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연)약함에 대하여(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8-22 11:48
조회
206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1.


 하영이는 내 수영장 동무이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문을 닫았던 수영장이 제한된 인원만으로 문을 열었을 때, 한 레인에 고작 한두 명이 수영하는 아주 넓고 한적한 수영장에서 만난 친구가 하영이다.


 고등학교 2학년인 하영이는 지적 장애를 가졌다. “안녕!” 하고 인사를 하면 곁은 주지 않으면서도 “엉!” 하고 인사를 한다. 제 쪽에서 먼저 아는 척하는 경우는 없지만, 그렇다고 딴청을 부리면서도 모른 척하지는 않는다. 부족해 보이는 매무새를 바로잡아 주거나, 전세 낸 것 같은 수영장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영을 하면서 조금씩 낯을 익혀 갔다. 평영을 좋아하는지 늘 평영만을 하는 하영이한테 “하영아, 자유영이나 배영도 하면 어떨까?” 하면 “하영이는 평영이 좋아요!” 하며, 대꾸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출처 - 헤드라인제주


 그런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있는 하영이를 봤다. 엄마를 보면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환하게 웃던 하영이가 “근데 엄마, 수영장에서 아줌마가 나 많이 도와줘요!”라고 하였다. 앞뒤 맥락 없이 아이가 하는 말에 하영이 엄마는 경계하듯이 “하영아,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아이한테 되물었다. 아이가 같은 말을 반복하기에 옆에 있던 내가 “그 아줌마가 이 아줌마예요!” 하자, 그제야 하영이 엄마가 옆에 있던 나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출처 - KBS뉴스


 몇 달이 지나고 하영이가 장애인 수영대회 나간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메달을 땄다는 소식도 들렸다. 대회 나간 뒤여서 그런지 여러 날 하영이는 수영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하영이와 마주친 날, 인사만 하고 지나치던 여느 날과는 달리 아이가 내 주변을 왔다 갔다 맴돌았다. “하영아, 왜? 무슨 할 말 있어?” 그러자 아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영이 은메달 2개 땄어요! 동메달도 땄어요!” 하고는, 자랑이기보다는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을 다했다는 듯이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하영이가 요즘 더욱 작은 아이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오랜만에 만난 하영이는 인사도 하지 않고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피식피식 웃으면서 왔다 갔다 하더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오랜만에 만나 쑥스러워 그러는가보다 싶었다. 며칠 뒤에 엄마와 함께 온 하영이를 또 만났다. 하영이는 며칠 전에 본 행동을 그대로 했고, 엄마는 요즘 하영이의 행동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영이는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와도 이야기하기를 힘들어했다. 집중력이 떨어진 아이는 엄마가 무언가를 하게 하려고 계속해서 말을 시키면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하다가도 힘든지 짜증을 낸다고 하였다. 아무런 의미 없이 휴대전화의 화면을 계속해서 넘기거나, 한군데 있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한다고도 하였다.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하였으나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자고 하여 가족들의 걱정이 크다고도 하였다. 지금까지는 아이가 한 시간 거리의 학교를 혼자서 잘 다녔는데 당장 개학을 하면 아이가 제대로 갈 수 있을지….


2.


 그동안 지병 없이 건강하던 엄마의 몸이 한꺼번에 쇠약해지고 있다. 쇠잔해진 몸은 별 충격 없이도 발가락을 부러뜨리고, 오랜 세월을 이겨낸 귀는 쉴새 없이 이명을 실어 나른다. “이 나이 되면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이러는 거야 당연한 거지!” 하는 엄마를 달래고 달래서 병원에 가니 의사는 “어르신, 한 달은 깁스를 하고 계셔야 해요!” 한다. 이 당치도 않게 무더운 여름에 한 달씩이나 말이다. 그 뒤로도 방문을 약속한 병원은 또 어디이던가?!


출처 - 아시아경제


 그런 우리 엄마한테 추억이라는 선물은 저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기억인지, 엄마의 시간은 자꾸만 뒤로 향해 가고 있다. 육남매의 막내인 울 엄마, 이제는 혼자 이승의 삶을 살면서 그 오래 전 시간으로 시간 여행을 가곤 하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좀 전에 들은 이야기는 계속해서 되물으면서도 국민학교 때 배운 동요와 율동은 생생하게 생각난단다. 요즘 그 추억을, 깁스한 채 내게 들려주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닌가 싶은데, 쇠잔해진 울 엄마의 육체에 깃든 애잔한 시절의 추억 여행에 내가 동행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3.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채송화가 화분 가득히 꽃을 피었다. 부추씨도 날아와 화분에 떨어져 싹을 틔워, 봄부터 여름까지 부추를 뜯어 장떡도 부쳐 먹고 부추김치도 담가 먹었다. 지난가을에 씨를 받아 봄에 뿌린 나팔꽃은 지금 층층이 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여간 보기 좋은 게 아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꽁꽁 언 날씨가 풀리는 봄이면 겨우내 실내에 있던 화분들을 밖으로 옮긴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꽃샘추위라도 닥치면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다시 밖으로 옮기는 일이 꽤 부산스럽다. 그렇게 내놓은 화초 가운데 구문초가 있다. 실내에서는 힘없이 처져 보이던 잎새가 밖에 나오니 꽤 튼실해 보이는 중에 누렇게 뜬잎이 있어 솎아 주다, 아뿔싸 새로 나는 가지를 꺾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그냥 두면 제시간 되어서 떨어질 잎을 예쁘고 좋은 것만 보려고 하다가 생가지를 꺾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기장장애인복지관


 잘나고 똑똑하고 힘 있는 것만이 행세하려고 하는 세상에서, 조금은 어리고 조금은 부족하고 약한 그래서 조금은 못날 수도 있는 우리가 함께하는 세상은 꿈이기만 한 것일까?! 비열하고 저열함을 포장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앞세우는 염치없는 세상에서 꿈꾸기에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꿈인 것일까?!