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비친 인권연대

home > 활동소식 > 언론에 비친 인권연대

이태원은 누구의 땅인가 (한겨레21 07.12.20)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03 04:40
조회
162
고급상권과 게이클럽과 이슬람·아프리카… 미군이 떠나간 거리, 인종·성·계층의 경계가 뒤섞인 해방구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흘러간 노래로 시작하자.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이태원 이야기>(변승욱 작사·작곡)는 이렇게 노래했다.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세상 구경 떠나자~”고. 노래에서 이태원은 온종일 엄마를 졸라서 마련한 예쁜 안경을 끼고서 ‘구경가는’ 공간이다. 이어지는 노래의 한 자락, “소방서 골목마다 서성대는~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은~ 길 가는 남자마다 붙들고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렇게 1980년대 노래는 미군을 주로 상대하는 유흥업소가 밀집된 언덕길, ‘후커 힐’(Hooker Hill)을 묘사한 다음에 이렇게 이어진다. “반지 목걸이 귀걸이 한 파마머리 저 사람은~ 모습은 여자인데 나도 몰라~ 목소리는 어머~ 웬일이니.” 당시엔 ‘게이’로 불렸던 ‘트랜스젠더’ 여성도 이태원 풍경에서 빠지지 않는다.
blank.gif △ 한국에는 없지만 이태원에는 있는 7개의 표정. ① 쓸쓸한 후커힐
그리고 세월은 흘렀다. 용산기지 이전과 함께 미군이 상당수 떠나간 2007년 이태원 이야기를 해보자. 참, 여기서 이태원은 녹사평역이 위치한 이태원 입구에서 시작해 해밀턴 호텔을 지나고 제일기획 건물 너머까지, 이태원로를 의미한다. 여기에 이태원로에 이어진 골목길이 포함된다. 2007년 이태원은 누구의 땅일까.

“청담동 거품 빼고 스타일 더하면”

이태원 거리마다 역사가 들어 있다. 이태원 부동의 랜드마크 해밀턴 호텔에서 시작하자. 해밀턴 호텔 옆으로 돌아가면 인도·파키스탄 식당 ‘모굴’(Moghul)이 보인다. 오래된 이슬람 식당인 모굴의 얼굴이 요즘엔 훤하다. 한두 해 전에 간판을 바꾸고 세련된 느낌의 식당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모굴의 간판은 이 거리의 활력을 상징한다. 모굴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어느새 서울의 명물로 떠오른 식당이 줄지어 늘어섰다. 음식의 국적만 보아도 중국, 인도, 중동은 기본에 이탈리아, 프랑스는 물론 그리스, 벨기에 심지어 불가리안 레스토랑까지 있다. 음식점마다 인테리어에 개성도 넘친다. 10월20일 심야의 이 거리에서 누군가 그릴을 내놓고 소시지를 굽고 있었다. 소시지를 파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한결같은 서양인. 이들 옆에서 낯선 국기를 몸에 두른 이들이 서로의 얼굴에 페인팅을 해주고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기였다. 이들 뒤에는 남아공과 잉글랜드의 럭비 월드컵 결승전 중계를 알리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이들은 ‘스크루지 펍’(Scrooge Pub)에 모여서 월드컵 결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한국에는 없지만 이태원에는 있는 7개의 표정.② 지중해 식당 ‘ape with pipe’
그러나 이곳이 외국인 중심의 거리는 아니다. 오히려 이 거리는 한국인도 가고 싶어하는 이태원으로 변화를 상징한다. 이태원에서 타이 음식점(Buddha’s Belly)과 지중해 식당(Ape with pipe)을 운영하는 김태응 사장은 “청담동 문화의 거품을 빼고 독특한 스타일을 더하면 이태원 문화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태원의 카페에는 주인의 취향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2년 카페 ‘Our place’에 이어서 2007년 타이 음식점 ‘My Thai’, 중국 식당 ‘My China’를 오픈한 홍석천씨도 “압구정동이 과시적이라면 이태원은 실리적”이라며 “다리 하나만 건너면 새로운 트렌드를 접하는데 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외국인이 외국인을 상대로 운영하는 외국 식당이 많았으나 이제는 한국인이 운영하고 외국인과 한국인이 모두 오는 음식점이 늘었다. 김태응 사장은 “이태원도 변했지만 한국인도 변했다”고 말했다. 유학과 연수로 외국 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태원은 더 이상 거북한 기지촌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운 타국의 음식을 고향에서 맛보는 즐거움을 느끼는 공간이다.
blank.gif △ 한국에는 없지만 이태원에는 있는 7개의 표정.③ 한국의 유일한 이슬람 서점 
송도영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예전의 이태원이 해외로 나가는 문이었다면, 요즘의 이태원은 해외 경험을 재확인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인도 여행에서 맛본 ‘진짜’ 인도 음식을 이태원의 식당에서 맛보면서 스스로를 문화적으로 구별짓기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다문화 소비 능력이 새로운 문화자본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송 교수는 이태원에 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태원에선 한국인이 주인이 아니다. 나름대로 그것을 즐긴다. 인생 자체가 여행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투어리즘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한국인이 늘었다. 이태원은 그렇게 소비된다.” 이제 이태원엔 하드록 카페가 들어온다. 이태원 상인들 말로는 “그 도시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곳에 위치하는” 하드록 카페가 청담동에서 이태원으로 이전한다.

새 얼굴, 세 얼굴

여기까지 이태원 ‘업타운’ 이야기다. 반면에 이태원로를 경계로 소방서 쪽은 비교적 가난한 이방인의 거리다. 이태원 소방서를 따라서 올라가는 길에는 리오(RIO), 칸쿤(Cancun), 킹(King) 클럽이 잇따라 나온다. 이곳엔 유난히 러시아어 간판이 많은데, 심지어 키릴문자도 보인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러시아 여성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소방서에서 보광초등학교로 올라가는 길의 왼쪽 첫 번째 골목은 이른바 ‘후커 힐’. 1970~80년대 형성된 골목에 아직도 미군을 상대하는 업소가 이브(Eve), 치어스(Cheers), 비너스(Venus) 같은 ‘클래식한’ 이름을 달고 있다. 11월24일 살짝 열린 문틈으로 중·장년 백인 남성이 젊은 한국인 아가씨를 끼고 앉은 모습이 비쳤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풍경은 지금 여기 3세계적 성격을 웅변한다. 이곳은 이태원의 여전한 어제를 상징한다. 김은실 이화여대 교수(여성학)의 논문 ‘지구화 시대 근대의 탈영토화된 공간으로서 이태원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에는 1982년부터 이태원에서 미국 식당과 바를 운영해온 ‘미스 리’의 증언이 나온다. 논문에는 “90년대에 이태원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대생들은 미국으로 시집을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여행을 하고자 했다”고 나온다. 이제는 쇠락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아직도 서양인 남성을 향해서 “헬로”를 외치는 한국인 여성의 목소리가 가끔씩 들린다. 오늘도 이태원 후미진 골목엔 늙은 ‘히빠리’(기지촌 여성)가 담배를 베어물고 서성인다. 80년대까지 이태원에 살았다는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전우용 교수는 “당시에도 해밀턴 호텔을 경계로 삼각지 방향으로 옷집이 많았고, 한남동 방향으로 클럽들이 있었다”며 “이미 70년대 이태원엔 유흥가, 쇼핑가의 두 얼굴이 있었다”고 말했다.
△ 한국에는 없지만 이태원에는 있는 7개의 표정. ④ 해밀턴 호텔 뒤쪽의 카페와 레스토랑들
한편 이태원에는 새 얼굴, 세 얼굴도 있다. 소방서 길을 따라 후커힐을 지나서 두 번째 골목은 이른바 ‘게이 힐’(Gay Hill)이 나온다. 주말 심야면 게이(남성 동성애자)로 가득해지는 골목이다. 골목에 리볼(Reball)을 시작으로 여섯 개의 게이 바와 클럽이 늘어서 있다. 이태원의 게이클럽은 80년대부터 존재했지만, 게이 힐은 21세기에 들어서 그 이름을 얻었다. 이태원에 게이들이 대규모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다. 초기엔 해밀턴 호텔 뒷골목을 ‘아랫동네’, 지금의 게이 힐을 ‘윗동네’라고 불렀다. 아랫동네 클럽인 지퍼(Zipper)가 주로 가요를 틀었다면, 윗동네 클럽인 트랜스(Trance)에서는 팝을 틀었다. 그렇게 윗동네는 서양인을 만나려는 게이들이 주로 가는 곳이었고, 아랫동네는 한국인끼리 노는 동네였다. 하지만 2000년대 아랫동네의 클럽이 사라지면서 윗동네로 통합됐다. 이렇게 한국인 이방인, 게이에게 이태원은 해방구다. 윤리의 치외법권 지대 성격도 지닌 것이다. 김은실 교수는 논문에서 “이태원에는 이제까지 구축되었던 이방성 위에서 새로운 이방성이 유입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이곳이 무중력의 해방구는 아니다. 지난 여름, 한국인이 탈레반에 납치됐을 즈음 주말에 이곳에 작은 소란이 생겼다. 한 외국인이 한 클럽의 출입을 거부당한 것이다. 생김새가 중동 사람 같다는 이유로. 사실 그는 캐나다 국적의 청년이었다. 최근의 변화는 트랜스젠더 클럽의 가시화다. 오래된 ‘여보여보’ ‘보카치오’ 같은 트랜스젠더 클럽은 제일기획 너머 이태원 외곽에 있었다. 하지만 두어 해 전부터 트랜스젠더 클럽이 이태원 중심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소방서 길에는 지하와 2층에 두 개의 트랜스젠더 클럽이 들어선 건물도 있다. 소방서 길 부근에 여섯 개가 넘는 트랜스젠더 클럽이 불과 두어 해 사이에 생겼다. 이제 소방서 길에서 주말이면 드레스를 차려입고 나와 자태를 뽐내는 트랜스 ‘언니’를 보는 일은 아주 흔하다.
blank.gif △ 한국에는 없지만 이태원에는 있는 7개의 표정. ⑤ 버거킹 자리는 커피빈으로 바뀌었다. 
후커 힐, 게이 힐을 지나면 이슬람 거리가 나온다. 이제 할랄(Halal·이슬람식으로 도축한 고기) 푸드를 파는 슈퍼는 익숙한 존재다. 지난 3월엔 한국 유일의 이슬람 서점도 생겼다. 서점엔 한국어, 아랍어, 영어로 인쇄된 책들이 빼곡하다. 주인은 인도 카슈미르 출신의 청년. 서점 옆에는 아랍 전문 여행사도 생겼다. 아랍어로 연합을 뜻하는 이테하드(Ettehad) 여행사 강문정 실장은 “파키스탄 직원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파키스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아랍어 간판을 달고 정보통신 기기를 파는 상점도 있다. ‘살람닷컴’에는 노트북 컴퓨터, MP3 플레이어 등이 종류별로 진열돼 있었다. 파키스탄인 남편과 함께 ‘살람닷컴’을 운영하는 임경숙씨는 “쿠란 낭송 파일을 MP3 플레이어에 넣어주는, 다른 곳에선 받기 어려운 서비스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동남아, 중동 무슬림 외에 아프리카 무슬림도 주요 고객”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선 양복을 입고서 첨단의 제품을 사는 흑인 무슬림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도 보인다. 한편 이슬람 거리의 상점 주인은 유난히 파키스탄 출신이 많다. 임경숙씨와 강문정씨의 남편도 파키스탄인. 송도영 교수는 말한다. “파키스탄인은 무슬림, 인도에 동시에 관련돼 있다. 또한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미국 관련 네트워크가 있다. 이들은 지구화에 관해선 한국인보다 강하다. 그래서 파키스탄인은 손님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주인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태원에는 유난히 중동 음식과 인도 음식을 겸하는 식당이 많다.

이화시장, 북서부 아프리카로 오세요

이태원의 세 번째 새 얼굴은 이태원 이화시장 길의 아프리카인이다. 파전 등속을 파는 주점들 사이에 아프리카 레스토랑(Chajeanks Delight Restaurant)이 있다. 10월20일 밤 11시, 레스토랑에는 30여 명의 흑인이 빼곡하다. 그 속에는 한 명의 백인도, 한국인도 보이지 않는다. 식당의 게시판에는 모임 공고도 붙어 있다. 나이지리아 독립기념일 파티를 10월7일 서울의 나이지리아 공동체가 주최한다는 소식, 10월14일 서울의 가나 커뮤니티가 주최하는 회의 공고도 있다. 이곳은 거의 북서부 아프리카 사람들‘만’ 이용하는 식당이다.
△ 한국에는 없지만 이태원에는 있는 7개의 표정. ⑥ 소방서 길의 트렌스젠더 클럽들
이화시장 골목에는 이슬람 음식점도 있는데, 어디에도 서양인이나 한국인은 보이지 않는다. 불과 몇십m 떨어진 소방서 길의 중동 식당에는 서양인, 한국인이 많이 보이지만, 이화시장 골목의 식당에선 다른 나라 사람이 들어가면 매우 뻘쭘한 형세다. 여기엔 레게머리 전문인 미용실 에보니(Ebonny)도 있다. 역시나 이곳의 주인도, 손님도 흑인 일색이다. 골목의 끝에는 술탄(Sultan)이 있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는 케밥집이다. 술탄의 주인인 터키인 오메르 일마즈는 “손님의 60%는 한국인, 40%는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주말이면 3천원짜리 케밥을 700개가량 팔아치운다. 소방서 길에서 아이스박스에 케밥을 넣고 다니며 파는 레바논 청년도 있었다. 이제 케밥은 햄버거를 뛰어넘는 이태원 제일의 거리 음식으로 떠올랐다.

“특구지만 특혜가 없다”

이태원의 낮과 밤은 다르다. 12월12일 밤 9시. 해밀턴 호텔에서 삼각지 쪽으로 걸어가는 길에선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태원 시장의 상당수 상가가 벌써 문을 닫았다. 소방서 길의 클럽들이 깨어날 무렵에 이태원 시장은 잠든다. 이제 이태원 시장의 밤길을 지키는 불빛은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널드 매장의 로고 ‘M’, 이태원 교회의 십자가뿐이다. 미군이 떠나간 이태원 시장은 여전히 변신 중이다. 남성복 전문점 스톤(Stone)의 주인은 “원래는 미군을 상대로 힙합 옷을 팔았는데 이제는 자연스레 한국인을 상대로 캐주얼을 팔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연착륙에 성공한 편이다. 상당수 상인들이 미군의 이전으로 타격을 입고, 외국인 관광객도 남대문, 동대문 시장에 뺏긴 지 오래라고 걱정했다.
△ 한국에는 없지만 이태원에는 있는 7개의 표정. ⑦ 케밥을 파는 가게, 술탄.
정경훈 이태원 관광특구연합회 사무국장은 “이태원은 낮 경기와 밤 경기가 다르다”고 전했다. 이태원 클럽과 식당의 경기는 괜찮아도 이태원 시장의 경기는 나쁘다는 것이다.그는 “서울시와 용산구청이 이태원을 살리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태원 지역이 대부분 준주거 지역으로 묶여 있고 주차난이 심각하고 우회도로도 없지만, 개선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태원 시장은 밤이면 여성이 다니기 두려운 거리가 된다. 홍석천씨도 “거리가 밝아져야 한다”며 “밤에는 주말의 홍익대 앞처럼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파는 예술거리를 만들면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이태원 상인들은 한결같이 “특구지만 특혜가 없다”고 푸념했다. 2008년엔 서울시가 이태원을 디자인 거리로 선정해 4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지만, 상인들은 아직도 반신반의다.

그래도 이태원은 갈수록 동서로 확장되고 있다. 제일기획 너머로 이어진 이태원로 동쪽은 고급 상권화가 두드러진다. 최근엔 폴크스바겐 매장이 들어섰고, 고급 빵집 ‘패션 파이브’도 문을 열었다.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이 등장한 이후에 상류층 미술품 컬렉터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하얏트 호텔 부근의 남산길 인근도 상류층 문화지구로 탈바꿈했다. 터줏대감인 유명 디자이너 서정기, 이광희씨의 의상 부티크 숍에 표화랑과 백혜영 갤러리가 2~3년 사이 옮겨와 가세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주민도 의아해할 지경이다.
이태원로 인근 사무실의 한 직원은 “최근 이태원로 동쪽의 한남동 단국대 부지가 일반에 팔리고 그 자리에 대형 빌라촌 건립 계획 등이 추진되면서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태원 서쪽 경리단으로 가는 길에도 세련된 음식점 거리가 자리를 잡았다.

여권 없이 세계를 만나는 공간

이제 이태원은 미군의 이태원에서 ‘여러분의 이태원’이 되었다. 송도영 교수는 “외국인에게 이태원은 한국인의 신촌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신촌에는 분식부터 갈빗집까지 다양한 연령이 갈 만한 장소가 있듯이 다양한 외국인이 찾을 만한 서울의 유일한 장소가 이태원이란 것이다. 프랑스인의 서래마을처럼 국적에 따라서 특화된 외국인 공간은 있지만 다양한 외국 문화가 집합된 곳은 서울에 이태원 하나뿐이다. 그래서 이태원에서 27년째 살고있는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이태원은 항공권, 여권, 비자 없이도 세계를 만나는 공간”이라며 “잘만 가꾸면 인권과 평화의 공간이 될 희망도 있다”고 말했다.
△ 이태원 골목이 저마다 다른 이들의 공간이라면, 이태원 대로는 이들이 뒤섞이는 장소다. 이렇게 이태원은 ‘따로 또 같이’ 공간이다.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백선혜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도시가 얼마나 개방적인가는 도시의 브랜드 가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며 “이태원의 다국적성을 살리면 서울의 미래도 밝아진다”고 말했다. 이태원 지하철역의 에스컬레이터는 길다. 주말이면 다른 국적,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함께 탄다. 그곳의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은 감히 인천공항의 입국 심사대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다양하다. 그리고 성정체성의 다양성도. 어쩌다 한 번은 이태원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한다.


다를 이, 태반 태?
출신성분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든 이태원의 역사이태원의 이름에는 이태원의 역사가 들어 있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 배나무 밭이 많다고 하여 배나무 이(梨)가 나왔고, 조선시대 서울을 드나드는 여행자를 위한 숙소인 4대 역원(驛院)의 하나여서 원(院)이 붙었다. 그리하여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렀다. 이태원의 또 다른 한자 해석인 이태원(異胎圓)에도 이태원의 역사가 담겼다. 이곳이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임진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 그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를 이(異), 태반 태(胎)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비슷한 유래로 이타인(異他人)이란 말에서 지명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전용 거주지였다. 이렇게 이태원은 출신성분이 다른 사람들의 땅으로 역사를 지녔다.

이방인 공동체의 성격에 기지촌 성격도 더해졌다. 조선의 일본군 사령부가 용산에 들어섰고, 한국전쟁 이후에 그 자리엔 미군기지가 들어오면서 이태원의 기지촌 성격이 생겼다. 한편으로 70년대 젊은이들에게 이태원은 록음악 감상실이 있고, 팝송을 원판으로 들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었다. 가수 혜은이가 <제3한강교>를 부를 무렵, 그 다리는 강남과 이태원을 이어주었다. 그래서 1차는 강남, 2차는 이태원 공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통행금지 해제는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 이태원은 “소비와 쾌락을 배출하는 창구, 외화를 벌어들이는 시장”(김은실 교수 논문)이었던 것이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이태원은 국가적 각광을 받는다. 당시 신문에 실린 ‘잠실에선 스포츠 올림픽, 이태원에선 쇼핑 올림픽’이라는 제목은 이태원의 위치를 함축한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나고 이태원 이미지는 달러를 버는 애국자 이미지에서 나라를 망신시키는 곳으로 바뀌었다. 국가 위신을 내세운 ‘짝퉁’ 단속이 강화된 것이다. 그래도 97년에는 관광특구로 지정됐다. 앞으로 이태원동, 한남동, 보광동 일대에 33만 평 규모의 한남 뉴타운이 조성된다.

*자문 전우용 교수, 참고자료 김은실 교수 논문


전체 4,003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942
'불법시위 참가자 즉심' 경찰방침 논란(연합뉴스, 08.03.03)
hrights | 2017.07.03 | | 조회 112
hrights 2017.07.03 112
941
공안기구의 과잉충성이 공안정국 불려와(민중의소리, 08.2.28)
hrights | 2017.07.03 | | 조회 125
hrights 2017.07.03 125
940
이 당선인, 폭력시위 없어지는데 '엄정 대처'?(한겨레, 08.02.22)
hrights | 2017.07.03 | | 조회 99
hrights 2017.07.03 99
939
[뉴스 따라잡기] 신입생 혼수상태…구타 의혹 (kbs 뉴스 08.02.15)
hrights | 2017.07.03 | | 조회 149
hrights 2017.07.03 149
938
"당신이지"...CCTV는 알고 있다(한국일보, 08.02.15)
hrights | 2017.07.03 | | 조회 168
hrights 2017.07.03 168
937
노무현, 최고이자 최악의 정치인(주간<시사인> 07.12.17)
hrights | 2017.07.03 | | 조회 105
hrights 2017.07.03 105
936
피우진 중령의 '끝없는 싸움'(주간<시사인>-8.1.21)
hrights | 2017.07.03 | | 조회 141
hrights 2017.07.03 141
935
과거에 대한 성찰, 현재를 읽는 지혜(주간<시사인>08.1.21)
hrights | 2017.07.03 | | 조회 152
hrights 2017.07.03 152
934
대한민국 여성 헬기 조종사 1호, 피우진 중령 복직시켜야 (가톨릭인터넷신문 지금여기 08.01.30)
hrights | 2017.07.03 | | 조회 152
hrights 2017.07.03 152
933
정통부 '수사권 확대' 재추진 논란(한겨레, 08.01.28)
hrights | 2017.07.03 | | 조회 121
hrights 2017.07.03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