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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내란을 이기는 힘 - 우리는 구체제(앙샹 레짐)를 넘어서는 중이다 -(오항녕)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유튜브 채널 ‘겸손은힘들다’에 나와 몇 가지 우연이 겹쳐 작년 12월 3일 계엄을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정말 그렇구나 싶었다. 또 김어준 씨가 헬기가 늦게 뜨도록 만든 날씨, 개인 방송이 시민을 국회에 모이도록 독려한 것, 국회의원들이 봉쇄를 뚫고 담 넘어 들어간 것 등등 계엄의 그날 아슬아슬했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밤 증가했던 엔트로피가 다시 느껴졌다. 맞다. 이처럼 기억은 몸에 새겨져 있다.
이번 내란 사태는 우연히 저지된 것이 아니다. 이미 눈이 높아진 시민의식이라는 디폴트 값이, 계엄령 해제와 관련된 법령 제도가 역할을 해냈다. 상황을 주시하고 국회까지 모여든 시민, 계엄령 해제를 결의한 국회의원, 그리고 계엄군의 가슴에 작동했던 선한 의지가 있었다. 물론 헬기를 뜨지 못하게 했던 날씨 같은 우연이 겹쳤다. 이렇게 모든 사태에는 구조, 의지, 그리고 우연이 함께 작동한다.
[사진 : 국회에 모인 시민들. 명심하라! 우리는 언제든지 일어설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 2월 13일(수), MBC 저녁 뉴스가 심상치 않다. 계엄 세력이 ‘수거’해서 ‘수집소’로 보내 제거하려던 사람이 5백 명이 넘는단다. 연평도, 제주도, 실미도, 전방 GOP 등에서 사고로 위장하거나, 원격 제어 폭탄으로, 심지어 음식에 화학약품을 타서 ‘처리’하려고 했다. 전 국민의 출국 금지,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계획까지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계엄 세력의 중심인물로 지목되고 있는 민간인 노상원 전 방첩사령관의 수첩에 적힌 내용이다.
불법 계엄으로 시작된 내란, 초기 진압은 성공했으나 여전히 내전은 지속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의 냉정한 현실이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비롯하여 김용현, 노상원 등이 체포되었고, 윤석열은 대통령직 파면이 예상되는 등 고비를 넘고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서부법원을 침탈한 폭도들 주변의 극우들이 여전히 준동하고 있고, 최상목의 특검 발목잡기도 계속되는 중이며, 국무위원들에 대한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검찰의 개입에 대해서는 손도 못대로 있으며, 심지어 내란 혐의자가 서울경찰청장으로 임명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동을 막지 못하면 모든 혁명은 비극이 된다.
혁명이 빈틈을 보이는 때가 있다. 시민들이 ‘지겹다’ ‘힘들다’ ‘버겁다’ 생각하는 때이다. 왜 빨리 끝났으면 하는 조바심이 생기는가? 혁명은 시민들 일상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식료품 조달이 원활하지 못하고, 때론 전기, 수도까지 끊어진다.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간단히 말하면 혁명의 과정에는 생활 리듬이 깨지고 피로감이 몰려온다.
지금 우리도 경험하고 있다. 식품, 전기, 수도까지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환율이 불안하고 사람들은 회식도 꺼리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언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판결이 나나, 웬 재판이 이리 긴가, 말 같지 않은 계엄 세력들의 저런 변명과 거짓말도 듣고 있어야 하나…. 잠도 설치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게 짜증 나고 스트레스 지수를 올리면서 싸이토카인(cytokine 염증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늘리고 있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체력이 고갈되어 예민해진 상태가 되면 자주 다투게 된다. 술에 의지하거나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도 있다.
인권연대 회원들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내란의 깊이와 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역사학도로서 나는 이렇게 본다. 식민지 강점기 이후 백 년 이상의 구체제(Ancient Regime)를 넘어서는 중이라고. 식민지 시대 이래 기득권층이 이승만의 민간 파시즘, 박정희~전두환의 군사 파시즘을 거치면서 기업, 문화, 법률, 언론의 탈을 쓰고 온존하던 세력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나라를 이끌 실력이나 비전도, 남을 설득할 지적 능력도, 동시대 사람들을 안고 갈 덕성이나 휴머니즘도 없다. 그들은 사사로운 이익만을 서슴없이 주장하며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1789년 프랑스 시민들만 앙샹 레짐과 맞선 게 아니다. 우리도 구체제를 전복시키는 한복판에 서 있다.
간단한 추정을 통해 희망 하나를 제시하고자 한다. 독립기념관장,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을 매판적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로 채웠다. 역사관은 현실에 대한 관점의 반영이다. 근데 그 자리에 임명된 인물들이 학계에서 거의 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다행이고, 이 세력들의 끝자락이라고 생각한다. 매판 세력에게 이제 역량 있는 인재가 더 이상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최근 청문회, 국정조사, 국정질의 등을 통해 드러난 국무위원들의 불쌍할 정도로 저열한 수준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계엄 초기에 이루어진 ‘즉각 해제’는 이런 인적 조건이 낳은 또 다른 결과이다. 내란 주범인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은 또 다른 내란 주범 노상원에게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중과부적은 12월 3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총체적으로 극우-매판 세력은 중과부적의 시대에 들어섰다.
나는 우리가 겪는 이번 구체제 타도 과정이 ‘치열하지만 조용히 진행되는’ 연성(軟性) 혁명이라고 본다. 조용한 내전(A Soft Civil War)! 이 과정에서는 혁명의 심성이라고나 부를 ‘공포와 기대’조차 부드러워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번 내전이 연성으로 진행되는 데는 12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내란을 초기에 진압한 사실에 힘입고 있다. 그리하여 이후의 전개가 법률적 쟁투로 들어가면서 법치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법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폭압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써 법치의 역할과 순기능이 엄연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국회, 정당, 법원이 중요한 이유, 그래서 더 잘 가꾸어야 할 이유가 된다.
형용모순이 분명한 ‘부드러운 내전’이라는 이상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 높은 민도(民度), 집단지성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어떻게 혁명 세력의 중심인 시민들은 이토록 평화롭게 앙샹 레짐을 무너뜨리고 있는가? 눈 속의 ‘키세스’가 보여준 창의력과 간절함의 도저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지금 이를 설명할 수 없다. 다행으로 느끼고, 고마울 뿐이다. 이처럼 평화로운 혁명의 페이스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
[사진 : ‘키세스’들의 힘. 이번 내전과 혁명의 상징이다.]
‘근본적인 혁명’ 같은 것은 없다. 근본적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기에 붙잡힌다. ‘공포와 기대라는 혁명적 심성’이 ‘피곤하고 짜증난 시민들의 마음을 점령할 때’ 그 근본주의는 악마적 폭력성을 드러낸다.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는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따라서 혁명은 그저 그런대로 살만한, 좀 더 편안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계엄 해제 이후 두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내란범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고 화를 내는 분들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로 3년 이상이나 지난 뒤에야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가 처형되었다고. 그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파리 시민들 속이 어땠을지 짐작해보자고. 이 땅에서도 1980년 5월 광주 학살의 주범이 대통령 노릇을 하고, 그 후계자가 또 대통령이 되고, 제죽음하는 것을 보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마리 앙뚜아네트의 처형 : 프랑스 시민들은 3년이 넘게 걸렸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처형 못한 학살 주범 전두환을 겪었다. 이제 갓 두 달 지났다. 조금만 길게 보자.]
이 연성 내전, 조용한 내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에게 스스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첫째, 일상생활의 리듬을 유지하자. 인간은 조그마한 노력으로도 감정과 생각을 능동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뉴스나 SNS, 유튜브 등은 시간을 정해놓고 보자. 잘 때는 잠만 자자. 밥도 잘 먹자.
둘째, 우리가 쉽게 피로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 있는 상태라고 인정하자. 그러니까 술은 자제하고 스트레칭, 걷기 등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운동을 하자. 내 마음이 화가 나기 쉬운 상태라는 것고 인정하자. 운전 하다 옆 차가 끼어들어도, 보험료나 짜장면 값이 올라도, 당분간은 그러려니 하자. 시민들끼리는 짜증을 적게 내도록 마음 쓰자.
셋째, 수도권 시민들에게 고마운데, 계속 토요일 집회를 유지해주시기 바란다. 적어도 대통령 파면이 선고될 때까지. 만일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바로 서울로 올라가 함께 할 것을 굳게 약속한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