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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비정규직(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36
조회
158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 연구본부 연구위원



한 달쯤 전부터 여의도 직장까지 40분을 걸어서 출근한다. 한강고수부지 억새밭을 지나면 곧바로 KBS까지 이어지는 낙엽길이고 그 중간에 작은 찻집이 있어 잠시 다리쉼을 한다. 진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버릇처럼 책을 꺼내든다. 시집, 소설책, 인문사회과학 서적. 그날 그날 읽으려고 들고 오는 책이 바뀐다.

몇 주 전 갑작스런 추위에 집을 나서기 전, 서랍을 뒤졌다. 혹시나 하며 장갑을 찾았는데 역시나 없다. 세 켤레든 네 켤레든 장갑을 모두 잃어버려야 겨울이 끝나고, 장갑을 사야지 하면 또 다시 겨울이다. 그래서 이맘때면 장갑을 잃어버리는 털털함을 책망하기 마련이다.

마침 KBS 앞을 지나는데 피켓을 든 사람들이 예닐곱 명 서 있다. 피켓 밑에는 ‘KBS 계약직 지부’라 적혀있고 부당한 해고와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문득 피켓을 든 손을 보니 장갑을 끼지 않았다. 해고가 되어 싸우다 보니 겨울일 터 언제 장갑을 준비할 정신이 있으랴마는 찻집에 들어설 때까지 그 손이 뒤꽁무니를 쫓아온다. 공원 양쪽 은행나무 가로수에 그들의 시린 손이 단풍으로 걸린다.

지난 목요일인가. 집을 나서는데 가랑비가 온다. 커다란 우산을 쓴 채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g in the Rain)를 흥얼거리며 오는데 KBS 앞이 소란스럽다. 무슨 일인가 멈춰 서서 보니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해고된 사람들이 정문 출입을 시도하고 있다. “비정규직도 사람이다, 일터로 가고 싶다.” 막히면 서서 구호를 외치고 그래도 막히면 또 구호를 외친다. “공영방송 KBS가 부당해고 웬 말이냐!” 비에 젖은 그들의 등만 바라보다 찻집에 들어갔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데, 또 얼마나 비에 젖으려나. 찻집 통유리 너머로 뿌리는 비를 1시간 넘게 바라만 보다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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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언론노동조합 KBS계약직지부가 지난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그동안 사측과
벌여온 비정규직 문제해결과 고용안전을 위한 교섭 진행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마 그 때문일 게다. 지난 금요일 토론회에서 도대체 비정규직에게 “연대하다”가 무슨 의미이냐고 묻게 된 것이. 사회에 ‘자리’가 있는 자, 예를 들어 정규직은 자리를 지키거나 나누거나 더 많이 만들기 위해 연대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연대해왔다. 때문에 연대하다는 사실상 무엇 무엇 ‘인 자’의 규범이며 모든 도덕과 문화와 관습, 법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한 사회가 무엇 무엇 ‘인 자’와 ‘아닌 자’ 즉 정규직 인자와 아닌 자, 정상인 인 자와 아닌 자, 인문계 고고를 나온 자와 아닌 자, 이성애 인 자와 아닌 자로 나뉘면, 그래서 사회에 자리 자체가 없는 긴 차별의 목록이 만들어지면 무엇 무엇 인자의 규범은 그렇지 않은 자를 배제하는 규범으로 바뀐다. 정규직이 아닌 자에게 연대하다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그 말을 쓰게 될 경우 연대가 배제로 바뀌는 것은 불가피하다.

노동조합 전략에 목소리내기(voice)와 회피(exit) 전략이 있다. 직장에 자리가 있는 정규직은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다른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면 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지 않던가. 그러나 비정규직은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정규직 조직률은 17.5%이지만 비정규직 조직률은 2.5%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매년 떨어지는 추세인데 어떻게 목소리를 내겠는가. 그렇다고 회피(exit)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에게 회피란 사회적 강제이며 일종의 추방이지 결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 전략 하면 두 가지를 떠올린다. 그것이 무엇 무엇 인자에게는 전략과 규범일지 모르지만 아닌 자에게는 그 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배제이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비정규직, 주변인들, 사회적 약자에게 연대하다는 어떤 의미인가. 그들이 연대와 저항의 주체일 수 있는가. 이 사회에 자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이와 비슷한 문제가 최근 논란이 되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에 있다. 대기업에서는 기존의 정규직 노동조합 외에 소규모의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있을 수 있다. 이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범위가 겹치는 복수노조가 아니기 때문에 현행법으로도 노동조합의 설립을 인정받은 다수노조이다.

그런데 정부가 주장하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는 다수노조와 복수노조를 구분하지 않고 한 사업 혹은 사업장에 하나의 교섭단위를 강제하기 때문에 현장에 다수의 조합이 있으면 조합원 수가 최소 1명이상 많은 노동조합만이 단체교섭권을 가지고 사무실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정규직 노동조합에 비해 조합원 수가 적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교섭권을 갖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한국의 노동조합은 해당 조합의 조합원 이익만을 대표할 뿐이며 다른 노동조합이나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모든 종업원의 이익을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다. 결국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특정 이해집단에게만 단체교섭권을 부여하여 다른 노동조합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삼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또한 정부는 이 조치를 시행령에 의해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노동삼권의 제약을 시행령으로 강제하겠다니. 해당 기사를 읽으며 눈을 의심하지만 다시 읽어도 그렇게 씌어있다.

오늘은 영하의 추위란다. KBS 앞을 지나다보니 계약직 지부 사람들이 장갑을 낀 손으로 피켓을 들고 있다. 모금함이라도 있으면 싶은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멈칫 거리다 다시 걷는 길에 노란 은행나무 잎이 휘날린다. 비정규직에게 또 다시 겨울이 왔다. 그들이 정규직처럼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대답할 자신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추위 탓인지 장갑 낀 손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