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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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내 기억의 지도, 소사삼거리-1970년대 전후-(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5-12-15 14:16
조회
166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부천의 한 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부천 시간 여행자’라는 프로그램에 동행하였다. 부천의 옛이야기를 오늘의 장소에서 함께 걷고 기록하며 ‘기억 지도’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오래된 공장은 아파트가 되고 논밭은 도로가 되고 수많은 개천은 지하로 숨었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시간이 덮어쓴 자리. 그 흔적을 따라 걷고 기록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살아온 곳, 우리가 살아가는 곳의 이야기를, 시간을 거슬러 기억하고, 도시의 오늘을 읽는 ‘시간 여행’은 미래를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개발로 변화된 도시에서 그 변화가 밀어낸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은, 미래의 개발은 기억을 품고 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주었다. 시간에 맞물려 종묘 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래 이야기는 그때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1970년대 경인국도변 복숭아 노점(출처:부천시청 홈페이지)


 

들어가는 말

이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데서 출발하였다. 소사삼거리는 어린 시절 내 삶의 터전이기도 하고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청소년, 청년, 중년의 시절을 거쳐왔지만, 기억은 유독 유년 시절에 머물러 있다. 시간은 사람에게 관용을 주는지라 추억을 누리는 것은 달콤한데, 기억의 오류에 따른 서술은 이해를 바랄 뿐이다.

 

솜틀집 자리

경인국도 정지용 동상이 있는 자리, 그곳이 1970년대 내가 살던 거리다. 이 차선 경인국도가 길게 길게 뻗어 있고, 도로와 집들을 사이에 두고 도랑이 흘렀다. 아마도 개울이었던 곳을 토관으로 정비했을 터이다.

우리 집 왼쪽으로는 목사님 가족이 살았다. 목사님네 부엌 쪽문이 우리 집 마당으로 연결되어 오가며 인사하곤 하였다. 왼쪽으로는 솜틀집이었는데, 건넌방 뒷문으로 도랑이 흐르고 그 너머로 솜틀집이 있었다.

솜틀집 할머니는 인상이 무서웠다. 목소리도 컸다. 점잖은 할아버지 대신 사람들을 상대할 일이 많아 극성스러웠다. 목청을 높이는 일도 많았으나 대개는 경위가 바른 할머니 말에 수긍했는지 더 큰소리로 이어지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할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먼 일가한테서 수양아들을 들였고 그 손주들이 방학이면 할머니네 오곤 하였다. 세련되고 예쁜 서울내기 아이들은 우리 형제들과 어울려 놀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솜틀집 할머니네 안방까지 휘젓고 다녔다. 무서운 인상의 호랑이 할머니가 “이것 많이 먹으면 코피 흘린다”라며 원기소 한 알씩 손바닥에 올려주며 웃으시던 기억도 있다.

70년대 후반 엄마와 아버지가 동네 어르신들과 시청을 드나드는 일이 잦았다. 이 차선 경인국도를 넓히기 위해 개발한다고 하면서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 이주해야 했다. 보상 문제는 지난하게 이어졌고, 한 집 두 집 이주하면서 우리도 10년 가까이 살던 동네를 떠났다. 솜틀집도 완전히 문을 닫았다. 사실 솜틀집은 그 몇 해 전부터 연로하신 두 분이 일하기에는 힘에 부쳐, 서서히 일이 끊겨 문을 닫은 상태였다. 70년대 후반 마을은 문을 닫았고 이웃은 각자의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났다.

솜틀에서 달칵달칵 솜이 틀어지는 소리, 솜을 튼 묵은 이불이 새털처럼 가벼워져 포근하게 덮고 잤던 기억이 아련하다.

 

정미소(방앗간) 자리

현재 소사삼거리 00팰리스 자리가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정미소(방앗간) 자리였다. 검게 칠한 커다란 나무문이 기억난다. 정미소 앞 너른 마당은 해가 넘어가면 어른들의 사랑방이었고. 저녁을 먹고 밤마실 나오는 아버지 뒤를 쫄랑쫄랑 따라 나온 아이들한테는 놀이터였다. 어른들이 막걸릿잔을 기울이는 동안 아이들은 너른 마당을 뛰어다니며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였다. 그 너른 마당엔 가시철망을 쳐놓아 구역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친구와 술래잡기한다고 숨으러 가다가 철조망에 찢긴 상처를 가슴에 남기기도 하였다.

 

800년 느티나무

아이의 눈에 느티나무는 거대하기만 하였다. 지금은 800년된 보호수가 되었는데, 뿌리 뻗을 곳 없이 주변으로 들어선 건물을 피해 엉성하게 가지를 친 느티나무는 경이로워 보이기보다는 애처롭기만 하다.

어릴 때 단옷날이면 느티나무에는 그네가 매어졌다. 학교에 있는, 잡으면 손에서 쇳내 나는 짧은 그네가 아니었다. 저 높은 나뭇가지에 동아줄로 길게 내려 맨 그네는 그 위엄이 당당했다. 누가 누가 높이 올라가나, 한번 구르고 두 번 구르고 차츰차츰 길 저 위로 나아가는 모습은 아이의 눈에는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어디에서나 있는 전설 한 조각은 그네 타고 높이높이 오르던 처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 아마도 아이들한테 접근을 허하지 않으려는 토막 난 이야기가 아닐까?! 아이들은 흙먼지 풀풀 날리는 행길(한길)에서 놀다 지치면 나무 앞에 퍼져 앉거나 오르내리면서 놀았다.

기억으로는 느티나무는 오른쪽 뒤쪽 마당에 한 그루 더 있었다. 무슨 까닭인지 마당에 있던 나무를 베었고 집주인은 그곳을 떠났다. 일이 잘 안 풀렸다고 했다.

 

우시장 자리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 길을 가다 보면 “음메에~”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밀짚모자를 쓴 사람들, 웅성거림, 소의 목에 걸린 방울 소리, 줄을 손에 쥔 사람들, 그 냄새, 그 소리, 활기찬 사람들의 움직임이 시간 속으로 멀어져간다.

가끔 신작로 길을 뛰어다니는 우리를 보고 맘씨 좋은 아저씨가 우마차를 태워주던 기억이 난다. 우마차 뒤에 앉아 두 발을 떨어뜨리고 넘어가는 해를 보며 가다 보면 ‘철퍼덕’ 소가 똥을 싸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 우리는 키득키득 웃곤 했다. “소가 똥 싼다!” 그러면서.

 

소사초등학교

나는 소사남국민학교(현 부천남초등학교)를 다니다 분교하여 새로 개교한 소사국민학교(현 소사초등학교)로 옮겼다. 3학년 때이다. 당시 부천에는 동서남북의 이름을 가진 학교가 있고 소사초등학교는 이를 통합하는 교명이라고 우쭐해하곤 했다.

소사초등학교는 복숭아밭에 지은 학교이다. 무덤을 헐어 학교를 세웠다는 전설을 가진 학교들과 달라 소풍 날에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소사삼거리에서 학교까지 가자면, 큰길을 따라 개울을 지나야 했다. 그러자면 길이 멀었다. 벌터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름길로 논틀밭틀길을 택했다. 아침잠이 많은 아이들이 택한 지혜로운 길이었다. 그렇게 논틀밭틀길을 가려고 길 아래로 내려가면 상엿집이 나왔다. 말만으로도 으스스한 초막이었지만, 우리는 으스스함을 감내하고 이 길을 택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두 손에 운동화를 모시고 맨발로 걸어갔다. 어느 길로 가든 비 오는 날은 길이 뻘밭이 되어 운동화가 엉망이 되었다.

학교 주변은 논밭이었다. 아직 복숭아밭도 남아 있었다. 학교 울타리는 나무로 이루어져 여름이면 송충이를 잡는 일도 우리 몫이었다. 학교 앞엔 개울이 있었다. 장마가 지면 아이들이 건너기에는 물살이 세어 고학년 오빠들이나 선생님이 손을 잡아주었던 기억도 있다. 날이 따듯한 봄날 우리는 소풍 가듯이 운동장 뒤편에 있는 복숭아밭에서 점심을 먹은 추억도 생각난다.

학교 가는 길에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가 있었고, 학교 담벼락 볕이 드는 양지 녘에 애장 터가 있었다. 애장 터를 뒤로 하고 소나무가 우거져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짧은 숲길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는 것은 웬만한 담력이 없으면 안 되었다. 하루는 서너 명이 그곳에서 담력 시험을 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혼자서는 못 가니 가방을 손에 꼭 쥔 채 힘껏 달렸다. 숨을 참고 달려서 빠져나온 우리는 씩씩거리면서도 한바탕 웃어젖혔다. 싱거웠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세계에 들어섰다. 처음 들어선 웃소사 길이 나왔던 것이다.

 

부원초등학교

솜틀집이 있던 자리에서 우리는 웃소사로 이주를 했다. 새로 들어선 집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골목 끝에는 개울물이 흘렀고, 집 뒤로는 복숭아밭이었다. 복숭아밭 울타리로 커다란 목련나무 다섯 그루가 서 있었다. 봄날, 한밤에 활짝 핀 목련꽃을 보노라면 신선이 따로 없었다. 보름달 아래 그 화려함과 단아함이 피어오르면 어린 마음에도 성큼 들어와서 넋을 잃고 바라보곤 하였다.

그 시절을 회상하자면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는데, 요새는 부자도 마당이 없는 집에서 산다”라는 말이 맴돈다. 우리 집 마당에서는 모과나무가 자랐고 흑장미도 피고 졌다.

골목 끝에 있던 개울은 복개되어 건물이 들어섰고, 복숭아밭은 헐리어 집들이 들어섰으며, 80년대 초중반에는 부원초등학교가 들어섰다.

 

개울

소사에는 개울이 많았다. 학교 가는 길도 개울을 따라 난 길을 걸어가야 했고 학교 앞에도 개울물이 흘렀다. 여름이면 어릴 적 우리의 놀이터는 개울이었다. 집에서 동생 보고 있으라는 엄마의 당부를 귓전으로 흘리고, 태어난 지 100일 된 막둥이를 둘러업고 물놀이 가는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아차 싶었지만 해는 기울고 터덕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엄청나게 야단을 맞았다.

허접한 그물을 들고 둑을 발로 차며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새로 산 운동화 한 짝을 개울가 깊은 웅덩이에서 잃어버려 헌 운동화를 한참 더 신고 다녀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한참을 놀고 나면 모래밭에서 물기를 털어낸 맨발로 차도를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잔돌투성이 길 대신 걷는 차도는 맨발로 걷기에 참 좋은 길이었다.

상전벽해가 이런 거려니 싶은 땅, 소사. 그 어디서도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이렇게 기억을 더듬자니 마음이 아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