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혁용(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태중(병원장),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교수), 이재승(건국대학교 법전문대학원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 글을 씁니다.
숙종과 장희빈 : 그의 시대, 나의 시대(오항녕)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는 역사가 반복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관찰로는 반복되는 역사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했다. 직업에 불리한 말일 수도 있는데, 사실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른 방식으로, 예컨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배운 도덕, 공자님이나 부처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미 다 나와 있다. 따라서 오늘 얘기도 교훈을 얻자는 취지가 아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다. 굳이 교훈을 얻겠다는 분도 있겠지만, 있다 해도 몇 분 되지 않을 것이다.
1막
때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 12년(1686), 숙종은 연인 장씨를 위해 궁궐 깊은 곳에 몰래 별당을 지었다. 사헌부에서 중지하라고 요청했지만, 숙종은 잘못 전해 들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이어 장씨를 종4품 숙원(淑媛)으로 올렸다. 궁녀로 들어와 왕자나 공주를 낳지도 않았는데 숙원이 되는 것은 특별한 조치였다. 며칠 뒤 장씨의 궁방인 숙원방(淑媛房)에 사패(賜牌, 임금이 내려줌) 노비 100명을 주었다. 홍문관, 사간원도 비판하고 나섰다.
숙종도 뭔가 말을 해야 했다. “역사 기록을 보니, 여자를 총애하다가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정치를 망친 자가 많았으므로 내가 늘 한탄하였다. 더구나 나는 종묘사직을 부탁받았으니, 어찌 가볍게 행동하겠는가?” 거짓말을 했다.
2막
성균관 대사성 김창협의 상소가 들어갔다. “사헌부의 논계에 대해 전하께서는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별당을 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목재를 구하는 관리가 빈번히 민간에 출입하고 있습니다. 별당을 짓는다면 그건 잘못이라고 지금 전하께서 하교하고는, 안에서는 급하지 않은 공사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신하의 말을 막아 버리며 변명하시니, 이것은 스스로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의 말은 숙종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숙종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억측이 지나치다”고만 답변했다. 숙종이 숨겼던 화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터졌다. 1689년,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왕후로 책봉했을 때였다.
김창협의 아버지이자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은 이런 숙종의 조치를 반대하다 진도로 귀양을 갔다. 이른바 기사사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숙종의 사약을 받았다. 김수항은 숙종이 여섯 살, 원자였을 때 스승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3년 전 아들 김창협의 비판으로,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생겨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했다고 말했다.
[사진① : 드라마로 소환되는 장희빈 이야기. 실은 훨씬 복잡하고 깊은 주제가 숨어 있다. 어쨌거나 장희빈 역으로 기억에 남는 건 김혜수 님이다.]
3막
인현왕후는 숙종 7년(1681), 왕비에 간택되었다. 아버지는 민유중이다. 간택된 뒤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는 민유중의 관직 교체를 금하는 하교를 내렸다. 원래 왕의 장인은 관직을 맡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대로 관직을 맡게 한 것이다. 이유는 그가 군사, 경제 분야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호조판서였을 때부터 형인 민정중과 함께 공납제 개혁에 열심이었다.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공물과 왕실 진상을 줄였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 지방을 중심으로 대동법의 성공이 확실해질 무렵, 대동법을 추진했던 정책가들은 공안 개정으로 에너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던 흐름의 연장이었다. 민유중은 기사환국이 시작되기 이태 전인 숙종 13년(1687)에 세상을 떴다. 딸이 왕비에서 폐출되는 험악한 꼴은 안 본 셈이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1689년, 줄었던 공물 상납이 되돌려졌다. 호조판서 오시복은 각 전(殿)에 올리는 공상(供上, 왕실 물품 조달), 생일이나 명절에 바치는 선물을 예전대로 회복하자고 건의하여 숙종의 허락을 얻었다. 여기서 말하는 전(殿)이란, 대전, 대비전, 중궁전, 동궁전 등을 말한다. 이때 대비전은 이미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서 없었고, 원자는 아직 어려서 동궁(세자)으로 책봉되지 않았으므로, 이 조치는 결국 숙종 자신과 왕후가 된 장희빈을 위한 공물의 회복이었다.
[사진② : 필자가 Jtbc에서 강의한 숙종 시대 화면. 왕정은 종신제라 잘못하고도 개과천선한 뒤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있다. 태조 이래 처음 환갑까지 산 숙종은 그런 점에서 행운이자 봐줄 만한 점이었다.]
4막
노양처종모법(奴良妻從母法), 종종 전공자도 오해하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개혁이다. 조선 전기 부모 한쪽이 노비면 자식이 노비가 되는 법[一賤則賤]을 개혁하여,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여도 양인이 되는 법이다. 조선 전기 종모법이란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것이고, 조선 후기 종모법이란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되는 법이다. 이는 점차 노비를 줄이고 양인을 늘이는 정책이었고, 이는 후일 추세로도 증명되었다.
이 개혁법은 율곡이 발의한 이래, 근 100년 만인 숙종의 아버지 현종 10년(1669)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숙종 4년(1678) 폐지, 숙종 10년 재입법, 문제의 1689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좌의정 목내선이 숙종에게 폐지를 청하였고, 권대운은 반대했으나 김덕원이 찬성함으로써 숙종이 파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입법이 되는 것은 영조 6년(1730)이고, 《속대전(續大典)》에 수록되었다.
5막
인현왕후를 폐위하던 날 오두인과 박태보 등 86명이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태보, 오두인 등은 장희빈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 인현왕후였다는 점,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인현왕후를 아꼈던 일을 상기시키고, “삼년상을 지낸 아내는 내보내지 못한다(與經三年喪, 不去)”는 말까지 거론하며 숙종의 조치를 되돌리려 하였다.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모진 국문이었다. “압슬로 무릎을 빻고 능장(稜杖 모서리가 있는 곤장)으로 치니 좌우 사람들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였고, 살갗과 살점이 떨어지며 뼈마디가 드러났으며, 튀는 피가 숙종의 곤룡포 아래 떨어졌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 민진원이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여겨서 이들도 하옥하고 심문했다.
오두인은 의주로 귀양을 가다가 파주에서, 박태보는 진도로 귀양을 가다가 과천에 이르러 국문으로 인한 중상으로 세상을 떴다. 오두인은 숙종의 사돈으로, 현종의 셋째 딸 명안공주 남편인 오태주의 아버지였다. 박태보는 박세당의 아들이다. 송시열은 박태보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손들에게 ‘박태보’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송시열도 6월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렇게 숙종은 숱한 인재를 잃었다.
6막
숙종 19년(1693) 봄, 숙종은 태조와 태종의 잠저(潛邸)였던 개성 경덕궁을 찾았고, 글을 썼다. ‘경덕궁비계영경지비(敬德宮丕啓靈慶之碑)’이다. ‘비계영경’이란 ‘왕조를 위대하게 열었다’는 의미이다. 아래는 숙종이 그때 지은 시이다.
지난해 거듭 용이 나르시던 해 만났는데 去年重遇龍飛歲
오늘 흔쾌히 성스러운 조상의 궁 보노라 今日欣瞻聖祖宮
어찌 그리운 추모의 정이 곱절 뿐이랴 奚但羹墻追慕倍
큰 위업 생각하니 내 마음 끝이 없네 緬懷洪烈意無窮
‘용이 나르시던’이란 우리가 아는 ‘용비어천가’의 그것이다. 1692년이 조선 건국 1392년(임신년)에서 5갑자 되던 해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듬해 4월,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으로 다시 낮추었다.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부른다.
숙종은 과오를 반성하고 갑술환국을 단행하기 전에 경덕궁을 찾았다는 것은 국왕으로서 왕조에 대한 책임을 새롭게 인식했다는 뜻이다. 이대로 망해 먹으면 큰일이다 싶었을 것이다.
[사진③ : 숙종의 글씨이지만, 숙종의 글씨가 아니기도 하다. 비석 글씨는 숙종 글씨를 놓고 글씨 잘 쓰는 사자관(寫字官) 등이 뽀샵을 해준 것이다.]
사랑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지만 눈먼 사랑은 죄가 되고 대가가 큰 것 같다. 왕정은 종신제라 잘못했더라도 개과천선한 뒤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있다. 태조 이래 처음 환갑까지 산 숙종이 그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 강화 농지 간척, 북한산성 구축, 진경 문화의 후원, 단종 복위, 균역법의 출발, 삼각 무역을 통한 경제 안정 등은 그런 증거였다. 그래서 숙종에게는 행운 외에 봐줄 만한 점이 있었다. 그나저나 왜 이번 칼럼 주제로 숙종과 장희빈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