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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켄터키 블루그래스 대신 아스팔트를 - 전종휘/ 한겨레21 기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9-01 11:41
조회
240

전종휘/ 한겨레21 기자


 3년이 조금 더 된 일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한 박사와 저녁 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다. 알코올이 피와 뒤섞여 혈관을 한참 헤매고 다닐 무렵 서울광장이 대화의 도마 위에 올랐다. 잔디를 깐 지 몇 달 안 된 시점이었는데, 서울시가 보수단체에는 사용허가를 마구 내어주면서 진보단체가 사용 신청을 하면 허가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술 한 잔 먹은 김에 필자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세상에 광장에다 잔디를 깔아놓곤 잔디 보호한다고 못 들어가게 하고 단체도 성향 봐가며 사용을 허가하고말고 이런 게 어딨어요. 도대체 서울시는 광장이라는 공간이 무얼 위한 것인지, 어떠해야 하는지 알기라도 하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내가 이명박 시장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잔디를 다 걷어낸 뒤 이렇게 선포하는 거에요. ‘세상에 입 달린 자, 할 말 많은 자, 모두 서울광장으로 오라. 어떤 하고 싶은 얘기든 다 하라. 그게 바로 광장이다. 서울광장은 모든 이들에게 열린 공간이다. 나 이명박이 시장직을 걸고 보장하노라’ 이렇게요. 이러면 이 시장은 열린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얻고 인기도 확 올라갈텐데…”


 그리고 나서 거듭 이 시장 비판을 계속 했더니 그 박사 연구원이 “그래도 우리 시장님 욕하는 게 듣기 좋지 않다”고 거듭 자제 요청을 하는 바람에 ‘혀의 칼질’을 멈췄던 적이 있다.


 그 뒤 집회시위 취재를 할 때나 올해 3월까지 1년 동안 서울시청 출입 기자를 하면서도 서울광장은 늘 불편하게 다가왔다. 걸핏하면 잔디보호를 위해 빙 둘러 줄을 쳐 놓고선 못 들어가게 했다. 누구나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는, 광장의 본질적 의미를 배반한 그런 닫힌 공간처럼 느껴졌다.


 서울광장의 애초 출발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고종의 국장 행렬이 지나간 곳이자 4·19혁명, 87년 6월 항쟁, 2002한-일 월드컵 등 한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사건들이 벌어진 공간에다 온전한 광장을 조성하자는 것이었다. 2004년 3월 서울광장 조성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광장은 조그맣고 차도가 대부분 점거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서울시는 2003년 1월 ‘서울시청 앞 광장 조성 설계공모’ 결과 서현 한양대 교수가 낸 ‘빛의 광장’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2003개의 LCD 모니터를 바닥에 깔아 밤이면 첨단의 영상 이미지를 주변의 시청 본관, 덕수궁 등 유적과 어울리게 한다는 야심찬 작품이었다. 물론 찬반의 논란이 뜨겁게 일기도 했다. 여러 가지 현실성의 문제가 제기됐다. 작품을 운용할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운용하는데 대한 기술적, 재정적 문제들이 제기됐다.


 1년 넘게 어물거리던 서울시는 2004년 5월 1일부터 시작하는 ‘하이서울 페스티벌’을 앞두고 잔디광장을 급조하기에 이르렀다. 설계공모를 거쳐 당선작까지 선정해놓고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냥 잔디를 깔기로 했다. 2002년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 깔았던 ‘켄터키 블루그래스’가 1년 사시사철 푸르고 교체하기도 쉽다는 설명도 따랐다. 이때부터 이 광장의 주인은 켄터키 블루그래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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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번째 촛불집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지난달 29일 저녁 6시께 경찰이 서울시청 앞 광장을 경찰버스로 둘러싸 시민들의 광장 출입을 막고 있다.


 (위쪽 사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두 번째 시국미사가 진행된 지난 7월 1일 오후 경찰 버스와 병력이 모두 철수해 광장이 텅 비어 있다. 서울시는 잔디 교체 이유로 다음주부터 시민들의 출입을 금지할 방침이다.    /   사진 출처 - 한겨레


 잔디광장이 갖는 미덕도 적지 않다. 광장 전체 1만3207㎡ 면적 가운데 절반가량인 6447㎡을 뒤덮은 녹색의 자연은 보는 것만으로도 회색빛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눈의 피로를 덜어주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 무더운 여름에는 아스팔트 위를 걷다 그 잔디광장으로 들어가면 체감온도가 확실히 낮아지는 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1년 중 100일 이상은 잔디 보호 등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고 잔디 교체를 위해 연간 수억 원의 시 예산을 쏟아 붇고 있으며, 1㎡당 10원의 사용료를 내고 시에서 사용허가를 받아야 하는 광장은 더 이상 광장이 아니다. 헌법적 권리이고 ‘허가제로 운영하지 아니한다’고 헌법이 못 박은 집회시위를 경찰이 사실상 제멋대로 허가제로 운영하는 것만도 충분히 짜증스런 일이다. 게다가 역사적 의미가 큰 서울광장을 쓰기 위해 시에서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니!


 광장으로 기능하지 못하게끔 한 건 이명박 전 시장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비롯한 대미굴욕 협상과 신자유주의를 향한 조건 없는 투항 때문에 거대한 저항에 맞부닥친 상황이다. 그 저항의 공간인 촛불의 집결지, 서울광장을 서울시가 다시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겨울이면, 루체비스타니 스케이트장이니 잔디를 괴롭히는 일을 실컷 저질러놓고 초봄이 되면 대규모 잔디 식재를 하는 서울시의 이율배반이다. 잔디광장을 시청 공무원의 개인 정원쯤으로 여기는 행태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마찬가지다. 1천만 서울시민의 식수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대운하가 한창 논란일 때 “대운하를 하면 취수원 이전 등의 문제가 발생해 곤란하다”거나 “대운하와 서울시민 식수와는 아무런 상관없다”거나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오 시장이다. 명백한 직무유기였다. 총선 때 한나라당의 수많은 후보들이 너도나도 뉴타운을 거들먹거리며 땅값은 땅값대로 올리고 서민들의 사행 심리를 조장하면서 당 될 때 침묵으로 선거를 도운 이도 오 시장이다. 어려운 말로 ‘부작위에 의한 지자체장의 적극적 선거 개입’이다. 이번에도 행정 관료들의 ‘촛불 끄기’에 다시 침묵으로 답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하나의 문맥으로 엮여 서울시민들에게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줄 것인지 오 시장은 정녕 모르는 걸까?


 세금내고 사는 서울시민으로서 켄터키 블루그래스 모시고 살기가 너무나 피곤하다. 땡볕에 조금 더 땀을 흘릴지언정, 눈이 조금 더 피로할지언정, 아스팔트는 시민들에게 스스로를 모시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조금 더 고생하겠다. 켄터키 블루그래스는 시청 공무원 집에다 옮겨 심고 아스팔트를 깔아 달라. 시민 노릇하기도 고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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