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혁용(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태중(병원장),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교수), 이재승(건국대학교 법전문대학원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 글을 씁니다.
차별금지법 없이 ‘빛의 혁명’을 말할 수 없다(권혁용)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5-08-25 13:18
조회
786
권혁용/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재명 대통령은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시민은 이를 “아직 추진 의사가 없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사회적 합의는 어느 주체가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 또 그 합의는 언제 완성되었음을 인정받는가? 이렇게 모호한 말로 입법을 미루는 사이, 우리는 인권의 가장 기초적인 기준조차 갖추지 못한 사회로 남았다.
차별금지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첫째, 글로벌 기준 때문이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은 ‘평등법(The Law of Equality)’을 제정해 성별, 나이, 장애, 인종, 국적, 성적 지향, 종교, 출신 지역 등으로 인한 차별을 명시적으로 금지한다. 고용, 교육, 서비스, 주거 등 사회 전반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와 동등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법률이다. OECD 국가 중 한국과 일본만 이 법이 없다. 그나마 일본은 LGBTQ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제정한 상태다. 반면 우리나라는 2007년부터 수차례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지만, 보수 종교계의 반대와 정치권의 외면 속에 아직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2007년에 태어난 이들은 이제 성년이 되었는데, 그 시간 동안 국가는 시민들의 동등한 권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둘째, 민주당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다. ‘잘사니즘’과 실용주의가 민주당의 정체성이 될 수는 없다. 민주당의 비전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정치적 균열의 축은 수평축에서 경제 이슈(증세 vs 감세, 복지 확대 vs 축소, 정부 개입 vs 시장지상주의)로 구분된다. 이에 교차하는 수직축의 균열은 현재 한국 맥락에서는 사회문화적 균열이 적실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 표현을 보장하는 보편적 자유냐, 아니면 전통적 위계 규범(성별, 나이 등)에 기반한 가치냐의 대립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의지가 없다는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의 태도는 후자, 즉 위계적 질서 수호를 정체성으로 삼겠다는 선언일 뿐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보수 정당임을 자임하는 셈이다. 이것이 민주당의 정체성인가? 민주당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내세워 온 정당이다.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에 걸맞은 입법과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차별금지법(‘평등법’으로의 제정을 촉구한다)은 시민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기본 입법이다. 이는 최소한의 기회균등을 마련하는 일이며, 민주당의 자유, 인권, 민주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입법이 될 것이다.
셋째, ‘빛의 혁명’의 계승을 말하려면, 그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빛의 혁명’을 계승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순간에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 그중에서도 여성, 청년 등 소수자들이야말로 그 대열의 제1열에 있었다.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권리보장 조치도 없이 ‘혁명 계승’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키세스시위대를 떠올려보라.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률 제정을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으면서, 빛의 혁명 운운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제1열에서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이 지난 대통령 궐위선거에서 이재명 후보를 지지했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까.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로 비롯된 한국 민주주의의 전복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한 민주대연합을 굳건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학의 ‘당파적 경기순환론’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 초반에는 당파적 아젠다를 추진하고, 임기 후반에 다음 선거가 다가오면서 중도로 수렴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지금 이재명 정부의 행보는 정반대이다. 우상호 정무수석은 최근 “갈등 사안, 찬반이 나눠지는 사안에서 가능한 한 빠져나와서 민생, 경제, 정상회담 등 국가적 국익을 위한 행보들, 또 국민의 삶을 돌보는 일로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는 오히려 임기 말에나 어울리는 전략이다. 지금 민주당은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을 모두 갖고 있다. 지금이 민주당의 비전과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당파적 아젠다를 추진할 시기다. 입법의지와 결단만 있다면 차별금지법 제정은 가능하다. 모든 시민이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나라, 그것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차별금지법 없이 ‘빛의 혁명’을 말할 수는 없다.
권혁용 위원은 현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