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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화의 이해 2 - 지상중계] 2강 '이슬람 역사의 번영과 좌절 - 칼과 꾸란의 방정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14:28
조회
980
황병하/ 조선대 아랍어과 연구교수
57개국 14억의 인구가 속해 있는 이슬람은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다문화, 다인종, 다양성을 포용하는 종교•문화적인 개념이다. 이렇게 아랍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인도, 파키스탄, 중동,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적 요소 등 다양한 문화를 한꺼번에 녹여서 이루어진 이슬람은 공존, 융화, 평화의 종교이다. 또한, ‘이슬람’이라는 단어 자체가 신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슬람역사 이전의 시기: 자힐리야
이슬람 역사 이전의 시기는 ‘자힐리야’, 즉 ‘무지의 시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슬람이 곧 진리, 참이기 때문에 이슬람 이전의 상태를 무지한 상태라 보는 것이다. 이슬람이 등장하기 이전에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교리로 인해 로마세력과 갈등을 빚으며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로부터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이 등장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사상은 이슬람이 신에 대한 사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나타남에 따라 무질서하고 혼란의 상태에 있던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하였고, 그 후 메디나에서 공동체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문제들이 논쟁되었다.
이슬람의 역사의 번영: 칼리파 시대에서부터 압바스 제국까지
이슬람 사회는 부족들이 모여 정치하는 대의제이다.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 두 파로 나뉘는데 수니파가 약 85%에 이르러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무함마드가 죽으면서 후계자를 따로 지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가 제 1대 칼리파에 추앙되었다. 그 후, 제 2대 칼리파 오마르는 주로 이슬람의 영토확장에 힘썼고 제 3대 칼리파 오스만 때에 이르러서는 꾸란이 집대성 되었다.
제 4대 칼리파 알리를 마지막으로 정통 칼리파 시대는 막을 내리고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중심지로 한 우마이야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마이야 시대에는 아랍인을 중심으로 771년 스페인 땅으로 전격 진출하여 스페인을 점령하였고 프랑스 남부까지 쳐들어가는 등 유럽을 이슬람화 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을 만큼 이슬람의 전성시대였다. 이 때 지어진 스페인 그라나다 지방의 알함브라 궁전은 약 8세기 동안 이어진 이슬람에 의한 스페인 지배의 역사(711-1492)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패배한 이후, 1492년에는 결국 스페인 제국에서도 후퇴하였다.
우마이야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압바스 제국이 세워졌다. 압바스 제국은 활발한 무역로 개척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도입하였고, 그 결과 고도로 발달된 문화인 사라센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다. 우리가 ‘아랍’ 하면 쉽게 떠올리는 아라비안 나이트도 이 때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토 정벌에 나선 칭기스칸의 후예들에 의해 압바스 제국도 결국 몰락하였고, 한때 찬란한 번영을 누리던 이슬람 제국은 압바스 제국을 끝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슬람의 쓰라린 역사
1096년에 발발한 십자군 전쟁에서 결과적으로는 기독교가 패배하였으나, 1099년에 이슬람의 성지 예루살렘이 십자군에게 점령당했다. 그 후, ‘종교를 올바르게 행하는 자’ 라는 뜻의 살라딘(살라훗딘)이 세운 아유브 왕조가 이슬람을 지배하였고 마침내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초반에는 이슬람의 정치적 지도자인 칼리파를 선거를 통해서 선출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세습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칼리파의 정치적 세력이 확대되고 나중에는 군사력까지 장악하게 된다. 그리하여 생긴 왕조가 마므루크 왕조(1250-1516)이다. 마므루크 왕조, 이란의 사파비 왕조를 거쳐 인도의 무굴제국이 이슬람을 지배하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도의 타지마할이 바로 이 무굴제국 시대의 유적이다. 1516년, 터키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제국은 동유럽에 이슬람을 전파하는데 있어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나 유럽 전체에까지 이슬람을 확장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후, 1258년 몽골에 의한 바그다드 점령을 시작으로 1830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1917년 영국의 바그다드와 예루살렘 점령,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아랍이슬람세계의 쓰라린 역사가 계속되었다.
파키스탄 카라치의 이슬람학교에서 16일(현지시간) 학생들이
이슬람 경전 '꾸란'을 공부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로이터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구 기독교 사회에 이슬람에 대한 경각심, 경이감을 불어 넣어주었고, 그 때 각인되었던 시각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서구에서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인들이 단시간에 이룬 정복사업의 강제성과 호전성을 설명하는데 실제로 이것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오해에 불과하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은 십자군 전쟁에서 서구 기독교의 패배의식과 갈수록 빠르게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여진다. 이슬람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피정복민들에게 ‘종교에의 강제 또는 강요는 없다.’ 라는 꾸란에서의 가르침처럼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점령지의 피정복민들에게 대해 무력으로 개종시키지 않았으며 일종의 계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였다. 단지, 그 대신 이슬람이 보호하고 있다는 명목아래 ‘딤미’라 불리는 인두세만을 부과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납마저도 액수의 부담이 이전의 비잔틴 제국이나 페르시아 시대에 비하면 줄어든 것이어서 당시 기독교와 유대교도들은 상당한 종교의 자유를 향유하였다. 이렇게 주변 지역과의 화해와 공존을 바탕으로 한 유대감을 통해 이슬람은 점차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기에 그려진 칼은 아랍이슬람 국가의 호전성과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교리와 부합하는 정의와 진리를 의미한다. 이처럼 서구에서 말하는 이슬람의 세계와 실제 이슬람의 세계와는 큰 괴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우리의 능동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리 - 정유진(인권연대 인턴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