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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공유지의 비극(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11-22 14:23
조회
288

이윤 / 경찰관

 

경찰 수사관들이 3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원하는 것 중 하나가 ‘고소장 인지대’ 도입이다. 고소 한 건 접수할 때마다 인지대를 받자는 것이다. 고소 사건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한국은 다른 외국에 비해 고소가 참 많다. 요즘도 수사관 1인당 많게는 40건 정도의 고소 사건을 보유하여 수사하고 있다. 그중 70% 정도는 혐의를 인정하기 어려워 불송치한다(재판까지 가지 않고 경찰 수사에서 끝낸다는 의미). 불송치되는 사건은 보통 돈 빌려주고 못 받은 경우나 공사‧물품 대금 등을 받지 못한 경우, 즉 채권자가 채무자로부터 돈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소한 경우가 많다.


출처: 법률방송



수사관은 일단 고소장이 접수되면 나중에 불송치하더라도 최소한 ‘고소인 상대 진술 청취 및 조서 작성 → 증거 자료 정리 → 피고소인 출석요구 → 피고소인 진술 청취 및 조서 작성 → 증거 자료 정리 → 결과보고서 작성 → 결정서 작성 → 통지서 작성’ 등을 해야 한다. 단순한 채권‧채무 관계라고 하더라도 혹시 사기죄가 될 가능성(돈을 빌릴 때 갚을 능력이나 의사가 없었다면 사기)이 있으므로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그중 70%는 불송치한다. 수사관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느라 자원이 낭비된다는 허무한 느낌이 든다.


고소인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 고소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수사관이 피고소인을 불러서 이것저것 묻고 따져주니 그게 부담스러운 피고소인은 돈을 빨리 갚을 가능성이 커진다. 혹시 불송치되더라도 운이 좋으면 민사재판을 위한 자료라도 구할 수 있다. 그러니 채권자가 고소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수사관으로서는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새로운 고소 사건은 계속 접수되어 들어오고, 피고소인은 연락도 잘 안되고 잘 오지도 않고, 고소인은 요구가 많아서 피곤하고 힘들다. 때로 화 많고 자기 말만 한 시간씩 하는 분이 고소인이면 트라우마가 생겨 전화기만 울려도 깜짝깜짝 놀란다. 수사권 조정이 되면 70%에 해당하는 사건들 종결하기가 쉬워질 줄 알았는데, 더 어려워졌다. 수사관들은 점점 지쳐가고, 머리도 아프고, 마음은 상처받고, 승진도 어려우니 다른 부서로 옮기려 한다. 결국 수사 부서에 베테랑 수사관은 적어지고, 경력 3년 미만자가 많아진다. 그래서 국민이 받는 수사 서비스의 질은 점점 낮아진다. 이런 경향은 형사, 여성청소년, 지역경찰에게도 해당한다.


위 과정은 ‘공유지의 비극’과 매우 유사하다. 어떤 마을에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유지가 있어 그곳에서 소를 사육할 수 있었는데, 비용이 들지 않으니 사람들은 점점 많은 소를 공유지에 풀어 놓게 되었고, 그 결과 공유지의 좋은 풀은 줄어들고 대지는 오염되어 결국 소를 키울 수 없는 황무지가 되었다는 것이 공유지의 비극이다. 공유지는 경합성과 배제 불가능성을 특성으로 한다. 경합성은 내가 사용하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양이 줄어드는 것 즉 자원의 한정성이고, 배제 불가능성은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산물, 공공도로 등이 공유지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매거진한경


경찰 수사업무는 경합성과 배제 불가능성이라는 공유지의 특성이 있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황무지처럼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경찰이 인력과 예산을 집중해야 할 사기범은 코인 사기, 보이스피싱, 다단계 등 폰지 사기, 주식 리딩방, 전세 사기, 보험 사기 등 정말 작정하고 다른 사람들 속여 등치고 코 베어가는 사기꾼들이다. 그런데 ‘아는 사이에 급해서 그러니 돈 좀 빌려달라’는 말에 몇백만 원 빌려주었는데 갚지 않는다고 해서 고소한 사건 수사하느라 수사관들은 지치고 황폐해져 간다.


공유지의 비극을 해결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피구적 접근 방식은 공유지 진입 시 과세함으로써 무분별한 공유지 사용을 자제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고소할 때 인지대를 내도록 하는 방식이다. 다만 범죄 피해자에게 인지대까지 내게 할 수는 없으니, 재판에서 피고인이 유죄판결을 받은 고소인에게는 환불해주어야 한다.


다음은 코즈적 접근 방식으로 소유권이 명료하게 정의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기관인 경찰을 나누어 소유하도록 할 수는 없고, 민영화할 수도 없으니, 경찰에 요구되는 기능 중 일부에 대한 민영화를 생각할 수 있다. 탐정제도 도입이 그 예다. 탐정을 공인하여 도난, 분실, 은닉된 자산의 소재 확인, 미아나 실종자 소재 파악, 기업 내 정보 유출 조사 등 굳이 경찰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탐정에게 비용 지불 후 사용하도록 하고, 경찰은 범죄 예방과 수사에 집중한다.


세 번째 방식은 공유자들이 자발적으로 질서를 형성하고 합의하여 규칙이나 제도를 만들고, 이를 자율적으로 준수하고 감독하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지만 경찰 수사에 대해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질서를 형성하고 합의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투자나 계약, 차용 등을 할 때는 신중하게 결정하고 구체적 근거와 보장 장치를 남겨 놓는 태도가 문화처럼 자리 잡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겠다. 그리고 웬만하면 법과 공권력에 기대지 말고 서로 설득하고 합의하여 해결하면 좋겠다.


경찰은 잘 사용하면 국민을 이롭게 할 공공재이자 공유지이다. 그러니 공짜라고 함부로 쓰지 말고, 힘 있다고 혼자 쓰려하지도 말고, 동네 강아지 대하듯 막하지 말고, 모두를 위해서 모두가 함께 관심 가지고 지켜보며 응원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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