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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도 한류?(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7:07
조회
141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얼마 전 일본 대학으로부터 한국의 비정규직에 대한 발표를 부탁받았다. 이런 요청이 최근 들어 꽤 잦아졌다. 비정규직 비율이 35%인 일본의 현실이 한국에 대한 관심을 키운 탓이다. 바닥을 향해 질주하는 두 대의 자동차가 서로를 곁눈질 하는 형국인데, 어쨌든 이것도 일종의 ‘한류’인가하여 조금 씁쓸하다.

물론 두 나라 비정규직 문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2008년 경제위기(이것을 일본에서는 리먼 쇼크라고 부른다) 직후부터 일본 정부의 정책은 ‘규제완화’에서 ‘규제강화’로 선회하였고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20년’을 만회하기 위한 일본의 규제완화가 워낙 급격했던 탓에 생채기가 크다.

또 하나의 차이를 꼽으라면 1919년 2월 9일 창립한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일 것이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산하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는 기업가 오오하라의 이름을 딴 연구소로 이미 100년 가까이 되었다. 홈페이지 http://oohara.mt.tama.hosei.ac.jp에 들어가면 연구소에 대한 소사를 읽어볼 수 있다. 앞부분만을 요약하면 이렇다.

“오오하라는 쿠라시키 방적 등의 사업을 하면서 오오하라 미술관, 쿠라시키 노동 과학 연구소 등을 설립한 이색의 실업가이다. 그는 빈곤아동을 대상으로 한 야간학교를 경영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헌신하였지만 자선사업의 결과에 실망하였다. 그리고 사회 문제의 해결에는 근본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면서 연구소를 만들었다. 오오하라 사회 문제 연구소의 초대 소장은 당시 도쿄 제국대학(현 도교대학) 교수 다카노 이와사부로였다. 그 아래 일본의 뛰어난 연구자가 모여, 노동·사회 문제, 마르크스 경제학 등 미개척의 분야에서 수많은 선구적 연구업적을 쌓았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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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산하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는 기업가 오오하라의 이름을 딴 연구소이다
사진 출처 -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 홈페이지


물론 그 이후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지만 오오하라의 이름을 딴 일본의 가장 오래된 사회과학연구소이자 노동관련 연구소는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활발한 성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업가가 노동관련 연구소를 만들다니. 한국에서 상상할 수 있는 일일까? 일본의 요청에 따라 발표문을 쓰면서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의 저항과 이에 대한 기업이나 정부의 대응이 매년, 반복적으로 유사한 패턴을 띠고 계속된다. 그러다 보니 필자가 쓰는 글도 작년, 올해가 유사하다.

“기륭전자 파견노동자들은 6년째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회사 앞에서 시위 중이다. 현행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 대한 파견근로를 금지하지만 기륭전자는 파견노동자로 생산라인을 운영하다가 지난 2005년 7월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지만 바뀐 것이 없다.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그룹 본사 앞에는 기아차 ‘모닝’을 생산하는 동희오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해고자 복직, 노조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기아차 모닝은 기아차가 생산하지 않는다. 기아차내의 생산라인을 전혀 다른 업체인 동희오토로 이전하고 여기서도 정규직이 아닌 12개 사내하청 업체 노동자에 의해 기아차가 만들어진다. 사내하청 활용 방식의 가장 최근 버전(version)이다.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는 특수고용직인 학습지 교사들이 1천일 넘게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본사가 학습지 교사의 임금이나 마찬가지인 회원관리 수수료를 2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삭감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10월 13일 특수고용직인 레미콘 노동자 한 사람이 분신자살했다. 건설현장에서 비일비재한 임금체불이 원인이다.”

내년도 비슷할까, 날이 추워지면 시린 손에 피켓을 든 비정규직 노동자들 소식을 알려야 하고 날이 더워져도 어딘가에서 발생한 고공농성 소식을 접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기업가가 노동연구소를 만든 일본도 비정규직 문제는 별반 다르지는 않다. 다만 대응방식에서는 차이가 있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더 이상의 규제 완화는 멈춰!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필자는 일본으로부터의 초대가 반갑지 않다.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이 각각 자국의 비정규직과 근로빈곤의 현실을 소개하고 나아진 것이 없다, 는 결론을 내리는 자리가 반가울 수는 없다. 그래도 내년에는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꿈이라도 꾸어야하지 않겠는가, 또다시 겨울이 다가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