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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시민의회’를 실험해 보자.(장은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3-31 15:45
조회
831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지방선거가 얼마 안 남았다. 언론과 정치권의 관심은 온통 서울, 부산, 대구같이 지금 국민의힘이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 과연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쏠려 있다. 확실히 지역 사회의 정권교체는 정말 중요한 과제다. 서울, 부산은 물론이고 한 번도 민주당이 정권을 차지해 본 적이 없는 대구에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할 수 있다면, 민주화 이후 고착된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 정치 구도가 크게 흔들리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여론 흐름만 보면, 선거 결과가 좋을 것 같아 기대가 크다.
그러나 그동안의 지역 정치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최선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과연 우리 지역 사회의 현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지에 대해 쉽게 낙관하지 못한다. 우리 지역 정치가 중앙의 적대적 양당제에 일방적으로 지배되고 있어서다. 지역 차원의 정권교체가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이 중앙 정치 차원을 넘어 정말 우리 지역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낼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민주당조차 수도권 중심 정당이 된 지 오래인데, 호남을 넘어 영남 지역에서도 민주당이 정치적 주류가 된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지역민들의 삶이 얼마나 많이 개선될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정당정치의 의미를 폄훼하거나 민주당의 정치적 역량을 회의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는 우리 정치의 본원적 ‘수도권 중심주의’가 심지어 지방선거에서도 압도적으로 관철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지금의 선거 중심의 양당제에서는, 설사 얼마간 지역주의 구도가 완화된다고 하더라도, 중앙 정치에 의한 지역의 내부 식민화는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어 보인다는 게 문제다. 지역 차원의 정치에서는 실제로 지역 사회에 사는 지역 주민들의 실질적 주권이 제대로 실현되도록 하는 게 정말 중요해 보이는데, 지금과 같은 제도적 틀 안에서는 본원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물론 시민주권의 실현은 중앙 정치에서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지금 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스스로 현안들에 대한 답을 찾을 기회를 가지는 건 사활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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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지방 정치에서는 무슨 직접민주주의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정당정치와 대의정치를 존중하되, 그래서 지역주의 정치가 극복되어야 하는 건 너무도 마땅하지만, 지역 사회 차원에서는 더 절실하게 시민들이 더 깊고 체계적으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게 요점이다. 여기 우리가 참조할 만한 좋은 사례가 있다. 바로 동벨기에(Ostbelgien) 지역의 ‘영구 시민 대화’ 제도다. 이 지역은 인구 7만7천 명 정도의 독일어권 사용 인구 지역인데, 2019년부터 상설 ‘시민의회’를 도입하여 지역 사회의 다양한 지역 사회 현안들을 두고 시민들의 숙의를 끌어내고 이를 지역 의회가 수용하여 정책화하는 실험을 해 왔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단순히 직접민주주의의 강화가 아니라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생산적 거버넌스를 체계적으로 제도화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의 상설대화 제도는 다음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 시민평의회(Citizens’ Council): 추첨으로 선발된 24명으로 구성된 상설기구로, 매년 1~3개의 시민의회 주제·범위·구성을 결정하고 전체 과정을 감독한다.
- 시민의회(Citizens’ Assemblies): 주제별로 25~50명을 연령별, 계층별, 성별 균형을 맞추어 무작위로 추출해 숙의와 권고안을 작성하는 일시적 기구로, 합의 또는 4/5 다수로 권고를 채택한다.
- 상설 사무처(Permanent Secretary): 의회사무국 소속 공무원으로, 추첨·예산·행정·홍보·후속 모니터링 등 실무 전반을 담당한다.
이 시민 대화 실험은 말하자면 새로운 방식의 민관협동 모델을 추구한다. 시민의회에서 도출된 권고안은 관련 상임위원회에 제출되고, 세 번의 연속된 ‘공동위원회’ 절차를 거친다. 1차로 시민 대표단이 권고를 발표하고, 의원·담당 장관·전체 시민참가자가 공개 토론을 진행한다. 그 후 의원·장관이 각 권고에 대해 수용 여부와 이행 방식, 미이행 시 구체적인 거부 이유를 포함한 의견서를 작성한다. 이 의견서는 시민참가자와 함께 2차로 공개적으로 검토·토론된다. 1년 후 마지막 3차 회의를 통해 모든 사안을 점검한다. 법적으로는 의회·정부가 시민 권고를 반드시 채택할 의무는 없지만, 공식화·상설화된 공개 절차와 명시적 “거부 사유 설명 의무”가 정치적 압력을 만들어 사실상 상당한 실질적 이행을 유도한다.
이 동벨기에 시민의회 모델은 단발성·자문적 시민참여가 민주주의 위기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진단에서 출발해, 상설·제도화된 시민 숙의를 대안으로 추구한다. 이 실험에서는 무엇보다도 시민의회의 권고안에 대해 공개적·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거부 사유 설명 의무”를 둠으로써, 대의제 민주주의 체계 안에 제도화된 “제2의 숙의 채널”을 구축한 점이 새롭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시민의회 실험은 단발적으로 계속 시도됐으나 주로 중앙 정치 차원에서 기후 위기 같은 비교적 정치적으로 덜 민감한 의제들 중심이었다. 동벨기에는 그런 시민의회 실험이 정말 필요하고 또 가장 잘 안착할 기회가 다름 아닌 지역 사회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실험을 한국의 지역 사회에서 해 볼 수는 없을까? 추첨을 기반으로 세대별, 계층별, 성별 등에 따라 통계적으로 가장 근사하게 시민들의 구성 양상을 반영하는(여론 조사 표본처럼 선발된) 대표자들이 깊이 있는 숙의를 통해 지역 정치의 현안들에 대해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게 하는 제도를 정착시킨다면? 광역시도 수준에서는 물론이고 기초지자체 수준에서(또는 읍면동 수준도 좋다) 이런 식으로 상설화된 시민의회가 여러 현안에 대해 시민들의 숙고를 담은 권고안을 만들어 선거로 선출된 의회나 단체장이 이를 어떤 식으로든 수용하게끔 하는 식의 제도적 틀이 마련된다면? 만약 이런 ‘지역 시민의회’가 일상화된다면, 여전히 지역주의라는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나라 많은 지역의 정치적 삶은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실험은 아래로부터 제기되는 압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체장들이나 지방 의회가 앞장서 나서고 수용할 때 더 확실하게 성공이 보장될 수 있다. 정당들, 특히 집권 가능성이 큰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이번 선거를 통해 지역 정치도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일 것임을 약속하는 차원에서 지역 시민의회 상설화라는 혁신적 실험을 공약으로 내걸고 과감히 시도해 볼 것을 제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