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말이 막힌 순간(은수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7:29
조회
165

은수미/ 사회학



저는 말로 사는 사람이고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말로 소통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정의”, “민주”, “자유”, “인권”, “존엄”, “사랑”, “평화”... 제게 소중한 단어가 입안에만 맴돌며 문득 말을 막는 날이 있습니다. 여의도에 꽃비가 내리던 며칠 전의 아침도 그러했습니다. 혼자 외롭게 목숨을 끊었을 젊은이, 작업장에서 얻은 백혈병으로 아파하고 절규하며 눈을 감았을 노동자... 그 숱한 이름이 벚꽃놀이가 끝난 윤중로, 무수한 발길이 사그라진 길 위로 꽃비와 함께 흩날렸습니다.

그래서 이번 칼럼은 제가 좋아하는 시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 시들은 2년 전 이맘때 쯤 제가 그림과 함께 프린트하여 연구실에 붙여두었던 것들입니다. 첫 번째 시는 백무산의 [인간의 시간] 중 일부입니다.
잠든 씨 알갱이들과 언 땅 뿌리들을
불러내는 것은 봄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밀어올리는 것
생명의 풀무질을 충만하게 가두고
안으로 눈뜬 초미의 주의력을
늦추지 않는 것
시간과 봄은 생명력의 배경일 뿐
역사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단절의 꿈이 역사를 밀어간다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강릉 교도소에 있을 때였으며 간혹 다시 읽어보는 시 중의 하나입니다. 두 번째는 나희덕의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입니다.
덩굴이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벌들이 꽃에게로 접근하고 있다
아무도 이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억하라,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도, 우리조차 우리가 살아있음을 알지 못했으나
덩굴이 나무를 정복하듯이
꽃이 열매를 맺듯이
마침내 이루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의 숨은 눈을 통하여
마침내 붉은 열매가
우리를 넘어서 날아오를 때까지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20110420web02.jpg
사진 출처 - 솔숲닷컴


저는 나희덕의 작품을 즐겨 읽습니다. 소장과 대장, 약 50센티 정도를 자르고 교도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투병하고 있을 때 나희덕의 [빨래는 얼면서 마루고 있다]를 읽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작품을 다 읽은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시 역시 나희덕의 [고통에게 2]입니다.
절망의 꽃잎 돋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겨드랑이에서
무릎에서

어디서 눈이 하나씩 열리는가
돋아나는 잎들
숨가쁘게 완성되는 꽃
그러나 완성되는
절망이란 없다

그만 지고 싶다는 생각
늙고 싶다는 생각
삶이 내 손을 그만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어제 2009년 9월 해고된 동료가 대법원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복직판결을 받았다는데도 아직 축하 전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기 때문에 기뻐하기도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늘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말을 해야겠습니다. 동료와 함께 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