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법치주의의 ‘治’(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6-27 11:17
조회
425

이 윤 / 경찰관


 

법치주의(法治主義)라는 말은 한자 때문에 그 뜻을 오해하게 되는 대표적 사례다.


 

법치주의란 ‘국가가 자의적으로 국민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법이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통제하게 한다(rule of law)’는 원리다. 법치주의 원리에 의하면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때는 법률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히틀러의 나치처럼 법률만으로 무조건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해석하면(형식적 법치주의) 안 된다. 그 법률도 기본권 보장과 실질적 평등 추구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적정하고 합법적이며 정의로운 법률이어야(실질적 법치주의) 한다.


 


출처 - jagran josh


 

그러나 법치주의라는 한자를 직역하면 ‘법을 도구로 하여 다스린다(rule by law)’로 읽히기 쉽다. 그러다 보니 ‘국민은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준법정신 강조의 의미로 법치주의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오해를 줄이기 위해 다스릴 치자를 좀 다른 한자로 바꿔쓰면 좋겠다. 차라리 ‘법의 지배 원리’라고 풀어서 쓰면 의미가 더 정확하게 전달되겠다. 법치주의를 의미하는 독일어는 ‘Rechtsstaat’인데, 독일어 문맹인 내가 보더라도 ‘법+국가’인 듯하고, ‘治’는 들어갈 구석이 없다. 설마 중간에 s가 治는 아니겠지. 도대체 ‘治’를 누가 어디서 가져다가 붙여 놓았는지 모르겠다. 헌법이나 법철학 공부를 따로 하지 않으신 분들은 한자를 직관적으로 해석하여 그 의미를 딱 오해하기 쉽다. 진나라 상앙의 이목지신(移木之信) 고사도 이런 오해에 한몫했을 것이다.


 

상앙은 진나라 효공을 도와 여러 법령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행하기 전에 백성들이 법령을 잘 따르게 할 방법을 고심하였다. 하루는 도성 남문 앞에 크고 무거운 나무를 놓고 옆에 방을 붙여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10금을 주겠다’고 알렸다.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다음 날 50금을 주겠다고 고쳐 쓴 방을 붙였다. 누군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 나무를 북문까지 옮기자 정말 50금을 주었고, 그 후 법령을 공포하자 백성들이 조정을 믿고 잘 따랐다고 한다.


 

나는 법치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이 고사가 먼저 떠오른다. 아마 어릴 적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심리적 오류 중 ‘가용성 휴리스틱’의 영향을 받는 듯하다. 걱정스러운 것은 많은 정치인과 법조인이 나처럼 이 고사를 먼저 떠올리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인터넷상 많은 글이 ‘상앙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책을 써서 진나라가 천하통일 할 수 있는 기틀을 닦은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니 헷갈리는 것도 당연하다. 춘추전국시대의 법치주의는 백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부 권력자가 통치 수단으로 법을 만들어 활용한다는 것이어서 현대 민주국가의 법치주의와는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그런데 아직도 2,400년전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건 매우 시대착오적이다. 국민을 대표하여 법 만들고 행정부 감시하라고 뽑아 놓은 국회의원을 지역 영주나 높은 벼슬아치쯤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러 언론 기사에 나타나는 ‘법치주의’의 용례는 상앙의 법치주의에 가깝다.


 


출처 - 경향신문


 

「경제계가 노조원의 손해배상 책임 정도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 “민법의 기본 원칙을 부정하고 산업현장의 법치주의 근간을 무너트렸다”고 주장」(강원도민일보, 23. 6. 20.)


 

「TV 토론에서 경제학 전공자인 한 논객이 '법치주의'를 말했다. 그러자 판사 출신인 상대방 토론자가 "동의한다. 성숙한 시민사회로 가기 위해 모든 국민들이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화답하는 것을 보고 경악...」(대전일보, 23. 6. 12.)


 

「법무부가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청구서에서 ...(중략)... 이 법이 법치주의의 원칙을 위배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으로서 ...(후략)」(프레시안, 23. 6. 20.)


 

여러 대신들과 설전을 벌이는 상앙(출처 - 네이버블로그 세상사는 이야기)


 

어릴 적 상앙의 고사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지점은 그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였다.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자 상앙에게 형벌을 받고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이 일제히 ‘상앙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상앙은 급히 도망쳐 함곡관에서 여관에 묵으려 했다. 여관 주인은 “상앙의 법에 의하면 증명서 없는 사람을 재워주어도 벌을 받는다“라고 하면서 방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상앙은 “아, 내가 만든 법이 나를 옭아매는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결국 상앙은 진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되어 시체마저 거열형으로 찢어지고, 가족들까지 처형되었다.


 

 

63fd650e15a397420277.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