 똑같이 답답한 놈이다. 내가 정치 얘기 했냐? 세월호 얘기 했지.”  술자리는 어찌어찌 끝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안 보겠다던 두 친구는 또 다시 보게 되겠지요.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저였습니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일까요, 친구가 말했던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서였을까요? 그날 집에 가는 길에 눈물이 났던 것은 아마 며칠 전 보았던 그 눈부신 꽃들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정말 ‘주책바가지’가 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9-04-19 | hrights | 조회: 1536 | 추천: 5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작년에 ‘선을 넘어 생각한다’라는 책을 내고 나서 몇 차례 강연요청을 받았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까 고민하다가 프레젠테이션 첫머리에 집어넣은게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였다. 만원권 지폐 뒷면에 실리면서 유명해진 이 14세기 조선 초기 별자리 지도를 우리가 흔히 아는 서양식 별자리 지도와 비교해보자. 한국 사람들은 북쪽 하늘에 있는 국자 모양을 한 별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선을 그은 뒤 ‘북두칠성’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유럽 사람이라면 큰곰자리를 구성하는 꼬리와 등뼈 부분으로서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얘기하면 선 같은건 없다.  우리는 밤하늘을 보면서 북두칠성이니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하는 별자리를 생각하며 별과 별 사이에 선을 잇는다. 하지만 우리가 별자리를 기준으로 별을 인식하는 건 별자리를 잇는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북두칠성이니 큰곰자리니 하며 연결하는 선이란 그저 우리가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에 따라 혹은 외우기 쉽도록 상상력을 동원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28수,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같은 별자리를 만들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일단 별자리를 그리고 나면 그 별자리가 우리 인식을 규정해 버린다.  우리는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한다. 별과 별자리 지도의 관계를 현실과 프레임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프레임이란 한 번 자리 잡으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이 심어놓은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길 원하신다’는 생각의 씨앗이 자라고 자라서 아버지가 물려준 거대기업을 제 손으로 해체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런 이치다. 선과 선을 잇고 특정한 틀 안에 공간을 인식하게 만드는 ‘지도(地圖)’야말로 그런 효과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지도에 매혹 당했다. 메르카토르 지도의 크기 왜곡 문제를 없앤 피터스 도법 세계 지도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지도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틀’  주변에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를 대략 유럽만한 크기를 가진, 북아메리카보다는 훨씬 작은 대륙으로 인식한다. 여기에는 ‘메르카토르 도법’이라는 방식으로 만든 지도가 워낙 널리 퍼진 게 큰 영향을 미쳤다. 1569년 네덜란드 사림인 게르하르두스 메르카토르가 발명했다는 이 지도는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실제보다 훨씬 더 커보이게 하는 정치적 효과까지 덤으로 거둔다.  그럼 독일사람 아르노 피터스가 만들었다는 피터스 지도는 어떤가. 세계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표시한다는 이 지도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기괴하기까지 할 정도로 낯설다. 이 지도를 통해서야 우리는 아프리카가 미국과 중국, 인도는 물론 동유럽과 영국, 프랑스, 독일을 모두 우겨넣은 것보다도 더 큰 땅덩어리라는 걸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지도 하나 바꿨을 뿐인데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틀까지 바꿔버릴 수 있다. 지도를 통해 세상을 더 지혜롭게 인식하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틀을 깨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대목이 있다.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지도가 있는데도 우리는 왜 계속해서 메르카토르 지도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할까. 짐작하건데, 메르카토르 지도가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의 틀에 훨씬 더 잘 부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익숙한 걸 편하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불편한 진실’이란 말은 틀렸다. 진실이란 원래 불편한 게 아닐까. 점심시간마다 서울시내에 울려 퍼지는 ‘박원순 시장 아들 병역기피 의혹 수사 촉구’ 집회와 ‘트럼프 대통령님, 피로써 지킨 대한민국을 지켜주세요’ 현수막을 보면서 틀을 깨고, 선을 넘어 생각해보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노릇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9-04-03 | hrights | 조회: 1536 | 추천: 6
- 안보딜렘마에서 안보다원주의로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안보를 내세우며 북한과의 대화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이 많다. 대북 대화나 교류 기사에 대해 인터넷을 도배하다시피 험악한 반대 발언들을 쏟아내는 이들은 무슨 일말의 논리라도 있는 것일까. 두루 살펴보면 북한을 그저 전복시키든지 압박해 죽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폭력적 심성 외에는 없어 보인다. 힘으로 정복하라는 파괴적 정서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자기 가족에게도 그런 태도를 적용할까. 이웃이나 친지에게도 그런 태도로 일관할까. 글이 다소 길어지더라도 안보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힘에 의한 평화와 안보딜렘마  사전적으로 안보는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당연히 안보는 국방, 국제정치, 외교의 주요 과제이다. 신약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힘센 사람이 무장하고 자기 궁전을 지키는 동안 그의 소유는 평화 안에 있습니다.”(누가복음 11:21) 이천년 전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평화’를 더 큰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큰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상태는 ‘안보’(安保, security)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힘센 사람이 무장하고 지키는 자신의 소유물’처럼, 안보란 어떤 힘에 의해 무언가가 지켜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안보라는 개념 자체가 무언가 막아야 하는 외부의 힘 혹은 폭력적 상황을 전제한다.  문제는 저마다 힘을 이용해 다른 힘을 막으려는 데서 발생한다. 안보는 힘으로 나를 지키는 행위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저마다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다보니, 힘들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한다. 갈등을 해소하겠다며 다시 더 큰 힘을 추구한다. 역시 저마다 그렇게 한다. 저마다 힘을 키운다. 힘을 키우기 위한 투자가 지속된다. 그럴수록 실질적인 삶의 질은 뒷전으로 밀리고, 안보가 ‘편안히(安) 보전됨(保)’이기는커녕 불안(不安)의 계기가 된다. 서로가 힘을 키우면서 불안은 여전히 지속되거나 더 커진다. 안보에 대한 투자가 안보불안을 키우는 안보의 역설, 안보딜렘마가 지속되는 것이다. 안보라는 동상이몽, 안보들의 충돌  안보딜렘마는 왜 발생하는가. 나의 안보만 안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안보, 우리의 안보가 있다면, 남의 안보, 너희의 안보도 있다. 한 걸음 물러선 곳에는 그들의 안보도 있다. 안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안보도 사실상 복수이다. 하나의 안보(Security)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안보들(securities)이 있다. 그런데 자신의 안보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안보와 충돌하는 것이다. 서로 충돌하는 안보들 사이의 자세, 안보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성경이 전하는 이천년 전의 상황처럼, 그것은 나의 소유를 지키고 키우려 하면서도, 남이 나의 소유를 뺏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무장하고 나의 소유를 지킨다는 말은 누군가 나의 소유를 탐낸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데 나의 소유를 탐낸다고 여겨지는 상대방도 내가 자신의 소유물을 탐낸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이자 적으로 여기는 상황, 마치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비슷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안보가 충돌하고 안보가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안보만을 기준으로 남의 안보를 나의 경쟁 상대이거나 마치 적처럼 생각하는 데서 벌어지는 일이다. 영어식 표현을 빌리면, 현실에서 대문자 단수 안보(Security)는 사실상 없다. 서로 대립하는 소문자 복수 안보들(securities)이 있을 뿐이다. 좋든 싫든, 여러 안보들 간 인정, 수용, 조화를 통해 우산과 같은 상위의 안보를 계속 추구해나가야 한다. 나 혹은 우리만이 아닌, 모두가 안전해져가는 과정에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힘에 의한 안보는 기본적으로 힘들의 대립을 낳는다. 힘들의 균형, 대화를 통한 안보들(securities) 간의 타협의 과정을 통해 대문자 안보(Security)로 나아가는, 즉 안보다원주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한반도 안보트릴렘마  물론 현실에서는 서로 안보라는 동상이몽에 빠져있다. 안보는 늘 딜렘마에 처해있다. 북한대학원대학 구갑우 교수는 한반도의 경우는 ‘트릴렘마’의 상황 속에 있다고도 말한다. 구체적으로 구 교수는 ① ‘한반도 비핵화’, ② ‘한반도 평화체제’, ③ ‘한미동맹의 지속’, 이 세 가지는 한국정부가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정책목표, 즉 트릴렘마라고 분석 및 정리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이 세 정책 목표를 추구해야 하지만,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이라는, 그래서 한국 정부는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사실상 해결하기 힘든 난제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 가지 표제들의 충돌, 즉 트릴렘마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가령 ①한반도 비핵화와 ③한미동맹을 같이 지속하려면 북한에 대한 강압정책 또는 전쟁을 통한 북한붕괴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니, ②한반도평화체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②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 ③한미동맹을 동시에 지속하려면 북한이 핵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①한반도 비핵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①한반도 비핵화와 ②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루려면 ③한미동맹의 형태나 수준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남한의 친미주의자나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미국 주류의 입장 때문에 그것도 어렵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정부가 나서서 한미동맹의 방행과 강도를 수정했는데도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국내정치적 파국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형세에 대한 적절한 분석이며, 형식논리상으로도 그럴 듯하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트릴렘마의 돌파구  그러나 현실은 형식논리 안에 갇히지 않는다. 현실적 난제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렘마들’의 출구로 이끄는 지점도 있다. 안보가 안보에 대해 불안의 근원이 되는 현실을 인식하고, 안보의 다양성을 인정할 때 출구도 보인다. 그러려면 무엇이 최종 목적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안보딜렘마의 상황이나 수준이 다르다는 사실과 트릴렘마 중에서도 우선 선택지가 보인다.  셋 가운데 최종 목적은 당연히 평화, 즉 한반도평화체제이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가장 원하는 이는 한반도 구성원이다. 특히 한반도의 평화를 가장 아쉬워하는 곳은 남한이다. 가장 원하는 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물론 북한도 평화를 원한다. 한반도 통일을 바라는 이가 북한은 95% 이상, 남한은 국민의 절반 수준이라는 점만 보면, 북한이 평화를 더 원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70년 이상 행해온 독자적 정책의 원심력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구미세계의 압박이 강해 평화를 향한 공식적 모멘텀을 찾기가 남한만큼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남한 정부가, 근본적으로는 다수 국민이 먼저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남북 평화의 길과 목적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북한의 실상과 현실을 일단 인정하는 것이다.  이 때 한반도 평화의 추구가 세계의 다양한 평화 ‘목소리들(voices)’과 대립한다면 역시 한반도 평화가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같은 소모적 논리에 빠진다. 인류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한반도 평화여야 한다. 세계의 다양한 평화 목소리들을 일단 인정한다는 목소리를 세계에 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이 무언가 양보하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세계의 인정을 받는다. 이것이 가장 가능한 돌파구이다.  한반도 비핵화(사실상 북한의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핵심 과제이자 주요 과정이다. 한미동맹도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한반도 평화라는 최종 목적을 위한 주요 수단이다. 한미동맹 자체가 한반도와 인류의 평화보다 궁극적일 수는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한미동맹 체제도 결국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남한 정부도 이것을 알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으로 하여금 북미대화에 더 적극적이도록 자극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뉴욕타임즈에 전면 광고하라  하지만 바로 여기가 사태를 풀어나가기가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세상은 한국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미국대로 미국 중심적이며, 미국의 대북관도 다양해서 한국 정부의 목소리에 동일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존 볼턴(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처럼 극우에 가까운 대북강경파가 있고, 마이크 폼페이오(국무부장관) 같은 그 다음 우파가 있다. 미국 민주당 역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지를 흐려놓고 미국 내 트럼프의 입지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큰 대북 대화를 못미더워 한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일방적 정책으로 미국 내 정치적 입지가 대단히 취약해진 트럼프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좌우협공으로 맥을 못 춘다. 미국 내 대북 대화가 시작은 되었으나 늘 좁은 문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아베 정권도 자신의 정권과 일본의 재무장을 위해 늘 대북 강경파의 자리에 선다. 미국과의 경제전쟁에서 흔들려 경제에 손상을 입히고 체면을 구긴 중국 시진핑은 한반도 문제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 물론 중국 역시 한반도에 봄이 오는 것을 내심 좋아할 리도 없지만...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를 열어줄 첫 열쇠는 남쪽의 정부에 있을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좁게는 김정은을 다시 만나야 한다. 만나야 할 명분과 실리도 북한에 다시 주어야 한다. 좀 더 길게는 미국을 다시 움직여야 한다. 트럼프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를 설득해야 한다.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유력 언론에 세계의 평화를 위한 감동적 전면광고를 해야 한다. 여러 차례 해서라도 미국 시민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북한을 통해서도 미국에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인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미국 전체에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광고비는 제법 들겠지만, 그것이 유엔연설보다 효과가 몇 배 클 것이다. 기업이 광고비를 쓰는 이유는 결국 광고비를 상회하는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 아닌가. 손을 내미는 쪽이 진짜로 강한 쪽이다. 진짜 강한 쪽  세 가지 렘마들 간 힘의 균형은 더 힘이 큰 쪽에서 한 발 물러서거나 문을 여는 데서만 이루어진다. 그런데 힘이 있는 쪽에서는 손을 먼저 내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차선은 가장 필요로 하는 쪽에서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이 때 상대방이 물리치지 않을 정도로, 오판하지 않을 정도로 손을 내미는 외교적 지혜가 필요하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나, 문재인 정부가 평창올림픽 기간 중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연기하자고 미군에 정책적으로 먼저 제안했던 것은 적절한 예이다. 물론 평화마저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는, 본성에 가까운 습관 탓에 힘 있는 자가 힘을 일부라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남한의 극우 보수 및 대북 강경파들이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심리도 자기중심성에 기반해 당장의 이익과 안정만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남한 내에서조차 이른바 남남 갈등을 해소하는 과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평화와 안보는 지난하고 장기적인 과정적 과제이다. 평화는 술어다  나는 언젠가 평화는 주어가 아니라 술어라고 정리한 바 있다(『평화와 평화들』). 가령 “평화는 전쟁이나 일체의 폭력이 없는 상태”라면, 평화라는 주어는 전쟁, 폭력, 없음 등의 술어에 의해서만 지시된다. “평화는 정의의 구현”이라고 한다 해도 정의 역시 질서와 같은 또 다른 언어를 가지고 와야 해명되기 시작한다. 모든 주어는 술어를 통해서만 지시되는 세계이다. 이것은 모든 주어의 운명이고 한계이다. 어떤 개념이든 그 개념을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그 개념 아닌 다른 개념을 가지고와야 하는 것이다. 인식의 지평 자체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어는 문장의 주체가 아니라 술어에 종속적이다. 주어에 해당하는 영어 subject가 ‘종속적’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도 이러한 논리적 경험의 소산이다. 마찬가지로 평화든 안보든 자신의 입장을 술어의 자리에 둘 때에만 평화가 되고 안보가 된다. 자신의 입장을 주어 혹은 유일한 목적과 동일시하는 순간 주어도 사라진다. 술어의 자리에 둔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여러 가지 기능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인정하는 것이다.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듯이, 그럴 때에만 딜렘마 혹은 트릴렘마가 해소되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평화가 술어라는 말은 평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입장들을 일단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인정하는 쪽이 주어로서의 평화에 먼저 다가선다. 이미 남북 간에도 힘의 균형이 동일하지는 않은 마당에, 더 큰 힘의 소유자가 먼저 대화와 만남의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 먼저 손을 내밀려면 대화와 나눔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평화적인 길이라는 사실을 힘의 소유자 자신이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내면에까지 변화를 주는 일은 사실상 정치적 협상이나 힘에 의한 밀어붙이기보다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의 길은 자기 자신을 술어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인문적 겸손함에 대한 지속적 교육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9-03-27 | hrights | 조회: 1348 | 추천: 13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평화는 밥을 공평히 나누는 일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대륙에 밥이 있다고 믿는다. 당연히 대륙에 평화가 있다. 지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평화를 찾아 가는 일이야 말로 새로운 미래에 대한 도전이다. “대륙의 꿈은 북한을 넘어서지 않으면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말을 신뢰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 양 체제의 반목으로 인한 대립, 즉 분단에서 기인한 각종 불완전 요소가 상재하는 상태에서 대륙과의 소통은 궁극적 평화의 길에 이를 수 없다.  북한은 금단의 땅. 비밀의 전진 기지였다. 70년을 미국과 전쟁했으니 사회 기반 시설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자동차 한 대, 고기 잡는 어선 한 척의 숫자까지 군사력이고 곧 군사 비밀이었다. 그들이 공식 매체를 통해 발표하는 사항이 아니면 도대체 알 수 없는 제국이었고 더 궁금한 사항들은 행간을 통해 짐작할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의 비밀은 평가에 있어서 양극화되기 마련이다. 지극히 신비화 되거나 철저하게 악마화 된다. 마치 천국과 지옥처럼.  80년대 중 후반, 일부 학생 운동권 세력에 의해 북한이 신비화 된 적은 있으나 그 세력들은 거의 감옥에 갔고 철저한 악마화는 남한 사회에서도 일반적인 일이었다.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남과 북 정상이 실질적인 한반도 종전 선언을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우리가 사는 민주주의의 골간이기 때문이다.  두만강 철교가 훤히 보이는 언덕에 올라갔다. 건너편 나진 선봉이 훤히 내다보이는 러시아 국경 하산(Хасан)에서였다. 딱히 국경이라고 느끼기에 너무도 허술한 경계선에 놀랐다. 각진 삶을 사는 이들에게 경계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경계를 조금이라도 허락하는 순간 목숨이 달아나는 듯 한 공포에 젖어든다.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남과 북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지뢰를 묻어놓고도, 빛나는 청춘들에게 살인 무기를 들려놓고도 당연하게 살았다. 그러나 두만강 국경엔 설치한지 4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철조망은 녹이 슬었고 초소가 있으나 총을 든 병사는 없었다. 바람을 거슬러 날개 짓 하는 한 무리의 새떼들은 대륙으로 향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칡꽃 몽우리는 향내 없이도 강 건너 아이들의 놀이터로 달려갔다. 하산역으로 굉음을 울리며 들어오는 화물 열차를 보았다. 기관차의 방향이 북쪽이니 북한의 나진 선봉을 지나 두만강 철교를 건너온 것이 틀림없다. 속도는 약 시속20km를 넘지 않는 듯 보였다. 기차의 칸 수를 일흔셋 까지 세다가 숫자를 잃어버렸다. 그 뒤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기차의 꽁무니에 걸터앉아 나도 평화가 되어 대륙의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사진 출처 - 평화방송  좋던 싫던 친해져야만 한다는 게 실감났다. 무기를 더 쌓아야 평화가 온다는 이 땅의 신념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너무 간단했다. 서로 바라보고 얘기하고 웃고 손잡아야 평화였다. 내가 본 그 국경의 평화는 조, 러 양국이 눈 붉히고 싸울 일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평화의 시대, 대륙의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은 서로 친해지기 위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상례다.  굶어 죽는 사람이 넘쳐 망한다.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 때문에 망한다 했지만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북한의 모습은 활기차다. 평양의 거리는 높은 건물에 휘황찬란한 조명이 번뜩이고 각 도시엔 북녘 동포의 웃음이 넉넉하다. 거기도 당연히 사람이 사는 곳이니 여타의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 비길만한 발전의 모습이 없을 리 없고 그것으로 신기해 할 필요는 없다. 다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분단 70여년 더욱이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30여년 마땅한 우방에 기대지 않고도 그 세월을 견뎌온 북한 사람들의 힘은 무엇인가. 그것을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모두들 “북한이 변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설마 북한만 자신이 원하는대로 변하고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겠다는 궂은 심보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교류와 소통은 당사자 간의 호흡을 주고받는 일이다. 더 좋은 향기를, 더 많은 웃음을 나누기 위해 쌍방 간에 노력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10만의 평양시민들에게 호소했다. 평화로 새 시대를 열어 가자고. 뜨거운 박수로 그들은 화답했다. 서로 덕담을 했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벌써 아득한 이야기로 변했지만 그날의 뜨거움은 언제나 유효하다. 제 2차 북미회담의 미합의로 인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답보는 곧 언론과 여론의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또 하나의 겨레를 맞이하기 위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평화로 가는 길이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9-03-21 | hrights | 조회: 1355 | 추천: 8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남이란 말이 있다. 한국남자의 줄임말이면서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문화와 사고’를 가진 한국의 남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인다. 이 말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당연하다. 누구든 혐오 표현에 불쾌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지난 연말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한국, 남자>라는 책을 홍보하며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라는 제목의 이메일 광고를 내보냈을 때 많은 남자들이 자신을 ‘한남’ 취급하는 데 항의하며 회원 탈퇴했던 소동이 있었다. 이 소동은 예스24 측이 사과문을 게재하는 걸로 마무리되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와 한남 담론이 얼마나 예민한 주제인지를 보여준 사건이라 할 만하다.  많은 남자들이 ‘한남’이라는 말에 불쾌감과 억울함을 토로한다. 하지만 오래 동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수많은 ‘...녀, ...년’으로 비하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왔다. 남성혐오의 언어로 한남이 등장한 건 최근이지만 지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여성혐오의 언어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져 쓰여온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 여성혐오의 주체는 물론 남성이다. 최태섭의 책 <한국, 남자>는 이른바 한남을 조롱하는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의 남성성, 남성문화가 형성되고 변화해 온 역사를 통해 지금 한국 남자들이 ‘한남’이라는 단어 앞에서 느끼는 불쾌감과 모멸감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사회학적 연구서에 가깝다. 최태섭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착취와 소외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다양한 책과 글을 써온 사회학자이자 문화비평가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잉여 사회> 등 저자가 낸 책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청년세대의 문제가 어떤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지를 청년세대 자신의 시선으로 분석한 책들로 주목받은 바 있다. <한국, 남자>는 저자 최태섭이 지금까지 천착해 온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가 처해 있는 현실, 불안과 좌절의 의미에 대한 일련의 연구 작업의 연장에 있다. 사진 출처 - yes24  이른바 남성성의 문제, 혹은 위기는 단지 한국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인구문제, 노동시장 구조의 변화 등 사회적 혹은 문화적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여주긴 하지만 지금 ‘보편 인류’였던 남성성이 크게 도전받고 있는 양상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속에서 한국의 남성성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변화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 전쟁과 군부독재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장기 불황에 이르는 동안 ‘남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 분석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남성성의 맥락에서 새롭게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젠더 갈등이 어떤 연원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남자 자신도 잘 모르고 있던 남자, 혹은 남성성에 대해 객관화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남자인 나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환기하게 된다.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젠더 갈등은 오래 동안 젠더 권력을 누려온 남성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충분히 사유하지 않으면 풀리기 어렵다. 이 책에서 그려내는 남성성의 역사를 보면 남성성의 권력 자체도 사실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 속에서 구조적으로 호출되고 이용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남성 권력은 사실 권력이 아니라 굴레이고 억압이었으며 지금 한국의 남성들이 겪고 있는 곤란함이 여성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른바 젠더 갈등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누군가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의 주체로, 또 타인과 연대하고 돌보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은 그런 사유의 한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9-03-13 | hrights | 조회: 1654 | 추천: 6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최근 한 시사프로에서 청소년의 자해에 대해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그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고단한 현실 속에 고립되어 자신의 신체를 해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소시키는 것” 이라 했다.  2018년 여름부터 학교에서 자해를 시도하는 학생들이 갑자기 일시적인 유행처럼 증가했다. 그 중 원인으로 대두되었던 것이 청소년들이 출연해 랩 실력을 겨루는 TV프로그램에서 본 한 래퍼(Rapper)의 손목 자해 흔적이다. 상흔이 래퍼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자해는 멋있다’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 행위로까지 이어지고,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어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에 인증 사진을 남기거나, 구체적인 방법이 공유돼 부추기는 현상까지 나타난 것이다. 이때 제대로 된 공감에 대한 고민이나 매뉴얼조차 갖추어 놓지 않은 상태에서 자해 청소년을 지도하는 일이 상담교사와 담임교사의 재량에 맡겨지는 현실이다 보니 학생과 교사 모두 괴로운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진 출처 - © 2018 Paediatric Foam  손목에 붕대를 감고 다니던 여고 2학년 선우(가명)도 한 달에 한 번씩 손목에 30개가 넘는 흔적을 망설임 없이 보여 주며 “이런 행동이 뭐가 문제가 되냐? 엄마와 친구들도 알고 있지만 잘 지낸다. 상관하지 말라”고 소리치곤 했다. 그런 선우의 모습에 당황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이런 행동은 자제하는 게 좋다’는 식으로 충고하며 눈감아 버렸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너무나 쉽게 나의 기준과 경험으로 했던 충고는 선우에게는 또 하나의 상처였을 것 같다.  자해하는 자녀를 둔 한 부모는 방송에서 "자해라는 건 내가 정말 죽기 위한 게 아니고 나를 봐달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다." 라고 했다. 이 부모의 말처럼 자해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힘들었던 상황에 대해 진심으로 들어주고 마음으로 느끼는 공감을 가질 때 상처를 가진 아이들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나와서 치료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는 우리에게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공감은 연고이자 치료제다.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과 훈계는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한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 시작되는 순간 소통은 불통으로 바뀌고 상대는 마음의 문을 닫고 문고리가 열리지 않도록 굳게 문을 걸어 잠근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당신이 옳다」중에서 김영미 위원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9-03-07 | hrights | 조회: 1433 | 추천: 3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거짓정보와 허위가 판치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5․18망언’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과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국가의 차원에서도 분명하게 공인된 ‘5․18민주화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날조하고, 목숨을 내놓고 민주주의를 사수한 시민들과 말할 수 없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유가족을 “괴물집단”으로 매도하는 일이 21세기 대명천지에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광주폭동’으로 날조했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신군부 세력은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여당이었던 김영삼 정부 때 내란 및 군사반란으로 단죄 받았다는 사실을. ‘5·18’의 역사적 성격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고 법정기념일로도 지정한 것도 1997년의 일이다. 지 아무개 씨가 주구장창 떠드는 ‘북한군 개입설’은 전두환 정권조차 제기하지 못했던 허위선동으로 이미 법원 판결을 통해서 근거 없음으로 판명 났다. 박근혜 정부의 국방부조차 “5·18 북한군 개입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마무리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 소속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은 “우파는 5·18 문제만 나오면 꼬리를 내린다. 힘 모아 투쟁하자”,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됐다”, “5·18 유공자는 괴물집단으로 세금을 축낸다. 명단을 공개하라”는 따위의 망언을 쏟아냈다. 망언을 한 사람과 장소를 감안하면 충격은 경악으로 변한다. 시정잡배도 아닌 국회의원이, 음습한 밀실이 아니라 신성한 민의의 전당에서, 다름 아닌 자기 나라 역사와 국민을 능멸하다니. 밥값 못하는 얼빠진 인간도 더러 있는 게 세상이라도 해도, 나랏밥 축내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국회에 있다는 건 세상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은 더욱 기괴하게 전개되었다. 명색이 당 대표와 최고위원에 출마한 사람이 국회에서 피땀으로 일궈온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능멸했음에도, 자유한국당은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짓밟는 망언을 ‘다양한 의견’으로 치부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존재할 수 있다”고 했고,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11일 해당 의원들의 징계 요구에 대해 “보수정당 안에 스펙트럼과 견해차가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그 자체가 보수정당의 생명력”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사과는 했지만 그것은 충분하지도 않고 진정성도 없어 보인다. 김병준 위원장은 스스로 당을 대표해 사과한다면서도 망언 의원들에 대한 윤리위 처리 문제를 어이없게도 원내대표에게 떠넘겼다. 한국당이 추천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 후보 3명 중 2명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을 거부한 데 대해 반발하고 나선 건 더 어처구니가 없다.  문제가 된 자유한국당 추천 진상조사위원들은 이미 추천할 때부터 극우이념 성향으로 부적격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군 출신 보수인사로, 군이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한 주요세력이란 점에서 과연 제대로 진상을 규명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한 사람은 기자 출신으로 1996년 <월간조선>의 “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와 과장”이라는 기사에서, 이미 사실로 밝혀진 계엄군의 중화기 사용, 공수부대원들의 성폭행 의혹 등에 대한 보도가 과장·왜곡됐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거 경력과 발언을 토대로 ‘5·18민주화운동’관련 단체들도 이들이 진상조사위원으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자유한국당에 재추천을 요구한 바 있다. 따라서 청와대의 임명거부와 재추천 요구는 역사의 진상을 편견 없이 공정하게 규명하자는 시민들의 열망에 부합하는 당연한 조치인 셈이다,  자유한국당이 ‘5․18망언’을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망언을 한 의원들에 대한 엄중한 단죄는 물론이고 진상조사위원의 즉각적인 교체와 같은 행동을 취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모독한 의원들에 대해 얄팍하게도 당규를 내세워 보호막을 제공했다. 잘못된 추천을 반성하기는커녕 “한국당과 국회를 무시”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런 식의 대응을 고수한다면,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석방 운운하며 탄핵 이전으로 회귀할 것을 꿈꾸는 반(反)헌정세력일 뿐만 아니라 ‘5월 광주’를 유린한 전두환 군부독재로의 퇴행을 기도하는 반(反)역사세력으로 고착되고 기억될 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내가 저들에게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라는 씁쓸함이 몰려온다. 옳고 그름은 정의가 아니라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 마음의 진정성이 아니라 형식적 제스처(gesture)가 표를 얻는 데 효과적이라는 믿음, ‘눈 가리고 아웅’식 대응으로도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경험, 혹세무민에 능수능란한 아군 언론이 있다는 현실의 세계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정의와 진실과 정공법과 정도(正道)를 말한들, 그게 먹히기나 하겠는가! 당장 그들에게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란 수학문제가 아니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 풀리면 밑지는 사람들이 방해하기도 하는, 그게 일반적인 세계다. 그럴지라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주인이기에 자기 살림이 결딴나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여 막스 플랑크(독일의 물리학자, 1858~1947)가 ⌈과학 자서전⌋에 남긴 말을 빌려 긴 호흡의 희망을 상기하고 싶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새로운 세대가 자라남으로써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9-02-20 | hrights | 조회: 1562 | 추천: 5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다가오는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민족과 민중이 걸어가야 할 미완성의 꿈이 무럭무럭 커가고 있다.  대결과 불신으로 얼룩진 한반도에 긴장완화와 평화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르익고 있다. 남북 군사합의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이 완전히 무장 해제됐고 비무장지대(DMZ) 내 전방 감시초소(GP)에 대해서도 동시에 시범철수를 했다. 한강하구 공동이용수역에 대한 남북공동수로조사 결과를 반영해 만든 해도가 북측에 전달됐다. 작년 말 남북은 도로·철도 연결 착공식을 열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긍정적 전망이 밝아지고 있다.  세기적 숙적인 북미 간의 분위기에 세기적 대전환이 일고 있다. ‘투자의 귀재’라는 미국 투자가 짐 로저스의 올 3월 북한 방문 가능성이 보도되고 있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획기적 진전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짐 로저스는 대북투자 낙관론을 가진 미국의 투자가로서 “대북 투자 대박론”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가 모은 전 재산을 북한에 투자하고 싶다”고 최근에 발언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윗에서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의 지도력 아래 위대한 경제 강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보안법 찬양·고무죄에 해당하는 발언이다.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종전선언을 넘어 평화협정으로 가는 합의안이 도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근 한미연합사령관은 평화협정 체결 후에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상식적 발언이고 우리 민족, 민중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프로세스의 최종 단계에 해당한다. 2월 13일 오전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2019년 금강산 새해맞이 연대모임' 참석자들의 해맞이 행사가 열린 해금강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바야흐로 한반도의 주인공인 남과 북의 우리 민족, 민중이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꿈이 현실로 무르익어 가는 때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다. 여전히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오해와 불신의 늪이 있다. 또한 적대와 대결이 난무하는 낡은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세력이 망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북한이 경제 강국이 되고, 군사분계선 일대가 말 그대로 비무장화되고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전쟁이 사라지며 남북을 잇는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북한의 경제가 발전하고 한반도에서 외국군대가 철수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남과 북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혹시 뿌리 깊은 적대와 불신에 사로잡혀 한반도를 달구는 새로운 변화에 체질적 거부감을 갖고 적화통일의 악몽에 잠 못 이루는 국가보안법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동족에 대한 최대한의 제재와 압박이라는 당치 않은 경제제재가 사라지고 외국군대가 철수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우리는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남북공영발전의 시대를 맞이하고 자주적 평화통일로 비약적 경제부흥으로 도약하는 통일국가를 달성할 것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꿈은 결코 되돌릴 수 없고 실질적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반드시 실현해 내야 할 당면의 과제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9-02-14 | hrights | 조회: 1681 | 추천: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