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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 개인공화국을 위하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18 15:18
조회
334

서정민갑


 버스를 타면 으근으근하게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에 짜증이 날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뉴스나 시덥쟎은 우스개소리, 혹은 유행가를 버스 요금 900원의 부가 서비스로 제공하기로 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라디오소리에 대한 나의 선택권은 없다. 버스를 탄 순간부터 내릴때까지 그냥 묵묵히 들어야만 한다. 라디오 방송의 내용을 싫어한다던가 아예 라디오를 틀어놓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거나 하는 개인의 취향은 깡그리 무시된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소리를 낮춰달라고 부탁해보기도 하지만 소리가 낮춰지기는커녕 버스 운전사의 욕설만 한바가지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말도 안하고 그냥 참는게 상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고속버스를 타면 텔레비전의 화면과 소음에 신경을 빼앗겨야하고 어쩌다 집에서 쉬는동안에는 무시로 찾아오는 야채 트럭, 생선 트럭, 열쇠 수리 오토바이의 소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소한 몇가지 예를 들었지만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평온을 침범하거나 개인의 취향과 선택이 깡그리 무시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이다. 일반적인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획일화되지 않는가? 국가의 검인을 통과한 교과서로 교육을 받는 동안 개인은 끊임없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땅에 태어난’ 국민으로 훈육된다. 대학진학과 성공이라는 목표를 반복적으로 주입받고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똑같은 교복을 입어야 하며 일주일에 한번씩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아무말 없이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어야 한다. 각기 다른 생각과 취향을 가진 개별 인격체임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반, 학교, 지역, 직장이라는 거대 집단을 옮겨가며 끊임없이 집단속의 일부로 배치당하는 것이다. 특히 남성의 경우에는 군대를 경험하며 이러한 특성은 완전히 내면화된다. ‘까라면 까라’, ‘군대에서는 튀면 안된다. 잘하지도 말고, 못하지도 말고 남들 하는만큼만 해라’하는 말속에 담겨진 철학은 결국 개성의 포기를 통한 안락의 도모인 것이다. 게다가 친일파가 득세하고 우국지사는 몰락해온 한국의 근현대사 역시 이러한 굴종과 순응의 내면화를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개성을 존중하지 않으니 타인에 대해, 타자에 대해 무신경해지고 폭력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군가의 발을 밟아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있건말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 통화를 하고, 뒷차가 어떻게 되건말건 우선 끼어들고 보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 4강 진출의 신화를 기뻐하는 기쁨의 함성이 모두 똑같은 한두가지의 응원구호였다는 것, 그리고 당시 붉은 악마 열풍에 제동을 걸었던 인권운동사랑방의 홈피가 일부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았던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획일적이며 폭력적인 사회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삶의 질이 대체로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개인의 존엄과 독자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버스안에서 들리는 라디오 소리를 묵묵히 들어야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만 한다. 조금만 다른 문제제기를 하거나 다른 취향을 내보였다가는 사회적 왕따가 되기 십상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적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못 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신체구조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거나 취업을 하지 못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남들과 다르면 틀린 것으로 별난 것으로 인정받는 사회는 얼마나 폭력적인 사회인가? 고문과 최루탄이 사라지고,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 사라졌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군부독재 시대의 마인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개인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존엄한 실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야만 한다.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를 함부로 침범하거나 지배해서는 안되듯이 개인 역시 함부로 침범되거나 지배당할 수 없는 공화국과도 같다. 대한민국은 4800만 국민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 4800만 개인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피부가 검다거나, 동성을 좋아한다거나, 소수 종교를 믿는다거나, 가난하다거나, 독신이라거나, 이혼했다거나, 장애를 가지고 있다거나, 좌파라고 해서 무시당할 이유가 없다. 아울러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버스안에서 듣기 싫은 라디오를 들어야 할 의무가 없으며 나는 나의 고요를 침범받고 싶지 않기에 라디오를 꺼달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져야 한다. 누군가의 발을 밟으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고, 핸드폰 통화의 목소리는 낮춰져야 하며, 무조건 끼어들기는 사라져야 한다. 만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과의 싸움과 함께 개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과의 싸움이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기주의의 전면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에 대한 배려와 공존의 확산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만세’가 아니라 ‘개인공화국 만세’가 외쳐지는 세상을 위해 모든 개인의 봉기를 호소한다. 물론, 이것도 ‘내가 싫거나 귀찮으면 그만’이지만 말이다.


* 서정민갑씨는 스스로를 몽상가라고 지칭하는 문화비평가이며, 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 인권연대에 매월 글을 써주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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