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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혁용(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태중(병원장),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교수), 이재승(건국대학교 법전문대학원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 글을 씁니다.

난세를 보는 역사학도의 관점과 의심(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8-16 11:47
조회
1479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 손잡고 일상 지키기


1. 꽤 오래 인권연대 ‘발자국통신’을 써왔지만, 점점 글을 쓰기가 힘들어진다. 몸이 늙어서? 공부를 안 하고, 생각을 안 해서? 천만에! 도대체 발자국을 내디딜 수 없을 만큼 쓰레기를 뿌려대는 어리석은 정부의 덕에 과제 상황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주제를 잡는 데만 무려 나흘을 고민하다가 역사학도가 할 수 있는 얘기 몇 마디만 하기로 했다.


매판세력이 주무르는 외교와 국방


1. 이 정권의 외교와 국방이 매판(買辦)의 성격을 띠는 건 오래되었다. 멀쩡한 독립국이 일본 극우 세력에게 도매금으로 팔리는 형국이다. 위안부, 강제 동원, 독도, 최근의 사도 광산까지, 대통령실에 간첩, 밀정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뿐이랴! 지금 대한민국이 원래 식민지였나, 하는 착각마저 든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를 뿌릴 때도 일본 정부를 대변했던 한국 정부, 이번 사도 광산 등재 때도 강제 동원을 양해하는 한국 정부, 이게 식민지 총독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네이버의 라인 지분 매각 같은 사소한(?) 일들은 빼고) 이 사안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역사 연구 및 교육 단체에서 비판 성명이 나올 것이다.


[사진 : 역사의 농단. 결국 과거 사람들에 대한 폭력적 심성은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폭력와 무자비로 이어진다.]


1. “어떻게 하면 뿌리를 뽑을 수 있을까요? … 쏟아지는 비상식적인 사건과 정책들…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역사 현장의 후배가 보낸 장문의 문자에는 절박함이 배어있었다. 먼저 나는 3년 전 예언처럼 썼던 발자국통신 ‘드러내는 힘, 민주주의’(2021년 6월 9일)를 소개했다.
 검찰 권력의 민낯이 드러나고 뉴라이트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극우 추종 세력이 실체를 드러내는 것, 방송, 외교, 국방, 역사를 말아먹는 권력인 줄 몰랐거나 뿌옜다가 다 드러나는 과정이 곧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렇다, 드러나면 해결할 길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저도 좀 지겨울 때가 있고, 늘 조마조마합니다. 근데 연산군 때, 광해군 때는 얼마나 징그러웠겠어요? 왕은 종신이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맥시멈 3년이고!!


① 선생님들은 하시던 대로 하면 됩니다.
② 댓글, 퍼 나르기, ‘수군수군’을 좀 더 즐겁게 강화하면 더 좋습니다.
③ 틈나는 대로 집회도 하러 가면 더 좋습니다.
④ 매일 운동(요가, 스트레칭, 명상, 걷기, 등산 중 되는대로)을 권합니다.
⑤ 친한 분들과 좋은 책 읽습니다.”


일상을 지키는 시민, 난세를 견디는 기본


동네 음식점이나 카페에 가면 코로나 때보다 더 장사가 안된다고 힘들어한다. 설상가상 코로나 발생이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물론 법인세 인하부터 금투세 폐지 논의까지, 이미 부자 감세로 인한 부담은 중산층 이하로 전가되었다. 이렇게 폭정(暴政 포악한 정치)이든 혼정(昏政 무지한 정치)이든 늘 사람들의 일상을 공격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일상을 지키는 시민, 그럴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시민, 이것이 난세를 견디는 기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 현재를 위한 의심


1. “왕조시대에도 이러지는 않았다,” “지금이 조선시대냐?” 디올백 사건부터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 장관급 인사, 편파적 검찰 권력 등이 드러날 때면 무심결에 나오는 말들…. 국회의원에서 언론인, 일반 시민들까지 참 쉽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왕비가 궁궐 밖에 사무실을 차려놓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고, 검찰이라는 것도 없었다. 방통위가 없었으니 빵과 와인을 좋아해 법카로 횡령하는 사람을 위원장에 앉히는 일도 당연히 없었다. 그러니까 무의미한 푸념인 셈이다.
 며칠 전 어떤 신문 칼럼에서 이런 서술도 있었다. “농경사회이고 신분사회였을 때 보통 사람들에겐 휴가는커녕 휴일도 없었다. 우리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휴가는 오랫동안 귀족이나 부르주아에게만 허락됐다.” 틀렸다.
 농민은 추수가 끝난 11월부터 이듬해 4~5월 모내기 전까지가 휴가였다. 부르주아가 득세하는 19세기부터 노동자는 무한 노동시간에 내몰렸고, 길고 긴 투쟁을 통해서 주6일, 주5일 노동을 쟁취했지만 지금도 이 땅의 노동자는 농민이 누리던 휴가의 반의반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내 글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싶다. 좋은 세상이냐, 나쁜 세상이냐를 떠나, 과거와 현재는 무엇보다 다른 세상인 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다른 세상을 두고 비교하길 좋아할까?


왜 다른 세상과 비교하길 좋아할까?


1. 이런 말을 하는 의식 속에는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 대한 우월감이 들어있다. 이는 우리 사회와 문명의 형편없는 것조차도 과거 어떤 시대보다 낫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그 근거는? 자본주의+대의민주주의, 거기에 과학기술이 덧붙여진다. 이걸 역사학에서는 ‘진보사관’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건 허위의식이다. 우선, 진화생물학에서 볼 때 우리 몸은 4만년 전 현생인류보다 나을 게 없다. 인간 자체로 나아진 게 없다는 말이다. 둘째, 공해, 오염, 무한 노동시간, 빈부의 격차, 식민지배 등 당대의 부조리를 감춘다.
 인류사의 선형(線型)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19세기에 등장했다. 그 전에 인류는 늘 ‘과거보다 지금이 못하다’라는 논리로 자신들의 시대 과제에 경각심을 가져왔다. 19세기 이후 일부 인간들은 달랐다. 자기들이 문명인, 나머지 시대는 야만 또는 암흑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이런 이데올로기는 1차, 2차 참혹한 제국주의 전쟁을 겪으며 그 본산 유럽에서는 깨졌다. 냉전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가 그 수명을 늘리려고 했지만 이젠 누구도 속지 않았다. ‘이성, 자유, 평등’ 등 ‘진보사관’의 핵심 개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이래 현대 문명은 이성만큼 광기를, 자유만큼 전제를, 평등만큼 불평등을 유감없이 노출하였다. 하긴 200년도 안 되어 인류 멸망의 징후를 곳곳에 드러내 보이는 문명 주제에 무슨….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2024년 우리들이다.


인류 멸망의 징후가 보이는 판에 진보는 무슨


1.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진보사관’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둘째, 진보사관은 경험적으로 기각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진보사관이란 말이 형용모순이라고 생각한다. 진보 자체가 특정 국면이나 시대를 넘어 전체 역사에 적용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를 썼던 초역사적 관념이니, 이를 극구 역사관이라고 한다면 ‘네모난 삼각형’처럼 형용모순일밖에. 특정 국면이나 시대에 적용해도 증거 없는 주장이나 부정합일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무의미하고 증명되지 않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1. ‘진보사관’의 폐해는 정작 다른 데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역사의 사실이야 뭐 잘못 알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런데 진보사관을 과거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과거를 재단하는 앞의 사례에서도 나타났던 증상이다. 시야를 넓혀서 보면 19세기 이래 유럽 중심의 진보사관이 세계 인류의 삶을 뒤틀고, 그 왜곡을 바탕으로 노략질했는지는 무수한 조사와 연구가 나와 있다. 진보사관은 그 태생부터 과거 사람들이 누구건, 근거 없고 오만한 잣대로 포맷하는 폭력적 심성을 깔고 있었고 스스로 강화하였다.


유럽 중심의 진보사관의 폐해


이 지점에서 확인하자. 이 폭력 심성이 과거로만 향할까? 그럴 리 없다. 인간의 심성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 결코 과거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습관화된 심성은 과거 사람처럼 익명의 대상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웃, 친구 누구에게나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함부로 하는 정치와 세태에 한몫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역사학도로서 두려운 지점이 여기이다. 처리되지 않은 19세기 문명의 쓰레기 ‘진보사관’이 만연하면서 퍼뜨리는 폭력의 심성, 그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문제이다.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성실한 이해나 존중과는 거리가 먼 배설일 뿐인 그 폭력 말이다.


1. 하지만 진보는 태도로서 중요하다. 우리 앞에 놓은 불평등, 부패, 불의를 극복하려는 동력으로써의 진보적 태도 말이다. 말하자면 진보는 태도의 이슈이지, 사실의 이슈가 아니라고. 이를 혼동하면 현실-역사의 전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왜 이렇게 반동과 좌절의 시대가 반복되는가, 안타까워하면서 말이다. 이해는 간다.


그런데 많은 선의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꼬이는 인생이 있듯이, 역사도 숱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난세를 맞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서 희망을 이야기할 뿐이다. 결과는 누구도 모른다. 진보적 태도를 보이되, 역사의 진보라는 허상을 덜어내면 현실-역사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줄어든 스트레스의 자리에 덤덤한 일상의 몫을 넓혀보면 어떨까.


[사진 : 일상을 유지하는 힘. 전주에서 특강을 마치고, 같이 준비한 이웃들과 함께]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