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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화의 이해 2 - 지상중계] 10강 '팔레스타인 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 - 충돌의 역사를 넘어 평화로 -'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14:42
조회
876
유왕종/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팔레스타인 문제는 유대인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성서의 2천 년 전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서기 135년경 유대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아있던 소수의 유대민족과 절대다수의 아랍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아왔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가진 두 민족의 갈등은 영국과 미국 등 열강의 비호 아래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의 수립을 실현했던 시오니즘의 등장과 이에 대항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팔레스타인 민족의 저항으로 심화되었다.
UN 분할안과 중동전쟁
고대로부터 20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은 명확한 영토로 규정되기보다는 ‘필리스타인들의 땅’이라는 지역의 명칭으로 불렸다. 그러던 팔레스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멸망한 직후 영국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2000년 만에 처음으로 정치적 경계선을 갖게 된다.
당시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놓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구삼언’을 하게 된다. 프랑스와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 지배하겠다는 ‘사이크스-피코협정’을, 아랍과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도록 해주겠다는 ‘후세인-맥마흔선언’을, 시오니스트들과는 유대국가 건설을 보장하겠다는 ‘밸푸어선언’을 하게 된다. 영국의 이런 일구삼언으로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서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되고 문제는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에도 마무리 되지 않는다. 1947년 11월 UN은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도록 명령한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87.5%를 소유하고 있던 아랍인들은 당연히 이 분할안을 거부한 반면, 6.6%만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여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시오니스트 지도자인 데이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 직후 중동의 아랍 국가들은 이 분할선언을 거부하고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 아랍연합군은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하지만 이 1차 중동전쟁에서 오히려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되고 영국의 통치시절과 비슷한 팔레스타인 영토를 확보한 후 국제연합에 가입해 세계 50여 개국으로부터 공인받는다.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은 모두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전쟁의 결과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시키고 이스라엘의 지위를 보다 확고하게 만든다. 특히 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가자지구, 시나이반도, 요르단 강 서안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결국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획득한 시나이반도, 요르단강 서안 등을 둘러싼 팔레스타인 주변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오히려 이집트와 유르단으로부터 현재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점유권을 인정받게 된다.
사진출처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협상과 협상, 그리고 로드맵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인 1차 인티파다의 결과로 1993년 노르웨이 외무장관 요한 홀스트의 중재 하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만나 원칙의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이라 불리는 오슬로 협정을 맺게 된다. 이 협정의 결과로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주재 하에 적대관계를 종식시키자는 악수를 나눴다. 이스라엘은 이 협정에서 헤브론시를 제외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의 철군과 이 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를 허용한다. 또 ‘상호인정'의 원칙에 따라 이스라엘은 PLO를 합법적인 팔레스타인 정부, PLO는 이스라엘의 존재 근거를 인정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스스로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
2단계 자치 협정인 오슬로 협정 Ⅱ에서는 첫째, 요르단 강 서안 7개 도시, 즉 베들레햄, 제닌, 나블루스, 콸킬라, 라말라야, 툴카름, 헤브론 일부와 450여개의 마을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군은 이 지역에서 6개월 내에 완전 철수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보호 하에 유대인 정착촌은 그대로 남는다. 둘째, 팔레스타인은 1995년 3-4월경에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의회(82명)를 구성하고 의장을 선출하여 자치정부를 조직한다는 원칙에 합의해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세워져서 독립 국가 수립을 향한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아랍 측의 강경세력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정착촌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요르단강 서안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넘어가는 불안감을 표출, 반대 투쟁을 결의하고 결국 라빈 총리가 암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사이에 와이리버 협정, 캠프데이비드 협정이 차례로 진행되며 평화를 위한 조심스런 발걸음들이 진행되지만 2000년 9월 샤론총리의 동예루살렘 알-아크사 성지를 방문하면서 발생한 제2차 인티파다로 인해 평화협정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됐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당사자 간 협정과는 별개로 2002년 9월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 UN이 모여 중동평화 로드맵을 구상하게 된다. 로드맵에는 단계, 2003년 5월까지 테러와 폭력 종식.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 동결. 2단계, 2003년 12월까지 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3단계, 2005년까지 국경, 팔레스타인 난민, 유대인 정착촌 문제를 포함한 항구적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위 협정 체결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실현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평화, 열매 맺기에는 아직 멀어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행조건으로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 골란고원 등 점령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향적 입장변화가 있어야 한다. 아울러 주변국을 떠돌고 있는 수백만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국경선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대한 문제도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과는 별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각자 해결해야할 문제를 안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에서부터 네 차례에 걸친 전쟁, 그리고 평화 협상을 거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 특유의 단결력과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들의 침공을 매번 영토 확장 기회로 활용하였다. 반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재정적 경제적으로 유대인들과 비교가 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정파 간의 입장차가 명확하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을 상대로 결단력을 가진 평화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정부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1994년 지금은 고인이 된 야세르 아라파트의 주도 아래 PLO를 모체로 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인하는 하마스와 같은 무장저항단체에 대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민중들로부터의 지지도 경쟁을 해야 하는 취약한 입장에 있다. 또한 이스라엘 내부에도 팔레스타인에 비해 비교적 통제는 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어떤 타협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이스라엘의 영토화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강경파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 내부의 강경세력들이 취하고 있는 대화거부와 자살폭탄공격이라는 극단적인 투쟁의 방식이 아닌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동참하게 해야 한다. 즉 서로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시각을 벗고,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때 비로소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결을 위한 한 걸음을 디딜 수 있다.
정리 - 허창영(인권연대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