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갈라 묵고 살아야제” -이 세상이 지탱되는 이유- (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2-07 10:05
조회
239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적금도 갯바닥에서 돌아오는 길, 박동심(78) 어매가 그 집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발길을 멈춘다. 마치 내 집처럼 들어서서 주인을 부를 것도 없이 마당가에 놓인 바구리에 반지락을 가만 덜어낸다. 그 기척에 방문이 열린다.


“오매, 함씨야! 그 고생을 하고 나헌티 갈라주러 왔소?”


“오매, 함씨야! 배고파겄소.”


“오매, 함씨야! 안 추왔소.”


함씨야를 연발하는 남춘임(71) 어매의 말속엔 고마움과 안쓰러움이 실린다.


“어짜쓰까. 허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헌 함씨가 하리내(하루종일) 이걸 파갖고 날 갖다주네.”


“많애 많애, 이것도 많애”라고 덜어내는 손과, “아녀 아녀”라며 한 주먹이라도 더 보태주려 안달하는 손이 반지락 바구니 위에서 부딪친다.


“내가 짝대기 짚고 걸어댕긴께 갯것(갯벌 일)을 못해. 나이 조까 덜 묵어서는 그래도 팠어. 3년 전까지는 팠는디 인자 못가. 꿀땡이가 쪼빗쪼빗 질어갖고 있어.(굴이 뾰족뽀족 길어) 자빠져서 손 짚어불깨비(짚어버릴까봐) 못가.”


“요 사람은 바닥에 못 가. 그런께 주제. 나 혼차 묵으문 안 넘어가. 사람은 갈라 묵고 살아야제. 우리 친정 어무니도 그러코 살았어. 그런께 나도 보고 절로 배우고.”


“오매오매 이 함씨야. 바람도 찬디 언능 가서 푹 눕소. 잘 묵을라요.”


전라도닷컴 2023년 5월호



위 내용은 구독 중인 《전라도닷컴》 2023년 5월호에 실린 내용이다. 두 할머니가 사는 적금도는 여수 아래 남해 바다에 있는 섬이다. 유명한 여자만 초입에 있다. 다 알겠지만 여자만은 ‘Lady only’가 아니라 ‘여자만(汝自灣)’이라는 해역을 말한다.


적금도는 이제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니 섬이 아니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사람이 다리 놓는다고 섬이 섬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적금도 오른편이 여수시인데, 돌산도 아래 금오도가 있다. 


앞서 소개한 함씨들, 그러니까 할매, 할머니들이 나누는 대화에 나오는 반지락은 바지라기, 바지락이라 해서 칼국수나 봉골레 파스타에 넣어먹는 그 조개를 말한다. 거의 국민조개가 아닐까 싶다. 반지락, 빤지락이라고 현지에서 부른다. 반지락은 2~4월이 제철이라고 한다. 지금이 2월, 위 함씨들 인터뷰를 딴 것이 바로 4월 17일이었다. 곧 지금이 한창 제철이라는 것이다. 남춘임 할머니가 거동이 쉽지 않아 반지락을 캐지 못하나보다. 박동심 할머니는 캐오던 반지락을 남 할머니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이다.



반지락 조개와 반지락탕


2011년, 당시 이명박 정부의 농림수산식품부는 어촌 지역주민에게만 허용된 맨손 어업에 대기업도 진출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갯벌 양식 어업을 육성하겠다는 게 이유였다. 그동안 어촌 지역민이 해왔던 바지락 채취 등을 대기업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농림수산식품부는 2013년 농림축산식품부로 바뀌었고, 수산 부문은 해양수산부로 이관되었다.


이 법령은 의원입법으로 추진되었지만, 농림수산식품부가 발주한 연구보고서에 기초하고 있었다. 어업 전문가들은 기업의 골목상권 장악에 빗대며 갯벌 민영화로 어촌도 어장도 망가질 거라고 우려했다. 그동안 금지됐던 어업회사 법인에 임대차를 허용하고 지역 주민이 참여한 기업에는 지분참여율을 최대 90%까지 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기업의 진입장벽 완화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갯벌 개발 법령 폐기


농촌이나 어촌에 고령화로 심화되고 있고, 어업 인력난 역시 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갯벌 사유화의 방향이어야 할까? 지역주민의 맨손 어업 중심이었던 어촌이 소수의 법인 기업에 의해 독점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공유수면이라는 공공자산, 공유지의 사유화를 의미한다.


정부는 자율관리 어업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는 어자원 남획, 과잉시설 설치, 경쟁조업을 막지 못한 정부가 어민 스스로 공동체적 규제를 통해 어업자원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민간기업 투자 계획을 발표했으니 결국 정부 자체가 정책 혼선을 초래한 셈이었다.


적금도 갯벌 굴따기


헌데 이 법령과 사안을 살펴보던 중에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수 적금도 어민들은 이미 지난 1960년대 민간회사와 마을어장 관리 위탁 계약을 맺었다가 낭패를 당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임대료를 받고 민간회사에 어업권을 양도한 적이 있었다. 근데 위탁관리업체는 임차료 회수와 수익창출을 위해 남획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어장 훼손으로 이어져 주민들은 10년간의 법정 소송을 거쳐 2006년에야 다시 어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다 2011년 다시 이명박 정부에 의한 갯벌 사유화가 추진된 것이다. 국회의원 임기 만료로 이 법은 폐지되었지만, 아마 이 소식을 접안 여수, 남해 어민들은 악몽이 떠올랐을 것이다.


지금은 2022년 제정되어 2023년 시행된 ‘갯벌 및 그 주변지역의 지속가능한 관리와 복원에 관한 법률(약칭 갯벌법)’으로 갯벌의 관리, 복원, 생물다양성 유지를 위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막 봄이 오기 시작하는 2월이면, 적금도 가까이 있는 금오도가 참 좋아서 몇 번 비렁길(해안절벽길)을 다녀온 적이 있다. 올해는 적금도에 가서 두 함씨 댁을 가보려고 했는데 못 갈 듯하다. 다만 두 함씨의 지난해 인터뷰를 통해서 이 땅을, 이 사회를 지탱하는 작지만 단단한 ‘서로 돕는 삶’을 기억한다. 함씨들, 오래 사십시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