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인권연대

home > 활동소식 > 월간 인권연대

[89호] 한국사회와 가난 ⑨ 한국사회와 가난’ 연재를 마치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30 13:43
조회
251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가톨릭신문 기자


 ‘하얀 할매(할머니)’


 누구나 가슴 한 켠에, 떠올리기만 해도 어딘가가 저릿저릿해지고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사람이나 대상 한둘쯤은 품고 살기 마련입니다. 제게는 ‘하얀 할매’가 그런 존재입니다.


 ‘하얀 할매’는 제 증조할머니입니다. 누가 그런 별칭을 붙였는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온통 흰 머리카락뿐이어서 그렇게 불렀던 모양입니다. 도회지에서 학교를 다녔던 저는 방학이면 어김없이 하얀 할매가 계시는 반농반어촌의 동해 바닷가 시골마을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서 쉬 할머니 곁으로 보내주셨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팍팍하기만 한 도시를 벗어나 보라는 뜻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땐 누구나가 살기 힘든 때였으니까요.


 할머니에 대한 기억


 방학이 시작하기가 무섭게 달려갔던 그 곳엔 늘 저를 ‘우리 강새이(강아지)’로 부르시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제가 곁에 앉을 때면 할머니는 치마를 걷어 부치고 속주머니에서 뭔가를 끄집어내 손에 꼭 쥐어주시곤 하셨습니다. 누런 삼베수건에 쌓인 건 엿가락일 때도, 어떤 때는 눈깔사탕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시골 할매가 그런 걸 다 구했을까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할머니는 지금 말로는 ‘시각장애인’, 그 때 말로는 ‘봉사’였기 때문에 할머니의 그런 몸짓은 눈물겹기까지 했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이면 참빗으로 고운 흰머리를 빗어 쪽을 틀고 은비녀로 곱게 단장하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할머니의 일과를 도와 간혹 머리를 빗겨 드리기도, 볕이 따뜻한 날이면 마루에 나앉아 이를 잡아 드리기도 했지요. 그런 할머니의 비쩍 마른 손을 잡고 집밖이라도 나설 때면 할머니는 그야말로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셨습니다.


 “히~유, 히~유….”


왕복 100걸음도 채 안 되는 삽작거리를 다녀오는데도 가슴 어디서 올라오는지 짐작하기도 힘든 숨을 내쉬며 힘들어 하시는 할머니를 지켜보며 저는 할머니를 위해 무슨 큰일이라도 한 듯 뿌듯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그런 모습으로 계실 줄 알았던 할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겨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할머니에 대한 새로운 얘기를 듣게 된 건 좀 더 철이 난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늘상 ‘봉사’였던 모습이었기에 원래부터 할머니가 그랬을 것이란 생각 자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왜 좀 더 다른 생각을 가져보지 못했는지 한탄스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얽힌 이런저런 얘기를 듣던 순간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할머니의 아들, 그러니까 제 친할아버지에 대해 알아왔던 사실도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냥 서른 초반에 일찍 돌아가셨다고만 들어왔던 할아버지는 마을 서당 훈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 풍족하진 않았지만 이웃과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보람을 찾던 시골 서생이 독립운동가로 고단한 삶을 택한 건 오롯이 시대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시골 할머니들 이름 가운데 유독 ‘이찌꼬’와 같은 일본식 이름이 많았던 건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의 발걸음이 잦았던 탓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일제 때가 아니라 해방 후에 닥쳐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몸 담으셨던 조직이 좌익에 속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우익 청년들에 의해 끌려가셨고 ‘하얀 할매’는 말로 다하기 힘든 그날의 끔찍했던 충격으로 눈이 점점 어두워지셨다는 것입니다.


 눈물과 콧물을 한 되는 족히 쏟으며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기억이 뇌리에 다시 새겨진 그날 이후 저는 하루아침에 달라져버렸습니다.


 우리 사회에 여전한 아픔과 부끄러운 잔재


 2006년 한 해 동안 많은 분들과 함께 고민하며 이어온 기획 ‘한국사회와 가난’ 연재를 마치며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모두가 힘든 가운데 근근이 진행해온 기획이라 얼렁뚱땅 넘기기도 힘들어 다른 글로 채울까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숱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가족사의 한 부분을 덜어내 우리 사회에 비춰보자는 생각에 좀 무거운 얘기까지 끌어내게 됐습니다.


 기획을 진행하며 아직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운 씻기 힘든 아픔과 부끄러운 잔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굳이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과거 초등학생 때의 저였다면 마주 대하고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 고사하고 의문조차 갖지 못했을 수도 있을 생생한 현실들입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온가족이 도회지로 나오기 전 진흙으로 지었던 담을 허물고 당시 유행하던 시멘트블럭으로 담을 쌓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꼬마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을 테니까요. 신기한 듯 아이들은 물론이고 동네 어른들까지 몰려와 구경하고 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30여 년 전 제 기억에 남아있던 가난했던 시골의 모습을 21세기의 대한민국, 그것도 수도인 서울에서 발견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아니, 그때의 시골 풍경보다도 못한 곳이 수두룩했습니다. 처음엔 웃음이 나다가도 한두 번 보다보니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재개발을 둘러싸고 숱한 아픈 사연과 음모가 얽히고설킨다는 건 이미 ‘고전(?)’에 속하는 얘기고 한 몸 겨우 누일 수 있는 창도 없는 쪽방에서 20년도 훨씬 넘게 혼자 살아온 할아버지,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후 쉰살이 넘도록 친구라곤 모르고 살고 있는 장애인, 자신도 장애인이면서 중증장애를 지닌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조그만 포장마차라도 차리는 게 소원인 여성,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알콜의존증환자가 되어버린 가장, 다른 친구들이 다 입양돼 갈 때 장애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했던 소녀….


 그런 자리에도 끼지 못하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죽음보다 더 큰 절망 속에 지내는 이들을 만날 땐 우리 사회가 지닌 모순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어야 했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으로 인해 굳이 원하지 않아도 사회 고위층 인사나 저명인사들과도 만나야 하고 그들의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지닌 모순은 더욱 극명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두 꺼풀 덮여져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는 깊은 시선을 갖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그러한 문제를 찾아내고 들추어내는 것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돌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냉랭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그런 현실이 일반적인 것이 되고 점차 그것이 모든 이들의 삶이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더 이상 학교에서 가르치는 윤리의 본질과 사회를 살아가면서의 도덕의 본질이 다른 게 이상하지 않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난했지만, 그래서 더욱 서로 부대끼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다운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세상은 오랜 ‘과거’의 기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제가 지녔던 할머니의 추억은 우리 아이들의 것이 아닌 동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


 저는 우리 사회의 가난 문제를 들춰보며 조그만 희망이나마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늘 진실은 가까이 있다고 하는 말이 맞나 봅니다. 그것은 자신이 희망이 되지 않고, 그런 희망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조그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연대해 나갈 때 희망은 자라나게 된다는 소중한 진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번 기획의 소중한 결실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좀 늦었지만 새해 인사드립니다. 새해엔 좀 더 자주 만나 희망을 키우고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지난 1년 동안 진행했던 기획 ‘한국사회와 가난’을 마칩니다. 고생해주신 서상덕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새로운 기획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관련기사
ⅰ) 가난, 그 끝자리의 삶
ⅰ) 구룡마을을 통해 본 한국사회의 가난 (상)
ⅰ) 강남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 (하)
ⅰ) 가난한 이들의 의료문제 - 도시의 그림자 (상)
ⅰ) 가난한 이들의 의료문제- 도시의 그림자 (하)
ⅰ) 교육(상) - 가난한 이들에게도 파랑새는 있나?
ⅰ) 교육(하) - 빈곤과 교육, 그리고 불평등
ⅰ) 자활을 향한 몸짓들 -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 그럼 우리가 알아서!

전체 2,172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349
[89호] 2007년 겨울 교사인권강좌 - 좋은 선물, 실천으로 돌려드릴게요 (강유미/ 수색초등학교 교사)
hrights | 2017.08.30 | | 조회 194
hrights 2017.08.30 194
348
[89호] 한국사회와 가난 ⑨ 한국사회와 가난’ 연재를 마치며
hrights | 2017.08.30 | | 조회 251
hrights 2017.08.30 251
347
[89호] 故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시
hrights | 2017.08.30 | | 조회 224
hrights 2017.08.30 224
346
[89호] 인권현장 이런 저런 이야기 - 박종철, 그리고 20년
hrights | 2017.08.30 | | 조회 200
hrights 2017.08.30 200
345
[89호] ‘세팅’된 사회에서 꿈은 사라진다
hrights | 2017.08.30 | | 조회 185
hrights 2017.08.30 185
344
[88호] 인권연대에 힘을 보태주십시오
hrights | 2017.08.30 | | 조회 167
hrights 2017.08.30 167
343
[88호] 인권그림판
hrights | 2017.08.30 | | 조회 183
hrights 2017.08.30 183
342
[88호]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11월)
hrights | 2017.08.30 | | 조회 234
hrights 2017.08.30 234
341
[88호] 인권연대 송년모임에 초대합니다
hrights | 2017.08.30 | | 조회 207
hrights 2017.08.30 207
340
[88호] 겨울 교사인권강좌 - 청소년 인권’에 함께 해요
hrights | 2017.08.30 | | 조회 198
hrights 2017.08.30 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