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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갚은 까치?(정범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3-06 10:42
조회
801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예전에 비해 시간 여유가 많은 생활을 하다 보니 옛날 일들을 종종 생각하게 된다.
아마 1994년 5월초 즈음이었으니 벌써 30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2년여 몸담고 있던 어느 대기업 산하 연구소를 나와 정처 없는 프리랜서의 길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지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각오도 다질 겸 며칠 시간을 내어 동해안을 찾았었다. 돌아오는 길은 설악산 미시령을 넘는 길을 택했는데, 지금은 미시령 밑으로 터널이 뚫렸지만 그 때는 편도 1차선, 왕복 2차선의 좁고 구불구불한 구간을 넘어야 했다.

돌아오는 날은 마침 주말, 토요일이었다. 서울로 가는 차선은 텅텅 비었지만 속초 쪽으로 들어오는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개 중턱쯤 이르렀을 때 거의 서 있다시피 하는 반대 차선에서 차 한 대가 갑자기 삐져 나왔다. 피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내 차와 정면 충돌했다. 내 차가 한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멈추었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내가 오르막 차선이어서 속도를 내지 못했고, 상대 차도 정체구간에서 튀어나온 것이라서 충돌 강도가 약했다는 것인데 어쨌든 내 차는 엔진룸이 완전히 망가졌다.



상대방 차에서는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나왔다. 추월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중앙선을 넘어 와 낸, 이해불가한 사고였지만 막상 사고를 낸 당사자는 멀뚱멀뚱 서 있을 뿐, 뭘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모르는 듯 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한 사과도, 사고처리를 위한 대책도 없이 그냥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에서 부인인 듯한 여인이 내렸다. 그 여인은 나를 붙잡고 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친구 부부와 넷이 주말 동해안에 놀러오는 길이다. 이 차는 친구에게 빌려 온 차다. 자기네들에게는 보험이 없다. 그러니 경찰은 부르지 말고 해결하자. 차 수리비는 지불하겠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대포차"에 걸린 셈이었다.
사고로 차량통행이 완전히 막히고, 양 방향에서 울려대는 경적 소리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 사정을 살펴보았다. 먼저 그 여인의 처지가 딱해보였다. 남편은 그야말로 대책이 없는 사람같이 보였다. 특별한 직업도 없는 것 같고 부인의 노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놀러 온답시고, 그것도 남의 차를 빌려 나섰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안되었다. 보험도 없으면서. 거기다가 말도 안되는 중앙선 침범까지 하고. 정말 아무 대책 없이 사는 사람 같아 보였다. 문제는 그 부인이었다. 부인이 거의 사색이 되어 경찰을 부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해결하셨을지 묻고 싶다. 나는 그 부인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보여 그녀의 요청대로 하기로 했다. 그녀가 대책 없는 남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을까 하는 오지랖 넓은 걱정까지 보태서 말이다. 그래서 내 차는 다시 속초 시내로 견인되어 가고 정비소에 수리를 맡긴 후 나는 고속버스 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수리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버스 편으로 속초에 가서 차를 찾아왔다. 정비소에 지불한 수리비는 그 부인에게 나중에 돌려 받았다. 그러나 차를 찾으러 다시 속초를 오가며 지불한 시간이나 비용은 그냥 내가 부담하였다. 그런데 정비소에서 에어컨 수리비용을 누락했다고 10여만원 정도를 추가로 요구해 왔다. 돈을 부쳐 주고 나서 그 부인에게 이야기하니 부쳐 주겠다고 하고는 끝내 종무소식이었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쯤에서 그 일은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돈이 거짓말하는 거지 사람이 거짓말 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반전은 6년 후에 일어났다. 그 일은 새카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2000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루 종일 선거운동을 하다가 사무실로 들어오니 운동원들이 계란 파티를 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삶은 훈제달걀이 널려 있고 사무실 안은 그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여성분이 계란을 몇 십 판 싣고 와서 주고 갔다고 했다. 열성지지자께서 그런 후원을 했나 싶어 바쁜 유세 와중에 계란상자에 적혀 있는 주소로 찾아갔다. 훈제달걀을 취급하는 도매상 같은 곳이었다. 주인을 찾아 인사룰 하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알고 보니 6년전 미시령 고개 위에서의 그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사이 일산에 들어와 계란 사업을 시작했었고, 어느 날 길을 지나다 선거벽보에 붙어있는 내 사진을 보고는 사무실을 수소문하여 찾아왔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잠시 스치듯 지나쳐 봤을 사람인데도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 여인 역시 미시령에서의 일이 가슴에 오래토록 부담으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 모두 참 희한한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일에 감개무량해 하였던 기억이 난다.


이 일은 두고두고 나에게도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원론적 질문에서부터, 손해 보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까지.


어쨌든 그 만남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 보다는 훨씬 훈훈한 만남이었다.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까지 떠올렸다면 그건 너무 오버하는 것일테고.


지혜로운 어른들께 들은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이날 이때껏 살아오는 동안 나 모르게 내 목숨 구해주고 도와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바람의 딸’ 한비야가 해남 땅끝마을에서 DMZ까지 도보여행을 하다가 충북 괴산 어느 산골에서 만났던 할머니 이야기다. 6.25때 후퇴하는 어린 인민군 병사를 숨겨주고 치료해 보내줬다는 할머니에게 한비야가 물었다. “그러다가 걸리면 바로 총살인데 무섭지 않았어요?” 이 질문에 대한 할머니의 대답이 바로 위의 말이다. 나 모르는 새에 내 목숨 구해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올해로 창립 9주년을 맞는 장발장은행 사업이 성황(?)이다. 지난 2015년 2월 25일,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가는 현대판 장발장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설립된 장발장은행은 그동안 1만 5194명의 후원자들로부터 16억 가까운 성금을 모아 1300여명의 장발장들에게 22억 6천여만원을 대출해 줬다. 벌금을 못내 감옥에 가야 했을 사람들 중 1300명을 구했다는 말이다. 모금액보다 대출액이 더 많은 것은 그사이 대출을 갚은 장발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출을 받은 사람 가운데는 대출 신청자에서 후원자가 된 경우들도 있다. 장발장은행이 성황을 이루는 것은 비극이다 장발장은행은 하루빨리 은행문을 닫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특히 윤석열 정권 들어 벌금을 내지 못해 몸으로 때우는 노역장 환형유치는 2021년 2만 2천명에서 2023년 11월 기준 4만 1800명 까지, 불과 2년새에 두 배 가까이 폭증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장발장은행에 대출을 신청해 온 우리 시대 장발장들의 사연은 눈물겹다. 200여년 전 배고픔에 빵 한 조각을 훔쳐 범죄자의 나락으로 떨어진, 소설 속 장발장 이야기가, ‘눈떠보니 선진국’이라던 202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한 논픽션의 현실이다.


후원자들의 사연도 하나하나가 감동적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넘어 그들의 연대하는 정신이 감동이다. 그들이야 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더불어 숲’을 만들어가는 이들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내미는 연대와 선행의 몸짓은 내가 모르게 받았던 어느 누군가의 도움과 선행에 대한 답장일 것이다.


정범구 위원은 전 독일대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